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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21) : 정광필(2)(附 예천중 송창협, 28일 양궁 도대회 신기록 수립...축하합니다/풍양면 삼한C1, 조달청으로부터 ‘자가품질 보증업체’로 선정...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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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필(鄭光弼) : 브리태니커/ 1462(세조 8)~1538(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아버지는 좌참찬 난종(蘭宗)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가 되었으며, 그 뒤 사록·전적·정언·집의·부제학·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왕에게 극간(極諫)하다가 아산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되고,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을 거쳐, 사헌부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지냈다.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으며, 1516년 영의정이 되었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종사하려 하자 훈구대신들과 함께 반대했으며, 현량과(賢良科)의 시행에도 반대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연소한 유생들이 때를 모르고 다만 인고시령(引古施令)하고자 한 일이라며 조광조 일파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다가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527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실권은 좌의정 심정(沈貞)에게 있었으며, 1533년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회덕에 한거하고 있을 때, 일찍이 1515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었을 때 총호사(摠護使)로서 능을 불길한 땅에 만들었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를 당해 김해로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회덕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 완담향사(浣潭鄕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daum 2010)
정광필(鄭光弼) : 본관(本貫) 동래(東萊), 시대(時代) 1462 ∼ 1538, 자(字) 사훈(士勛), 호(號) 수부(守夫)/ 이력(履歷)/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 8)∼1538(중종 33). 15世 조선 전기의 문신. 자(字)는 사훈(士勛), 호(號)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 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陽谷集./ <鄭淵模>(daum 2010)
정광필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정광필(1462-1538)은 별실 마을(豊壤面靑谷里別室) 출신으로,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본관은 동래,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갑자사화(1504) 때 왕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극간(極諫)하다가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홍문관 부제학에 복직되어 이조 참판, 예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1510)을 토평하고 돌아와 병조 판서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1512) 기황(饑荒)을 해결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1516)에 올랐다. 기묘사화(14519)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파직되고 다시 좌의정(1527)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총호사(摠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憘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1537), 이듬해 김안로의 사형으로 풀려났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중종의 사당에 모셔지고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과 지보면 마산리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 문익공 유고(鄭文翼公遺稿)>가 남아있다. 정광필은 풍채가 특별히 잘 나고,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말과 모습이 의젓하고 일 처리가 매우 분명하였다. 일에 앞서 꾀하고, 기미를 밝게 보고 생각하니, 급한 물결에 돌기둥 같은 힘이 있어서 어떤 어려움에라도 우뚝 버티고 섰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 중종이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근래 자주 일어나는 원인을 신하들에게 물으니, 한충(韓忠)이라는 젊은 선비가 중종께 아뢰기를, "어리석은 영의정이 앉아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정광필을 욕되게 하였다. 어전에서 물러 나왔을 때 주위에서 한충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정광필은 손을 저어 말리면서 이르기를, "한충은 내가 화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나를 꺼리고 있다면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니, 나에게는 해로울 것이 없다."라고 하니 모두 그 말에 탄복하여 과연 대인의 도량이라고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정광필(鄭光弼) :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462(세조 8)∼1538(중종 33)/ 정의 :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애 : 자는 사훈(士勛)이고, 호는 수천(守天)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동래(東來)로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다가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되어 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한 후, 성희안(成希顔)의 천거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으나,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면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잠시 귀양살이를 했으나 곧 풀려났다. 이 때 윤은보(尹殷輔)·홍언필(洪彦弼)에 의해 영의정에 추천되었으나, 과거에 조광조를 구하지 못하고 심정(沈貞)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으며, 희릉(禧陵)의 땅이 나쁜 것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임금이 거절하였다. 사상 : 그는 사화가 격심하던 시기에 벼슬에 있으면서 때로는 임금에게 극간하기도 하고 귀양살이에도 주저하지 않아 처신에 지조가 있다고 칭송 받았으며, 조광조와 정온(鄭蘊) 등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리는 등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정치에서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젊은 선비들의 과격한 언동도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에게 죄를 주게 되면, 과감히 말하는 사람의 용기를 꺾게 되어 결국 언로를 막는 셈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 : 저서에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기타 :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daum 2010)
정광필 :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 鄭文翼公遺稿/ 鄭光弼 (1462∼1538) ; 字 士勛, 號 守夫, 本貫 東萊./ 石印本. - 京城 : 大聖文學院印刷, 昭和9(1934)./ 1冊 ; 28.5x17.8cm./ 조선 전기의 문신 정광필의 시문집이다. 정광필은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이다. 1492(성종 2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1510(중종 5)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한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總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海)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賜死)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 문집은 1702(숙종 28)년 7세손 재륜(載崙)에 의하여 편집되고, 1934년 간행되었다. 「효문두우성유감(曉聞杜宇聲有感)」이나 「납설(臘雪)」 등에서 저자의 섬세한 감각과 절묘한 표현방법을 엿볼 수 있다. 「수죽정공구동계소(水竹鄭公上疏)」는 우의정 정창연(鄭昌衍)이 그때 부사직으로 있던 정온(鄭蘊)이 죄를 입어 유배될 때 그를 구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이다. 이 문집은 저자의 정치적 비중에 비하여 그리 다양한 편은 아니나 15∼16세기의 정치상황, 특히 갑자사화 및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序 ; 鄭萬朝. / 詩 ; 日晩 扶人步庭 後里故人皆逝 來現者皆是後生 愴懷 仍成一律, 乘竹輿 往槐木亭 與宋汝佐鄭和 觀築堰處 俄而日出風和 成一律, 往槐亭 宋世欽吳卿道亦到 終日相 話回家成一律, 丁酉正月夜吟, 二月旣望 行寒食祭于祖墓 欲得吉兆 周覽支? 愴懷, 惟吉去後尤愴懷 月夜偶吟, 夕雨後寒甚 見爬下積火 移于木爐以煖身 夜半得句 書示兒輩, 曉聞杜宇聲有感, 注山十律, 自懷德向金海途中吟, 偶吟(3首), 臘雪. / 有明朝鮮國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使兼安東進兵馬僉節制使宋公墓碣銘, 有明朝鮮國成均進士宋公墓碣銘, 鄭文翼公諱光弼世系,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謚文翼鄭公神道碑銘, 鄭文翼公事蹟附錄, 附水竹鄭公上疏, 附脩石鄭公上箚, 鄭文翼公遺稿續編./ 跋 ; 鄭寅燦.(daum 2010)
정광필 : <국조 문과 방목>/ 정광필(鄭光弼) 성종(成宗) 23년(149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6(乙科6)/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62년, 임오, 자(字) 사훈(士勛), 호(號) 수부(守夫), 본관(本貫) 동래(東萊), 諡號, 封號 문익(文翼)/ > 가족사항 부(父) 정난종(鄭蘭宗), 조부(祖父) 정사(鄭賜), 증조부(曾祖父) 정귀령(鄭龜齡), 외조부(外祖父) 이지지(李知止), 처부(妻父) 송순년(宋順年)/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92(임자) 진사시, 전력(前歷) 무공랑(務功郞), 관직(官職)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 묘(墓) : 군포시 속달동 동래정씨 묘역(daum 2010)
정광필 : 鄭文翼公遺稿(奎5401), 鄭光弼(朝鮮)著, 鄭載崙(朝鮮)編./ 1冊(49張) 木板本 32×21.1cm./ 四周雙邊 半郭:19.2×14.4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守天 鄭光弼(1462∼1538)의 시문집으로 7대손 載崙이 1702년(肅宗 28)에 편찬했다. 鄭光弼의 자는 士勛, 본관은 東萊. 1492년(成宗 23) 式年 文科에 乙科로 합격, 副提學·吏曹參議를 역임했다. 1504년(燕山君 10) 甲子士禍 때 王을 極諫하다가 牙山에 유배, 1506년 中宗反正으로 副提學에 복직되었다. 禮曹判書, 大司憲, 右參贊, 左議政을 거처 1516년 領議政이 됐다. 1519년 己卯士禍 때 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 1527년 다시 左議政에 이어 領議政에 올랐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면직되었다. 1537년 摠護使로서 章敬王后의 陵(禧陵)을 불길한 땅에 만들었다는 金安老의 무고로 金海에 귀양갔다가 이 해 金安老가 賜死되자 곧 풀려나왔다. 中宗의 廟庭에 配享, 懷德의 崇賢書院, 龍宮의 浣潭鄕社에 祭享. 시호는 文翼. 내용은 曉聞杜宇聲有感, 臘雪 등 詩 23수, 宋汝諧와 宋汝翼의 墓碣銘, 世系, 神道銘幷序, 水竹鄭公救桐溪疏 및 鄭光弼에 관한 사적을 적은 책명이 수록되어 있다. 인용 전적으로는 ≪中宗實錄≫, 安노의 ≪己卯錄≫, 李廷馨의 ≪東閣雜記≫, ≪林塘年譜≫, 奇大升의 ≪論思錄≫, 李기의 ≪松窩裸說≫, ≪識小錄≫(著者不明, 許筠의 ≪惺翁識小錄≫인 듯), 朴東亮의 ≪寄齋??錄≫, 張維의 ≪玄軒申公壽序≫, 尹根壽의 ≪月汀漫錄≫, 金時讓의 ≪紫海筆談≫, 鄭士龍의 ≪湖陰集≫ 등이며 그 내용을 적고 각 인용전적을 표시하였다. 끝에 鄭復先의 跋이 있다. 「水竹鄭公救桐溪疏」는 右議政 鄭昌衍이 副司直으로 있던 鄭蘊이 죄를 업어 流配 될 때 그를 구하기 위해 上疏한 것이다. 저자의 정치적 비중에 비하여 그 내용은 다양하지 못하나 15∼16세기의 정치적 상황, 특히 甲子士禍 및 己卯士禍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daum 2010)
정광필 :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정광필(鄭光弼) #경상도(慶尙道) 용궁(龍宮)/ *완담향사(浣潭鄕社) : 선조무진건(宣祖戊辰建)./ 제향. 정구령(호삼수 현감 증이판 본동래). 정 옹(구령자 수찬 본동래). 정 사(옹제 직학 증찬성 내산군 본동래). 정 환(옹손 응교 본동래). 정광필(호수천 영의정 시문익 중종묘배향 본동래) 정영후(호매오 환현손 참봉 효행 본동래). 정영방(호석문 영후제 진사 본동래)./ 祭享. 鄭龜齡(號三樹 縣監 贈吏判 本東萊). 鄭 雍(龜齡子 修撰 本東萊). 鄭 賜(雍弟 直學 贈贊成 萊山君 本東萊). 鄭 渙(雍孫 應敎 本東萊). 鄭光弼(號守天 領議政 諡文翼 中宗廟配享 本東萊) 鄭榮後(號梅塢 渙玄孫 參奉 孝行 本東萊). 鄭榮邦(號石門 榮後弟 進士 本東萊).// # 충청도(忠淸道) 회덕(懷德)/ *숭현서원(崇賢書院) : 창건미상임진화실 광해기유중건 동년액(創建未詳壬辰火失 光海己酉重建 同年額)./ 제향. 정광필(호수천 영의정 시문익 중종묘배향 본동래). 김 정(호충암 형판 시문간 본경주). 송인수(호규암 이참 대사헌 시문충 본은진). 김장생(호사계 시문원 문묘배향 본광산). 송준길(호동춘당 좌참찬 증영의정 시문정 문묘배향 본은진). 송시열(호우암 좌의정 시문정 효종묘 문묘배향 본은진),/ 祭享. 鄭光弼(號守天 領議政 諡文翼 中宗廟配享 本東萊). 金 淨(號沖庵 刑判 諡文簡 本慶州). 宋麟壽(號圭庵 吏參 大司憲 諡文忠 本恩津). 金長生(號沙溪 諡文元 文廟配享 本光山). 宋浚吉(號同春堂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正 文廟配享 本恩津). 宋時烈(號尤庵 左議政 諡文正 孝宗廟 文廟配享 本恩津),// *별사(別祠) : 숙종정미건(肅宗丁未建)./ 제향. 이시직(호죽창 시충목 본연안). 송시영(호야은 시충현 본은진)./ 祭享. 李時稷(號竹窓 諡忠穆 本延安). 宋時榮(號野隱 諡忠顯 本恩津).(daum 2010)
정광필 : 164대 한성판윤 정광필(鄭光弼) : 중종 3년(1508)11월 7일//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용궁(龍宮)/ ● 완담향사(浣潭鄕社)(daum 2010)
정광필(鄭光弼) : 자 사훈(士勛), 호 수부(守夫), 시호 문익(文翼), 생졸년 1462 (세조 8) - 1538 (중종 33), 시대 조선 전기, 본관 동래(東萊)/ [문과] 성종(成宗) 23년 (14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 [상세내용] 정광필(鄭光弼)에 대하여 :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陽谷集(daum 2010)
정광필(鄭光弼)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성종(成宗) 23년, 과거시험연도 : 1492 임자,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을과6(乙科6)/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광필(鄭光弼), 자 : 사훈(士勛), 호 : 수부(守夫), 본관(本貫) : 동래(東萊)/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문익(文翼), 소과 : 1492(임자) 진사시, 전력(前歷) : 무공랑(務功郞), 관직(官職) : 영의정(領議政)/ [가족사항] 부(父) : 정난종(鄭蘭宗), 조부(祖父) : 정사(鄭賜), 증조부(曾祖父) : 정귀령(鄭龜齡), 외조부(外祖父) : 이지지(李知止), 처부(妻父) : 송순년(宋順年)(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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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중 송창협, 28일 양궁 도대회 신기록 수립...축하합니다.
송창협(慶北學生體典 醴泉中 송창협, 洋弓 新記錄 樹立) [記事] : 제48회 경북학생체전에서 포항교육지원청이 종합우승의 영예를 차지한 가운데 나흘간의 열전을 마무리했다. 2011년 10월 26일 영천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육상경기를 시작으로 진행된 이번 대회에서는 모두 28개 신기록(대회신 23, 경북중학신 5)을 쏟아내 내년 전국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 청신호가 켜졌다. 대회 첫날인 지난 26일 경산압량초 이정욱이 남초 5년 포환던지기에서 11m90으로 대회신기록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같은 날 남초 6년 포환던지기에 출전한 김경훈도 15m12로 대회기록을 바꿨다. 또 육상 여초5년 멀리뛰기의 성주도원초 노지현도 4m72를 기록, 종전기록을 22㎝나 뛰어넘었다. 둘째날에는 길주중 조성훈이 남중3년 멀리뛰기 경기에서 6m69로, 구미 형곡중 송유진이 여중2년 100H경기에서 15초14의 기록으로 골인, 종전기록을 12년 만에 갈아치웠다. 셋째날에는 남중 5천m경보에서 군위중 김환희가 23분13초91로 종전기록을 17초48이나 앞당겼다. 같은날 수영에서 대회신기록이 쏟아졌다. 남중 자유형 800m에 출전한 포항 유강중 이규형은 9분45초91을 기록해 지난해 세운 대회기록을 무려 28초21이나 끌어당겼다.
경북중학신기록은 양궁에 출전한 예천중 송창협의 손에서 나왔다. 송창협은 남중 60m에서 341점으로 종전기록(338점)을 갈아치고, 40m마저도 350점으로 종전기록(348점)을 바꾼 뒤 개인종합까지 1천370점으로 종전기록(1천68점)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송창협이 대활약을 펼친 예천중은 단체종합에서도 4천26점으로 종전기록(4천점)을 새로 썼다. 경북체육중은 여중 양궁단체전에서 3천925점으로 종전기록 3천891점을 제치고 경북중학신기록을 세웠다. 한편 대회결과 포항교육지원청이 초등부 준우승(80점), 중등부 우승(79점), 고등부 우승(58점)에 이어 합계 217점으로 종합우승의 영예를 안았으며, 경주교육지원청이 준우승, 구미교육지원청이 3위에 올랐다. 대회최우수선수에는 남중 5천m경보 대회신기록을 세운 군위중 김환희와 여중 육상 100m, 100mH, 400mH허들을 휩쓴 구미 형곡중 송유진에게 돌아갔다.(이종욱 記者 경북일보 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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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면 삼한C1, 조달청으로부터 ‘자가품질 보증업체’로 선정...축하합니다.
삼한C1(한삼화 三韓 C1會長) [記事] :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회사의 미래이자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벽돌 생산에서 국내 최고 기술력을 가진 ㈜삼한C1이 최근 조달청으로부터 '자가품질 보증업체'로 선정됐다. 자가품질보증제는 업체 스스로 생산 제품의 품질을 관리하고 조달청이 심사해 최고 3년까지 납품검사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2011년 첫 실시하는 이 제도에 당당히 1호 도장을 찍은 삼한C1은 제품 불량률이 '제로'에 가까운 완벽한 기업이다. 삼한C1의 한삼화 회장은 기업의 미래를 '기술'보다 기술을 다루는 '사람'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려면 경영자 혼자만이 아닌 직원들 스스로가 우리의 위치를 깨닫고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리는 1993년부터 매년 직원 10명을 해외로 견학을 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1등에 만족하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 세계 1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고령 출신인 한 회장은 흙이 지닌 매력에 빠져 1985년 황토 벽돌 사업에 뛰어들었다. 울진 후포에 1공장을 지은 뒤 1990년 5월에는 예천 풍양에 2공장을 지어 본격적인 세계시장 공략에 나섰다. 한 회장은 매출액이 30억원에 불과할 때 150억원을 투자하려 하자 주변에서 "무모하다"며 극구 말렸다. 한 회장은 "흙 벽돌을 만드는데 선진기술을 도입하지 않으면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없고, 불량률을 떨어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며 "그때의 적극적인 투자가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고 '자가품질 보증업체'로 선정되도록 한 것이다"고 말했다. 또 한 회장은 우수한 품질의 원천이 바로 '사람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수한 기계를 사용하면 제품의 질이 좋아지지만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이를 다루는 사람이 바른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제품에 하자가 생기기 마련이다"며 "생산설비가 이상이 생기기 전에 소리만 듣고 미리 판단해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직원'을 중시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회사는 각종 지원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에 직원이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불량제품을 막는 삼한C1의 전략 중 하나는 철저한 사전관리다. 회사는 품질 보증을 위해 매주 한 번씩 반나절의 시간을 생산라인 정비에 할애한다. 이 모든 것이 한 회장의 품질 경영에서 나온다. "흙만큼 정직한 것도 없습니다." 한 회장은 '흙이 미래다'는 생각으로 회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또 그러한 회사를 이끄는 '사람'을 선별하는데 고민 중이다. 그는 "큰 아들이 나의 가업을 이어 받아 진정한 세계 1등으로 회사를 키웠으면 한다"며 "또 더 많은 인재들이 우리 회사에서 '흙의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다.(노경석 記者 每日新聞 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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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