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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706:전삼달-전상근(1)(附예천방문781)
작성자장병창 @ 2011.10.17 06:19:50

   예천의 자랑(2706) : 전삼달-전상근(1)(附 예천방문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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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달(全三達) : 1570(선조 3)-1632(인조 10),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는 군형(君炯), 호는 영고정(潁皐亭), 본관은 용궁, 몽룡(夢龍)의 아들, 임진왜란(1592) 때 창의하여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고, 1599년(선조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627년(인조 5) 2월 29일 경상 좌수사로서 병사(兵士)를 뽑아 군량을 운송하는 일 때문에 왜인을 응접하는 물건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장계를 하였고,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거쳐 1628년(인조 6) 8월 16일에 황해도 병마사(黃海道兵馬使)로서 인견 중 성의 수비에 관한 하교를 받고, 표피(豹皮), 궁전(弓箭), 납약(臘藥), 호초(胡椒) 등을 하사받았다.  황해 병마사,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竺山勝覽 1934, 仁祖實錄)

 

  전삼달(全三達) : 시대(時代) 1570-1633/ 자(字) 군형(君炯), 호(號) 영고정(潁皐亭)/ 이력(履歷)/ 성명 전삼달(全三達), 시대 1570-1633, 비고 장군/ 설명 장군의 자는 군형(君炯)이요. 호는 영고정(潁皐亭)이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전몽룡(全夢龍) 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치밀하고 조직적인 성품은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구국의 충정으로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사천(沙川) 전투와 영천복성전투, 경주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고 159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때부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성은 크게 인정되어 1611년 북방경비책으로 선발되어 심양에 급파되어 바위성을 구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변방을 튼튼하게 하였다. 1616년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고, 1625년에는 영흥진병마첨절제사(永興鎭兵馬僉節制使)가 되어 가는 곳 마다 군사를 모집하여 정예군으로 훈련시켰으며 군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굳건히 했다. 이렇듯 장군은 최일선을 방어하는 야전군의 책임자로서 또는 지혜를 겸비한 군사 전략가로서 당시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또한 장군은 김해도호부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등을 재임하는 동안 지방민정에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daum 2010)  

 

  전삼달 : 영천복성 동고록/ Daum 블로그 | 2년전, 2008년 2월 2일/ ; 地域 姓 名 人員數 備 考 永川 金潤國.鄭世雅.曺 城.郭懷瑾.全三益.鄭千里 鄭大任.鄭 湛.曺希益.崔仁濟.全三達.辛俊龍 12 金潤國 永川郡守 新寧 韓 倜.權應銖.朴應琪.權應銓.權應心.李蘊秀 丁應拒.權應平.權應信 9 韓 倜.../ blog.daum.net/| 우재(daum 2010)

 

  전삼달 :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유래/ Daum 블로그 | 2년전, 2008년 5월 13일/ ...南이라 "水南"이라 했다. 현재 용궁 전씨(龍宮 全氏)가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에 功이 많은 전삼달(全三達) 장군의 자손들이다. 장군의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섬촌(島村)은 섬 모양으로 생겼으며 청석비리(靑石碑里.../ blog.daum.net/| 새벽// 내 고향~~소식(연혁)/ Daum 카페 | 7달전, 2010년 3월 2일 (화)(daum 2010)

 

  전삼달 : 姓氏의 故鄕龍宮全氏 [용궁전씨]/ Daum 카페 | 지난달, 2010년 9월 2일 (목)/ 그리고 全命三(전명삼)은 縣監(현감)을 지내면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百姓(백성)들의 民心(민심)을 샀고, 全三達(전 삼달)은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나라에 功(공)을 많이 세웠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全光濟.../ cafe.daum.net/| 블루넷 쉼터(daum 2010)

 

  전삼달 : 慶州壬辰倡義士 諱 鄭仁獻 (휘 정인헌) (16代)/ Daum 카페 | 3달전, 2010년 7월 17일 (토)/ ...전장을 누볐고 동년 선조 28년(1596년) 4월 형산강 전투에서는 의병대장 권응수 진영의 김태허(金太虛) 전삼달(全三達) 등과 좌우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하는 승첩을 거두었다. 동년 3월 3일 제1차 팔공산회맹과 9월 28일 2차.../ cafe.daum.net/ylyc/dNCb/| 영일정씨영천화수회// 정인헌(鄭仁獻)/ Daum 카페 | 6달전, 2010년 4월 4일 (일)(daum 2010)

 

  전삼달 : 고향 마을 이름의 유래/ Daum 카페 | 4달전, 2010년 6월 18일 (금)/ ..."水南"이라 했다. 현재 용궁 전씨(龍宮 全氏)가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에 공(功)이 많은 전삼달(全三達) 장군의 자손들이다. 가야(佳野) ⇒ 아름다울 가(佳), 들 야(野) 가야(佳野)는 약 400여년 전 유씨(兪氏)인 농부가.../ cafe.daum.net/| 금남 23회(daum 2010)

 

  전삼달 : 성씨검색/ 웹문서 | 4달전, 2010년 6월 27일 (일)/ ...제향되고 있다. 그리고 전명삼(全命三)은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샀고, 전삼달(全三達)은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웠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전광제(全光濟, 1697 丁丑生.../ rootsinfo.co.kr// 용궁전씨(龍宮全氏) ::/ Daum 카페 | 4달전, 2010년 6월 12일 (토)// 용궁 전씨 - 시조/ Daum 카페 | 작년, 2009년 2월 18일(daum 2010)

 

  전삼달 : 임진,정유 왜란시 全氏 공신/ Daum 카페 | 6달전, 2010년 4월 8일 (목)/ 主簿 全暹 2. 洧林衛 全凡守 3.私奴 全作只 4.正 全夢禎 5.守門將 全應良 6. 司僕 全山 7.校生 全三益 8.部將 全三達 9.羽林衛 全告伊山 10 守門將 全仁元 11守門將 全霽 12 僉正 全繼忠 13.副正 全大福 14.水軍 全必連 15.守門.../ cafe.daum.net/| 천안전씨 대종회(daum 2010)

 

  전삼달 : 팔공산회맹록(八公山會盟錄)3-1/ Daum 카페 | 작년, 2009년 10월 21일/ 조덕기(曺德驥), 전삼성(全三省), 정세아(鄭世雅), 조일기(曺逸驥), 정안번(鄭安藩), 정영탁(鄭永鐸), 전삼달(全三達), 서도립(徐道立); 예안(禮安) 손흥효(孫興孝), 구찬조(具贊祚), 금경(琴璟), 김기(金圻), 금응각(琴應角.../ cafe.daum.net/ijokbo/Nenu/| 족보나라 꿈해몽전서(daum 2010)

 

  전삼달 :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 - 창의록6/ Daum 카페 | 작년, 2009년 10월 21일/ 鄭世雅 和叔 乙未 湖? 永川 鳴山 鄭安藩 寧甫 甲戌 永川 鄭守藩 貞甫 庚辰 永川 全三益 君輔 丙寅 永川 全三達 君烱 庚午 永川 全三省 君勉 癸酉 西岡 永川 趙時彦 永川 六? 曺德驥 彦成 丁酉 永川 蒼水 曺俊驥 汝集 丁未.../ cafe.daum.net/ijokbo/| 족보나라 꿈해몽전서(daum 2010)

 

  전삼달 :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冊/ 최효식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 2004-09-30/ 책본문 : 후손, 증 參判 선무원종공신 幼學 鄭三戒, 판서 鄭光厚 후손, 선무원종공신 幼學 全三達, 全三樂의 동생 선무원종공신, 兵使, 선조상사선유가 있었음, 화왕산 동고록 등재 鄭四震,.../ 191페이지(daum 2010)

 

  전삼달 :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 冊/ 최효식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 2003-09-30/ 책본문 : ..., 증 參判 선무원종공신 幼學 鄭三戒, 판서 鄭光厚 후손, 선무원종공신 幼學 全三達, 全三樂의 동생 선무원종공신, 兵使, 선조상사선유가 있었음, 화왕산 동고록 등재 鄭四震, 판서 .../ 219페이지(daum 2010)

 

  전삼달 : 한국고전문학작가론/ 冊/ 민족문학사연구소 지음| 소명(김호영) 펴냄 | 1998-08-31/ 책본문 : ...것이다. 문집에는 장현광(張顯光), 정연길(鄭延吉), 최기남(崔起南), 전삼달(全三達), 정홍업(鄭弘業), 이명원(李明遠) 등과의 교유를 보여주는 한시들이 있기는 하나 그 수가.../ 298페이지(daum 2010)

 

  전삼달 : 여선시문학논고/ 冊/ 김창규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 2001-01-31/ 책본문 : 李三省. 官은 提督. 慶州月城古池에서 會遊할 때, 酬唱한 漢詩이외에는 未詳이다.○ 全三達(字君炯, 1570∼1633). 號는 潁樂亭. 龍宮人이다. 官은 黃海道兵馬節度使였고, 문집이 .../ 130페이지(daum 2010)

 

  전삼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崔山立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朴而立|李惟吉|柳|黃時|鄭百亨|朴垓|韓謙|趙炯|金秀南|柳孝健|朴|申瑋|琴是調|南|孫必大|權以聞|李蕃|沈|全三達|姜弘勣|朴|朴廷琦|李偉國|禹甸|李耆|金瑨|池連沂|康在山|李|李沇|申俊|鄭尙古|李碩基|朴炡|兪伯曾...(daum 2010)

 

  전삼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柳舜懋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柳舜懋|金鎭|全三達|李必榮|梁貴生|孫必大|南宮|李|閔光勛|李|崔茂|沈之源|趙錫胤|金|李公益|金忠淹|宋國澤|郭龍伯|朴潢|張喚|李景曾|柳琳|柳景紹|李景仁|趙公潚(daum 2010)

 

  전삼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光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鄭百昌|李昭漢|李景奭|金光炫|柳孝健|金卨|柳|鄭沁|宋錫胤|朴敦復|琴是調|趙|宋象仁|康復誠|趙璞|尹絅|姜絪|全三達|趙緯韓|閔馨男|李廷|卞三近|李義傳|李眞彦|金鎭|朴霽|金浚|李靖|尹就之|陳誠一|洪孝孫|辛喜業...(daum 2010)

 

  전삼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安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安倜|朴炡|申達道|沈之源|沈東龜|吳達天|全三達|吳端|李耆|金宗一|李崇元|李眞卿(daum 2010)

 

  전삼달 [專門資料] : [간행물] 29일(경진)/ 전삼달(全三達)|귤지정, 부산(釜山) 첨사(僉使) |상사|종사/ 강홍중(姜弘重)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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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근(全相根) : 1927- , 지보면 지보리 출신, 본관은 용궁, 옥영(沃永)의 5자, 성천(聖天)의 넷째 동생, 지보초등, 경기중, 경기고 졸업, 51년 뉴멕시코대 화학공학과 수료, 54년 미국 Purdue대 화공과 졸업, 54년 상공부 촉탁, 54년 문경시멘트공장장, 57년 충주비료공장 생산부장, 61년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 67년 과학기술처 연구조정관, 동 종합기획실장, 국립과학관장, 76년 한국원자력연구소 감사(監事), 80년 (사단) 새사람선교회 회장, 81년 한국에너지연구소 감사, 81년 과학기술번역협(科學技術飜譯協) 회장, 82년 삼양식품(三養食品, 株) 연구소장, 83년 (사단)과우회(科友會) 부회장, 87년 동 회장, 대경주택(大慶住宅) 사장, 보연사(保硏社) 사장, 88년 세종로타리 회원, 91년 청도주택사 회장, 엘시종합건설(주) 회장(현), 삼건복지재단 이사장이다.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이 있다. 부인 윤남경(尹男慶, 1928- ) 여사는 한국 문단(文壇)의 거성(巨星)으로도 활약하고 있다.(慶北年鑑 1975, 嶺友俱樂部 99號 1982, 每日年鑑 1985 1986 1987 1988, 知保面誌 1987, 每日名鑑 1996 1999 2001,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다음 百科事典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전상근(大韓民國의 첫 科學技術政策을 立案한 ‘全相根’) [記事] : “한국에 전쟁이 터졌다”는 급박하고 참혹한 뉴스를 시시각각으로 들으면서도, 가족들의 안녕이나 빌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간 속에서 미국 뉴멕시코대학에 유학 온 전상근(83,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 밖에 없었다. 1949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유학 온지 1년도 채 안된 때의 일이었다.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여, 조국의 재건을 돕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는 지도교수의 말씀을 되새기며 퍼듀대학 화학과로 옮겨 학업에 몰두했다. 유학 길 4년여, 각고의 졸업장을 들고 귀국한 1954년 봄,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다. 한번 본 일조차 없는 안동혁 상공부장관을 찾아가서 이력서를 내밀고 “조국에 도움 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당돌하게 청원하여 상공부 화학과에 취직, 국가공무원의 길로 들어선 그 앞에 이번엔 5.16 군사혁명이 터졌다.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첫 만남에서 ‘국가 기술진흥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 전 이사장을 찾아서 ‘과학기술계의 신화’로 회자되고 있는 ‘1960년대 역사의 진실’을 들어 보았다. 그는 지금, 복지재단을 세워 봉사에 열중하는 한편, 지난 얘기들을 담은 ‘한국의 과학기술개발(삶과꿈· 2010)’을 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기술진흥계획’ 보완 지시 :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술진흥계획’ 수립을 직접 지시받으셨나요?  =1962년 1월 초순,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 석조전에 있었던 회의실에 6개월 전에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혁명주체들과 군복의 장관들이 꽉 들어찼어요. 그렇게 많은 별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지요. 잠시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들어섰고 민간인 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이 새해 업무보고를 시작했어요. 보고내용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었지요. 1시간 정도 브리핑이 끝난 후, 담배를 꺼내 한 모금 피워 문 박 의장이 “그런데 기술 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서 있는지?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신 거예요. 그 질문 한 마디, 그 혜안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준 과학기술 개발의 기폭제가 된 거예요. 그 자리에 있던 계획을 만든 공무원과 참여한 경제전문가, 경제학 교수들은 당황하는 표정이었지요. ‘쟁이’를 천시하는 그들만의 풍조 탓에, 기술적 요인과 기술인력 양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빼버렸던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 송정범 차관이 “각하, 기술수급에 대해서는 별도계획을 수립하여 보고 올리겠습니다”라고 했고, 박 의장이 머리를 끄덕여서 업무보고를 무사히 마쳤지요. 그리고 그 ‘기술수급 계획’은 기획원 기술관리 과장이던 내가 만들게 되었지요.

 

  ♦그 당시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할 만한 자료가 있었나요?  =정부 어디에도 기술수급에 관한 자료는 없었어요. 그래서 주한 미국원조기관인 USOM의 윌리엄 윔즈 박사에 부탁해서 어렵게 미국과 일본의 자료를 얻어 왔어요. 일본과는 수교가 안 돼 있었어요. 이 자료를 참고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국가 과학기술 진흥계획’을 수립했지요. 이 작업은 과기처 차관을 지낸 이응선, 조경목, KIST처장을 지낸 도정섭 등 20대 젊은 공무원들이 참여하여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경제관료인 차관이 “과학이란 용어는 경제개발계획과는 별로 관련 없는 학문적인 분야 같으니 빼라”는 거예요. 그래서 표제는 ‘제1차 기술진흥5개년계획’이라 붙이고 그 내용과 범위에서 과학과 기술을 모두 다뤘지요. 그때, 사상 최초로 민간과 학계 대표 40명으로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계획수립에 참여시켰어요. 정인욱 강원산업 대표, 조홍제 효성물산 대표, 전택보 천우사 대표, 안동혁 한양대 교수, 김동일 서울공대 교수, 현신규 서울농대 교수, 이채호 국립중앙공업연구소장, 정남규 농촌진흥원장 등이지요.

 

  ♦기술진흥계획의 뼈대는?  =국민들이 사농공상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근대적, 과학적인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게 하는 것과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을 선진공업국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지요. 그 당시, 목표 달성은 까마득한 얘기라고 했어요. 골격은 다섯 가지였지요. 첫째는 과학자, 기술자, 기능인 등 인력개발인데 수요를 전망하고 문교부와 구체적인 양성 계획을 수립했고, 둘째, 상공부와 협의한 선진국 산업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활용, 셋째, 해외 과학 두뇌 유치와 국내 과학집단의 형성, 넷째, 기술기반 구축을 위한 제도, 기구의 정비, 다섯째, 과학풍토 조성이었지요. 4개월 반 작업 끝에 1962년 5월에 송요찬 내각수반이 주재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공표되었지요. 신문에서는 1면 톱기사로, 방송은 빅뉴스로 보도해 주었고 학계와 과학기술계에선 극찬했지요.

  KIST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깜짝 선물 : ♦한국과학기술원(KIST) 설립에 관해서는?  = 그 얘기도 길어요. 1965년 5월 19일자 조간신문에 워싱턴발 외신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대통령의 정상회담 기사가 실렸는데, 과학기술 담당국장인 나도 모르는 얘기가 실린 거예요. 내용은 “양국 대통령은 교사로써의 과거경력을 상호 상기하고~”로 시작했는데 “한국에 생산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한국의 과학 및 교육계 지도자들과 검토하기 위하여 존슨 미대통령의 과학고문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는 거예요. 그 날 아침에 장기영 부총리에게 불려갔는데, 부총리도, 정부 내의 누구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거예요. 훗날, 방한한 도널드 호닉 존슨 대통령 과학고문이 “존슨 대통령은 36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월남전의 명예로운 승리’를 국민과 약속했고 20만 대군을 파병했으나 승전기미는 안 보이고 반전운동이 확산하므로, 1950년 한국전쟁의 교훈을 되살려 이를 만회 해보려고 박 대통령을 초청한 것이다. 박 대통령 방미 며칠 전, 존슨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박 대통령에 줄 선물’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문하여 호닉이 ‘한국은 가난하고 부존자원도 없지만, 과학적으로 우수한 두뇌 재원은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이 인재를 활용, 도입기술을 자체 소화할 능력을 갖추게 하면 된다. 미국에 와 있는 한국 과학자들이 귀국하여 일할 수 있는 자리, 산업기술을 연구 개발할 과학기술연구소를 지어주자’고 제안했고 존슨 대통령이 흡족해 했다. 존슨은 정상회담 때까지 함구했다가 그 자리에서 깜짝 선물한 것이다”라고 전해줘서 전모가 밝혀졌지요.

 

  ♦그 당시 정부에선 국립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계획 같은 것은 없었나요?  =전국에 72개 연구기관이 있었지만, 연구 분위기가 몹시 취약해서 연구원은 1천750명, 전체 연간 예산도 12억 원 정도였어요. 대학부설은 명칭뿐이었고, 국공립은 검사, 조사, 분석으로 정부의 행정지원 수준이었어요. 원자력원만 제 구실했지요. 민간연구소 중에선 최형섭 박사가 이끄는 금속연료종합연구소가 독보적이었구요. 1962년 말께, 국립공업연구소를 민간 법인 형태로 개편, 확장하여 종합과학기술연구소로 만드는 안을 마련했었지만 예산이 없어 미루다가, 1964년 11월에 원자력원과 금속연료종합연구소, 국립공업연구소를 통합하여 종합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드는 것을 검토했고, 박충훈 상공장관과 박태준 대한중석사장 겸 금속연료연구소 이사장과도 합의했어요. 신설 종합과학기술연구소는 상공부가 아닌, 기획원 산하에 두기로 했구요. 그렇게 추진하고 있을 때, KIST 설립이 튀어나온 거예요.

 

  오늘 날 우리 과학기술은 ‘박 대통령의 집념의 결실’ : ♦KIST 건설 때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이 지대했다면서요?  =1965년 6월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 일개 부처의 국장인 내게 “대통령께서 과학기술연구소 창설에 대해 궁금해 하시니 보고하시오”라고 직접 전화했더라고요. 황급히 청와대로 달려갔는데 장기영 부총리, 박충훈 상공장관까지 대기하고 있었어요. 내가 “미국 측에서 건설비와 연구기자재 등 500만 달러를 기증받고 우리는 부지를 제공하고 건설을 담당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여 연구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는 요지의 설명을 마치자 박대통령이 흡족해 하면서 “전 국장, 사업추진에 어려움이 생기면 내게 직접 보고하시오”그리고 “이 사업은 내가 직접 돌봐줘야 하겠소”라고 이 비서실장과 장 부총리에게 말씀하셨지요. 1966년 봄에 부지를 결정할 때도 “홍릉 임업시험장이 최적지인데, 협의가 잘 안 됩니다”라고 보고 했더니, 농림장관 등 관계자를 현장으로 오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임업시험장 한쪽 부지를 떼어서 결정해 주셨어요. 완공 후, 박대통령은 “세종대왕께서 학자들을 집현전에 모아 한글을 만드셨듯이, 우리도 이 연구소에 유능한 과학자들을 모아 기술을 개발해야겠소”라고 말씀하셨어요. ‘과학기술 집현전’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거지요. 그 후, 1965년 7월부터 몇 달간, 호닉 일행과 최규남 준비위원장, 장기영 부총리,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 박충훈 상공장관, 윤천주 문교장관, 번스틴 유솜처장. 슬로우터 바텔연구소 부소장, 김학렬 기획원차관 등이 참석하는 설립준비회의를 몇 차례 했지요. 명칭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 하고, 국립이 아닌 민법에 의한 법인 형태로 하고, 연구시스템은 바텔연구소에서 수탁, 공동 연구하는 형태로 하고 바텔이 175만5천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고, 한편으론 해외 과학자 유치에 나섰고,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가 선임되었고요.

 

  ♦옆에서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관한 철학을 느끼셨겠네요?  =1966년 2월, KIST 법인설립 때, “후진국 일수록, 국가가 발전하려면, 통치자가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세계적 과학기술정책 학자인 스티븐 데디에의 말을 인용, 박 대통령을 이사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어요. 이에 ‘개인자격의 설립자’로서 사재 100만원을 희사하셨지요. 우리나라가 건국 60주년 여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고, 그 저력은 과학기술의 괄목할 만한 신장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오늘날 우리의 과학기술이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의 결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2차 기술진흥5개년계획 때 과기처 신설 : ♦과학기술처 설립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기술진흥 5개년계획이 발표된 후, 과학기술행정 전담기구의 설립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과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가 날아들자, 지금의 총리실인 내각수반실에서 검토 지시가 내려왔고 그 건 결국 내게 돌아왔지요. 그래서 과학기술 전담부서의 주요 업무 범위는 기본계획 수립과 종합조정, 인력 개발, 연구 개발, 국제기술협력 등 4개 부문으로 하되, 1차 5개년 계획기간에는 국단위로 경제기획원에 예속시키고, 제2차 기간에 국무위원을 장으로 하는 독립부처의 설치를 고려하는 안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정책으로 채택되어 곧바로 경제기획원에 기술관리국이 생겼지요. 제가 국장이 되었고요. 그 후, 제2차 계획기간인 1967년 초, 박정희 대통령이 김원태 무임소장관에게 과학기술행정기구 설치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대요. 김 장관은 내게 검토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래서 이응선, 문영철, 송재휘 등 기술관리국 과장들과 만들었던 ‘과학기술원 설립(안)’을 손질하여 1967년 2월에 김 무임소장관에게 보고했지요. 본부에 기획관리실, 연구조정실, 진흥국, 국제협력국, 산하에 원자력청, 중앙관상대, 국립지질조사소를 두는 체제였어요. 그 당시 정부 내 과학기술 관련기구는 대통령의 경제과학 자문기구인 경제과학심의회의에  최규남, 이종진, 김기형, 신현확 등이 장관급 위원으로 있었고요. 기획원 기술관리국이 과학기술개발계획, 인력개발계획. 국제기술협력을 담당할 뿐이었어요. 1959년에 창설된 원자력원이 연구소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요. 총무처로 넘어간 ‘과학기술원 설립(안)’은 명칭이 ‘과학기술처’로 바뀌었을 뿐,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7년 3월 30일자로 공표됐지요. 그렇게 해서 4월 21일 과학기술처가 탄생한 거예요. 김기형 장관, 이재철 차관이 초대로 취임했지요.

 

  ♦과기처의 1급 연구조정관으로 가셨지요?  =지금 조선일보 사옥 옆에 있었던 원자력원 건물에서 개청했지요. 공무원 15년 했는데, 과학기술 인력개발 정책에 몰두했어요. 고려대 윤병욱 기업경영연구소장과 반년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인적자원’을 조사해서 과학자, 기술자, 기술인, 기능인 29만9천414명을 확인했어요. 최초의 과학기술인 통계예요. 그리고 이봉인 대한기술총협회장, 김동일 화학회장, 김두종 의학협회장, 김노수 기계학회장, 김재근 조선학회장, 이균상 서울공대 학장 등 60년대 기라성 같은 과학기술자 40여명을 한자리에 모아서 ‘과학기술진흥관계법령 기초위원회’를 구성, 직업훈련법, 기술사법 등 과학기술진흥법령을 만들어 나갔지요.

 

  ♦1945년 광복, 미 군정, 정부수립 등 그 어려울 때, 미국유학은 어떻게 가셨나요?  =백만장자 독지가인 길버트 샴보우라는 미국인의 도움을 받았지요. 후진국 학생들을 미국에 불러들여 공부시켜 주었어요.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하던 내 형님(편집자 주 : :전성천 전 장관)이 천거해 주었지요. 1954년 봄, 퍼듀대학 화학공학과 졸업인데, ‘건국이래, 미국에서 4년제 대학 졸업하고 귀국한 첫 번째 유학생’이란 말 들었어요.

 

  ♦요즘엔 어떤 일에 몰두하시는지?  =제가 도움받은 샴보우 씨의 ‘샴’자와 제 성을 합친 삼전복지재단을 설립하여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청소년을 도와주는 일을 해요. 북한 청소년을 위해 결핵 약도 보내주고요. 아들이 경영하는 조그만 건설회사에 나가고 있어요. 정진익 고려대 과학기술대 객원교수(科學技術2.0 2010년 04월 14일(수)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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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781

 

  예천군민제전 2011(出鄕人ㆍ都市民 招請 歡迎 晩餐 行事 열려 : 15日 文化體育센터에서 열려) [記事] : 재경예천군민회, 출향인과 예천을 방문한 자매도시인 김윤주 군포시장, 자매단체장, 도시민을 비롯한 출향인 자매단체 환영만찬행사가 2011년 10월 15일 오후 4시 30분부터 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초청만찬에서는 예천의 따스한 고향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화합의 마당이 되었다.(醴泉뉴스 2011년 10월 15일)

 

  예천군민제전 2011(깊어가는 가을, 그윽한 茶香에 醉해 : 15日 醴泉 단샘 茶禮祭 열려) [記事] : 따뜻한 다향(茶香)이 그리워지는 계절을 맞아 제35회 예천문화제 일환인 ‘2011 예천 단샘 다례제’가 2011년 10월 15일 예천 한천체육공원 주행사장에서 열렸다. 예천다례원(원장 이재은)이 주관한 이번 다례제는 다례 의식과 찻자리 경연, 일본차 시연 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행사장은 찾은 관람객에게 전통 차(茶)의 향기와 다례(茶禮)의 진수를 선사했다. 이날 식전행사로 다례 의식인 단샘례와 개회식에 이어 성년례 시연, 예천다례회원과 룸비니유치원, 성락어린이집 원생 등 80명의 ‘우리 절’ 시연이 우아하게 펼쳐졌다. 특히 올해 첫 선을 보인 ‘아름다운 성년례’ 다도 시연은 성년을 맞은 남녀 16명이 입장을 시작으로 성년배례, 문명(問名), 시가축사(始加祝辭), 성년 선언, 성년자 배례, 차 마시는 의식, 큰 손님 덕담 등 성년식 다도 예법 전 과정이 연출되어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어 일본 설륜회 회원인 조윤숙 씨의 ‘일본 차’ 시연은 한국과 일본 다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높여 줬으며, 통기타 가수 김이난 씨의 공연이 펼쳐져 다도제의 흥취를 돋웠다. 2부에선 전국 20여개 차 단체팀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두리차 시연, 유치원 40여명의 다구명칭 퀴즈 맞추기, 아름다운 찻자리 시상, 대동놀이마당 등이 이어져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함께 나눴다.(醴泉뉴스 201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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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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