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2739:정난종(3)
작성자장병창 @ 2011.11.19 06:11:14

   예천의 자랑(2739) : 정난종(3)

---

 

  정난종 : 奉先寺鍾銘(奎12601), 姜希孟(朝鮮)撰. 鄭蘭宗書./ 1帖(5折 8面) 像 拓本 49.7×28.3cm./ 楊州郡 榛接面 奉先寺에 있는 大鐘의 銘文을 拓本한 것이다. 글은 당대의 巨匠 姜希孟이 짓고, 글씨는 鄭蘭宗의 작품이다. 鄭蘭宗은 서울의 圓覺寺 塔碑도  썼던  大家로, 이 鐘銘 또한 活達하여 그의 書風을 보기에 좋은 작품이다. 내용은 奉先寺의  창건  유래와 大鐘 주조 緣起, 그리고 그것을 찬양하는 韻文의 銘으로 되어 있다. 大鐘이라  하지만 鍾 위에 새겨진 글인 만큼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약 430자쯤 되는 짤막한  글이다. 그렇지만 이 鍾銘은 조선 초기의 불교에 대한 信心度라든가, 文臣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奉先寺와 왕실과의 관계등을 살피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鍾銘에 따르면 奉先寺는 朝鮮 제8대 睿宗이 그의 父王 世祖의  陵寢(곧 光陵) 守護를 위해 창건했던 사찰이며, 大鍾 역시 이때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연혁으로는 별로 오래된 梵鍾은 아니지만, 중량과 크기에 있어서는 주목되는 큰  종이다(重量 약 2만 5천근, 높이 7尺 5寸 5分, 徑 5尺 5寸 5分, 周圍 1丈  5尺  6寸).  문장은 장중·근엄하며, 여기에 불교적인 이상까지 가미되어 자못 雄麗한 맛이  있지만,  奉先寺의 事蹟 考證에는 다소 소흘히 했던 감이 있는 듯하다.(daum 2010)

 

  정난종 : <국조 문과 방목>/ 정난종(鄭蘭宗) 세조(世祖) 2년(1456년), 식년시(式年試) 정과8(丁科8)/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33년, 계축, 자(字) 국형(國馨), 호(號) 허백(虛白), 본관(本貫) 동래(東萊), 諡號, 封號 익혜좌리공신/동래군(翼惠佐理功臣/東萊君)/ > 가족사항 부(父) 정사(鄭賜), 조부(祖父) 정귀령(鄭龜령), 증조부(曾祖父) 정해(鄭諧), 외조부(外祖父) 이백인(李伯仁), 처부(妻父) 이지지(李知止), 자(子) 정광필(鄭光弼)/ > 이력 및 기타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영(丙戌1466英),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이조/판서(吏曹/判書), 호당,한림(湖堂,翰林)(daum 2010)

 

  정난종 : 묘(墓)/ 정난종(鄭蘭宗,1433-1489)/ 묘 군포시 속달동 동래정씨 묘역/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동래(東萊), 시호 익혜(翼惠), 자 국형(國馨), 호 허백당(虛白堂), 자(子) 정광필(鄭光弼)(daum 2010)

 

  정난종(鄭蘭宗) :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 경상도 慶尙道 [3] > 동래현 東萊縣/ 본조 인물 정란종(鄭蘭宗) : 두 번이나 과거에는 장원으로 급제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초서ㆍ예서 등을 잘 썼으며, 시호는 익혜(翼惠)이다.(daum 2010)

 

  정난종 : 정난종 고택/ 군포시 속달동 24-4/ 수리산 줄기의 동쪽 자락에 서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조선중기의 문신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그는 파시조(派始祖)인 동래군(東來君)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의 손자로서 이 가옥의 맞은편 산 중턱에 정난종의 묘가 있어 이로 인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행랑채 등 4동이나 원래는 사랑마당 바깥쪽으로 행랑과 연못, 작은 사랑채 뒤에 초당, 안채 뒤에 사당, 오양간 등이 있었다. 사랑채는 1877년에 지어졌으며, 안채는 178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당과 오양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사당은 60년대에 철훼하였으며, 방앗간이 있던 바깥행랑채는 70년대에 무너진 것으로 전한다. 사랑채는 전면 5칸으로 구성된 전후 툇집으로 누마루, 마루복도, 행사청 등 평면 구성과 칸의 분할이 독특하여 조선후기 살림집의 기능을 중시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daum 2010)

 

  정난종 : 정난종(鄭蘭宗) 본(本) 동래(東萊)/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世祖 命 撰 ; 崔恒 外 編./ 筆寫本. - [發行事項不明]./ 4卷4冊 : 揷圖 ; 26.9x17.2cm./ 四周雙邊. 半匡 ; 19.6x14cm.有界.8行字數不定.註雙行./ 序 ; 崔恒(1466)./ 세조가 명찬(命撰)한 것으로 최항(崔恒) 등이 교정, 보해(補解)한 것이며 1465(세조 11)년 송나라의 주희가 찬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석한 책이다. 각 권의 편차는 권1은 본도서(本圖書), 권2는 원괘(原卦), 권3은 명시책(明蓍策), 권4는 고변점(考變占)으로 되어 있으며 부도(附圖)로는 옥재호씨통석부도(玉齋胡氏通釋附圖), 복희칙하도이작역도(伏羲則河圖以作易圖), 대우칙낙서이작범도(大禹則洛書以作範圖), 선천팔괘합낙서수도(先天八卦合洛書數圖), 후천팔괘합하도수도(後天八卦合河圖數圖), 복희육십사괘방도(伏羲六十四卦方圖), 소자천지사상도(邵子天地四象圖), 주자천지사상도(朱子天地四象圖) 등이 있고, 또 서의(筮儀)가 부록되어 있다. 발문에서 "주역을 배우는데 있어 《역학계몽》은 학자의 지침이 되나 어의(語義)가 정심(精深)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뜻을 알 수가 없다고 왕께서 분부하시어 우리들이 교정하고 혹 미진한 것 같으나 또한 보해(補解)하였다"고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이 때 교정과 보해에 참여한 이는 최항(崔恒), 한계희(韓繼禧)와 김국광(金國光), 노사신(盧思愼), 구종직(丘從直), 정자영(鄭自英), 정난종(鄭蘭宗), 유희익(兪希益), 어세공(魚世恭), 최자준(崔自濬), 유진(兪鎭)등 9명이었다. 부록의 「서의(筮儀)」에는 시점(蓍占)의 방법이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역학의 입문서요, 《역학계몽》의 해설서로서 쓰여진 저술이다.(daum 2010)

 

  정난종 : 정난종(鄭蘭宗)  가문을 빛낸 분들/ 2006/07/25 16:15/ http://blog.naver.com/tgkit/ 1433(세종 15)∼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명신·서예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대교·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재차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참찬· 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趙孟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 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기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원각사 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 尹子雲神道碑〉·〈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 金鐵山碑〉가 있으며,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 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이 보기 드물며,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 《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金石苑 卷五, 朝鮮金石總覽 下, 槿域書畵徵, 韓國金石遺文(黃壽永, 一志社, 1976), 韓國古印刷文化史(金斗鍾, 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李完雨〉/ [출처] 정난종(鄭蘭宗)|작성자 보석이네(daum 2010)

 

  정난종(鄭蘭宗)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세조(世祖) 2년, 과거시험연도 : 1456 병자,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정과8(丁科8)/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난종(鄭蘭宗), 자 : 국형(國馨), 호 : 허백(虛白), 본관(本貫) : 동래(東萊)/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익혜좌리공신/동래군(翼惠佐理功臣/東萊君), 특별시 : 병술1466영(丙戌1466英),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이조/판서(吏曹/判書)/ [가족사항] 자(子) : 정광필(鄭光弼), 부(父) : 정사(鄭賜), 조부(祖父) : 정귀령(鄭龜?), 증조부(曾祖父) : 정해(鄭諧), 외조부(外祖父) : 이백인(李伯仁), 처부(妻父) : 이지지(李知止)(daum 2010)

 

  정난종 : 제목: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이름: 野鶴/ 등록일: 2010-06-24 22:12/ 조회수: 602 / 추천수: 14/ 익혜공(翼惠公) 정난종 선생(1433~1489)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돈화문 현판 등을 남겼다.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선생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래정씨 전체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13명이 정난종 선생의 후손에서 나왔다. 선생의 묘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번지에 있다. 저수지를 지나 묘소 아래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읽고 선생의 묘를 향하여 오르는데 길게 늘어진 산줄기가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내려 그 끝이 좁고 길게 끝나고 그 끝난 지점에 안내판이 있었다. 처음 오르는 부분 즉 혈장(穴場)의 순전(脣氈) 아래 부분이 길게 흘러 점점 좁게 빠지니 혈을 맺을 주인 격이 아닌 호종사(護從砂)의 형태를 띠어 약간 실망하였다. 올라갈수록 다소 가파른 지형인데 올려다보니 많은 묘들이 위에서 아래로 늘어서 있었다. 첫 번째 비각(碑閣)의 주인공이자 문인석이 두 개씩 좌우에 있는 묘가 바로 선생의 묘였다. 묵례를 올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위에서 내려오던 맥이 주된 기운이 이곳에서 거의 멈춘 형태였다. 혈장의 평탄한 면이 비교적 넉넉하고 순전이 불룩하게 앞으로 나갔으며 그 아래로 낙차가 크기 때문에 가파르게 흘러내리던 대부분의 기운은 이곳에 머물고 극히 일부만 아래로 흘러 내려간 형태다. 내맥(來?)을 타고 위로 올라가 줄기 전체를 살피니 주성(主星)으로부터 내려온 맥이 곧게 내려가지 못하고 좌선(左旋)으로 완만하게 굽어 내려갔다. 기복(起伏)은 없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 돌때마다 왼편 청룡 쪽으로 두 군데에서 분지(分枝)하여 요도지각(橈棹枝脚) 형태로 돌고 있는 반대편을 받쳐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 첫 번째 지각(枝脚)은 정휘겸(鄭?謙)공의 묘 아래로 내려갔고 두 번째는 정유청(鄭惟淸)공 묘 아래로 나갔다. 내맥(來?)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에 특별이 배부르게 살쪄 뭉친 곳도 없이 흘러 내려 그 끝이 약간 좁게 끝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바나나처럼 길고 굽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곳이 혈(穴)을 맺는 주맥(主?)인지 호종사(護從砂)인지 혼란스러웠다. 좌선(左旋)으로 돌고 있으니 백호 쪽의 어딘가를 감싸 보호하는 듯한 형태이며 기복(起伏)없이 그대로 흘러내리고 그 끝이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 내렸으며 물을 거스르기는커녕 물과 함께 나란히 진행되어 역수(逆水)하지 못하고 순수(順水) 하였으니 호종사로 의심하기 쉬운 형태였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내맥(來?)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정난종 선생의 음택에 도달하였다. 처음 산을 오르면서 묵례를 올리기 위하여 잠깐 머물렀을 때와는 느낌이 다소 새로웠다. 왜 이곳에 점혈(點穴)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혈장(穴場)을 전후좌우에서 살펴보았다. 이곳은 전체 묘역 중에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비교적 평탄한 면이 앞뒤로 넓었다. 그래서 바로 앞 소명당(小明堂)에 6세손 정진원공의 묘가 함께 할 정도로 넉넉한 편이었다. 맨 위의 정유진공 묘로부터 선생의 묘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내맥(來?)이 한번도 기복(起伏)없이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보니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리니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경사진 내맥(來?)에 음래양수(陰來陽受)로 평탄한 곳을 선택하였으며 혈장(穴場)의 조건 중 하나인 평(平)을 선택하여 이곳에 점혈한 것 같다. 따라서 이곳 전체 묘소 중에서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겠다. 혈정(穴情)을 살피고자 최종 입혈맥(入穴?)을 보니 이미 묘가 들어서서 원래의 형태가 다소 훼손 되었으나 급하게 내려온 맥이 완만하게 바뀌어 혈장을 이루니 혈장의 조건 중에 평(平)에 합당하므로 이곳에 기운이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묘 바로 뒤에는 큰 아들 정광보(鄭光輔)공의 묘가 있고 그 위로 둘째 아들 정광필(鄭光弼)공의 묘가 나란히 삼부자(三父子)가 역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 회원이 묻기를 비각이 세워진 상중하(上中下)로 나란히 있는 묘자리 중에 어느 곳이 좋은지 질문해왔다. 이곳 세 군데를 비교 분석하자면 위에 있는 정광필공의 자리는 바로 옆 청룡 쪽으로 하나의 줄기가 내려가고 그 위에 정유청공의 묘가 있을 정도로 좌우로 넓다. 그러나 그 옆으로 내려간 줄기가 바로 선익(蟬翼)의 역할을 한다면 선익이 발출(發出)한 그 부분은 뇌두(腦頭) 혹은 승금(乘金)에 해당되는 곳으로 혈처(穴處)가 아니다. 따라서 혈증(穴證)의 하나인 뇌두에 쓴 격이니 적합하지 않다. 가운데의 정광보공의 자리는 청룡쪽의 선익사(蟬翼砂) 아래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어 좋고 백호쪽도 미미(微微)한 암사(暗砂)의 흔적이 있어 아래보다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좋게 보기 쉬우나 혈장의 측면으로 가서 전체 기울기를 보면 가파른 각도로 내려와 평(平)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사진 곳을 인작(人作)으로 파내고 소명당(小明堂)을 돋구어 자리 잡으니 이곳은 기(氣)가 멈춘 곳이 아닌 지나가는 입혈맥(入穴?)상에 작혈(作穴)하였으니 역시 부적합하다. 아래의 정난종 선생 자리는 양 옆으로는 위의 두 자리보다 좁은 듯하나 상하(上下)로는 평탄한 면의 공간이 제일 넓다. 이것은 가파르게 내려오던 맥의 기운이 여기에서 비로소 멈춘 형태인 것이다. 상중하(上中下) 세 곳 중 유일하게 자연적인 평(平)을 유지하여 기운을 멈추었으니 이곳 정난종 선생의 자리가 가장 안정된 혈처(穴處)가 되겠다. 시야를 좀 더 멀리하여 좌우를 보면 청룡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쪽을 둥글게 감싸고 있어 유정(有情)하였으나 백호쪽은 숲에 가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이곳과 경쟁하듯 바짝 붙어 있어 겨우 좁은 골짜기로 경계를 구분할 정도로 이곳을 핍박하고 반배하여 무정하다. 따라서 그 골짜기의 물길이 이쪽을 감싸 돌지 못하고 오히려 반궁(反弓)으로 충사(沖射)하여 나가고 있었다. 청룡도 좌선(左旋)으로 돌고 내맥(來?)도 좌선으로 돌며 백호도 내맥(來?)을 떠다밀다 싶이하며 좌선으로 돌고 있는데 흐르는 물까지도 좌선으로 돌아 나가니 좌선룡(左旋龍)에 좌선수(左旋水)로 음양교도(陰陽交度)를 못 이루었고 백호의 무정(無情)으로 올바른 형태의 당국(堂局)도 이루지 못하였다. 백호 쪽에 확보된 내명당(內明堂)의 공간이 전혀 없으니 전체적으로 볼 때 내명당의 중심을 향(向)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 향하게 되니 모든 자손이 고르게 발복받지 못하고 잘 되는 자손과 그렇지 못한 자손의 차이가 현격한 상(象)이 되겠다. 그리고 국(局)의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고 변방에 거처하는 격이니 대지(大地)의 품격에 위배된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보면 선생의 자리는 내맥(來?)의 기복(起伏)이 없이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돌고 있으며 양쪽으로 선익사(蟬翼砂)의 역할을 할 만한 가까운 위치에 지각(枝脚)이 받쳐주지 못하였으니 혈(穴)을 맺을 수 있는 주인(主人)의 품격이 부족하다. 그런데 어떻게 후손들의 발복이 그토록 컷단 말인가. 큰 발복으로 대지(大地)를 기대하고 왔는데 너무나 평범한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 외에 다른 지역의 자리를 볼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큰 발복을 야기시킬만한 증거를 명쾌하게 밝힐 수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겠다. 다음기회에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폭넓게 소조산(少祖山)까지 밟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후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산을 내려왔다.(daum 2010)

 

  정난종 : 東萊君派 鄭蘭宗 선생묘 및 신도비-경기 군포시 속달동 산3/ 2년전, 2008년 6월 9일/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東萊君派  鄭蘭宗(1433~1489) 선생의 자는 국형, 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13년(1467) 황해도 관찰사로서 재직하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blog.daum.net/koreapungsu/ 하늘이 열린곳(daum 2010)

 

  정난종 : (군포)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묘·신도비·종택/ 2년전, 2008년 7월 25일/  (군포)허백당 정난종 묘·신도비·종택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1 정난종[鄭蘭宗, 세종 15년(1433)∼성종 20년(1489)]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본관은 동래, 시호는 익혜(翼惠), 아버지는.../ blog.naver.com/roaltlf/ 개미실사랑방(daum 2010)

 

  정난종 : 聖雄李舜臣將軍墓/ 지난달, 2010년 9월 11일 (토)/  ...(九里邑)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조선 태조릉)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홍릉의 세종대왕신도비, 안산의 정난종(鄭蘭宗) 신도비,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 등 전국 각지에 많은 신도비가 전한다. 그러나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blog.daum.net/ 密城 朴 善 泳(daum 2010)

 

  정난종 :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4달전, 2010년 6월 24일 (목)/ 익혜공(翼惠公) 정난종 선생(1433~1489)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돈화문 현판 등을 남겼다.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 선생의 다섯.../ blog.daum.net/fungsu_jiry 민중원(daum 2010)

 

  정난종 : 봉선사(奉先寺) 대종/ 4달전, 2010년 6월 24일 (목) | 남양주투데이 | view/ 해파문(海波文 : 파토문양) 장식 사이에는 강희맹(姜希孟 : 1424 ~ 1489)이 짓고 정난종(鄭蘭宗 : 1433~1489)이 쓴 장문의 글이 새겨져 있다. 특히 여기에는 종을 만든 연유와 동종 제작에...(daum 2010)

 

  정난종 : 군포 수리산 관통 고속道 건설 시민 반발/ 4년전, 2006년 10월 21일 | 경기조은뉴스/ 수리사(修理寺)는 고속도로의 직접 영향권에 있으며, 부원군파 종택(宗宅)과 경기도기념물 115호인 정난종(鄭蘭宗) 선생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게 된다. 한편, 이 도로는 2002년 말 처음 거론된 이후 군포지역 13개 사회·환경...(daum 2010)

 

  정난종 : 보물급 지하창고로 옮겨… 동종은 끝내 소실/ 5년전, 2005년 4월 6일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 불경 간행 사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썼다. 글씨는 정난종(鄭蘭宗) 작품이다. 이에 의하면 이 동종은 조선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왕이 선왕(先王)인...// 소실된 보물 낙산사 동종 중 명문 부분/ 2005.4.6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daum 2010)

 

  정난종 : 국내 최초의 출판박물관 개관/ 20년전, 1990년 6월 27일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 ...들인 뒤 그 위에 銀을 풀어 글을 쓴 [妙法蓮華經] 등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귀한 자료들이다. 또 조선 세조 때 鄭蘭宗의 글씨를 字本으로 삼아 주조한 동활자[乙酉字]를 가지고 만든 [碧岩錄]은 落帙本 아닌 全帙本이 선보이기는...(daum 2010)

 

  정난종 : 조선최강상인 1 역발산/ 冊/ 이용선 지음| 동서문화사 펴냄 | 2002-09-09/ 책본문 : ...그 정광필의 서자에 정화鄭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화는 정난종鄭蘭宗의 손자가 되는 셈인데 자기 할아버지 난종이 서자의 과거 금지법 .../ 73페이지(daum 2010)

 

  정난종 : 조선의 무기와 갑옷/ 冊/ 민승기 지음| 가람기획 펴냄 | 2004-09-30/ 책본문 : 화살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성종 18년의 기록에 정난종鄭蘭宗이, 지금 군기시의 화살은 화살촉이 짧아서 갑옷의 미늘을 뚫지 못하고 오직 착전촉鑿箭鏃은.../ 74페이지(daum 2010)

 

  정난종 : 하늘의 도. 3/ 冊/ 정찬주 지음| (웅진문학에디션) 펴냄 | 2007-11-20/ 책본문 : ...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의 자는 사훈(士勛), 본관은 동래,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이었다. 진사시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후 공이 처음으로 오른 벼슬은 성균관 학유.../ 16페이지(daum 2010)

 

  정난종 : 해동제국기/ 冊/ 신숙주 지음| 신용호 옮김| 범우사 펴냄 | 2004-02-05/ 책본문 : ...완성하다[예조판서 양성陽城 이승소李承召가 짓고, 이조판서 동래東萊 정난종鄭蘭宗이 씀].264 해동제국기34) 주 문왕의 아들. 무왕의 아우로 유약한 조카 성왕을 보필하여 훌륭한.../ 264페이지(daum 2010)

 

  정난종 : (신봉승 실록대하소설)조선왕조 500년/9. 설중매/ 冊/ 신봉승 지음| 금성출판사 펴냄 | 2010-05-26/ 책본문 : ...가지고 오도록 하라! 승지들은 어서`! ”좌부승지 홍도상洪道常, 우부승지 정난종鄭蘭宗, 동부승지 이수남李壽男이 나가더니,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세조는 다시 영순군 부, 귀성군.../ 136페이지(daum 2010)

 

  정난종 [專門資料] : 봉선사 대종 종명 탁본 (奉先寺 大鐘 鐘銘 拓本)/ 을유자(乙酉字)를 쓴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 송설체(宋雪體)로 썼는데 강건, 단정한 필치이며 힘이 있다. 보물 397호 奉先寺大鐘의 鐘銘 拓本.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韓國書蹟(이회여대박물과.../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난종 : 동래 정씨의 시조와 조상 알려주세여/ 6달전, 2010년 4월 9일 (금)/ ...정승과 2명의 대제학, 200명이 가까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이조판서와 우참판을 지낸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있습니다.../ 답변수: 1 | 조회수: 436(daum 2010)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