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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804:정춘모(1)
작성자장병창 @ 2012.01.23 06:08:36

   예천의 자랑(2804) : 정춘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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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鄭春模) : 1940- , 용궁면 출신, 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인간문화재 후보 지정(候補指定),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초청 특별전시회(特別展示會) 제작시범, 91년 통영갓의 명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 지정(技能保有者指定, 現), 한국무형문화제 기능보존협회 이사장이다. 예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을 한다고 대구에서 하숙할 때, 그 집이 갓집이었다. 그 곳엔 인간문화재였던 고재구, 전덕기, 김봉주 옹을 비롯한 경남 충무(慶南忠武)의 대가(大家)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틈틈이 심부름하여 잔일 거든 게 한 평생의 붙임이 되고 말았다. 갓의 원형과 제조 기술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그는, "70년 대에 들어서면서 아무도 갓 제작에 관심을 안 갖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든 갓의 전통을 계승해야겠다는 집념으로 배우게 되었다."라는 그는, "갓에 미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통영(統營) 갓"하면 예로부터 우리나라 갓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임금이 쓰는 어립(御笠), 국상(國喪) 때면 누구나 써야 했던 백립(白笠), 명주를 입힌 최고급품인 진사립(眞絲笠)은 모두 이 곳에서 제작되었다. 갓은 언뜻 보기엔 대나무와 말총으로 얼기설기 엮으면 될 것 같지만, 피나는 훈련과 오랜 경험에서 생기는 일종의 영감이 있어야 한다. 말총을 촘촘히 엮어 모자를 만들고, 대나무를 머리카락의 절반 굵기만큼 가늘게 클로 다듬어 차양을 만들고, 이 둘을 한데 맞추면서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엷게 먹과 옻칠을 수 십 번 거듭하는 그 과정은 무려 50여 단계나 된다. 따라서 예전에는 작업이 각기 다른 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정춘모 혼자서 세 가지 일을 해나가고 있다. 열심히 작업하면 한 달에 두서너 개의 갓을 만들 수 있으나, 실용성이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요즘엔 한 달에 한 개 정도 갓을 만든다고 한다. 1982년 후반기에는 갓을 사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옛 것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이 야속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갓의 명맥을 잇는 일인데, 30년 전부터 갓 일을 배우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고 말한다.(每日名鑑 1997)

 

  정춘모 : 공예가/ 출생 1940년 9월 5일 (만70세) | 용띠,/ 출생지 경북 예천군/ 경력 : 1991 ~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입자장 기능보유자 지정, 1992 ~ 한국공예가회 회장, 1984 ~ 로마 바티칸 박물관 갓 기증, 1996 ~ 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이사장, 1974 ~ 중요 무형 문화재 전수자 등록, 1980 ~ 중요 무형문화재 이수자 수여, 1999 ~ 한국중요무형문화재 총연합회 부이사장, 1999 ~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 한국공예 문예진흥원 이사 취임/ 수상 : 1973 제1회 인간문화재 작품 전시회 출품 입상 수상, 1978 제3회 인간문화재 작품전시회 은상 수상(daum 2010)

 

  정춘모 : 입자장 정춘모 선생| 비밀의 화원/ 빛과 소금/ 2010.04.24. 19:41/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관모의 하나로, 비, 햇볕, 바람을 막아주는 실용성까지 갖추었다. 귀품 나는 양반들의 의관 매무새는 갓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갓은 넓은 의미로 방갓형, 패랭이형 모두를 말하며 흑립, 칠립, 평립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양반들의 사회적 신분과 우리 민족의 의관으로 줏대와 체면을 상징했다. 갓의 명칭은 고려 말 공민왕 때 풍속에 따라 관모를 제정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갓은 말총, 대, 아교 먹, 숯, 생칠 등을 원료로 제작되며, 작업 공정에 따라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말 또는 소의 꼬리털을 사용해 만든다. 일골 위, 정면에다 창호지를 바르고, 아교칠을 한 다음, 말린 날줄, 사잇줄, 절임줄 등을 엮는다. 양태는 둥글고 넓적한 갓의 챙에 해당한다. 대를 쪼개고 쪼개어 실처럼 가느다란 대나무실로 다듬어, 뜨기, 훑기, 직이기, 죽도에 밀기, 대나무 고르기, 양태절이기, 오림줄고르기, 빗대꽂기, 양태풀먹이기, 양태풀칠하기, 트집잡기, 철대깎기, 이어붙이기, 밑달기, 먹풀칠하기, 싸개싸기, 겉철붙이기, 칠올리기 등의 공정을 거친다. 총모자와 양태가 마련되면 대를 십자로 엮어 웅기를 잡고 이어, 훈가싯기, 수상하기, 버렁잡기를 거쳐 하나로 갓모으기를 하고 옷칠을 한다. 마지막으로 곱고 투명한 비단으로 갓끈을 단다. 이 모든 과정이 갓일이며, 하나의 갓을 만나려면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이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이 세 분야를 모두 섭렵한 유일한 장인이 바로 중요문화재 제4호 입자장 정춘모 선생이다. 선생은 18세 갓일을 시작하여, 김봉주(입자장), 전덕기(입자장), 모만환(양태장), 고재구(총모자장) 선생이 그의 스승이었다. 갓일의 거성들에게 전수를 받았다는 자부심과 존경심이, 그의 공방에 들어서면 금방 감지된다. 바닥에는 인두, 솔, 바늘대, 칼 등 40여개의 도구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벽에는 스승들의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숨소리까지 죽이며 인두작업에 빠져있는 선생의 머리 위로, 봄을 닮은 노란 갓집이 흔들흔들 춤을 춘다. "인두의 열이 강하면 세죽이 꺾이고 제대로 된 곡선이 살지 않습니다. 특히 양태절이기는 여간 세심한 작업이 아닙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죽사를, 훑어내는 작업은 양태 하나에 삼백 올이 넘는 세심한 손길이 닿지요." 그 세심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숨 막히는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갓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선생의 우리 것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갓일은 섬세한 손놀림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외로운 작업이다. "스승이 기능뿐만 아니라 장인의 아름다운 고집과 고독까지 전수해 주셨지요. 그래서 외길에 따라다니는 고독도 다스릴 줄 압니다." 갓은 이제 박물관, 영화나 드라마 소품 등 한정된 수요 말고는, 일상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로 등한시 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전통의 명맥을 이어, 한국인의 줏대와 체면을 세워가는 선생의 세심한 손은 아름답다. 하나만을 바라보며 외길을 간다는 것은 외롭고 힘들다. 하지만 갓일을 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선생은, 오늘도 노란 꽃 갓집을 머리에 달고, 한없이 평온한 작업에 빠져 행복해 하신다......(daum 2010)

 

  정춘모 : 민족의관의 자존심을 엮는 갓일 장 정춘모|  ☞ 근대문화재/ 박순구/ 2007.11.18. 20:51/  “8,9개월 하나 엮고 나면 시력을 버리고,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진사립의 좋은 점을 물었다.  “벌써 광택부터 다르지, 늘 새것같이 반들반들해. 오래가지. 멋있지.” 하지만 이어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누가 이제 진사립을 만들겠어. 나 죽으면 진사립도 끝나는 거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로부터 갓은 한국의 줏대와 체면을 상징했다. 그 중에서 통영갓은 단연 으뜸으로, 철저한 전통방식의 공정과 제품의 우수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이제는 촌로에게서도 볼 수 없고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만 간간이 볼 수 있는 갓, 우리 주위에서 멀어져 버린 전통 갓을 오늘도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이가 있다./ 갓에 미치기까지 : 삼성동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만난 정춘모鄭春模(67) 선생의 첫인상은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느낌이었다. “저요, 전 갓일 안 해도 먹고 살만해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제가 안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마는 거지.” 갓일은 그에게 운명이었나 보다. 통영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춘모 선생이 스무 살 무렵, 유학을 간 대구의 하숙집에서 여러 어르신의 갓일 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첫눈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당시 대구는 전국 모든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최대 유통단지였고 갓 역시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팔려나갔던 때였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갓을 만들던 이들 역시 당대 최고의 기능을 보유한 어른들이었던 것이다. 갓일은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대를 쪼개어 머리카락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얇은 대나무실로 다듬은 다음, 대올 4가닥으로 갓의 차양을 만드는 양태, 말총이나 소털로 관을 만드는 총모자, 그리고 양태와 총모자를 취합하여 최종적인 갓을 만들어내는 입자. 당시 정춘모는 양태장 모만환, 총모자장 고재구, 입자장 전덕기, 김봉주 등 당대 최고의 갓일 장匠들에게 갓일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그들 모두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갓은 이미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한 분, 한 분씩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헌데 그분들의 자제들은 모두 갓일과는 무관한 길을 걸어갔다. 이에 전통 갓일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정춘모 선생은 그때부터 더욱 완벽한 갓을 만들기에 고군분투하게 된다. “한 마디로 갓에 미쳤던 거지.”/

 

  진사립의 위기 : <한 코 떠라 두 코 떠라 세 코 떠라 속히 떠라 토양하나 돌아 갈제 쌍금 쌍금 쌍가락지 호작신을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이 뜨니 후에 보니 처자로다 처녀애기 자는 방에 숨소리가 둘이로세 천도복숭 울오랍시 거짓 말슴 말아주소 꾀꼬리라 그림방에 참새같이 내누었네 동남풍이 불어 풍지떠는 소리로다 거짓말슴 말아주소.>  예전에 갓일을 하던 이들이 부르던 노동요다. 양태 작업 24단계, 총모자 17단계, 입자에 10단계 등 총 51단계를 거쳐야만 갓이 하나 탄생되기에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며 엄청난 인내심을 가져야 가능한 고단한 작업이다. 이제 내일모레면 칠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이기에 전수생을 양성하고 있긴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기능 공정밖에는 가르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진사립 하나 만들려면 신명을 바쳐야 하는데, 요즘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진사립眞絲笠. 그렇다 정춘모 선생의 자부심은 바로 진사립에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초 정부 고위인사의 부탁으로 만들었다는 진사립, 그것은 갓일 장匠 최대의 숙원이었다. 전수관 내에도 물건을 볼 수가 없고 다만 선생이 내민 사진 속으로만 그 실체를 봉사 코끼리 만지듯 어림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진사립은 양태를 명주 세사로 엮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죽사竹紗에 비해 오랜 시간과 고도의 하이테크를 요구한다. “8,9개월 하나 엮고 나면 시력을 버리고,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진사립의 좋은 점을 물었다. “벌써 광택부터 다르지, 늘 새것같이 반들반들해. 오래가지. 멋있지.” 하지만 이어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누가 이제 진사립을 만들겠어. 나 죽으면 진사립도 끝나는 거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국에 실크햇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갓이 있었다 : 갓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남 용강군 화상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고분인 합신총 벽화의 기사인들이 쓰고 있는 입자笠子는 조선시대의 매월당이라고 부르던 입자와 모양이 일치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서민들의 관모로 소립素笠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전성기는 조선조 중엽, 통영 12공방 중 하나였던 갓방에서 질 좋은 갓이 생산되면서부터이다. 갓은 당시 모양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고, 또 색깔에 따라 쓰임이 다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홍립은 무관이 쓰던 갓이었고, 국상이 나거나 부모가 돌아가시면 백립을 썼던 것이다. 갓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유행을 달리했다. 연산군 때에는 양태가 넓어지고 대우(관)가 너무 높아져 왕이 승정원에 교지를 내려 규격의 표준을 제정한 일도 있었다. 명종 때는 대우가 낮아지고 양태가 넓어져 대우는 식기를 엎어놓은 것 같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명종은 다시 새로운 갓을 제정했는데 대우는 너무 높고 양태는 너무 좁아 보는 사람마다 웃음을 자아냈다고 한다. 고종 무렵에는 제립자유화 정책에 따라 갓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모든 계층이 갓을 쓰게 되었고 대원군은 양태를 좁게 한 소갓으로 개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갓. 갓을 쓴다는 것은 의관을 정제할 때의 마무리다. 그러한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던 갓은 이제 한낱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갓은 정녕 사라질 것인가 : 전수관 한쪽 벽에는 그에게 갓일을 가르친 선생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고, 그 옆에는 미국 스미소니언 학회로부터 받은 전통공예 인증서가 걸려있다. 그리고 천정으로 삼십여 개의 노란 갓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앞으로 그 갓집을 채울 갓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인가. 제도적 뒷받침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고 배워야 할 작금의 장인 전수생 풍토에서 과연 누가 갓일을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의 몫이리라. 오늘날 IT 분야에서의 한국인의 놀라운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갓일과 같이 오랜 세월 축적된 우리만의 고도의 하이테크가 그러한 능력을 낳은 것은 아닐까. 누구나 우리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 나가길 열망할 때, 결코 우리의 전통 갓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한평생 갓에 미쳐 살아갈 또 한 명의 정춘모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리라. 글 : 문화재사랑 편집실, 출처 :문화재청 글쓴이 : 문화재사랑(daum 2010)

 

  정춘모 : 이 시대의 장인 :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정춘모/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 진정한 갓쟁이 정춘모/ 오은주 공예 전문지 ‘crart’ 기자/  한코 떠라 두코 떠라 세코 떠라/ 속히 떠라 토양하나 돌아 갈제/ 쌍금 쌍금 쌍가락지 호작신을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이 뜨니/ 후에 보니 처자로다 처녀애기 자는 방에/ 숨소리가 둘이로세 천도복숭 울오랍시/ 거짓말슴 말아주소 꾀꼬리라 그림방에/ 참새같이 내누었네/ 동남풍이 불어 풍지떠는 소리로다/ 거짓말슴 말아주소./ <갓 일을 하던 기능공들이 정신집중과 함께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갓 노래>// 갓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대표적인 관모(官帽)의 하나로 외출을 하거나 의례행사 등 의관을 갖추어야 할 때 상투를 튼 머리 위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는데 사용되었다. 완전한 성인으로서의 의관 매무새는 갓으로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갓이 요즘은 세월의 풍파에 밀려나 지리산 청학동이나 안동 하회마을, 박물관, 사극 등에서나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갓의 수요가 미미해졌고, 갓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갓일의 맥을 이어가는 장인들을 요즘 세상에 만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도 멈춰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 우리 선조의 당당한 풍채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4호 갓일장 정춘모(64) 선생은 전통 있는 통영 갓의 명맥을 전수 받아 지키고 있는 장인이다. 요즘시대에 그가 지켜 온 갓일은 자칫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잊혀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통영 갓의 전수자의 길에 투영하고 있는 정춘모 선생을 만나보았다.

 

  갓에 대해 말하다 : 예로부터 통영사람들은 예술적 감각이 높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전칠기, 소목장, 두석장 등 단단하면서도 정교한 예술성 때문에 널리 인정받았다. 더불어 갓도 유명했는데, 갓 중에서도 통영 갓을 최상품으로 쳐주었다. 통영 갓은 옛 선비들이 선망하던 최고급품으로 명성을 떨쳤던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러한 통영 갓의 명맥은 현재 서울 도심지의 정춘모 선생 공방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삼성동 문화재 전수회관 3층에 자리잡은 갓일장 정춘모 선생의 공방은 바닥에는 이름 모를 갖가지 연장들로, 천장은 갓을 넣은 갓집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 천장을 가득 메운 노란 갓집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이 이색풍경이다. 대나무로 갓집의 틀을 짓고 노란 한지가 발리고 마지막으로 갓일장 정춘모 선생의 솜씨가 어우러진다. 그의 갓임을 알리는 당당한 서체가 쓰인 갓집은 전통이 어린 통영 갓이 넣어지기에 손색이 없다. 방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손을 놀리는 정춘모 선생은 하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주변 상황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드디어 일을 마무리짓자 선조들에게 갓이 어떤 의미를 지녔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옛 조상들은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서 버선발로 나갈 때에도 갓을 챙겨 의관을 바로 잡았고, 제대로 의관을 하지 않고서는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이라 하여 부끄러이 여기었지.” 정춘모 선생이 갓일에 갖는 자부심은 숨죽이고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갓은 예(禮)를 알고 도(道)를 갖추려는 선비들에게 자신과 상대를 존중하는 유형의 언어였던 것이다.

 

  세심한 손길이 담긴 작업 : 갓을 만드는 일은 원래 세 분야 장인의 손을 거쳐야했을 만큼 섬세한 작업이다. 갓은 머리를 감싸는 ‘총모자’와 차양이 되는 ‘양태’로 구성되어 있다. 만드는 과정은 크게 세 과정으로 나뉜다. 양태방에서 대를 쪼개어 머리카락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얇은 대나무실로 다듬은 다음, 대올 4가닥씩으로 양태를 엮는다. 총모자방에서는 쇠꼬리털과 말꼬리털로 양태를 제작하는 수법과 같이 총모자를 엮게 된다. 이 두 가지를 입자방에서 합하여 갓모으기를 하고 옻칠을 한다. 이 과정을 모두 합하여 갓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 장인이 함께 해야 갓의 형상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춘모 선생이 각 과정을 혼자서 해낸다. 전수자가 혼자였기 때문에 세 과정의 장인에게서 오랜 기간 전수 받아 자신의 손으로 모든 과정을 소화해 온 것이다. 갓일 작업 중에 그가 가장 어려운 일로 꼽는 것은 대나무를 머리카락처럼 가는 세죽으로 만들어 하나하나 엮어 가는 양태 일이다. 이 과정은 인내와 집념이 담긴 세심한 손길이 요구된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과정은 ‘버렁잡기’라 불리는 양태의 곡선을 살리는 작업이다. 갓의 테를 이루는 부분인 양태는 양판 위에서 인두로 지져 느슨한 곡선을 갖도록 한다. 이 버렁잡기에서 대나무를 다루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인두질을 너무 해도, 적게 해도 원하는 형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불 온도를 잘못 맞춰 대나무를 태우는 것은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흔히 할 수 있는 실수이다. 오랜 경험의 정춘모 선생은 불에 달군 인두가 너무 뜨거우면 세죽이 꺾어져 버리고, 인두가 적당히 달아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곡선이 나오지 않는다고 귀띔한다. 갓을 평소에 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박물관에서만 갓을 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과정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 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갓일이 극에 다다른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임을 간파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정춘모 선생의 공방에서 알게 된 일련의 갓일의 과정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갓일은 말총, 대, 명주실, 아교, 먹, 생칠, 숯 등을 원료로 하여 제작된다. 갓의 양태부분은 갓의 챙에 해당하는 둥글고 넓적한 부분으로 햇빛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양태에 쓰일 대나무를 머리카락과 같이 가늘게 쪼개어 엮는데, 결을 엮을 때는 지름이 양태 만한 둥근 ‘양태판’을 이용하며, 그 중심에 총모자만한 원을 비워둔다. 사죽을 양태판 위에 햇살처럼 펼쳐 놓고, 직조의 씨줄에 해당하는 4가닥의 돌림줄을 가지고 나선형으로 엮어나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빗대를 사선으로 꽂아 가로세로로 안정시키고 묽은 아교로 풀을 먹여 완성한다. 특히 갓의 양태를 만들 때는 단 하나의 칼로 나무를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쪼개어 400여 개의 대들을 서로 엮어 완성해야하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갓의 테 부분인 양태를 만들고 나면 모자집인 총모자를 제작한다. 총모자의 재료는 날줄감으로는 말총이 쓰이고 절임줄감으로는 쇠꼬리털이 쓰인다. 일골 위 정면에 창호지를 바르고 아교 칠을 한 다음, 말려서 날줄과 사잇줄이 흐트러지지 않게 붙인다. 양태를 엮는 일과 마찬가지로 날줄, 사잇줄, 절임줄 등을 엮는다. 총모자를 골에서 뺀 다음 이를 먹칠하면 완성이 된다. 그 다음 과정이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해 갓으로 맞추는 입자일이다. 갓으로 모아지면 마지막으로 옻칠을 하여 마무리를 한 후 투명하고 얇은 비단으로 갓끈을 단다. 갓끈은 원래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턱 밑에 매는 실용적 구실을 하던 부분인데, 차츰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장식적인 구실도 겸하였다. 그 종류로는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布帛纓), 옥·호박·산호·수정 등으로 만든 주영(珠纓) 및 대(竹)로 만든 죽영(竹纓)이 있다. 갓끈에 대한 사치도 대단하여 계급에 따라 주영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삶, 갓일을 지켜가는 길 : 정춘모 선생은 18살 되던 해부터 갓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30여 년전만 해도 통영지역에서는 입자장으로 전덕기, 김봉주, 양태장의 모만환, 총모장의 고재구 등의 장인들이 기·예능보유자로 각각 지정되어 갓일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로써는 경제성이 불투명한 갓일을 전수받기로 결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네 분의 스승님에게서 갓일을 제대로 배우고자 했던 그의 일념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이다. 스승들의 타계로 현재 통영 갓의 기술을 재현 할 수 있는 장인은 정춘모 선생 혼자가 되었다. 지난 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호, 갓일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갓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갓은 그 쓰임이 쇠퇴하여 현재는 그 전통이 끊어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춘모 선생은 70년대 이후부터는 갓에 대한 수요가 박물관이나 예술계 종사자 등에 국한되어 갓일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에 걱정이라고 한다. 갓이 만들어지기까지 드는 노력과 시간이 더욱 갓의 값어치를 높이지만 그 만큼 가격 또한 높아진다. 갓의 사용이 일상생활에서 없어진 지금, 한복과 같이 명절이나 기념일에 착용하려 해도 쉽게 구입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갓을 지켜가기가 힘든 현실에도 정춘모 선생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오히려 나이보다도 정정한 모습과 날이 서있는 듯한 힘있는 눈빛이 마주한 이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마음과 몸에 병을 만들지 않는다는 뼈 있는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인으로 불리는 그에게서 우러나오는 당당함은 그의 갓일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닐까. 오늘도 그는 작업실에서 노란 갓집들을 위로 두고 갓을 엮고 있을 것이다. 그의 스승들이 그랬듯이 그의 삶은 갓과 함께 하는 것이다.(daum 2010)

 

  정춘모 : 정춘모(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관리자 2008-01-02/ 651/ 정춘모(鄭春模)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입자장 정춘모 선생님은 1970년도 총모장의 고재구, 입자장의 김봉주, 양태장의 모만환, 세 분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 어렵게 갓일을 전수받았다. 1979년도까지 세 분 스승이 모두 작고한 이후, 세 분 스승들이 분업해서 하던 갓일을 지금은 혼자서 해오고 있으며,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갓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경력사항 : 1974년 중요 무형 문화재 전수자 등록, 1980년 중요 무형문화재 이수자 수여, 1982년 미국 워싱톤 Smith-soniar 박물관 초청 특별 전시회 및 제작 시범, 갓 기증, 한미 수교100주년 기념사업 해외 특별전시회, 미국과 일본 전시회, 1983년 오스트리아 뷔엔나 박물관 갓 기증, 1984년 로마 바티칸 박물관 갓 기증, 연세대학교 민속박물관 갓 기증,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 지정, 1992년 한국공예가회 회장, 1996년 (사) 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이사장, 1999년 한국중요무형문화재 총연합회 부이사장, 99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년 (재) 한국공예 문예진흥원 이사 취임, 2006년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기능보유자/ 수상사항 : 1973년 제1회 인간문화재 작품 전시회 출품 입상 수상, 1978년 제3회 인간문화재 작품전시회 은상 수상, 전승공예대전 2회, 4회, 5회, 6회 장려상(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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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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