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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777:정옥례(2)-정옥연-정옹(1)(祝김태우.풍양의용소방대)
작성자장병창 @ 2011.12.27 06:12:39

   예천의 자랑(2777) : 정옥례(2)-정옹(1)(附 대창고 김태우, 도전골든벨 왕중왕된 것이 25일 kbs 녹화방송되었다...축하합니다/풍양의용소방대, 26일 국무총리 표창...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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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옥례(慶北 醴泉 남기호, 정옥례, 親庭엄마 미숫가루) [記事] : 고객들이 붙여준 ‘우리 친정엄마’라는 별명을 지키며 가꾸는 세상에 최고 맛있는 음식은 몇 가지나 될까? 아마도 ‘세상의 어머니 수’ 만큼이라는 말이 가장 근접치에 다가서는 답이 아닐까 싶다. 오십을 넘어가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내 아이들의 아버지’, ’부모’의 컨셉보다는 여전히 내 생각과 판단을 지배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내리 받은 위치와 존재감이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추세로 보면 아마도 평생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느낌과 뜻 속에서 살다가 갈 것으로 보인다. 입맛, 추억, 가르침, 헌신, 내리사랑…. 그로 인해 풍부해진 내 인생, 그로 인해 살맛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된 내 인생…. 그게 인생이라면 당연히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지 싶다. 미숫가루를 우유에 타서 먹기도 하고, 가루로 내와 복분자 갈은 것과 함께 소스로 활용하기도 한다. 감자, 고구마, 가지, 당근, 단호박… 제철에 나오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은근한 불에 한참을 구워내면 표면은 쫄깃거리고 속은 알맞게 익은 아주 괜찮은 맛, 아주 낯익은 맛이 나온다. 여기에 죽염 살짝 찍고, 후식으로 토마토 정도 나올라 치면 근사한 아침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식구들의 아침은 가벼우면서도 실속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여기다 한 가지 더, 미숫가루가 추가되면 완벽한 맛의 조화와 영양을 섭취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야! 진짜 아침 제대로 먹었네” 탄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미숫가루는 다른 것들과 어울려 전체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덕분에 공복감이 없는 근사한 아침이 완성된다. 찹쌀·멥쌀 또는 보리쌀을 쪄서 말린 다음 다시 볶아서 가루로 만든 식품으로 녹말이 호화(糊化)되어 물에 분산이 잘 되고 소화도 잘 되며 볶는 과정에서 고소한 향미가 생긴다. 미숫가루는 미수(米水)라고도 한다. 찹쌀·멥쌀·보리쌀·콩 등을 찌거나 볶아서 가루로 만든 식품으로 주로 꿀물이나 설탕물에 타서 차게 마신다. 주로 여름철 음료로 이용하며, 다식과 암죽을 만들 때에도 쓴다. 찹쌀 외에 보리·콩·율무 등 서너 가지를 섞어 만들면 맛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해진다. 어려서부터 자주 미숫가루를 먹어서 그런지 미숫가루를 보거나 연상을 하면 항상 정겨움이 느껴진다. 여름에 더울 때는 얼음 동동 띄워서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한 물에 타서 식사대용으로 마시곤 하던 추억의 미숫가루. 우리에게 대표적인 추억의 하나인 것이다. 며칠 전 미숫가루를 냉동고 알알이 얼음을 몇 개 띄우고 마시려는데 불현듯 훅...! 옛날 생각이 났다. 아! 그랬지...!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 드렸다. 막상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길래 “더위 먹지 마셔~” 딴 이야기만 엉뚱 거리다가 끊었다. 유년시절은 대전시 태평동에서 살았다. 지금이야 아파트촌으로 시내 한복판 번화가가 되어 내가 다닌 태평국민학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지만 40년 전에는 아주 변두리촌이었다. 당시 집집마다 냉장고 TV,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었고 여름에 얼음을 구하려면 동네 ‘어름집’에 그릇 들고 가 한 덩어리 사와서 바늘로 콕콕 찍어 조금씩 깨서 미숫가루에 타먹었다. 얼음 당번은 맏이인 나였고 둘째(두살아래)와 막내여동생(5살아래)은 아직 어렸다. 집이 가난하더라도 큰 부담없이 보리가루나 곡물가루 볶고 갈아서 만든 미숫가루는 종종 먹을 수 있던 간식이자 별미였다.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도 말간 유리컵에 미숫가루한잔 내오면 그만이었다.

 

  6학년 여름 어느 날, 엄마는 중간 크기의 스텐양푼에 미숫가루를 타고 내가 뛰어가 사온 얼음을 쪼개 넣고 골고루 잘 저어서 가루가 엉키지 않게 한참을 저으셨다. 우리 3남매는 평소 단맛보기 힘든 터라 아주 맛나게(게걸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얼음 크기가 제 각각이라 미숫가루를 다 먹고 나면 나머지 크고 작은 얼음덩어리를 입에 넣고 오도독 깨트리거나 녹을 때까지 이리저리 굴리던 뒷맛도 괜찮았다. 엄마는 설탕대신 단맛 내는 ‘뉴슈가’를 타주셨다. ‘뉴슈가’는 아주 단맛이 독해서 조금만 넣어도 달디단 맛을 냈다. 바깥은 찌는 듯 폭염이었지만 엄마랑 미숫가루 파티 때는 마냥마냥 천국이었다. 쨍쨍쨍 셋이서 숟가락 부딪히는 다툼도 있고 작은 아우성도 벌어지곤 했다. 엄마가 장사(생선장수) 나가시는 날에는 주섬주섬 내가 어설프게 미숫가루를 찾아 동생들과 타먹기도 했다. 그 해 여름에는 내가 핸드볼 선수생활도 하던터라 시합에 자주 나가게 되어 며칠 만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 엄마가 여러 가지 챙겨 주셨고, 미숫가루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 3남매가 같이 미숫가루 먹는 것은 그 해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내 국민학교 졸업식을 달포 정도 남겨놓은 어느 겨울날, 둘째가 시름시름 앓다가 병으로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부모님은 내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아이의 증상이 뇌염(?)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 후로도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마음에 비할 바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방학이 끝나 개학식 조회를 서면서 교장선생님이 아우의 죽음을 전교생들에게 알리고 명복을 빌 때 울었고, 대전중고등학교(중고등학교가 한울타리안에 있다) 다닐 때 그 아이가 잠시 입원해있던 병원 ‘녹색십자가’가 생각이 나서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병원들 앞을 지나기가 싫어서 몇 년을 뒷길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내 형제끼리 나눈 그리움 중에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 겨울 ‘태평동 하평 뚝방길에서 연날리며 엄마 기다리던 일’하고 여름에 ‘미숫가루 타먹던 일’이 생각난다. 여하튼 이후로도 미숫가루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자취생활 6년 동안 비상식량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거 한 봉지 크게 구입해 코딱지만한 찬장 안에 잘 모셔두는 날이면 나나 룸메이트 친구녀석이나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엄마가 자취생 아들에게 보내주신 고향보따리 한 켠에서도 늘 한몫을 차지한 녀석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였어요. 그땐 저희가 들에 일하러 나가면 할머니가 손주들을 봐주시면서 (옛날초가집의) 부뚜막이 있는 부엌에서 찬장 속에 숨겨두었던 미숫가루를 스텐레스 밥그릇에 타서 아이들한테 간식으로 주곤했었지요. 그때 우리 큰아이가 4살쯤 되었을 때였는데 점심때가 되어 들에서 일하고 돌아왔는데 부엌(나무문)앞에 큰 돌 위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스텐레스 그릇에 무엇인가를 들고 입가 가득히 하얗게 묻은 상태로 맛나게 먹으면서 저를 보고 반갑다고 소리치면서 엄마도 미숫가루 먹어보라며 내미는데 왠지 색깔이 노란 것이 이상하다 싶어 맛을 보니 아.뿔.사. 볶은 콩가루를 물에다 타서 그리도 맛나게 먹고 있었지요.

 

  할매가 타주던 것을 보았던 터라 할매가 마루에서 잠시 잠드신 사이에 부엌에 들어가서 콩가루를 미숫가루로 생각하고 그릇에 타서 두 형제가 그리도 맛나게 먹고 있던 것이 쑥떡을 묻혀먹던 달짝지근한 볶은 콩가루였답니다. 온통 얼굴에 풀칠이 되어서 맛나다며 입맛을 다시던 그 아이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답니다. 그땐 간식꺼리가 유일하게 미숫가루가 최고였었거든요. 지금은 두 아이들 모두 군대도 제대하고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답니다. [쌀아지매추억]

 

  인터넷 친정엄마 : 경북 예천군 개포면 가곡1리에 ‘우리 친정엄마(고객들이 붙여준 컨셉)’가 있다. 올해 40대 중반을 갓 넘어선 정옥례 씨가 그 주인공이다. 올해 영농 26년차, 인천에서 만나 결혼하고 시어머님이 편찮으셔서 5년만 병구완 해드리고 올라오자며 내려간 시댁이 경북 예천이다. 그 예천에서 지금은 70여 마을농가와 인근농가가 연합하여 친환경농사를 짓고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전국 4,000여명 고객들의 친정엄마로 살아간다. 쌀아지매란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선입견을 갖는다. 나이도 많고, 억척스럽고 약간은 뚱뚱하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대한민국의 농업적 현실, 그것도 특별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거리가 풍부한 마을도 아닌 곳에서 한 농가가 전자상거래를 통하여 자신이 생산한 것뿐 아니라 인근지역의 농산물까지 판매를 감당하기에 이른다. 체험학교를 비롯하여 ‘찾아오는 농촌의 전형’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드라마틱하여 호기심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몇 년 전 ‘도시와 통하는 농촌쇼핑몰’이란 책을 쓰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도시민과 소통하는 컨셉’과 너무나 정확히 일치하는 쌀아지매의 활동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 또 농촌쇼핑몰이 갖는 유의미한 가치를 실재로 느끼게 해 주는 요소가 많아 쌀아지매를 공부하면 할수록, 현장에 내려가 살펴보면 볼수록 배울 것이 많았고, 비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픈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친정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고향보따리 : 어느 날 60대 중반을 넘긴 어느 고객이 울먹거리면서 전화를 했다. 쌀아지매가 바리바리 야물게 꾸려서 보내준 상품 보따리를 풀어보고, 그 안에 앉아있는 마음이 느껴지는데 영락없이 젊었을 때 친정엄마에게서 받은 마음 그대로라 엄마 생각난다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20여년이나 어린 쌀아지매에게서 친정엄마의 뜻을 얻은 것이다. 보통의 여자들, 엄마들에게 친정엄마는 어떤 의미일까?  20대 30대 새댁의 친정엄마 다르고, 40대 엄마의 친정엄마 다를 것이다. 쌀아지매보다 나이 많은 50대 60대 엄마들은 이미 그 자신이 친정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쌀아지매를 보고 친정엄마의 정감을 느낀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는 영원한 엄마고 엄마의 그 마음 앞에서는 마냥 작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엄마는 참 ‘감성적인 홀로그램’이기도 하다. 살아계시든 아니든,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세대가 한 바퀴 흘러 내가 죽을 때까지 엄마의 뜻은 남는다. 엄마가 이뻐서일까? 아니다 예쁜 거로 치면 영화배우 탤런트 따라 갈수야 있겠는가? 그런데 그 엄마가 그리 좋은 이유는 마음일 께다. 자식에게 무엇이든지 주고픈, 일방적인 마음 때문에 딸자식들은 감동 먹고, 시큰하고 잊은 듯 부지불식간에 뜨거워지는 것이다. 엄마로 인해,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 삶은 영원한 공명을 울리는 것이다. 친정엄마의 주파수에 맞춰서…. 친정엄마가 보내주는 고향보따리에 담긴 마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황토방선식(미숫가루) : 쌀아지매 미숫가루는 자연농법으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 12가지 곡물을 원료로 한다. 보리 15%, 현미찹쌀 15%, 현미 15%, 기능성현미 10%, 흰콩 10%, 찹쌀 5%, 율무 5%, 서목태 5%, 수수 5%, 흑임자 5%, 약콩 5%, 속청 5%를 쓴다. 주문이 들어온 뒤 바로 볶아서 생산을 한다. 미리 생산해 놓을 수도 없다. 흑임자 같은 원료가 같이 들어가 있으므로 산화되거나 산패되기 쉬우므로 언제나 최선의 상태에서 준비하는 것이다. 최상의 곡물로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보낼 때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망설이듯 망설이듯 정성들여 보낸다. 토종잡곡류에는 몸 안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도와 몸속에 쌓이는 해로운 물질을 몸 밖으로 빼내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기분까지 산뜻하게 해주고, 입맛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미숫가루의 매력에 빠질 만도 하다. 필자가 지난 5월 예천 가곡리 쌀아지매가 사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 논둑이며 밭둑이며 온통 풀밭이었다. 자연스런 논의 풍경, 모나지 않는 밭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제초제를 쓰지 않으므로 논밭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크는 벼와 작물에 해충이 생기면 자연스레 풀밭에서 천적이 생긴다. 마을전체가 환경친화적인 컨셉으로 농사를 짓는다. 마을과 이웃마을까지 합하여 77농가가 연대를 하여 다양한 결과물을 생산해낸다.

  미숫가루의 활용 : 아무리 맛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거라도 아침식사 대용이나 건강간식으로 여름 내내 쓰다보면 자칫 애물단지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요즘에는 철을 안 가리고 연중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질 때 있는 법이다. 입자가 고우므로 여러 가지 제과 제빵의 재료로 쓸 수 있고, 찹쌀경단에 미숫가루 옷을 입히기도 하고 칼국수 반죽할 때 미숫가루를 5 :1 정도 섞어 면을 만들면 시원한 육수와 잘 어울려 한 끼 식사 너끈히 뒷받침한다. 미숫가루는 다른 요리와도 궁합이 맞는 편이다. 다른 재료에 자연스럽게 묻어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전체적인 맛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겉절이 김치 버무릴 때 한 큰술 뿌려주면 매운맛이 살짝 줄어들면서 감칠짭짜롬한 맛이 난다. 어느 삼겹살집에서 미숫가루를 활용한 소스를 내온 집이 있었다. 기름기에 물리는 느낌이 한결 덜했다. 마땅한 끼니꺼리가 없을 때에는 죽처럼 되게 만들어서 ‘이거 밥이다’하고 먹어도 좋다. 미숫가루는 시간이 지나면서 속이 든든해진다. 만인의 추억이 스며있는 먹을거리 미숫가루, 사람 사람마다 수십 가지 추억으로 녹아있고 애환으로 살아나는 미숫가루…. 그러고 보면 세상에 미숫가루 이야기는 끝이 없는 무한대일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도 살아있는 동안 가까이 여미고 만나야 할 존재…. 쌀아지매의 황토방미숫가루로 인하여 내 아이들과 추억의 끈을 잇고,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감을 기꺼워한다.(아이디위클리 2010-07-16 16: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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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옥연(<인터뷰> 60年 前 食生活 傳하는 정옥연 할머니 : "풀죽만 잔뜩 먹었는데…요즘은 개까지 豪强" , "統一벼 出現 後 보릿고개 무섭지 않아") [記事] :  "그 땐 일 년 내내 풀만 잔뜩 먹곤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모두 다 호강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해."  경북 예천의 한 농가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배고픈 시절을 몸소 겪었던 정옥연(78) 씨는 1948년 무렵 식생활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대뜸 이렇게 말한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쳐 한국전쟁 때까지 한국인의 식생활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사실상 전혀 없다는 게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얘기다. 음식문화 연구자들이 `암흑시절'로 꼽는 그 시절의 산 증인인 정씨는 "풀죽을 많이 먹었다"고 당시 식단을 회상했다. 쌀 한 홉에 쑥만 잔뜩 넣어 찌거나 끓인 쑥밥이나 쑥죽, 소나무 속껍질에 쌀가루를 넣어 삶은 송기죽(松肌粥), 보릿겨를 빻아 소다를 넣고 부풀린 뒤 찐 개떡, 호박 조각 사이로 밥알이 거의 안 보이는 멀건 쌀죽․보리죽, 밀을 빻은 뒤 체로 쳐서 남은 찌꺼기로 만든 밀기울 죽 등등. 정씨는 "있는 집에서도 쌀밥은 못 먹었고 쌀이 있어도 선뜻 건드리지 못했다"며 "봄에 모내기를 할 때 일꾼을 굶길 수는 없기 때문에 품앗이 나온 남자들에게는 하얀 쌀밥을 지어주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리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가뭄이 드는 해에는 논밭을 팔아버리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콩과 팥으로 연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쇠고기, 돼지고기, 개고기를 구경할 수 있는 때라곤 동네 계모임에서 돌아가면서 도축을 하는 1년에 한두 차례뿐이었고 꽁치나 고등어 같은 바다 생선을 맛보는 것도 고작 제사 때뿐이었다는 것이 할머니의 얘기다. 정씨는 "아이들은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고등어 한 토막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싶어 밤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지만 결국 입에 대 보지도 못하는 때가 많았다"며 "그나마 냇가에서 잡아들이는 붕어나 미꾸라지는 흔해서 자주 먹는 편이었다"고 했다. 1953년 휴전이 이뤄진 뒤 미국에서 원조물자가 들어왔지만 식생활 형편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정씨는 전한다. 간혹 동 단위로 쇠고기나 생선을 담은 통조림이 배분됐으나 `입맛만 다실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양이었고 초등학교에서 미제 분유를 한 도시락씩 나눠주는 것도 1년에 한두 차례로 드문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평생 논밭 농사를 지어온 정씨는 먹을거리 사정이 호전된 때를 1970년대로 보고 있었다. 정씨는 "나라에서 나눠준 새 품종인 통일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가을에 예전보다 두 배나 많은 쌀이 쏟아졌다"며 "기적같은 일이었고 그 뒤로는 보릿고개도 두렵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 말기보다 더 가난했던 일제 강점기와 전쟁 시절이 지나 간지 50년이 넘었지만 정씨는 곡식 낱알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멀건 죽을 쑤어먹던 그 시절의 초라한 밥상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밥상 아래로 밥 톨을 떨어뜨리거나 밥을 남기는 손자에게 불호령 하기 일쑤고 쌀이 하얗게 보이는 남은 밥을 먹어치우는 개에게 "호강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는 "잔소리해 봐야 결국 내 입만 아프다는 걸 알지만 요즘에는 먹을 게 정말 많아져서 모두가 고마워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서도 "어쨌거나 쌀 한 톨, 고기 한 조각이 아쉽던 때가 이렇게 좋은 시절로 바뀐 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장재은 記者 聯合뉴스 2008.07.2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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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옹(鄭雍) : 1391(공양왕 3)-1424(세종 6), 풍양면 청곡리 별실(別室) 출신, 초명은 희(熙), 본관은 동래, 귀령(龜齡, 豊壤面 靑谷里 別室 入鄕祖)의 맏아들, 지주(之周, 敎導)ㆍ사주(師周, 司果)ㆍ종주(宗周, 文科, 持平)ㆍ복주(復周, 副司直)ㆍ흥주(興周)의 아버지이다. 1414년(태종 14)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17년(태종 17)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응교(應敎),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1426년(세종 8)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있을 때 향교를 중수하고 기문(記文)과 학규(學規)를 자찬(自撰)하여 유학을 천명하니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나 읍의 풍속이 어질어졌고 학덕과 행의(行誼)가 독실했는데 일찍 죽었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산 45번지 완담 간좌(浣潭艮坐)에 있는데, 묘갈문(墓碣문)은 후손이 지었는데 누구인지 모른다. 그 곳 완담사(浣潭祠, 1568)에 제향(祭享)되었다.(族譜, 竺山勝覽 1934, 龍宮縣邑誌 1780, 浣潭誌 1992, 醴泉의 金石文 2003)

 

  정옹(鄭雍)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태종(太宗) 17년, 과거시험연도 : 1417 정유,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동진사16(同進士16)/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옹(鄭雍), 본관(本貫) : 동래(東萊)/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응교(應敎)/ [가족사항] 자(子) : 정종주(鄭宗周), 제(弟) : 정사(鄭賜), 부(父) : 정귀령(鄭龜岺), 조부(祖父) : 정해(鄭諧), 증조부(曾祖父) : 정승원(鄭承源), 외조부(外祖父) : 박문노(朴文老), 처부(妻父) : 이경(李經)(daum 2010)

 

  정옹(鄭雍) : [문과]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6위/ [인물요약] 초명 정희(鄭熙), 본관 동래(東萊)/ [이력사항] 전력 생원(生員), 관직 응교(應敎)/ [가족사항] [부] 성명 : 정구령(鄭龜齡), [조부] 성명 : 정해(鄭諧), [증조부] 성명 : 정승원(鄭承源), [외조부] 성명 : 박문노(朴文老), [처부] 성명 : 이경(李經), [제] 정사(鄭賜), [자] 성명 : 정종주(鄭宗周)/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daum 2010)

 

  정옹(鄭雍) : 가문을 빛낸 분들/ 2006/07/25 17:57/ http://blog.naver.com/tgkit/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는 조성현감(#城縣監) 구령(龜齡)이고,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며, 부인은 이경(李經)의 딸이다. 진사시를 거쳐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종대를 통하여 지례현감·집현전수찬·사헌부집의·집현전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는 조성현감(#城縣監) 구령(龜齡)이고,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며, 부인은 이경(李經)의 딸이다. <추가사항> 정옹(1391-1424)은 풍양면 청곡리 출신으로, 처음 이름은 희(熙), 본관은 동래, 귀령(龜齡)의 맏아들이다. 1414년(태종 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즉시 홍문관 수찬의 벼슬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홍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그 후 종3품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다가 현재 금릉군의 지례 현감(1426)으로 나갔다. 지례 현감 때는 그 곳의 향교를 중수하고 경전과 역사 등의 교육을 장려하였다. <지례읍지>에서 이르기를, "정옹은 지례현에서 문교(文敎)를 크게 일으키고 현민의 예의 풍속을 순화시켜서 칭송 받아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3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타계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무덤은 지보면 마산리 산 45번지에 있는데, 학문 활동의 공이 많아서 무덤 부근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제향되었다. 이 향사는 1568년(선조 1)에 풍양면 청곡리 삼수정 곁에 세워 정귀령, 정옹, 정사 등 3부자를 제향하다가 임진왜란(1592) 때 불탄 것을 다시 지보면 마산리 45번지에 재건하고, 정환, 정광필을 추가로 배향하고, 뒤에 정영후, 정영방 형제를 또다시 배향하여 일곱 분을 모시다가 1868년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어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출처] 정옹(鄭雍)|작성자 보석이네(daum 2010)

 

  정옹 : 동래정씨/ Daum 카페 | 2달전, 2010년 10월 27일 (수)/ ?承旨?吏曹判書 역임. 제향:栢麓里祠(안동). 저서:『文峯集』. ▣참고:『國朝人物考』 ?집필:김태안 정 옹(鄭雍):생몰년 미상. 본관 東萊. 초명 熙. 현감 龜齡의 子. 1417년(태종 17) 문과 급제. 弘文館 修撰과 知禮縣監 역임..../ cafe.daum.net/woruddPcjsrns/ | 재경예천군민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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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창고 김태우, 도전골든벨 왕중왕된 것이 25일 kbs 녹화방송되었다...축하합니다.

 

  김태우 : 김태우 학생 kbs 2011도전 골든벨 왕중왕이 되다/ 2011.12.25 방송청취 소감 |◈-- 人事/ 동정 /祝賀/ 이성인 | 2011.12.25. 20:33/ http://cafe.daum.net/seouldaechong/ 대창의 건아 김태우 학생이 kbs 2011  도전골든벨  퀴즈에서 1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1인으로 남아 왕중왕이 되는 장면을 2011.12.25. kbs 방송으로 녹화방송되어 이를 청취하고 여기 올립니다. 자랑스럽습니다. 2011.7 녹화한 것을 비로소 2011.12.25 방송하였습니다. 마지막 문제 정답 ----주사위는 던져졌다. 줄리어스 시져는 로마제국 건설을 앞두고 무슨 강을 건넜을까요.----"루비콘강 " 을 맞추고 왕중왕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다시 한번 마지막 문제의 정답 루비콘강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라는 말로도 표현이 가능하죠.. 이 말의 뜻은 선택 끝났고 이를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여서 끝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유래는 고대 로마공화정 시절로 넘어갑니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체제로 이탈리아 본토는 원로원이 그 외에 지역은 개별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고 만약 이탈리아 본토로 개별 총독이 들어오려고 할 때는 원로원의 허락없이는 병사는 자기의 지역에 두고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총독이 지배하는 지역은 로마외의 국가나 부족과의 국경을 이루는 곳이 많아 총독은 강대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고 총독이 군사를 데리고 로마로 들어온다면 쿠테타 등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법률을 어길 경우 로마공화정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줄리어스 시져(카이사르..로마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죠..^^;)는 갈리아총독으로서 갈리아 전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에서 끝없는 인기와 명망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카이사르를 두려워하였던 로마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로마로 돌아오도록 갈리아총독 임기의 연장을 거부하였습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 루비콘강이고 카이사르는 이 루비콘강을 앞두고 옛법에 따라 병사를 두고 강을 건너 로마에 가서 제거될 것인가 아니면 병사를 끌고 강을 건너 로마의 반역자가 되더라도 끝까지 싸워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의 것으로 할 것인가의 선택에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선택을 함으로써 1000년 가깝게 지속되어 오던 로마공화정은 붕괴되고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재경대창중고등학교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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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의용소방대, 26일 국무총리 표창...축하합니다.

 

  풍양의용소방대(2011年 義勇消防隊 活動力量 評價 施賞式 : 豊壤義勇消防隊 口蹄疫 對應活動 有功者로 選定되어 國務總理 表彰 受賞) [記事] : 문경소방서(서장 남화영)는 2011년 12월 26일 11시 소방서 4층 대회의실에서 2011년 의용소방대 활동역량 평가에 대한 시상식을 가졌다. 이번 평가에서는 의용소방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문경ㆍ예천지역 29개대 920명의 의용소방대를 대상으로 실시되었으며 문경에서는 최우수 동로대, 우수 문경대, 장려 농암대, 여성대 최우수 문경여대가 차지하였으며, 예천에서는 최우수 용궁대, 우수 감천대, 장려 예천대, 여성대 최우수 호명여대가 차지하였다. 또한 지난 겨울에 발생한 구제역에 대하여 풍양의용소방대(대장 정옥진)가 구제역 대응활동 유공자로 선정되어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남화영 서장은 “항상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의용소방대원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또한 늘어나는 소방수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서로 긴밀히 협조하여 원거리 면지역의 화재피해를 최소화하고 지역주민의 안전파수꾼으로서 화재초기 진화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醴泉뉴스 201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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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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