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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854) : 조목 공조참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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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趙穆) :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524(중종 19)∼1606(선조 39), 정의 :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애 : 조목의 자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동고(東皐)이다. 본관은 횡성(橫城)으로 조대춘(趙大春)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친자(親炙)를 가장 많이 받았다. 1552년(명종 7)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76년(선조 9)에 봉화현감(奉化縣監)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사상 : 그는 임진왜란 전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있을 때, 일본(日本)과의 강화를 반대하였다. 경학(經學)에 능통하여 당시의 구두(句讀)나 해석이 그의 질의(質疑)에 의해 개정된 것이 많았다.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 곡속장(??章)의 약(若)자를 위로 접속시켜 곡속약(??若)을 한 구(句)로 읽었는데, 이황이 옳다고 하였다. 그의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학설을 그대로 전수하였고, 리기(理氣)에 대한 사변적(思辨的) 분석을 지양하고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心學)의 체인적(體認的) 공부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심학도(心學圖)」에서 심재(心在)와 구방심(求放心)의 위치를 바꾸어 이황의 질의를 받았으며, 『심경(心經)』을 중심으로 한 심학을 전개하였다. 말년에는 예서(禮書)에 유의하여 토의하고 강론하였다.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대해서 기대승(奇大升)과의 질의를 통해 연구하였다./ 저서 : 저서에 『월천집(月川集)』·『곤지잡록(困知雜錄)』·『주서초(朱書抄)』·『한중잡록(閒中雜錄)』이 있다.(daum 2011)
조목 : 횡성군 인물/ 조목(趙穆) 조선시대(朝鮮時代) 본관은 횡성(橫城),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동고산인(東皐散人), 부용산인(芙蓉山人)이다. 아버지는 참판(參判) 대춘(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다섯 살에 구두로 『대학 大學』을 배우고, 12세에 『사서삼경 四書三經』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이때 퇴계는 38세로 정 6품의 지위인 좌랑(佐郞)의 직임에 있던 중앙관인이었다. 당시 퇴계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와 집상중(執喪中)이었다. 이때부터 조목과 퇴계와의 단절없는 만남이 계속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조목은 성리학을 연찬(硏鑽)하는 처사형(處士形)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1세에는 풍기군수(基郡守)로 재직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주세붕(周世鵬)을 찾아가서 그 고을의 향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26세에 참봉 군개세의 딸과 결혼한 다음 당시 풍기군수로 재직중이던 이황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童蒙敎官)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工曹佐郞)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형조좌랑(刑曹佐郞)신녕현감(신녕縣監)영덕현령(盈德縣令)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공조정랑(工曹正郞)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 및 금산(錦山)단양(丹陽)합천(陜川) 등의 군수(郡守),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국조방명록 國朝榜名錄』/『월천집 月川集』/張浩重,「月川 趙穆의 現實認識과 詩世界」(안동대 대학원석사학위), 1993./ 부(父) 조대춘(趙大春), 모(母)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수익(權受益)의 女, 형제(兄弟) 형(兄) 조숙(趙肅),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개세(權盖世)의 女, 자(子) 조구붕(趙龜朋) 조졸(早卒), 녀(女) 김유길(金裕吉), 녀(女) 권병(權昞), 녀(女) 김광?(金光?), 배(配) 측실(側室)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봉령(金鳳齡)의 女, 자(子) 조수붕(趙壽朋) 진사(進士)(daum 2011)
조목 : 문헌(文獻)/ 조목(趙穆) 자는 士敬, 호는 月川. 東皐, 본관은 橫城/ 서원편 - 陶山書院 -/ 위치 :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축 : 1574년(선조 7) 창건, 1575년(선조 8) 사액, 1614년(광해군 6) 趙穆 追配, 서원철폐령 때 존속한 서원, 1969-1970년 정화작업/ 배향인물 : 이황(李滉), 조목(趙穆)/ 배향일: 2월 中丁日, 8월 中丁日/ 기타 : 사적 제170호(1969.5.28), 典校堂: 보물 제210호(1963.1.21), 陶山書院 尙德祠附正門 및 四周土?: 보물 제211호(1963.1.21), 陶山書院圖: 보물 제522호(1970.8.27)/ 『嶠南誌』: 在郡東十里宣祖甲戌建乙亥賜額享文純公李滉光海乙卯從享工參趙穆/
▶ 해설 : 선조 7년(1574) 서원을 건립하여 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의 위패를 奉安하고 이듬해인 선조 8년(1575)에 ?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石峯 韓濩(1543-1605)가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6년(1614)에 이르러 士林이 月川 趙穆(1524-1606) 선생을 從享하게 되었다. 陶山書院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陶山書堂??雲精舍?亦樂書齋?下庫直舍 등 도산서당 일곽의 건물을 포함해 尙德祠?典敎堂?典祀廳?博約齋?弘毅齋?東光明室?西光明室?藏板閣?上庫直舍 ?內三門?進道門?玉振閣 등이 있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進道門이다. 진도문 좌우측으로는 東光明室과 西光明室이 담에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光明室은 藏書庫로서 임금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 그리고 퇴계의 門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 둔 곳이다. 東光明室은 1819년(순조 19)에 지은 건물이고, 西光明室은 1930년에 東光明室과 같은 모습으로 지은 건물이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강당인 典敎堂이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고, 좌우에는 東齋와 西齋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형성하는 이 일곽은 엄격한 좌우대칭을 한 배치를 하여 강학공간으로서의 규범을 보이고 있다. 典敎堂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서쪽으로만 閑存齋로 불리는 한 칸의 온돌방이 있다. 이방은 원장이 거처하던 방이다. 강당 대청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전면 뜰 아래에는 庭?臺가 설치되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東齋인 博約齋와 西齋인 弘毅齋는 각각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서원의 제향공간은 강당 뒤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사당인 尙德祠는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서, 退溪 李滉과 제자 月川 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목은 열다섯 살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들어와 마흔일곱 살때까지 가장 가까이 퇴계와 인연을 맺었고, 퇴계 사후에는 문집 발간 등의 추모사업과 도산서원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1614년(광해군 6) 왕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도산서원 從祀者가 되었다. 사당 출입문인 內三門의 오른쪽 계단은 제향 때 들어가는 오른쪽 문으로 오르는 계단이고, 왼쪽 것은 나올 때 이용하는 문과 계단이다. 강당의 동쪽, 사당의 남쪽 아래에는 문집 판목이 보관된 藏板閣이 있고, 사당 서남쪽 아래에는 향사 때 향례를 보조하며 제수를 마련하는 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두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동쪽의 건물은 제기고로 쓰이고 서쪽의 건물은 酒廳으로 쓰이는 관계로, 한 칸은 바닥이 마루이고 다른 한 칸은 흙바닥[土床]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전돌바닥으로 바뀌어 외부로 트여 있다. 尙德祠와 典祀廳 사이에는 협문이 나 있다. 강당 일곽과 도산서당 서쪽 두 곳에는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庫直이 거처하던 庫直舍가 있는데, 각각 上庫直舍?下庫直舍라고 한다. 퇴계가 생존시 사용하던 각종 물품과 서책, 그리고 출판물은 1970년 보수할 때 지은 유물전시관인 玉振閣에 전시되어 있다. 도산서원 도서관인 東?西 光明室에는 1,271종, 4,917책의 장서가 있는데, 이곳에는 퇴계 선생의 서간첩인『師門手簡』을 비롯하여 선생의 手澤本 또는 문집과 선생의 저서 및 그 후의 수증본이 수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교남빈홍록』등 총 37종 2,790판이 소장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할 당시 신축한 건물로서 선생의 유품인 자리?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梅花硯?玉書鎭 등의 문방구, 靑藜杖?梅花燈?投壺?渾天儀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1963년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과 둘레담은 1970년 보물 제211호로/
▶ 관련 글 : 陶山記 : 靈芝之一支 東出而爲陶山 或曰 以其山之再成而命之曰 陶山也 或云 山中舊有陶?故 名之以其實也 爲山不甚高大 宅曠而勢絶 占方位不偏 故其旁之峯巒溪壑 皆若拱揖環抱於此山然也 山之在左 曰東翠屛 在右 曰西翠屛 東屛來自淸凉 至山之東 而列峀?? 西屛來自靈芝 至山之西 而聳峯巍? 兩屛 相望南行 ??盤旋八九里許 則東者西 西者東 而合勢於南野莽蒼之外 水在山後 曰退溪 在山南 曰洛川 溪循山北 而入洛川於山之東 川自東屛而西 趨至山之趾 則演?泓渟沿?數里間 深可行舟 金沙玉礫 淸瑩紺寒 卽所謂濯纓潭也 西觸于西屛之崖 遂?其下 南過大野 而入于芙蓉峯下 峯 卽西者東 而合勢之處也 始余卜居溪上 臨溪縛屋數間 以爲藏書養拙之所 蓋已三遷其地 而輒爲風雨所壞 且以溪上 偏於?寂 而不稱於曠懷 乃更謀遷 而得地於山之南也 爰有小洞 前俯江郊 幽?遼廓 巖麓?? 石井甘冽 允宜肥遯之所 野人田其中 以資易之 有浮屠法蓮者幹其事 俄而蓮死 淨一者繼之 自丁巳至于辛酉 五年而堂舍兩屋 粗成 可棲息也 堂凡三間 中一間 曰玩樂齋 取朱先生 <名堂室記>「樂而玩之 足以終吾身 而不厭」之語也 東一間 曰巖栖軒 取<雲谷詩>「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之語也 又合而扁之曰 陶山書堂 舍凡八間 齋曰時習 寮曰止宿 軒曰觀瀾 合而扁之 曰?雲精舍 堂之東偏 鑿小方塘 種蓮其中 曰淨友塘 又其東 爲蒙泉 泉上山脚 鑿令與軒對 平築之爲壇 而植其上梅竹松菊 曰節友社 堂前出入處 掩以柴扉 曰幽貞門 門外小徑 緣澗而下 至于洞口 兩麓相對 其東麓之脅 開巖築址 可作小亭 而力不及 只存其處 有似山門者 曰谷口巖 自此東轉數步 山麓斗斷 正控濯纓潭上 巨石削立 層累可十餘丈 築其上爲臺 松棚?日 上天下水 羽鱗飛躍 左右翠屛 動影涵碧 江山之勝 一覽盡得 曰天淵臺 西麓 亦擬築臺 而名之曰 天光雲影 其勝?當不減於天淵也 盤陀石在濯纓潭中 其狀盤陀 可以繫舟傳觴 每遇?漲 則與齊俱入 至水落波淸 然後始呈露也 余恒苦積病纏繞 雖山居 不能極意讀書 幽憂調息之餘 有時身體輕安 心神灑醒 ?仰宇宙 感慨係之 則撥書??而出 臨軒玩塘 陟壇尋社 巡圃蒔藥 搜林?芳 或坐石弄泉 登臺望雲 或磯上觀魚 舟中狎鷗 隨意所適 逍遙?? 觸目發興 遇景成趣 至興極而返 則一室岑寂 圖書滿壁 對案?坐 兢存硏索 往往有會于心 輒復欣然忘食 其有不合者 資於麗澤 又不得 則發於憤? 猶不敢强而通之 且置一邊 時復拈出 虛心思繹 以俟其自解 今日如是 明日又如是若夫山鳥?鳴 時物暢茂 風霜刻? 雪月凝輝 四時之景 不同 而趣亦無窮 自非大寒大暑大風大雨 無時無日而不出 出如是 返亦如是 是則閒居養疾 無用之功業 雖不能窺古人之門庭 而其所以自娛悅於中者不淺 雖欲無言 而不可得也 於是 逐處各以七言一首 紀其事 凡得十八絶 又有蒙泉冽井庭草澗柳菜圃花?西麓南?翠微寥朗釣磯月艇鶴汀鷗渚魚梁漁村烟林雪徑?遷漆園江寺官亭長郊遠峀土城校洞等 五言雜詠二十六絶 所以道前詩不盡之餘意也 嗚呼 余之不幸晩生遐裔 樸陋無聞 而顧於山林之間 夙知有可樂也 中年 妄出世路 風埃顚倒 逆旅推遷 幾不及自返而死也 其後年益老 病益深 行益? 則世不我棄 而我不得不棄於世 乃始脫身樊籠 投分農畝 而向之所謂 山林之樂者 不期而當我之前矣 然則余乃今所以消積病豁幽憂 而晏然於窮老之域者 舍是將何求矣 雖然 觀古之有樂於山林者 亦有二焉 有慕玄虛 事高尙而樂者 有悅道義 ?心性而樂者 由前之說 則恐或流於潔身亂倫 而其甚 則與鳥獸同? 不以爲非矣 由後之說 則所嗜者糟粕耳 至其不可傳之妙 則愈求而愈不得 於樂何有 雖然 寧爲此而自勉 不爲彼而自誣矣 又何暇知有所謂世俗之營營者 而入我之靈臺乎 或曰 古之愛山者 必得名山以自託 子之不居淸凉 而居此何也 曰 淸凉壁立萬? 而危臨絶壑 老病者所不能安 且樂山樂水 缺一不可 今洛川雖過淸凉 而山中不知有水焉 余固有淸凉之願矣 然而後彼而先此者 凡以兼山水 而逸老病也 曰 古人之樂 得之心而不?於外物 夫顔淵之陋巷 原憲之甕? 何有於山水 故凡有待於外物者 皆非眞樂也 曰不然 彼顔原之所處者 特其適然 而能安之爲貴爾 使斯人 而遇斯境 則其爲樂 豈不有深於吾徒者乎 故孔孟之於山水 未嘗不?稱而深喩之 若信如吾子之言 則與點之歎 何以特發於沂水之上 卒歲之願 何以獨詠於蘆峯之?乎 是必有其故矣 或人唯而退 嘉靖辛酉 日南至 山主老病畸人記/
영지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이 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산이 또 이루어졌기 때문에「도산」이라 명명하였다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산속에 옛날에 질그릇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지만 널리 트인 곳에 자리잡아 형세가 빼어나며 차지하고 있는 방위가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그 곁에 있는 산봉우리며 메, 시내와 골짝이 모두 이 산에서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둥글게 빙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산은 왼쪽에 있는 것은 동취병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서취병이라 한다. 동취병은 청량산에서 나와 산의 동쪽에 이르러 멧부리가 아득하게 늘어서 있다.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나와 산의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가 삐죽삐죽 솟아 있다. 두 취병산은 서로 바라보며 남쪽으로 가는데, 비스듬히 8, 9리 가량 돌아가면 동쪽 의 것은 서쪽으로, 서쪽의 것은 동쪽으로 와서 남쪽 들녘의 아스라한 바깥에서 산세가 합쳐진다. 물은 산의 뒤에 있는 것을 퇴계라 하며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은 낙천이라 한다. 퇴계는 산의 북쪽을 돌아 산의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어간다. 낙천은 동취병에서 서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향하여 이르니 멀리 흐르다 깊이 고이 기도 하며 몇 리나 내려가다가 거슬러 올라오기도 하는데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다. 금빛 모래며 옥 같은 자갈이 맑고 환하며 검푸른 빛을 띠고 차갑게 비치니 곧 이른바 탁영담이다. 서로 서취병의 기슭에 닿아 마침내 그 아래를 따라 남으로 큰 들판을 지나 부용봉 아래로 들어간다. 부용봉은 곧 서쪽의 것이 동으로 와 서 형세가 합쳐진 곳이다. 처음 내가 퇴계의 가에 살 곳을 정하여 시냇물이 보이 는 곳에 집 여러 칸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나의 보잘 것 없는 심신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대체로 이미 세 번이나 그 터를 옮기니 여차하면 비바람에 무너지고 게다가 냇가가 너무 고요하고 적막한 곳에 치우쳐져 마음을 넓히기에는 부적합하여 이에 다시 옮기고자 하여 도산의 남쪽에다 땅을 얻었다. 이곳에는 작은 골 짜기가 있어 앞으로는 강과 교외를 굽어보며, 그윽하고 아득하며 둘레가 멀고 바 위 기슭은 초목이 빽빽하고도 또렷한데다가 돌우물은 달고 차서 은둔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원래는 농부가 그 가운데서 밭을 일구고 있었으나 재물로 바꾸 고 법련이라는 중이 그 일을 맡았는데, 얼마 있지 않아 법련이 죽자 정일이라는 중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정사년(1557)부터 신유년(1561)까지 5년이 걸려 서당과 정사(精舍) 두 채가 대략이나마 완성되어 깃들어 쉴 수 있었다. 서당은 모두 세 칸이며 가운데 칸은 「완락재」라 하였는데, 주자의 <명당실의 기문>에 나오는 「그것으로 즐기며 완상하니(樂而玩之) 족히 종신토록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서 취하였다. 동쪽에 있는 칸은「암서헌」이라 하였는데 <운곡시>의「오래도 록 잘하지 못함 스스로 믿었거늘, 바위틈에 거처하며(巖栖) 작은 효과 드러나기 바라네.」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또한 합쳐서 편액을 달고 「도산서당」이라 하였 다. 정사는 모두 여덟 칸인데, 재는「시습」이라 하였고, 료는「지숙」, 헌은「관 란」이라 하였으며 합쳐서 편액을 달고「농운정사」라 하였다. 서당의 동쪽에다 작은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안에는 연꽃을 심었는데,「정우당」이라 하였다. 또 그 동쪽에「몽천」을 만들고, 샘 위에 있는 기슭은 파서 관란헌과 대칭이 되도록 하여 평평하게 쌓아 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매화·대·솔·국화를 심어「절우사」 라 하였다. 서당 앞의 출입하는 곳은 사립문으로 가리고「유정문」이라 하였다. 문 밖의 작은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두 기슭이 서로 마주 보는데, 그 동쪽 기슭 곁에는 바위를 들어내고 터를 다지면 작은 정자를 지을 만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다만 그곳을 보존해둘 따름이었다. 산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생긴 것이 있어「곡구암」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돌아 몇 걸음을 가면 산기슭이 갑자기 끊기고 바로 탁영담 위로 내던져져 있는데, 큰 바위 가 깎은 것처럼 서 있으며 열 길 남짓 포개어 있음직하다. 그 위에다 높은 대를 쌓으니 소나무 가지가 해를 가리고 위로는 하늘/ □ 이 <陶山記>는 본래 도산서당(뒤에 서원이 됨)에 관하여 이것저것을 읊은 연작시인 <陶山雜詠>의 병기(幷記)로서, 도산서당의 환경과 유래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daum 2011)
조목 : 陶山書院月川趙公從享時告元位退陶李先生祝文 : 於惟先生道學之宗倡明絶緖日星大東遡沿洛寤寐考亭標的斯文發揮聖經聞風色悅?德心醉多士雲趨講?道義鼓?昇堂?多英賢惟時月川聞道最先敬義明誠篤信師說硏精性理討論心訣奧旨宏綱毫分縷析培壅根本攘斥禪寂?我來學扶我民彛魯無君子斯焉取斯進退有義幾辭乘除高蹈雲山屢空晏如壁立之操嚴毅之量砥柱頹波士皆尊仰眷玆陶丘講學之所有儼廟貌式陳??爰倣古事禮合從享德宇昭臨庶幾顧饗// 從享位月川趙公奉安文 : 天性謹嚴學問淵篤壁立之操??流俗進道之誠比堅金石先生挺生闡明絶學?衣當日獨立庭雪時雨春風莪長蘭茁有倡斯和志同德合明誠兩進敬義偕立討論經訓講?心法龍門餘韻更理琴南丈從容道義嗟切末學多岐異歸殊轍聖路?塞陸海?沒不有明辨孰開後覺尊信程朱攘斥禪寂面命提耳幾多誘掖簡牘論難扶植正?如水朝東如矢注的指引眞訣有此啓迪業勤師傳功護道適難進易退屢辭徵?白道丘園簞瓢自樂頹波著脚大有定力素履貞吉淸風如昨人多景慕士爭矜式豈但祭社可配尙德恭承綸命敬涓良吉爰?廟食享祀芬苾有泂玆觴庶幾昭?(daum 2011)
조목 : 문헌(文獻)/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조목 1524-1606 사경 월천 횡성 예안 퇴계문인 월천집/ 趙穆 1524-1606 士敬 月川 橫城 禮安 退溪門人 月川集(daum 2011)
조목 : 예안인물(禮安人物)/ 조목(趙穆) : 본(本) 횡성(橫城) 어릴 때부터 이황을 좇아 배웠다. 뜻이 돈독히 하고 행하기를 힘쓰며 의리(義理)를 연구하였다. 황이 죽으매 일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3년 동안 내실에 들어가지 않으며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서 추천되어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월천집(月川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daum 2011)
조목 : 月川趙穆先生.1524-1606/ 橫城人으로서 字는 士敬. 號는 月川으로 15세에 退溪先生에게 나아갔다. 1552년 (明宗 7) 生員試에 合格하여 成均館에서 修學하였으나 仕進에 뜻이 없어 돌아와 스승에게 學問과 道를 물어 大儒가 되었다. 學問과 德行으로 1556년 恭陵?奉에 薦除되었으나 不就하였고 이후 45차례에 걸쳐 벼슬이 내려졌어도 大部分은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서 工曹參判에 就任했으나 곧 辭退했다. 壬辰倭亂때는 義兵活動을 展開하였다. 40여년 간 官職이 除授 되었어도 실제 나아간 期間은 4년 未滿이었다. 著書로 "月川文集","곤지잡록","退溪先生言行叢錄" 등이 있다. 退溪 逝後 文集刊行과 院祠의 創建 및 位牌奉安을 主導했으며 후에 唯一하게 陶山書院에 從享된 분이다.
# 陶山書院 常享祝文 : 維歲次 某太歲 二月(八月) 某月建朔 某日 某日辰 某官 姓名 敢昭告于/ 先師 退陶 李先生 伏以 心傳孔孟 道紹?洛 集成大東 斯文準極 謹以 豕牲?盛 淸酌庶品 式陳明薦 以月川趙公 從享 尙 饗(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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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