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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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623) : 김필영(2)(附 호명면 출신 이상연, 22일 국세청의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축하합니다/하리면 우곡리 출신 고인환 교수, 문학평론집에 수록...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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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영(ꡒ中央亞 韓國學 傳播에 人生 걸었죠ꡓ) [記事] : 그 사람, 한국학자 김필영 씨(52, 동학교도의 후손, 예천농고 졸업)를 빼고선 중앙아시아의 한국학을 논할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한국학을 전파한 선구자. 이 땅에선 그저 한 사람의 한국학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2004년 9월 한국에서ꡐ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ꡑ(강남대 출판부)를 내기 전에는 그랬다.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녔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새 봄에 그는 한국에 온다. 2005년 3월부터 강남대에 대우교수로 부임해 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을 강의한다. 2006년 3월에는 강남대에 신설되는 카자흐스탄학과 주임교수를 맡을 예정이다. ꡒꡐ한국학ꡑ이란 단어는 한국인이 만든 게 아니고 1956년 파리대학에 한국학이 개설되면서 생겼습니다. 한국학은 의학․공학․자연과학을 제외한, 한국과 한국인과 관련된 모든 학문을 의미하죠. 한국학을 하려면 외국어도 잘 해야 돼요. 세계문화와 우리 문화를 비교하려면 적어도 6개 국어는 해야잖아요?ꡓ 그는 9개 국어에 능통하다. #파리의 포도농군 한국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 준비중인 그를 만났다. 파리 최고 번화가인 오페라가에 위치한 그랑호텔 카페 드 라패에서 만난 김 교수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도 격의가 없었다. ꡒ패(Paix)가ꡐ평화ꡑ를 뜻하잖아요. 그래서 한국 교포들은 프랑스식당인 이곳을ꡐ평화다방ꡑ이라고 부릅니다.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도 이 호텔을 방문했죠.ꡓ 전채요리로 주문한 생굴이 나오자 굴껍데기에 담긴 물이 몸에 좋으니 남김없이 마시라고 권했다. 편했다. 포도주를 주문할 차례. 그의 눈이 빛났다. 와인리스트의 포도주 빈티지를 척척 맞힌다. ꡒ10년 전부터 파리 서남방 300㎞ 부근인 소뮈르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어요. 10ha 규모의 농원이 있고 양조장도 있죠. 적포도주, 샴페인성 포도주, 단맛이 강한 후식용 포도주 등 세 종류를 생산합니다. 제법 잘 팔려요.ꡓ 디종에서 포도주 양조학 학사까지 땄다고 덧붙였다. 학자가 무슨 포도주 사업을 하느냐고 물으니 파리 15구에 중형 호텔을 지어 경영도 했다고 한다.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했더니, ꡒ한국학을 보급하고 한국학자를 육성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ꡓ고 했다. ꡒ한국을 아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한국의 힘은 커집니다. 그 동안 한국학에 2백만 달러(약 20억 원)를 투자했어요. 한국학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ꡓ 카자흐스탄에 1,600가구 규모의 아파트타운을 건설하고 북한에 화장품회사를 세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독야청청한 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자유롭고 거침없다. 그의 박사논문을 지도한 스승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의 말대로라면 그에게는 역마살이 단단히 끼었다. 성인이 된 후 30여년 동안 이곳저곳 누비며 바삐 살았다.
#프랑스 최초 한국학 박사, 경북 예천에서 동학혁명군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고교 재학시 책가방에 영문판ꡐ자본론ꡑ과 사회주의 서적ꡐ맑시즘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ꡑ를 넣고 다니며 읽었다. 장발 단속에 걸렸을 때 머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가방 속 불온 서적이 튀어나와 구류를 살았다. 군사정권 하의 청춘은 너무 깨어 있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않았다. 이 땅이 싫었다. ꡒ그렇다고 반체제 인사는 아닙니다. 진보주의 신봉자일 뿐이죠. 10대 후반, 20대 초반엔 지구상에 정말 멋진 세계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크고 보니 세계는 하나였어요.ꡓ 78년 미국에 머물다 프랑스로 간 그는 파리 7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다 한국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파리대 이옥 교수(1928~2001)의 충고로 한국학에 눈떴고, 80년대 중반 파리 동방어문대학에서 논문ꡐ정지용의 시적 미학ꡑ으로 프랑스 최초의 한국학 박사가 됐다. 56년 파리대학에 한국학과 개설 후 1호 박사의 쾌거를 이루었다. 저서ꡐ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ꡑ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37년부터 91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어로 발표된 고려인들의 문학 작품을 시기․장르별로 정리하고 평가한 역작이다. 분량이 무려 1,060쪽에 달한다. 자료 수집에만 12년이 걸렸다. ꡒ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문학은 한민족 문학사의 중요 부분입니다. 문학적 가치를 따지기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민족의 말과 문화를 지키려 한 고려인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카자흐스탄에는 한국어 신문인 고려일보도 발행되고 70년 전통의 고려극장도 있습니다.ꡓ #강남대 카자흐학과 교수로 왜 평생 한국학인가. 결정적인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 한인들을 연구하던 고려인 연구 분야의 선구자 고송무(1947~1993) 때문이다. 80년대 말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고씨와 김씨는 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창설하는 등 의기투합한 사이. 영원히 같은 길을 가자고 맹세했다. 그러나 고씨는 교통사고로 객사했고 김 교수는 유지를 이어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언어와 문화 재생에 관한 연구를 한국학으로 발전시켰다. 93년 우즈베키스탄 국립 타슈켄트 동방학대학교에 한국학대학, 94년에는 국립 카자흐스탄 대학에 한국학과를 신설했다. 2000년에는 카자흐스탄 최초 수도인 크즐오르다에서 중앙아시아한국학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94년 카자흐스탄대에 한국학과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로 임명된 후 첫 졸업생이 배출된 99년 6월까지 재직했다. 후에는 파리로 돌아와 동방어문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활동하다 2004년 12월 퇴직했다. 한국 강단에 서고 고려인문학 논문도 준비하기 위해서다. ꡒ알마티에서 1,200㎞ 떨어진 크즐오르다에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오지여서 선교사나 가지 학생들이 입학을 원치 않았죠. 94년 학과 개설 후 학과가 폐지될 위기여서 2000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살며 한국학과를 사수했죠.ꡓ 한국학 전파를 위한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카자흐스탄에서 15년을 보낸 셈이다.
남편의 역마살을 좋아하는 아내가 있을까. 프랑스 여성 조엘(53)과 결혼해 두 아들(대학생)을 낳았는데, 결혼 후 카자흐스탄을 떠날 수 없어 두 부부는 6년 동안 떨어져 살았다. ꡒ고 박사가 중앙아시아를 지키기로 했는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어떡합니까. 아내에게 1년 뒤 파리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6년이나 머물고 말았죠. 가족에게 못할 일을 한 셈이죠.ꡓ 2005년에도 살뜰히 가족을 챙길 수 없다. 한․불수교 120주년이고 멕시코 이주 100주년이다. 프랑스, 멕시코, 한국, 중앙아시아, 북한을 누비며 한국학 업무를 본다. 5월엔 멕시코에서, 9월엔 키르기스스탄에선 중앙아시아 한국학회를 개최한다. 포도주 양조학 서적도 출간한다. 시도 써야 한다. 2003년 시ꡐ지고개 전설ꡑ로 재외동포문학상을 탔다. 행동하는 한국학자의 항로는 고단하고도 화려하다.(유인화 매거진X부장 京鄕新聞 2005.1.30 (일) 18:25)
→예천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예천의 자랑(592) : 예천 출신 국립카작대 교수의 논문들,
→예천의 자랑(676) : 9개 국어에 능통한 예천 출신...
김필영(韓國카자흐스탄學會長 選任) [記事] : 경기도 용인시 강남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김필영(52․예천초등 55회, 예천중 19회, 예천농고 41회) 씨가 2005년 3월 25일 설립된 한국카자흐스탄학회 회장에 선임됐다. 한국카자흐스탄학회는 동년 4월 26일 오후 6시 강남대학교 강당에서 카자흐스탄 국립 크즐오르다대학교 민족가무단ꡐ디다르ꡑ초청 공연을 갖는다.(醴泉新聞 2005-04-15 17:42:18)
김필영(學術院 優秀圖書 選定 : 江南大 김필영 敎授) [記事] : 강남대 국제학부 카자흐스탄학과 김필영(52․예천초등 55회, 예천중 19회, 예천농고 41회) 교수의 저서「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강남대학교 출판부 2004)가 대한민국 학술원 2005년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저서는 학술원에서 2천만 원 내외에 해당하는 도서를 구매하여 대학, 공공 도서관 등에 보급하게 된다.「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는 소련 원동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된 1937년부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발간된 한글신문 `레닌기치'(1938~1990)와 `고려일보'(1991)의 문예 페이지에 발표되었던 문학 작품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연극의 희곡 작품을 분석한 것으로 이 분야 최초의 저서이다. 김 교수는 당시 사회적 배경과 문단 상황을 고려하여,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을 형성기, 발전기, 성숙기, 쇠퇴기로 시기 구분한 뒤, 각 시기별로 시와 가사, 소설과 산문, 희곡과 연극 갈래로 나누어 해당 작가와 작품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강남대학교(총장 윤실일)는 학술 활동을 통해 강남대학교의 위상을 교내외에 드높인 공로를 인정하여 김필영 교수에게 2005년 10월 5일 교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로패와 황금 행운의 열쇠를 증정하였다.(醴泉新聞 2005-10-14 10:11:41)
김필영 [記事] : 우즈베키스탄 뉴스 웹문서/ 중앙아시아 한국학 선구자 김필영(金弼榮, 1953- , 醴泉 出身, 醴泉初, 醴泉中, 醴泉農高 卒業, 江南大 敎授)/ 한국학자 김필영(金弼榮)은 웬만해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본거지는 물론 집이 있는 파리이지만 포도주 농장을 운영하는 소뮈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한국학자니까 당연히 한국(그것도 남한과 북한을 아울러서), 그밖에도 가까운 친척들이 살고 있는 미국,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는 멕시코 등등을 연중 수도 없이 돌아다닌다. 그의 스승 조동일 박사의 말처럼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낀 모양이다. 씩씩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당당한 체구, 그리고 이따금 발휘하는 의도된 듯한 장난기와 약간의 과장은 조용히 책 속에 파묻혀 사는 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렇듯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도 그는 2004년 9월 무려 1천60여 쪽에 이르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강남대 출판부)를 냈다. 학문이란 정신성만이 아니라 끈기와 체력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2005년 봄에는 포도주 생산ㆍ경영자답게 양조학에 관한 저서도 출간할 계획이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아파트촌 건설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벌이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한국학을 보급하고 한국 전문가를 키우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합니다. 벌 수 있다면 당연히 벌어야죠." 그는 학자일 뿐 아니라 각지에 한국학자를 키우는 후견인이자 양성자이기도 하다. 당연히 자금이 필요하다. 10여년 전에 시작한 소뮈르(파리에서 서남방 300km 앙제 부근) 농장은 면적이 약 10ha로 적포도주와 샴페인성 포도주, 단맛이 나는 후식용 포도주 등 3종을 생산하는데 사업이 "제법 된다"고 했다. 그 전에는 파리 15구에 중형 호텔을 직접 지어 경영한 적도 있을 만큼 그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은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좀더 포괄적 의미에서 행동가'임을 그의 행적은 보여주고 있다.
◇대학도 포기하고 외국으로 : 경북 예천에서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김필영(51)은 고교 시절에 영어판 `자본론'을 몇 차례나 읽었을 정도로 영어도 잘 했고 의식도 (지나치게?) 깨어 있었다. 진보 서적을 탐독하던 그에게 반체제적 사고방식이 깃든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그런 성향 때문에 대학입시에 합격해 놓고도 결국은 진학을 포기했다. 앞에 나서는 운동권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질로는 반정부적이었다. 당시의 반체제 세력들과 친해진 데에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는 형님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가 1978년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대학과 동방어문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할아버지가 동학혁명군의 일원이었고, 1920년대부터 아버지와 형님들이 외국체험을 했던 집안 내력으로 보아 그가 외국행을 택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파리에서 만난 이옥(李玉. 1928-2001) 교수의 충고가 한국학을 그의 평생의 업으로 만들었다. 파리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한국사 책을 내기도 했던 이옥 교수의 권유에 따라 김필영은 파리 제7대학에서 한국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뒤 동방어문대학에서 '정지용의 시적 미학'이라는 논문으로 프랑스내 최초의 한국학 박사가 됐다. 이후 19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설립했고, 2000년에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중앙아시아한국학회를 설립,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중앙아시아 한국학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한국학자들과 만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1년부터 중앙아시아를 드나들기 시작해 93년 우즈베키스탄 국립 타슈켄트 동방학대학교에 한국학대학을 설립했고, 94년에는 국립 카작(카자흐스탄)대학에 한국학과를 신설했다. 카작대학교 한국학과의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로 임명된 1994년 9월부터 한국학과 첫 졸업생이 배출되던 99년 6월까지 줄곧 카자흐스탄에 있었다. 이후 파리 동방어문대학 한국학과 교수(한국문학)로 발탁돼 파리로 돌아왔지만 2004년 9월에 그만두었다. 다시금 카작대학의 교수가 돼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손꼽아보면 모두 15년이란 세월을 중앙아시아에서 살았거나 오가며 보냈다.
◇크즐오르다 :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저 멀리 원동(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다 쫓겨온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중 카자흐스탄의 첫 수도였던 크즐오르다(이후 카자흐스탄의 수도는 알마티를 거쳐 97년 말부터는 아스타나로 옮겨졌다)는 유달리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크즐오르다는 한 마디로 고려인들의 문화ㆍ교육 중심지였다. 고려인들이 힘을 모아 원동고려사범대학을 옮겨다 문을 열고, 고려극장을 지은 곳이 바로 크즐오르다였다.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 유일의 한글신문이었던 `레닌기치'가 1938년 5월 재창간된 것도 그곳에서였다(이 신문은 당초 1923년 `선봉'이란 이름으로 창간됐고 그 후신격인 `레닌기치'가 1938년에 창간됐다가 1990년 폐간됐으며, 1991년에는 그 후신인 '고려일보'가 탄생해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원동고려사범대는 1938년 9월 러시아어 학교인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으로 개편돼 조선어로 교육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가 소비에트 체체 붕괴 이후인 1991년 한국어과가 생겨났다. 그러나 알마티(알마아타)에서 1천200여km나 떨어진 그곳에 교수로 가려는 사람이 없어 자칫 폐과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나선 것이 또다시 김필영. 경기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99년부터 2001년까지 그곳에서 교수로 일했다. 1999년 카자흐스탄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그의 `현대 한국어문법'(러시아어판)은 지금도 계속해서 구소련권 전체에서 한국어 문법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해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구입, 배포해주는 데 대해 그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고송무와의 만남 : 그토록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에서 뒹굴었다면 고송무(高松茂.1947-1993)를 모를 리 없겠다 싶었다. 고송무는 그 분야의 개척자였다. 중앙아시아에 가면 현지어를 너무 잘해 택시운전사가 요금을 사양할 만큼 중앙아시아와 고려인을 사랑한 천재학자였지만 알마티에서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해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아까운 인물이다. 충남 금산 출신인 그는 서울 중앙고를 졸업한 뒤 국내 대학엘 가지 않고 터키 참전용사와의 인연으로 터키를 거쳐 헝가리에 갔다가(물론 미수교 시절에) 핀란드에 정착했다. 헬싱키대학에서 우랄어를 전공했으며 중앙아시아 한인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인 연구 분야에서는 선배가 없는, 글자 그대로 선구자였다. "고송무 박사요?"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김필영이 그를 만난 것은 1990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럽한국학회에서였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학, 같이 한번 해봅시다. 몸이 가벼운 내가 갈 테니(고송무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김형은 돈을 대!" 그렇게 해서 1992년 알마티에서 구소련지역 최초의 한국학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한국학자 80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학술회의였다. 19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창설한 것도 그와 함께 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기획자 마인드 등 여러모로 죽이 맞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두고두고 같은 길을 가자고 했다. 그런 터에 고송무의 객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떡합니까? 내가 가는 수 밖에요. 파리의 가족에게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한국학과를 설치하고 1년 뒤에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6년이나 있다가 돌아왔어요. 그리곤 또다시 크즐오르다까지 가있다 왔으니...물론 이혼 당할 뻔했지요." 스물 다섯에 만나 서른에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 조엘 여사와 두 아들은 어쩔 도리 없이 가장의 장기 부재를 받아들였다. "고 박사가 그렇게 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는 다른 일을 했을 겁니다. 지금도 매년 한 차례 금산에 있는 그의 묘를 찾습니다. 고 박사의 부친께서도, 의사이신데, 대단한 지식인이시죠. 사람 목숨, 참 터무니없어요." 말이 난 김에 그는 프랑스인 한국학자 몇 사람의 근황도 전했다. 한국민속학자인 알렉상드르 기모즈 박사(화가 방혜자 여사의 부군)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 고 이옥 교수에게서 한국어를 배운 첫 프랑스인 제자로 한국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앙드레 파브르(72) 씨는 고향인 남프랑스 페르피냥에서 암과 투병 중이다. 또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한국학을 하게 된 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한국학연구부장 다니엘 부셰(76. 김준엽 고려대 전 총장의 동서) 씨는 몇 해 전 조동일 교수와 공저로 '한국문학사'를 출판하기도 했다. 부셰 씨는 가랑시에르에 18세기 고옥(古屋)을 사들여 별장으로 개조하면서 한국 나무들을 심어놨다고 했다. 모두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탓에 한국, 한국인과 애환을 함께 했던 이들이다.
◇카자흐스탄을 주목하세요 : 그는 카자흐스탄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2005년초로 예정된 국내 모대학의 카자흐스탄학과 개설을 위해 한국으로 갈 예정이다. "(학과 개설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사실 늦은 감이 있어요. 카자흐스탄에 대해 막연히 중앙아시아 국가, 고려인이 비교적 많이 사는 나라 정도로만 알고들 있지만 그 성장 잠재력, 특히 우리와의 관계를 보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나라입니다." 카자흐스탄은 면적이 272㎢로 한반도의 12배에 이르고 원유 추정 매장량이 966억 배럴로 세계 7위, 아연.스텐 매장량은 세계 1위일 정도로 자원부국이며 최근에는 연평균 10%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고려인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고려인들이 장관급 요직을 여럿 차지하고 있다. 고려일보는 물론 한국말로만 공연하는 70년 전통의 고려극장도 버티고 있다.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거의 전분야에서 진출할 가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안오면 안오는 기업만 손해에요." 그는 국내 대학 학과 개설 말고도 계속 바쁘다. 당장 1월 말에는 파리한인사회연구소장 자격으로 멕시코 국립대학과 함께 `멕시코의 한국사회와 한국학' 세미나를 개최한다. 멕시코 한인이주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열리는 한국학 관련 모임으로 한국과 중남미의 전문가들이 참석한다. 이어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중앙아시아 한국학회도 치러야 한다. 짬짬이 한국의 친구들을 찾아 술도 마셔야 하고.
◇한국학에 투자해야 한국이 강해집니다 : "왜 한국학을 합니까?" "문화비교론을 공부하다보니 한국이 세계문화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겠더군요. 그 위상을 높이려면 내 자신 전문가가 돼야겠고 다른 전문가들도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의 바탕 생각이 된 거죠. 외국어도 잘해야 해요. 한국학한다고 한국 것만 알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문화를 어느 정도 알려면 적어도 6개 국어(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는 해야 해요. 저는 9개 국어를 합니다. 우리 국학자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학문의 내용보다는 외국어 실력 부족 탓입니다. 제 은사이신 조동일 박사님께서 여러 언어를 하시는데, 아마도 국학 분야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니신가 합니다." (조 박사에 대해 그는 "뒤만 따라다녀도 논문이 줄줄 흐른다"는 말로 존경을 표했다. 발상이 신선해서 결코 같은 이야기 두 번 하는 법이 없고 철저한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며 거듭거듭 존경을 표시했다) "의학ㆍ공학ㆍ자연과학을 제외한,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모든 학문이 한국학입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나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한국학 지원 수준은 훌륭한 편이라고 봅니다. 문학분야에서 대산문화재단의 후원도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구요. 무조건 키워야 합니다. 한국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한국의 국력도 커지니까요." 이제,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달리는 유목민 대장같은 그의 당당함 속에 깃든 일말의 시심(詩心)을 들춰보는 것으로 인터뷰를 끝내자(실제로 그는 고향인 예천 지고개(酒峴)를 소재로 한 시 `지고개 전설' 등 세 편으로 2003년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러시아가 소비에트 체제 붕괴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시기에 썼음직한, 혹은 그런 시기를 떠올리면서 썼음직한 `겨울 바이칼 호수'가 그의 이렇듯 또다른 내면을 훔쳐보기에 적절하겠다.// 애써/애비가 뚫어 놓은/얼음 구멍 속에는/물풀 사이로/물고기를 나열한/한 폭의 수채화 같은/바이칼 호수가/걸려 있다//소년은/ 예전부터 내려오는/부리야트 민족의/전설을 꿰어/물풀을 헤치고/언 손을 비비며/낚싯줄을/내린다//뭍으로/끌려 나온/바이칼 호수는/영하 45도의 하중에/역사의 무게를/이기지 못하고/출렁이는 물고기로/얼어 버린다//소년이 둘러 멘/자루 속에는/망해 버린/소련의 현실에/아랑곳없이/장작 같은 오물들이/속절없이/퍼덕인다//앞날이 걱정스러운/애비의 한숨에/소년이 남기고 가는/발자국 위로/우울하게/떨어지는/빛 바랜/소련의 비늘들/ (시에 나오는 `오물'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안주 삼아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힌.--기자 주)(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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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출신 이상연, 22일 국세청의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축하합니다.
이상연(‘아름다운 납세자상’ 받은 이상연 경한코리아 대표 |◈----- 同門會長-동정/ 권오봉 | 2011.07.22. 18:28 http://cafe.daum.net/seouldaechong/ “성실납세는 국민의 도리... 기부·봉사로 행복경영”/ 기사입력 : 2011-07-22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이상연(62) 경한코리아(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대표가 2011년 7월 22일 ‘아름다운 납세자상(賞)’을 받았다. 이 대표는 “기업인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뜻깊은 상을 받았다. 사회에 큰 빚을 지게 된 만큼 더욱 성실한 경영인이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름다운 납세자상(賞)’은 국세청이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면서 기부와 봉사 등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는 납세자를 선정, 국민의 귀감이 되는 공정사회 실천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제정한 상이다. 이 대표는 납세뿐 아니라 다양한 기부와 봉사를 통한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 투명한 경영과 고용 창출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첫회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됐다. 이 대표는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세금을 성실히 납부해야 재정이 튼실해지고, 그 돈으로 국민들의 복지를 챙길 수 있을 것이다”며 “세금을 아깝게 생각하거나 회피하려는 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처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초창기 어려운 경영 상황에서도 세금만큼은 착실히 챙겼다”며 “내가 낸 세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보람된 일이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의 성실납세는 기부와 봉사에 그대로 투영됐다. 그는 “뭔가 나눠주고 나면 받는 사람의 행복이나 기쁨만큼 자신도 행복하고 기쁜 것이 기부다. 상대방에게 단순한 물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며 기부관(觀)을 얘기했다. 이 대표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지난 1984년 회사 창립 직후부터 지금껏 지역사회의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왕성한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산재근로자·국가유공자 가족, 소년·소녀가장 등 사회 소외계층은 물론 경남메세나협회, 예총, 미술관 등 지역문화계 발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경남지방경찰청, 북한대학원대학교, 경남대 등 9개 교육 관련기관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고,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경남지역발전협의회 등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단체에도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이 같은 활동에 이 대표는 최근 5년 동안만 해도 약 20억원을 쾌척했다. 이 대표는 기부뿐 아니라 봉사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봉사다. 희생이 따르긴 하지만 그 대상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 성취감과 보람을 동시에 느낀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해 2006년부터 4년간 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장을 맡아 조직을 급성장시켰고, 범죄예방위원회와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사장 등의 활동으로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약 50억원 규모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매년 매출의 1~2%를 모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현재 자동차 오토미션 핵심부품 밸브스플 제조업체인 경한코리아와 경한타일랜드(태국법인), 경한인터스트리 등을 경영하고 있다. 이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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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면 우곡리 출신 고인환 교수, 문학평론집에 수록...축하합니다.
고인환(고인환 慶熙大 敎授 `文學評論' 「2000年代 韓國의 젊은 批評」評論集에 收錄) [記事] :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젊은 평론가상’ 수상자들의 대표 평론을 모아 엮은 평론집 「2000년대 한국의 젊은 비평」이 나왔다. 이 책에는 지역 출신으로 ‘제7회 젊은 평론가상’을 수상한 고인환(44)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의 평론 등 12명의 수상자들이 자신의 수상집에서 직접 고른 대표 평론들과 좌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지형도'가 수록되어 있다. 고인환 교수는 하리면 우곡리 고재목(74·동아당약방) 박숙희(74) 씨의 장남. 경희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환 교수는 200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순정한 허구, 혹은 소설의 죽음과 부활 - 성석제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저서로는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 「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문학 속의 명장면 50선」「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이 있다.(醴泉新聞 2011년 07월 22일 (금) 09: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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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