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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20) : 정광보-정광익-정광필(1)(附 예천검도관, 23일 검도 초등고학년부 도대회 단체전 우승...축하합니다/예천방문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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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보(鄭光輔) : 1457(세조 3)-1524(중종 19), 예천 출생, 본관은 동래, 직제학 사(賜)의 손자, 동래군 난종(東萊君蘭宗)의 아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형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음사로 와서 별제(瓦署別提), 주부(主簿), 첨정(僉正), 연산(連山) 현감, 평양 판관, 5군의 군수, 창원(昌原)과 연안(延安) 부사를 지냈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竺山勝覽 1934, 知保面誌 1987)
정광보 : (군포)운지 정광보(運之 鄭光輔) 묘·묘비-동래정씨- 총.묘(塚.墓)/ 2008/07/26 06:06/ http://roaltlf.blog.me/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1/ 정광보[鄭光輔, 세조 3년(1457)~중종 19년(1524)], 자는 운지(運之), 본관은 동래, 증조부는 정귀령(鄭龜齡), 조부는 정사(鄭賜),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맏아들이다. 외조부는 이지지(李知止), 배위는 대호군 이격(李格)의 따님 전의이씨이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한룡(漢龍), 둘째는 사룡(士龍, 대제학.공조판서), 셋째는 원룡(元龍), 넷째는 언룡(彦龍)이다. 딸 맏이는 이희업에게, 둘째는 박종상에게, 셋째는 이윤우에게, 넷째는 이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한룡의 아들은 순우(純祐)·순지(純祉)·순복(純福)·순호(純祜)이고, 언룡의 아들은 순하(純?)이다. 공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음보로 관직에 나가 공을 쌓아서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경관(京官)으로 첨정·통례원 봉례를 지냈으며, 외관(外官)으로는 각 고을 군수 외에 창원과 연안 두 곳의 부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은 정광보를 창원공이라 칭한다. [출처] (군포)운지 정광보(運之 鄭光輔) 묘·묘비-동래정씨-|작성자 개미실(daum 2010)
정광보(鄭光輔) : 본관(本貫) 동래(東萊), 자(字) 운지(雲之)/ 이력(履歷)/ 정광보(鄭光輔) :조선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연산군(燕山君) 때 직간(直諫)을 하다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으나 중종(中宗) 때 다시 부사(府使)에 올랐다./ 정광보(鄭光輔) 1457년∼1524. 15世. : 자(字)는 운지(雲之) 이조판서 난종(吏曹判書 蘭宗)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연산군(燕山君) 때 직간(直諫)을 하다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으나 중종 때 부사(府使)에 올랐다.(daum 2010)
정광보 : 문헌(文獻)/ 동래(東來) 정씨(鄭氏) 역대 주요 인물(人物)/ [음사인명(蔭仕人名)]/ 정광보(鄭光輔) (남대부사(南臺府使))(daum 2010)
정광보 : (군포)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묘·신도비-동래정씨-/ 네이버 블로그 | 2년전, 2008년 7월 26일/ ...세-③)정난종(鄭蘭宗) : 이조판서, 참찬, 동래군, 익혜공, 아들 - ①광보(光輔) ②광필(光弼) ●(15세-①)정광보(鄭光輔) (16세) 정사룡(鄭士龍) : 대제학 ●(15세-②) 정광필(鄭光弼) : 대제학 , 영의정, 문익공, ①노겸(勞謙) ②휘겸.../ blog.naver.com/roaltlf/| 개미실사랑방(daum 2010)
정광보 : 남양주서화열전(書畵列傳)8. 정사룡(鄭士龍)/ 남양주타임즈 | 8달전, 2010년 2월 4일 (목)/ 호는 호음(湖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고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다. 1509년(중종 4)에 생원이 되고, 이어 별시 문과에 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1.../ http://www.wa-bu.net/| 미디어다음(daum 2010)
정광보 :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Daum 블로그 | 4달전, 2010년 6월 24일 (목)/ ...중에 평(平)에 합당하므로 이곳에 기운이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묘 바로 뒤에는 큰 아들 정광보(鄭光輔) 공의 묘가 있고 그 위로 둘째 아들 정광필(鄭光弼) 공의 묘가 나란히 삼부자(三父子)가 역장으로 자리잡고.../ blog.daum.net/fungsu_jiry/| 민중원//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Daum 카페 | 지난달, 2010년 9월 15일 (수)(daum 2010)
정광보 : 정기원(鄭期遠)/ Daum 지식 | 작년, 2009년 5월 16일/ ...(鄭象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담양군 이거의 증손 영천부정 이경(李璟)의 딸이다. 정광보(鄭光輔)의 후손. 처부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심전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주서.../ k.daum.net/qna/openknowledge/| 답변수: 1(daum 2010)
정광보 :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정란/ Daum 블로그 | 5달전, 2010년 5월 6일 (목)/ ...남겼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으로,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 때까.../ blog.daum.net/| 연산군//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정란/ Daum 카페 | 5달전, 2010년 5월 6일 (목)(daum 2010)
정광보 : 시도기념물 115호(경기)/ Daum 카페 | 지난달, 2010년 9월 25일 (토)/ 군포시 속달동 산3 조선 전기의 문신 허백당(虛白堂) 정란종(鄭蘭宗)(1433∼1489) 선생과 그의 두 아들 정광보(鄭光輔)(1457∼1524), 정광필(鄭光弼)(1462∼1538)의 묘지이다. 정란종(鄭蘭宗)은 본관이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cafe.daum.net/jeonchon42/| 전촌42회(daum 2010)
정광보 : 부모의 꿈/ 네이버 블로그 | 4달전, 2010년 6월 12일 (토)/ (鄭蘭宗·1433~1489)이다. 강희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정난종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정광보(鄭光輔), 둘째가 정광필(鄭光弼)이다. 국왕의 보필(輔弼)을 지상목표로 생각했던 정난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세종에서.../ blog.naver.com(daum // 모든 사람의 이름엔 부모의 꿈이...(퍼온 글)/ Daum 블로그 | 2년전, 2008년 7월 10일// 이름에 얽인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Daum 카페 | 6달전, 2010년 4월 18일 (일)(daum 2010)
정광보 : :::내고장 화순:::/ 웹문서 | 3달전, 2010년 7월 14일 (수)/ 송세림. 김 甲申...... 臺諫.啓前事.憲府又啓.奉常寺僉正李孝彦.心術凶猾.亦不謹於國事.請不齒仕版. 錦山郡守鄭光輔.性本貧酷.不可任字牧之責寶城郡守張漢功.性本邪○.虐民以事權要.眞寶 縣賢監韓成.重斂病民.請竝速罷.綾城縣令宋世.../ www.hwasun.go.kr(daum 2010)
정광보 : 조선의 프로페셔널/ e-Book/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04.02/ 책본문 : 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이다. 정씨 가문은 현종조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1605~1678) 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이 있었다. 증조부.../ 29페이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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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익(鄭光翼) : 호명면 금릉리 금릉(金陵) 사람, 본관은 동래, 직제학 사(賜)의 손자, 도사 난수(蘭秀)의 3자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창덕궁(昌德宮)의 수직부장(守直部將)을 거쳐 1516년(중종 11) 7월 22일 흥덕(興德) 현감을 이임하였다. 1517년(중종 12) 11월 12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이임하였고, 1524년(중종 19) 8월 29일 고령(高靈) 현감을 이임하였다.(中宗實錄, 醴泉郡誌 1939,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6, 竺山勝覽 1934, 知保面誌 1987)
정광익 : 정동현(鄭東顯)/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3달전, 2010년 7월 26일 (월)/ 합격연령 30세 본관 동래(東萊)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 전력 한량(閑良) [가족사항] [부] 성명 : 정광익(鄭光翼) 관직 : 부사과(副司果) [출전] 〈왕세자책봉경용호방(王世子冊封慶龍虎榜)〉 수정일 수정내역 2008-12-31 〈왕세.../ people.aks.ac.kr(daum 2010)
정광익 [專門資料] : 己丑十一月十七日未時, 上御集慶堂。/ 한국학자료 | 集慶堂|水原|仁慶宮|長興|仁慶宮|淸風溪|三淸洞|道峯|三角|平壤|慶州|京, 金尙喆|具允明|蔡濟恭|韓德厚|閔膺世|兪漢謹|許|李以楷|鄭允協|慶絢|吳道烱[吳道炯]|鄭允說|鄭光翼|尙喆|尙喆|尙喆|尙喆|尙喆|尙喆||以楷.../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광익 [專門資料] : 己丑十月初一日午時, 上御集慶堂。藥/ 한국학자료 | 集慶堂|京|京, 問答|問答|問答, 金陽澤|元仁孫|蔡濟恭|吳鼎源|韓光近|洪樂恒|許|李以楷|鄭允協|慶絢|吳道烱[吳道炯]|鄭光翼|玄處明|許溫|陽澤||以楷|陽澤|陽澤|陽澤||陽澤|仁孫|濟恭|||陽澤|徐浩修|李秉鼎|李德誠.../ http://ref.daum.net/item/ |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광익 [專門資料] : 有政 吏曹參判 閔應植 兵曹判書 尹滋承 進/ Daum 전문자료 | 閔應植|尹滋承|洪澈周|姜文馨|趙濟華|尹致聖|尹秉鼎|李載完|徐鶴淳|李根命|林翰洙|李亮信|洪謹周|閔應植|安佑默|金秉周|吳永學|李重七|金在敦|鄭光翼|鄭海弼|朴度陽|趙秉允|劉秉濟|林元相|在敦/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광익 : 송여익 묘비(宋汝翼 墓碑)/ 웹문서 | 7달전, 2010년 3월 2일 (화)/ 992 첨부 등록된 첨부파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찬 자 : 鄭光弼 서 자 : 宋麟壽 규 모 : 전체높이 171cm, 비신 높이 89cm, 비신 폭 49.5cm, 비신 두께 11cm 군의 이름은 여익(汝翼)이고 자는 원량(元亮)이고 성은 송(宋)씨니 .../ museum.metro.daejeon.kr(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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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필(鄭光弼) : 1462(세조 8)-1538(중종 33),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천(守天),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본관은 동래, 참찬 난종(參贊蘭宗)의 2자, 어렸을 때는 유난히 병이 많은 허약 체질이었다. 성장하여서는 특별히 잘 나고,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어려서 그의 큰 고모(姑母)한테서 글을 배웠는데, 자질구레한 글자의 뜻보다는 대강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고모가 스스로 그가 크게 될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자손들을 각별히 부탁하였다. 기국(器局)이 있고, 응접(應接)을 잘 하였는데, 말과 모습이 으젓하고, 경위(經緯)가 매우 분명하였다. 1492년(성종 23) 31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동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처음에는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 등 작은 벼슬을 낮게 여기지 않고 직책을 다하기를 더욱 힘쓰니, 좌의정 이극균(左議政李克均)이 한번 보고 정승(政丞)될 그릇으로 기대했다. 이 때 극균(克均)이 <성종실록(成宗實錄)> 총재관(總裁官)이 되었는데, 그를 뽑아 도청(都廳)을 삼고 편집하는 일을 맡겼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496.8.11),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1496.11.18), 검토관(檢討官),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14098.7.1), 동 교리(校理, 1498.11.8, 1499.5.17), 시독관(侍讀官),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1501.11.25)이 되었으나, 1502년(연산군 8) 1월 5일에 이문(吏文)을 정시(庭試)에서 제술(製述)하지 않은 죄로써 사헌부에서 국문 당하고, 태형(笞刑) 50대를 맞고 해임되어 서반 별직(西班別職)에 서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파평부원군 윤필상(坡平府院君尹弼商), 영의정 한치형(領議政韓致亨), 좌의정 성준(左議政成俊), 우의정 이극균(右議政李克均)이 왕에게 아뢰기를, "정광필은 정시(庭試)보는 날 숙부 난손(叔父蘭孫)의 아내와 숙부 난무(叔父蘭茂)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대궐에 나왔는데도 능히 제술(製述)하지 못했던 것이니, 다른 사람들의 집에 있으면서 제술하지 않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문종(文宗) 때에 하위지(河緯地)가 정시(庭試)에 들어왔으나 형 강지(綱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한 제술하지 않았는데, 뒷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옳게 여겼습니다. 광필(光弼)은 글을 잘하는 선비이므로 국가에서 마침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臣) 등이 그 사정을 이와 같이 들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전교하기를, "광필은 서반(西班)으로 보내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후 홍문관 부제학 겸 참찬관(參贊官), 이조 참의(吏曹參議, 1503.11.22, 1504.1.17)를 지냈다. 그러나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때 연산군을 극간(極諫)하다가 장(杖) 100을 맞고(1504.6.17) 아산(牙山)으로 귀양을 갔다. 이 때에 법령이 심히 엄하여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비를 들고 관문(官門) 앞을 쓸고 지키게 되었으나 조금도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으나 오직 그 만은 "이것이 종사(宗社)의 대계(大系)인데, 다만 옛 임금의 사생(死生)이 궁금하다."라면서 고기를 물리쳐 멀리하니, 사람들이 그 지조(志操)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종반정 덕택에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1506.9.6)에 복직되고 이어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 1506.10.11), 이조 참판(吏曹參判, 1507.5.19), 병조 참판(兵曹參判, 1508.2.9),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1508.6.15), 예조 판서(禮曹判書, 1508.11.10)에 오르고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1508.12.9)하였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1510.3.21)을 지냈다.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이 있자, 우참찬 겸 전라도 도순찰사(右參贊兼全羅道都巡察使, 1510.4.14)가 되어 백성을 안무(按舞)하였는데 처사가 모두 사리에 적합하여 남방이 모두 조용하였다. 그는 이 공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1510.6.27)에 승임(昇任)되고,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1512.6.9), 뒤이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1512.9.6)로 나가서 기황(饑荒)을 해결하여 공을 세우고, 우참찬(右參贊, 1513.4.2)을 겸직하였다. 우의정(右議政, 1513.4.15)에 올라 1513년(중종 8) 10월 25일에는 박영문 모반사건(謀反事件)을 추문(推問)한 공으로 가사(家舍) 2좌(坐)와 죄인(罪人)의 노비(奴婢) 5구(口)와 길들인 말 1필(匹), 담요 1좌(坐)를 하사(下賜)받았다. 좌의정(左議政, 1513.10.27)을 거쳐 1516년(중종 11) 4월 9일부터 1519년(중종 14) 12월까지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이는 모두 성희안 (成希顔)이 극력 천거하여 차례를 밟지 않고 기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救)하려 노력하다가 이것이 중종(中宗)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519.12.17)로 옮겼다가 군기시 도제조(軍器寺都提調),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를 겸직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좌의정(左議政, 1527.5.6)에 이어 영의정(領議政, 1527.10.21)에 올랐고, 풍수학 도제조(風水學都提調, 1530.9.27),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 1531.7.2),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1532.8.11),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등을 겸직하였으나 실상 실권은 좌의정인 심정(沈貞)에게 있었다.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가 인종(仁宗)을 낳고 7일만에 승하하자,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이 상소를 올려 신비(愼妃)를 복위(復位)하자고 청하였다. 이를 권달수(權達手) 등이 사론(邪論)으로 몰아 사죄(死罪)를 주장하니, 그가 이르기를, "말은 비록 맞지 않으나 죄를 줌으로써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여 구해(救解)하였다. 어느 해 마침 재변이 잇달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그 대책을 신하에게 물었다. 이에 한형윤(韓亨允)이 앞으로 나와 "성상(聖上)께서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다스리려 하시나, 못난 자가 감히 수상(首相)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災變)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이요, 정치가 잘 되기는 바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영의정인 그를 모욕하는 말인 것이다. 한형윤(韓亨允)이 물러가매, 신용개(申用漑)가 얼굴을 붉히며 크게 말하되, "신진(新進)의 사람이 대신(大臣)을 맞대놓고 지적하니, 이런 버릇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그는 손을 저어 말하기를, "우리들이 노(怒)하지 않을 줄을 알고 이런 말을 한 것이지. 만일 조금이라도 꺼리는 것이 있으면 하라고 권(勸)하여도 하지 않을 것이요, 내게는 해(害)될 것이 없으니 과감히 말하는 젊은 사람들의 용기를 꺾을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같이 있던 대신들이 그의 아량이 넓고 깊음에 서로 탄복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심정(沈貞)에 밀려 영의정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1533년 5월 28일에 면직(免職)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런데 그가 장경왕후 릉(章敬王后陵, 禧陵)의 총호사(摠護使)로서 그 능을 불길한 땅에 만들었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誣告)로 1937년(중종 32) 5월 7일에 김해(金海) 땅으로 귀양을 갔다. 그는 중종의 배려로 특별히 감사 1등(減死一等)이 되었는데, 그의 집에 갑자기 관원(官員)이 잡으러 오자, 온 집안 식구들이 겁내었으되 오직 그 만은 태연하였다. 귀양길에 올랐을 때도 연도(沿道)에 있는 고을의 군수(郡守)가 길에 나와서 결별(訣別)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민망하여 말이 없었다. 그는 홀로 이야기하고 웃는 것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다. 김해에 이르러서는 시로써 이르기를, "비방(誹謗)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끝내는 용서(容恕)를 받았으니/ 이 인생 다시는 임금님 은혜 보답할 길 없네/ 열 번을 높은 재 오르노니 두 줄기 눈물이요/ 세 번을 긴 강을 건너노니 홀로 애통(哀痛)하네/ 아득한 높은 봉우리엔 구름이 먹빛이요/ 망망한 큰 들엔 큰 비가 쏟아지네/ 저물녁에 임해 동성(臨海東城) 밖을 들어서니/ 쓸쓸한 띠집에 대로 문을 달았다."라고 하였다. 김안로(金安老)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된 뒤 그는 1537년 11월 9일에 곧 풀려나왔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537.11.10), 영경연사(領經筵事, 1537.11.14)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에 영의정 윤은보(領議政尹銀輔), 좌의정 홍언필(左議政洪彦弼) 등이 그를 다투어 영의정으로 추대하였으나 중종은 과거 영의정으로서 조광조(趙光祖)를 구하지 못하고, 심정(沈貞)의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희릉(禧陵)의 땅이 불길한 데도 장경왕후를 거기에 묻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고, 심정(沈貞)과 불화(不和)하여 면직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있다가 1538년 12월에 타계하였는데,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정문익유고(鄭文翼遺稿)>가 있다. <해동잡록(海東雜錄) 6권>에서 그의 행적 중 여러 가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행적(行蹟)>, <기묘록(己卯錄)>, <잡기(雜記)>, <음애잡기(陰崖雜記)>,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 여러 문헌(文獻)에서 모은 것이다. 또한 <대동야승(大東野乘)>의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에서도 <음애일록(陰崖日錄)>, <척언(척言)>, <관물필기(觀物筆記)>, <보유(補遺)>, <병신록(丙申錄)> 등에서 모았다. [海東野言 335쪽] : 이자의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이르기를, "정승(政丞)을 고르던 날, 성희안(成希顔)은 팔뚝을 걷어붙이면서 큰 소리로, '김응기(金應箕) 천명을 가지고 신용개(申用漑) 하나를 바꿀 수 없고, 신용개 천명을 가지고 정광필(鄭光弼) 하나를 바꿀 수 없다'했으니, 그 망령(妄靈)된 말을 하여 사리를 돌아다보지 않는 것이 이런 것이 많았다, 그가 정광필을 힘써 천거한 것은 비단 사사로이 친하기 때문 만이 아니라 또한 정광필의 뜻을 맞추어서 일찌기 그와 혼인을 한 중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中宗實錄 18卷] : 1513년 4월 15일에 정광필(鄭光弼)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광필(光弼)은 도를 즐기고 마음이 너그러워 재상(宰相)의 기국(器局)이 있는데, 성희안(成希顔)이 일찌기 말하기를, "광필(光弼) 같은 이는 참으로 '형체가 없어도 보며, 소리가 없어도 듣고, 공경하기를 신명(神明)이 있는 것처럼 한다'고 할 수 있다."하였다. 임금이 일찌기 삼공(三公)에게 복상(卜相)케 하니... 성희안(成希顔)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함께 광필 (光弼)을 추천하니, 희안(希顔)이 공언(公言)하기를, "오늘날의 정승은 당연히 광필 (光弼)이 되어야 하고... 후에 정광필이 명상(名相)으로 불리어지자, 사람들은 또 그의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또, 광필은 기질이 뛰어나고 지략이 원대한 데다가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어 사람들은 모두 정승(政丞)을 잘 골랐다고 하였다... 당시정승이 이어 죽으므로, 임금은 당시 현량한 보좌가 없음을 걱정하여 광필을 뽑아 재상(宰相)에 두었으나, 물론(物論)은 그리 흡족히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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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검도관, 23일 검도 초등고학년부 도대회 단체전 우승...축하합니다.
예천검도관(道知事旗 生活體育 劍道大會 : 醴泉郡 初等 高學年部 團體戰 優勝, 강민성, 전영훈 個人戰 3位) [記事] : 2011년 10월 22-23일 청도군 모계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제12회 경북도지사기 생황체육 검도대회에서 예천군이 초등 고학년부 단체전(최경호·전영훈·이현우) 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초등 저학년부 개인전에서 강민성 선수가 3위, 고등부 개인전에서 윤성배 선수가 3위를 차지했다. 전영훈 선수는 단체전 우승에 이어 개인전에서도 감투상을 받았다. 권경호(예천검도관) 감독은 “단체전에서 처음 우승을 하여 놀랍고 기쁘다”며 “이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한 예천군생활체육회(회장 권광남) 관계자들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는경상북도생활체육회가 주최하고 청도군생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경북검도연합회 주관, 경상북도와 청도군 후원으로 개최됐다.(醴泉新聞 20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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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790
예천군 방문(이난호 大韓傷痍軍警會 大邱市支部長) [記事] : 이난호 대한상이군경회 대구시지부장은 2011년 10월 28일 올해 회갑을 맞은 1950년생 회원 100여 명과 예천 석송령, 용문사 일원으로 단체관광을 하며 국가유공 상이군경으로서 자긍심 고취와 친목을 도모했다.(每日新聞 2011-10-29)
예천군 방문(박약회 靑壯年部 踏尋行事) [記事] : 사단법인 박약회 대구시지부 청장년부(회장 류인승) 회원 20여 명은 최근 예천지역 유적지를 찾아 조상 전래의 고유 문화를 계승코자 문화유적 답심 행사를 가졌다.(每日新聞 2011-10-29)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安東病院 나눔365奉仕團 ‘放課後 學生 프로’ 人氣) [記事] : ...2011년 11월 19일에는 ‘가자! 신나는 여행’이란 이름으로 학생들과 예천천문우주센터를 방문해 가변중력 및 4D 체험과 천체관측 등 체험과 학습을 경험한다. 이 프로그램은 안동시 자원봉사센터 우수자원봉사프그램 응모에서 우수사업으로 선정된 바 있다.(엄재진 記者 每日新聞 201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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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