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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38) : 정난종(2)(附 개포면 입암리 안승우, 13일 쌀 전업농 전국 선발대회 동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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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종 : (조선 문신 [1433]) [鄭蘭宗]/ 출처: 브리태니커/ 1433(세종 15)~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대교·감찰·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예조참판을 거쳤다. 그 뒤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형조참판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했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동지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0년(성종 1)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그가 남긴 금석문으로는 탑골 공원의 〈원각사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鍾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 등이 있다.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daum 2010)
정난종 :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정태하 | 2010.09.15. 20:30/ http://cafe.daum.net/wjdxogk/gkHx/ 제목: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이름: 野鶴/ 등록일: 2010-06-24 22:12/ 조회수: 471 / 추천수: 8/ 익혜공(翼惠公) 정난종 선생(1433~1489)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돈화문 현판 등을 남겼다.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 선생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래정씨 전체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13명이 정난종 선생의 후손에서 나왔다. 선생의 묘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번지에 있다. 저수지를 지나 묘소 아래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읽고 선생의 묘를 향하여 오르는데 길게 늘어진 산줄기가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내려 그 끝이 좁고 길게 끝나고 그 끝난 지점에 안내판이 있었다. 처음 오르는 부분 즉 혈장(穴場)의 순전(脣氈) 아래 부분이 길게 흘러 점점 좁게 빠지니 혈을 맺을 주인 격이 아닌 호종사(護從砂)의 형태를 띠어 약간 실망하였다. 올라갈수록 다소 가파른 지형인데 올려다보니 많은 묘들이 위에서 아래로 늘어서 있었다. 첫 번째 비각(碑閣)의 주인공이자 문인석이 두 개씩 좌우에 있는 묘가 바로 선생의 묘였다. 묵례를 올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위에서 내려오던 맥이 주된 기운이 이곳에서 거의 멈춘 형태였다. 혈장의 평탄한 면이 비교적 넉넉하고 순전이 불룩하게 앞으로 나갔으며 그 아래로 낙차가 크기 때문에 가파르게 흘러내리던 대부분의 기운은 이곳에 머물고 극히 일부만 아래로 흘러 내려간 형태다. 내맥(來?)을 타고 위로 올라가 줄기 전체를 살피니 주성(主星)으로부터 내려온 맥이 곧게 내려가지 못하고 좌선(左旋)으로 완만하게 굽어 내려갔다. 기복(起伏)은 없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 돌때마다 왼편 청룡 쪽으로 두 군데에서 분지(分枝)하여 요도지각(橈棹枝脚) 형태로 돌고 있는 반대편을 받쳐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 첫 번째 지각(枝脚)은 정휘겸(鄭?謙) 공의 묘 아래로 내려갔고 두 번째는 정유청(鄭惟淸) 공 묘 아래로 나갔다. 내맥(來?)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에 특별이 배부르게 살쪄 뭉친 곳도 없이 흘러 내려 그 끝이 약간 좁게 끝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바나나처럼 길고 굽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곳이 혈(穴)을 맺는 주맥(主?)인지 호종사(護從砂)인지 혼란스러웠다. 좌선(左旋)으로 돌고 있으니 백호 쪽의 어딘가를 감싸 보호하는 듯한 형태이며 기복(起伏)없이 그대로 흘러내리고 그 끝이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 내렸으며 물을 거스르기는커녕 물과 함께 나란히 진행되어 역수(逆水)하지 못하고 순수(順水) 하였으니 호종사로 의심하기 쉬운 형태였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내맥(來?)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정난종 선생의 음택에 도달하였다. 처음 산을 오르면서 묵례를 올리기 위하여 잠깐 머물렀을 때와는 느낌이 다소 새로웠다. 왜 이곳에 점혈(點穴)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혈장(穴場)을 전후좌우에서 살펴보았다. 이곳은 전체 묘역 중에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비교적 평탄한 면이 앞뒤로 넓었다. 그래서 바로 앞 소명당(小明堂)에 6세손 정진원 공의 묘가 함께 할 정도로 넉넉한 편이었다. 맨 위의 정유진공 묘로부터 선생의 묘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내맥(來?)이 한번도 기복(起伏)없이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보니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리니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경사진 내맥(來?)에 음래양수(陰來陽受)로 평탄한 곳을 선택하였으며 혈장(穴場)의 조건 중 하나인 평(平)을 선택하여 이곳에 점혈한 것 같다. 따라서 이곳 전체 묘소 중에서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겠다.
혈정(穴情)을 살피고자 최종 입혈맥(入穴?)을 보니 이미 묘가 들어서서 원래의 형태가 다소 훼손 되었으나 급하게 내려온 맥이 완만하게 바뀌어 혈장을 이루니 혈장의 조건 중에 평(平)에 합당하므로 이곳에 기운이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묘 바로 뒤에는 큰 아들 정광보(鄭光輔) 공의 묘가 있고 그 위로 둘째 아들 정광필(鄭光弼) 공의 묘가 나란히 삼부자(三父子)가 역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 회원이 묻기를 비각이 세워진 상중하(上中下)로 나란히 있는 묘 자리 중에 어느 곳이 좋은지 질문해왔다. 이곳 세 군데를 비교 분석하자면 위에 있는 정광필공의 자리는 바로 옆 청룡 쪽으로 하나의 줄기가 내려가고 그 위에 정유청공의 묘가 있을 정도로 좌우로 넓다. 그러나 그 옆으로 내려간 줄기가 바로 선익(蟬翼)의 역할을 한다면 선익이 발출(發出)한 그 부분은 뇌두(腦頭) 혹은 승금(乘金)에 해당되는 곳으로 혈처(穴處)가 아니다. 따라서 혈증(穴證)의 하나인 뇌두에 쓴 격이니 적합하지 않다. 가운데의 정광보 공의 자리는 청룡 쪽의 선익사(蟬翼砂) 아래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어 좋고 백호 쪽도 미미(微微)한 암사(暗砂)의 흔적이 있어 아래보다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좋게 보기 쉬우나 혈장의 측면으로 가서 전체 기울기를 보면 가파른 각도로 내려와 평(平)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사진 곳을 인작(人作)으로 파내고 소명당(小明堂)을 돋구어 자리잡으니 이곳은 기(氣)가 멈춘 곳이 아닌 지나가는 입혈맥(入穴?)상에 작혈(作穴)하였으니 역시 부적합하다. 아래의 정난종 선생 자리는 양 옆으로는 위의 두 자리보다 좁은 듯하나 상하(上下)로는 평탄한 면의 공간이 제일 넓다. 이것은 가파르게 내려오던 맥의 기운이 여기에서 비로소 멈춘 형태인 것이다. 상중하(上中下) 세 곳 중 유일하게 자연적인 평(平)을 유지하여 기운을 멈추었으니 이곳 정난종 선생의 자리가 가장 안정된 혈처(穴處)가 되겠다. 시야를 좀 더 멀리하여 좌우를 보면 청룡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쪽을 둥글게 감싸고 있어 유정(有情)하였으나 백호 쪽은 숲에 가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이곳과 경쟁하듯 바짝 붙어 있어 겨우 좁은 골짜기로 경계를 구분할 정도로 이곳을 핍박하고 반배하여 무정하다. 따라서 그 골짜기의 물길이 이쪽을 감싸 돌지 못하고 오히려 반궁(反弓)으로 충사(沖射)하여 나가고 있었다. 청룡도 좌선(左旋)으로 돌고 내맥(來?)도 좌선으로 돌며 백호도 내맥(來?)을 떠다밀다 싶이하며 좌선으로 돌고 있는데 흐르는 물까지도 좌선으로 돌아 나가니 좌선룡(左旋龍)에 좌선수(左旋水)로 음양교도(陰陽交度)를 못 이루었고 백호의 무정(無情)으로 올바른 형태의 당국(堂局)도 이루지 못하였다. 백호 쪽에 확보된 내명당(內明堂)의 공간이 전혀 없으니 전체적으로 볼 때 내명당의 중심을 향(向)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 향하게 되니 모든 자손이 고르게 발복받지 못하고 잘 되는 자손과 그렇지 못한 자손의 차이가 현격한 상(象)이 되겠다. 그리고 국(局)의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고 변방에 거처하는 격이니 대지(大地)의 품격에 위배된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보면 선생의 자리는 내맥(來?)의 기복(起伏)이 없이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돌고 있으며 양쪽으로 선익사(蟬翼砂)의 역할을 할 만한 가까운 위치에 지각(枝脚)이 받쳐주지 못하였으니 혈(穴)을 맺을 수 있는 주인(主人)의 품격이 부족하다. 그런데 어떻게 후손들의 발복이 그토록 컸단 말인가. 큰 발복으로 대지(大地)를 기대하고 왔는데 너무나 평범한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 외에 다른 지역의 자리를 볼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큰 발복을 야기시킬 만한 증거를 명쾌하게 밝힐 수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겠다. 다음 기회에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폭넓게 소조산(少祖山)까지 밟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후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산을 내려왔다.(daum 2010)
정난종 : 우리 가문을 빛낸 인물 /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 15)∼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명신·서예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대교·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재차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참찬· 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趙孟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 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기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원각사 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 尹子雲神道碑〉·〈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 金鐵山碑〉가 있으며,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 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이 보기 드물며,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 《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金石苑 卷五, 朝鮮金石總覽 下, 槿域書畵徵, 韓國金石遺文(黃壽永, 一志社, 1976), 韓國古印刷文化史(金斗鍾, 三星美術文化財團, 1980)/〈李完雨〉/ cafe.daum.net/jeongian/ 鄭 安 會 (동래정씨 안산공파 청년회)(daum 2010)
정난종 : 조선 鄭蘭宗(정난종)의 네 아들-임금을 보좌하고 균형을 잃지 마라/ 9달전, 2010년 1월 14일 (목)/ 조선 鄭蘭宗(정난종)의 네 아들-임금을 보좌하고 균형을 잃지 마라 -鄭光輔(정광보),鄭光弼(정광필), 鄭光佐(정광좌), 鄭光衡(정광형) 조선 최고의 정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중종 때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아버지는.../ cafe.daum.net/jeongian/ 鄭 安 會 (동래정씨 안산공파 청년회)(daum 2010)
정난종 :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 인물사/ 대건 | 2009.11.20. 16:21/ http://cafe.daum.net/ 鄭蘭宗(정난종) : 1433(세종 15)~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諡號(시호) 翼惠(익혜)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대교·감찰·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예조참판을 거쳤다. 그 뒤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형조참판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했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동지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0년(성종 1)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그가 남긴 금석문으로는 탑골 공원의 〈원각사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鍾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 등이 있다.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경기도 군포시에 그의 묘가 있으며 묘역 근거리에 동래정씨 고택이 있슴. 이곳에 묘를 쓰고 후손들이 묘역 관리를 위하여 조선시대에 지은 것으로 전함. 恭孝公(공효공) 朴仲孫(박중손 : 규정공 6대손 영해공 6대조)의 神道碑(신도비) 篆(전)함. ※篆(전) = 비각의 상단에 篆書(전서)체등의 글씨를 써준 사람.(daum 2010)
정난종(鄭蘭宗) : 본관(本貫) 동래(東萊), 시대(時代) 1433 ∼ 1489, 자(字) 국형(國馨), 호(號) 허백당(虛白堂)/ 이력(履歷)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 15) ∼ 1489(성종 20). 14世. 조선 전기의 명신·서예가. 자(字)는 국형(國馨), 호(號)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대교·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재차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참찬· 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趙孟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 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기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원각사 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 尹子雲神道碑〉·〈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 金鐵山碑〉가 있으며,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 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이 보기 드물며,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 《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金石苑 卷五, 朝鮮金石總覽 下, 槿域書畵徵, 韓國金石遺文(黃壽永, 一志社, 1976), 韓國古印刷文化史(金斗鍾, 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李完雨>(daum 2010)
정난종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정난종(1433-1489)은 풍양면 청곡리 별실(別室) 출신으로,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시호는 익혜(翼惠), 본관은 동래,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서얼 출신의 과거 응시를 반대했다(1460). 그 후에도 과거에 두 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형조 참판에 올랐다. 황해도 관찰사일 때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장정을 징발하여 공을 세우고 좌리공신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지고(1471), <세조실록>, <예종실록>편찬에도 참여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1477)로서 온성에 40리 장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중병이 생기니 참모들이 성종 임금께 알리고자 하였다. 정난종이 말리기를, "함경도는 오랑캐와 가까이 있는데, 내가 중병이라고 보고한다면 임금께서 반드시 놀라서 걱정을 하실 것이니, 병이 더 심해지면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오랑캐 이마거(尼麻車)가 정난종이 병났다는 소문을 듣고 쳐들어오려고 하자, 정난종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키면서 오랑캐 추장 수 십 명을 모아놓고 달래어 이마거를 치도록 하였다. 이마거는 겁을 먹고 도망해 버렸고, 정난종의 병도 나았다. 이 사실을 참모들이 또 임금께 보고하려 하니, 정난종은 말리기를, "직책상 당연히 한 일인데, 무엇을 번거롭게 임금께 알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서도 흉년으로 허덕이는 민심을 수습했고, 명나라에 사신(1485)으로 다녀와서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러 죽었다.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고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세조의 아낌을 받았는데, 어느 날 세조가 유고의 <주역>과 불교의 <원각경>의 우열을 물으니, <원각경>을 요사스런 글이라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정난종의 얼굴빛이 너무나 태연하여 처벌당하지 않았다. 정난종은 초서, 예서, 촉체(蜀體)를 잘 써서 서울의 돈화문 현판, 원각사 비문 등이 남아있고, 금속 활자인 을유자(乙酉字, 1465)를 만들어 <구결원각경(口訣圓覺經)>등의 책을 출판했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정난종 :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정난종 묘역과 신도비/ 속달동 산 3에 위치한 이 묘역은 경기지방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묘역 가운데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조선 세조(世祖) 때의 명신(名臣)인 정난종(鄭蘭宗)을 비롯 그의 맏아들 광보, 둘째 아들 광필, 그리고 광필의 넷째 아들 복겸과 6세손 주손·진원의 묘가 산등성 중턱에서 아래로 열을 지어 조성돼 있다. 묘역(墓域)에는 묘에 대한 신도비(神道碑)와 혼유석?석등?동자석?문인석등이 규례대로 갖춰져 있어 조선 전기의 분묘사?석비?금석문등 고고미술사 연구(硏究)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난종은 세종(世宗) 15년(1433)에 태어나 성종(成宗) 20년(1489)에 사망한 조선 전기(前期)의 문신(文臣)이자 서예가(書藝家)로 자(字)는 국형, 호(號)는 허백당(許白堂)이며 본관은 동래(東來)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가 뛰어나며 세조(世祖) 11년(1465)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해 주자체를 쓰도록 했는데 이 활자(活字)가 바로 유명한 '을유자'다. 정난종의 신도비(神道碑)는 높이 192㎝, 폭 82㎝, 두께 26㎝로 비문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 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생이 썼다. 둘째 광필의 신도비 비문(碑文)은 좌찬성 양세양이 짓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지정(指定), 보존(保存)되고 있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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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면 입암리 안승우, 13일 쌀 전업농 전국 선발대회 동상...축하합니다.
안승우(안승우(開浦面) 副會長 ‘쌀 專業農 選拔大會’ 銅賞) [記事] : 사단법인 한국쌀전업농 예천군연합회 안승우(53·개포면 입암리) 부회장이 2011년 11월 13일 열린 제14회 전국 쌀 대축제 및 전국 고품질쌀 생산우수쌀전업농 선발대회에서 영예의 동상을 수상했다. (사) 한국쌀전업농중앙회가 개최한 이번 대회에서 안승우 부회장은 고품질의 예천맥반석 쌀을 출품, 동상(한국농어촌공사 사장상)을 받았다. 안 부회장은 대규모(3만여평)의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4년째 ‘개포 내고향 육묘공장’을 운영하고 있다.(醴泉新聞 2001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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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