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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681) : 장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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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덕(張胤德) : 1872(고종 9)-1907(융희 1), 예천읍 노상리 출신,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본관은 단양, 잠재 근(潛齋謹)의 12세손, 재안(載安)의 장자, 구한 말의 의병장(義兵將)이다. 학문을 즐기고 애국심이 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이 체결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의기(義氣)를 들고 왜적(倭敵)의 토벌에 앞장섰다. 1907년 4월 동지들과 협의하여 침략자 일본 요인과 매국노들을 죽일 목적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지의 행색(行色)으로 피신하면서 다시 일어나기를 꾀하다가, 같은 해 7월 예천으로 돌아와 일본 관리와 헌병의 경계망을 뚫고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여, 예천우편국(醴泉郵便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일본인 우편국장(郵便局長) 및 일본 사람 관리들 몇 명을 죽였다. 이어 각지에 격문(檄文)을 뿌려 3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부대를 편성할 때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되면서 이강년 남도의병대장(李康秊南道義兵大將)과 제휴하고 예천, 영주, 봉화 등지에서 피의 항쟁을 계속하여 많은 일본군과 친일분자를 응징하면서 구국 운동을 펴던 중 소백산 밑 풍기 근처에서 일본군 1개 중대의 추격을 받고, 문경으로 의진(義陣)을 옮겼다. 특히 1907년 9월 10일 문경면 갈평리(聞慶面葛坪里, 갈벌) 전투에서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의병장 휘하 천여 명의 병력으로써 미하라(三原) 소위와 나가다니(永谷) 경시(警視)가 이끄는 수비대(守備隊) 및 경찰대를 섬멸시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병력을 나누어 이강년은 충북으로 떠나고 민긍호와 함께 대구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대구로 진격하던 도중 상주읍에서 일본인 자위단(自衛團)을 포위공격하다가 대구수비대 1개 중대가 다나까(田中) 대위의 인솔로 출동하여 상주의 자위단(自衛團)과 합세하였으므로 혈전(血戰)을 펼쳤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의진(義陣)이 무너지자 장윤덕은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 분전하다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함창 헌병대(咸昌憲兵隊)로 이송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오히려 재판관을 크게 꾸짖고 의분(義憤)을 피력하다가 동지들의 동정을 대라는 심한 고문을 견디려고 스스로 혀를 물어 곧은 절개를 지키다가 그 곳 구향리(舊鄕里) 뒷산에서 1907년 9월 총살형을 당하니, 36세의 한창 일할 나이였다. 묘는 보문면 수계리 147-1번지 보문사(普門寺) 부근에 있는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친필 묘비(親筆墓碑)가 있고, 경북대학교 경내에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張胤德義士殉國記念碑)>가 있다. 일본 놈들은 예천읍에 있는 장윤덕 의사(義士)의 집을 습격하여 집과 재산을 불태웠고, 유족까지 죽이려 하였으므로 유족은 보문면 산골짝으로 피난하여 낮에는 토굴 속에 숨고, 밤이면 나와 곡식 이삭을 훑어 먹어가며 목숨을 이어 갔으나, 왜적의 모진 손길은 다시 이 곳에 뻗혀 유족들은 잡힌 몸이 되어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왜적의 고문을 받았다. 1968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 제790호)이 추서되었다.(愛國志士墓籍簿 1979, 文化遺蹟總覽, 慶北大觀 1958, 族譜, 義兵大將 星菴 張胤德 墓碑 除幕式 典帖(1967), 韓國獨立運動史 嶺南出身 獨立運動略史, 大韓獨立運動略史 1980 340-341쪽,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890-891쪽, 獨立運動史 1126쪽, 獨立運動功勳錄1券 888쪽)
장윤덕(張胤德) : 조선 후기의 의병장(1872~1907).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일본인 예천 우체국장을 살해하고, 문경(聞慶)에서 일본군의 일개 중대를 크게 무찔렀다. 뒤에 상주(尙州)·대구(大邱)의 일본 수비대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daum 2010)
장윤덕(張胤德) : ⊙ 생몰연대 : 1872. 7. 6. ∼ 1907. 9. 16. ⊙ 출 신 지 : 예천 ⊙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 (68) 대통령표창(63) ⊙ 운동계열 : 의병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군에서 단양 장씨 장재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www.dalgu.net(daum 2010)
장윤덕(張胤德) : 본관(本貫) 단양(丹陽), 시대(時代) 1872(고종 9)∼1907, 자(字) 원숙(元淑), 호(號) 성암(惺菴)/ 이력(履歷)/ 장윤덕(張胤德) 1872(고종 9)∼1907./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경상북도 예천출신. 재안(載安)의 아들이다. 일찍이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직을 사임하고 민중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으며, 또 1907년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자 구국 항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각처의 의사(義士)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강년(李康#연05)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풍기·봉화·예천·용궁·문경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분파소·일본군사기지·일본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경찰보조원 또는 친일반역분자 등을 사살하였다. 특히, 1907년 9월중에는 이강년·민긍호(閔肯鎬)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1, 000여명을 이끌고 문경읍 갈평리에서 일본경찰과 군인이 인솔하는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경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같은 달 16일에도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하여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카(田中)대위가 거느린 1개중대의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이 크게 패하고 그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수비대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병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으며,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 〈李東宇〉(daum 2010)
장윤덕 : 성암 장윤덕 [張胤德]/ 장윤덕 [張胤德, 1872.7.6~1907.9.16]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도 참여했다. 의병을 모아 이강년 의진과 합류한 후 풍기, 봉화 일대에서 일본경찰과.../ artsnet.co.kr(daum 2010)
장윤덕(張胤德) : 자 원숙(元淑), 호 성암(惺菴), 생졸년 1872 (고종 9) - 1907 (융희 1), 시대 조선 후기, 본관 단양(丹陽)/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 의병장/ [상세내용] 장윤덕(張胤德)에 대하여 : 1872년(고종 9)∼1907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경상북도 예천 출신. 재안(載安)의 아들이다. 일찍이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직을 사임하고 민중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으며, 또 1907년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자 구국 항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각처의 의사(義士)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강년(李康?)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풍기·봉화·예천·용궁·문경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분파소·일본군사기지·일본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경찰보조원 또는 친일반역분자 등을 사살하였다. 특히, 1907년 9월 중에는 이강년·민긍호(閔肯鎬)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문경읍 갈평리에서 일본경찰과 군인이 인솔하는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경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같은 달 16일에도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하여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카(田中) 대위가 거느린 1개 중대의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이 크게 패하고 그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수비대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병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으며,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daum 2010)
장윤덕 : 칠성리 김성호 처조부 성암 장윤덕 의사 기록 발췌| [2] 칠성 성원공파/ 남재(南齋) 재호/ 2010.08.03. 00:38/ http://cafe.daum.net/ 칠성리 김성호 처(장기남) 조부 성암 장윤덕 의사 기록 발췌/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 의사(義士) : 1872(고종 9)∼1907,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경상북도 예천 출신. 재안(載安)의 아들이다. 1) 장윤덕 의사 묘역 : 예천 보문사 부근에는 한말의 독립운동가 장윤덕(張胤德)의 묘가 있다. 보문사에서는 약 500여 미터가 떨어져 있는데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밭으로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산허리를 돌아 밭이 있고 그 너머의 산자락 끝에 묘역이 있다.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군에서 단양 장씨 장재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워 예천군에서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7년 4월에는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원흉인 이또오히로부미를 비롯한 매국적신들을 살해하고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피신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의병대장 이강년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장윤덕 의사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 대장 휘하에 합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 봉화, 문경, 용궁, 예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7월 9일에는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그해 8월 27일에는 의병 300여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또한, 9월 3일에는 문경읍을 습격,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인의 가옥을 소각시켰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에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적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에도 예천읍을 습격하였음은 물론 16일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과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대위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 의사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당하여 3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묘역은 유혈의 혈상을 구비하고 있다. 전형적인 혈상에 인작을 가해 돋은 흔적이 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입수룡은 조금 약하나 비룡형으로 조영되어 그 기맥을 잘 보전하고 있다.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묘역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입구 방향에는 작은 산자락이 사두혈을 조영하였는데 소나무가 너무 자라 잔디가 죽어 황폐화된 모습이 안쓰럽다
2) 장윤덕(張胤德) : 1872(고종 9)∼1907.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경상북도 예천 출신. 재안(載安)의 아들이다. 일찍이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직을 사임하고 민중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으며, 또 1907년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자 구국 항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각처의 의사(義士)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강년(李康秊)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풍기·봉화·예천·용궁·문경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분파소·일본군사기지·일본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경찰보조원 또는 친일반역분자 등을 사살하였다. 특히, 1907년 9월 중에는 이강년·민긍호(閔肯鎬)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문경읍 갈평리에서 일본경찰과 군인이 인솔하는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경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같은 달 16일에도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하여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카(田中)대위가 거느린 1개 중대의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이 크게 패하고 그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수비대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병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으며,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 〈李東宇〉(daum 2010)
3) 장윤덕 [張胤德, 1872.7.6~1907.9.16] :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도 참여했다. 의병을 모아 이강년 의진과 합류한 후 풍기, 봉화 일대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고 일본 공무소를 습격했다. 상주에서 교전 후 순국하였다.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이다. 경상북도 예천(醴泉)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재안(載安)이다.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로 경고문을 보내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매국적신(賣國賊臣)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으로 들어갔다. 풍기(豊基)·봉화(奉化)·문경(聞慶)·용궁(龍宮)·예천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경찰대와 교전하는 한편, 일본경찰분서·일본헌병분파소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우고, 순검·경찰보조원 등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9월 민긍호(閔肯鎬) 의진과 연합하여 1,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葛坪里)에서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을 치렀다. 곧이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예천을 거쳐 상주(尙州)를 공격하던 중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까[田中] 대위가 거느린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daum 2010)
장윤덕 : [스크랩] 의병장 장윤덕 나무/ 글쓴이: 松河 李翰邦/ 07.05.19 20:44/ 경북대학교 정문 뒤쪽 숲 속에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에 둘레의 오래된 버드나무를 장윤덕 나무로 명명하고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아래 자료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받아온 자료입니다./ (심후섭)/ 장윤덕[張胤德] : 1872. 7. 6 경북 예천~1907. 9. 16.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아버지는 재안(載安)이다.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재직했으며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사임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비롯한 일제고관과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재차 거사할 기회를 엿보았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궐기하고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키자, 각 처에 창의격문을 돌리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다. 이강년 휘하의 의병장으로 주로 풍기·봉화·문경·용궁·예천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7월 9일 일본경찰과 교전하여 경찰 보조원 3명과 순검 2명을 사살했다. 8월 27일 의병 300명을 이끌고 풍기에 있는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했으며,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 소각했다. 그 후 9월 3일에는 문경읍으로 나가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 가옥을 소각했다. 9월 10일에는 이강년·민긍호 연합부대에 합세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문경면 갈평리에서 일본 경찰대 및 수비대와 교전하여 5명을 사살했다.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16일에는 대구수비대와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결국 의병진은 와해되고 그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에서 총살당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daum 2010)
장윤덕 : 대구보훈청 자료/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 | 우리고장 현충시설 소개/ 2007.11.18 22:57 대구보훈청/ http://blog.daum.net/dgmpva/ ☞ 소재지 : 대구 북구 산격동 1370(경북대학교 내)/ ☞ 관리번호 : 30-1-15 ☞ 관리자 : 경북대학교 총장/ ☞ 시설제원 : 부지 20평, 높이 3m/ ☞ 건립취지 :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07년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 대장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신 장윤덕(張胤德, 1872.7.6~1907.9.16, 1968년 독립장) 선생의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장윤덕 선생은 1907년 7월 의병을 일으켜 주로 풍기, 봉화, 문경, 예천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16일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출동한 1개 중대가 격전을 벌이다 패전하였으며, 장윤덕 선생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 후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혀를 끊고 항거하다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당하여 3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 찾아가는 길 : - 시내에서 545번, 349번 등 시내버스 이용 20분, 동대구역, 대구역에서 경북대학교 정문방향 버스 이용 20분(daum 2010)
장윤덕 : 장윤덕 의사 나무 [펌]| 주변역사이야기/ 남재(南齋) 재호 | 2009.11.17. 12:03/ http://cafe.daum.net/ 경북대학교 정문 뒤쪽 숲 속에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에 둘레의 오래된 버드나무를 장윤덕 나무로 명명하고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daum 2010)
장윤덕 :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 대구 북구 산격동 1370 경북대학교(daum 2010)
장윤덕 : 국립묘지에 들러.../ 차례일기/ 4년전, 2006년 4월 10일/ ...8월에 순국하였다.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617 3.1운동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기 화성 장윤덕 張胤德 경북 예천 보문 수계 산147 의병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북 예천 장인환 張仁煥 그는 심문하는 미국.../ blog.naver.com/unclej/ 우이동친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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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