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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860) : 조범준(야생동물연합국장)-조병상(저술가)-조병홍(판사)-조보양(감찰)(1)(附 호명면 출신 권영빈, 12일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 피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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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준(ꡒ動物 사라진 世上, 人間 孤獨해서 못 살아ꡓ) [記事] : 자연을 향한 애착은 수렵․채취가 인류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의 유전자 속에 살아 있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생존과 종족 번식뿐 아니라 정신적, 심미적 만족을 위해서도 자연을 필요로 한다며,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ꡐ생물에 대한 애정ꡑ(바이오필리아)을 꼽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도 남다른 자연사랑을 삶의 방편으로 삼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을 통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본다. ꡒ표범! 표범을 봤어요. …ꡓ 양병국 국립환경과학원 박사의 전화기를 타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두대간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야생동물을 조사해 온 조범준 야생동물연합 사무국장(47)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씨는 2006년 8월 11일 경북 봉화군 삼방산에서 면산을 거쳐 강원도 태백시 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센 날이었다. 오후 2시께 평소처럼 신갈나무 거목 밑에서 숨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ꡒ마치 톱날을 줄로 가는 듯한 컥컥하는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맹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겁이 더럭 나 지니고 있던 막대기로 나무 둥치를 쳐 소리를 냈지요. 나무 밑 움푹 파인 바위틈에 있던 표범이 놀라서 건너편 산등성이로 빠르게 사라지더군요.ꡓ 2008년 8월 12일 조씨와 함께 표범을 목격했던 면산(해발 1245m)을 찾았다.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 경북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은 전문가들이 ꡐ남한에 표범이 살아 있다면 비무장지대 아니면 이곳ꡑ이라고 꼽는 대규모 산악지대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튿날 국립환경과학원 연구팀이 와 이 일대에 무인센서 카메라를 설치했다. 조씨는 증거도 없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할까봐 몇몇 이들을 빼고는 목격담을 아예 말하지 않았다. 표범이 산다는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ꡒ표범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도 표범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워낙 조심스런 동물이라 사람을 만나기 전에 피해 버리기 때문이죠.ꡓ 그는 이 경험을 울진~삼척~봉화 산림의 야생동물을 지키라는 계시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1994년부터 백두대간보전회 환경부장으로, 99년부터는 야생동물연합 사무국장으로 일해온 조씨는 시민운동가이지만 정부 전문가들도 ꡐ선생ꡑ으로 부르는 야생동물 서식지 조사와 모니터링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어린이를 위한 야생동물 생태학교를 열거나 방송사의 야생동물 취재를 지원하는 교육․홍보 활동과 밀렵도구 제거 등 감시활동에도 바쁘다. 그는 ꡒ1년에 300일 가까이 집 밖에서 잔다ꡓ고 말했다. 그의 자동차는 1년에 6만㎞를 달리고 등산화는 6개월마다 밑창을 간다. 발로 현장을 뛰지 않고 입으로만 야생동물을 연구하고 사랑하는 전문가와 운동가를 그는 믿지 않는다. 산양이 깎아지른 절벽에만 산다는 믿음이 그렇다. ꡒ사람 접근이 힘든 비무장지대 근처 농경지와 소양호․파로호 물가 등에서도 산양의 흔적이 관찰된다ꡓ고 그는 말한다. 반대로 산양 서식에 적합한 환경일지라도 사람의 간섭이 빈번하면 산양은 자취를 감춘다. 그는 산 속을 다닐 때 동물이 자주 다녀 난 길을 이용한다. 배설물과 발자국을 확인하고 밀렵꾼들이 놓은 올무나 덫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ꡒ동물 길을 따라가면 힘이 들지 않아요. 동물들은 평지를 가듯 산등성이를 비스듬히 넘는 최단 코스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ꡓ
조씨가 울진~삼척~봉화 일대 산악지역의 야생동물을 살피고자 설치한 무인센서카메라는 모두 40대다. 거의 원시림 수준인 이곳을 매달 방문해 필름을 수거하고 배터리를 갈아주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ꡐ일반용도로 쓰지 못한다ꡑ는 안내문을 붙여놔도 막무가내로 카메라를 가져가는 사람들 때문에 애를 먹는다. ꡒ지금까지 20여대를 분실했다ꡓ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조씨는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에 와 자랐다. 그가 야생동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류학을 전공한 고등학교 생물교사로부터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향을 정한 것은 ꡒ어릴 때 밀렵으로 잡힌 토끼가 눈을 뜬 채 죽어가던 모습이었다ꡓ고 한다. 그 생생한 기억 때문에 그는 육식을 하지 못한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환경운동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역 유지의 승용차에서 시트로 깔아놓은 산양 가죽을 벗겨내기도 했다. 사람이 개발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오지 구석까지 개발광풍이 부는 요즘 같아서라면 야생동물은 살아남지 못한다고 그는 걱정한다. ꡒ동물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고독해서 못 삽니다.ꡓ 그가 좋아하는 어느 인디언 추장의 말이다.(조홍섭 環境專門記者 한겨레신문 2008-08-20)
조범준 : [한국의 자연주의자들] 야생동물 지킴이 조범준씨/ 2008/08/28 09:12 http://blog.naver.com/ [한국의 자연주의자들] 야생동물 지킴이 조범준씨 1년 300일 밖에서 자며 백두대간 제집처럼 서식지 조사와 모니터링 국내 최고 전문가 자연을 향한 애착은 수렵.../ blog.naver.com(daum 2011)
조범준 : 야생동물 지킴이 조범준 선생님/ 3년전, 2008년 10월 23일/ 야생동물 지킴이 조범준 선생님을 추천합니다. 조범준 선생님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서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고한에 와 자랐습니다. 야생동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류학을 전공한.../ blog.naver.com/ 생태지기하리하라 생태알리미 지표종(daum 2011)
조범준 : 강원도 고갯길 여행/ e-Book/ 임동헌 지음 | 송정문화사 | 2009.04.24/ 책본문 : ...일쑤인 곳이 석개재이므로. 하긴 석개재를 품고 있는 면산은 2년 전 야생동물지킴이 조범준 씨가 표범을 목격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에 표범이 산다면 비무장지대 외에는 면산일 것이라는.../ 216페이지(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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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상(趙秉相) : 1833(순조 33)-1897(광무 1), 감천면 돈산리 산곡(山谷) 출신, 자는 중덕(仲德), 호는 학서(鶴西), 본관은 한양, 석회(錫晦)의 손자, 구와 김굉(龜窩金紘)과 입재 정종로(立齋鄭宗魯)의 제자, 열심히 경학(經學)에 전념하여 <6의휘편(六衣彙編)> <성학지남(聖學指南)> <심학총도(心學總圖)> <학서집(鶴西集)> 등의 저서가 있다.(朝鮮寰輿勝覽 1929)
조병상(趙秉相) : 본관(本貫) 한양(漢陽), 자(字) 중덕(仲德), 호(號) 학서(鶴西)/ 이력(履歷)/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 第一節 人物/ 조병상(趙秉相) : 한양인(漢陽人). 자(字)는 중덕(仲德) 호(號)는 학서(鶴西)다. 일봉(一峯) 석회(錫晦)의 손(孫)으로 구와(龜窩) 김굉(金굉).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양문(兩門)에 나아갔고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성학지남(聖學指南)」.「안자전서해(顔子全書解)」등을 저술(著述)했다. 유집(遺集)이 있다.(daum 2011)
조병상 : 학(鶴)의 고장 안동/ 웹문서 | 작년, 2010년 9월 27일/ ...(의성) ㆍ학산집鶴山集 유응목柳膺睦(풍산) ㆍ학사집鶴沙集 목판 김응조金應祖(풍산) ㆍ학서집鶴棲集 조병상趙秉相(한양) ㆍ학서집鶴棲集 목판 유태좌柳台佐(풍산) ㆍ학천집鶴川集 목판 이봉춘李逢春(진성) ㆍ학천집鶴天集.../ www.kbin.co.kr(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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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홍(趙炳洪) : 1952- , 예천 출신, 75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82년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84년 사법연수원 14기 수료, 85년 마산지방검찰청 검사, 87년 대구지검 김천지청 검사, 88년 서울지검 북부지청 검사, 89년 대구지방법원 판사, 93년 대구지법 경주지원 판사, 변호사조병홍법률사무소 변호사이다.(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朝鮮日報 DB 2003,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다음 百科事典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조병홍 : 변호사조병홍법률사무소/ 변호사조병홍법률사무소 총 1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조병홍 (趙炳洪) .../ jpeople.unitel.co.kr(daum 2011)
조병홍 : 조병홍 동기(법률사무소)/ 3년전, 2008년 1월 18일/ "조병홍법률사무소 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3동 13-19 · 조병홍법률사.../ cafe.daum.net/kustar71/ 고려대학교법과대학71(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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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양(趙普陽) : 1709(숙종 35)-1788(정조 12), 감천면 유리 출신, 자는 견경(見卿)ㆍ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본관은 한양, 유학(幼學) 원익(元益)의 2자, 규양(揆陽)의 동생, 득양(得陽)ㆍ의양(宜陽)ㆍ몽양(夢陽)의 형, 욱(勗)ㆍ안(晏)ㆍ집ㆍ석우(錫우)의 아버지, 고산 이유장(孤山李惟樟)과 소은 이경익(小隱李景翼)의 제자이다. 뛰어난 총명에 지극한 효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기이(奇異)하다고 하였다. 청대 권상일(淸臺權相一)의 제자로서 사서육경(四書六經), 주퇴문자(朱退文字) 외기삼백(外朞三百) 상수(象數) 등을 배울 때 칭찬을 많이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747년(영조 23) 식년 생원시에 3등 45위로 합격, 동년 식년 진사시에 3등 73위로 합격, 1773년(영조 49) 증광 문과에 병과 46위로 65세에 조카 석회(錫晦)와 동방(同榜)으로 급제하여 숙질(叔姪)이 비천당(丕闡堂)에 함께 돌어가니, 왕이 일가 쌍계(一家雙桂)를 칭찬하면서 전적(典籍)을 직접 제수(除授)하였다. 그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 당시 영조(英祖)의 외손(外孫)으로 세도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모욕을 당함에 조정이 오래 몸담을 곳이 못 됨을 간파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하고 귀향하여 이전처럼 학문과 도학적(道學的) 교류, 그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반드시 지성으로 가르쳐 자기 수양을 통해 세상에 쓰일 인재로 양성했으나 성품이 본래 겸양(謙讓)이 많아 일찍이 한 번도 스승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 또한 부모를 모시는데 힘썼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 피를 드리기도 하였고, 아버지 상(喪) 때는 70세인데도 3년 시묘살이를 한 효자이다. 1788년에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승진하였다. 일생을 효(孝), 송(松), 죽(竹), 매(梅), 국(菊)으로 대자연을 벗을 삼아 산동(山東)에서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자호를 팔우헌(八友軒)이라 하였다. 성리학예 전력한 당세의 거유(巨儒)로서 명성이 높았다. 청빈한 벼슬 생활과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고 학행을 숭상하니 학자로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남야 박손경(南野朴孫慶, 1715-1782), 대산 이상정(大山李象靖, 1711-1781), 해좌 정범조(海左丁範祖), 하지 이상진(下枝李象辰) 등과의 친분이 두터웠고, 저서로 <팔우헌 문집(八友軒文集)> 8책이 있다. 지금 주손 가(冑孫家)에는 "양계초려(陽溪草廬)'라는 현판 원본 글씨와 현 위치로 이건(移建)한 천곡서당 (泉谷書堂)이 남아 있고, 문집(文集) 4권이 남아 있다. 산거팔영(山居八詠)은 다음과 같다. 【山】 : 밀어도 가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지만, 산은 깊고 은은하며 자태높고 웅장하네. 가을 단풍 봄꽃을 가리지 않고 감싸니, 자연의 참 모습으로 사랑할만 하네. 【水】 : 흐르고 흘러 언젠가 바다에 이르고자, 조용하고도 쉬임없이 물은 흘러 간다. 이미 흘러간 여울을 헤쳐 얼굴 씻으니, 맑은 물소리 다시금 귀에 가득차네. 【風】 : 바람이 언제 왔다 가는지 몰라도, 이따금 추녀끝과 방 안을 가득 채우네. 숲 사이로 지나가며 송죽(松竹)을 흔들어 놓지만, 바람자니 책장 흩날리지 않고 한적함을 즐기네. 【月】 : 하늘 아래 어느 집엔들 비추지 않으랴만, 초라한 내 집을 더욱 밝게 비추는 듯 하네. 달빛 아래서는 완연한 백발도 두려워함 없이, 편안히 평상에 누워 책을 읽어도 좋으네. 【松】 : 털끝처럼 작은 싹이 돋아 나와 마침내 소나무는, 구름을 뚫고 하늘을 받치네. 반듯한 집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거나, 운학(雲鶴)이 찾아와 보금자리를 틀게 하네. 【竹】 : 내가 사랑하는 건 위수(渭水) 위에 심어 놓은 대나무 숲이 아니라, 내 뜨락에 있는 다만 몇 그루라네. 겨울 오고 한해 저물어도 풀빛 변치 않고, 의연히 고사리 덤불 속에 서서 맑은 바람 거느리네.【梅】 : 안 뜰 깊숙히 매화를 심으니, 아름다운 풀과 어울려 외롭지 않네. 해마다 봄비 내린 뒤 처마를 따라 거닐며, 갓 피어난 꽃과 웃음을 나누고 싶네. 【菊】 : 둥근 저녁상에 국화꽃잎 즐기고 도연명(陶淵明)이 술잔에 띄워 마심은 먹기 위함이 아니라, 오상 고절의 운치(韻致)를 취함이었네. 만약 먹어서 즐겁고자 한다면, 아름다운 곽 향이나 몇 이랑 심어 보소. [詩] 독서동(讀書洞)/ 마을 이름 독서라 글공부 해야 하니/ 글 읽지 않아 그 이름 헛되게 말아라/ 그러나 그 깊은 의미 찾지 않는다면/ 뭣하러 그 많은 책 외운단 말인다/ 묘는 감천면 두곡(杜谷) 병좌(丙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예조참판 풍산 유태좌(柳台佐)가 지었다.(禮鄕醴泉 1994, 醴泉郡誌 1939, 嶠南誌 卷4 安東條 1937, 朝鮮寰輿勝覽 1929, 安東鄕廳事例謄錄, 醴泉文化 7輯 1994, 司馬榜目, 文科榜目, 醴泉의 金石文 2003)
조보양(趙普陽) : 영남문집(嶺南文集)/ 팔우헌집(八友軒集) 조보양(趙普陽) (1709, 숙종 35-1788, 정조 12) : 자(字) 인경(仁卿), 호(號) 팔우헌(八友軒), 본(本) 한양(漢陽), 부(父) 원익(元益), 거(居) 예천(醴泉)/ 7권4책/ 묘갈명(墓碣銘); 류태좌(柳台佐) 찬(撰). 공(公)은 소은(小隱) 이경익(李景翼)에게 수학(受學)하였고 라굴재(懶掘齋) 이산두(李山斗)에 질의(質疑)도 하였으며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문하(門下)에 사서(四書), 육경(六經), 주퇴문자(朱退文字), 기삼백(朞三百), 상수(象數) 등을 배울 때 칭찬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번 합격(合格)하였고 1747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合格)하고 1773년 조카 석회(錫晦)와 동방(同榜)으로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였다.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거쳐 예조좌랑(禮曺佐郞) 때에 후겸(厚謙)에게 ?오(?오)를 당(當)함에 귀향(歸鄕)하여 양친(養親)에 힘썼다. 1788년 통정(通政) 첨추(僉樞)에 승진(昇進)하였다.(daum 2011)
조보양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조보양(1709-1788)은 감천면 돈산리 산골(山洞) 출신으로,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본관은 한양, 원익(元益)의 둘째 아들, 청대 권상일의 제자이다. 뛰어난 총명에 지극한 효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하였고, <사서육경>, <주퇴문자(朱退文字)>, <상수(象數)>등을 배울 때는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1747년(영조 23)에 성균관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73년(영조 49) 증광 문과에 병과로 조카 석회와 더불어 급제하여 영조 임금이 한 집안에 두 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칭찬하면서 성균관 전적으로 직접 임명하였다. 그 후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을 거쳐 예조 좌랑 때 영조 임금의 외손으로 세도를 부리던 정후겸에게 모욕을 당하였기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모시는데 힘썼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 피를 드리기도 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70세인데도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후 용양위 부호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1788)에 올랐다. 일생을 산(山), 물(水), 바람(風), 달(月), 소나무(松), 대나무(竹), 매화(梅), 국화(菊)와 벗을 삼아 산동 마을에서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호를 팔우헌(八友軒)이라 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안간힘을 쓴 당시의 거유(巨儒)로서 명성이 높았다. 청빈한 벼슬 생활과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고 연구에 몰두하였기에 학자로서 후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박손경, 이상정, 정범모, 이상진 등과 서로 친하게 사귀었고, <팔우헌 문집>8책이 있다. 그리고 '산거팔영(山居八詠)'의 시문이 남아 있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1)
조보양(趙普陽)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23년 (17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5위/ [인적사항] 자 견경(見卿), 생년 기축(己丑) 1709년, 합격연령 39세, 본관 한양(漢陽), 거주지 안동(安東) 감천(甘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타과 영조(英祖) 49년(177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조원익(趙元益),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형] 조규양(趙葵陽), [제] 조득양(趙得陽), [제] 조의양(趙宜陽), [제] 조몽양(趙夢陽)/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1)
조보양(趙普陽)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23년 (17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3위/ [인적사항] 자 견경(見卿), 생년 기축(己丑) 1709년, 합격연령 39세, 본관 한양(漢陽), 거주지 안동(安東 甘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타과 영조(英祖) 49년(177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조원익(趙元益),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형] 조규양(趙葵陽), [제] 조득양(趙得陽), [제] 조의양(趙宜陽), [제] 조몽양(趙夢陽)/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1)
조보양 : <국조 문과 방목>/ 조보양(趙普陽) 영조(英祖)49년(177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5(丙科15)/ > 인적사항 생년(生年) 1709년, 기축, 본관(本貫) 한양(漢陽)/ > 가족사항 부(父) 조원익(趙元益), 조부(祖父) 조봉징(趙鳳徵), 증조부(曾祖父) 조명한(趙鳴漢), 외조부(外祖父) 이기만(李基晩)/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747(정묘) 생원시/진사시, 전력(前歷) 생원(生員)(daum 2011)
조보양 : 조보양[趙普陽]/ -네이트백과사전 출처/ 趙普陽 1709(숙종 35)∼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안동 풍산(安東豊山)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원익(元益),.../ blog.joins.com(daum 2011)
조보양(趙普陽)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영조(英祖) 49년, 과거시험연도 : 1773 계사,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병과15(丙科15)/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조보양(趙普陽), 본관(本貫) : 한양(漢陽)/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747(정묘) 생원시/진사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父) : 조원익(趙元益), 조부(祖父) : 조봉징(趙鳳徵), 증조부(曾祖父) : 조명한(趙鳴漢), 외조부(外祖父) : 이기만(李基晩)(daum 2011)
조보양 : 기 건(奇 虔)/ 팔우헌집(八友軒集) 조보양(趙普陽) (1709, 숙종 35-1788, 정조 12) 자(字) 인경(仁卿), 호(號) 팔우헌(八友軒), 본(本) 한양(漢陽), 부(父) 원익(元益), 거(居) 예천(醴泉) 7권4책 묘갈명(墓碣銘); 류태좌(柳台佐) 찬(撰). 공.../ www.shinjongwoo.co.kr(daum 2011)
조보양(趙普陽) : 축산지(鷲山誌) (영산읍지) 상(上)/ 누정(樓亭)/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 고성(固城)/ 좌랑(佐郞) 조보양(趙普陽) 기(記)(daum 2011)
조보양 :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쌍매당(雙梅堂) 고성(固城)이씨/ 장마면(丈麻面) 유리(幽里)/ 이윤(李胤) 호(號) 쌍매당(雙梅堂) 재각(齋閣)/ 건립(建立) 이상경(李尙慶)/ 좌랑(佐郞) 조보양(趙普陽) 기(記)(daum 2011)
조보양 :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영산(靈山)/ ● 쌍매당(雙梅堂) 재(在) 장마면(丈麻面) 유리(幽里)/ 고성(固城) 이윤(李胤) 자(字) 자백(子伯) 호(號) 쌍매당(雙梅堂). 소축(所築)/ 한양(漢陽) 좌랑(佐郞) 조보양(趙普陽) 기(記)(daum 2011)
조보양 : 조보양(趙普陽) 본관 한양(漢陽)/ 영주 문화유적 > 서당/ 구호서당(鷗湖書堂)/ 영주시 영주2동 구성산 서록에 있다.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의 서당(書堂)으로 후손 생원(生員) 권용섭이 1731년(英祖 7)에 창건(創建)하였으나 폐지되었다가 1784년(正祖 8)에 진사(進士) 권명수(權命守)가 중건하였으며 좌랑(佐郞) 조보양(趙普陽)의 중수기가 있다.(daum 2011)
조보양(趙普陽) : 본 한양(漢陽)/ 영주 문화유적 > 정각/ 갈수헌(渴睡軒) : 영풍군 이산면 신암리 우금에 있다. 지평(持平) 김위(金위)가 건립하였고 교관(敎官) 박손경(朴孫慶)의 기와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의 팔경시(八景詩)가 있다. 지금은 없음.(daum 2011)
조보양 : 조보양(趙普陽) 본 한양(漢陽)/ 영주 문화유적 > 정각/ 동락정(同樂亭) : 구동헌(舊東軒:현 영주국민학교) 앞에 있었다. 군수(郡守) 홍주세(洪柱世)가 건립하고 정자앞에 두못(兩池)을 파고 연을 심었으며 세계의 섬을 만들기도 하였다. 군수 조태휘(趙泰彙)가 중건하였고 다시 군수 조진태(趙鎭泰)가 중수하였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의 기와 송사(松沙) 이적의(李適意)의 상량문이 있다. 정자는 지금 없다.(daum 2011)
조보양 : 팔우헌 조보양(趙普陽)| 선조님의 발자취/ 삼 형제/ 2010.02.22. 18:30/ 스승 : 권상일(權相一)/ 학파 : 퇴계 학파/ 퇴계학맥과 인연/ 조보양(趙普陽)은 아버지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 조원익(趙元益)과 어머니 예안이씨 이기만(李基晩)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보양의 선조는 일찍이 퇴계 학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그러한 집안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퇴계 학맥과 인연을 맺어갔다. 증조 조명한(趙鳴漢)은 진사로 호는 죽림(竹林)인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조봉징(趙鳳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유계(幽溪)인데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 조원익은 신당 이성전(李成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보양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함이 남달랐다. 『통감』을 처음 배우면서도 범례에 해박하고, 정통과 정통이 아닌 것을 능히 구분할 줄 알아서 보는 이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자라서는 소은 이경익(李景翼), 또 난졸재 이산두(李山斗)에게서 의심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청대 권상일(權相一)의 문하에서 『사서육경』, 『주자문집』, 『퇴계문집』 외에 『상수학(象數學)』 등을 배웠는데, 미세한 발단에서 시작하여 대의까지 통달하여 칭찬을 받았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1747년(영조 23)에 성균관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조카 조석회(趙錫晦)도 함께 급제하였는데, 영조임금이 한집안에서 두 명이나 급제했다고 칭찬하면서 직접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하였다. 관직은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예조좌랑, 용양위부호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벼슬에는 큰 뜻을 두지 않고 산·물·바람·달·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의 여덟 가지를 벗 삼아 지낸다는 데서 팔우헌(八友軒)이란 호를 지었다.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산동마을에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박손경, 이상정, 정범모, 이상진 등과 교류하였다. 청빈한 벼슬살이와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며 자연을 벗하며 살았는데, 가선대부 류이좌(柳台佐)가 지은 묘갈명의 다음 내용은 이러한 삶과 학문적 태도를 단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행실의 근원인 효성이 독실하고 학문은 경서에 통함이었네. 학문을 미루어 문예가 이루어졌고 뜻은 곤하고 형통함에 힘썼네. 일정월매를 이어받아 이를 가벼이 하고 의를 중히 하셨습니다. 성지에서나 정시에서 급제함을 어찌 늦다 하겠습니까. 나귀를 타고 벼슬길에 나갔다 갈잎 물고 나는 기러기였지요. 어버이는 지양(志養)을 기뻐하고 성상은 포장을 하시도다. 초복(初服)으로 돌아와서 수(壽)와 더불어 덕이 높았네. 고관의 관복으로 군자가 고종명하셨도다. 동산의 산 회수 물버들의 바람 오동의 달 정조 있는 솔과 대나무 설중의 매화 서리 후 국화에 끼친 향기 우두커니 우러르면 공이 세간에 계시는 듯합니다. 송덕의 글 후세에 알리니 영역의 도리송 빛나리다. 가선대부 원임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돈령부사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풍산 류이좌(柳台佐) 짓다.(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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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출신 권영빈, 12일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 피임...축하합니다.
권영빈(권영빈 氏 韓國文化藝術委員會 委員長 任命) [記事] : 호명면 태생의 권영빈(69) 전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가 2012년 3월 12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임기는 3년. 신임 권영빈 위원장은 서울대 역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 중국사를 수료하고 월간 세대사 편집장 발행인을 거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필, 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운용·관리하며,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다. 권 위원장은 방송위원회 심의위원과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교육개혁위원 등을 지냈으며, 삼성언론상과 위암 장지연 언론상, 서울시문화상, 중앙대 중앙언론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칼럼집 <어느 좀팽이의 작은 소망>과 번역서 <중국공산주의 운동사(벤자민 슈위츠)> <리대조-중국사회주의의 기원(모리스 메이스너)>, <도스토웹스키(EH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한나 이렌트)> 등이 있다.(醴泉新聞 201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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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