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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853:조두섭(2)-조명한(진사)-조목(참판)(1)(祝김동구,박사취득)
작성자장병창 @ 2012.03.12 06:14:30

   예천의 자랑(2853) : 조두섭(교수)(2)-조명한(진사)-조목(참판)(1)(附 예천읍 출신 김동구, 영국 런던에서 박사 취득...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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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두섭 [專門資料] : [] 이육사 시의 주체 형태 (24p)/ 조두섭  | 한국어문학회  | 1998.06(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이병각 시의 주체형태 (24p)/ 조두섭  | 한국어문학회  | 1998.02(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황석우의 상징주의시론과 아나키즘론의 연속성 (14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96.06(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축시 : 당신의 파이프향은 오늘도 이땅에 그윽합니다 -외골 권재선 박사님의 화갑을 축하하면서 (2p)/ 조두섭  | 한민족어문학회  | 1994(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권구현의 아나키즘문학론 연구 (32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93.06(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박목월시 지향의 변모 양상 (26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92.06(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임화 서간체시의 정체 (26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91.06(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정노풍시 연구 (34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90.05(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권구현시연구 (36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89.11(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1920년대 한국 민족주의시 연구-상해 독립신문파 시인을 중심으로- (21p)/ 조두섭  | 한국어문학회  | 1989.05(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1920년대 한국민족주의시 연구 - 기일, 접근시각 - (28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88.10(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 김우진 시의 위상 - 시의식을 중심으로 - (25p)/ 조두섭  | 우리말글학회  | 1986.09(daum 2011)

 

  조두섭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국어국문학] 이상화 시인에 대해서 (10p)/ ...」『문학사상』,(1988) 정대호,「이상화의 시에 나타난 비극성 고찰」,『문학과 언어』17집, 문학과 언어학회(1996) 조두섭,「이상화 시의 근대성」,『우리말글』25호, 우리말글학회(2002)언론 :<매일신문> ,...(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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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한(趙鳴漢) : 1615(광해군 7)-?, 예천 출신, 자는 문원(聞遠), 호는 죽림(竹林), 본관은 한양, 충의위(忠義衛) 덕수(德秀)의 양자, 성균진사 관(貫)의 아들, 승한(承漢)의 동생, 봉휘(鳳徽)ㆍ봉징(鳳徵)의 아버지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52년(효종 3) 증광 진사시에 3등 29위로 합격하였다. 효성이 천출(天出)로 지극하고, 학술이 순정(純正)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문집(文集)이 있다.(朝鮮寰輿勝覽 1929, 司馬榜目)

 

  조명한(趙鳴漢) : 본관(本貫) 한양(漢陽), 자(字) 문원(聞遠), 호(號) 죽림(竹林)/ 이력(履歷)/ 조명한(趙鳴漢):1615(광해군 7, 을묘)~1666(현종 7, 병오). 본관 漢陽. 자는 문원(聞遠). 호는 죽림(竹林). 관(貫)의 子. 덕수(德秀)에게 출계(出系). 사마시(司馬試) 합격. 문장(文章)과 행검으로 알려짐. 효성(孝誠)이 도타와 어버이 병환에 삼년이나 옷을 갈아입지 않음. 증직:좌승지(左承旨). 저서:竹林集. ▣참고:安東鄕土誌(daum 2011)

 

  조명한(趙鳴漢) :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3년 (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29위/ [인적사항] 자 문원(聞遠), 생년 을묘(乙卯) 1615년, 합격연령 38세, 본관 한양(漢陽)/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조덕수(趙德秀), 관직 : 충의위(忠義衛), [생부] 성명 : 조관(趙貫), 타과 : 성균진사(成均進士), [형] 조승한(趙承漢)/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1)

 

  조명한(趙鳴漢) :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29위/ [인물요약] 자 문원(聞遠), 생년 을묘(乙卯) 1615년, 합격연령 38세, 본관 한양(漢陽)/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조덕수(趙德秀), 관직 : 충의위(忠義衛), [생부] 성명 : 조관(趙貫), 타과 : 성균진사(成均進士), 생부구존 : 자시하(慈侍下), [형] 성명 : 조승한(趙承漢)/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學中央硏究院)(daum 2011)

 

  조명한 : 팔우헌 조보양(趙普陽)/ Daum 블로그 | 3년전, 2008년 9월 16일/ ...맺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그러한 집안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퇴계 학맥과 인연을 맺어갔다. 증조 조명한(趙鳴漢)은 진사로 호는 죽림(竹林)인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조봉징(趙鳳徵)은.../ blog.daum.net/hanyangcho/| 晛溪亭// 팔우헌 조보양(趙普陽)/ Daum 카페 | 작년, 2010년 2월 22일// 팔우헌의 학문이야기/ 조인스 블로그 | 3년전, 2008년 6월 24일(daum 2011)

 

  조명한 : 조보양(趙普陽, 1709~1788)/ Daum 블로그 | 3년전, 2008년 9월 16일/ ...대대로 관리를 배출하였다. 조선 태종 때 조연(趙涓)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경공이다. 증조 조명한(趙鳴漢)의 호는 죽림(竹林)이고,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조봉징(趙鳳徵)의 호는 유계.../ blog.daum.net/hanyangcho/| 晛溪亭// 팔우헌의 가족 이야기/ 조인스 카페 | 2년전, 2009년 7월 3일(daum 2011)

 

  조명한 : 한양조씨/ Daum 카페 | 작년, 2010년 10월 31일/ ...崇禎處事’로 일컬어짐. 증직:司僕寺正. 저서:『檜溪集』. ▣참고:「墓碣銘」(金應祖 撰) ?집필:이원걸 조명한(趙鳴漢):1615(광해군 7, 을묘)∼1666(현종 7, 병오). 본관 漢陽. 자는 聞遠. 호는 竹林. 貫의 子. 德秀에게 출계.../ cafe.daum.net/poongryuhahoi/| 풍류하회(daum 2011)

 

  조명한 : 망와 김영조 묘갈명/ Daum 카페 | 작년, 2010년 3월 6일/ ...(全昌孝) ,金宗?, * 삼남 시침(時?) 호는 일용재(一용齋) 別檢 손자 문수(文壽) 손서 조명한(趙鳴漢) 進士, 박호(朴?) 進士, 김종명(金宗溟) * 사위 서준리(徐準履) 영산현감. 선정으로 表裏一襲賜給.../ cafe.daum.net/seolwoldang/| 雪月堂(daum 2011)

 

  조명한 : 조원승(趙元升)/ 네이트 한국학 | 2년전, 2009년 3월 15일/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감찰(監察) [가족사항]부(父) : 조봉징(趙鳳徵) 조부(祖父) : 조명한(趙鳴漢) 증조부(曾祖父) : 조덕수(趙德秀) 외조부(外祖父) : 이진탁(李振鐸) 네이트 푸터 영역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 koreandb.nate.com(daum 2011)

 

  조명한 [專門資料] : 權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한국학자료/ 權|申鍵|趙鳴漢|趙益剛|金萬重|金孝淸|魚震說/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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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목(趙穆) : 1524(중종 19)-1606(선조 39), 예천읍 생천리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祭享)된 사람,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본관은 횡성(橫城), 용문면 금당곡인(金堂谷人) 장(璋, 文科, 承文院正字)의 고손자, 용문면 상금곡리인(上金谷里人) 윤손(胤孫, 司온署直長)의 증손자, 참봉(參奉) 대춘(大春)의 아들, 수붕(壽朋, 1579生, 字子長, 進士)석붕(錫朋, 1585生, 字百中, 生員, 文科)의 아버지,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52년(명종 7) 식년 생원시에 3등 80위로 합격하였다.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저서로 <월천집(月川集)>,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이광윤(李光胤, 1564-1647)의 <양서집(양西集)> 중 '상정한강선생품립사서(上鄭寒岡先生稟立祠書)'에 의하면, "조목이 비록 외향(外鄕)인 예안(禮安)에 살았더라도 그 실은 예천의 금당곡인(金堂谷人)이다." 라고 하였다.(宣祖實錄, 退溪集, 國朝人物考, 韓國儒學史, 原色世界大百科事典 25卷 178쪽, 醴泉文化 2輯, 司馬榜目)

 

  조목(趙穆) : 출처: 브리태니커/ 1524(중종 19)~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동고(東皐). 아버지는 대춘(大椿)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했다. 그 뒤 동몽교관·공릉참봉·집경전참봉·종부시주부·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으로 잠시 봉직하며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1594년에는 군자감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했다. 일생 동안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경학(經學)에 능통했으며, 이기(理氣)에 대한 사변적 분석을 지양하고 인심도심(人心都心)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心學)의 체인적(體認的) 공부에 역점을 두었다. 말년에는 예서(禮書)에 유의하여 토의·강론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다. 저서로 〈월천집〉·〈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예천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daum 2011)

 

  조목 : Re:월천(趙穆, 1524~1606)| 횡성조씨 유래/ 조원규 2010.12.28. 17:19/ 조목(趙穆):1524(중종 19, 갑신)∼1606(선조 39, 병오). 본관 橫城. 자는 士敬. 호는 月川. 大春의 子. 외조는 安東 權受益. 李滉 문인. 1552년 생원시 합격한 뒤 대과를 포기하고 위기지학에 전념. 1566년 공릉참봉에 제수된 이래 여러 벼슬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음.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 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 그 뒤에도 내외 관직에 수차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재직하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함. 계속하여 여러 벼슬에 제수 되어 嘉善大夫 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이르렀지만 모두 재덕과 노병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함. 만년에 스승을 追崇하고 유지를 紹述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사업에 진력하여 이황의 高弟 가운데서 陶山書院 尙德祠의 유일한 배향자가 됨. 저서:『月川集』. ▣참고:「神道碑銘」(鄭蘊 撰) ??집필:이원걸(daum 2011)

 

  조목 : 월천(趙穆, 1524~1606)| 횡성조씨 유래/ 부드러운 남자 2008.09.01. 15:24/ 조목(趙穆, 1524~1606) :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 대춘(大椿) 대에 예안에 정착하였다. 그는 예안현의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별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이곳이 퇴계의 향리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목은 자연히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결국 퇴계의 수제자로 도산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종향되었다. 연보(年譜)에 의하면 조목은 5세부터 책을 읽어 12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15세에 퇴계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학업을 청하였다. 이 때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퇴계의 학문적 성취에 따라 월천 또한 성장함으로써 퇴계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그 의발을 전해 받은 으뜸가는 제자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9세 되던 해(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즈음에도 그는 퇴계를 찾아뵙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해 질의하고 공부하였다. 32세 때에 두 번째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학문과 과거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조목은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도학에 대한 월천의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아마도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에 1560년(명종 15)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39세 때인 1562년(명종 17) 심경(心經)에 관한 질의가 처음 나온 이래 4~5년간 퇴계와의 사이에 심경부주(心經附註),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정민정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심학 관련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단순히 퇴계에게 질문을 아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조목은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이후 독실한 수행으로 덕성을 쌓았다. 과거를 거치지 않은 월천에게 처음으로 벼슬이 내린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인 1566년(명종 21)이었다. 그 즈음 사림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사림의 영수로서 신망이 두터웠던 퇴계에게 연이어 소명이 내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퇴계 문인에 대한 등용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월천에게는 처음으로 이조의 천거로 공릉참봉이 제수되었고, 뒤이어 선조 원년 성균관의 천거로 집경전참봉이 되었으나 사은 후 곧 물러났다. 조목의 존재가 중앙 정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73년(선조 6) 삼공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李之함),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부터 였다. 그는 다섯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참상의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 종2품인 가선대부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를 한 것은 53세 때인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으로 2년 남짓 재직한 것과, 65세 때인 1588년(선조 21) 2년간 합천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지방관 시절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유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반 행정과 정치적 능력은 크게 평가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합세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향화를 받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강학 활동을 벌려 퇴계의 학풍을 계승, 확대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조목은 『퇴계문집』의 간행을 통하여 기라성 같은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 단연 퇴계의 의발을 받은 적통 제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80세 이후 강학을 할 수 없는 형편에서도 도산서원에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묘당을 배알하였다. 퇴계의 가르침으로 출발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퇴계를 숭모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행장에 의하면 월천은 저술하기를 즐기지 않아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행을 보게 된 문집마저도 서애와의 갈등 관계를 담은 내용 때문에 문인 김택용이 지은 「월천언행록」 등의 기록을 제외시켜버려서 조목 학문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성격은 퇴계 이상으로 주자설을 받들어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학설을 이단을 물리치는 차원에서 극력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조목 성리학의 핵심은 심경과 그 부주의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심학도의 비판과 인심도심도의 비판적 고찰에 집중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圖)를 그려 그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의 학문은 심경을 발판으로 한 주자학적 심학이었다. 심학에 매진하는 목적은 올바른 행위를 위한 ‘바른 심성 수양’을 하려는 데에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과 행위를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조목의 남달리 뛰어난 마음가짐과 성실한 실천 행위는 치밀하고 명철하게 정확한 태도로 탐구한 그의 심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목의 이러한 정통 주자학적 자세는 그의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관직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또 벼슬다운 벼슬을 하지 않아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584년(선조 17) 영덕현령의 자리를 사양하면서 올린 갑신사직소(甲申辭職疏)와 강화에 반대하여 올린 갑오진정소(甲午陣情疏) 등을 보면 그는 향촌사회에 대한 중앙이나 지방관의 통제를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향촌활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당시 향촌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며 성리학적 정치론의 근본 입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스승을 기리는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던 그는 마침내 1613년(광해군 5)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묘소는 서당 뒤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

 

  관련문집 : - 월천선생문집(月川先生文集) : 도산서원에 소장되었던 『월천선생문집(月川先生文集)』이다. 조목(趙穆, 1524~1606)의 저술들을 엮어서 총4책으로 1666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 월천선생언행초기(月川先生言行草記) : 횡성조씨 월천종택에 소장되었던 『월천선생언행초기(月川先生言行草記)』이다. 조목(趙穆, 1524~1606)의 언행들을 기록하여 간행하고자 한 초안이다./ - 월천선생종향사적(月川先生從享事蹟) : 횡성조씨 월천종택에서 소장하던 『월천선생종향사적(月川先生從享事蹟)』이다.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에 대한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관련문서 : - 월천선생수간(月川先生手簡) :월천종택에 소장되었던 월천 조목(趙穆, 1524~1606)의 서간문들이다. 12대손 조병욱(趙炳昱)이 창려문집 사이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엮은 것이다./ - 상소 초(上疏 草) : 이것은 토계동 향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던 상소 초안이다. 국가의 가장 급한 의무는 나라의 선현 중에 대현(大賢)을 가려 숭상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퇴계의 도학을 이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을 도산서원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는 상소이다.

 

  명칭 : 월천서당(月川書堂)/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539/ 건축  : 조목(趙穆, 1524~1606)/ 시기 :  1539년(중종 34)/ 소유자 :  조동주(관리자 : 조동주)/ 문화재 :  경상북도 기념물 제41호, 1982년 12월 1일 지정, 374㎡/ 건축 배경 :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학문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건축 특징 : 서당의 전면은 낭떠러지 끝에 있어 문을 낼 수 없을 정도여서 일각문이 서편에 설비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 단층 와가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랭이가 되었다. 어칸 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하반에 널판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있다. 신위를 봉안하게 된 것이다. 가난한 선비가 가묘를 일으키는 법도로 허용되었던 방법이다. 전면과 측면에 쪽마루가 설치되었는데, 그 반대편 측면과 배면에는 쪽마루가 없다. 대청 뒷벽에 머름을 들이고 바라지창을 달았다. 방의 뒷편에는 개구부가 없다. 질박한 구성법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가 깔렸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귀틀의 설치가 보통은 병행되는 법인데, 이 건물의 귀틀은 병렬과 교차가 혼재하였다. 안통의 동귀틀이 도리에 병행되었는데 앞쪽에서는 동귀틀에 의지하고 다시 작은 귀틀을 만들어, 보와 평행되게 하였다. 원형이 아닌 듯이 보인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건물 구성 :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단층와가/ 현판 : 월천서당(月川書堂) ; 이황(李滉)의 친필이다.(daum 2011)

 

  조목 : 월천月川 조목(趙穆)| 韓國의 학맥 학풍/ 松河22翰邦57/ 2009.04.28. 23:07/ 성명(姓名) 조목(趙穆), 본관(本貫) 횡성(橫城), 시대(時代) 1524(중종 19)∼1606(선조39), 자(字) 사경(士敬), 호(號) 월천(月川)/ 이력(履歷) 조목(趙穆) : 1524(중종 19)∼1606(선조3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으며,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였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 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하여서는 매년 역동서원(易東書院)·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소술(紹述)과 존봉(尊奉)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名錄, 月川集./ 〈金道基>(daum 2011)

 

  조목 : 조목(趙穆) 자는 士敬, 호는 月川. 東皐, 본관은 橫城/ 月川先生文集(奎3100), 趙穆(朝鮮)著./ 6卷 附錄 2冊 木板本 32×21cm./ 四周雙邊 半郭:19.5×15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月川 趙穆(1524∼1606)의 詩文集. 序, 跋 및 刊記가 없어 開印 경위  및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趙穆의 자는 士敬, 호는 月川. 東皐, 본관은 橫城이다. 1552년(明宗  7) 生員試에 합격, 微官을 거쳐 集賢殿 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學問과  書冊을  벗했다가 1594년 軍資監 主簿를 거쳐 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했다. 학문·文章·書道에 탁월했던 사람이다. 이 점은 本集의 내용 가운데 退溪와  來往한 文字가 많이 있는 점, 또는 退溪先生言行總錄,  退溪先生文集告成文,  退溪先生埋誌文…… 등 退溪를 위한 사업과 직접 관련된 文字가 많은점 등으로  미루어  봐도  우선 짐작할 수가 있다. 그가 남긴 글은 本集 이외에도 前賢들의 訓誡語들을 모아  「困知雜錄」이란 冊子를 만들었다는 記錄도 있다. 아뭏든 그는 退溪와 함께  배우고  記錄하고 하다가 一生을 마친 학자였던 것이다, {卷1}:詩 140여수(謝退溪先生見臨  등).  {卷2}: 疏 6편. 甲午陳情疏 (壬辰倭亂 당시 日本과의 講和를 반대하던 疏) 등. {卷3}:書  21편. 答退溪先生, 與柳而見書, 與同門諸契論理學通錄, 與同門諸契論朱書節要刊本曲折,  與同門諸契論退陶先生, 碣文 誌文 등. {卷4}:雜著 4편. ㉠心經稟質:退溪에게  朱子가  지은 心經의 각 條目을 들어 질문한 것. 질문 요지 및 答書가 모두 收錄돼  있는데  분량이 28張에 달한다. ㉡朱書節要稟質:退溪에게 朱書節要의 각 條目을 들어  질문한  것으로 作者의 질문요지 및 退溪의 答書 要旨가 아울러 收錄돼 있다.  ㉢尙書疑義:尙書  가운데에서 의문나는 점을 지적, 그 자신의 견해를 붙여 놓은 것. 각 조목별의  25條目이다. ㉣家禮疑義:朱子家禮 중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摘出, 그 자신의 견해를  붙여  놓은것. {卷5}:雜著. ㉠退溪先生言行總錄:退溪의 一生에 나타난 言行 및 人品을 記錄해  놓은 글. 매우 신중하고 꼼꼼하게 記錄이 돼 있어 退溪의 人品을 비교적  방불하게  전해 놓은 글인 듯하다. 분량은 8張이다.  ㉡易東書院事實,  ㉢書金士純鮑甲,  ㉣重修書實記등 4편이다. {卷6}:跋, 祭文, 論, 墓碣 등 4종. 跋은 書丹陽水山館宇記後,  理學通錄跋, 書自警編跋後 등 3편. 祝文. 祭文은  陶山書院春秋常用祝文,  易東書院春秋常用祝文, 陶山書院奉安文, 祭退溪先生文, 退溪先生集告成文, 告退溪先生埋誌文,  祭金義將達遠文등 도합 14편. 墓碣·墓誌는 柳美叔墓誌, 先府君墓碣, 先夫人墓碣 등 3편.  論은  荀彧論(後漢末 曹操에게 從仕했던 荀彧의 忠·不忠을 논한 글), 朔蜀洛之黨論(宋나라  蘇東坡 시대의 黨論 문제를 논한 글) 등 2편. 附錄으로 작자 자신에  관한  자료가  수록돼 있는데 내용은 嘉善大夫工曹參判月川趙先生神道碑銘(義禁府事 鄭蘊 撰), 賜祭文,  陶山書院從享贈祭文, 祭文(鄭逑, 廬江書院 儒生 등 8편), 輓詞(李山海, 鄭經世, 韓百謙  등) 12편이다.(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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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읍 출신 김동구, 영국 런던에서 박사 취득...축하합니다.

 

  김동구(김동구 氏 英國 런던 AA스쿨에서 博士學位) [記事] : 예천읍 태생의 김용한(66·전 재부예천군민회장)·홍미순(62) 씨의 장남 김동구(39) 씨가 2012년 2월 영국 런던의 명문 건축학교 AA School(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에서 박사학위(친환경 건축 설계 전공)를 받았다. 김동구 씨는 부산 성도고등학교, 부경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지난 2004년 영국 Sheffield University 건축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이번에 AA School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醴泉新聞 20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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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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