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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805:정춘모(2)-정충원-정탁(1)
작성자장병창 @ 2012.01.24 08:47:29

   예천의 자랑(2805) : 정춘모(2)-정충원-정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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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춘모 : [전통을 잇는 사람들]<1>중요무형문화재 갓일 보유자 정춘모 씨 반백년 ‘꼿꼿한 선비정신’을 만들다/ 혼을 불어넣는 장인정신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정춘모 씨의 공방. 수십 개의 노란 갓집 아래서 정 씨가 갓을 만들고 있다. 한국 고유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들을 만나 그들의 작업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에 담긴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의 장인정신을 통해 끊길 듯 위태롭게 이어지는 우리의 전통과 그 속에 맥맥이 흐르는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다. 월 1회 게재될 ‘전통을 잇는 사람들’에 많은 성원을 기대한다. 씨줄 날줄 정성을 담아 갓 만드는 세 가지 공정 가운데 양태의 과정. 정씨가 대를 쪼개 만든 대나무실로 갓의 차양을 만들고 있다. 갓은 예로부터 선비의 인격이 배어나는 단정한 매무새의 상징이었다. 종류도 다양하고 독특한 형태적 특징과 아름다움을 지닌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이다. 흔히 의관(衣冠)을 정제한다는 표현처럼 예전에는 어디를 가나 반드시 갓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갓 쓰고 자전거 탄다’는, 다분히 갓을 비하하는 듯한 속담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실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정춘모(68) 씨는 갓을 찾는 이가 없어도 오로지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분투하는 장인이다. 생계가 어려워 갓일을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손을 놓으면 말 그대로 갓일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만난 그의 첫마디에는 반 백년 갓과 인연을 맺어온 자부심이 가득하다. “갓일 안 해도 먹고살 만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어. 그냥 그대로 끊어지는 게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춘모 씨는 그곳에서 갓 조립하는 일을 배운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갓일과 인연을 맺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이십대 초반 대구에서 하숙을 할 때였다. 그 하숙집에 통영 출신 장인들이 모여 갓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갓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첫눈에 갓일에 빠져버렸어. 당시 잠자는 시간을 빼고 15시간 이상씩 갓 만드는 일만 했던 것 같아.”  “갓은 내 인생” 정 씨(왼쪽에서 두번째)가 통영에서 갓 일 보유자 고재구 씨(오른쪽), 갓 일 보유자 김봉주 씨(오른쪽에서 세번째)에게서 기능을 전수받고 있는 모습이 담긴 빛바랜 사진.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갓은 여전히 쓸모 있는 의관이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명과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조차 갓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 시점에서 오히려 정춘모 씨는 갓일의 명맥을 잇기 위해 통영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갓일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손수 모든 공정을 직접 익혀서 평생 갓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40여종 장구들 갓을 완성하기 위한 공정은 크게 세단계로 나뉘나 40여종이나 되는 장구를 이용, 50여 단계를 거쳐야만 제대로 된 갓이 완성된다. 갓 만드는 과정은 크게 ‘양태(갓의 테)’일, ‘총모자(모자집)’일, 양태와 총모자를 거두어 맞추는 ‘입자’일로 나눈다. 대를 쪼개어 머리칼같이 가느다란 대나무실로 양태를 엮는 24개 과정을 거쳐야 하고, 말총으로 관을 만드는 총모자 제작에 17개의 과정을,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를 조립하는 입자에 10개 과정이 소요돼 모두 51개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갓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는 또 40여종의 다양한 장구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양태나 입자, 총모자 등 부분적 과정의 장인들이야 더러 있지만 정씨처럼 이 세 가지 과정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이는 드물다.

 

  정씨는 “수십 년 이 일을 했지만 이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다”며 “갓 하나를 만들고 나면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갓 중에서도 으뜸은 왕이나 귀인이 썼던 진사립. 양태를 명주세사로 엮어 만든 진사립이야말로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갓의 결정판’이라고 정씨는 자부한다. 진사립은 대나무실로 만드는 보통 양태가 아니라 가느다란 명주실로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한데, 오로지 그의 손에서만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양태의 부드러운 곡면은 곡선미를 추구하는 우리 고유의 조형적 특징을 그대로 담아낼 뿐만 아니라 반투명의 검은빛 광택에서 느껴지는 격조 높은 화사함이 선비의 기품과 절조를 드러낸다. 특히 섬세하게 만들어진 갓의 양태 위에 내려앉는 햇살과 반투명으로 걸러진 그 햇살이 연출하는 얼굴 위의 은은한 그림자는 열림과 닫힘의 절묘한 조합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미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백미라는 평가다. 51단계 공정을 거쳐 탄생한 갓 양태, 총모자, 입자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갓.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노란 갓집 아래 묵묵히 손을 놀리는 정씨의 모습에서 이제는 갓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태반인 시대를 살아가는 장인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 아픔 속에는 우리네 전통과 아름다움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는 당당한 장인의 기품도 함께 배어 있었다.(허정호 記者 世界日報 2009 02 27)

 

  정춘모 : 인간문화재 35명 한자리서 예능 보여준다…/ ‘2010 여름, 천공(天工)을 만나다.../ 5달전, 2010년 7월 12일 (월) | 국민일보 | 미디어다음/ ...처음이다. 12일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갓일(중요무형문화재 4호) 보유자 박창영 정춘모, 매듭장(22호) 김희진, 조각장(35호) 김철주, 악기장(42호) 고흥곤, 궁시장(47호) 박호준, 두석장(64호) 박문열...(daum 2010)

 

  정춘모 : 가구가이드 2008년 10월호(통권 제164호)/ e-Book/ 월간 가구가이드 |  2009.03.19/ 책본문 : 통영갓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보유자 정춘모作 40×15cm 화각화접문머리장/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9호 화각장 한춘섭作63×64×62cm십장생 액자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보유자 .../ 405페이지(daum 2010)

 

  정춘모 :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冊/ 장경희 지음| 화산문화 펴냄 | 2001-12-26/  책소개 : 이 책에서는 갓일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 조선시대의 원전사료를 수집·정리하고, 총모자장 김인, 양태장 장순자, 입자장 정춘모, 박창영의 갓일 제작과정의 기술을 현장에서 조사하고 면담하여 상세히 다뤘다....(daum 2010)

 

  정춘모 : 명품명장 통영12공방 이야기/ 冊/ 조윤주 지음| 디자인하우스 펴냄 | 2009-04-20/ 목차 : 나전장 송방웅 나전장 박재성 나전장 김종량 소목장 김금철 통영전통비연구소장 김휘범 두석장 김극천 갓일 정춘모 염장 조대용 소반장 추용호 통영 누비 조성연 통영을 바라보다 디자인은 달나라 가는 생각 _...(daum 2010)

 

  정춘모 : 민족의관의 자존심을 엮는 갓일 장 정춘모/ 4년전, 2006년 8월 7일/ 민족의관의 자존심을 엮는 갓일 장 정춘모    “8,9개월 하나 엮고 나면 시력을 버리고,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진사립의 좋은 점을 물었다. “벌써 광택부터 다르지, 늘 새것같이 반들반들해.../ 태그: 통영 , 무형문화재 , 갓/ blog.daum.net/munhwajaecheong/ 환영합니다~ 문화재청 블로그입니다~(daum 2010)

 

  정춘모 : 탐라문화제 - 갓일, 망건장, 정동벌립, 고분양태 만들기/ 2달전, 2010년 10월 13일 (수)/ ...제주 등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로는 입자장에 정춘모, 박창영, 양태장에 장순자, 총모자장에 강순자가 있다. 갓은 조선초에/ blog.daum.net/ 푸른솔(daum 2010)

 

  정춘모 :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작품 만드는 과정, 직접 보니/ 작년, 2009년 12월 29일/ ...일부 전시되었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완성품 갓, '갓일(입자) '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4호입니다. 보유자인 정춘모 님의 시연이 올 연말까지 이어집니다.> 갤러리를 돌아봅시다! '2009 겨울 인사동, 天工을 만나다' 展 내부는 .../ 태그: 인사동, 무형문화재, 보유자.../ blog.daum.net/hellopolicy/ 정책공감 - 소통하는 정부대표 블로그(daum 2010)

 

  정춘모 : 갓일장 정춘모 / 김은지 | 크라트 2003년 5월호 - 모아진/ 2년전, 2008년 10월 15일/ ....이 두 가지를 입자방에서 합하여 갓모으기를 하고 옻칠을 한다. 이 과정을 모두 통합하여 갓일이라고 한다. 정춘모 선생이 갓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예천에서 3대 째 가업으로 갓방을 경영하던 이종국 선생 밑에서.../ 모아진 > 크라트(daum 2010)

 

  정춘모 : 한옥의 향기 ㅣ 옛 감성 그리고 장인의 손길이 깃든 전통가구 | 이하우징 2.../ 작년, 2009년 9월 1일/ 나전장의 송방웅, 박재성, 김종량, 소목장의 김금철, 두석장의 김극천, 염장의 조?용, 입자(갓) 장의정춘모,통씁소반의추용호,통씁누비의조성연등통씁의쟁쟁한명인들이옛전통가구제품의?중화와그 감성을 계승하기 위해.../ 모아진 > 이하우징(daum 2010)

 

  정춘모 : 2009 서울리빙디자인페어 / 이나영 | 이하우징 2009년 4월호.../ 작년, 2009년 4월 1일/ 나전장의 송방웅, 박재 성, 김종량, 소목장의 김금철, 두석장의 김극천, 염장 의 조대용, 입자(갓)장의 정춘모, 통영 소반의 추용호, 통영누비의조성연등통영지역이자랑하는쟁쟁한 명인들이 12공방의 부흥을 위해.../ 모아진 > 이하우징(daum 2010)

 

  정춘모 [專門資料] : 갓일 테를 만드는 양태, 이것들을 조립하여 완성시키는 입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영상물은 총모자장 김인, 양태장 장순자, 입자장 정춘모(통영갓)과 박창영(예천갓)의 갓일 제작과정과 기술 등을 수록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 국립문화재연구소(daum 2010)

 

  정춘모 : 무형문화재 - 서울특별시 갓일 笠子匠/ 6년전, 2004년 10월 22일/ 통영, 예천, 제주 등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로는 입자장에 정춘모, 박창영, 양태장에 장순자, 총모자장에 김인이 있다.../ 답변수: 1 | 조회수: 164(daum 2010)

 

  정춘모 : 우리나라 전통갓 만드는 방법 좀 알고 싶어요..../ 작년, 2009년 10월 11일/  ...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기능보유자-김인선생님) 입자 : 완성된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는 것.(기능보유자-정춘모선생님) 여기서 입자일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입자일은 골배기일, 버렁일, 수장일, 운각일 등으로.../ 답변수: 1 | 조회수: 268(daum 2010)

 

  정춘모 : 이매동 - 이매동의 중요 문화재엔 어떤 것이 있나요?/ 6년전, 2004년 10월 15일/ 이매동에 있는 문화재로는 갓일(정춘모, 중요무형문화재 4)이 있다고 하네요./ 답변수: 1 | 조회수: 55(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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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원(鄭忠元) : ?-1520(중종 15), 풍양면 우망리 출신, 본관은 동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470년(선종 1) 11월 9일 평산 부사(平山府使)에 부임하기 위하여 왕을 하직하였다.(成宗實錄)

 

  정충원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각 邑의 留馬를 잘 보살펴서 내년 봄에 平壤에 往納하는 일을 京畿道 등의 監司에게 行移하여 申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함/ 高陽|平壤|京|濟州|京|平壤|京畿|黃海, 鄭忠元|李尙嚴|李承福(daum 2010)

 

  정충원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靖에게 內醫를 보내 看病하는 사안에 대한 沈의 계/ 沈|李靖|李時挺|黃適|李得男|安淳實|李士男|崔弘達|金潗|朴廷健|金緝|孫仁及|安穎男|미결|崔成甲|吳孝男|柳福男|金國|邊義吉|李季榮|梁廷祉|安孝男|李之龍|尹衍之|鄭忠元|朴虎男|金夢龍|金佶|池莫孫|韓得吉...(daum 2010)

 

  정충원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冊封奏請正使 李桓 등에게 加資 등을 지급하라는 전교/ 李桓|李|黃一夏|鄭忠元|李後勉|金鎰信|朴泰華|李興瑞|崔奎|徐漢柱|金世鼎|洪聖疇|方俊傑|李杓|玄|崔龜齡|朴再蕃|韓興臣|吳泰說|李世忠|鄭萬碩|吳達興|李興完|李枝萬|崔檍|權聖徵|金應淵|盧尙迪|金尙鐵|韓重休...(daum 2010)

 

  정충원 : 정두형(鄭斗亨)/ ...] 전력 : 유학(幼學) 타과 : 중종(中宗) 39년(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정충원(鄭忠元) 관직 : 순릉참봉(純陵參奉) 관직 : 장사랑(將仕郞)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www.shinjongwoo.co.kr(daum 2010)

 

  정충원 : 정두형(鄭斗亨)/ ...사항]소과 : 1540(경자) 생원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부사(府使) [가족사항]부(父) : 정충원(鄭忠元)/ koreandb.nate.com/history(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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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鄭琢) : 1526(중종 21)-1605(선조 38), 용문면 하금곡리 버들밭 삼구동제 청주 한씨 외가(三九洞弟淸州韓氏外家)에서 태어나 부친 따라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가구촌(安東市臥龍面地內里佳丘村)으로 이사(1536), 백담 구봉령(栢潭具鳳齡)과 같이 금사사(金沙寺)에서 배웠고(1538), 중부 삼가현감 이흥(仲父三嘉縣監以興)에게 배웠고(1540), 퇴계 이황(退溪李滉)에게 배웠고(1542), 남명 조식(南溟曺植)에게도 배웠다. 1545년(인종 1) 부친 따라 다시 금당곡(金堂谷)으로 이사, 그 후 예천읍 고평리에서 살았다.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또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 현감 원로(縣監元老)의 증손, 학생 이충(以忠)의 2자, 연(璉)의 동생이다. 1548년(명종 3) 관물당 반충(觀物堂潘沖)의 딸과 결혼,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 천문, 지리, 병가(兵家), 상수(象數)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팔진육도법(八陣六蹈法) 등을 잘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영남 3대가(嶺南三大家)'라고 불리어진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여 년 간의 벼슬길에서 조금의 실수도 없었고,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超然)했고, 포용력이 있어 동인(東人)에 속하면서도 서인(西人)의 영수인 오음 윤두수(梧陰尹斗壽)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552년(명종 7) 식년 생원시에 3등 96위로 합격,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윤의정(尹義貞)과 같이 배웠고(1553),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4위로 급제하였다.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에는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校書館)에 머물러 있었다. 일찌기 향실(香室)에 숙직하던 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향을 가져다가 불공(佛供)을 드리려고 하자, 정탁이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세에 중시되고 이어 현로(顯路)에 통하게 되었으며, 뒤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에 재상(宰相)에 발탁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니 고인들의 치사하던 기풍이 있었다. 작위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나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과 친하였다. 정탁이 예천으로 돌아와 있다가, 1605년(선조 38) 10월 1일에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

 

  정탁(鄭琢]) : 출처: 브리태니커/ 1526(중종 21)~1605(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탁 :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증조부는 현감 원로(元老)이며,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전적·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교리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응교를 거쳐, 157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도승지·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81년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뒤 예조·병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 영변(寧邊)에 이르러 왕자이사(王子貳師)로서 세자를 따라 이천(伊川)으로 갔으며, 이듬해에는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했다. 1595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황정욱(黃廷彧)을 구하려다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몸소 전장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의 연로함을 들어 만류했다. 1599년 관직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판중추부사·영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치사(致仕)했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사(經史)·천문·지리·상수(象數)·병법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을 천거했으며,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했다. 저서로는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예천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daum 2010)

 

  정탁 : 약포 정탁(鄭琢)선생의 영정,보물제487호 (청주정씨)/ 지난주, 2010년 12월 14일 (화)/ 정탁(鄭琢) 약포영정 - 약포 정탁(鄭琢) 선생의 영정, 보물 제487호 鄭琢. 본관은 청주(淸州). 字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cafe.daum.net/emaeil(daum 2010)

 

  정탁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藥圃 鄭琢의 程朱學 수용 양상/ 3달전, 2010년 9월 3일 (금)/ 藥圃 鄭琢의 程朱學 수용 양상/ 金洛眞( 진주교육대학교 도덕교육과 교수 및 남명학연구소 특별연구원) )/ <국문초록> 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cafe.daum.net/CHEONGJU/ 청주정씨(daum 2010)

 

  정탁 : [한국의 혼 樓亭 .14] 예천 호명면 약포(藥圃) 정탁(鄭琢) 읍호정/ 작년, 2009년 1월 17일/ [한국의 혼 樓亭 .14] 예천 호명면 약포(藥圃) 정탁(鄭琢) 읍호정 나라걱정 잠 못드는 老臣의 충정 고이 서려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좌·우의정 두루 거치며 45년간 국가 경영 신명 임진왜란 땐 류성룡과 함께 구국의 혼.../ cafe.daum.net/CHEONGJU/ 청주정씨(daum 2010)

 

  정탁 : 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 자유게시판/ 현산 JHKIM/ 2009.06.18. 11:02/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 모든 전쟁에는 침략자 쪽이든 침략 받는 쪽이든 영웅이 나오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때의 영웅을 꼽으라면 누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제일 앞자리에 올려놓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임란의 영웅으로서 제일 앞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도 그를 추천하고 온갖 모함으로부터 지켜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를 추천하고 지켜준 인물이 바로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선생이다. 선생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둘째아들로 중종21년 (丙戌, 1526) 10월 8일 외향인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서 출생하여 선조38년(乙巳, 1605) 9월 19일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 집에서 8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선생은 27세인 명종 7년(1552) 사마시에 합격하고, 33세인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하여 6조 중 5조의 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시에는 동궁을 모시고 피난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선조 37년(1604) 호종공신삼등(扈從功臣三等)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으며 사후 광해군 5년(1613)에는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특히, 임란 중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 및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에 대하여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원함으로써 임란을 이끄는데 주력하였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풍수가에서는 두사충이 소점해준 집터와 신후지지에 얽힌 전설 때문에 더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집터와 신후지지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참전한 두사충은 벽제관전투 패전의 책임이 진(陣)을 잘못 쳤다는 이유로 모두 자신에게 돌아갔다. 참수될 위기에 처한 그는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 선생의 救命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선생 때문에 목숨을 건진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북 문경군 가은읍 갈전리 아호동에 "이곳에 집을 지으면 대감과 같은 정승이 세 사람 더 나올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집터를 잡아주었다 한다. 선생은 두사충이 잡아준 현지를 답사하기 위해 평복으로 갈아입고 구종(驅從)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주막집 노파에게 선생이 새로 집을 지을 문경 인심을 물어보니 "앞으로 문경 백성은 아호동에 약포 대감 집을 짓는 부역을 해야 하므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고 대답했다. 노파의 대답을 들은 선생은 자신의 집 때문에 백성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집 짓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렸다 한다. 그 후 선생이 낙향하여 두사충이 정해준 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송아래까지 와서는 하인에게 “아직도 멀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은 손으로 갈전동 쪽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백보이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뒷발질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대감은 말을 죽여 노송 밑에 묻고는 "나의 터가 아니구나! "라고 탄식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장례기간 중 왕과 왕세자는 각각 승지와 궁관(宮官)을 보내 임조(臨弔)하게 하였으며 예관으로 하여금 각각 치제(致祭)하게 했다한다. 그리고 장수(葬需)까지 내려 귀후서관(歸厚署官)으로 치상(治喪)하게 하고 승문원관으로 하여금 제주하게 했다 한다.

 

  선생의 視力에 대한 逸話 : 약포 선생의 약관시절 겸암 선생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임을 알고 있었으나, 아우인 서애 선생은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다. 이를 안 겸암 선생은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어느 날 오후 늦게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의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밤까지 돌아오라”고 일렀다. 이에 서애가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어려울 텐데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고 하자, 겸암은 “약포는 밤중이라도 그 편지를 알아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하였다. 과연 밤중이 될 무렵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고 겸암이 물으니, 이에 하인은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도 방에는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 주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하인의 대답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한 인재임을 깨달았고 더욱 친분을 더했다고 한다. 위의 일화내용을 보면 선생의 시력이 대단했음을 느낄 것이고 겸암과 서애의 나이가 선생과 비슷하여 어릴 때부터 서로 친구사이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과 겸암은 13살, 서애와는 16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른들 간의 13살, 16살 차이라면 그렇게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선생의 약관시절이면 이들은 아직 어린애다. 선생께서 약관에 막 접어들었다면 겸암은 7살이고 서애는 4살이다. 과연 이 나이에 겸암이나 서애가 선생의 인물됨을 판단할 수 있었을까?  좀더 올려 잡아 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하기 전의 26세로 치더라도 겸암의 나이 13살이고 서애의 나이 10살이다. 이 나이 역시도 그들이 선생의 인물됨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겸암이나 서애가 선생을 하늘 같이 알고 따를 나이지 친구로 지낼 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23세에 배우자를 맞은 선생이 설마 어린 소년들과 어울려 다녔겠는가?(daum 2010)

 

  정탁(鄭琢) : 작 성 일 2003-10-27/ 홈페이지 링 크 첨부파일1 첨부파일2 □ 약전(略傳) 정탁(鄭琢, 1526∼1605)의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이며 시호(諡號)는 정간(貞簡)다. 본관은 서원(西原)으로 예천(醴泉.../ nammyung.org(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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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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