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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873) : 조의양(동추)(3)(附 유천면 출신 노병태 대화제약 사장, 21일 대통령 표창...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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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양 : 오죽재집의 계속/ 서인재유고후 書忍齋遺稿後 : 忍齋公의 유고에 대한 後書이다. 그의 齋號에 관해서 젊었을 때는 勤齋, 장성하여서는 愚齋, 만년에 이르러서는 忍齋라고 하였다. 공자의 발분망식한 뜻과 寧武子의 어리석음과 仲弓의 과묵함을 겸하였으니,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고 적었다./ 제체화정십이영후 題체華亭十二詠後 : 進士 李公의 정자인 체華亭에서 형제의 우애를 읊은 12수를 짓고 그 후서를 쓴 것이다. 정자는 豊岳의 서쪽 낙동강의 북쪽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위치하였다고 하였다. 이 곳은 외딴 산속이 아니고 사람들로 시끄러운 인가에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 이름도 형제의 우애를 의미하는 체華라고 하였다./ 제정해좌시상고산도후 題丁海左柴桑孤山圖後 : 海左 丁範祖가 사람을 시켜서 그린 柴桑孤山眞境에 대한 後題이다. 柴桑山은 중국 江西省 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晉나라때 陶潛이 여기에 살았고, 孤山은 강원도 法泉의 명승지로서 愚潭 丁時翰이 살았으며, 두 사람의 出處가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제류경규남북사행록후 題劉景圭南北사行錄後 : 劉景圭는 육로로 介八烏蠻館을 배행하여 중국을 여행하면서 萬壽山 太液池와 같은 천하의 장관을 구경하였고, 또 通信使를 따라서 일본으로 들어가 對馬島와 大坂城을 지나면서 후지산을 보았다. 유경규는 이 여행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 대한 後題이다./ 제양한록후 題養閒錄後 : 鴻巖 權新之가 지은 養閒錄에 대한 後題이다. 권신지는 아직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공명에의 꿈을 끊고 茅屋을 짓고 한가로움을 지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이에 趙宜陽이 그 양한록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을 지었다./ 간옹설 艮翁說 : 趙宜陽의 친구 李夢瑞가 집을 짓고 주역의 艮괘를 自號로 한데 대해, 그 의미를 설명한 글이다. 艮은 그친다는 뜻이다. 그쳐야 할 때에 그치고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여야 하니, 모름지기 時라는 한 글자를 올바로 한다면 艮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잠실명(소서) 潛室銘(小序) : 조카 君美에게 潛室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지은 銘이다. 이 호는 朱子의 高足인 陳埴의 호에서 취한 것이며, 그 의미는 시전의 "潛雖伏矣"와 "相在爾室"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제독서실학령 題讀書室學令 : 仲氏인 八友公이 자식 교육을 위해 지은 독서실을 위하여 지은 學令이다. 事親과 事君의 도리와 공부하는 절차와 단계는 주자의 白鹿洞規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여기에 빠진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삼열사서원고유문 三烈士書院告由文 :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세 열사를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은 告由文이다./ 제권선계(용)문 祭權仙溪(墉)文 : 仙溪 權墉에 대한 제문이다./ 제팔우중형문 祭八友仲兄文 : 仲氏인 八友公에 대한 제문이다. 팔우공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讀洞에 위치한 別業은 많은 문헌이 갖추어져 있어 원근의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고 하였다./ 제권자화(섭)문 祭權子和(燮)文 : 친우 權燮에 대한 제문이다. 화사하지만 들뜨지 않은 것이 그의 모습이고, 질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으며 진실하면서도 소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정과 행실이라 하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농담을 해도 망령스럽지 않은 것이 그의 즐거운 생활 모습이며, 높으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넉넉하여 멀리 가는 것이 그의 음성이라고 하였다./
곡상사제몽양문 哭上舍弟夢陽文 : 동생인 夢陽에 대한 제문이다. 동생에 대하여, 經書를 음식 삼고 富貴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며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웠고 빈한한 생활도 편안히 여겼다고 적었다./ 제망실증정부인영양이씨문 祭亡室贈貞夫人永陽李氏文 : 부인 永川李氏에 대한 제문이다. 永川李氏는 처사 猶龍의 여식으로 천성이 孝養하여, 시할머니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음식을 입에 맞게 하고 옷가지를 언제나 깨끗이 입혀서 옛날의 賢婦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제류서만휴문 祭柳壻萬休文 : 사위 柳萬休에 대한 제문이다. 柳萬休가 죽자 친분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 탄식하였고 했다./ 곡질욱문 哭姪욱文 : 조카 욱에 대한 제문이다 . 욱은 仲氏인 八友公의 아들로서,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분수에 자족하는 인품이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고 적었다./ 곡질집문 哭姪집文 :조카 집에 대한 제문이다. 조카에 대하여 재주와 덕, 그리고 성품과 행실이 옛날의 군자들에 비견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제권군명신문 祭權君命新文 : 權命新에 대한 제문이다. 권명신은 성품이 화려함을 싫어하였고, 韓愈와 杜甫의 시를 쓰고 시풍은 蘇軾과 黃庭堅을 따랐으며, 만년에는 程朱學에 침참하여 著者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백형둔암공행장 伯兄鈍巖公行狀 : 伯氏인 趙葵陽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葵陽이고 자는 向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의 휘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이다. 1706년(숙종 32)에 豊山에서 태어나서 1776년(영조 52)에 죽었으니 향년 71세이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仲弟 普陽과 仲子 錫晦가 함께 대과에 급제하였다. 遺稿 3冊이 본가에 家藏되어 있다. 공은 태어나서 풍골이 늠름하고 준수하여 조부가 언제나 우리 집안을 길이 보전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일을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鈍巖이라고 自號하였다. 공은 일찍이 新塘처사 李成全에게 수학였으니, 이성전은 바로 孤山 李惟樟의 高足이다. 知事 洪晟, 判書 洪重孝, 萬頃 李孟休, 烟客 許泌, 石北 申光洙, 台世 姜晃과 교유하였다. [始電義], [洪範賦], [尙友策], [山村野店] 등의 저술이 있다고 하였다. 著者는 柳子厚가 지은 [先友記]에 따라, 葵陽이 가깝게 교유하였던 인물로는 九思 金樂行, 三山 柳正源, 下枝 李象辰, 參奉 李達中 學中, 正言 金방, 持平 金위, 參奉 李重光, 進士 權濤, 參奉 柳聖曾, 永春 李守貞, 大憲 李世澤, 連山 權正宅, 進士 成惠寅, 芝翁 金鼎漢, 龜山 任必大, 參奉 南龍萬, 參奉 金紘, 進士 宋履錫, 斯文 鄭翰弼, 進士 金柱雲, 斯文 趙性道, 進士 權潤, 進士 孫思翼, 錦翁 李植春, 進士 黃羽漢, 陰城 李世述, 斯文 金柱國 등을 들었다. 配는 豊山 金氏이다./
중형팔우헌공행장 仲兄八友軒公行狀 : 仲氏인 趙普陽의 행장이다. 공의 성은 趙氏이고, 휘는 普陽이고 자는 仁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로 1709년(숙종 35)에 豊山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고, 조부 鳳徵은 李葛庵의 문하에서 從遊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커서는 부친의 명으로 小隱 李景翼에게 수학하였는데, 이경익은 孤山 李惟樟의 문인이다. 공은 또한 李懶拙齋와 權淸臺에게 質疑하였다. 1747년(영조 23)에 생진과에 모두 급제하고 1773년(영조 49)에 조카 錫晦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典籍에 임명되었고, 뒤에 監察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禮曺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은 參判의 세도와 월권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781년(정조 5)에 조카 錫晦가 어전에 입시하였는데, 임금의 질문이 집안에 이르렀을 때 측근에 있던 신하가 삼촌 조보양이 예조좌랑으로서 참판의 세도를 증오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하자, 임금은 바로 典籍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조보양이 숙배하기 위해 도성에 이르렀을 때 이미 병조좌랑으로 옮겨져 있었다. 공은 6일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88년(정조 12)에 첨지중추부사로서 五衛將이 제수되었으나, 이 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이 교유하였던 인물로는 李大山 형제와 朴南野, 李下枝 등이 있었고 특히 大山翁을 존경하였다./ 통덕랑안공(성복)행장 通德郞安公(聖復)行狀 : 安聖復의 행장이다. 공은 휘는 聖復이고, 자는 克甫이며, 본관은 興州이다. 父는 夏圭이고 母는 宜寧余氏이다. 1707년(숙종 33)에 태어나서 1780년(정조 4)에 죽었으니 향년 74세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이웃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配는 昌原黃氏로 龜巖 孝恭의 후손이다./ 조비정부인풍산류씨유사 祖비貞夫人豊山柳氏遺事 : 조모 豊山柳氏의 遺事이다. 정부인 柳氏의 본관은 豊山이다. 류씨의 고조부는 謙庵 雲龍이다. 父는 世馨이고 母는 安東權氏로 1678년(숙종 4)에 태어났다. 정부인은 선정의 閨範을 갖추었고, 우리 집안 吉祥의 기운은 류씨에서 그 싹이 텄다고 하였다. 1751년(영조 27)에 사망하였다. 류씨는 조부 鳳徵이 세 번째 결혼한 부인이다. 조부가 문과에 급제하여 都事를 지냈고, 예조참판이 추증됨으로 인하여 류씨에게 貞夫人이 추증되었다./ 선비정부인선성이씨유사 先비貞夫人宣城李氏遺事 : 저자의 어머니 宣城李氏의 遺事이다. 이씨의 父는 基晩이고 母는 東萊鄭氏이다. 1623년(인조 1)에 태어나서 1677년(숙종 3)에 죽었다. 시부모를 예의로써 섬겼고, 집안 사람을 화목으로 대했으며, 비복들을 은혜와 위엄으로 부렸고, 자녀 교육에 절도가 있었다./ 삼형처사공행략 三兄處士公行略 : 셋째 형 得陽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득양은 자가 來卿으로 1715년(숙종 40)에 태어나 1748년(영조 24)에 이른 나이로 죽었다. 配는 咸陽朴氏이다./ 종손현수행략 從孫顯洙行略 : 從孫 趙顯洙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현수의 자는 集汝이다. 父는 著者의 伯氏인 葵陽의 아들 錫晦이고, 母는 仁川蔡氏이다. 1752년(영조 28)에 태어나서 1781년(정조 5)에 죽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 뿐만 아니라 史書와 農書까지도 손수 베껴서 다니면서 외웠지만, 그가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였다./ 권군명신행록 權君命新行錄 : 權命新의 行錄이다. 권명신은 고려의 태사 幸의 후예로서, 父는 璉이고 母는 宣城金氏이다.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저자는 그의 기이함을 보고 장래 크게 될 것으로 기약하였으며, 명신의 종숙 君珍이 데리고 와서 저자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누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고, 만년에는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심경, 근사록 등을 손수 베끼고 고금 성현들의 잠언을 적어 좌우에 붙이고 암송하였다. 특히 퇴계의 성학십도에 대해서, 천하의 도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고 심취하였다고 하였다. 1799년(정조 23)에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配는 一善 金氏이다./
숙부인영천이씨묘지명(병서) 淑夫人永川李氏墓誌銘(幷序) : 저자의 첫째부인 永川 李氏의 墓誌銘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서 1756년(영조 32)에 죽었으니 향년은 42세였다. 李氏의 父는 猶龍이고 母는 聞韶 金氏이다. 李猶龍은 문장으로 당대의 이름을 떨쳤으나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가 죽자 당대의 명류인 李密菴, 趙玉川, 柳涵鏡, 李息山, 權淸臺, 李鹿門, 柳三山 등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씨는 1736년(영조 12)에 저자에게 시집왔다.(daum 2011)
조의양 : 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卷6/ 부록 附錄/ 행장 行狀 : 외손자인 柳炳文이 쓴 趙宜陽의 행장이다. 휘는 宜陽이고 자는 義卿이며, 성은 趙씨이고 본관은 漢陽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母는 宣城李氏이다. 공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글을 많이 읽었고, 특히 목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자라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經史에 관해 함께 토론하였는데, 공은 특히 詩에 관해 가르침을 청하였다. 訥隱은 공에게 詩를 지음에 반드시 漢魏體를 따르도록 가르쳤다. 또한 李守淵에게 師事하고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특별히 노인에게 額外의 은혜를 베풀어 공은 여기에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經傳, 子集, 文章史家 등에 관해 널리 통하였으며, 陰符經, 道德經, 參同契 등까지 많은 독서를 하였다. 詩書, 語孟은 매일 읽었고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론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또 당시 詩로 널리 알려져 있던 李集斗가 安東府使를 지낼 때, 자신이 지은 詩 수백편을 공에게 보여주며 和答詩를 부탁하였다. 공은 선 자리에서 화답시를 지었고, 부사는 "진실로 나의 스승이오."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공은 일찍이 "나는 문장가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지만, 늦게서야 주자와 퇴계의 말씀이 제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공이 지은 詩文은 散逸되어 수습되지 못한 것이 십중팔구에 이르고, 겨우 약간이 본가에 가장되어 있다. 初配는 永川 李氏이고, 後配는 安東 權氏이다./
묘갈명(병서) 墓碣銘(幷序) : 李晩규가 쓴 趙宜陽의 墓碣銘이다.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서 1808년(순조 8)에 죽었다. 어린 아이 때 이미 정부인이 읽어주는 한글책을 듣고 기억하였다. 일찍이 詩를 지어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광정은 句法은 반드시 漢魏體를 본받으라고 가르쳤고, 공은 古樂府와 建安七子를 배워 시의 격조를 더욱 높였다. 또한 靑壁 李守淵에게도 누차 質疑하였다. 1771년(영조 47)에 처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4년(정조 18) 별시에서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병이 깊었지만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공은 百家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陰符經, 南華經, 道德經, 參同契, 역대의 典故, 인물, 천하의 산천에 이르기까지 난문과 벽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양현의 詩에 대해서는 편마다 차운시를 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천하의 책을 다 읽으려고 하여 넓게는 읽었지만 정밀하지 못하였는데, 근자에 유가에 전념하여 약간의 견해를 얻었다." 하였다. 언제나 유약하게 처신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았지만 일에 임해서는 과감하여 남들이 꺽지 못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온화함이 넘쳤고, 일에 있어서는 우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절실하였고, 행실은 소탈하였지만 실제로는 긴밀하였다. 初配는 永川 李氏이고, 後配는 安東 權氏이다./
유사 遺事 : 從曾孫 秉相이 쓴 趙宜陽의 遺事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孝友와 文行으로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 母는 宣城 李氏로 1719년(숙종 45)에 幽洞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5형제 가운데 넷째로서, 鈍巖公 葵陽이 맏형이고 八友公 普陽이 둘째형이다. 어렸을 때 한번은 공이 홀연히 사라져서 집안사람들이 그를 찾았는데, 나중에 서고에 있는 책 속에서 나왔다.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었더니 "우연히 장서들을 읽게 되었는데, 배고픔을 알지 못하겠더라." 하였다. 장성하여 山雲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유학자 집안으로 李秀泰가 공에게 장인이 되었다. [五總龜經世文]은 鈍巖公 葵陽이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이 매우 광범하였다. 어떤 사람이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질의하면, 공이 나서서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공이 성균관에 있었던 수년 동안, 그의 명성이 서울에까지 퍼졌다. 일찍이 눈오는 날에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詩를 논하였다. 訥隱은 [朴孝娘西江女詩]와 [香郎傳]을 주면서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禮安의 선비들이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 공을 疏頭로 추대하였다. 또 靑壁 李守淵을 배알하였는데, 가학을 전수하여 당시 儒宗이었던 이수연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칭찬하였다. 農隱 李級은 공을 박학하고 단아한 군자라 칭하였다. 1785년(정조 9)에 朱書節要刊補를 교정하는 일로 廬江에 모였을 때, 李后山 柳東巖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를 존경하여 비록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양현의 詩를 和韻함으로써 흠모의 정을 대신하였다. 공은 자식들에게 과거공부는 비록 폐할 수는 없지만 경중의 구분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檜溪公에서 山谷公에 이르기까지 모두 詩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漢陽四世詩稿로 칭하였으니, 공의 詩才는 그 뿌리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사 輓詞 : 權訪이 쓴 趙宜陽에 대한 輓詞이다. 선대로부터 아름다운 文才를 이어 받아서 동방에 문화를 꽃피웠으며, 공이 죽고 난 뒤 동방의 풍류가 쓸쓸해졌다고 하였다./ 우 又 : 黃龍漢이 쓴 輓詞이다. 공은 문장에서 으뜸이 되어 90평생 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상자 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시가 많은데, 풍월은 오래 동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는 언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우 又 : 金相溫이 쓴 輓詞이다. 영남의 문장가는 대개 檜溪公의 가문에서 나왔는데, 공은 만년에 유학에 귀의하였다. 풍류객은 90년을 살고 산 속에 누웠다고 하였다./ 우 又 : 權聖翊이 쓴 輓詞이다. 공이 시문고를 완성하여 그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를 언급하면서, "문장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재주 없는 이 사람이 어찌 서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우 又 : 姜必孝가 쓴 輓詞이다. 영남에 유학이 성할 때, 공의 이름이 홀로 드높았다. 젊어서는 정계에 나아가 정책을 내었고 늙어서는 벼슬과 영화를 버리고 유학에 몰두하였다고 하였다/ 우 又 : 張中矩가 쓴 輓詞이다. 영남의 노학자들은 언제나 공을 칭찬하니, 문장을 일으켜서 많은 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적었다./ 우 又 : 李仁行이 쓴 輓詞이다. 공은 유학의 노선생으로 그는 죽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었다./ 우 又 : 朴時源이 쓴 輓詞이다. 한 가문에 진사가 무수하고 양세에 걸쳐 중추부사를 낸 것은 다시없는 드문 경우라고 하였다. 2수의 對聯이다./ 우 又 : 金在成이 쓴 輓詞이다. 공이 살던 고택에는 슬픈 바람이 일고, 梧竹齋의 빈 뜰에는 해가 져서 서늘하다고 하였다./ 우 又 : 金龜鍊이 쓴 輓詞이다. 梧竹齋의 선생은 세상을 버렸고 芙蓉山 꼭대기는 서늘하다. 찾아뵙고 인사하고자 해도 이제 받아줄 선생이 없어 눈물만 흐른다고 적었다. 4수의 對聯이다./ 우 又 : 權補가 쓴 輓詞이다. 봉황새는 떠나고 집은 비었으나 드높던 기상은 여전하니, 벽오동과 푸른 대는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라고 하였다./ 우 又 : 宋文煥이 쓴 輓詞이다. 후생은 선생을 그리며 우러러 보아도 보이지 않고 覽德臺 앞의 달빛만 여전하다고 하였다./ 우 又 : 신경룡(辛慶龍)이 쓴 輓詞이다. 깊은 마음에는 千家의 말을 담았고 담담한 가슴에는 봄 풍경을 품었다고 하였다. 또한 3대에 걸쳐 영화가 빛났고 한 가문에 존귀함이 연이었다고 하였다./ 우 又 : 族孫인 淵晦가 쓴 輓詞이다. 高陽의 자제들은 뛰어난 인품을 지녔고 樞府의 벼슬은 대를 이어 내렸다고 하였다. 經學은 李靑壁에게 배웠고 典刑은 李懶拙齋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우 又 : 金완이 쓴 輓詞이다. 세 사람의 어진이가 남으로써 仁을 가히 경험하였고 一代의 문장은 늙어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제문 祭文 : 外孫 柳炳文이 쓴 제문이다. 문장에도 능했지만 詩에 더욱 뛰어났다. 한번 붓을 휘두르면 백편의 시가 나왔고 쓸수록 더욱 기이한 작품이 되었다. 늙어서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았고 책상과 상자에는 시가 쌓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고 자세하게 차운하여 따로 책을 만들었다. 추워도 두껍게 옷입지 않았고 볼 때는 안경을 끼지 않았으며, 가난으로 근심하지 않았고 효성과 우애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다./ 우 又 : 外孫 柳徽文이 쓴 제문이다. 부군께서는 옛사람의 기운과 풍모를 타고났으며, 드물게 세상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仲氏인 普陽은 經術에서 뛰어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로써 가풍을 이었고 어버이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평생 동안 지은 저술은 한 방을 채울 정도라고 하였다./ 우 又 : 從孫 趙顯汶이 쓴 제문이다. 대과에 급제하고 소과에 급제한 것을 영화로 여기지 않았다. 물러나 芙蓉山 아래에 집을 짓고 覽德齋에서 안빈낙도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손을 움직이면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문체는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고, 글은 주자와 퇴계를 따랐다. 장수하고 큰 덕을 이루었으며 양대에 걸쳐 중추부사를 배출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고 나라에 상서로운 징조이다./ 우 又 : 從孫 趙顯佐가 쓴 제문이다. 梧桐나무를 노래하고 綠竹을 읊었으니, 공의 齋號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만년에 香山洞에 집을 짓고 살았으니 골짜기가 매우 깊었다. 산을 鳳凰山이라 하였고 臺號는 覽德齋라 하였다. 사람들은 梧翁으로 불렀으며 이제는 地仙이 되었다. 가난해도 병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늙어서 더욱 강건하였다. 후학을 훌륭하게 양성한 것이 더욱 큰 공이었으니, 어리석고 똑똑함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여 순순하게 지도하였다. 저자는 10세에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불행히 돌아가시니 서까래가 부러지고 산이 무너진 것과 같다고 하였다./
발 跋 : 宋啓欽이 쓴 梧竹齋集에 대한 跋文이다. 梧山夫子(해제자주:梧竹齋 趙宜陽)의 저술은 매우 많지만 상자에 담겨서 이미 백년이 지났다. 우리 영남에서 문장이 가장 성하였던 때는 숙종 정조대였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다. 당시에 申石北 鄭南屛 丁海左 李艮翁 등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쳤다. 南屛翁은 일찍이 탄식하기를, "공이 죽고 난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장차 쓸쓸해지리라." 하였다. 일찍이 訥隱(李光庭)과 後村(李守淵)에게 사사하여 학문의 요체를 알았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훈계하였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면 마음 다스리고 몸을 닦는 요결을 알려 주었고, 時文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학문하여 이름을 이루는 대체를 알려 주었다. 후학을 가르치는 뜻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였다. 詩는 주자와 퇴계를 모범으로 하였고, 뜻은 周濂溪와 二程을 지향하였다. 鳳凰城 覽德齋를 바라보면 그 풍류를 느낄 것 같지만 불행히 시대를 달리하여 그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공의 玄孫 泰敬이 마침 공의 글을 간행한다 하기에 자손은 비록 많이 있지만, 사문의 다행이며 공의 뜻을 기리는 좋은 일이므로, 한 마디 말을 말미에 덧붙이다./ (김종석金鍾錫)(daum 2011)
조의양 : 농암묘소/〈이장 시 만사〉 觀察使 鄭大容, 同知 李守貞, 通家後生 李泰淳. 縣監 李世聞, 郡守 李龜星, 進士 趙宜陽, 충齋後孫 權思浩, 進士 金象九, 通家後孫 金台翼. 後生聞韶 金鎭東, 外裔漢陽 趙運道, 後學鳳城 琴養純, 外裔眞城.../ bungang.nongam.com(daum 2011)
조의양 : 자원유형별검색/ *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송기촌[기]면앙정[구거재담양정지승독단호남시자선산귀색시](005) 조의양(趙宜陽) 1921년 미상 원문 역사/지리 > 한국역사(통사) *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문학: 고등학교 ...(4) 소리와 운율(韻律) 8.../ https://www.knowledge.go.kr(daum 2011)
조의양 [專門資料] : 慶尙道 儒生 趙宜陽 等二百二十一人上疏請李瀣易名賜批/ 趙宜陽|李瀣|瀣|文純公|滉|瀣|瀣|瀣|宣祖大王|肅宗大王|英宗大王|李瀣|文純公(daum 2011)
조의양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癸卯十一月十七日午時, 上御誠正閣。/ 誠正閣, 趙興鎭|金孝建|李崑秀|尹行任|趙宜陽|李瀣|李文純|文純公(daum 2011)
조의양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慶尙道生員趙宜陽·權國觀, 幼學李宗/ 陽城|范滂|范滂|陽城, 趙宜陽|權國觀|李宗洙|金宗燮|金宗國|金光遇|李膺龍|李淳|朴師周|李鼎秉|柳之源|金敏源|金龍燦|金圭|李師靖|李|李世勉|李世翕|權思儼|李大錫|李尙慶|李鎭東|金朝翼|李述賢|黃志純|黃潤漢...(daum 2011)
조의양 [專門資料] : 判下上言于各該司/ 申在元|在英|在弘|申啓文|李老淳|姜渭聘|宣廟|仁廟|李敦五|尹|宋時榮|李時稷|得蒙|姜渭聘|李敦五|尹|趙錫時|趙宜陽|朴基福|祖承|朴承宗|朴承宗|李昌任|金衡柱|廷佐|柳|李永深|肅廟|李永國|朴弘祚|李濟衡|金應海...(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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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면 출신 노병태 대화제약 사장, 21일 대통령 표창...축하합니다.
노병태(노병태 대화제약 代表理事 大統領 表彰) [記事] : 유천면 태생의 노병태 대화제약 대표이사가 2012년 3월 21일 서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제39회 ‘상공의 날’에서 모범상공인으로 정부포상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노병태 대표이사는 제약업에 26년 동안 종사하며 과감한 투자로 국민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했으며 상공인의 이미지 제고, 지역발전과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노 대표이사는 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인물로 2008년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신 공장 건설, 연구소 설립, 항암제 개발, 신제품 개발 등 생산성 향상과 품질개선에 힘쓰고 세계 최초 흡수증진제 없는 경구용 항암제를 개발하는 등 연구개발에 힘써왔다.(醴泉新聞 20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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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