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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649) : 조경래-조수영-조용부-조윤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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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래(趙景來) : 1930- , 예천읍 출신, 지보초등에서 예천초등으로 전학하여 졸업(33회), 동성중(東星中), 동성고, 고려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성균관대 문학 박사(文學博士)이다. 57년 교직 시작 후 각종 보직과 대학 행정에도 관여하였고, 학문 생활 외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상명대(祥明大)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동 교육대학원 원장, 96년 정년퇴임이다. 96년 재경예천읍민회장(在京醴泉邑民會長), 상명대와 고려대 서양사학과 강사이다. 저서로 <문화사 개론(文化史槪論)>, <절대주의 시대(絶對主義時代)>, <서양사 입문(西洋史入門)>, <서양문명(西洋文明)의 제문제(諸問題)>, <서양근세사(西洋近世史)>, <서양현대사(西洋現代史)>, <조명하의사 약전(趙明河義士略傳, 1987)> <역사의 여로(旅路, 1994)> 등 전문 서적이 있고, 20여 종의 전공 논문, 각종 언론을 통한 문필 활동을 했다. 종교는 가톨릭이다.(醴泉文學 1990 1991 1992, 醴泉新聞 1995.10.19 1996.9.26 199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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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영 : 1963- , 예천읍 출신, 예천초등, 경신중, 동성고, 순천향의대 졸업, 의학박사, 순향의대 부속병원 외래교수, 제생종합병원 성형외과장, 한국의학레이져센터 진료원장, 서울 강남구 신사동 조수영성형외과 원장이다. 대한성형외과학회 회원,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회원, 대한수부미세수술학회 회원, 대한레이저의학회 회원이다.(醴泉新聞 2001.6.28)
조수영 [바로가기] : 조수영 성형외과/ http://www.chocc.co.kr/(daum 2011)
조수영 [사이트] : 조수영 성형외과/ 강남구 논현동 소재, 초음파 지방흡입, 쌍꺼풀수술, 무통 코 융비술, 유방수술, 모발이식./ www.chocc.co.kr/ 생활, 건강 > 전문병원 > 성형외과(daum 2011)
조수영 : 조수영성형외과/ 2달전, 2010년 11월 4일 (목)/ 조수영 원장님, 직원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항상 공기처럼 산소처럼 조수영성형외과 직원들과 함께하는데 제가 오늘에서야 감사함을 전달합니다... 어제는 제가 국민대학교에서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받았습니다.../ shy6311.blog.me/ 신연희(daum 2011)
조수영 : 조수영성형외과에서의 Happening^^/ 2주전, 2011년 1월 11일 (화)/ 저는 한 번 웃기시작한 일은 두고두고 웃는... 버릇이 생겨서... 고민입니다! 조수영성형외과에 오시는 눈 작으신 분들에게... 눈 크게 뜨고 이곳을 바라보세요...??? 눈을 크게 떠 보시라니까요??? 비포 사진 찍을 때 생기는.../ shy6311.blog.me/ 신연희(daum 2011)
조수영 : 조수영 - INFO/ 조수영 원장님, 직원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항상 공기처럼 산소처럼 조수영성형외과 직원들과 함께하는데 제가 오늘에서야 감사함을 전달합니다... 어제는 제가 국민대학교에서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받았습니다... 조수.../ catch.9259.co.kr(daum 2011)
조수영 : 조수영성형외과/ 강남구 논현동 소재, 초음파 지방흡입, 쌍꺼풀수술, 무통 코 융비술, 유방수술, 모발이식./ www.chocc.co.kr(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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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부(趙勇夫) ; 1942- , 예천읍 노하리 출신, 예천초등(42회), 예천중(6회), 대창고(5회), 경희대 정경대 졸업, 대창고(大昌高) 교사, 신영전기(주) 영업부장, LG산전(주) 영업본부장, 선도전기(주) 전무이사, 동 부사장을 거쳐 이조전기(주) 대표이사 사장이다. 예천성당에서 영세한 수도권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인 교우회(敎友會) 회장, 2003년 재경예천군민회 상임부회장이다.(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醴泉新聞 2003.6.12, people.chol.com 2004)
조용부(趙勇夫 在京醴泉郡民會 常任副會長) [記事] : 군민회 사무국을 관장하는 조용부(61) 상임부회장은 온화한 성품이나 매사에 맺고 끊는 단호한 일 처리가 돋보인다. 철저한 현장 확인주의자라고 자부할 정도로 지시한 일의 마무리는 항상 현장에서 한다. 따라서 대충대충 일을 하거나 눈속임한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처리해도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을 정도로 신의를 중시한다. 수도권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인 교우회 회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몸에 배어 있다. 등산과 골프를 즐기고 부인 김순환(예천읍 출생) 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 약력 : 예천초(42회)․예천중(6회)․대창고(5회)․경희대 졸업, 대창고 교사․LG산전(주) 영업본부장․선도전기(주) 부사장 역임, 이조전기(주) 대표이사 사장(현).(醴泉新聞 2003-06-12 15:15:30)
조용부 : 대창80년사:부록(36) 강사및교사(3)/ 작성 장병창/ 2주전, 2011년 3월 10일 (목)/ ....3.1 대창고등하교 교무과장 1991.9.10-? 대창학원 재단이사 1992.3-? 예천신문사 발행인 조용부 (趙勇夫, 1968.6.20-1969.5.30) 주소는 예천읍 노하리, 제세(濟世)의 아들, 1968.6.20-1969.5.30.../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조용부 : 대창80년사:부록(1) 위치-졸업생수/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녀 2월 2일 (수)/ ...(禹昌球, 영주종고), 김규훈(金奎薰, 상주여고), 차준재(車埈載), 이인수(李仁守), 박구서(朴九緖), 조용부(趙勇夫), 박원구(朴源久), 김길자(金吉子), 장석조(張錫祚, 상주고 교장), 이중기(李重氣, 상주고.../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조용부 : 대창80년사:중고병설시대(14) 벽천선생탄신100주년기념행사(1)/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2일 (수)/ 박운하(朴運河), 황중태(黃重泰), 권영세(權寧世), 정용인(鄭鏞仁), 변정구(邊鼎九), 변병직, 조용부(趙勇夫), 김현각, 장우신(張友信) 동문 등 주로 고등학교 제5회 졸업생이 맡았다. 그리고 비문.../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조용부 : 재경예천군민회cafe/ 재경 예천군민회 태백산가족산행-최종명단/ 2년전, 2009년 1월 31일/ ...2명 40,000 오창근 잠실 1명 20,000 권말순 잠실 2명 40,000 조용부 잠실 1명 20,000 윤화자 잠실 1명 20,000 박영조 잠실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조용부 : 예천군민회 임원분들/ 7년전, 2004년 9월 24일/ 주소 : 송파구 잠실5동 주공(아) 514-801 상임부회장 조용부(예천읍) 근무처 : 이조전기(주) 대표이사 회장 office : 주 소 :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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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趙潤濟) : 1904-1976, 지보면 지보리 신촌(新村) 출신, 호는 도남(陶南), 본관은 함안, 생육신 여(生六臣旅)의 16세손, 용범(鏞範)의 2자, 1909년 한문서당(漢文書堂) 수학(修學), 1919년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 24년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 26년 경성제국대 예과(京城帝大豫科), 29년 동 법문학부(法文學部) 조선어문학과 졸업, 문학사(文學士) 논문은 <조선 소설의 연구>,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학 박사, 경성제대 촉탁(京城帝大囑託), 낙산구락부원(駱山俱樂部員)으로 기관지 <신흥(新興)>을 발행, 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소창진평(小倉進平) 교수의 조수(助手), 제주도에서 민요 300여 수 채집, 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조선문학(朝鮮文學) 강사,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조선어문학회보(朝鮮語文學會報)> 발간,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조선어교유(敎諭),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을 기고(寄稿), 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진단학보(震檀學報)> 발간, 39년 <교주춘향전(校註春香傳)>을 출간, 보성전문대학(普成專門大學) 도서관 부설 연구실, 40년 경신학교(儆新學校) 한문(漢文) 강사,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한문 강사, 41년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 강사, 중앙중학교 한문 강사, 43년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강사, 44년 천주교신학교 한문 강사, 45년 해방 즉시 경성대(京城大) 법문학부 재건 책임, 동 교수, <진단학회> 재조직, 46년 미군정(美軍政) 학무국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경성제대 법문학부장(法文學部長), 서울대 대학원 부원장 겸 문리과대 교수, 47년<국문 교육의 당면 문제> 출간, 48년 <조선 시가(詩歌)의 연구> 출간, 김구(金九)따라 평양 김일성대(平壤金日成大) 시찰, 서울대 문리과대 교수, 정부 수립 문교심의위원회 위원, 국어교육연구회 조직 회장으로 기관지 <국어 교육> 발간, 49년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 성균관대 교수 겸임, <국문학사(國文學史)> 출간, 서울대 문리과대 학장, 50년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성균관대 교수, 52년 서울대 문학박사(文學博士), 53년 성균관대 대학원장, 고등고시(高等考試) 위원, 문교부 대학입학자선발연합고사 중앙위원, 54년 한국문예학회 조직 회장, 고등고시(高等考試) 위원, 50년 성균관대 부총장(副總長), <국문학 개설(國文學槪說)> 출간, 57년 문교부 국어심의위원회 위원, <교주춘향전(校註春香傳)> 수정판(修正版)과 <춘향전 이본고(春香傳異本考)> 출간, 59년 문교부 고등학교교원자격고시 검정 전공과목 국어과 고시위원, 60년 재경(在京) 각 대학교수단(大學敎授團) 데모에 가담, 한국교수협회(韓國敎授協會) 의장(議長), 성균관대 대학원장, 63년 제8회 대한민국학술원상(大韓民國學術院賞) 수상,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 출간, 64년 <도남잡식(陶南雜識)> 출간, <도남조윤제박사회갑기념논문지(陶南趙潤濟博士回甲紀念論文誌)>, <화갑기념도남난훈록(華甲紀念陶南蘭薰錄)> 출간, 65년 청구대(靑丘大) 교수, <국문학사 개설(國文學史槪說)> 출간, 재경교수단(在京敎授團) 의장으로 한일협정반대선언문(韓日協定反對宣言文) 서명, 67-74년 영남대 교수, 69년 대한민국학술원(大韓民國學術院) 회원, 72년 문교부 한문과 교육과정심의회 위원이다. 서거(逝去) 후 제자들이 도남학회(陶南學會)를 창설하여 <도남학보(陶南學報)>를 발간하고 있다.
조윤제 : (한국 국문학자) [도남]/ 출처: 브리태니커/ 1904 경북 예천~1976./ 조윤제 :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도남(陶南). 1924년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1929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조선어문학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했다. 1932년 경성사범대학교 교유(敎諭)에 임명되었으며,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해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했다. 1937년에는 최초의 저서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을 간행했다. 1939년 〈교주춘향전〉을 출간했고, 조선어연구회 사건으로 용산경찰서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다 풀려났다. 경신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등을 출강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후 대학원부원장·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국어교육연구회를 조직해 기관지 〈국어교육〉을 간행했다. 1950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후 대학원장,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한국교수협회를 조직하여 의장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나자 구속되어 교수직을 사퇴당하고 5년 구형을 받았으나 무죄가 선고되어 8개월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63년 제8회 학술원상을 받았다. 1965년 대구 청구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한일협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추방당했다가 1967년 복직되었다. 1969년 대한민국 학술원회원이 되었고, 1974년 영남대학교를 퇴직했다.〈조선시가사강〉(1937)·〈교주춘향전〉(1939)·〈국어교육의 당면한 과제〉(1947)·〈조선 시가사의 연구〉(1948)·〈국문학사〉(1949)·〈국문학개설〉(1955)·〈한국문학사〉(1963) 등의 저술로서 최초로 국문학의 체계를 세운 국문학자로 국문학연구사에서 평가받는다. 그의 국문학연구의 특성은 첫째, 문학을 생명체로 파악하고 문학이 역사성·시대성 위에서 하나의 유기체로 변화·발전하는 것이라고 본 점, 둘째, 민족의 주체성에 역점을 두어 민족사관을 정립한 위에다 국문학의 체계를 세운 점, 셋째, 과학적 이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국문학연구사에서 그가 이룬 학문적 가치는 ① 국문학사상 민족사관의 정립, ② 한국 시가 형태의 기본 이념 정립, ③ 모든 시가군을 문학 장르로서 최초로 체계화시킴, ④ 자연미의 발견을 조선시대 문학의 중요한 현상으로 부각시킴, ⑤ 〈춘향전〉을 국문학의 백미로 확정, ⑥ 한문학의 성격을 밝힘, ⑦ 평론문학의 기틀을 처음으로 마련해놓았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문학의 특질을 '은근과 끈기'로 파악하기도 했다.(daum 2011)
조윤제(趙潤濟) : 국문학자(1904~1976). 호는 도남(陶南).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나왔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부총장을 지냈다. 국문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국문학사》, 《국문학 개설》 따위가 있다.(daum 2011)
조윤제 : 도남학회/ 학회 현황/ 학회명 : 도남학회(陶南學會 The Institute of Do-Nam), 설립일 : 1976.11.13, 대표자 : 이동영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설립 연혁 : 1976년 06월 12일, 돈암동 선생댁에서 이가원(李家源) 외 20명이 발기인회를 열어 도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조직할 것과 초대 임원의 선출은 영대(嶺大) 총장과 유족에게 일임할 것을 의결하다. 1976년 11월 13일, 돈암동 선생댁에서 정병욱(鄭炳昱) 외 18명이 회합하여 선임된 초대 임원의 명단을 발표하고, 정관과 설립취지문과 예산안 등을 통과시켜 조직을 완료하다./ 설립 취지 : 기미독립운동 이후 각성한 민족 의지가 새로운 민족사를 꾸미기 시작할 무렵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문학 연구에 뜻을 두어 평생을 이에 헌신함으로써 최초로 국문학의 학적 체계를 세워 이 땅에 학문하는 풍토를 조성해 주신 도남 조윤제(趙潤濟) 선생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도남학회를 설립한다. 본회는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국문학을 민족의 생명체로 삼은 선생의 학풍을 기조로 하여 국문학 발전에 적극 공헌할 것을 다짐한다./ 주요 사업 : 도남국문학상 시상, 학술강연회 개최, 연구발표회 개최, 학보 발간, 유고집 발간, 기타(daum 2011)
조윤제(趙潤濟) : 본관(本貫) 함안(咸安), 시대(時代) 1904∼1976, 호(號) 도남(陶南)/ 이력(履歷)/ 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문학박사.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도남(陶南).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서 용범(鏞範)과 청주한씨(淸州韓氏)사이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그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생으로 문과에 입학,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으며,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임명되었으며, 이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晉泰), 뒤이어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입장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 및 동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동 대학원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일제하에서 자비로 출간한 《조선시가사강》(1937)을 필두로 《교주 춘향전 校註春香傳》(1939)·《조선시가(朝鮮詩歌)의 연구》(1948)·《국문학사 國文學史》(1949)·《국문학개설 國文學槪說》(1955)·《한국문학사 韓國文學史》(1963) 등 20여권에 이르며, 논문으로는 1929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조선문학과 한문학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50여편, 수필·잡문 등은 거의 100편에 이른다. 《조선시가사강》은 우리의 시가사를 처음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 서술한 책으로, 이제는 고전적 저술에 속하나 아직도 다시금 음미하고 고려하여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보이고 있으며, 《국문학사》도 국문학의 형성과 발전을 우리 민족의 형성 발전과의 관련 하에서 체계있게 서술한 역작으로, 《한국문학사》는 그 개수판이다.《국문학개설》은 국문학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분석과 고찰을 시도한 저서로 국문학개론류의 효시이다. 이 책은 크게 서론·각론(各論)·사론(史論)·통론(通論)·부론(附論)으로 나누어져 서술되고 있는데, 특히 통론은 국문학과 인생, 국문학과 자연, 국문학과 외국문학과의 교섭, 국문학의 특질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바, 이 책의 핵심부분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주목할 부분이다. 이들 저서와 논문들은 모두가 이른바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된 것들로, 일제하 황무지였다고도 할 국문학연구에 있어 개척자적 역할을 하면서 광복 후에는 국문학연구의 출발점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는 진지한 민족독립운동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민족사관에 입각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학문이 국수주의적이거나 독존적·배타적이지는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세계화적 일반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정당당한 자세였음은 주목하여야 할 점이다. 그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민족을 사랑한 그의 태도는 저술에서뿐만 아니라, 대학강단과 사회생활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났으며, 그 과단성·청렴성과 학구적 양심은 옛 선비의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대인의 풍을 갖춘 학자라는 일반의 평이 그리 어긋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陶南年譜抄(成大文學 10, 1964), 陶南先生年譜(陶南趙潤濟博士古稀紀念論叢, 1974), 陶南國文學의 탁월한 제사실들(李明九, 陶南學報 1, 1978),陶南先生의 人間像(李崇寧, 陶南學報 2, 1979),陶南學의 전통과 國文學硏究의 방향 설정(趙東一, 陶南學報 3, 1980)/ 〈李明九〉(daum 2011)
조윤제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조윤제(1904-1976)는 부리기마을(知保面知保里) 출신으로, 호는 도남(陶南), 본관은 함안, 용범(鏞範)의 아들이다.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初等學校)에 입학(1915)하여 경성제대(서울大)를 졸업(1929)하였다. 일제 때 경성사범학교(1932)에서 조선어과 교편을 잡으면서 일반 학과에서 손을 대지 못하던 국문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은 최초의 방대한 국문학 연구서이며, 국문학의 체계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시조 자수고(時調字數考)', '춘향전이본고(春香傳異本考)' 등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모두 국문학의 황무지를 개척한 고심작(苦心作)이었다. 특히 해방 후 서울대와 성균관대에서 교수, 학장, 대학원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문학사>,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 개론>, <교주 춘향전(校註春香傳)>, <한국 문학사>등을 간행하였다. 이들 저서를 통해 나타난 사상은 민족사관(民族史觀)이며, 민족의 생과 민족정신에 입각하여 국문학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여 당시 일본 제국주의적 실증주의를 극복하였다. 물론 한때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조직할 때는 실증주의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사관을 주장함으로써 실증주의와 결별하였다. 오로지 민족정신의 고취와 민족 독립운동의 일환으로써 40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이 애국적인 입장에서 국문학에 관한 공부를 꾸준히 해왔으며, 특히 <한국문학사>는 현재 나와 있는 우리 문학사 중에서 가장 방대한 것이고, 또 권위 있는 저술이다. 1953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교수협회 의장(1960)으로서 교수 데모를 주도하였으며, 영남대 교수(1965)를 하였다. 조윤제는 해방 전후와 6.25전쟁 때 예천에 와서 살았다. 6.25전쟁 때는 고향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芝圃八景)가 있다. 조윤제는 <국문학의 특질(1948)>에서 이르기를, "나는 감히 은근과 끈기를 국문학의 특징이라 주장하고 싶다... 은근은 한국의 미(美)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 은근하고 끈기있게 사는 데 한국의 생활이 건설되어 가고 또 거기서 참다운 한국의 예술과 문학이 생생하게 자라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1)
조윤제(趙潤濟) : 1904년∼1976년. 국문학자·문학박사.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도남(陶南).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서 용범(鏞範)과 청주한씨(淸州韓氏)사이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1. 학력 및 경력 :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그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생으로 문과에 입학,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으며,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임명되었으며, 이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晋泰), 뒤이어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입장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 및 동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동 대학원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2. 저서 : 그의 저서로는 일제하에서 자비로 출간한 《조선시가사강》(1937)을 필두로 《교주 춘향전 校註春香傳》(1939)·《조선시가(朝鮮詩歌)의 연구》(1948)·《국문학사 國文學史》(1949)·《국문학개설 國文學槪說》(1955)·《한국문학사 韓國文學史》(1963) 등 20여 권에 이르며, 논문으로는 1929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조선문학과 한문학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50여편, 수필·잡문 등은 거의 100편에 이른다. 《조선시가사강》은 우리의 시가사를 처음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 서술한 책으로, 이제는 고전적 저술에 속하나 아직도 다시금 음미하고 고려하여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보이고 있으며, 《국문학사》도 국문학의 형성과 발전을 우리 민족의 형성 발전과의 관련 하에서 체계있게 서술한 역작으로, 《한국문학사》는 그 개수판이다. 《국문학개설》은 국문학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분석과 고찰을 시도한 저서로 국문학개론류의 효시이다. 이 책은 크게 서론·각론(各論)·사론(史論)·통론(通論)·부론(附論)으로 나누어져 서술되고 있는데, 특히 통론은 국문학과 인생, 국문학과 자연, 국문학과 외국문학과의 교섭, 국문학의 특질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바, 이 책의 핵심부분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주목할 부분이다./ 3. 평가 : 이들 저서와 논문들은 모두가 이른바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된 것들로, 일제하 황무지였다고도 할 국문학연구에 있어 개척자적 역할을 하면서 광복 후에는 국문학연구의 출발점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는 진지한 민족독립운동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민족사관에 입각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학문이 국수주의적이거나 독존적·배타적이지는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세계화적 일반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정당당한 자세였음은 주목하여야 할 점이다. 그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민족을 사랑한 그의 태도는 저술에서뿐만 아니라, 대학강단과 사회생활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났으며, 그 과단성·청렴성과 학구적 양심은 옛 선비의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대인의 풍을 갖춘 학자라는 일반의 평이 그리 어긋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 陶南年譜抄(成大文學 10, 1964), 陶南先生年譜(陶南趙潤濟博士古稀紀念論叢, 1974), 陶南國文學의 탁월한 제사실들(李明九, 陶南學報 1, 1978), 陶南先生의 人間像(李崇寧, 陶南學報 2, 1979), 陶南學의 전통과 國文學硏究의 방향 설정(趙東一, 陶南學報 3, 1980)(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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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