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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786) : 정윤기-정윤목(1)(附 예천방문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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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기(鄭允奇) : 1495(연산군 1)-1545(인조 1), 풍양면 우망리 포내(浦內) 출신, 자는 탁경(卓卿), 본관은 동래, 수찬 옹(雍)의 증손, 홍문관응교 환(渙)의 양자(養子) 겸 제자, 참봉 은(殷)의 5자, 원충(元忠, 進士)ㆍ원침(元沈)ㆍ원묵(元黙)ㆍ원건(元健)의 아버지이다. 갑자사화로 귀양살이하는 양부 환에게 글을 배우고, 유학(幼學)으로서 1543년(중종 38) 식년 생원시에 3등 68위로 합격하였으나, 2년 후에 51세로 타계하였다. 그러나 덕행과 문장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다. 친필 <문장궤범(文章軌範)> 1권이 안동에서 전하고 있다. 필법이 유명하였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마산(馬山) 서향묘좌(西向卯坐)에 있는데, 묘갈문(墓碣문)은 누군가 써서 1570년(선조 3) 10월에 세웠다.(竺山勝覽 1934, 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醴泉의 金石文 2003)
정윤기(鄭允奇) :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8위/ [인물요약] 자 탁경(卓卿), 본관 동래(東萊), 거주지 용궁(龍宮)/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정환(鄭渙), 관직 :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품계 : 조산대부(朝散大夫)/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學中央硏究院)(daum 2010)
정윤기 : 석문 정영방/ Daum 블로그 | 2주전, 2010년 11월 27일 (토)/ 정환(鄭渙)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가 되어 연산군 때에 직간(直諫)을 하다 쫓겨났다. 증조인 정윤기(鄭允奇)는 생원을 지냈으며, 조부는 진사 정원충(鄭元忠)이다. 부친은 정식(鄭湜)이며, 모친은 안동인으로 참봉(參奉).../ blog.daum.net/| 水 山// Re: 안동의 금석문 자료-1(정영방의 묘갈명외 3건)/ Daum 카페 | 9달전, 2010년 3월 9일 (화)(daum 2010)
정윤기 : 영주 인동장씨 안양공 휘 말손 묘갈명/ Daum 카페 | 7달전, 2010년 5월 4일 (화)/ ...、一女、郡守李渥、其壻也。仲羽生二男、長應門、彰信校尉、次應國、六女、彰信校尉李?壽、生員鄭允奇、府使權紹、正郞曹允愼、孝子李藎、進士姜濟、其壻也。應臣生三男、長胤禧、護軍、次順禧、主簿、次壽禧、贈參議.../ cafe.daum.net/| 진성이씨 온계선생 후손들 사랑방(daum 2010)
정윤기 : 강사필(姜士弼)/ 네이트 한국학 | 작년, 2009년 3월 4일/ 조부(祖父) : 강영숙(姜永叔) 증조부(曾祖父) : 강형(姜?) 외조부(外祖父) : 박식(朴?) 처부(妻父) : 정윤기(鄭允奇)/ koreandb.nate.com(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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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목(鄭允穆) : 1571(선조 4)-1629(인조 9), 예천읍 고평리(高士坪)에서 용궁(龍宮)으로 옮겨 산 입향조, 자는 목여(穆如) 또는 백유(伯兪), 호는 청풍자(淸風子) 또는 죽창거사(竹窓居士), 노곡거사(蘆谷居士), 본관은 청주, 좌의정 약포 탁(左議政藥圃琢)의 3자, 윤위(允偉)의 동생,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과 한강 정구(寒岡鄭逑)의 제자, 풍체가 호탕고매(豪宕高邁)하고 매우 총명하여 어렸을 때 경사(經史)의 큰 뜻에 통달하고 문명이 쟁쟁하여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들이 다 경탄하였다. 예악(禮樂), 병법(兵法), 형법(刑法), 음양(陰陽), 율력(律曆), 구류(九流, 9種의 學派),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하였고,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또 필법이 탁월하여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명필(名筆)이라 일컬어졌는데, 특히 초서(草書)에는 당시의 제1인자(第一人者)로 알려졌다. 그림에도 뛰어났다. 약관(弱冠)에 아버지를 따라 명(明) 나라에 가니(1589), 그곳 사람들이 정윤목(鄭允穆)의 풍채와 문장을 보고 큰 사람의 풍도가 있다고 다투어 사귀기를 청하였다. 이듬 해(1590) 여름 돌아왔고, 당시의 명사인 오리 이원익(梧里李元翼), 백사 이항복(白沙李恒福) 등이 국사(國士)로 대접했고, 임진왜란(1592)에 전쟁에 대비하여 왕과 세자(光海君)가 나뉘어 피난할 때 세자를 모시는 책임을 진 아버지를 따라 강계(江界)길을 돌다가 다시 관동 춘천(關東春川)길을 거쳐서 이천(伊川)으로, 다시 성천(成川)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시종 세자(世子)와 동행하면서 초로(草路)에서 동침(同寢)하고 험식(險食)을 같이 하였다. 난이 끝나고 선조(宣祖)가 승하하고, 세자(光海君)가 등극하게 되자, 왕이 그를 누차 불렀으나 때가 대북당(大北黨)의 패륜(悖倫) 행위 때라서 결연히 벼슬길을 피하고, 고평리(高坪里)에 돌아와 유유자적(悠悠自適)했고, 그 뒤로 노곡(盧谷, 醴泉郡西 海鴨山 鴨峯下)에 살면서 호(號)를 삼기도 했고, 다시 44세 때 용궁현 장야평(龍宮縣長野坪)에 옮겨(1614) 살면서 당시의 명사(名士)들과 교유(交遊)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처음으로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에 보직(補職)되었으나, 1년 만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에 윤리가 무너지고 기강이 문란해짐이 계속됨을 보고 출세에 뜻이 없어서 다시 삼강(三江)의 합류 지점인 달지 몽촌(達池夢村, 1622, 現 聞慶市 永順面)으로 옮겨 살면서 삼호정(三湖亭)을 세우고 시(詩)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풍양면 삼강(三江)에서 타계 (他界)하였다. 스스로 청풍 거사(淸風居士)라 하고, 시율(詩律)로 당대에 유명했다. 용궁면 무이리의 무이서당(武夷書堂)에서 쓴 유초(遺草)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서당(書堂)은 불에 탔으나 이 책만은 남아 있다. 정구(鄭逑)는 제자들 중에 그를 특히 촉망하였고, 그에게 특청(特請)한 병풍(屛風) 8첩서(八帖書)가 지금도 정구 종택(鄭逑宗宅)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묘는 갈운산 묘좌(갈雲山卯坐)에 있다.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ᄋ 그는 효심(孝心)도 지극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명(明) 나라에서 파견한 경략 송응창(經略 宋應昌)과 제독 이여송(提督李如松)도 그의 부군 시행(父君侍行)을 보고 그 지극한 효심에 감탄하였다,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 연경(燕京, 北京)에 갔을 때(1589)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의 필법(筆法)에 중국인들은 감탄하였다는데, 그가 길을 거닐다가 부채장수인 어느 노파의 부채를 펴서 글씨 한 줄을 써 주었는데, 그 노파가 부채를 훼손했다고 성을 내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 길에서 되돌아올 때는 그 노파가 백배 사죄(百倍謝罪)하더라는데, 그 이유는 그 부채값이 몇 갑절 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는 왜병(倭兵)도 탄복한 바 있는데, 그의 처가(妻家) 벽상에 써놓은 그의 시문(詩文)을 본 왜병은 그 필법(筆法)과 시상(詩想)의 탁월함에 오히려 절하고 가게 되니, 병화(兵禍)도 면했다고 한다. "평생불의지부귀(平生不義之富貴)하고 오탐불역삼공귀(吾貪不易三公貴)"라고 한 그는 '동방부자(東方夫子)'라고 칭하는 퇴계 이황(退溪李滉)과 같이 '동방백이(東方伯夷)'라고 칭했다. 그의 서책(書冊)은 병화(兵禍)로 소실(燒失)되었지만 후손의 구송(口誦)으로 <청풍자집(淸風子集)> 3책이 이루어졌는데, 현손(玄孫)인 황해도관찰사 정옥(黃海道觀察使鄭玉)에게 영조(英祖)께서 명하여 <약포문집(藥圃文集)>과 같이 국비(國費)로 간행되었는데, 별판(別版)은 삼강리 청풍자 종택 묘우(三江里淸風子宗宅廟宇)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전고대방(典考大方)>에도 일본어 서적인 <광나집(廣儺集)> 등에도 당시의 명필(名筆)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유묵(遺墨)도 삼강 종택(三江宗宅)에 많이 남아 있는데, 아버지의 유묵(遺墨)과 같이 보물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그가 중국 연경(燕京)에 갔을 때 수양사(首陽祠, 伯夷叔齊廟)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4대자를 모사(模寫)하여 헌판(軒板)에 게시된 것이 있다. 삼강온고각(三江溫古閣)도 향토관(鄕土館)으로는 손색이 없다. 정탁(鄭琢), 정윤목(鄭允穆) 의 양대 유묵(遺墨)을 위시하여 신라 토기, 고려 청자, 이조 백자, 유성룡(柳成龍) 의 징비록 책판(冊板), 명현(名賢)들의 유묵(遺墨) 등 7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뒷산 중턱에는 그의 6세손 도천 참봉 노암(道薦參奉魯庵)의 동산정(東山亭)도 삼강(三江)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 같고, 약설정(藥雪亭), 영락재(映洛齋)도 삼강종택(三江宗宅)을 옹위(擁衛)하고 있다. ᄋ 경당 장흥효(敬堂張興孝)보다는 나이가 일곱이 아래이나 동문 수학(同門修學)한 학문의 벗으로 퍽 친숙한 사이였다. 그가 오랜 만에 예천에서 안동의 서후면 금계동(西後面金溪洞) 춘파로 벗을 찾아 오게 되니, 서로 반기며 밤이 새는 것도 잊어가며 세상 일을 논하고 또 학문에서 느끼는 바를 말하고, 시도 짓고 며칠을 즐겼다... 그 때에 장흥효(張興孝)의 어린 딸이 쓴 적벽부체(赤壁賦體)의 초서(草書)를 그에게 보였는데, 그가 이르기를, "정말 놀라우네! 이 글씨에 나타난 기풍(氣風)과 굳센 필세(筆勢)가 호기(豪氣)롭고 굵직함이 우리 동국(東國) 사람의 글씨와는 그 유(類)를 달리하고 있네! 나는 처음 이 글씨를 보고는 중국 어느 대가(大家)의 글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았네, 정말 대단한 솜씨야! 경탄이란 것이 이것이야"라고 했다.(襄陽誌 1661, 廣瀨集, 東國文獻筆苑編, 朝鮮名臣錄, 槿域書畵徵, 歷代名人筆跡 1983, 淡水 6輯 282-285쪽,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朝鮮寰輿勝覽 1929, 韓國人의 族譜, 위대한 어머니 金龜鉉 1991 22-24쪽)
정윤목(鄭允穆) : 본관(本貫) 청주(淸州), 시대(時代) 1571(선조 4)~1629(인조 7), 자(字) 목여(穆如), 호(號) 청풍자(淸風子)/ 이력(履歷) 정윤목(鄭允穆) 1571(선조 4)~1629(인조 7), 조선의 학자.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죽창거사(竹窓居士), 우의정 탁(琢)의 아들.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 천성이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통달, 당시의 학자들을 감탄케 했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에 이르기까지 정통,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했다. 글씨에도 뛰어나 그의 초서(草書)는 당시의 제 일인자로 알려졌다. 1616년(광해군 8) 비로소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으로 나갔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에 불만을 품고 사직, 시(詩)·서(書)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daum 2010)
정윤목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정윤목(1671-1629)은 예천읍 고평리 불우실 마을 출신으로,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 본관은 청주, 탁(琢)의 셋째 아들, 류성룡과 정구의 제자이다. 풍채가 호탕하여 보는 사람마다 맑은 바람처럼 시원하다고 하였다. 매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뛰어난 문장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탄복했다. 학문이 예절, 음악, 병법, 형법, 음양, 달력,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성리학에도 깊은 연구가 있었다. 또한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에는 당시의 제1인자였다. 임진왜란(1592) 때 아버지를 따라 세자(光海君)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할 때 세자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 임란 후에는 고평리 불우실을 거쳐 예천군 서쪽 해압산(海鴨山) 아래 노곡(蘆谷)에 살았다. 이 때 광해군이 왕이 되자(1609), 정윤목은 여러 차례 벼슬로 불리어졌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용궁면 월오리의 장야평(長野坪, 1614)으로 옮겼다. 이때 광해군의 부름에 마지못해 소촌도 찰방(1616)으로 나아갔으나, 임금의 혼란한 정치에 실망을 느껴 1년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장야평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몽촌(夢村)으로 옮겼다가 풍양면 삼강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글씨로 여생을 보냈다. 용궁면 무이리의 무이서당(武夷書堂)에서 기록한 원고가 남아있고, 삼강리의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뻬이징에 갔을 때(1589) 그 곳 수양사(首陽祠)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큰 글씨를 베껴 써와 현판에 게시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남아있다. 또 스승 정구의 특별한 부탁으로 쓴 병풍 글씨가 남아있고,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정윤목 :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淸風子先生續集/ 鄭允穆 (1571∼1620) ; 字 穆如, 號 淸風子·竹窓居士, 本貫 淸州./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純祖25(1825)跋./ 2卷1冊 : 年譜 ; 30.7x20.6cm./ 四周雙邊. 半匡 ; 20.3x14.6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윤목의 시문집의 속집이다. 이 문집은 1825(순조 25)년 6세손 필규(必奎)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저자는 시가(詩歌)에 능하였는데 특히 고체(古體), 근체(近體)에 뛰어났으며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노래한 것이 많다. 서(書)에는 대개 친지에게 보낸 문안편지로 학술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年譜./ 目錄./ 卷之 1. 辭 ; 田家感興./ 詩(182首)./ 卷之 2. 詩./ 書 ; 洪侯獨淸翁, 答獨淸翁, 與郭丹谷, 答琴彦恭(恪), 與李伯明(2), 宗兄鋤歸子(3), 仲兄(2)./ 祭文 ; 祭權梅堂, 祭李伯明./ 附錄 ; 輓詞, 行狀, 墓誌銘, 道正書院從享文, 蕪湖別祠常享祝文, 贈遺詩.(daum 2010)
정윤목 : 淸風子遺稿/ 鄭允穆 (1571∼1629) ; 字 穆如, 號 淸風子·竹窓居士, 本貫 淸州./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純祖25(1825)跋./ 4卷2冊 : 揷圖, 遺墨 ; 30x22cm./ 四周雙邊. 半匡 ; 21.3x14.2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윤목의 시문집이다. 정윤목은 탁(琢)의 아들로 예천(醴泉)사람이다. 선생은 정간선조(貞簡先祖)의 계자(季子)로서 용의(容義)가 풍후(?厚)하고 재조(才操)가 영민(潁敏)하며 가정의 교훈을 잘 따르고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 양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으며 입지가 청고(淸高)하고 문사(文詞)가 초일(超逸)하였다. 부친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실 때와 성상(聖上)의 파천(播遷)에 호종(扈從)하실 때에 항상 곁에서 모시며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니 모두들 그의 충효를 칭찬하였다. 추천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광해군 때 패륜의 변(變)과 간신의 농권(弄權)함을 보고 호연히 부귀(賦歸)하여 부임하지 않았다가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는 부임하였으나 나중에는 사퇴하였다. 시(詩)의 「난후견고성국감제(亂後見古城菊感題)」에서는 전화(戰禍)의 참상을 아프게 표현하였다. 「낙행서회(洛行書懷)」는 저자가 아버지 정탁(鄭琢)의 사신길에 수행하면서 여행노정의 감회를 읊은 기행시이다./ 目錄./ 卷之 1. 辭 ; 卜居辭, 慕古辭, 別離辭寄權子夏辭./ 詩(202首) ; 七言絶句 83首, 五言律詩 40首, 七言律詩 25首, 五言絶句 54首./ 卷之 2. 詩(60首) ; 五言古詩 60首./ 卷之 3. 詩(41首) ; 五言古詩 23首, 七言古詩 11首, 雜詩 7首./ 書 ; 與李儀甫, 答李儀甫(3), 與洪時可, 答鄭德胤, 答鄭慶輔(2), 與丹城伯, 與李寬夫, 答鄭仁輔, 答從兄鋤歸子, 寄子時晦./ 祭文 ; 祭外舅李公, 祭石泉權公, 祭希夷翁, 祭文參議(啓周), 祭張君./ 卷之 4. 雜著 ; 題全性之贈行詩後, 希夷精舍記, 避炎亭記, 後凋堂記, 淵雷亭記, 祖考淸城府院君墓碣銘, 先考西原府院君行蹟, 外祖考觀物堂潘公行蹟./ 附錄 ; 墓碣銘, 輓詞, 淸風歌十八韻, 淸風子傳./ 遺墨./ 跋 ; 鄭玉.(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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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817
예천군 방문(韓·中 文化·書藝交流 새로운 時代 열었다 : 中皇室 堂上官, 수장가협회, 文物學會 等 活動 梁華京 先生 醴泉 訪問, 千年古刹 普門寺 絶景에 感歎… “獨創的 韓國文化 中國에 알릴 터”) [記事] : 2011년 12월 31일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학가산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보문사. 보물 제145호인 대장전,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 보물 제729호인 용문사 교지, 보물 제989호인 대장전 목불좌상 및 목각탱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는 천년고찰인 이곳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황실 당상관, 수장가 협회, 문물학회 등에서 문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양화경(62) 선생이 한국화가인 경북도립대 권정찬 교수의 초청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천년고찰 보문사와 예천군청, 초정 서예기념관을 둘러보고 정기채 예천 부군수, 서예가 초정 권창륜, 경북도립대 교수 권정찬, 역사학박사 황연화, 사진작가 최현준 씨 등과 한·중간의 문화교류, 초정 권창륜 선생과의 서예교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인 권창륜 선생에게는 선생의 서력에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차후 방문 할 때에는 좀 더 발전적인 교류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권창륜 선생은 정부가 제작하는 제5대 국새의 아랫부분인 인문(印文)과 청와대 인수문(仁壽門)과 춘추관, 운현궁의 현판을 쓴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이다. 양 선생은 하루의 일정으로 방문한 가운데 보문사를 가장 먼저 찾아 사찰음식을 시음하고 주지 도문 스님으로부터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득도도량,.. 사찰을 둘러싼 고송 숲을 보고는 역사적 사실과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을 했다. 이어 600년 수령의 석송령 소나무를 관람하고 군청을 방문해 정기채 예천 부군수와 환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양 선생은 중국황실에 수장 중인 양세녕 작품의`서곡도`를 그대로 모사하고 황제의 옥새를 실재 찍은 작품을 선사했다. 정기채 부군수는 예천참기름으로 답례하고 곤충엑스포 준비 등 예천군 문화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어 중국서화예술위원회 종신회원으로 서예에 관한 관심이 많은 양 선생은 용문에 위치한 권창륜 서예전수관을 방문해 자료와 화집을 교환하고 흥겨운 즉석 휘호, 문화교류에 대한 담소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오후를 보냈다. 이곳에서도 `서곡도` 1점을 권창륜 선생에게 선물해 우애를 과시했다. 양 선생은 전통건물 양식의 전수관과 권창륜 선생의 서력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양 선생은 “한국에는 자주 방문해 조순, 이수성, 박찬종, 박수룡, 권정찬 등 많은 지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지만 연말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 날에 역사가 깊고 귀중한 예술가들이 자리한 예천을 보게 돼 더욱 기분이 좋다”고 했다. 또 그는 “중국도 그렇지만 한 나라의 대표적 서예가, 국제적 활동의 예술인들이 대도시를 벗어난 작은 문화도시에 머물고 있음은 독특한 인상을 줬다. 마지막으로 연말이라 바쁘신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주신 정기채 부군수와 초정 권창륜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향후 기회가 되면 곤충엑스포를 관람하고 더 많은 예천 지역민들과 문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유명중국문화인들을 소개하고 어울리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 지인들에게 한국의 독창적 문화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양 선생은 `서곡도` 1점을 김용대 경북도립대학 총장에게도 전달하기도 했다.`서곡도`는 청나라 웅정 5년 풍년을 기념해 황제의 명으로 그린 조이삭의 그림으로 중국 당상관에서 그대로 복제하고 웅정어보를 직접 찍은 것으로 후진타오가 오바마, 노무현 등 세계 정상들에게 선물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양호경 선생이 직접 제작했다. 이번에 딸을 동행해 방문한 양화경 선생은 중국 혁명 2세대로서 현재 중국 문화 활동의 중심인물이며 한중민간교류연합회 고문직을 갖고 장영실기념사업회와 한중문화교류, 친선 방문 등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한파 학자다. 최근에는 북경양화경문화재단 명예회장과 북경중가국제옥션의 수석고급고문으로서 경북도립대학 권정찬 교수의 작품에 매료돼 한국인으로는 처음 권 교수를 양화경문화재단의 고급고문에 임명하고 중국문물학회와 경매회사에 소속되게 하여 지속적으로 활동하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 한편, 양화경 선생과 함께 예천을 방문한 문화학자 박성일 선생은 “양화경 선생의 이번 한국 방문은 권정찬 교수와 서울중심의 고급문화인사들과 중국의 문화실세들이 모여 한중간의 국제문화교류단체를 만들려는 의도에서 방문했다”면서 “그래서 당연히 예천을 방문한 것이다. 나는 중국의 사찰문화 복원위원으로서 보문사라는 절을 보니 매우 아름답고 그 역사성에 놀랐다. 도문 스님이 말한 반학루나 보조국사 국사전 건립 등은 필요한 듯하고 도움을 주고 싶고, 2012년 여름에 한번 방문해 보문사에 머물 예정이다. 그리고 예천지역의 음식문화가 한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른 고찰, 소나무나 아름다운 강을 다음에는 좀더 오랜 시간을 두고 보고 싶다”며 예천의 자연환경을 높이 평가 했다.(윤희정 記者)
■양화경 선생 약력 : 중국혁명2세대, 홍콩학자, 중국문물학회 특별이사, 중국문물학회 지도교수, 중국선자예술학회 상임이사, 중국수장가협회 회원, 북경양화경문화전매유한공사 명예회장, 북경중가국제경매유한공사 수석고급고문, 중국제1역사당상관 명예관원, 중국서화예술위원회 종신회원, 한국장영실기념사업회 중국고문, 한중민간교류연합회 중국고문(慶北每日新聞 기사입력 2012-01-03 오후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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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