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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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68) : 정영후(2)-정옥(1)(附 대창고 출신 우남석, 1일 진보중고 교장으로 승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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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후(鄭榮後) : 자 인보(仁輔), 호 매오(梅塢), 생졸년 1569 (선조 2) - 1641 (인조 19), 시대 조선 중기, 본관 동래(東萊), 활동분야 / 은사/ [상세내용] 정영후(鄭榮後)에 대하여 :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보(仁輔), 호는 매오(梅塢). 관직은 참봉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모부인을 모시고 산속에 피란하였다가 적군을 졸지에 만났다. 화가 어머니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몸을 드러내어 적 앞에 어정거리니 적이 쫓아 와서 어머니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적에게 잡혀 위협을 당했지만 조금도 안색의 변함이 없이 땅바닥에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有老母]”는 세 글자를 쓰는 뜻이 매우 간절하니 적의 괴수가 감동되어 석방해 주었다. 이에 다시 서로 만나 타향 객지로 전전하느라 간난(艱難)하고 괴로움이 아울러 이르렀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함을 거르지 않았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daum 2010)
정영후 : [ 간찰 > 정영후(鄭榮後)-동래/ * 상태 양호./ 조선 선조 때의 문인.학자. 공의 姓은 鄭. 諱는 榮後. 자는 仁輔이다. 정영방과는 형제지간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梅塢遺稿>가 있다.(daum 2010)
정영후 [專門資料] : 挽詞[鄭榮後]/ 간행물/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영후 : 동래정씨/ Daum 카페 | 지난달, 2010년 10월 27일 (수)/ ...중수하여 學規를 세우고 經史를 가르침. 제향:浣潭書院(龍宮). ▣참고:『嶺南人物考』 ?집필:김태안 정영후(鄭榮後):1569(선조 2, 기사)∼1641(인조 19, 신사). 본관 東來. 자는 仁輔. 호는 梅塢. 湜의 子. 외조는 安東 權濟世.../ cafe.daum.net/woruddPcjsrns/| 재경예천군민회(daum 2010)
정영후 : Re: 안동의 금석문 자료-1(정영방의 묘갈명외 3건)/ Daum 카페 | 8달전, 2010년 3월 9일 (화)/ 효성스럽고 우애가 뛰어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성심을 다해서 상례를 마쳤으며, 형인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에게는 우애와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10리 거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맛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cafe.daum.net/| 교리 남산골(daum 2010)
정영후 [專門資料] : 梅塢先生逸稿/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영후 : yeongnam/ 영남일보 | 작년, 2009년 5월 28일/ ...(己卯名賢) 중의 한 분이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정환의 현손이요 삼수의 7세손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는 학봉(鶴峯) 김성일의 제자이다. 일생토록 학문과 실천에 힘썼고, 선조 때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내렸으나.../ www.yeongnam.com(daum 2010)
정영후 : 예천군 풍양면 '삼수정'/ Daum 카페 | 작년, 2009년 4월 26일(daum 2010)
정영후 : 동래정씨 며느리 교육가(정기매 지음)/ Daum 카페 | 작년, 2009년 8월 13일/ (雪消虎踞之儀) = 호랑이 앉은 자리에 눈이 녹아 있는 모양. ※筆者 鄭己梅(1933 ? ) = 29世孫임. 매오(梅塢)공 휘 정영후(鄭榮後)파. 원철(源喆)의 장녀로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자라나서 예천군 개포면 금리 청주한씨댁으로 출가하여 .../ cafe.daum.net/| 동래정씨 대구경북화수회(daum 2010)
정영후 : 남고집 (南皐集)(17c)/ 웹문서/ 高靈에서 출생하여 8세에 문리를 터득하고 9세 때 참봉 金聲振에 受學하였다. 1623년(인조 1)인 19세 때 참봉 鄭榮後의 딸 東萊 정씨와 혼인하였다. 20세 때 정경세의 墨谷第에 나아가 수학하고, 23세 때 수암 柳袗에게 수학하였다..../ e-kyujanggak.snu.ac.kr(daum 2010)
정영후 : 사림의 향촌생활과 시가문학/ e-Book/ 최재남 지음 | 국학자료원 | 1997.02.20/ 책본문 : ...참여한 인물로는 鋤歸子 鄭允諧(1553-1618), 淸風子 鄭允穆(1571-1620), 梅塢 鄭榮後(1569-1641), 石門 鄭榮邦(1577-1650), .西 李光胤(1564-1637)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윤해는.../ 392 페이지(daum 2010)
정영후 : 冊板名 매오선생일고(梅塢先生逸稿) 編著者 정영후(鄭榮後)/ 소장자 판각사항/ 姓 名 : 정일우 版心題 : 매오선생일고(梅塢先生逸稿)/ 門 中 : 동래정씨 매오공파/ 크기 : 53×19×2 (가로ⅹ세로ⅹ폭/단위㎝)/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820/ 印刊年度 : 1837년/ 관리자 : 한국국한진흥원 完本 數 : 48/ 現存 數 : 48/ 缺落 數 : 0/ 匡 郭 : 四周雙邊/ 界 線 : 有/ 魚 尾 : 內向二葉花紋魚尾/ 行 款 : 半葉 10行 19字/ 上下鼻線 : 白口/ 마 구 리 : 有/ 序 文 : 류이좌, 정기선(柳台佐, 鄭基善)/ 跋 文 : 정교, 정필기, 정인기(鄭僑(1828), 鄭必奎(1828), 鄭仁器(1837))/ 특기사항 기록문화링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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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鄭玉) : 1694(숙종 20)-1760(영조 36), 예천읍 고평리 출신,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본관은 청주, 약포 탁(藥圃琢)의 후손, 유학(幼學) 석제(碩濟)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남달리 대담한 용맹과 놀라운 슬기를 겸비(兼備)한 위에 언제나 얌전하고 확연(確然)하고 무거운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빠른 말과 가벼이 행동함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재상(宰相)의 그릇'이라 했던 것이다.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725년(영조 1) 증광 생원시에 2등 9위로 합격,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 병과에 5위로 급제,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 1731)에 부임하였다. 그런데 당시 율봉도에는 커다란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심지어는 찰방 소유의 우졸(郵卒)들까지 모두 굶주린 나머지 부황병(浮黃病)에 걸려 사람의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무렵에 부임한 그는 지체없이 말먹이는 콩과 곡식으로는 죽을 끓여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고, 칡을 캐어 삶아서는 말을 대신 먹였던 것이다. 뿐 아니라, 그는 녹봉(祿俸)까지 한 꿰미도 갖지 않고 다 털어서 구제하는 등 온 마음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마침내는 한 사람의 굶어죽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지방의 민정(民政)을 살피러 다니던 암행어사는 그의 이러한 일을 모두 조정에 보고하자, 영조는 친히 한 필(匹)의 망아지를 하사(下賜)하여 그를 장려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뿐 아니라, 이러한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그 고을 백성들은 너나 없이 몰려나와 그의 수레를 휘어잡고 차마 보낼 수 없어 했다. 그리고 정작 그가 떠난 뒤에는 돌비(碑)에 그의 덕을 깊이깊이 새겨 넣고 영원히 사모의 정을 붙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뒤 황해도 도사(都事, 1734)가 되어 검전교차관(檢田敬差官)을 겸임하기도 하였고, 또 시위(試圍)를 맡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중요한 임무들을 띠게 되자, 이곳저곳에서 부탁하는 편지가 들어오는 대로 좋은 얼굴로 웃고 받아 두었다가 막상 부임길에 오르면서는 모두 그의 말머리에 모아 놓고 통쾌하게 불살라 버리고 총총히 임지(任地)로 향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임지에 도착한 그는 한결같이 모든 것을 법에 의하여 가차없이 처리하고, 그의 상관의 어떠한 부탁이라 할지라도, 그는 또한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어 보령 현감(保寧縣監, 1742)에 부임하게 되었다. 마침 부임차 가는 길에 율봉(栗峰)을 지나게 되었는데, 율봉(栗峰)의 우인(郵人)들은 남녀노소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메인 소리로 늘어서서 절을 하면서, "이 어른은 옛날에 우리 부모님들을 살려 주신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라고 울먹이면서 각각 음식을 들고 나와 맛이라도 보시라고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임지에 이르러서는 온 정성을 기울여 백성을 다스렸을 뿐 아니라, 털끝만치도 백성의 재물이나 국가의 법에 저촉된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당시 그 지방장관(長官)으로 있던 이종성(李宗城)은 그의 훌륭한 정치에 탄복한 나머지 그가 요청한 시정 사항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극진히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경성 판관(鏡城判官, 1751)이 되었는데, 이 때도 그는 또 커다란 흉년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도 지체없이 구제 대책을 강구해 나가면서 우선 굶주린 백성으로 의지할 곳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관사(官舍)를 주어 거처케 하고, 죽을 끓여 매일 두 차례씩 먹여 살렸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딱한 사정을 상사(上司)에게 알리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곡식을 수로(水路)로 운반하여 각 사(社)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남은 것은 또 아낌없이 이웃 고을로 넘겨주어 버렸다. 그러자 한편 그의 밑에서 구제를 감독하던 어떤 사람은 뒷날을 생각해서 이웃 고을로 넘겨주지 말자고 요구해 왔던 것이다. 그 말에 그는, "이웃 고을의 급함은 곧 나의 급함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백성을 살리는데 있어서 어찌 내 구역 네 구역의 한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루는 양식을 싣고 오던 배가 풍랑을 만나 실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목메어 기다리던 백성들은 너나 없이 그날 밤을 새우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절도사(節度使)와 싸우다시피 하여 결국은 군량미(軍糧米)를 얻어내어 계속 그들의 양식을 이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관리들로 하여금 쌀이며 미역 등과 적은 솥을 지게 하고, 자신은 한 필의 말과 두어 명의 종을 데리고 아무리 먼 곳이라 할지라도 몸소 찾아다니면서 구제의 실정을 감독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성 앞에 그 고을 백성들은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지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또 들나물을 캐어가지고 와서는, "이 나물이 참 맛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서로 맛 좀 보라고 다투어 말했던 것이었다. 뿐 아니라, 그는 백성들에게 방축(防築) 쌓는 방법을 가르쳐 관개(灌漑)를 편리케 하여 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치적을 당시 관찰사 역시 최고의 치적으로 평가하고 정부에 보고하자, 영조는 특명을 내려 그를 통정(通政)의 지위로 승품시켜 주었다. 그가 그 곳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그 곳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뿌려 그의 떠남을 슬퍼하면서, "우리를 살려준 어진 주인을 다시는 얼굴마저도 볼 수 없게 되었구나"하고는 곳곳에 나와 장막을 쳐 놓고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1759)로서 황해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에도 그는 또한 공평하고 청백함으로써 널리 이름났을 뿐 아니라, 당시 황해도 일대는 먼발치로 그의 소문만 듣고도 모두 즐거이 따라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몸은 옷을 견디어 이기지 못할 것 같이 약했다. 그러나 시비의 판가름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양보하거나 굴복하려 들지 아니하여 끝까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뿐이랴, 세상의 물욕이란 그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그의 마음은 맑은 호수 물빛 마냥 언제나 담연한 자세였던 것이다. 그 자신도 항상 말하기를, "내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란 없다. 그러나 물욕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보단 약간 적을 것이다." 라고 자신을 술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약관 시절의 일이다. 한 번은 밤에 변소엘 가는데 마침 개가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그의 뒤를 따르던 개를 확 채서 물고 도망쳐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재촉하여 빨리 방으로 돌아오라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호랑이는 벌써 개를 채어 갔소. 그러니 다시 오지는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뒤를 보더라는 것이다. 그 뒤 1727년(영조 3)에는 문과(文科) 시험을 치르고 같이 갔던 친구와 더불어 남한(南漢)에 나와서 시험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의 종이 서울로부터 달려와서 급제를 알려주었다. 때마침 그는 막 밥을 먹던 중이었는데, 그는 이 즐거운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동요의 빛마저 찾아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밥을 다 먹은 뒤 같이 밥을 먹던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놀란 빛이나 즐거워하는 빛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번은 그가 율봉도(栗峰道)의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버이를 공양하기 위하여 빌려 쓰고 미처 갚지 못한 해묵은 빚을 갚기 위하여 두어 꿰미의 동전을 자기 본집으로 보내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그 동전의 반으로써 그 빚을 갚아 주고, 나머지 반을 다시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인 남편에게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 부인의 맑고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마지않았던 것이다. 또 한 번은 그가 일찍이 경성(鏡城)에서 판관(判官)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제들에게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여 말하기를, "옛 책에 이르기를, '사람의 혈기가 쇠하게 되면 욕심이 많이 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언제나 자기만이 갖고자 하는 욕심을 경계하여야 된다.'라고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을 마치고 돌아올 때 행낭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때는 오로지 쉰 꿰미 남짓의 동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버이의 공양을 위하여 반찬을 사드리려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 다음 보령 현감(保寧縣監)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그 곳 관리들이 남아돌아가던 것을 주면서, "가지라고 권했으나, 나는 다만 네 꿰미의 돈을 가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에 돌아올 때에는 길이 먼 탓으로 두 필의 말을 사서 왔으니 이것을 팔면 아마 실히 백금은 될 것이다. 그러하니 내가 뒤에 만약 또 고을을 다스리게 된다면, 돌아올 때의 행장이 어찌 금번보다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것이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라고 소감의 일단을 말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그가 일찍이 관리들의 성적을 고사할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을 가차없이 법에 의하여 처벌해 버렸다. 그러자 왕은 그의 이러한 일에 탄복하면서, "정옥(鄭玉)이 아니면 다시 누가 이러한 일을 해낼 것인가."라고 칭찬하더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대간(臺諫)에 있을 때에도 마땅히 할 말은 숨김없이 다 하였을 뿐 아니라, 끝내 이해로써 그 마음을 변한 일은 없었다. 이처럼 고고(孤高)한 그의 지절(志節)을 영조(英祖)는 매우 가상히 여기면서, "대신(臺臣)의 풍체는 진정 이러해야 되느니라."라고 칭찬했던 것이다. 그 뒤 약산 오광운(藥山吳光運)은 온 정부 안의 인물을 평해 말하기를, "정공(鄭公)이야말로 공정 분명할 뿐 아니라, 더욱이 동서반(東西班)의 전형관(銓衡官)으로 봉직(奉職)하고 있을 때에는 인재를 뽑아 쓰는데 있어서 한 번도 실수한 일이 없었다."라고 회상해 말한 일도 있는가 하면, 또 한 번은 청대 권상일(淸臺權相一)이 승지(承旨)로서 입시(入侍)한 어느 날, 영조는 그에게, "영남 사람으로서 높은 벼슬에 등용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정옥(鄭玉)은 본 바탕이 도에 가까우며 아무런 욕심이란 없습니다. 더욱이 관직에 있을 때에는 맑으며 조심하는 것뿐이었나이다. 마땅히 영남 사람들의 으뜸이 될 것이옵나이다."라고 아뢰자, 영조는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 "나도 역시 그 사람을 알고 있지"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樊菴集, 歷代淸白吏賞 金元奉 編著 서울 1980 584-588쪽, 司馬榜目).
정옥(鄭玉)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영조(英祖) 3년, 과거시험연도 : 1727 정미,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병과5(丙科5)/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옥(鄭玉), 자 : 자성(子成), 본관(本貫) : 청주(淸州)/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725(을사) 생원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황해/감사(黃海/監司)/ [가족사항] 부(父) : 정석제(鄭碩濟), 조부(祖父) : 정집(鄭輯), 증조부(曾祖父) : 정시영(鄭時榮), 외조부(外祖父) : 김정휘(金鼎輝)(daum 2010)
정옥(鄭玉) : 자 자성(子成), 호 우천(牛川), 생졸년 1694 (숙종 20) - 1760 (영조 36),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청주(淸州),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3년 (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5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1년 (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2등(二等) 4위/ [상세내용] 정옥(鄭玉)에 대하여 : 1694년(숙종 20)∼1760년(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좌의정 탁(琢)의 5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석제(碩濟)의 아들이다. 권두경(權斗經)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담대하고 기지가 있었다. 1725년(영조 1) 진사가 되고 17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을 거쳐 대간이 되었는데, 시무(時務)를 조리 있게 고하며 이해에 좌우됨이 없이 간언하여 영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1759년 좌승지에 올랐다가 황해도관찰사로 부임, 임지에서 죽었다. 청렴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참고문헌] 英朝實錄, 國朝榜目, 承政院日記(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간행물] 輓詞[鄭玉]/ 정옥(鄭玉)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간행물] 輓章[鄭玉]/ 정옥(鄭玉)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持平鄭玉上疏, 伏以臣, 草野微,/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啓曰, 假注書李迪輔時無職名, 令/ 鄭玉|李迪輔(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大司憲兪基再度呈辭入達,/ 鄭玉|兪基|鄭純儉|金元行|金時默|李恒祚|李徽中(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掌令呂善應, 持平鄭晩淳/ 鄭玉|呂善應|鄭晩淳|李碩載|南雲老(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侍講院言達曰, 本院新除授兼/ 鄭玉|洪梓(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同副承旨李翼元, 今日不爲/ 鄭玉|李翼元(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思政殿訓義綱目板, 在岑/ 思政殿|湖南, 訓義綱目|訓義|小學,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御營廳言啓曰, 本廳哨官朔試/ 鄭玉|金鼎錫|李濟命|崔尙徵|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以左承旨鄭玉, 右承旨沈, 牌不進/ 鄭玉|沈|徐命膺(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弘文館言達曰, 本館上番闕直/ 鄭玉|朴道源(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啓曰, 假注書任觀周, 時無職名,/ 鄭玉|任觀周(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 前校理徐命膺, 付軍職/ 鄭玉|徐命膺(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以備忘記, 傳于鄭玉曰, 今日新舊軍/ 鄭玉|陳弼祚|田德雨(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都摠府言啓曰, 今日入直內三/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兵曹言啓曰, 今六月二十一日/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 今已夜深, 政事明日爲/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 禮房承旨置之, 戶房承/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又以兵曹言啓曰, 諸道邊將褒貶/ 鄭玉|金壽鼎|鄭起周|朴成彬|金壽昇|鄭起周|朴成彬(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司僕寺官員, 以一二提調意達/ 北道,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漢城府言達曰,京中流人等,/ 京中,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備忘記, 傳于鄭玉曰,宮園式例, 校/ 宮園式例, 鄭玉|徐命膺|鄭存謙(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義禁府言達曰,全羅道濟州牧大/ 江都|江都|京|江都|昌陵丁字閣|安陵|咸興|高山|居山|輸城, 鄭玉|申致夏|李天輔|金尙魯|韓翼|李宗白|洪鳳漢|洪益三|鄭玉|南碩老|全義采|李世演|天輔|天輔|益三|益三|益三|鳳漢|益三|鳳漢|益三|宗白|益三|益三|益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都摠府言啓曰, 今日入直內三/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宗簿寺官員, 以提調意啓曰,/ 鄭玉|成廟|中廟(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啓曰, 明日親臨陳賀時, 東宮陪從/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達/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 殷山縣監, 今日政擧行/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兵曹言啓曰, 頃者爛傷扈衛軍/ 鄭玉|金尙徵|朴東麟(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兵曹言啓曰,宗廟擧動時, 本/ 宗廟, 鄭玉|李碩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都摠府言啓曰, 今日, 入直/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明日秋享大祭齋戒相値, 常/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傳于鄭玉曰, 耆社諸臣入來, 則來待/ 藝文館,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以備忘記, 傳于鄭玉曰, 工曹參議金/ 鄭玉|金始煐(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校理宋文載, 修撰李錫祥,/ 鄭玉|宋文載|李錫祥(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成中,以吏曹言啓曰, 本曹佐郞鄭玉/ 李成中|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趙漢緯啓曰, 持平鄭玉, 引避退待,/ 趙漢緯|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所啓, 請充軍罪人李時蕃, 依律處/ 鄭玉|李時蕃(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正言鄭玉疏曰, 伏以天眷我東, 慶溢/ 關東|嶺南|關東|湖|嶺, 鄭玉|何孟春|魏相|魏相|陸贄|范鎭|燕|趙如愚|孝宗|覃吉|武宗|馬永成|劉瑾(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正言鄭玉疏曰, 伏以臣家在嶺南半千里/ 嶺南,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普昱啓曰, 大司憲金有慶, 持平鄭玉/ 李普昱|金有慶|鄭玉|趙明謙|洪昌漢|朴履文|閔(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備邊司郞廳來言, 今日,/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兵曹言啓曰, 禁衛營敎鍊官禁/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兵曹言啓曰, 明日宗廟擧動時/ 宗廟|京, 鄭玉|朴漢暉|金應淳(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以寶劍, 傳于鄭玉曰, 以前落點爲之/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啓曰, 吏曹參議朴相德, 旣有只推/ 鄭玉|朴相德(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明日常參, 取稟。令曰,/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以禮曹言達曰, 卽接昭顯官守直/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明日常參, 取稟。令曰,/ 鄭玉(daum 2010)
정옥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鄭玉達曰, 掌令呂善應, 持平鄭晩淳·/ 鄭玉|呂善應|鄭晩淳|李碩|南雲老|趙榮進(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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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창고 출신 우남석, 1일 진보중고 교장으로 승진...축하합니다.
우남석(우남석 醴泉女高 校監, 1일 진보중고 校長으로 陞進) [記事] : 예천 출신인 예천여고 우남석(대창고 졸업) 교감이 2011년 12월 1일자로 진보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가족으로는 부인 정재욱 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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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