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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780:예천의병대장 박주상 추모비건립 중(祝군청,이영호,권이숙)
작성자장병창 @ 2011.12.30 06:12:37

   예천의 자랑(2780) : 예천의병대장 박주상 추모비 건립 중(附 예천군, 지적행정 도평가 우수상...축하합니다/노상리 출신 이영호 교사, 20일 전국 스마트러닝공모전 금상...축하합니다/오지리로 시집온 권이숙. 사무관 승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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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상 : 안내의 말씀/ 엄동지절에... 가정에 건강과 행운을 기원 드립니다... 수년 전부터 뜻있는 이들이 남천 선생의 추모비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까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발기인 몇 사람이 뜻을 모아 조직을 갖추고 추모비건립계획서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결과 11월 10일 공훈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습니다... 참고로 추모비건립사업비는 국가보훈처의 보조와 문중 및 유족 성금 등으로 확보되어 현재 사업이 착공단계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2011.12. 의병장 박주상선생추모비건립추진위원장 김시우, 함양박씨 정랑공파문중대표 박일순, 유족대표 박희식

 

  박주상(朴周庠) : 신종우의 인명사전 | 3년전, 2008년 11월 2일/ 박주상(朴周庠), 본관(本貫) 함양(咸陽), 시대(時代) (1831-1908), 자(字) 양선(養選), 호(號) 남천(南泉)/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박주상(1831-1908)은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출신으로, 자는 양선(養選), 호는 남천(南泉), 본관은 함양, 필령(弼寧)의 셋째 아들이다. 유학뿐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어 예천 유림의 존경을 받았다. 을미사변 후, 박주상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1896)하였는데, 모여든 의병의 수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박주상은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예천군의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부서를 정하고, 대열을 정돈하여 밤낮으로 훈련을 거듭하여 왜적의 정보를 알아내고, 한편으로는 안동의 김하락, 문경의 이강년 등과 연락하여 북진하기도 하였다. 박주상이 선봉에 서니,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간교한 무리들을 기필코 섬멸하고 국권을 되찾겠다."라고 하면서 고향인 예천을 떠나 용궁으로 진격하는 도중 친일파와 왜적을 무찌르고, 용궁에서 하룻밤 들에서 자고 다음날 함창을 지나 상주에 다달았다. 이때 고종 임금이 의병을 해산하라고 명령을 하니, 박주상은 놀랍고 분하고 통탄스러웠다. 부득이 예천으로 돌아오니 뒷날을 기약하고 의병들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박주상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던 중 예천 군민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후에도 청년들과 장년들에게 항일정신, 민족정신 함양에 전력하였다. 일제는 다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니, 박주상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미 70여 세의 늙은 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마을 뒷산 비석골 장등에 있는데, 문공부에서 유적으로 등록하였다. 당시의 유림들이 박주상의 <창의록>을 적어 예천향교에 보관하였고, 정부에서는 박주상의 공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제55107호, 1982)을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1)

 

박주상(朴周庠) : 1831(순조 31)-1908(융희 2),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자는 양선(養選), 호는 남천(南泉), 본관은 함양, 필령(弼寧)의 3자, 어려서 부친, 형(周鍾, 홍문관교리)에게 배우고, 족숙 기령(族叔箕寧)에게 사사(私事)하였다. 충효를 생의 기본으로 지키며 학문에 진력,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도량이 넓고 굳세고 정직하고 불의에 굽히지 않고, 효성이 지극하고 친구 간에 우의가 두텁고, 가정을 잘 다스렸다. 형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면서 늘 행동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았다. 을미사변(1895)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 국모 민비를 시해하자 사재를 털어 유명한 사림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1896년 3월 2일 65세의 고령으로 예천 향회에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다른 의병대장 김하락(金河洛), 이강년(李康秊) 등과 서로 연락하여 북진키로 하고, 간교한 무리들을 꼭 무찌르고 국권을 회복시키려고 선봉에 나서 싸워 적을 무찌르고 상주에 이르러 고종의 의병해산조칙(義兵解散詔勅)이 선포되자 의진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다시 의기하려다 노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조국을 안타까워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묘는 용문면 원류리 비석골 장등 축좌(長嶝丑坐)에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대통령표창(1982,제55107호), 애족장(愛族章, 1990)을 추서하였다.(族譜, 丙申倡義錄, 慶北版 獨立運動史, 民族寶譯 1959 503쪽, 韓國獨立史 660쪽, 文化遺蹟總覽,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국가보훈처) 597쪽, 韓國獨立運動史 (文一民) 49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53 638-639쪽, 獨立運動史 695쪽, 文化財總覽, 國史大事典, 郡誌, 慶北道義誌 338쪽, 抗日獨立運動 1991 65쪽, 醴泉新聞, 具滋一의 碩士論文)

 

  박주상 [記錄] : 徐相烈字敬殷, 號敬菴, 先生之門人也, 先生以爲召討將, 使徇嶺南, 時嶺南有七邑義將, 安東 金都事道和?禮安 李重麟?醴泉 朴周庠, 皆巨室長者, 又順興 姜??豊基 金敎明?榮川 丁奎燮?奉化 琴錫祚, ?七將也, 推敬菴爲盟主, 刑白馬于醴泉, 盟約依葵丘會,(소의신편 外篇 卷八 卜隱 元容正 著)

 

  박주상 [記錄] : 禮安 李中麟, 豊基 金敎明, 醴泉 朴周庠, 奉化 琴錫祚, 榮川 丁奎奕, 廣州 沈鎭遠, 原州 李麟榮, 春川 柳重洛, 洪川 南宮?, 橫城 權大亨, 無大得失, 然遠外事實, 有不得詳, 後當隨聞繼錄, 盖是擧也, 首倡持久, 而名威最著, 柳先生 麟錫 也, 雖其不能無失者, 苟非諂附亂賊, 則皆大功也, 其雖皆見敗, 所謂不以成敗, 論得失, 所謂能與讐戰, 雖敗亦榮者也, 諸路同聲,(소의신편 外篇 卷八 斥和擧義事實大略 李習齋 著)

 

  박주상 : 卷八 斥和擧義事實大略/ 상위서지: 소의신편(昭義新編) > 外篇/ 저자: 金華埴, 白三圭, 金瀅/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卷八 斥和擧義事實大略 李習齋著/ ...以義聞於北, 後入遼, 爲李容泰所欺, 有事三水, 雖?貳見殺, 而有受惡名, 北人皆嗟惜之, 禮安 李中麟, 豊基 金敎明, 醴泉 朴周庠, 奉化 琴錫祚, 榮川 丁奎奕, 廣州 沈鎭遠, 原州 李麟榮, 春川 柳重洛, 洪川 南宮?, 橫城 權大亨, 無大得失, 然遠外事實, 有不得詳, 後當隨聞繼錄, 盖是擧也, 首倡持久, 而名威最著, 柳先生 麟錫 也, 雖其不能無失者, 苟非諂附亂賊, 則皆大功也, 其雖皆見敗, 所謂不以成敗, 論得失, 所謂能與讐戰, 雖敗亦榮者也, 諸路同聲, , 柳先生, 師華西 重庵 省齋三先生, 李宜愼, 師重 省二先生者也。...//

 

  박주상(朴周庠) : 구분: 독립운동자공적자료/ 날짜: 1831/ 분류: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유공자명(한글) 박주상 유공자명(한자) 朴周庠/ 생존여부 사망/ 성별 남/ 생년월일 (양)1831년/ 사망년월일 (양)1908년 05월 05일/ 본적 1. 경상북도 예천군 龍門面 上金谷里 353/ 독립운동당시 주소  慶北 醴泉郡 龍門面 上金谷里 353/ 관리번호 2442/ 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운동계열 의병/ 소속 및 지위  醴泉義兵陣 義兵將/ 독립운동기간 3年/ 활동지역 慶北 醴泉/ 공적개요 1895년 明成皇后 시해를 분격한 나머지 사림에 통문하여 향병을 모집. 1896년 醴泉義兵將으로 추대되어 의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咸昌의 적군을 격멸시키다가 의병해산조칙에 따라 해병하였으며 1905년 을미의병활동을 후원한 사실이 확인됨. / 심사년월 참조문헌 제목  관련 이미지/ 1990.00...  독립운동사자료집 1권 참조 정보 597p ,//

 

  박주상 : 독립운동가 소개-박주학(朴周學,敬可,蓉溪) 선생/ Daum 카페 | 3년전, 2008년 8월 14일/ 대장으로 천거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하여 박주학이 부장(副將)직을 맡게 되었으며, 대장이 된 박주상(朴周庠)은 선생의 집안 족형(族兄)이었다. 그 뒤 2월 제천의병의 일파인 서상렬 의병을 비롯하여 안동(安東)·예안.../ cafe.daum.net/parkyeol/KdEU/25 | 독립운동가 박열의사 추도회(daum 2011)

 

  박주상 : 함양박씨 고문서 국사편찬위에 위탁관리/ 연합뉴스 | 6년전, 2005년 5월 2일/ 하나인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한 박주종(朴周鍾)을 비롯해 한말에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박주상(朴周庠),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항일 활동을 한 박일수(朴一洙) 등의 인물을 배출했다. 이번에 위탁된 자료는 17세기.../ newslink.media.daum.net/news/ | 미디어다음(daum 2011)

 

  박주상 : 독립유공자(공훈록) ㅣ 국가보훈처/ 검색결과 1102건 [48/111 페이지] 독립유공자 연번 성명 한자 운동계열 생존기간 훈격연도 출생지 632 박주상 朴周庠 의병 1831.~1908. 5. 6 애족장(90) 경북 예천 631 박주석 朴周錫 국내항일 1864. 2.17~1921. 7.24 애국장(95.../ mpva.go.kr(daum 2011)

 

  박주상 : 안동의진/ Daum 카페 | 3달전, 2011년 9월 24일 (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였다. 1896년 2월에 들어와 이중린(李中麟)이 이끄는 청량산의진, 박주상(朴周庠)이 이끄는 예천의진이 새롭게 꾸려지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반격 대열이 형성되었다. 안동의진 역시 주변 지역.../ cafe.daum.net/lhl0775/GTtB/13 | 진성이씨 우포파(daum 2011)

 

  박주상 : 권세연(權世淵)/ 웹문서/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이 이끄는 의진이 청량산에서 편성되었고, 예천에서도 박주대(朴周大)를 이어 박주상(朴周庠)이 의진을 맡으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반격 대열이 형성되었다. 안동의진이 주변지역 의진들과 연합하여.../ 815andong.or.kr// 권세연(權世淵 1836~1899.12.10)/ Daum 카페 | 4년전, 2007년 4월 11일(daum 2011)

 

  박주상 : 예천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 =취지문.../ 예천사랑 | 조회 75 | 2006.02.21. 09:40/ 박치대/  예천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한 지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여 충효의 고장이라고 내세울 때는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충효사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토양과 뿌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천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큰공을 세운 약포 정탁 선생이 충(忠)을 대표하고, 명심보감에 오를 정도로 효행이 지극했던 도시복 선생을 효(孝)의 대표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 뿌리 깊게 이어져 가는 일관성과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침탈로 모진 수난을 겪었던 시절이 어느 때보다 힘겹고 어려운 고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구한말에 예천 지역의 의병운동을 이끌어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예천의 긍지와 자존심을 살리는 데 앞장섰던 의병장 박주상(朴周庠) 선생과 엄혹한 식민지배 아래서 일본제국의 중심적 상징인 천황 부자를 폭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역범으로 몰려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떨쳤던 박열(朴烈) 의사의 기녑비를 세워 오늘날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를 제대로 살리고 올바른 민족교육 활동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박주상 선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에 발맞추어 65세의 고령에 예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이강년, 김하락 등 혁혁한 의병장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고종이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자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지친 몸을 쉬면서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조선 합병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국적으로 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니, 선생은 다시 예천 의병장으로 나서서 침략군과 맞서 싸웠으나 워낙 고령으로 무리하게 싸운 데다가 병환이 겹쳐 1908년 7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2001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과 함께 이장되어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박열 의사는, 누대를 금당실에 터 잡고 살아온 집안으로 조부 때 문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기미년에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쫓겨 일본에 건너가서 사상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제국 최고 권력자인 천황 부자를 폭살할 계획으로 폭탄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던 가운데 때마침 일어났던 관동 대지진으로 일이 무산되었고, 의사는 대역범으로 몰려 일본 대심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3년간의 오랜 세월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다음 일본의 패전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의사는 재일교포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하여 애쓰다가 고국에 돌아와 장학 사업에 힘쓰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으로 잡혀가 거기에서 평화통일을 위하여 힘쓰다가 1974년에 세상을 떠나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습니다. 그러자 서울에서 박열 의사 추모식을 거국적으로 거행하였으며,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십 없이 자신을 바쳐 싸웠던 박주상 의병장과 박열 의사의 기념비를 두 분의 본고향인 용문 금당실 마을에 세우려고 합니다. 금당실은 전통 문화마을로서 앞으로 예천 지역의 문화 답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기념비 건립은 예천의 정체성을 찾고 정신적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천 지역의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민과 관이 마음을 함께 모아 뜻깊고 실속 있는 사업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 출 처 : 예천군홈페이지 자유게시판/ cafe.daum.net/yckun/ 예천군민회(daum 2011)

 

  박주상과 박열(趣旨文) [記事] : 예천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한 지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여 충효의 고장이라고 내세울 때는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충효사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토양과 뿌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천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큰 공을 세운 약포 정탁 선생이 충(忠)을 대표하고, 명심보감에 오를 정도로 효행이 지극했던 도시복 선생을 효(孝)의 대표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 뿌리 깊게 이어져 가는 일관성과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침탈로 모진 수난을 겪었던 시절이 어느 때보다 힘겹고 어려운 고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구한말에 예천 지역의 의병운동을 이끌어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예천의 긍지와 자존심을 살리는 데 앞장섰던 의병장 박주상(朴周庠) 선생과 엄혹한 식민지배 아래서 일본제국의 중심적 상징인 천황 부자를 폭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역범으로 몰려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떨쳤던 박열(朴烈) 의사의 기념비를 세워 오늘날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를 제대로 살리고 올바른 민족교육 활동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박주상 선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에 발맞추어 65세의 고령에 예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이강년, 김하락 등 혁혁한 의병장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고종이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자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지친 몸을 쉬면서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조선 합병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국적으로 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니, 선생은 다시 예천 의병장으로 나서서 침략군과 맞서 싸웠으나 워낙 고령으로 무리하게 싸운 데다가 병환이 겹쳐 1908년 7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1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과 함께 이장되어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박열 의사는, 누대를 금당실에 터 잡고 살아온 집안으로 조부 때 문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기미년에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쫓겨 일본에 건너가서 사상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제국 최고 권력자인 천황 부자를 폭살할 계획으로 폭탄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던 가운데 때마침 일어났던 관동 대지진으로 일이 무산되었고, 의사는 대역범으로 몰려 일본 대심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3년간의 오랜 세월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다음 일본의 패전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의사는 재일교포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하여 애쓰다가 고국에 돌아와 장학 사업에 힘쓰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으로 잡혀가 거기에서 평화통일을 위하여 힘쓰다가 1974년에 세상을 떠나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습니다. 그러자 서울에서 박열 의사 추모식을 거국적으로 거행하였으며,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십 없이 자신을 바쳐 싸웠던 박주상 의병장과 박열 의사의 기념비를 두 분의 본고향인 용문 금당실 마을에 세우려고 합니다. 금당실은 전통 문화마을로서 앞으로 예천 지역의 문화 답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기념비 건립은 예천의 정체성을 찾고 정신적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천 지역의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민과 관이 마음을 함께 모아 뜻깊고 실속 있는 사업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박치대 醴泉郡廳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2006-02-02 오후 8:55:54)

 

박주상묘(朴周庠墓) [墓] : 용문면 원류리 비석골 장등 축좌(碑石谷長嶝丑坐)에 있는 묘로, 박주상(1831-1908)은 구한 말 의병장이다. 묘 앞에 상석과 망주(望柱)가 있고, 봉분(封墳)은 직경 3.1m, 높이 1.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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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지적행정 도평가 우수상...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醴泉郡, 2011年度 地籍行政推進 綜合評價 ‘優秀賞’ 受賞 : 地籍業務硏究實績 等에서 높은 點數 받아) [記事] : 예천군은 경북도가 주관한 ‘2011년도 지적행정추진 종합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도는 지적행정 발전을 도모하고, 담당공무원의 사기진작 및 대민서비스 향상을 위해 도내 23개 시ㆍ군을 대상으로 주요 지적업무 12개 항목 추진실적을 매년 평가하고 있다. 예천군은 이번 평가에서 지적민원 현장방문 처리제 운영과 토지이동전산등기촉탁, 공공용지 합병사업 추진, 지적측량 기준점 정비 및 신설, 지적업무연구실적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도청이전지내 불법전용산지 지적측량 기간단축과 민원인을 내 가족처럼 슬로건 아래 민원안내 도우미운영, 유기한 민원 단축 처리 등 특수시책 추진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예천군 관계자는 “앞으로도 군민의 재산권보호를 위해 다양한 시책을 개발하고, 지적분야에 대한 행정의 신뢰도를 향상시켜 주민편익 위주의 행정을 펼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醴泉뉴스 2011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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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상리 출신 이영호 교사, 20일 전국 스마트러닝공모전 금상...축하합니다.

 

  이영호(路上里 出身 서울 강덕초등학교 이영호 敎師 '스마트러닝 公募展'에서 金賞 受賞) [記事] : 예천읍 노상리 태생의 이영호 교사(28.서울 강덕초등학교)가 SK텔레콤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함께 주최한 '스마트러닝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 상금과 미국연수를 부상으로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태블릿 PC를 이용한 '수시평가 관리 시스템'을 기획 '활용' 분과에서 금상을 받은 이 교사는 "학생의 가능성을 알기 위해 수행평가를 시행하고 있으나 평과 결과를 모두 기록하고 가중치를 둬 성적에 반영하는 작업이 번거로워 수시로 할 수 없었으나 스마트폰 등을 활용하면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획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개발/활용 분과별로 총 19개의 작품이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2011년 12월 20일 을지로 SKT 타워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이영호 교사는 이상일 과장(예천군재무과)의 장남으로 남부초등학교~경덕중학교~안동고등학교~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인재'라고 평가한다. 지난 8월 29일~10월말까지 진행된 공모전에는 전국의 교사 250명, 상당수의 대학생 등이 참여하여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열의를 볼 수 있었으며, 이번에 금상을 수상한 '수시평가 관리 시스템'은 향후 이 교사의 동의를 얻어 SK텔레콤이 서비스 중인 'T스마트러닝'에 적용하여 교육현장에 직접 활용될 예정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1-12-29 오후 1: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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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리로 시집온 권이숙. 사무관 승진...축하합니다.

 

  권이숙(出鄕人 오진택 氏 婦人 권이숙 氏 事務官 陞進) [記事] : (주) 젝스프로코리아(무역회사) 오진택(풍양면 오지리 출생) 부사장의 부인 권이숙 씨가 최근 사무관으로 승진,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 충남지원 천안사무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권이숙 사무관은 봉화 출신으로 32년 간 공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난 2009년 모범공무원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았으며 남편 오진택(56·재경풍양중고총동문회 부회장) 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醴泉新聞 2011년 12월 29일 (목) 1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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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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