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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872) : 조의양(동추)(2)(附 이현준 예천군수, 30일 상이군경회 중앙회장 감사패 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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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양(趙宜陽) : (1719~1807, 숙종45~순조7), 한양인(漢陽人), 자(字) 의경(義卿), 호(號) 오죽재(梧竹齋), 거(居) 예천(醴泉) 오향(梧香), 원익(元益)의 자(子)로 이광정(李光庭), 이수연(李守淵)의 문인이다. 177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출사(出仕)에 뜻을 끊고 경사(經史)에 열중하였다. 부친(父親) 정헌공(正憲公)이 84세이 사마시에 합격, 형제사인(兄弟四人)이 청백수삼(白首淸衫)하니 향내가 칭송(稱頌)하였고 향산동(香山洞) 봉황성(鳳凰城)아래 람덕일(覽德壹)와 오죽재(梧竹齋)를 지어 자호(自號)로 편액하여 후진교육에 전력하였으며 1794년 조정에서 경사가 있어 왕의 특명(特命)으로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문집(文集) 6권3책이 전하며 이 글은 부친(父親)에게 보낸 편지이다.(daum 2011)
조의양(趙宜陽)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47년 (177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9위/ [인적사항] 자 의경(毅卿), 생년 기해(己亥) 1719년, 합격연령 53세, 본관 한양(漢陽), 거주지 안동(安東 甘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과목 일의(一義)/ [가족사항] [부] 성명 : 조원익(趙元益),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제] 조몽양(趙夢陽)/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1)
조의양 : 梧竹齋文集/ 趙宜陽 (1719∼1807) : 字 義卿, 號 梧竹齋, 本貫 漢陽./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6卷3冊 ; 31.4x21.2cm./ 四周單邊. 半匡 ; 22x15.3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조의양의 시문집이다. 조의양은 원익(元翼)의 아들로 예천 사람이다. 선생은 이광정(李光庭)을 찾아 경사(經史)를 같이 강론함을 좋아하였고 또 이수연(李守淵)을 사사하여 1771(영조 47)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부친이 84세인데 형제 4인이 자수청삼(自首靑衫)으로 즐기니 향리가 환영했다. 조정에 경사가 있어서 진수성찬을 차리니 임금이 특명으로 첨추를 명하였고 1807년 가선동추(嘉善同樞)에 특승(特陞)하였다 하므로 박물군자(博物君子)라는 말도 들었다. 향산동(香山洞) 봉황성(鳳凰城)에 오죽재(梧竹齋)를 지어 자호로 삼았다. 이 문집은 1914년 현손 태경(泰敬)이 편집, 간행하였다. 사(辭)의 「칠통사(七通辭)」는 이광정(李光庭)을 추모하는 뜻에서 대화형식을 취하여 지었다. 시(詩)는 주로 고체인 한위체(漢魏體)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장편이 많다. 특히 [잉족백운시정이간옹몽서헌경(仍足百韻詩呈李艮翁夢瑞獻慶)]은 100운시로 1,400자나 되는 대작이다. 부(賦)에는 「백록동(白鹿洞)」,「감춘(感春)」,「공동(空同)」등이 있다. 「온계이선생청익소(溫溪李先生請謚疏)」는 이황의 형인 이해(李瀣)의 시호를 청하는 소(疏)로, 정경에 오르지 못한 사람으로 시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도학(道學), 훈노(勳勞), 명절(名節) 등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이 3조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정경에 추증까지 되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또 「제독서실학령(題讀書室學令)」은 중형 보양(普陽)의 서재 벽에 써 붙인 것으로 공부하는 차례는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를 취하였고 학령은 따로 만들었다. 이 문집은 고시(古詩)와 악부(樂府)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序 ; 柳必永./ 目錄/ 卷之 1. 辭(七通)./ 詩(148首)./ 卷之 2. 詩(34首), 挽./ 卷之 3. 賦 ; 白鹿洞賦, 感春賦, 空同賦, 琴操賦, 招隱操賦./ 詩(201首)./ 卷之 4. 詩(211首)./ 卷之 5. 書 ; 與李尙之, 上大人, 上鈍巖伯兄, 上八友仲兄(2), 與李琶西, 答金○, 與柳壻(萬休)(2), 與外孫柳炳文, 與外孫炳文徽文(2)./ 疏 ; 溫溪李先生請謚./ 記 ; 山谷南平草堂./ 序 ; 贈安斯文宜庵./ 識 ; 君子塘記後, 宋處士傳後, 忍齋遺稿後, ?華亭十二詠後, 丁海左柴桑孤山圖後, 劉景圭南北擄行錄後, 養閒錄後./ 說 ; 艮翁說./ 銘 ; 潛室銘./ 雜著 ; 題讀書室學令./ 祭文 ; 三烈士書院告由文, 祭權仙溪(墉), 祭八友仲兄, 祭權子和(燮), 祭上舍弟夢陽, 祭亡室 祭贈貞夫人永陽李氏, 祭柳壻萬休, 祭姪勖, 祭姪集, 祭權君命新./ 行狀 ; 伯兄鈍巖公, 伯兄八友軒公, 通德郞安公(聖復)./ 遺事 ; 祖?貞夫人豊山柳氏, 先?貞夫人宣城李氏./ 行略 ; 三兄處士公, 從孫顯洙, 權君命新./ 墓誌銘 ; 淑夫人永川李氏./ 卷之 6. 附錄 ; 行狀, 墓碣銘, 輓詞(15), 祭文(4)./ 跋 ; 宋啓欽.(daum 2011)
조의양 : 오죽재집(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趙宜陽의 玄孫인 敬泰가 조의양의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10行 20字 상 중 하 3冊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柳必永이 序文을 썼고, 宋啓欽이 跋文을 썼다. 趙宜陽이 생전에 詩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 까닭에 문집에는 詩가 많았고, 특히 주자와 퇴계의 詩에 次韻한 것이 많았다. 시는 주로 고시체인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편이 많다. 특히 [仍足百韻 詩呈李艮翁夢瑞獻慶]은 1,400字나 되는 대작이며, 賦에는 [白鹿洞賦] [感春賦] [空洞賦]가 있다. 이 문집은 古詩와 樂府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daum 2011)
조의양 : 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조의양(趙宜陽) : 1719~1808(숙종 45~순조 8). 字:義卿, 號:梧竹齋,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 李氏, 居:安東(甘泉)./ 趙宜陽은 正憲大夫로서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趙元益과 李基晩의 딸 사이에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學才가 있어 글을 많이 읽었으나 목이 붓는 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장성하여 訥隱 李光庭를 찾아 뵙고 詩에 관하여 깊이 배웠다. 또 後村 李守淵에게 師事하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공은 이 시험에 額外로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많은 독서를 하였다.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설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梧竹齋集 내용 개요/ 序文(1914) : 著者 趙宜陽의 사승관계, 교유관계, 그리고 문학적 위치를 서술하였다. 스승인 李光庭은 著者에게 漢魏體의 시풍을 가르쳤고, 李夢瑞는 자신과 著者를 李白과 杜甫의 관계로 대하였다. 詩를 모르는 사람도 이 사실을 미루어 著者의 문학적 비중을 알 것이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를 흠모하여 많은 詩를 차운하여 남겼으니, 후세 이 문집을 읽는 사람은 著者가 詩외에 道를 깨달았음도 알게 될 것이다. 西坡 柳必永(1841~1924)이 썼다./ 卷1 칠통 七通 : 漢나라 사람인 枚乘이 [七發]을 지었고, 張景陽이 [七命]을 지었으며, 陳思王이 [七啓]를 지었고, 著者의 스승인 李光庭도 [七篇]을 지었다. 著者는 病中에 七章을 지었으나 탈고에 이르지 못하다가, 꿈속에서 스승을 만나고 나서 감회에 젖어 추모하는 심정으로 일곱 통의 賦를 지었다./ 추풍구첩사(소서) 秋風九疊辭(小序) : 秋聲은 천지자연의 법칙이다. 六律六呂의 기본음인 黃鍾은 九寸을 기본으로 하고, 舜임금의 음악인 韶는 九成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屈原은 [九歌]를 지었고 宋玉은 [九辨]을 지었다. 九는 陽數 가운데 가장 큰 것이고 극단에 이르면 변하는 것은 자연의 이법이다. 宋나라 시인인 邢居實은 [秋風三疊辭]를 짓고 가을의 풍취를 다하였다고 했는데, 著者는 그것을 적다고 여기고 [秋風九疊辭]를 지었다./
시 詩 : 擬杜草堂長篇, 登高丘望遠海, 遠別離, 效李白公無渡河, 效古贈丁海左(範祖), 淸凉山, 題申天若(命欽)鶴巢洞茅堂(其先祖按廉使古里), 過金籠巖(澍)朴松堂(英)古里有感, 過義狗塚, 砥柱碑下問香娘所自沈淵, 過金烏山憶冶隱吉先生, 陜川大野城過竹竹廟, 登涵碧樓, 登矗石樓, 次申靑泉(維翰)韻, 回至矗石樓次李仲함(詠義巖韻), 南江, 楡谷待李仲함不至, 次朴丈(師赫)紫皐堂八詠, 贈李實甫(英徵), 龍華山下道興津爲述寒岡旅軒忘憂堂諸先生泛舟故事, 望伽倻山憶崔孤雲, 紅流洞次崔孤雲韻, 讀太極西銘有感, 鄭藥圃先生(琢)神道碑, 淸心臺(尹別洞先生逍遙之地), 中夜見窓月有感, 登洪杜谷玉溜亭, 文山詞, 伏갱御題樊巖詩稿韻呈相公案下, 次樊巖蔡相公(濟恭)金剛山歇惺樓韻, 靑松歸路訪瓢隱遺墟登仙遊亭(1754), 夢遊島潭(1762), 夢遊泰山, 兒時夢遊洞庭湖微月掛斑竹枝四邊商歌互答覺來窓虛蟾壁畵隱如向來景至今老壯爽氣沁肺(三首), 南征, 黃山碑殿, 渡錦江, 方丈山, 蟠桃館(南原), 呈丁海左, 上俗離山雲莊臺, 贈萬頃姪(錫晦), 湖南歸路有感, 知禮縣龍洲先生淸德碑(縣有李五峯芳草亭先生遊行之所), 吉先生採薇亭, 東都懷古(1771), 東都與南上舍鵬路李上舍士寬同遊, 送冬至使赴北京, 宿開元寺, 東武吟, 詠懷, 次立春韻贈菊潭, 過果川, 過新溪驛, 過水原憶權公(廷吉), 呈李于鱗(甲龍, 1783), 次朴參判大人(良佐)韻, 過弄淸臺有感, 天柱峯, 草澗, 贈金抱려(翼景), 覽德臺, 鳳山, 和權江左翁(萬)淸凉山月歌, 栢潭, 三山亭, 廬江養浩樓次朱元兆詩, 贈金道彦(宗德)直夫(宗敬), 懷柳士極(규), 七月旣望次讀書洞落成韻呈八友兄, 呈李丈(命天)蔚玧匪所, 呈丁海左, 賦伐木三章贈南上舍活山老人(居慶州), 贈李琶西(集斗), 戊申元朝感吟(1788), 廬江會校講錄刊補歸次龜溪韻奉寄李學甫柳叔遠柳養直(浩源)李命吉(弘天), 奉贈李錦淵翁(植春), 奉贈尹雪園, 與李臥雪(尙慶)聯句, 西湖(時湖樓漂後未及重建), 洪武皇帝節義旗, 臨淸閣贈山甫君輔琢之和甫(1769), 贈外孫柳炳文, 喜外孫柳徽文講濂洛風雅, 雨中見(집)姪來, 鴻峴遇金潤秋借參同契二冊, 贈城谷子, 伏次家大人壽陞正憲追榮焚黃時賀韻, 次山陽焚黃慶席韻, 追次체華亭十二詠韻, 謹次八友兄書室雜詠韻, 夜坐獨吟, 伏呈八友兄, 仍足百韻詩呈李艮翁夢瑞(獻慶), 邂逅趙君善問扶桑事不覺日域森然在目, 文忠公墓수碣日歸路遇雨, 次柳柳州(풍)寫麗史彙纂五年字韻, 閱八友兄遺稿문淚而題, 呈李琶西(集斗), 慕古逸人, 영懷, 次孟浩然除夕韻, 次李君輔步蘇集례臺詩韻, 花山道中與權而輯(睦)賦州字, 醴泉東岳寺, 龍門寺送權恭甫, 贈龍門寺僧, 閒居, 山村春日, 追和黃聖徵(炳漢)南遊韻, 寄題金公望(象九)新居, 贈申執玉(履相), 懷李上舍龍舒沈上舍鳳錫安上舍有常, 次李重維大人重牢宴賀韻, 孫신신蕃而盛德人食報膺餘慶./
卷2/ 시 詩 : 輓訥隱李先生, 輓懶拙齋李先生, 輓權仙溪(墉), 輓鄭琢之(璞), 輓李參奉(重光), 輓李仲華(重實), 輓李若天(象辰), 輓金渴睡軒(위), 輓權繩軒(濤), 輓金德翁(象동), 輓李晩花軒(世師), 輓柳叔文(道源), 輓李君輔(尙慶), 輓南忍窩(大萬), 輓李子明(級), 輓松泉權丈(灝), 輓丁成之(志宬), 輓李四一(龜元), 輓蔡進士(湜), 輓承宣姪(錫晦), 輓柳昌甫(明休), 輓全伊堂(得濂), 輓柳德逸(日休), 輓李僉樞(栖), 輓李孟仁(孝慶), 輓柳汝遠(弘源), 哭柳壻(萬休), 輓權上舍(馨復), 輓柳漢卿(宗文), 哀從孫上舍(縣귀), 輓裵季珍(집), 聞柳女入地寄哀(1806), 哀君美姪(題此輓數朔後公歿), 輓權君(昌植)./ 卷3/ 부(주자시부차운) 賦(朱子詩賦次韻)/ 백록동부, 감춘부, 공동부 白鹿洞賦, 感春賦, 空同賦./ 금조 琴操/ 초은조 招隱操/ 시 詩 : 遠遊篇, 邵武道中, 友人黃子衡欲之上庠以詩留行, 奉酬丘子野表兄飮酒之句, 古意, 晨起對雨, 殘臘, 夜聞子規, 杜門, 宿山寺, 晨登雲際寺, 池上示同遊者, 宿운당鋪, 齋居閒磬, 又聞琴作, 讀道書作(六首), 秋夜懷子厚, 川上見月歸示同行者, 冬日(二首), 懷友, 寄山中舊知, 試院雜詩, 八月七日夜月, 夢山中故人, 南安道中, 九日, 再至作, 苧溪道中, 夜雨, 寄題金元鼎同年長泰面山亭, 梅花兩絶, 宿傳舍見月, 涉澗水作, 祠事齋居聽雨呈劉子晉, 之德化宿劇頭鋪夜聞杜宇, 次旬父韻, 次祝澤之表兄韻, 小盈道中, 對月思故山野景, 梵天寺觀雨, 秋暑, 和李伯玉蘇東坡梅花韻, 和劉抱一, 再和, 梅花開盡未及吟賞仰貽同好, 困學, 復齋, 克己, 春日, 示西林院惟可師, 感事, 次子有聞捷韻, 偶題, 次張彦輔賞梅韻, 家山堂晩照效輞川體, 次劉丈秀野閑居十五詠(只謄八首), 秀野劉丈寄示南昌諸詩和此兩篇, 次秀野韻, 留秀野劉丈, 又和秀野, 次秀野極目亭韻, 次亭字詩呈秀野兼簡王宰, 次秀野滄波觀至赤石觀刈早稻, 次題臥雲巖, 和秀野見留之作, 次韻寄題芙거館, 葺居, 次張敬夫登定王臺韻, 馬上口占次敬夫, 登山有作次敬夫, 後洞山口晩賦, 霜月次林擇之, 方廣寺睡覺次敬夫, 石름峰次敬夫, 至上封用擇之韻, 贈上封諸老, 醉下祝融峯作, 宿梅溪胡氏客館觀壁上題詩自警, 次擇之韻聊記秦事, 雪梅二결奉懷敬夫, 次韻擇之見路傍亂草有感, 野人家, 西山嶽麓莫能上下聊賦, 進賢道中, 野望, 次擇之宿進賢客舍韻, 安仁曉行, 有懷南軒呈伯崇, 九日登天湖以菊花須揷滿頭歸分韻得歸, 和人游西巖, 題周氏雪亭, 送林擇之還鄕赴選, 擇之誦所賦擬呂子進元宵韻, 擇之寄示深鄕唱和鳥石南湖佳句輒次, 送林熙之, 次淸湍亭韻, 次圭甫將軍巖韻, 次彦集經營別墅之作, 奉酬圭父茉莉之作, 次圭父觀魚韻, 再題吳公濟風泉亭, 寄公濟兼簡李伯諫, 公濟和詩見悶耽書勉以敎外之樂以詩問, 伯諫和詩(邢色규解方漫漫, 是中正氣愈침침)此乃從心之妙云, 百丈山六詠, 九月六日早發潭溪夜登雲谷翌朝賦此, 雲谷二十六詠, 送許順之南歸, 宿雲際寺別許順之, 彦集奉檄歸省, 寄題宜春使君張定수隱齋, 日用自警示平父, 唐石雪中, 宿休菴用德功壁閒韻贈陳道人, 壬子三月二十七日聞迅雷有感, 崇安客舍聞子規聲得三絶句呈平父, 寄雲谷瑞泉庵主, 屢欲賦廬阜而不就六月中臥龍庵偶成詩, 讀李賓老玉澗詩偶成, 九日陪, 次卜掌書落成白鹿, 白鹿講會次卜掌韻, 和張彦輔初到南康之句, 和張彦輔落星寺之作, 次張彦輔臥龍之作, 和張雪後棲賢之作, 次沈侍郞遊楞迦李氏山房韻, 閏十一月中坐彭려門喚船與諸人共載汎湖至堤首回棹入西灣還分韻賦詩, 和林擇之黃雲之句兼簡同遊, 和彭려月夜汎舟落星湖, 讀子厚詩用其卒章晨起之韻, 登蘆峯, 五禽言和王仲衡尙書, 遊密庵分韻得淸字, 次寄萬頃寒光奉呈休齋先生, 用林擇之韻別陳休齋, 和林擇之鳳凰山韻, 承侍郞使君示所與少傳西湖佳句, 伏蒙侍郞示及致政少傳送行長句, 伏讀致政少傳相公送趙成都韻次餞, 次劉正之芙蓉韻, 淳熙甲辰中春精舍閒居作武夷櫂歌, 劉子澄遠寄羊구有懷仁輔義語以謝兩絶, 答袁機仲論啓蒙, 懷潭溪舊居, 聞 , 延平水南天慶觀夜作, 墨梅, 戱作楊廷秀問訊離騷之作,진韻, 次晦叔寄弟韻, 蘭, 水口行舟, 易, 客來, 秋日, 放船.
악부 樂府/ 수조가, 차원기중운 水調歌, 次袁機仲韻./ 발 跋:趙宜陽이 朱子 詩에 次韻을 시작한 것은 1792년 11월 27일이고, 다음 해인 1793년 1월 16일에 완성되었다. 조의양은 주자 시 차운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우레 소리를 듣고 시를 짓는 경우, 주자는 천하를 담당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군왕의 웅대한 결단을 읊었고, 자신은 산림에 뜻을 두었으므로 時運의 회복을 읊었고 따라서 대상은 같아도 소감은 다르다는 것이다. 주자가 죽은지 5백여년이 지나, 당시는 육왕학이 천하를 뒤덮고 西學도 점차 밀려오고 있어 뜻있는 선비들은 근심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海東의 주자는 바로 退溪이며, 퇴계를 앙모하는 심정으로 주자 시에 차운하였다고 하였다. 1793년에 趙宜陽이 썼다./ 卷4 / 시(퇴계선생시차운) 詩(退溪先生詩次韻)/ 過吉先生閭, 矗石樓(用龍蛇事), 臨風樓(七夕), 感春, 雨留新蕃縣, 義州雜詠十二絶, 聚勝亭韻奉別聖節使洪公春卿, 讀東史, 南樓壁上六言四韻, 九月七日午憩臨津亭, 泰安曉行憶溫溪先生, 宿淸風寒碧樓, 湖上園亭效康節體, 錦江亭, 晩步次明陽正賢孫韻, 夜起有感, 晨至溪莊用東坡新城途中韻, 和西林院詩韻, 七臺三曲詩, 閒讀武夷志次九曲櫂歌十首, 古意, 白雲洞書院示諸生韻, 退溪, 寒樓, 和陶集移居韻(二首), 和陶集飮酒(二十首), 東齋感事(十絶), 林居十五詠, 陶山雜詠十八絶, 二十六絶(逐題又有四言詩一章), 愛閒, 養靜, 焚香, 次金芝山(八元)見寄韻, 贈李龜巖(楨), 秋日獨至陶舍得趙月川(穆)韻遣懷, 韓上舍永叔(江墅十景), 郭侯景靜(求題山水畵幅(五絶), 端居, 竹嶺道中遇雨, 洛東觀水樓, 暎湖樓, 送李義州(潤慶)韻, 全義縣山谷行遇飢民, 自春川向楊口皆崖路傍江峽束眞奇景, 水仁驛, 湖上園亭次山谷韻, 竹山途中, 三嘉雙明軒, 題山水圖, 七月望日狎鷗亭卽事, 醉題狎鷗亭, 鳥嶺道中, 龍宮浮翠樓, 偶成六言, 周書武陵贈陸淸山人詩卷後, 次男(應龍)見贈韻, 三智灘, 都土潭, 乃邁潭, 花灘, 龜潭, 長會灘, 次金季珍(彦거)見寄韻, 景濂亭, 順興途中, 郡齋早起, 雙淸堂月夜, 次東軒韻求和金季珍, 聚遠樓, 春寒, 閒居次月川栢潭芝山酬唱韻, 溪居早春, 次山谷韻贈郭右曺, 自燕子院向所峴馬上卽事, 濯淸亭示主人, 書季任倦遊錄後, 次安陰舊題韻, 次尙州見和韻, 霞고小亭名以수石山奇水麗, 二十三日, 復次商山見和韻, 次金季珍遊邊山諸作韻, 實相寺南溪, 直淵瀑布, 摩天臺, 用東坡韻酬道中遇雪見寄詩, 次韻答李公幹(賀淵其號), 遊枕流亭(在烏川下洛水上), 三月四日聾巖先生臨溪堂, 寄趙松岡, 錦溪詠竹, 贈別閔景說參議赴燕京, 次友人韻, 次金厚之爲金季珍漆溪十詠韻, 偶題, 次松岡見贈韻, 又次, 韓士炯(胤明)往天磨山讀書留一帖求和偶書所感寄贈, 宋秋派(麒壽)雪中見訪云夢中得句相思成鬱結幽恨寄瑤琴覺而足四韻示之次韻, 宋企村(純)면仰亭, 次錦溪新寧韻, 贈錦溪論圖書, 奉別南時甫, 晦日夜吟次金應順(命元)韻, 寄島潭李而盛, 九月二十九日溪堂卽事, 山中偶書, 枕流亭, 次韻寄題松江亭, 竹溪書院, 白鹿樂而康, 臨고書院(永川), 藍溪書院(咸陽), 伊山書院(榮川), 總論書院, 偶成(五絶只謄三絶), 十八日風雨, 寄題淸遠亭, 月瀾臺, 考槃臺, 凝思臺, 郞영臺, 凌雲臺, 禦風臺, 再訪陶山梅(十絶只謄五絶).
卷5/ 여이상지 與李尙之 : 山陰에서 文會가 있었음을 말하고, 그 자리에 朱子書 1질을 가지고 가서 講討하였음을 말하였다. 또한 그 자리에는 權季善과 李斐彦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의 筆力이 대단하여 江左의 사림이 쓸쓸하지 않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 상대인 上大人 : 趙宜陽이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아버지 趙元益에게 보낸 편지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이 표현되어 있다./ 상둔암백형 上鈍巖伯兄(1772) : 伯氏인 葵陽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선대부가 더해졌고 이에 따라 동지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선조인 병조판서공의 음덕이 컸음을 말하면서,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를 말하였다. 다만 편지에 표기된 간지를 계산해 보면, 행장에 표기되어 있는 연도와 차이가 있어 간지 표기에 착오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상팔우중형 上八友仲兄(1773) : 숙질간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것을 함께 축하하는 편지이다. 1773년(영조 49)에 仲兄인 八友公 趙普陽과 伯兄인 趙葵陽의 아들 錫晦가 동시에 문과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趙宜陽은 늙은 부모님께 즐거움을 드린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 압구정 뒤에 있는 선조 병판공의 묘소에 성묘라도 하자고 제의하고 있다./ 상팔우중형 上八友仲兄(1782) : 오래 동안 형제가 만나지 못하였음을 말하였다. 다친 다리는 이제 아프지는 않고 조금씩 걸으면서 길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집안 친족들의 궁핍을 걱정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여이파서 與李琶西 : 李集斗에게 보낸 편지이다. 詩를 받고 평론을 부탁하는 편지에 대해 답장을 하였다. 90을 바라본다고 하였으므로, 이 편지를 쓴 시기는 8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답김 答金(1803) : 金氏성을 가진 사람에게 보냈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 늙을수록 더함을 말하였다. 從孫이 알려 주어서 상대방의 정황을 알고 있으며, 직접 만나 의문점을 질의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여류서 與柳壻(萬休, 1766) : 맏사위인 柳萬休에게 쓴 편지이다. 임금님의 병환이 회복되어 조정에서 3월중에 別試를 베푼다고 하므로 형님의 서울행이 헛걸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사위 집안의 형제들도 서울로 갈 것으로 전망하였다./ 여류서 與柳壻(1770) : 외손자와 산모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돌림병에 걸려 있으므로 잘 조리한 후에 친정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건강은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음을 화살을 피한 새에 비유하였다./ 여외손류병문 與外孫柳炳文 : 외손자인 柳炳文에게 쓴 편지이다. 딸과 외손자 형제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자신은 늙었지만 건강은 여전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외손자 형제에게 공부에 독실하게 매달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비의 맛난 음식은 책 속에 있음을 말하면서, 독서에 있어서 한창 나이는 70세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여외손병문, 휘문 與外孫炳文, 徽文(1792) : 외손자인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들이 仲父의 초상을 치른 일을 위로하고 학업을 독려하였다. 독서에 있어서 大學을 먼저하고, 中庸, 綱目, 左傳 등을 읽을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널리 읽되 또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우 又(1796) : 외손자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趙宜陽의 草谷 동생의 초상이 있어 문상하였음을 말하였다. 외손자들에게는 東巖선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을 걱정하고 師門의 촉망을 생각하여 놀지 말고 더욱 학업에 매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온계이선생청시소 溫溪李先生請諡疏 :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이다. 李瀣의 죽음은 을사사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당시 권신들이 사림을 원수처럼 여겨 사화를 일으키자 李瀣는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그들의 入相을 극력 저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급기야 妖民 李洪男과 崔賀孫의 무고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렀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미 억울함을 씻어주고 직첩을 회복하여 주었으며, 숙종 임금은 증직을 하였고, 영종 임금 때에는 경연에서 諡號를 주는 문제는 논의하였으나 다른 일 때문에 중단되었음을 말하였다. 또 증직이 正卿에 이르게 되면 응당 諡號를 내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는 왕조실록 정조7년 11월 17일조에 실려 있으며, 후에 李瀣에게는 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산곡남평초당기 山谷南平草堂記 : 조카인 晏이 舊宅을 옮겨 草堂을 지은 것에 대한 記文이다. 흙칠을 하고, 온돌을 놓고, 창문을 만들어 방1간 당1칸의 집을 이루었으며, 방의 북쪽에는 2층으로 된 서가를 놓았다고 했다. 특히 이 초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계해년에 趙宜陽이 실수로 불을 냈던 적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 그 다음 해 가을에 伯氏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그후 3년만에 다시 仲氏가 생진과에 합격하는 등 길사가 연이었던 곳이므로 앞으로 노력하면 크게 흥하리라고 적었다./ 증안사문의암서 贈安斯文宜庵序 : 宜庵 安德文(1714~1779)에게 써준 서문이다. 趙宜陽과 안덕문이 꼭같이 晦齋 退溪 南冥 삼현을 흠모하였으나 그들의 학문을 놓고 논평함이 서로 달랐던 모양이다. 조의양은 이에 "노선생(퇴계)은 玉山(회재)을 스승으로 하였고, 德山(남명)을 학우로 하였으니, 옛사람의 학문이 깊고 얕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寒岡 鄭선생의 詩에 '退陶의 正脈을 영원토록 사모하고, 山海의 고풍을 특별히 흠모한다.' 라고 한 구절이 있으니, 여기서 이미 正案이 정해졌다." 라고 하였다./ 서군자당기후 書君子塘記後 : 艮齋 李德弘(1541~1596)의 君子塘에 대한 記文이다. 이덕홍은 퇴계의 高足門人으로 12년간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퇴계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서적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迂川의 남쪽에 못을 만들어 蓮을 심고 이름을 君子塘이라 지었다. 흔히 말하기를, 이것은 周濂溪가 蓮을 사랑하였다는 설에서 취하였다고 하나, 실은 陶山書堂에 있는 淨友塘의 의미를 흠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서송처사전후 書宋處士傳後 : 형제의 우애가 지극하였던 宋적, 宋構 형제에 관한 기록이다. 동생인 構가 살인을 하여 죄를 받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적은 "동생이 죽고 형이 살면 살아도 기쁘지 아니하고, 형이 죽고 동생이 살면 죽어도 또한 즐겁다." 하여, 대신 죽음을 택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의양은 춘추시대의 汲壽와 후한의 褒融에 비견하여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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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준 예천군수, 30일 상이군경회 중앙회장 감사패 수상...축하합니다.
이현준(李鉉濬 醴泉郡守 傷痍軍警會 中央會長 感謝牌 受賞 : 事業費 3億원 投入해 南山 忠魂塔 位牌奉安室 新築 및 國家有功者 福祉增進 寄與) [記事] : 이현준 예천군수가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중앙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경상북도지부는 2012년 3월 30일 오전 11시 구미 소재 경북상이군경복지회관에서 제52차 상이군경회 도지부 정기총회를 열고 국가유공자의 복지증진에 기여한 이현준 예천군수에게 중앙회장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번 감사패는 이 군수가 지난해 군 재정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총사업비 3억원을 투입 남산 충혼탑 위패실을 지상화하고 그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는 등 보훈가족과 노약자의 이용 불편을 해소하고 군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기여한 공으로 주어졌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이현준 군수, 김관용 경북도지사를 비롯한 도의회의장, 도교육감, 대구지방보훈청장, 보훈 가족 등 130여명이 참석했다.(醴泉뉴스 2012년 04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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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