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의 자랑(2818) : 정필달(5)
---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尙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尙逸|宋時喆|姜頊|李程|權|鄭必達|李延年|李尙逸|宋時喆|朴世城(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延年 등이 謝恩함/ 李延年|鄭必達(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有政, 宋時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南九萬|李萬雄|金始振|李慶億|洪舜民|尹衡覺|洪柱三|鄭維城|李時|李東溟|郭齊華|全|兪棨|鄭道應|李時術|安後說|蘇東道|鄭援|李惇臨|李緯國|崔雲瑞|洪仁量|金炫文|李觀徵|元|張汝珩|元海益|楊廷藎|趙弘壁|鄭必達...(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一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觀徵|權愈|沈檀|柳命賢|李一台|申厚明|韓瑄|申|朴炫|鄭必達|吳挺緯|尹趾完|鄭載厚|金|李聃命|南致熏|南致熏|柳世鳴(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睦林儒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承得運|睦林儒|睦來善|李德昌|朴廷薛|朴奎|鄭必達|徐文緯|李鳳徵|李紳夏|安命老|金斗明|閔(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전문사전] 팔송선생문집 본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정필달(鄭必達:1611~1693)의 시문집. 7권 3책. 원래 유문이 많았으나 200여 년간 내려오는 동안에 거의 없어져서 4권만 남아 있었는데, 방손 광두(光斗)가 등사한 것을 합하여 13편이 됨..../ 한국학중앙연구원(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晝講에 吳竣 등이 입시하여 書傳을 進講함/ 書傳皐陶謨, 吳竣|洪茂績|尹得說|曺漢英|趙復陽|鄭必達|趙嗣基|申最|皐陶(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晝講에 李時昉 등이 입시하여 書傳을 進講함/ 書傳皐陶謨, 李時昉|尹順之|李行進|洪處尹|洪處大|鄭必達|趙嗣基|申最(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晝講에 朴 등이 입시하여 書傳을 進講함/ 書傳益稷, 朴|呂爾徵|李行進|曺漢英|趙復陽|鄭必達|趙嗣基|申最(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鄭必達|李楫|趙嗣基|申|崔蘊|郭之欽|沈澤|朴|朴日省|李時省|李梓|金興祉|洪茂績|閔馨男|金|金堉|金士健|呂曾齊|朴世模|金以載|吳熙胤(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時楷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時楷|金南重|金重鎰|鄭必達|申|蔡之沇|李守誠|吳挺垣|李恢|金震賢|金光煜|安應亨|申翊亮|李行遇|李元鎭|金|李尙弼|金義信|李郊|柳時成|金元立|許穡(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金光煜 등의 敍用, 金振聲 등의 職帖 還給, 張仲仁 등의 降資 還授, 작년 秋冬等 褒貶에 居中居下된 자를 모두 勿論할 것을 吏曹와 兵曹에 내려보내라는 전교/ 李東顯|成以性|邊麟吉|李回寶|任有後|徐|尹檄|高處明|李時中|朴世堅|金益烈|趙克善|金鼎鉉|南斗極|沈之溟|崔惠吉|李奎老|具|崔煜|許灌|呂閔齊|鄭必達|吳熙胤|魚尙儁|韓德及|李坰|權|李之翼|申濡|閔晉亮|柳時定|尹|鄭(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柳萬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金錫胄|李仁遇|尹|尹以益|李守恒|李奎齡|金益昌|洪應元|朴廷|鄭繼命|朱敬直|姜世明|吳斗寅|曺憲卿|趙嘉錫|李德夏|李堂揆|安後昌|沈栢|李|具|金以鏡|鄭必達|申纘|申|李復一|尹宗之|金夏鉉|金萬重|鄭維悌|蔡時欽...(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金廷進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金廷進|趙仁亨|睦行善|金自點|鄭亨道|崔孝騫|李時萬|鄭必達|李幼泗|金重鎰|白弘性(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文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文淸|申弘望|鄭必達|李舜元|金宗泌|權|金益廉|康時省|金|姜弼周|李之翼|李枝茂|閔維重|金善英|崔俊衡|曺致中|申厚戴|李觀徵|尹深|安後昌|趙遠期|姜時儆|鄭時大|洪萬容|李光|兪|鄭繼胄|朴世模|金壽恒|朴純|崔浣...(daum 2011)
정필달(鄭必達) : 본관(本貫) 진주(진양) 晋州(晋陽), 시대(時代) 1611(광해군 3)~1693(숙종19), 자(字) 가행(可行), 호(號) 팔송(八松)/ 이력(履歷) 정필달(鄭必達) 1611(광해군 3)~1693(숙종19), 조선의 문신. 자는 가행(可行), 호는 팔송(八松), 준후(俊後)의 아들. 정온(鄭蘊)·조경(趙絅)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11) 생원(生員)이 되고, 1645년(인조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재감 참봉(司宰監?奉)·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거쳐, 1650년(효종 1) 전적(典籍)에 올라 서학교수(西學敎授)를 겸했다. 이어 감찰(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 문성후(文誠後)와 함께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57년(효종 8) 예조 좌랑으로 다시 등용, 현종 때 단양 군수(丹陽郡守)·사예(司藝)를 거쳐 1691년(숙종1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daum 2011)
정필달 : 팔송(八松) 정필달(鄭必達), 거창군 가조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장기리, 창촌을 지나 계속 가다가 병산(屛山) 마을 앞의 다리를 건너면 가북면(加北面) 용산리(龍山里)이다. 용산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 뒤의 가야산(伽倻山) 줄기인 정봉(正峰)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용산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고 기름진 들이 펼쳐지고 북천(北川)과 동천(東川)이 합류하여 예로부터 경관이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난 마을이다. 이 마을엔 인재도 끊이지 않았으니 아림부자라고 불리는 모계 문위와 팔송 정필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필달(鄭必達)은 본관이 진주(晉州)로 은열공 신열(臣烈)의 후예이다. 팔송의 증조 방(房)이 창녕 조씨 언명(彦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에 대를 이를 자손이 없자 외손봉사를 위해 거창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진양 정씨들이 용산마을의 대성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팔송 정필달이라고 할 수 있다. 팔송은 1611년 4월 13일 아버지 준(浚)과 어머니 함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질이 총명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다. 8세 때 합천 야로에서 문경진(文景震)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3세 때는 부친을 따라 진주로 와서 능허 박민에게 공부를 배웠다. 능허는 남명의 제자 수우당에서 글을 배운 진주 선비로 항상 남명에게 글을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팔송이 능허에게 글을 배운 것은 남명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16세 때는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에게도 글을 배웠는데, 오계는 합천 출신으로 남명 선생을 사숙한 선비로 남명의 제자 도촌 조응인의 아들이다. 도촌은 한강 정구의 천거로 선조 때 왕자사부로 임명된 학식이 높은 선비였다. 거창에 살면서 인근 이름난 선비들을 찾아 학문을 익힌 팔송은 안음별시(安陰別試) 상주감시(尙州監試) 금산 동당시(金山 東堂試) 고령별시(高靈別試) 등에서 차례로 급제를 했다.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각종 과거에 급제를 하자 팔송의 명성이 고을에 자자했으며 서울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팔송은 특히 시를 잘 지었다. 20세 때 가야산에 올라 ?左手掃天雲 右手奉天月? 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왼손으로 구름을 깨끗이 하고 오른손으로는 달을 받드네" 라는 뜻으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때 거창 선비 박유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왕건의 출사 부탁을 거절하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산을 후세사람들은 ?박유산?이라고 한다. 팔송이 박유의 지조를 기리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高士與高山 高高高孰譬 山名以士傳 山未高於士(학덕이 높은 선비가 높은 산과 더불어 있으니 높은 것 위에 더 높은 것을 무엇으로 비유하리. 산의 이름이 선비의 이름으로 전해지니 산이 선비보다 높지 않네)"이다. 29세 때 팔송은 동계 정온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학문을 익힌다. 이때 동계는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부모상을 당해 용산으로 내려와 여막을 지키고 있었다. 동계는 팔송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어 당시 거창에 내려온 용주 조경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용주 조경은 남명선생의 신도비를 지은 선비이다. 아림부자라고 일컫는 모계 문위에게도 학문을 전수 받았다. 34세에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했다. 사재감참봉, 봉상시 직장 등의 벼슬을 거쳐, 전적겸 사학교수,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이후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팔송정(八松亭)을 창건하여 제자들을 모으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그를 "팔송선생"이라고 불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팔송을 조정에서 다시 불렀다. 팔송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다시 출사의 길로 나선다. 전적, 형조정랑, 예조정랑 봉상시첨정, 단양군수 등의 벼슬을 지내고 물러나 양양에 있는 금곡이라는 곳이 산수가 수려해 말년을 보내기 적합하다고 생각해 집을 짓고 기거를 했다. 숙종조에 다시 직강, 봉상시부정, 사예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빙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정이 당파싸움으로 시끄러웠다. 팔송은 벼슬에 나가기 보다는 임금에서 상소를 올려 폐단을 고칠 것을 주장했다. "과거(科擧)는 인재를 가리기 위한 방법인데, 지금의 선비들은 학업을 닦는 데에 힘쓰지 않고 나아가 벼슬하는 것만을 서둘러, 과거가 있을 것으로 정하여지면 반드시 먼저 누가 시험을 주관하는 지 물어서 연줄을 따라 몰래 넌지시 약속하고,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도 함께 응하되 태연하여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으며, 이밖에 시험장 바깥에서 대리 시험하는 따위는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과장(科場)이 파하기도 전에 방목(榜目)이 이미 전하여지니, 먼 지방의 순박하고 둔한 선비로서 불평을 품고 풀지 못하여 종신토록 떠드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당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이 글을 보고 임금이 팔송의 직언을 칭찬하면서 호피를 내렸다. 또 팔송은 숙종에게 정치를 서두르면 안된다는 뜻을 상소로 올리기도 했다. 팔송의 평소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바르게 앉아 항상 반성하는 자세로 일과를 보냈다. 제자들에게는 "먼저 큰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라"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팔송은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면우 곽종석, 교우 윤주하 등 거창의 선비들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문집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강동욱 記者)(daum 2011)
정필달(鄭必達) : 자는 可行, 호는 八松, 본관은 晋州/ 八松先生文集(奎11977), 鄭必達(朝鮮)著./ 7卷 3冊 古活字本(木活字) 31.5×20.5cm./ 四周單邊 半郭:21×15.8cm./ 10行 22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八松 鄭必達(1611∼1693)의 詩文集. 원래 八松의 遺文은 많이 있었으나 200여년 내려오는 동안에 거의 없어지고 衰集 당시에는 겨우 舊本 4卷만이 남아 있었다. 그 외에 旁孫인 光斗가 謄寫한 것을 합하여 13편이 되었다. 이것을 ?悅宇 郭鍾錫의 校正을 거쳐 1902년에 9세손 載星에 의하여 晋州의 龍山齋에서 木活字로 活印 되었다. 鄭必達의 자는 可行, 호는 八松, 본관은 晋州. 7歲에 全汝怡 文景震 朴凌虛 曺桐溪에게 受學했다. 1628년(仁祖 6)과 그 다음해에 安陰別試에서 三場에 壯元. 桐溪 鄭蘊을 師事, 廬墓 후에 龍洲 趙絅을 師事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1633년 生員, 1645년 別試文科에 乙科로 及第. 司憲府監察, 禮曹佐郞, 刑曹正郞, 四學敎授, 成均館典籍, 丹陽郡守, 蔚珍縣令 등을 역임, 1654년(孝宗 5) 父親喪을 당한 후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八松齋를 세우고 후생교육에 힘썼다. 1690년(肅宗 16) 임금의 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時弊를 極言했고, 「其命維新箴」을 지어 올렸다. 1693년에 求言에 의하여 다시 상소를 올렸는데 勤·謹·和·緩을 그 조목으로 삼았다. 卷頭에는 1902년 ??宇 郭鍾錫이 쓴 序文이 실려 있다. {卷1}:詩 169수(矗石樓次鄭郊隱以吾板上韻, 送李大玉之任昇平府 등). {卷2}:詩 123수(高澤八詠, 偶觀世譜有感 등). {卷3}:詩 77수(聞拜仙사縣, 輓崔上舍復元胤貞 등). {卷4}:辭三疊 1편(和邢居實秋風辭三疊), 賦 3편(詩亡春秋作賦, 義牛塚賦, 銀稿賦). 「詩亡春秋作賦」는 14세 때, 「義牛塚賦」은 20세 때 지은 것이다. 疏 6편(道山書院請額疏, 藍溪書院請升配桐溪先生疏, 道東書院請제享寒岡先生疏, 鼎山書院請額疏, 求言應旨疏, 癸酉疏 등). 「求言應旨疏」는 1690년 80세 때 쓴 상소문으로 당시의 時弊를 極言하고 정치의 요점을 논한 내용이다. 「癸酉疏」는 八松이 죽는 해에 지어 올린 상소문으로 정치의 방책을 엮은 글이다. 策 1편(對殿試問誠策), 箋文 3편(孝肅王大妃殿종患平復陳賀箋文 등), 進香文 1편(孝宗大王進香文), 表 1편(擬伏羲群臣賀鍊石補天表), 書 4편(與李候斗瞻 등), 啓 1편(謝閔方伯昌道連惠食物啓). 「對殿試問誠策」은 殿試에서 올린 策으로 至誠의 「誠」문제를 논한 것으로 大學의 誠意 正心이나 中庸의 誠章을 원용하여 쓴 것으로 성리학적으로 깊이 있는 策文이다. {卷5}:序 7편(龍山泛菊會序, 柱岩閒居序, 居陀縣南北面合諸文會序, 西行唱酬錄序, 標題海內奇觀敍, 自敍 등). 「自敍」는 역대 선조들의 내력과 자신의 평생사를 자술한 글이다. 記 5편(洗耳巖記, 松假亭記, ??勝堂記, 古亭記, 德輝樓記), 跋 5편(跋康公慶遇觀感錄, 世譜跋, 書月潭題詠後, 題生祭文丞相文後, 柳大老成根傳後敍), 銘 1편(木枕銘), 箴 2편(製進其命維新箴, 視民如傷箴). 「其命維新箴」은 1690년 「求言應旨疏」와 함께 올렸던 것인데 逸失되어 목차만 남아있다. 頌 2편(剝盡陽生頌, 土階頌), 贊 1편(警蒙贊). 頌은 모두 月課로 쓴 것이다. 雜著 4편(溪上小說, 石峰對示李隆甫, 遊鶴駕山錄, 世墓敍). {卷6}:上樑文 4편(某里翫藥齋上樑文 등), 祝文 12편(盤川里社奉安文, 景山精舍奉安文, 祭桐溪先生文, 祭茅溪先生緯文, 祭戚叔全公汝怡文 등), 墓誌銘 3편(內資奉事邊公墓誌銘 등). {卷7}:附錄으로 門人인 金千鎰이 쓴 行錄, 아들 文五가 쓴 遺事, 尹胄夏가 쓴 行狀 1편, 都事 李種杞가 쓴 墓碣銘, 李承熙가 쓴 墓誌銘. 卷尾에는 9世孫 載星이 지은 跋文이 실려 있고, 책 끝장에「上之卽조三十九年壬寅(1902) 夏龍山齋活印」 이란기록과 監印者 (後孫 太驃, 宜煥)의 명단이 있다.(daum 2011)
정필달(鄭必達) :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8위/ [인적사항] 자 사겸(士兼), 생년 신해(辛亥)1611, 합격연령 23, 본관 진주(晉州)/ [이력사항] 타과 : 인조(仁祖) 23년(1645) 을유(乙酉) 별시(別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정준(鄭浚),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제] 정필영(鄭必榮)/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1)
정필달 [專門資料] : <국조 문과 방목>/ 정필달(鄭必達) More Info./ 인조(仁祖)23년(1645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11년, 신해, 자(字) 사겸(士兼), 호(號) 본관(本貫) 진주(晉州)/ > 가족사항 부(父) 정준(鄭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633(계유)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사예(司藝)(daum 2011)
정필달 : 문헌(文獻)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5. 대(臺) 3) 장유대(壯遊臺)// 현령 정필달 시 / 縣令 鄭必達 詩// 진주 백리라 그 중간을 바라보니 / 眞珠百里望中間// 굽이굽이 명사는 곳곳마다 굽이쳤네 / 曲曲明沙回回灣// 하늘과 접한 푸른 바다엔 태양만 보이고 / 碧海天連惟見日// 땅 끝난 청구엔 산만 우뚝하게 서 있구나 / 靑邱地盡更登山// 진나라 사람들은 어느 때 이곳에 왔으며 / 秦人鞭石何時到// 근원 찾는 한객들은 어느 때 이곳을 떠났던고 / 漢客尋源此際還// 실컷 천지를 봄에 다함없는 생각이고 / 極日乾坤無限意// 대 아래의 좋은 유람에 안색이 펴지노라 / 壯遊臺下一開顔(daum 2011)
정필달 : 문헌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6. 정(亭) 2) 월송정(越松亭)// 팔송 정필달 시 / 八松 鄭必達 詩// 기성 저 북쪽에 / 箕城治之北// 낮은 벼슬에 얽매었지 / 蒼官九重環// 찬 소리 바다와 구분되지 않더니 / 寒聲不分海// 검은 빛 홀연히 산인 듯 하네 / 黛色忽疑山// 다행히 장군 댁이 가까워서 / 幸近將軍宅// 유자의 한가로움을 얻었다네 / 能偸遊子閑// 평생 두어사는 / 平生杜御史// 졸다가 이 강물에 빠졌다는데 / 睡足此江灣// 1) 몽접(夢蝶) :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노닐었다는 고사./ 1) 표륜 : 신선이 타는 수레 / 1) 경장(瓊漿) : 신선이 마시는 술. / 1) 창오(蒼梧) : 중국에 있는 명승지(daum 2011)
정필달 : 문헌 <울진군지>/ 제3장 기(記) 제1절 기/ 5. 정(亭) 2) 독송정(獨松亭)// 현령 정필달의 독송정기((縣令 鄭必達 獨松亭記)// 독송정은 주씨(朱氏)의 마을 앞 계상(溪上)에 오래된 소나무가 고목의 자태를 자랑하고 암석이 오밀조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서(島嶼)에 위치하였다. 그 경광(景光)이 기성(箕城)의 월송정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승경(勝景)이였으나 세월 따라 나무도 죽고 정자도 허물어지고 독송정이란 이름만 전하고 있었다. 그 곁에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었으나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으니 애석하다. 내가 공무의 여가에 이곳 고적들을 두루 돌아보았더니 많은 명승지가 폐허로 된 것이 허다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어 인력을 동원하여 그 나무는 복을 주고 그 정자는 다시 확장하였으니 이 역사(役事)를 실질로 총괄한 사람은 주현벽(朱炫璧)이였다. 정자의 크기는 삼십여 명이 앉아 놀 수가 있으며 북쪽에는 돌섬이 있고 섬 위에 다시 어린 소나무 몇 그루가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있기에 그 가지를 정지하고 흙으로 북을 주고 다듬어서 상층에 한 대(臺)를 두니 선구경색(仙區景色)이 환연히 새롭게 되었다. 그래도 공정이 미비한 곳이 있음이 아쉬워 이에 관속(官屬)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갔다. 해가 저물어 모래섬의 가을 경광이 사람을 붙잡기에 물가에서 돌을 쓰다듬으면서[臨流撫石] 술잔을 권하니 속진(俗塵)의 바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지 못하였으니, 무엇으로써 이 같은 참다운 취미에 비유할 수 있으리요. 어리둥절하면서 이 몸이 내 몸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시 한 수를 읊으며 어둑어둑한 뒤에야 돌아오게 되었다.(daum 2011)
정필달 : 문헌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6. 정(亭) 4) 취운정(翠雲亭)// 현령 팔송 정필달 시 / 縣令 八松 鄭必達 詩// 한줄기 맑은 시내 빈 누를 감싸 흐르고 / 晴川一曲抱虛樓 // 어둑어둑한 소나무 그늘 그윽하기 그지없네 / 松跌陰陰不勝幽 // 서늘한 밤에 맑은 이슬 내릴 때 가장 아름답고 / 凉夜最隣淸露重 // 여름엔 비취 구름 그 더욱 아름다워라 / 暑天偏愛翠雲流 // 몇 사람이나 이곳에 올라 시를 남겼던고 / 幾人登眺詩篇在 // 예로부터 강산의 물색은 그대로 남아 있노라 / 終古河山物色留 // 늙으막이라 선향은 진정 어디에 있는지 / 垂老仙鄕眞司分 // 단구로 돌아와서 또 이곳에 유람했네 / 丹邱歸後又玆遊(daum 2011)
정필달 : 문헌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6. 정(亭) 7) 독송정(獨松亭)// 현령 정필달 시 / 縣令 鄭必達 詩// 수많은 신기한 나무들을 그만두고 / 정반의 독송에 와서 외로운 가지 쓰다듬네 / 試來庭畔撫孤枝// 그 당시 도연명을 만나지 못했으니 / 當時不遇陶元亮 // 세상에 그대 알아주는 이 누구이었겠소 / 世上知君何在誰(daum 2011)
정필달 : 2.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정필달 1611-1693 가행 팔송 진주 거창 능허동계문인 팔송집/ 鄭必達 1611-1693 可行 八松 晋州 居昌 凌虛桐溪門人 八松集(daum 2011)
정필달 : 3. 정필달(鄭必達) 본(本) 진주(晉州) 자(字) 가행(可行) 호(號) 팔송(八松)/ 만구선생문집(晩求先生文集) 전의(全義) 이종기(李種杞)의 문집(文集)/ 권지(卷之) 15. 묘갈명(墓碣銘) ; 팔송정공(八松鄭公)(daum 2011)
정필달 : 4. 정필달(鄭必達)(1611~1693) 본(本) 진주(晉州) 자(字) 가행(可行) 호(號) 팔송(八松)/ 八松先生文集 면우문고/ 八松先生文集 국립(daum 2011)
정필달(鄭必達)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인조(仁祖) 23년, 과거시험연도 : 1645 을유, 시험명 : 별시(別試), 등위 : 을과1(乙科1)/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필달(鄭必達), 자 : 사겸(士兼), 본관(本貫) : 진주(晉州)/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633(계유) 생원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사예(司藝)/ [가족사항] 부(父) : 정준(鄭浚)(daum 2011)
정필달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八松 鄭必達(1611·1693)의 詩文集. 원래 八松의 遺文은 많이 있었으나 200여년 내려오는 동안에 거의 없어지고 ?集 당시에는 겨우 舊本 4卷만이 남아 있었다. 그 외에 旁孫인 光斗가 謄寫한 것을 합하여 13편이 되었다. 이것을.../ e-kyujanggak.snu.ac.kr(daum 2011)
정필달 : 진주정씨 (晋州鄭氏) [ 진양정씨 (晋陽鄭氏)]/ ...: 세종~세조 때 충청도관찰사와 중추원지사를 지냈고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정성근(鄭誠謹) : 척의 아들, 성종 때 효자와 청백리로 유명하다. 정사제(鄭思悌) : 임진왜란 때 순사 정필달(鄭必達) : 숙종 때 문신 예계(藝系.../ www.surname.co.kr(daum 2011)
정필달 : [동계집 속집 제2권] = 사림 제문(士林祭文)[문생 정필달(鄭必達)]/ 작년, 2010년 7월 4일/ 아, 천지 사이에 한 기운이 있으니, 위로는 삼광(三光)이 되고 아래로는 악독(嶽瀆)이 되며, 흩어져 물건이 될 때에는 금옥(金玉)이 되고 규벽(圭璧)이 되고 인(麟)ㆍ봉(鳳)ㆍ귀(龜)ㆍ용(龍)ㆍ송(松)ㆍ계(桂)ㆍ남(枏)ㆍ재(梓)가...(daum 2011)
정필달 : 초계정씨의 방 [동계집 부록 제2권] = 만시(挽詩) [정필달(鄭必達)]/ 작년, 2010년 7월 3일/ 선생이 돌아가신 숭정 신사년 가을이란 崇禎辛巳歲之秋 바로 우리나라 정기가 거두어진 때로다 正是東韓正氣收 오백 리 사이에 필시 덕성이 모였을 터 五百里間應有聚 삼천 년 뒤에 다시 짝할 이 없으리라 三千年後更無?.../ cafe.daum.net(daum 2011)
정필달 : 초계정씨의 방 (苟全集)등장인물 정리/ 작년, 2010년 9월 30일/ 지은 詩章이 실려 있으며, 말미에 李光庭이 쓴 跋이 있다. 그리고 槃泉精舍에 대해 金啓光이 지은 上樑文, 鄭必達이 지은 奉安文, 柳經立이 지은 常享祝文, 南亨會가 지은 奉安祭文, 정필달이 지은 축문이 있다. 원집의 끝에는.../ cafe.daum.net/tdkimoldboy(daum 2011)
정필달 : 구미당(九未堂) 봉안문(奉安文)/ 2달전, 2010년 11월 15일 (월)/ 봉안문(奉安文) 정필달(鄭必達) 우/ cafe.daum.net/tdkimoldboy/ 구미당(九未堂)(daum 2011)
정필달 : [김중청] <구전집> 등장인물 정리(전체)/ 작년, 2010년 10월 6일/ 지은 詩章이 실려 있으며, 말미에 李光庭이 쓴 跋이 있다. 그리고 槃泉精舍에 대해 金啓光이 지은 上樑文, 鄭必達이 지은 奉安文, 柳經立이 지은 常享祝文, 南亨會가 지은 奉安祭文, 정필달이 지은 축문이 있다. 원집의 끝에는.../ 태그: 김중청, 구전집, 광산김씨 예안파.../ blog.daum.net/ieditors(daum 2011)
정필달 : 23세 松川(千鎰)公 行狀/ 2년전, 2009년 7월 18일/ 17일(1622년 光海광해 14) 居昌 加北 龍山에서 출생. 桐溪(동계) 鄭 蘊先生(정온선생)의 門下(문하)와 八松 鄭必達(팔송 정필달)先生(선생)에게서 學問(학문)을 배웠다. 특히 桐溪(동계) 先生(선생)께서는 遠大之器가 있다 하여.../ blog.daum.net/ 암천블로그(daum 2011)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