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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41) : 정보식-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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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식 : 1961- , 예천 출신, 대산공업사 대표이사 사장이다.(朝鮮日報 DB 2003,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paran 人物 2004)
정보식 : "신앙의 날개로 세상을 날자 " -정보식 대산 공업대표/ 곰TV | 00:47:50 등록일 2009.06.19 영상실행 상세 정보 내 생애 특별한 만남 제8회 " 신앙의 날개로 세상을 날자 " -정보식 대산공업 대표/ ch.gomtv.com(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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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鄭賜), 정묘(鄭墓) : 1400(정종 2)-1453(단종 1),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 본관은 동래, 결성현감 구령(結城縣監龜齡)의 3자, 학문과 덕망이 높아 모두가 추앙하였다. 1420년(세종 2) 22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그 해에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한림(翰林, 藝文館 儉閱)이 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이조(吏曹)의 좌랑(佐郞)과 예조(禮曹) 및 형조(刑曹)의 정랑(正郞)과 의정부 검상(議政府儉詳)과 사인(舍人)이 되고,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1448)에 이르러 외직(外職)으로 나가 진주 목사(晋州牧使)가 되었을 때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고, 54세로 죽었다. 문학과 덕행으로 1568년에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476년(성종 7) 병조판서 겸 순충보조공신(兵曹判書兼純忠補祚功臣)으로 내산군(萊山君)에 봉해졌고, 1516년(중종 11)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정사의 후손 중 영의정 정광필(領議政鄭光弼) 등 정승이 많다. 그 가계(家系)는 다음과 같다. 승원(承遠, 應敎, 墓龍宮縣委峰山)→해(該, 判事, 墓龍宮縣老峴山)→구령(龜齡, 縣監, 墓知保面馬山里)→사(賜, 直提學, 墓知保面道庄里)→3자난종(蘭宗, 東萊君)→광필(光弼, 領議政)→ᄋ→장자 유길(長子惟吉, 左議政), 2자ᄋ→유길자 창연(惟吉子昌衍, 左議政), 2자ᄋ자 지연(芝衍, 右議政)→ᄋ→장자 태화(長子太和, 領議政), 2자 치화(致和, 左議政), 3자 지화(知和, 左議政)→태화 아들(太和子) 재고(載고, 右議政)이다. 웅천(熊川)고을 동헌(東軒)에서 시로써 이르기를, "겹겹이 두른 뫼뿌리는 삼면을 에워싸고/ 넓고 넓은 물결은 끝간 데를 모를로고/"라고 하였다. [鄭墓] : 지보면 도장리 일쟁이(益庄)마을 복판 등성이인 대창맑(太乙山) 자좌 오향(子坐午向)에 있는 동래인 목사 정사(東萊人牧使鄭賜)의 무덤으로, 1453년(단종 1)에 이 곳에 묻혔는데, 우리 나라 8대 명당(明堂) 중의 으뜸이라고 한다.
[鄭墓의 傳說] : 1) 이 묘터를 얻기 위한 지관 박씨(地官朴氏)의 뛰어난 기지(機智)가 있다. 정사(鄭賜)는 진주 목사(晋州牧使) 재임 때 임지에서 죽었다. 목사라는 벼슬 높은 사람의 장사(葬事)일 뿐 아니라, 당시 풍수지리설에 흠뿍 젖어있던 사회풍조로 보아 상주들이 응당 자기 아버지의 묘터를 명당에 쓰려고 하였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하여 시체, 상주, 호상(護喪)군, 풍수, 상여군들을 태운 수 10척의 배가 진주 남강(晋州南江)에서부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당대의 명지관(名地官)인 박 풍수(朴風水)를 앞장 세워 산세와 지세를 살펴가면서 몇 달만에 마침내 도장리(道庄里)마을 앞까지 배가 왔을 때, 배 선두에 앉아서 동북편 산천의 지리를 살피고 있던 박 풍수가, "앗!"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서면서 배를 멈추라고 사공에게 고함을 쳤다. 선두에 선 배는 급히 멈추어 지고, 박 풍수가 가르키는 강 건너 동북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발 늦어 그만 놓쳤고나!" 말없이 서서 이윽히 한 곳만 바라보다가 무겁게 떨어지는 박 풍수의 비통(悲痛)에 가까운 탄성(歎聲)이었다. "바라보이는 저 곳이 천하 명당(天下明堂)인데, 현재 다른 사람이 묘를 쓰고 있다."라는 박 풍수의 말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현장에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상주들이 우겨서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묘터를 닦으려 하니, 물이 쏟아져서 묘를 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서 철수하노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철수하고 있는 상주에게, "우리가 이 자리에 묘를 들여도 좋습니까?" 라고 물으니, "우리가 쓰지 못하는 자리에 들이든지 말든지!" 라는 무뚝뚝한 대답, 수 삼차 다져서 묘를 써도 좋다는 확답을 듣고난 박 풍수는 조용히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광중(壙中)에 고여 있는 물 위에 겨 한 섬을 갖다 풀고, 놋젓가락 세 매를 물 속에 집어넣으라고 시키고, 인부 세 사람에게 호미 한 개씩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 오라면서 현장에서 수 천미터 떨어진 '도마(道馬)'라는 마을 논두렁 밑에 가서 논두렁 밑을 호미로 파라고 하였다. 세 사람의 인부가 박 풍수의 지시 대로 각각 세 곳의 논두렁 밑을 호미로 긁적이니, 갑자기 겨가 섞인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하며 놋젓가락 한 매씩이 물에 딸려 나오더니, 세 곳이 모두 샘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묘를 쓰려고 하는 현장의 물이 이 세 곳으로 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처음 이 묘터에 물이 고였을 때 금붕어가 놀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겨와 놋젓가락이 나왔다고 하는 샘들은 현재 도마(道馬) 마을 사람들의 식수(食水)로 사용되고 있고,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水量)이 한결 같고, 수정(水晶)처럼 물이 맑고, 맛이 좋다고 한다. 지금 이 세 개의 샘 이름이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으로 불려지고 있다. 2) 정사(鄭賜)가 죽자, 상주들이 명산(名山)을 찾기 위해 유해를 배에 싣고 남강에서 출발하여 수 백리 낙동강을 거슬러 오다가 비봉산(飛鳳山) 앞에서 멈추고 물맛을 보자 명산이 있으므로 묘터를 바라보니, 누군가가 한 발 앞서 광중(壙中)을 하고 있었다. 이미 천리 길을 찾아온 묘터는 남의 손에 갔으니, 어느 복 많은 이가 묘터를 얻었는지 인사나 하고 가자고 지사 박 풍수(地師朴風水)와 지리에 밝은 상주 정난손(鄭蘭孫)의 5형제가 와서 문상(問喪)을 하니, 이들(安東 權氏)은 광중에 물이 가득 고여서 묘 쓰기를 단념하고 막 돌아가려던 참이므로, 그 자리를 얻어서 동서로 5리씩이나 떨어진 세 곳에 우물을 파고, 광중에 왕겨와 대나무 젓가락 세 개를 넣었더니, 광중의 물이 그 세 곳의 우물로 빠져나가고 반석(磐石)같이 굳어진 후 안장(安葬)했는데. 이 묘를 쓸 때 황금빛 물고기의 한 쪽 눈을 다쳤으므로, 이 묘의 후손들은 한 쪽 눈이 작다고 한다. <상재록(桑梓錄)>에서는 이 곳의 산세(山勢)와 좌표(座標)에 대하여 이르기를, "동으로 사창(社倉)이 10리(里), 구담(九潭)은 20리, 동남으로 연화산(蓮花山)이 1리 쯤이니 곧 외청룡(外靑龍)이고, 남으로 낙동강이 1리, 남서로 예천의 다인창(多仁倉)이 5리 쯤의 강 건너에 있고, 서로 삼수정(三樹亭)이 10리, 서북으로 나부산(羅浮山) 아래 매화촌(梅花村)이 10리, 북으로 자래등(鼈山)까지 2리 쯤이고, 이 산이 후공(後拱)이 되고 위봉산(委峰山)까지는 10리, 북동(北東)으로 도경촌(道京村)의 구촌(九村)이 등너머에 있다. 노현산(老峴山)이 남쪽으로 10여 리를 달리다가 또 서남향인 바른 쪽으로 굽이쳐 국(局)으로 들고 줄기가 벋었고, 또 기봉(起峰)하여 연속으로 너댓 마디가 솟아나서 남쪽을 향해 탁 트이어 혈(穴)이 마련되고 후주산(後主山)의 산허리가 불쑥 솟으면서 넓직하고 둥그렇고 매우 단정하게 생겼는데, 그 여남은 걸음 아랫쪽에 모셨다. 청룡 백호(靑龍白虎)가 명당(明堂)을 안존(安存)하게 감싸고 강 건너 비봉산(飛鳳山)이 안산(案山)이고, 주안(主案)은 같은 근원에서 가지가 벋어 멀리 달려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라고 하였다(世宗實錄, 國朝人物考, 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朝鮮寰輿勝覽 1927, 醴泉郡誌 1939, 내고장醴泉 1984, 韓國人의 族譜, 知保面誌 1987, 浣潭誌 1992). [王朝實錄]
정사 : 동래 정씨 발복지 鄭賜墓/ 작성자 최윤상/ 2004/08/18/ 동래 정씨 발복지 鄭賜墓/ 본래는 답사 순서에 따라 仙夢臺와 巳頭穴에 대해서 쓰려했으나 鄭賜墓에 관심을 두어 順序를 바꾼 점을 諒解드립니다. 鄭賜 先生墓는 醴泉郡 지보면 지보리 익장 마을에 세종때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분으로 釜山 양정동에 있는 2세조 정문도 墓와 함께 兩大鄭墓로 알려져 있다. 동래 정씨는 우리나라 門閥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집안이다. 그분의 아들은 5명인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정난종이며 그분의 後孫에서 政丞 13명을 배출했다. 성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은 정난종의 아들이며 군포시 속달동 산 3-1번지에 있으며 수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墓域은 8월 31일에 踏査하기로 되어 있으니 期待가 된다. 그 외에도 대제학 2명 호당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과 문과급제 198명을 배출했다. 사실이 입증하듯 이 墓가 많은 風水人들의 觀心을 끄는 것은 당연한 論理인 듯 싶다 동래 정씨가 朝鮮時代에 17명의 政丞을 배출했으니 말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이곳에 오르면서 느끼는 所感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에서 볼록 솟은 부분이 혈장에서 볼 때 右측에서 左측으로 白虎 役割을 하는 것을 보았다. 墓의 왼쪽 부분은 물길이 나있는 듯 꺼진 모습이었다. 脣氈부분 앞에는 습기가 많아 보여 장마의 영향일까 생각할 수 있으나 다른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맑고 신선하여 여름 踏査치고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넓은 廣野에서 穴을 찾기 위해서는 太祖山에서 出脈한 龍이 龍脈을 따라오면서 主山의 模襲을 보고 주변 산의 높고 낮음과 遠近高低 過峽은 어떤 模襲일까 靑龍 白虎 案山 朝山 明堂 江河水 등 원만한 보국이 어떤 模襲인지 周邊山과 물의 흐름과 發源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鄭賜 先生 墓까지 龍脈을 살펴보면 백두대간에서 태백산을 거치면서 선달산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금계 저수지와 금계천이 悠悠히 흐르고 제1 연화봉과 제2 연화봉이 죽령을 지나면서 發源한 남원천 옥녀봉에서 지구산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發源한 석관천 묘적령 저수령에서 흘러나오는 한천 사부령 국사봉을 이으면서 금곡천과 중평천 등 모든 물들이 合流하여 내성천을 이루면서 혈장 뒤로 拱背水를 이루니 이를 水纏玄武라고 하는데 물이 玄武 역할을 하는 것으로 현무봉 뒤를 감싸고 있으므로 主龍의 生氣가 조금도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고 혈장으로 集中될 수 있기 때문에 大穴을 결지할 수 있다. 拱背水는 흘러 들어온 河川이 穴의 後方에 흐르지만 太祖山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龍脈을 따라 흐르거나 그 水源이 길면 길수록 福運이 따른다고 말해지고 있다. 산 뒤쪽에는 拱背水가 흐르고 산 앞쪽에는 낙동 정맥과 태백산에서 박달령 주실령 예배령을 거처 문수산과 갈방산이 조운산으로 이어지면서 송야천과 풍산천을 이루는데 학가산과 보문산의 신역천과 함께 거대한 낙동 강물을 형성하여 가까우면서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暗拱水가 흐르고 있으니 吉地가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다. 옛말에도 百里來龍에서는 百里의 局勢가 나의 것이고, 千里龍에서는 千里의 局勢가 나의 것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暗拱水의 特徵은 가까이 있으면 좋고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理由인즉 靑龍 白虎와 案山이 周密하여서 周邊山들이 관쇄가 잘 될수록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明朝不如 暗拱이라 有情한 暗拱水는 穴앞의 물보다 좋다는 뜻이다. 然 論水來去之 물의 오고 감을 論함에 있어서 地欲其來無源 흘러서오는 그 根源은 알 수 없을 만큼 길어야하며 其去無流라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은 볼 수 없어야 最高의 吉이라 했다.
天地와 陰陽은 本來 서로 다르지만 相互關係를 維持할 때 萬物은 서로 通하는 法 마치 日과 月은 다르나 서로 通하여 合하면 明즉 밝을明이 되듯이 拱背水와 暗拱水가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穴앞 明堂은 움푹 패어있어 커다란 그릇처럼 보이는데 靑龍白虎가 활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模襲이 融聚明堂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明堂을 보았으니 龍의 脈을 살피기 위해 過峽處를 보러 가는데 백두대간에서 학가산과 대붕산 검무산을 거처 終着地인 연화산 줄기 玉女峰을 만들고 낮아졌다가 남은 힘을 모두 吐하여 만든 玄武峰은 그야말로 壯觀이었다. 마치 구름을 뚫고 飛上하려고 몸을 감고 엎드려 있는 雲中蟠龍처럼 구름 위로도 솟아오르고도 남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궁금증은 過峽處인 結咽束氣 處에 있었다. 過峽處에서는 前進하는 生氣를 모아서 묶은 龍의 허리로서 露出이심하기 때문에 龍의 特性을 알 수 있으면서 虛하고 散漫하면 生氣가 흩어져 穴의 結地가 힘이 들고 低凹하므로 곧 바람이 過峽處를 射하면 殺風으로 氣는 흩어질 수밖에 없다. 迎送砂가 있어야 하는데 送(보낼송)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식을 出家시켜 보내니 迎(맞이할영) 그 아내는 남편을 도와 家庭의 幸福을 꾸며 가는 것이 보람과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런 어진 아내를 남편이 맞이하듯 마중 나가는 迎砂가 있어야 좋다. 그런데 迎送砂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主龍의 穴을 맞이하기 위해서 太祖山에서 出脈한 龍은 開帳 穿心과 起伏 剝換 過峽을 거치면서 惡氣를 모두 정제하고 生氣의 量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龍의 목을 묶고 氣를 모으는 것을 結咽束氣라고 한다. 만일 結咽束氣가 破傷되었거나 너무 길면 氣를 束氣하지 못하여 제대로 혈장에 供給할 수 없어 穴을 結地하기가 곤란할 수 있는데 多幸히 결인속기 처는 아주 짧았다. 自然의 養分은 必要한 만큼 攝取할 때 잘 자랄 수 있는 法입니다. 無條件 肥料를 많이 준다고 튼튼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 人生 역시 삶이라는 배를 타고 人生이라는 넓은 바다를 航海하면서 우리는 未來에 대한 꿈을 꾸고 希望의 닻을 올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도 너무 빨리 핀 꽃은 빨리 지기 마련이다. 서너 치 흙 밖에 담기지 않은 花盆 위에 핀 꽃이라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各 段階마다 必要한 滋養分이 있었던 것이다. 結咽束氣의 重要性은 말로서 다 表現할 수가 없다.
우리 일행은 다시 혈장 앞으로 내려오는데 부드러우면서 위이를 하면서 내려오는 龍脈은 殺氣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내려와 龍을 보니 破口는 坤破, 向은 癸坐丁向 正墓向이다. 四局의 絶胞宮으로 파구되고 正局의 12胞胎의 墓向을 正墓向이라고 한다. 물은 穴左측에서 得水하여 穴앞 明堂을 지난 다음 右측으로 破口되는 左水倒右하여야 하며, 龍은 右旋龍이 原則이다. 穴 左측의 장대한 帝王宮에서 得水한 물이 衰方水 病水 死水의 氣運을 가지고 穴앞 明堂에 모여 墓向에서 穴의 氣運을 供給해주고 絶胞宮으로 破口된다. 龍眞穴的에 正墓向이면 發富發貴하며 福壽雙全한다. 穴은 窩穴로서 陰來陽受이며 開口穴 掌心穴 (손바닥으로 본다면 그 中心 이라고 본다)이다. 窩穴은 深窩 闊窩 狹窩로 나누는데 先生의 墓는 闊窩로 보인다. 왜냐하면 오목 들어간 부분이 아주 넓었다. 先生의 墓 양옆으로 封墳 두 개를 만들어 놓았다. 뒷산의 이름은 玉女峰이고, 案山은 玉女彈琴形이라야 맞는 듯하다. 玉女端坐形이라면 明鏡案이나 머리빗을 닮은 산이 있어야 한다. 玉女가 丹粧하는 것은 여자가 化粧을 해야 하므로 산봉우리가 마치 여자의 머리처럼 둥글게 생기고 머리카락처럼 여러 개의 地脚이 있어야 한다. 全體的으로 산은 깨끗했으며 玉女가 거문고나 가야금을 켜야 만이 앞에 있는 산 비봉산이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비주를 했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여인의 가야금 소리를 한 쪽다리를 꼬고 感想하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만약 玉女端坐形 같으면 外面한 模襲이 되어 여성의 가슴을 象徵하는 두 봉우리를 만들었어도 裨補로서의 價値는 없었을 것이다. 비봉산이 直接的인 案山이라면 外面을 했으므로 안 되지만, 案山을 玉女彈琴形으로 보았으므로 가야금 소리를 듣는 비봉산이라면 비봉산이 다리는 꼬고 있으나 둘이 알아서 할 일은 充分히 알아서 할 모양이다 .......물론 필자의 생각일 뿐 여러 見解가 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daum 2010)
정사 : 동래정씨 13세 정사(鄭賜)의 묘 비석(예천)| 이한방 | 2010.01.06. 23:23/ http://cafe.daum.net/poongryuhahoi/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오백송으로 울창하였다고 하는 정사의 묘소/ 동래정씨 13세 정사(鄭賜)의 묘/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1400(정종2)년~14583(단종1)/ 직제학 진주목사時 별세/ 증 좌찬성/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예문관 직제학 동래 정사 연안군부인 이씨 합장지묘(有明朝鮮國通訓大夫藝文館直提學東萊鄭賜延安郡夫人李氏合葬之墓)/ 옥녀측와형국(玉女側臥形局)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진 터/ 답사 때 마침 부산 거주 동래 정씨 문중에서 관광버스로 오성산 참배차 이곳에 오셔서 음복도 얻어먹고 명당자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니 기쁨 두 배.../ 출처 : 참 나를 찾아 山寺로의 여행/ 글쓴이 : 신기루(daum 2010)
정사 : 정사(鄭賜)의 묘소/ 3년전, 2007년 4월 11일/ 예천군 지보리 정사(鄭賜;직제학공)의 묘소/ 글 작성 시각 : 2006.02.09 12:00:13/ 20)길(吉)한 땅 시리즈 - 예천 지보리 정사(鄭賜)묘/ 서광석 논설위원/ 산. 수(山·水)와 산형(山形) 조화 잘 이룬 옥녀망선형.../ cafe.daum.net/jeongsanggi/ 동래정씨 이야기(daum 2010)
정사 : 정사(鄭賜)의 묘소 (태을봉 아래 玉女端坐形) 한국 8대 명당| ~(づ^.^)づ 풍수사진자료/ 하늘빛푸른비/ 조회 187 | 2008.04.01. 22:34/ http://cafe.daum.net/ 정사(鄭賜)의 묘소 (태을봉 아래 玉女端坐形) 한국 8대 명당/ 정사는 동래정씨 직제학공파의 파조로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예천 지보리에 있으며 와혈로 정혈처에 산소를 썼다. 정사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정난종의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다.(daum 2010)
정사 : 정사(鄭賜)| 가문을 빛낸 분들/ 참살이/ 2007.04.21. 14:47/ http://cafe.daum.net/jeongsanggi// 정사(鄭賜) 가문을 빛낸 분들/ 2006/07/25 17:30/ http://blog.naver.com/tgkit/ 1400(정종 2)∼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는 구령(龜齡)이고,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다. 1420년(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어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감찰·정언·검열을 역임하고 이조·예조·형조의 낭관을 지냈다. 1448년 예문관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경상도로 가서 일본으로부터 오는 단목(丹木)·동·철 등을 수령하였다.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경상도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봉안되었다. 찬성에 증직되었다.(daum 2010)
정사 : 정사선생 묘/ 지난달, 2010년 9월 27일 (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익장마을 -광보 鄭賜- 蘭宗-光弼(영의정)-福謙(부사공)-惟吉(임당공)-昌衍(좌의)-廣成(제곡공)-太和(영의)-載嵩(우의) -致和(좌의) 본관 동래(1400-1453), 조선초기문신, 세종2년(1420년)에 사마시.../ blog.daum.net/ jinsan의 생활역학(daum 2010)
정사 : 鄭賜의 부인 연안이씨의 계보/ 작년, 2009년 8월 26일/ 鄭賜의 부인 연안이씨의 계보/ 시조 李茂 |17 -18대 | 1세 李漬 : 高麗左右衛保乘將軍通禮門副.../ blog.daum.net/jeonryu/ 나의 八高祖(daum 2010)
정사 : 동래정씨의 발복지 정사(鄭賜) 묘- 67차/ 2003년8월24일/ 경북 예천답사/ 4년전, 2006년 11월 2일/ 동래정씨 발복지 정사(鄭賜) 묘- 옥녀탄금혈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익장 마을에 정사 묘가 있다. 이곳은 부산 양정동에 있는 2세조 정문도(鄭文道) 묘와 함께 양대 정묘(鄭墓)로 알려져 있다. 동래정씨는 우리나라 문벌 중 다섯.../ blog.daum.net/ 행복의 문(daum 2010)
정사 : 정사(鄭賜) 선생 묘 답사기(日園 /2003-08-07)/ 2년전, 2008년 3월 7일/ 정사(鄭賜) 선생 묘 답사기/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익장(益庄)마을에 터 잡고 있는 조선 초기의 문신 정사(鄭賜){1400∼1453} 선생의 墓는 동래정씨 문중에서 부산의 양정동 華池山 자락에 터 잡은 鄭文道 선생의 묘와 더불어 양대.../ blog.naver.com/almail/ 화동(花洞) 1번지(daum 2010)
정사 : 동래정씨 鄭賜의 8 고조도/ 2년전, 2008년 3월 13일/ 동래정씨 鄭賜의 8 고조도/ blog.daum.net/jeonryu/ 나의 八高祖(daum 2010)
정사 [專門資料] : [간행물] (世宗朝)鄭賜/ 安鐘和(daum 2010)
정사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사회과 수업) 우리고장부산의 명당 (9p)/ 동래 정씨 문중에 예천군 지보면 익장(益庄)마을에 있는 정사(鄭賜)의 묘와 더불어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묘(名墓)가 있다.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華池山) 기슭에 터잡고 있는 중시조.../ 해피캠퍼스 | 2003.11.29 | 태그: 부산명당 , 풍수지리 , 명당 , 사회(daum 2010)
정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甲申五月十二日午時, 上御景賢堂。晝/ 者斤萬|李尙默|榮進|李弘稷|任珹|閔弘烈|李弘稷|榮進|李基德|任珹|李基德|榮進|李章吾|啓禧|金宗瑞|皇甫仁|鄭賜|金宗瑞|李運弘|安興頃|運弘|李運弘|李運弘|尹勉憲|勉憲|李晉圭|朴志源|李宅鎭|李在協|之|李碩載|之...(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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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