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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869:조용필(애국지사)-조우인(승지)(1)(祝예천문화 제24권나와/예천방문832)
작성자장병창 @ 2012.03.28 06:20:02

   예천의 자랑(2869) : 조용필(애국지사)-조우인(승지)(1)(附 예천문화원, <예천문화> 제24권 발간,,,축하합니다/예천방문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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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趙鏞弼) : 1865(고종 2)-1946, 지보면 지보리 신촌(新村) 출신, 자는 여유(汝裕), 호는 영은(嶺隱) 또는 운파(雲坡), 별명은 맹호(猛虎), 본관은 함안, 진규(進奎)의 장자, 성품이 활달대도하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한학(漢學)을 닦아 뒤에는 석학(碩學)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애국심이 투철하고 효우(孝友) 또한 지극하였다. 구한 말 지보리의 집강(執綱)으로 화적(火賊) 토벌에 참여하여 치안을 유지하는데 탁월한 용력과 의협심으로 명망을 떨쳤다. 1900년대 초 계속되는 흉년 속에서 질곡(桎梏)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민중과 기울어져가는 봉건 왕조와 체제에 기생하던 양반 지배층 사이에서 현실을 헤쳐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현실 속에서 몰락 농민집단인 화적(火賊)의 토벌에 참가하였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6년7월 21일 잡보(雜報)에 의하면, "청포 조씨(請褒趙氏), 경북 예천, 김해, 용궁의 안윤수씨(安允洙氏) 등이 내부(內部)에 청원하되, '업드려 아뢰옵건대, 5.6년 내로 화당(火黨)과 의요(義擾)가 백반(百般)으로 침학(侵虐)하와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지 못함은 이미 정부에서도 통촉(洞燭)하였사온즉 다시 번거로이 말씀드리지 않겠사오나, 용궁(龍宮)에 거주하는 전 참봉 조용필(前參奉趙鏞弼)이 평소 담략(膽略)과 의기(義氣)가 있어 마을의 장정을 규합하여 적괴(賊魁) 마 장군(馬將軍)과 민 중군(閔中軍) 등을 토포(討捕)하야 포살(砲殺)하거나 매살(埋殺)함에 열군(列郡)이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고 농상(農商)을 하는 백성들이 비로소 편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으므로 부근 6.7군이 조씨의 의용(義勇)과 효로(效勞)를 앙모(仰慕)하와 포상(褒賞)이 없다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정부와 내부(內部)에 정서(呈書)를 올림에 단지 '가상(嘉尙)' 2자로써만 적어 내려주니, 어찌 권장하는 도리라 할 수 있사오리까? 이에 감히 내부 대신(內部大臣)께 앙원(仰願)하니, 밝히 살피시어 특별히 관찰부(觀察府)에 훈령(訓令)하여 조용필로 하여금 토포(討捕)의 직임에 차출하야 그 군 백성들의 안도를 보전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더라"라고 하였다.

 

  당시 조용필의 화적 토벌에 양반들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월곡(月谷)의 전주인 참봉 이필언(參奉李弼彦)의 지원은 큰 것이었다. 이필언은 풍산 유씨(豊山柳氏)의 비호 하에서 대지주로 성장한 인물로 그의 농장은 낙동강 연변 용궁현(龍宮縣) 일대에 널리 펴져 있었다. 화적으로부터 심각하게 피해를 입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조용필이 조직한 토포군(討捕軍)은 지보촌(知保村)의 마을 장정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지보촌의 함안 조씨 가문의 지원도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용력(勇力)과 의협심에 대한 가문의 신뢰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지보촌에는 당시 장시(場市)가 있었기에 시장에 대한 화적의 약탈은 이들에게 심각한 현실적인 위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화적에 의한 피해는 심각했고, 인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당시 지보촌에 세거하고 있던 안동 권씨(安東權氏) 가문의 한 사람이 설장(設場) 하에 약탈하던 화적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특히 1903년의 큰 흉년은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 용궁 군수(龍宮郡守)였던 장용환(張龍煥)의 일기인 <자자생록(子子生錄)>에 의하면, 흉년에 관아(官衙)의 대처가 변변치 못함과 관예배(官隸輩)가 낀 수 10여 도적떼가 안 다니는 데가 없이 촌락을 약탈하고 있던 현실을 볼 수 있다. 마 장군(馬將軍, 마도치)의 체포에 조용필 등 토포군(討捕軍)의 공이 컸다.

 

  그는 1907년 8월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의 소모(召募)로 참가하였고, 이러한 그의 경력은 의병 동료들과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여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이나 그 개편된 조직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1915.7.15)의 회원이거나 관련을 가졌다. 1916년 8월 2일 그는 대구의 부호 서우순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실패한 동지들과 연루되어 일경(日警)에 붙잡혀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나왔다. 1917년 6월 10일부터 광복회(光復會) 명의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통고문(通告文)을 부자들에게 우송하고 징수하였다. 대한광복회의 회장 박상진의 지령에 의해 1917년 9월 26일 전 경상북도 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였다. 그 후 군자금 모집을 위해 채기중(蔡基仲)이 동년 10월 10일에 조용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 그의 집에서 채기중, 윤창하(尹昌夏, 지보 신풍)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한 경고문(警告文)을 제작하여 부호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부자 장승원(張承遠),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牙山郡道高面長朴容夏) 등을 살해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의 실형 선고를 받고 공주형무소(公州刑務所)에서 옥살이를 겪고 1921년에 풀려나왔다. 즉, 1918년 1월 관련 인사 중 51명이 피체되어 기소된 일명 대한광복회사건(大韓光復會事件)은 경상도 일원 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일경(日警)을 긴장시켰다. 또한 그는 만주와 국내 간에 연락 및 군자금의 제공 등을 하였다. 그는 여러 마지기의 전답(田畓)을 매각하여 도포 한 벌을 해입고 만주에 들어갔다. 남만군정서(南滿軍政署) 독판 이상룡,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동지들과 손을 잡고 재만동포(在滿同胞)들의 생활 안정책을 비롯 독립군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1924년 4월 영남 지방을 무대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띄우고 국내에 돌아와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영남 각처를 두루 다니며 동지들과 만나 뜻을 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보냈다. 그리고 민단조합(民團組合)에도 연결된다. 그러나 그는 일경(日警)에게 수상하게 보여 감시(監視)는 물론 미행까지 당하게 되자 후진들의 애국 교육을 가장하고 지하적으로 활동을 벌였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예비 검속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80 노령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묘는 합개산 해좌(蛤開山亥坐)에 있다.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1977), 애족장(愛族章, 1990)이 추서되었다. [光復會事件 判決文] : 채기중(蔡基仲) 등이 음력 10월 10일 경 피고 조용필에게 도착하여 광복회(光復會)의 목적 내용을 말하고, 각 자산가(資産家)에게 발송할 경고문을 작성하겠으니 첨삭(添削)을 가하여 달라고 의뢰하니, 피고 용필은 즉시 이를 찬동 승락하였다. 피고 기중은 '경고(警告)' 라고 제(題)한 광복회 경북지회 회원 도협만(嶋協萬) 명의로서 '동회(同會)가 국권을 회복할 사유를 설(說)하고 의연금을 출금(出金)하여 동회를 원조하라. 만약 이에 불응할 시에는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기재하고, '다음 난에 금액을 기입하여 출금(出金)할 기한을 정하고, 이 기한을 지날 때에는 군율(軍律)에 의하여 처단할 것이다.'라고 썼다. 피고 용필은 이를 첨삭(添削)하였고, 피고 기중은 피고 윤창하(尹昌夏)와 만나 동회의 목적과 내용을 고하니, 피고 창하는 즉시 이에 찬동하여 동회를 위하여 진력하겠다고 답하였다. 피고 기중의 제의에 의하여 경고문에 찍을 3개의 동회 인장을 조각하였고, 같은 달 18일 경 피고 기중은 피고 유창순(兪昌淳), 창하(昌夏)와 같이 피고 정진화(鄭鎭華)의 산직(山直)이인 동 예천군 풍양면 흔효리 유예천방(劉醴泉房)에 도착하여 피고 진화(鎭華) 및 정세여와 만나 동회의 목적과 내용을 설(說)하고 경고문을 작성키 위하여 왔다는 뜻을 말하고, 조력(助力)을 요구하니 피고 진화는 이를 찬동 승락하였다. 피고 창하(昌夏)는 이미 작성한 경고문에 따라 복사지(複寫紙)를 사용하여 십 수 통의 경고문을 복사하고, 피고 진화는 옆에서 탈자, 오자(誤字)가 없도록 주시하였다. 피고 기중, 창하 양인은 그 경고에 5천원이라고 기입하고, 또 이에 어음과 같은 모양을 의연금 5천원이라고 쓰고, 회인(會印)을 찍어 이를 반으로 끊어 한 쪽을 경고에 붙여 안동군 와룡면(安東郡臥龍面) 안승국 앞으로, 다른 경고도 똑같이 권영욱, 권준 및 기타 십 수 명의 자산가 앞으로 수 천원의 출금액(出金額)을 기입하고 그 이튿날 피고 창순(昌淳)은 이를 함창(咸昌) 및 상주(尙州)의 각 우편함에 투입하여 각인에게 발송하여 이를 통해 공갈하고 또 피고 창하는 계속하여 집에서 같은 경고 십 수 통을 복사하여 피고 기중에게 교부하였다. 그 후 피고 기중은 같은 달 말 경 용필 방에서 피고 김한종과 회합(會合)하여 피고가 발송한 전말을 고하고 안동군 풍서면(豊西面) 가곡리 권준현에 대하여 이미 경고를 발송하였으니 그 집에 가서 지정한 금액을 수취(受取)하여 오라고 의뢰하였다."라고 하였다.(判決文 1918.10.19(公州地方法院) 1919.9.22(京城覆審法院), 獨立運動史(金承學) 下卷 269쪽, 高等警察要史 182 259쪽, 獨立運動史(3) 175쪽,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298쪽) 11卷(674 675 678 690 713 714 722쪽), 大韓獨立運動略史 1980 375-376쪽,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272 665쪽, 韓國獨立史 160쪽, 權大雄 1910年代 慶尙道地方의 獨立運動團體硏究 1993 75-76쪽, 獨立運動史 1177쪽, 醴泉文化 2輯 5輯, 知保面誌 1987)

 

  조용필(趙鏞弼) : 본관(本貫) 함안(咸安), 시대(時代) (1865-1946), 자(字) 여유(汝裕), 호(號) 영은(嶺隱)/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조용필(1865-1946)은 지보면 지보리 부리기 출신으로, 자는 여유(汝裕), 호는 영은(嶺隱), 본관은 함안, 진규(進奎)의 아들이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한일합방(1910)으로 터지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동지를 모았다. 그리고 광복회(1915)에 가입하여, "우리는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왜적을 완전 쫓아내기로 천지신명께 알린다."라고 하면서 선언문을 만들어 발표하고 줄기차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지보면 신풍 사람 윤창하(尹昌夏), 풍양면 우망 사람 정진화(鄭鎭華)와 더불어 자기 집에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인쇄하여 여러 곳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악질 부자였던 칠곡의 장승원을 사살(1917)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을 방해하였던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사살(1918)하였다. 그리고 계룡산, 청송 등지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배신자의 밀고로 동지들과 더불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고등법원에서 3년형의 선고를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겪고 풀려나왔다. 그 후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서 군정서에 들어가 독립군 양성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에도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귀국(1924)하여 경상도를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보냈다. 이러한 행동은 일본 경찰에게 수상하게 보여 감사는 물론 미행까지 당하게 되자, 후진들의 애국 교육에 힘썼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예비 검속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80세의 노령에 이르기까지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해방의 기쁨이 있기 직전인 1945년 3월 26일에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조용필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1977)과 애족장(愛族章, 1990)을 추서하였고, 합개산(蛤開山)의 무덤에 묘비(1984)를 세웠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1)

 

  조용필 : 함안조씨 대구청년회/ 웹문서 | 2년전, 2009년 4월 25일/ 지보면 지보리 학강정(鶴江亭) 언덕에는 애국지사(愛國志士) 조용구(趙鏞九), 애국지사(愛國志士) 조용필(趙鏞弼) 선생의 항일애국비(抗日愛國碑)와 국문학자(國文學者)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선생의 국문학비(國文學碑)가.../ hamancho.com(daum 2011)

 

  조용필 : 함안조씨 선적지(예천지역)./ Daum 카페 | 3년전, 2008년 8월 17일/ 1919년 조용필(趙鏞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Daum 전문자료 | 광복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위해 병기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http://ref.daum.net(daum 2011)

 

  조용필 : 가격비교 - Latest 가격비교/ 웹문서/ 이동하 ...되어 강원·충청·경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6월에 이강년이 잡히자 권병을(權秉乙)·김성추(金聲秋)·조용필(趙鏞弼)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14년 귀국하였다. 이듬해 국권회복을 위한 민단조합(民團組...../ meple.co.kr// 독립운동가 李東下 선생 약기/ Daum 카페 | 9년전, 2002년 5월 28일(daum 2011)

 

  조용필 : 함안조씨 14대- 39- 16 어모공(禦侮公) 조창(趙昌)- 분묘, 묘도비, 학강정.../ Daum 카페 | 3년전, 2008년 9월 22일/ 이 건물은 조창(趙昌)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로 1932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건물 내에는 후손 조용필(趙鏞弼), 조용준(趙鏞俊) 등이 쓴 시판이 걸려 있다. 건축 구성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cafe.daum.net/ | 함안조씨 역사연구회// 국가지식포털 - 요약정보 - 학강정(鶴江亭)(daum 2011)

 

  조용필 : 국가지식포털 | 3년전, 2008년 12월 20일/ 驛 폐지 후 공문 수송 등에 7개월간 동원된 대가를 지급해 주도록.../ 간행물/ 梁星一 全之元 梁致元 金元九 具龍業 趙在文 趙鏞弼 金成中趙更已等 配附 驛遞所 局課 農商工部大臣 閤下/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1)

 

  조용필 : 국가기록원 - 독립 운동 관련 판결문 컬렉션/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포털 | 2년전, 2009년 7월 14일/ ...지르도록 역할을 담당하여 동일 일몰 후 결행 살해하였고, 第三. 동년 10월 중 피고 채기중은 피고 조용필(趙鏞弼) 집에서 광복회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자산가 앞으로 가짜문인을 기재한 문서를 작성하고 피고 윤창하(尹昌夏.../ contents.archives.go.kr(daum 2011)

 

  조용필 : 우리가문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이동하)/ Daum 카페 | 8년전, 2003년 1월 4일/ 강원도 영월에 피신해 있다가 의병투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권병을(權秉乙)·김성추(金聲秋)·조용필(趙鏞弼)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9월 귀국한 뒤 옛 의병동지인 이은영(李殷榮)·김낙문(金洛文)·최욱영.../ cafe.daum.net/gwangjulee/| 광주이씨방(daum 2011)

 

  조용필 : 네이트 한국학 | 2년전, 2009년 7월 16일/ 1895년 결세를 영구히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한 용궁군 지보역민의 소장과.../ 간행물/ 梁在祚 具龍云 趙戊出 趙鏞弼 金鳳觀 朴允成 趙七英 魏達俊 梁英云 梁致洙 趙元出 趙奉出 全之元 梁敬成 趙更已等 配附 驛遞所 局課 農商工部大臣 閤下/ http://ref.daum.net/item/| 국가지식포털(daum 2011)

 

  조용필 : 대한광복단/ 웹문서/ ...) 조백영(趙伯永) 조봉하(趙鳳夏) 조선환(曺善煥) 조성일(曺聖一) 조승태(曺承兌) 조용승(趙鏞昇) 조용필(趙鏞弼) 조유헌(曹裕軒) 조인혁(曹寅爀) 조재하(趙在夏) 조재화(趙載和) 조종철(趙種哲) 조현균(趙賢均) 주진수(朱鎭洙.../ www.kwangbokdan.com(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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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인(曺友仁) : 1561(명종 16)-1625(인조 3), 개포면 경진리(蘆浦) 사람,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또는 이재(頤齋, 怡齋), 현남(峴南), 청로(聽로), 본관은 창녕, 우부승지 계형(右副承旨繼衡)의 증손, 전력 부위(展力副尉) 몽신(夢臣, 後 承政院左承旨)의 아들, 순인(純仁)ㆍ희인(希仁, 1578生, 字汝善, 生員, 文科)의 형, 하연 이중량(賀淵李仲樑)의 사위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88년(선조 21) 식년 진사시에 2등 10위로 합격,  천거로 참봉(參奉)을 지낸 뒤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경성 판관(鏡城判官, 1616)이 되었다가 제술관(製述官, 1621)으로 상경하여 고궁(古宮)이 황적 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 일장(感懷一章)의 시를 지은 것이 백대연(白大衍) 등 이이첨(李爾瞻) 일당에 의해 광해군(光海君)을 풍자(諷刺)한 대역(大逆)의 뜻이 있다고 무고(誣告)를 받아 옥에 갇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풀려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까지 올랐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여 3절(三絶)로 불렀고, 글씨는 진체(晋體)와 초서(草書)에 뛰어났고, 진초중체(眞草衆體)를 구비하고 회사(繪事)에 능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음률(音律)도 잘 했다. 묘는 개포면 우감리우감산(牛甘山)에 있다. 예천군 다인현 봉산서원(多仁縣鳳山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가사집(歌辭集)인 <이재영언(이齋詠言)> 속에 '매호별곡(梅湖別曲, 1622)', '자도사(自悼詞, 1622)',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1622)' '출새곡(出塞曲, 1616)' 등네 편이 실려 있고, 문집인 <매호집(梅湖集)> 4권이 있다. 고경식(高敬植)은 <국어국문학(國語國文學)> 제236호 논문에서 조선조 가사 작가의 계보(系譜)를, 정극인(丁克仁)→송순(宋純)→백광홍(白光弘, 關西)→정철(鄭澈, 關東別曲)→조우인(曺友仁, 續關東別曲)으로 설정하고 있다. [梅湖別曲] : 만년(晩年)에 상주 매호(尙州梅湖)에서 자연을 벗삼아 생활할 때의 정경(情景)을 읊은 가사(歌辭)이다. 가사의 첫 부분을 보면, "명시(明時)에 바린 몸이, 물외(物外)에 누어더니, 갑 업산 풍월과 임재 업산 강산을 조물(造物)이 허사(許賜)하야, 날을 맛겨 보리시니, 뉘라 사양하며 닷토리 뉘이시리"이다. [續關東別曲] : 송강 정철(松江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속편(續編)으로 지은 가사라 자처하여 정철이 닿지 못한 곳에 언급하고 정철이 언급한 곳과는 중복을 피했다. 본문의 처음 부분은, "사선(四仙)의 노던 따흘 관동(關東)이 긔라호대, 진애 반생(塵埃半生)애 세월이 거의러니, 물외 연하(物外煙霞)에 원흥(遠興)이 뵈아나니, 심진행리(尋眞行李)난 전나굇 뿐이로다. 무안사(武安寺) 디나 올라 승학교(乘鶴橋) 건너 들어, 진환(塵환)이 점점 멀어 선경(仙境)이 가깝건가.. ." [自悼詞] : 옥중에서 쓴 가사인 듯, 임금과 신하 사이가 벌어졌다 어울렸다 하는 관계와 임금에 대한 연모(戀慕)의 정을 읊은 것인데,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수법(手法)이 비슷하다. 첫 부분을 보면,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께 태나시니, 삼생 결연(三生結緣)이오, 지은 마음 안녀이다. 내 얼골 내 못보니, 보암즉다. 할가마난 밋낫치 곱고 밉고 삼긴 때로 진혀이셔, 연지 백분(白粉)도 쓸 줄을 모르거든, 호치 단순(皓齒丹脣)을 무엇노라 하리잇가"이다. [出塞曲] : 1616년(광해군 8),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부임한 후 지은 가사로, 서울을 떠나 한 달 남짓 여행 끝에 임지에 닿기까지의 인정, 풍물과 5년 동안의 임지 생활 및 울적한 심정을 읊은 가사이다.(國朝人物考, 澤堂集,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醴泉郡誌 1939, 韓國文學大辭典 1981 904-905쪽, 韓國文學史(張德順) 264 499쪽, 韓國人의 姓譜)

 

  조우인(曺友仁) : 조선(朝鮮) 시대(時代) 14대 선조(宣祖) 때의 문신(文臣). 자는 여익(汝益), 매호(梅湖)ㆍ이재(頤齋). 경북(慶北) 예천(醴泉) 출신(出身).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시(詩)를 잘했음. 14대 선조(宣祖) 21년(1588)에 진사시(進士試), 선조(宣祖) 38년(1605)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음. 15대 광해주(光海主) 때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무함(誣陷)으로 옥에 갖힌 바 있었음. 『매호별곡(梅湖別曲)』 『자도사(自悼詞)』 등(等) 2편의 가사(歌辭)가 필사본(筆寫本)으로 전(傳)함(daum 2011)

 

  조우인 : 조우인[ 曺友仁 ]/ 작년, 2010년 5월 21일/ 조우인[ 曺友仁 ] 1561(명종 16)∼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齋). 경상도 예천 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자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cafe.daum.net/hanryupower1/ 한류문예(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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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문화원, <예천문화> 제24권 발간,,,축하합니다.

 

  예천문화 제24권(醴泉文化 제24권) [冊] : 예천문화편집위원회에서 편집한 책으로, 249쪽, 사진, 도표, 26cm, 서울 예일출판사에 인쇄하여 예천문화원(원장 김종배)에서 2012년 2월에 발행하였다. 목차는 문예중흥선언/ 예천군의 상징/ 2011 예천문화/ 발간사(예천문화원장 김종배) =12/ 축간사(예천군수 이현준) =13/ 축간사(예천군의회 의장 김영규) =14/ <내 고장 문화와 역사> 醴泉地方 古典籍 考察(윤동원) =19/ 忠孝의 고장 약포 鄭琢과 야계 都始復(홍승수) =33/ <문화진단> 更張의 時宜에 應하다(서교송) =43/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도전정신에 국가 지명도와 경제력 성장도 한몫(박성희) =55/ <역사기행> 임진왜란 피난 생활에 대한 생생한 증언-쇄미록(신병주) =63/ 분청사기를 바라보는 눈(전승창) =67/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과 의궤 번역의 필요성(신병주) =74/ 금당실 아흔아홉 칸 대궐 같은 집의 옛 주인을 찾아서(김대진) =77/ <생활속의 예절> 생활속의 예절(예천문화원) =83/ <한국의 민속> 죽음의례와 놀이(김창일) =99/ 옛이야기에 나타난 업신(조선영) =102/ 産神의 성격에 따른 禁忌(백민영) =105/  <예천문원> 시/ 草澗亭(김영진) =111/ 매미들의 合唱 외 1편(杏村 權泰漢) =112/ 내성천아 말하라 외 1편(임만기) =115/ 쌍계사(1) 외 1편(권오휘) =119/ 무지개 외 1편(여도현) =121/ 한시/ 원 학교교육 정상화 외 1편(장병국) =123/ 수필/ 건전생활 풍토 조성을 위한 강연회(김종배) =125/ 예천의 초간정에서(김영진) =132/ 소 죽 쑤는 할아버지(장경자) =134/ 도보여행 활성화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최인호) =137/ 지구를 되살리자(최병원) =143/ 경인 아라뱃길이 열린다(최병원) =145/ 崇禮門(김병구) =147/ 끝나지 않은 간절한 울림, 소파 방정환(민윤식) =149/ 독도, 1,500년의 역사를 만나다(유하영) =153/ 황포군관학교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김근제(한상도) =158/ 아리랑의 문화작업, 어떻게 해야 하나?(강등학) =163/ 사진자료의 의미와 정리(김종태) =166/ 조선시대 관청이야기(이숙희) =168/ 역사교육과 문화유산 교육(최용규) =174/ 용의 기상처럼 변화하는 예천 문화관광(이인숙) =178/ 좋았던 옛날, 시집가지 않고 장가들던 그때(정성희) =182/ 生生한 마을 구암 팜스테이 마을을 찾아(이병준) =187/ 황대포(황태섭) =191/ 동의보감 : 질병이 선물한 ‘지혜의 인드라망’(고미숙) =194/ 34회 예천문화제 백일장 입상작/ 유·초·중·고등부 -운문, 산문=199/ 유·초·중·고등부 -그리기, 서예 =221/ 제34회 예천문화제 백일장 수상자 명단 =237/ 주소록/ 예천문화원 조직도 =245/ 임원명부 =246/ 예천문화원 운영위원 명단 =247/ 예천향토문화연구회 회원명부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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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832

 

  예천군 방문(서울 구로구 마을企業 關係者 醴泉 訪問) [記事] : 서울 구로구 마을기업 관계자 45명이 2012년 3월 22일 예천군 사회적기업인 자활보호센터를 찾아 벤치마킹하고 메주마을의 된장과 예천참우 예천순대를 맛보고 회룡포와 삼강주막을 둘러보며 자매도시의 따뜻한 정을 담아 돌아갔다. 이날 예천군 정기채 부군수는 예천군을 찾은 자매도시 구로구 마을기업 관계자들을 환영하고 예천군을 소개한 뒤 2012 곤충 바이오 엑스포를 홍보하고 참여를 부탁하였다. 마을기업 대표와 신도림 동장 등은 예천참우가 맛이 뛰어나고 가격이 저렴하여 마을 기업과 함께 하기를 희망했다. 이들은 4백50만원 상당의 예천참우와 용궁순대, 된장 등을 사 갔다. 예천군은 앞으로 구로구 마을기업에 예천 농·특산물 판매장을 개장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醴泉新聞 2012년 03월 27일 (화) 11:21:45)

 

  회룡포(醴泉 回龍浦 ,‘2012年 寫眞 찍기 좋은 綠色名所’에 選定 : 周邊의 風光이 한 幅의 風景畵를 聯想하게 해) [記事] : 예천 ‘회룡포’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2년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에 선정됐다. 이번 선정은 ‘회룡포’가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 마을로써 내성천 물줄기가 350도를 휘감아 돌고 금방이라도 육지에서 뚝 떨어져 나올 듯 강줄기 속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절경인 이유에서다. 또 주변에는 맑은 물과 눈부신 백사장,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뿅뿅다리가 있어 동심을 불러일으키고, 해발 190m의 비룡산 중턱에는 천년고찰 장안사와 등산로가 이어져 있는 등 주변의 풍광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하게 된다. 특히, 비룡산 중턱의 회룡대에 서면 회룡포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전체 조망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등 사진 찍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한편 군은 이곳이 올해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돼 전국의 사진 애호가가 많이 찾을 것으로 보고 사업비 8,000만원을 투입, 시설을 보완키로 했다. 회룡대 아래 기존 전망대를 확장하고 새로이 포토존(phone zone)을 설치하는 한편, 주민 편의를 위해 진입로를 말끔히 개선할 계획이다. 이번 사업이 완료되면 회룡포 조망권이 향상되고 사진작가 및 관광객의 수용 규모가 늘어나 회룡포의 홍보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이번에 선정된 명소는 전국 25개소 중 경북에는 5개소로 경북예천 회룡포 △경주시 감포읍 △칠곡군 자고산 △울진군 원남면 △울릉군 북면이 그곳이다.(醴泉뉴스 2012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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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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