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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689) : 장진-장진성-장진우(附 예천동부초등학교, 한자 자격증 대거 합격...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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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張瑱) : 1635(인조 13)-1707(숙종 33), 호명면 원곡리 출신, 자는 군옥(君玉), 호는 모암(茅菴), 본관은 인동, 판서 말손(判書末孫)의 후손, 일은 원경(逸隱元慶)의 3자, 명걸(命杰)ㆍ대걸(大杰)ㆍ계걸(繼杰)ㆍ창걸(昌杰)의 아버지, 족숙 국암 장유경(族叔菊岩張裕慶)의 제자이다. 어려서 길가에서 놀다가 은장도(銀粧刀) 한 자루를 주우니, 여러 아이들이 이것을 숨기자고 했으나 곧이 듣지 않고 기다리고 섰다가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다. 뒷날 청백리(淸白吏)로 칭송이 높아진 것은 어려서부터 성현(聖賢)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컸었던 까닭이다. 1649년(인조 27) 15세 때 마을 앞 개울에 여러 아이들과 멱감으러 갔다가 마침 낚시하러 온 주봉 이래(柱峯李崍)를 만났다. 서로 대담하다가 이래가 그의 학문 숙성에 다시 한 번 놀라고 시 한 수를 지으라 하니 운자(韻字)를 받은 그는 서슴없이, "열 다섯 해 묵은 때를, 맑은 가을 물에 씻어 버리고, 또다시 티끌이 마음 속에 생긴다면, 오장(五臟)을 내어 이 냇물에 던지리라."라고 읊으니, 이래가 칭찬하여 "이 글에 청백(淸白)한 네 마음이 드러났다."라고 했다. 총명하고 박학하여 1664년(현종 5)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 1665년(현종 6)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8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 1670),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1673)을 거쳐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 영암 군수(靈岩郡守),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 울산 부사(蔚山府使) 등 여러 주부(州府)의 수령(守令)으로 나가면서 벽상(壁上)에 "공청근각(公淸勤恪 : 公正하고 淸廉하며 부지런하고 은근하자)"는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청렴하고 착한 치적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선정비(善政碑)를 남겼고, 1677년(숙종 5)에는 나라에서 포상(褒賞)하여 "선정(善政)은 진실로 아름답고, 맑은 덕은 더욱 가상하다."라고 칭찬하였다. 1679년(숙종 5) 10월 6일 정언에 임명되었고, 1693년(숙종 19) 12월 17일 장령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강계 부사 겸 방어사(江界府使兼防禦使)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초가 3칸을 세우고 스스로 모암(茅菴)이라 이름 짓고 살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명사(名士)들과 사귀면서 명승(名勝)을 찾아 풍월(風月)을 읊고 살림이 가난했으나 구애되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했고, 임종(臨終) 때 네 아들에게 "청검신의 신묵겸공(淸儉信義 愼黙謙恭)" 8자씩을 손수 써주며 가훈(家訓)으로 삼을 것을 당부하여 자손들을 청렴결백하게 살아가라고 타일렀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저서로 <모암집(茅菴集)> 4권이 있고, 묘는 지보면 마전2리 오복양수장(五福揚水場) 근처 대로 변 오복산 임좌(大路邊五福山壬坐)에 있는데, 속칭 "장 울산 묘(張蔚山墓)"라고 하는 명당(明堂)이다. 호명면 원곡리 송계재(松溪齋)에 제향되었고, 그의 문집 <모암집(茅菴集)> 2권과 1680년(숙종 6)에 하사받은 <열성어제(列聖御製)> 2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肅宗實錄, 國朝榜目,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1895, 慶北道義誌 431쪽, 肅宗實錄, 醴泉郡誌 1939)
장진 [專門資料] : 茅菴先生文集(모암선생문집)/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先生文集卷之一/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松溪合稿序/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書舍韻/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銘爲文載熙作/ 鄭載圭(정재규)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先生文集目錄/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先生文集卷之二/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松溪合稿序[趙昺奎]]/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先生文集目錄]/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書舍次韻 孤山黃耆老/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장진 [專門資料] : [茅菴松溪合稿序[圭煥]]/ 朴希參(박희삼) | 경상대학교도서관문천각(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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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성(張進聖) : 1873(고종 10)-1943, 본적과 주소는 용궁면 산택리 69번지 산못, 자는 덕화(德和), 호는 운봉(雲峰), 본관은 울진, 영조(永祚)의 장자, 일찍이 한학(漢學)을 닦아 그의 문사(文詞)는 널리 알려졌고,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때 우리 국모(國母)이신 민비(閔妃)가 왜적들에 의해 시해 당하자, 그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여 책상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그리고는 예천에 사는 친족 장진우(親族張進瑀), 외족 한양리(外族韓良履) 등 동지들과 모여 이충보국(以忠報國)을 맹서하고 서상열(徐相烈) 등 동지들과 예천회맹(醴泉會盟)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 준비를 하다가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의병대(義兵隊)에 들어가서 도포장(都包將)으로 왜적과 혈전 토멸(血戰討滅) 활약하였는데, 그의 전술과 용맹이 출중(出衆)하였다. 이 때 그는 이강년 의병대장으로부터 받은 삼천장검(三天長劍)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 임금님의 의병해산 칙령으로 고향 예천으로 돌아왔다가 1897년 이강년과 동행, 중국 장백(長白), 무송(茂松), 광림(光臨) 지방에서 수 없이 항전하면서 도검 무기(刀劍武器)를 옷상자에 숨겨 행상으로 가장하여 동지들의 진영에 운반하여 나누어주다가 1898년 귀국, 3도(道) 14읍(邑)을 순회하면서 왜적을 토벌하였다. 즉 단양, 제천, 원주, 강릉, 영월, 양성(陽城), 청풍(淸風), 충주, 연풍(延豊),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을 8년 간 계속 전전(轉轉) 군기(軍器)와 물자(物資)까지 노획(鹵獲)하니, 의병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을사조약(1905) 후 이강년 의병대에 다시 들어갔다. 장진성 의사는 이강년 진영의 포대(包隊)의 총책임 자인 의병 도포장(義兵都包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예천우체국(醴泉郵遞局)을 쳐들어가서 일본 적들을 혼내 주고, 특히 1906년 2월 17일부터 2월 27일까지 용소(龍沼) 지방에서 수천의 왜적을 토벌하여 크게 전과를 올렸고, 1906년 4월부터 이강년 대장으로부터 받은 의검(義劍)을 들고 경북의 문경, 예천, 안동, 풍기, 봉화, 충북의 단양, 제천, 청풍, 충주 등지에서 분투,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강원도의 영월, 횡성(橫城), 강릉에까지 이르렀는데, 1906년 7월 11일 원주에서 의병 수 천 명이 모인 가운데서 이강년 의병대장의 훈사(訓辭)를 대독(代讀)하여 의병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등 여러 곳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1908년 충북 청풍(淸風)에서 일본의 대군(大軍)을 만나 많은 의병이 죽고, 이강년마저 총상(銃傷)을 입고 체포되자, 의병 일동은 뒷날을 기약하고 일시 분산하였다. 1908년 이강년 대장이 왜적에게 체포되고, 그러나 1909년 다시 김상태 장군(金商台將軍)의 의진(義陣)에 가입 편성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1911년 우중수(禹中守)의 간계(奸計)로 김상태 장군(金商台將軍)도 체포되어 의병들은 무장(無將)의 병진(兵陣)이라 날이 갈수록 의기(義氣)는 허약하고, 적세는 강성하여 세불득(勢不得)을 한탄하여 각처로 해산하였다. 장진성 의사(義士)는 괴산, 보은 속리산(俗離山) 등지로 피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의사는 속리산에서 노모(老母)를 뵈오러 귀가하였다가 왜경(倭警)에게 체포 연행 도중 산택리동리 앞 연못가에서 포승(捕繩)을 절단하고, 육박 격투 끝에 위기를 면하고 강원도소백산에 은신(隱身), 일제의 눈을 피해 스님이 되어 수도와 학문에 전심하면서 여러 곳을 전전긍긍하다가 1943년 3월 병이 나서 고향 예천에 돌아와 같은 해 8월에 별세하니 당시 71세였다. 묘는 산택리 화미동산 청룡등 임좌(化美洞山靑龍嶝壬坐)에 있는데, 봉분(封墳)은 높이 1.1m, 직경 3.2m이다. 1977년 12월 13일 마침내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建國褒章, 제728호)을 받았고, 1990년에는 애국장(愛國章)을 받았다. 의사의 무덤은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 문화 유적(文化遺蹟)으로 등록되어 있다. 해방(1945) 후 의사집 지붕을 수리하다가 의사가 일본 적과 싸울 때 사용하던 삼천장검(三天長劍)을 발견하여 지금 전하고 있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891-892쪽, 文化遺蹟總覽, 族譜, 運岡倡義錄(李康秊), 醴泉文化 2號, 大韓獨立運動略史 1980 343-345쪽)
장진성(張進聖) : 본관(本貫) 울진(蔚珍), 시대(時代) (1873-1943), 자(字) 덕화(德和), 호(號) 운봉(雲峰)/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장진성(1873-1943)은 용궁면 산택리 출신으로, 자는 덕화(德和), 호는 운봉(雲峰), 본관은 울진, 영조(永祚)의 장남이다. 을미사변(1895) 후에 서상열의 예천회맹(醴泉會盟)에 참여하고, 이강년 의병 진영의 우포장(右包將)이 되어 문경, 수안보, 조령, 단양, 풍기, 정선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치다가 고종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의병들이 해산되자, 만주로 건너가(1898), 장백, 무송, 임광 등지에서 3년 간 군사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단양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다.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다시 이강년의 진영에 들어가(1906.4) 도포장(都包將)이란 참모로서, 문경, 예천, 풍기, 봉화, 안동, 단양, 제천, 영춘, 청풍, 충주, 원주, 영월, 횡성, 강릉 등지에서 왜적과 피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군대해산(1907) 후 전국적인 의병 조직을 갖추게 되자, 더욱 사기 충천하여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물리치고 크게 전과를 올렸다. 더욱이 문경의 갈벌, 죽령, 영춘에서 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강원, 충청, 경상도의 여러 곳에서 전과를 거두었으니, 이강년이 체포되자, 장진성은 10여 명의 동지와 더불어 예천, 봉화, 영주, 안동 등지의 험준한 산을 이용하여 야음을 타서 30여 차례나 싸웠다. 한일합방(1910)이 되자, 속리산에 들어가 숨어살던 중, 어머니를 보러 귀향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탈출하여 강원도 소백산에서 승려로서 수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타계하였다. 무덤은 산택리 화미동 뒷산에 있고, 의병 때 사용한 장검이 남아있고, 건국포장(1977)이 추서되었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장진성 : 장진우(張進瑀) 간찰(1918년 11월 24일)/ 웹문서 | 지난달, 2010년 8월 6일 (금)/ ...張漢輔)의 후손, 장영수(張永秀)의 아들이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신태식(申泰植), 장진성(張進聖) 등과 군자금 모금과 의병모집에 힘썼다. 1919년 김천 이명균(李明均), 상주 김재명(金在明) 등과 상경, 3·1운.../ i815.or.kr(daum 2010)
장진성 : 예천의 자랑(255) : 어머니를 뵈오려고 귀향했다가../ Daum 카페 | 作成 張炳昌/ 7년전, 2003년 5월 17일/ 장진성(張進聖, 1873-1943)은 용궁면 산택리 출신으로, 자는 덕화(德和), 호는 운봉(雲峰), 본관은 울진, 영조(永祚)의 장남이다. 을미사변(1895) 후에 서상열의 예천회맹(醴泉會盟)에 참여하고, 이강년 의병 진영의 우포장.../ cafe.daum.net/YeCheon/2aDy/8 | 내고향 예천 사랑(daum 2010)
장진성(張進聖) : 생몰년 : 1895-1943 시대 : 조선, 항일기 분야 : 항일/국방 > 의병 > 의병 장진성(張進聖)에 대하여 : 1895(고종 32)∼1943. 한말의 의병. 자는 덕화(德化). 경상북도 예천출신. 1895년(고종 32) 이강년(李康#연05)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임명되어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897년 이강년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장백(長白)·무송(茂松)·길림(吉林)지방에서 항쟁하였다. 그 뒤 1898년 본국으로 돌아와 단양·제천·원주·강릉·영월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군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1906년 2월 용소(龍沼)지방에서 적군을 토멸시켰다. 그 뒤 1908년 이강년 대장이 잡히자 일시 분산되어 보은 속리산에서 은신하던 중 붙잡혀, 연행도중에 탈출하여 승객(僧客)으로 수도하다가 죽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문헌 :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 〈朴成壽〉(daum 2010)
장진성 : 운강 의병부대의 장임참모 종사자 명단/ 웹문서 | 4달전, 2010년 5월 16일 (일)/ .... 沈章燮 : 본관은 청송이요 영천 사람이니 금란장(禁亂將)을 지냈다. 趙正熙 : 척후장(斥候將)을 지냈다. 張進聖 : 자(字)는 덕화(德化)요 본관은 울진(蔚珍)이니 용궁 사람으로 포장(砲將)을 지냈다. 劉秉先 : 원주 사람으로.../ ungang.go.kr(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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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우(張進瑀) : 1866(고종 3)-1945, 용궁면 산택리 산못 출신, 자는 여심(汝心), 호는 청운(淸雲), 본관은 울진, 영수(永秀)의 장자,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있고, 효성은 물론 애국심이 투철하였다. 장년(壯年)에 이르자 애국 애민의 장지(壯志)를 품고 널리 동지를 규합하고, 청소년 자손들에게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다. 을사조약(1905)이 강체(强締)되자, 그는 분연히 의병 운동에 호응하여 문경 의장 신태식(義將申泰植), 족친 장진성(族親張進聖) 등과 식량, 군자금(軍資金) 등을 제공하였으나 세가 부득하여 일제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한일합방(1910) 후 더욱 심해진 일제의 폭압(暴壓)에 통분(痛憤)한 그는 다시 각지를 돌며, 동지들과 구국 독립 운동에 힘쓰던 중 적신(賊臣)들의 독수(毒手)에 의하여 고종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자, 이를 규탄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상경하였는데, 때마침 3.1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우선 이에 참가하였다가 피체되어 4개월의 옥고(獄苦)를 겪었다. 그 후 1921년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밀령(密令)으로 군자금 모집 차 입국한 김찬규(金燦奎) 동지 그리고 이응수(李應洙), 장세명(張世明), 신태식(申泰植), 이명균(李明均), 한양리(韓良履) 동지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경상북도단(慶尙北道團)의 집사(執事)로 임명되었다. 1922년 6월 스스로 300원의 군자금을 내고, 동년 10월부터 동지들과 함께 경북 일원과 경남 창령(昌寧) 등지의 부호(富豪)들에게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명의(名義)의 군자금 제공 요청서와 이 요청에 불응할 경우에는 처단하겠다는 예경서(豫警書) 또는 사형선고서(死刑宣告書)를 우송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동년 12월 20일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獄苦)를 겪었다. 출옥(出獄) 후에도 지하 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쇠와 병고(病苦)에 시달리다가 해방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성목(性穆)도 역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로 갔으나 현재도 생사를 모르고 있다. 묘는 용궁면 산택리 화미동 기천(化美洞箕川) 뒷산 해좌(亥坐)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豫審終結決定書 1923.9.30 大邱地方法院, 高等警察要事 208 211쪽, 日帝警察極秘本, 東亞日報 1922.2.23, 2.30, 12.17, 12.20, 12.23, 12.30, 獨資 10卷 747 748 750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1卷, 義士淸雲先生張公記念碑除幕式典帖)
장진우(張進瑀) : 본관(本貫) 울진(蔚珍), 시대(時代) (1866-1945), 자(字) 여심(汝心), 호(號) 청운(淸雲)/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장진우(1866-1945)는 용궁면 산택리 산못(山澤) 마을 출신으로, 자는 여심(汝心), 호는 청운(淸雲), 본관은 울진, 영수(永秀)의 맏아들이다.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결백하고, 재주가 있어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효성은 물론 애국심이 투철하여 어릴 때에 이미 조선의 기울어짐을 탄식하였다. 커서는 농사일을 하면서 우국 애민의 뜻을 품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국의 위태로움을 얘기하고,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문경의 의병장 신태식(申泰植), 친척 장진성(張進聖) 등과 연락하여 식량과 독립 자금 등을 제공하는 한편 의병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관헌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더욱 민족의 쇠망을 개탄하여 여러 곳을 돌며 동지들과 구국 운동의 계획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께서 일본인들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상경하였는데, 때마침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이에 참가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 6월 김찬규(金燦奎), 한양리(韓良履)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그 간부가 되었다. 장진우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독립운동자금모집 사령서'와 항일 선전문 등을 경상도의 부자 집들에 발송하고, 장진우도 당시에 거액인 삼백 원의 독립 운동 자금을 제공함과 동시에 여러 곳을 돌면서 활약하다가 1922년 12월 20일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또 치루었다. 출옥 후에도 동지들을 찾아 지하 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해방되기 3개월 전인 1945년 5월 25일에 타계하였다. 무덤은 산택리 화미동 기천 뒷산에 있다. 장진우의 아들인 성목(性穆)도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으나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1971년 5월 21일에 세운 장진우기념비가 용궁초등학교에 있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장진우(張進瑀) : 생몰연대 : 1866. 7. 24 ∼ 1945. 7. 5/ 출 신 지 : 예천/ 훈 격 : 대통령표창 (93)/ 운동계열 : 국내항일 경북 예천 사람이다. 1920년 가을 신태식 ·이응수 ·김찬규 등은 만주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www.dalgu.net(daum 2010)
장진우 : 장진우(張進瑀) 간찰(1918년 11월 24일)/ 작성자 장진우(張進瑀)/ 작성일2010-08-05 15:27:47/ 내용보기 : 1866~1945. 울진인(蔚珍人). 자는 여심(汝心), 호는 청운(淸雲), 예천 산택(山澤)에서 살았다. 장한보(張漢輔)의 후손, 장영수(張永秀)의 아들이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신태식(申泰植), 장진성(張進聖) 등과 군자금 모금과 의병모집에 힘썼다. 1919년 김천 이명균(李明均), 상주 김재명(金在明) 등과 상경, 3·1운동에 동참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 의용단(義勇團) 집사에 임명되어 군자금 3백원을 출금하고 부호(富豪)들에게 군자금 요청서를 발부, 불응 시에는 사형선고를 우송하며 모금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daum 2010)
장진우 : 독립운동가 서한집/ 장진우(張進瑀) 간찰 (1918년 1월 24일) 1918년 1월 24일 장진우(張進瑀)가 목포의 권응희(權應僖)에게 보 낸 편지이다. 객지에 있는 상대와 주령(主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사는 곳에 독감(毒感)이.../ i815.or.kr(daum 2010)
장진우 : <독립유공 포상자 명단>-5/ 17년전, 1993년 8월 12일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 ...완주) ▲李弘珪(3.1운동.충남 공주.자.이만구.경기 성남) ▲林萬圭(3.1운동.경남 하동.자.임종기.경남 하동) ▲張進瑀(국내항일.경북 예천.증손.장석대.경북 예천) ▲全達彬(국내항일.평북 선천.손.전태형.서울 성북) ▲田泰萬...(daum 2010)
장진우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慶尙南北道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되/ 孫聖雲|許達|金燦奎|金供基|金敦熙|徐相業|嚴柱璉|張進瑀|李萬寧|金會文|金龍煥|孫聖雲|金東明|韓良復...金洪錫|梁漢締|詐鐘|申泰植|張世明|李明均|嚴柱璉|金龍煥|張進瑀|鄭源英|金在明|詐達|申鉉式|金炳祿...(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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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동부초등학교, 한자 자격증 대거 합격...축하합니다.
예천동부초등학교(醴泉東部初等, 漢字 資格證 大擧 合格 : 3學年 박성수 學生 2級 資格證 取得) [記事] : 예천동부초등학교(교장 이재일)에는 2011년 9월 27일 두터운 한자 자격증 상장이 많이 도착하였다. 방과후 한자교실에서 공부한 학생들 중 이번에 응시한 학생들에게 나온 한자 자격증이었다. 한자 시험은 제52회 대한민국한자급수자격검정시험(한국어문회)이며 3학년 박성수 학생은 성인도 취득하기 힘들다고 하는 2급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그 외 5급 3명, 7급 8명, 8급 1명, 준 3급 3명, 준 4급 1명이다. 방과후 한자교실과 연계하여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였고, 담당 선생님들이 여름 내 땀흘려 지도하신 결과라고 모두 기뻐하였다.(醴泉뉴스 2011년 0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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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