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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736:정기선(12)-정기원(1)(附예천방문799)
작성자장병창 @ 2011.11.16 06:10:54

   예천의 자랑(2736) : 정기선(12)-정기원(1)(附 예천방문 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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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선 [專門資料] : 國葬都監 以諡狀行狀諡冊哀冊表石誌文銘旌表石大字寶篆文 製述官 及 書寫官 實預差別單啓/ 趙寅永|洪羲俊|朴宗薰|李止淵|洪奭周|鄭基善|金根|金蘭淳|南公轍|徐俊輔|洪羲俊|金箕殷|領議政|沈象奎|李勉昇|趙萬永|李紀淵|金根|朴綺壽|鄭基善|徐耕輔|金炳疇|徐能輔|金賢根|金在昌|朴周壽|洪命周|李相璜|洪顯周(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備局 以 京畿 關西 災實分等狀覆啓/ 洪學淵|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備局 以 嶺南 湖南 湖西 災實狀覆達/ 鄭基善|徐耕輔|朴晦壽(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行 都堂 翰圈 領議政 金載瓚 左議政 韓用龜 右議政 金思穆 弘文提學 金啓洛 同春秋 金履喬 金敎根/ 金載瓚|韓用龜|金思穆|金啓洛|金履喬|金敎根|尹豊烈|鄭基善|李驥秀|金道喜(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健陵 親祭 華寧殿 酌獻禮時 獻官 大祝 以下施賞有差/ 南公轍|永明尉洪顯周|金魯敬|鄭基善|金在元|朴宗琦|鄭祖榮|李憲述|成競默|金敎喜|李羲肇|金|李奎秀|金蓍根|金元根|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許施 嶺伯 災結加劃之請/ 南公轍|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有政 吏曹判書 李相璜 進/ 李相璜|李肇源|任希存|李勉昇|朴宗薰|李有秀|崔弘德|金道喜|鄭基善|洪學淵(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有政 吏曹參判 李寅泰 參議 金 進/ 李寅泰|金|李基華|鄭基善|趙斗淳|金興根|趙秉鉉(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令 關北 嶺南 湖西 賑資許劃從速稟處/ 金箕殷|鄭基善|朴晦壽(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有政 吏曹參判 李寅泰 兵曹判書 權敦仁 進/ 李寅泰|權敦仁|許晟|朴齊明|金建銖|鄭基善|李魯秉|朴潤榮|沈樂承|李觀熙|南錫圭(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行閣圈 檢校提學 金祖淳 檢校直閣 李光文 檢校待敎 朴宗薰 李龍秀/ 金祖淳|李

光文|朴宗薰|李龍秀|鄭基善|南周獻|金敬淵|徐憙淳|權敦仁|李嘉愚(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有政 吏曹判書 沈象奎 參判 洪羲臣 參議 朴宗琦 兵曹判書 金履陽 進/ 沈象奎|洪羲臣|朴宗琦|兵曹判書|金履陽|柳|李晩秀|金履陽|李時秀|趙萬永|李儒秀|鄭晩錫|尹復誼|朴宗薰|李龍秀|鄭基善|徐憙淳(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實錄總裁官 以下施賞有差/ 李相璜|沈象奎|朴宗薰|李止淵|申在植|趙寅永|領敦寧|趙萬永|徐俊輔|金學淳|金蘭淳|李翊會|洪敬謨|朴晦壽|徐憙淳|洪羲俊|金|金萬淳|金履載|徐耕輔|李嘉愚|金根|權敦仁|李止淵|鄭元容|徐有|鄭基善|李憲瑋|朴永元...(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差下實錄儀軌堂上 李憲瑋/ 李憲瑋|李止淵|鄭基善|李憲瑋(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給 密陽府 燒戶恤典/ 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令罪倭松井龜治償命一款 廟堂 爛議回達 東萊府使 金 限畢賑戴罪擧行/ 金|鄭基善|金|裵末敦|裵快敦|裵喆敦|末敦|末敦|金玉突|末敦|金玉突|裵末敦|裵末敦|末敦|末敦|裵末敦|金|曺允鵬|裵末敦|金|曹允鵬(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命 赤裳山城 安國寺 修葺之方關問營邑從長區劃/ 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有政 吏曹參判 朴齊一 進/ 朴齊一|李寅弼|李鎭華|李佑伯|洪重燮|金鼎集|金逸淵|李竣祜|尹致秀|李根友|李肯愚|金大根|洪奭周|洪敬謨|金元根|徐能輔|金根|李紀淵|洪命周|鄭基善|尹載健|白殷鎭|金胤根|李趾秀|金大坤|趙寬錫|尹致麟|朴氣浩|李學鉉(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命前前 別兼春秋 朴綺壽 還付別兼申飭上來/ 朴綺壽|鄭基善|趙琮鎭|朴綺壽|朴綺壽|朴綺壽(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備局 以 關北繡衣 別單覆啓/ 鄭基善(daum 2010)

 

  정기선 [專門資料] : 命 外史庫 御製奉安明春擧行/ 鄭元容|鄭基善|道喜(daum 2010)

 

  정기선(鄭基善) : 동래정씨 인물/ 참살이 | 2007.04.19. 13:22/ http://cafe.daum.net/jeongsanggi/ 정기선(鄭基善) : 1784(정조 8)∼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백(元伯). 아버지는 지용(持容)이며, 어머니는 이창중(李昌中)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15년 다시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된 뒤 함경도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문란한 지방행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활약하였다. 예를 들면 영흥부의 부사였던 엄기(嚴耆) 등의 잘못을 적발하여 논죄하는 한편, 각 고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과 장부를 조사하여 허류(虛留) 등 부정행위를 단속하고, 아울러 제진(諸鎭)의 봉수대와 목장 및 일로(馹路)의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1817년 홍문록에서 4점을 얻은 뒤 직각·검상·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부제학을 거쳐, 1829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왜관소통사(倭館小通事) 배말돈(裵末敦)이 왜인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동래부사와 부산첨사를 문책하는 한편, 왜인들을 방어하는 대책을 수립함과 아울러 국가에서도 강경책을 쓰도록 건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그는 경상도관찰사로서 도내에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왕은 특별히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하사하였으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거쳐 1833년에는 드디어 예조판서에 올랐고 그 이듬해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동래정씨 집성촌의 하나인 경북 예천군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태을산 아래 익장마을에 정기선의 선정비가 있다./  참고문헌 :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金昊鍾〉(daum 2010)

 

  정기선 : 가문을 빛낸 이름/ 지난달, 2010년 9월 14일 (화)/ 鄭甲孫 鄭健朝 鄭啓淳 鄭 适 鄭廣敬 鄭廣成 鄭光世 鄭光弼 鄭 矩 鄭 球 鄭基善 鄭基世 鄭期遠 鄭基一 鄭基春 鄭基會 鄭蘭宗 鄭내永 鄭大年 鄭大容 鄭東晩 鄭東愈 鄭東逸 鄭東後 鄭萬朝 鄭萬和 鄭範朝 鄭丙朝 鄭復始 鄭復周 鄭.../ cafe.daum.net/wjdxogk/ 정친회(동래정씨 친목회)(daum 2010)

 

  정기선 : 고대인물/ 작년, 2009년 12월 17일/ ...(鄭光弼) 정 교 (鄭 僑) 정 구 (鄭矩.1) 정 구 (鄭球.2) 정 근 (鄭 謹) 정기룡 (鄭奇龍) 정기면 (鄭基勉) 정기선 (鄭基善) 정기세 (鄭基世) 정기용 (鄭夔容) 정기우 (鄭基雨) 정기원 (鄭期遠) 정기일 (鄭基一) 정기직 (鄭基直.../ cafe.daum.net/whisa/ 동래정씨 직제학공파 종중(daum 2010)

 

  정기선 : 조선의 암행어사/ e-Book/ 임병준 지음 |  가람기획 |  2003.06.14/ 책본문 : 李..·李維命·洪遇燮1813 具康·李在秀·洪大浩·李..·金學淳1816 李友秀·趙萬永·李..·鄭基善1818 韓用儀1819 趙萬永1820 鄭基善1822 朴齊聞·任俊常·徐左輔·權敦仁·沈英錫·尹命圭·朴來謙.../ 229페이지(daum 2010)

 

  정기선 : 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e-Book/ 고승희 지음 |  국학자료원 |  2003.05.29/ 책본문 : ...않아 이 지역의 화폐사용 규제는 해제되었다. 1816년(순조 16)에 함경도 암행어사 鄭基善이 삼갑과 江邊 7읍의 예에 따라 육진읍에서도 .餘를 作錢하고, 民庫의 應下條를 화폐로 .../ 101페이지(daum 2010)

 

  정기선 : 백로가 깃든 낙동강의 강촌마을, 예천 풍양 우망리/초석/ 작년, 2009년 6월 30일/ ...세운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후에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다.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중건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09년경 옛터에 다시 세운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blog.naver.com/ 등대마루(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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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원(鄭期遠) : 1559(명종 14)-1597(선조 10),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에 불조위 사당(不跳位祠堂)이 있다.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또는 가암(柯庵), 본관은 동래, 별좌 상신(象信)의 맏아들, 내성군(萊城君)에 봉작되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호매하고 지조가 굳으며 엄격한 가정 지도를 받아 힘써 배우더니,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사헌부 감찰, 호ㆍ형ㆍ예조 좌랑을 거쳐 1589년(선조 22) 봄에 사간원 정언, 1592년(선조 25) 봄에 사은사 신점(申點)의 서장관으로 명 나라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무는 동안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서 듣고 석성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참장(參將), 대변(戴弁), 유격장 사유(史儒)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행재소(行在所) 의주에서 병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을 배(拜)하고, 곧 병조 정랑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 가을 안악(安岳) 현감이 되어 난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지성으로 돌보고, 1595년(선조 28) 병조 정랑, 사헌부 장령 겸 지제교, 사간원 헌납, 홍문관 수찬, 시강원 문학, 사간원 사간, 종부시 정,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임금이 특히 그에게 명하여 왜군이 재침할 기미가 엿보인다는 고급주문정사(告急奏聞正使)를 삼아서 명 나라에 보냈다. 국가 존망이 그의 책임이라 국력은 약하고 적세는 강성하니 눈보라를 무릅쓰고 별 뜬 밤중에도 말을 달려갔으나 그들은 좀체로 군사를 보내려 아니하더니,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대장 마귀(麻貴), 총병 양원(楊元) 등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양원이 즐겨 출병하려 아니하므로 달래어 출병하게 하고 돌아오니 가선대부 상호군을 제수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나던 해 5월 양원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이 때 조정 관원들이 모두 사지(死地)라고 피하는 소임이었으나, 그는, "신하의 도리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아니랴"하고 남원으로 내려가 밤낮없이 백성들과 성을 쌓고 참호를 다듬을 때 양원은 왜적을 얕보고 술타령으로 7월까지 지냈다. 이 때 바다에서 원균(元均)이 패전하고 수륙(水陸)의 적군이 남원을 침범하니 순찰사, 조도사(調度使)는 모두 달아나고, 남원성 안에는 다만 양원의 군사 3천 명과 병사 이복남(兵使李福男)의 군사 수백에 불과했다. 이 때 양원이 그에게, "적의 형세를 살피니, 승산이 없다. 문신으로서 이 위태로운 곳에 있을 게 무어냐? 빨리 피하라."했다. 그는 양원의 속마음을 짐작하는지라, "내가 이 곳을 떠나면 그도 이 곳을 뜰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양원에게, "원군의 원수(元帥)인 공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내가 공을 두고 떠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이 성이 무너지면 서울이 위태하니 함께 여기서 죽기를 바란다."라고 결연히 대답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를, "적이 벌써 남원을 둘러쌌습니다. 저는 몸을 나라에 허락했으니 걱정마소서."하고 따로 패도(佩刀) 한 자루를 보내면서 부인에게, "어디서 죽을지 모르며, 이 칼에는 나의 정기가 서렸으니 대신 장사를 지내라"고 당부했다. 남원성이 무너지던 8월 16일 새벽 양원은 도망치고 그는 의관을 정제하여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남원성과 운명을 같이 하여 저 유명한 민인의총(萬人義塚)에 그 유해를 묻었다. 양원이 뒷날 울면서 선조에게, "남원이 함락될 때 거의 도망쳤으나 홀로 정 아무(鄭某)만이 나의 권함을 안 듣고 목숨을 끊었으니 참된 의사(義士)이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슬퍼하면서 예조 판서를 추증하더니, 1604년(선조 37)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선무공신 3등의 제3인자를 삼았으며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게 해서 해마다 추석에 제향을 치루며, 남원의 충렬사에 모셨고, 그 사당(不跳廟)이 지보면 도장리에 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지금도 글씨 몇 점과 시문(詩文) 약간 편이 <현산집(見山集)>에 전한다.(先祖實錄, 번암집, 見山實記, 文獻備考, 萊城君實記, 知保面誌,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

 

  정기원(鄭期遠) : 영어음역  Jeong Giwon/ 이칭/별칭 사중, 현산/ 분야 역사/전통시대/ 유형 인물/전통인물/ 시대  조선/조선 중기/ 집필자  정성미/ 정기원 : 생년 1559년, 몰년   1597년, 본관 동래정씨, 대표관직 주서|사헌부감찰|좌랑|사간원정언|승지, [가계] :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고려시대의 좌복야 정목(鄭穆)의 후손이며,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고손자, 현령 정한용(鄭漢龍)의 증손자, 사직서령 정순복(鄭純福)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내산부원군 정상신(鄭象信),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영천부정 이경(李璟)의 딸이다. [활동사항] : 정기원은 24세가 되던 해 진사에 합격하고,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의 주서(注書)가 되었다. 그 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호조·형조·예조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 봄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해 4월에 왜적이 우리나라를 크게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대궐로 들어갔다. 대신들이 모두 입궐하는 틈을 타 꿇어앉았다가 정문을 올리고 난 다음, 머리를 돌벽에 부딪쳐 피를 흘렸다. 이를 본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명의 황제에게 고하여 곽목징 등의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했다. 그 후 정기원은 병조정랑, 안악 현감(縣監), 수찬(修撰)을 두루 거쳐 좌·우승지(左·右承旨)까지에 이르렀다. 왜군이 다시 남해에 집결하여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석성이 화의를 제기하자 그는 또다시 머리를 깨트려 피를 흘렸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 마귀와 총병 양원으로 하여금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선조는 가선으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양원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명나라로부터 3,000여 명의 구원병을 거느리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때 남원은 삼도 요충지로서 사지였다. 정기원은 양원의 접반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거절하지 않고, 줄곧 남원에 내려와 남원성과 참호를 수축하며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남해에서 원균이 왜적에게 패하자 왜적은 곧장 남원성으로 진격해왔다. 순찰사와 조도사는 모두 도망치고 성 안에는 오직 명나라 군사만이 남게 되었으므로, 양원이 정기원에게 대피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울면서 거절했다. 그는 의정공에게 편지를 올려 나라를 위하여 난리에 죽는 뜻을 고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장렬하게 죽을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로부터 3일 후 남원성이 함락되자, 드디어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북쪽을 향하여 절한 후 순절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묘소] : 정기원은 전라북도 남원 향양동(向陽洞)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 선조가 그의 충성을 감안하여 죽은 뒤 예조판서 벼슬을 내렸고, 다시 좌찬성과 효충자의선무원종공신을 내렸다. 시호는 충의(忠毅)공이고, 내성군(萊城君)에 추봉하였으며 『삼강행실록』에 기록하고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남원에 충렬사를 세워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남원지』(남원지편찬위원회, 1992)(daum 2010)

 

  정기원 : 萊城君 忠毅公(諱:鄭期遠)先生 享祀| 우곡/정수식 조회 94 | 2010.04.21. 06:02/ http://cafe.daum.net/ 萊城君 忠毅公(諱:鄭期遠) 先生 : 1597(조선조30)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東萊 자는 士重 호는 見山이시다. 1585(조선18) 식년 문과에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호조, 형조, 공조의 좌랑 등을 지냈다. 현재 남원 충열사에 제향되고 있으며 선생의 충의를 받들고자 김천시 아포면 지동에 충의사 내격묘(來格廟)를 세워 매년 음력 3월 8일 생신날에 향사를 모신다. 시호는 忠毅다./ 충의사 래성군(휘:기원)향사 헌관(daum 2010)

 

  정기원 : 구리-정기원(鄭期遠)| 한풀 2003.12.06. 21:08/ http://cafe.daum.net/myojy/ 정기원(鄭期遠) 1559(명종 14)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구리 교문동에 단이 있다. 본관은 동래(東來),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호조, 형조, 공조의 좌랑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94년 의주 행재소(行在所)에서 병조좌랑,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가 곧 정랑이 되었다. 이해 안악현감이 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장령 겸 지제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 홍문관수찬, 시강원문학, 사간원사간, 종부시정(宗簿寺正),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왜군이 재침입해 올 움직임이 있음을 알렸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로 남원에 갔다가 왜군과 싸움 도중 남원성에서 제장(諸將)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원이 조정으로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자 선조는 예조판서로 추증하였고,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더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내성군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썼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daum 2010)

 

  정기원(鄭期遠) : 가문을 빛낸 분들/ 참살이 2007.04.21. 13:58/ http://cafe.daum.net/jeongsanggi/ 정기원(鄭期遠) 가문을 빛낸 분들/  2006/07/25 16:12/ http://blog.naver.com/tgkit/ 1559(명종 14)∼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아버지는 별좌(別坐) 상신(象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부정 경(璟)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가 호조·형조·공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589년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594년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복명한 뒤 병조좌랑에 제수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가 곧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안악현감에 제수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장령 겸 지제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 시강원문학·사간원사간 ·종부시정·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심유경(沈惟敬)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올 움직임이 있음을 알렸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 예조참판으로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남원에 갔다. 양원은 왜적이 성 가까이 근접하자 승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먼저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숙(庶叔) 기생(己生)에게 “도적이 이미 남원 십리 밖을 침범하였으니 머지않아 포위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아버지에게 올린 뒤, 왜군과 항쟁하다가 제장(諸將)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원이 조정에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자 선조는 예조판서를 증직하였고,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를 더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에 녹훈되었고, 내성군(萊城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국문헌비고》 예문고에 《현산집》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하지 않고, 《현산실기》에 수록된 약간의 시문이 전한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 國朝榜目, 亂中雜錄, 再造藩邦志, 東閣雜記, 紫海筆談, 樊巖集, 見山實記./ 〈李章熙〉(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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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799

 

  예천공설운동장(‘醴泉’ 陸上 轉地訓鍊 場所로 全國 最高 : 올해 1千5百餘 名 訓練, 來年 1萬餘 名 올 것으로 期待) [記事] : 예천군이 전국 육상선수단들의 전지훈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2011년 11월 15일 예천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인천 남동구청과 경기도 시흥시청, 강원도 정선군청, 경북 구미시청 등 4개 실업팀이 예천을 찾아와 예천 공설운동장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또 인천광역시 인일여고와 인천체고, 인천여중, 경북체고, 충남체고 등 고교육상팀 5개팀 등 연인원 1,500여명의 육상선수가 지역에서 전문 체력훈련과 실전훈련을 쌓고 돌아갔다. 이밖에도 2011년 11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대한육상연맹 심판단과 경기도 시설위원장, 한국실업육상연맹 부회장, 전라남도 외 7개 시.도 육상연맹 전무이사들이 공설운동장을 방문해 체육시설과 편의시설, 휴식공간 등을 둘러보고 최적의 육상 전지훈련 장소에 감탄했다. 특히, 전국의 체육고등학교를 비롯한 각 시도 육상 실업선수단에서는 내년 육상보조경기장 전천후시설 완공과 함께 전지훈련을 오겠다는 예약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군은 이런 추세로 보아 내년에는 지역을 찾은 전지훈련 선수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약 1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전망했다. 한편, 예천군은 체육 웅군의 위상에 걸맞게 공설운동장과 보조경기장 등을 상시 개방하여 군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醴泉인터넷放送 2011-11-15 오후 4: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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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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