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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886:최맹순(수접주)-최명환(교육장)(1)(祝문경예천(전국최고),장병국(전국3등)/예천방문841)
작성자장병창 @ 2012.04.14 06:16:39

   예천의 자랑(2886) : 최맹순(수접주)-최명환(교육장)(1)(附 문경예천선거구, 11일 투표율 전국 최고...축하합니다/개포면 장병국, 9일 한시 전국 3등...축하합니다/예천방문 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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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맹순 : 1852(철종 3)-1894(고종 31), 양반 고장 예천에서 봉기 횃불, 조직력 뛰어난 옹기 장사꾼이었다. 예천에서는 1894년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예천은 양반 토호의 고장으로, 이름 높았는데, 여기에 맞선 하층민들은 때를 타서 일대 저항에 나섰다. 초기에는 북접의 지시를 받고 있던 탓인지 군아(郡衙)를 점령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으나, 2차 봉기 무렵에는 성주, 상주, 선산, 김천 등지의 읍성이 함락되었고, 낙동강 주변의 일본 병참 기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런 속에서 예천은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곳은 양반 토호 구실아치를 묶은 보수 세력과 농민 소상인을 묶은 농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농민군이 패배하여 많은 살육이 따랐던 것이다. 예천 지방의 농민군 지도자는 최맹순이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20세 무렵에 동학에 입도하여 몸을 숨기며 동학 경전을 익혔다. 아마도 최시형이 1870년대 강원도 일대를 잠행하며 포덕에 열중할 적에 인연이 닿아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때 무슨 연유로 예천 땅 동로소면 소야리로 흘러들어 왔는 지는 모른다. 아무튼 최맹순은 고향 땅을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는 이 곳에서 옹기 장사를 했다. 소야 마을 근처에는 좋은 옹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가 여러 해 옹기를 팔고 다닌 것은 생계를 위해서 였는지 아니면 신분을 가장키 위해서 였는지 모르나, 이런 장사는 천한 출신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 벌이는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옹기 장수가 아니었다. 이웃집에 사는 장복극을 동학에 끌어넣기도 하면서 동학 조직을 넓혀나갔다. 1894년 3월 보은집회가 있은 뒤 경상도 지역의 동학교도들은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고부 봉기가 한창 일어날 무렵, 최맹순은 후진 소야 마을에 접소를 차리고 관동수접주라고 일컬으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난 뒤인 6-7월에는 면과 리 단위에까지 조직을 만들어 나갔는데, 48개 접에 7만여 명을 끌어들였다. 이런 기록이 있다. "큰 접소는 1만여 명, 작은 접소는 몇 천 명이 되었는데, 시정의 불량 청소년, 평민, 노비, 머슴 등이 자기들 멋대로 뜻을 얻은 때라 여기고 관장을 능욕하고 사대부를 꾸짖으면서 마을을 노략질하고 돈과 재물을 빼앗으며 무기를 도둑질하고 남의 노새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묘를 파헤쳤다.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사람을 묶어 두들겨 패서 더러 죽이기도 했다."(醴泉郡의 記錄인 '甲午斥邪錄'), 이렇게 군 단위에 큰 조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최맹순의 열정과 지도력이 뛰어났음을 알만 하겠다. 더욱이 이들은 예천 읍내를 제외하고는 서북 지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하고 있었다. 또 함양 박씨의 유계소를 농민군이 빼앗아 접소로 삼는 등 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금곡접소에는 몰락 양반인 함양 박씨들도 농민군에 가담했거니와 만석꾼으로 이름난 전돼지(본명은 전기항)가 모량도감이 되어 경비를 대고 있을 정도였다. 전돼지는 모습이 '돼지'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인데, '돈 많고 글 잘하고 풍채좋다.'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향촌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고손자 전장홍의 증언). 농민군은 7월 들어 영장(營將)을 지낸 토호 이유태를 끌어내 두들겨 패고 돈과 곡식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읍내로 들어와 악질 구실아치 김병문을 두들겨 패고 그의 아버지 묘를 파내기도 하고, 안동 부사가 경진 가점을 지날 적에는 부사의 의관을 빼앗은 뒤 두들겨 패고 마누라의 비녀 가락지 등의 여장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도 했다. 이럴 적에 최맹순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읍내를 공격하려 하지 않고 농민군의 행패만을 막고 있었다. 더욱이 위의 짓거리를 일삼는 유천 접주의 죄상을 적어 읍내로 보내기도 했다. 이 동안 읍내의 양반층과 향리들은 집강소라는 이름으로 객관에 본부를 두고 1,500여 명의 민보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농민군에 대응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8월 9일 북부 구산 마을에 농민군 수 십 명이 들이닥쳐 지주집을 습격했다. 이 때 민보군이 출동하여 농민군 11명을 잡아왔다. 농민군이, "우리를 죽이면 너희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호령하자 이들을 한천 냇가로 끌고가 생매장하였다. 이들은 금곡접 소속이었는데, 금곡 접주는 물론 최맹순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최맹순은 읍내의 집강소에, "불쌍한 저 백성들은 관에서 울거내는 가렴주구와 구실아치의 토색질과 양반의 토호짓을 견디기 어려워 조석도 살아갈 수 없다."라는 글을 보내고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또 집강소의 설치를 힐문했다. 이어 금곡포덕소와 화지도회에서도 집강소의 행동을 나무라고 함께 일본 공격에 나서자고 요구했다. 이른 바 보수집강소에서는 이들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타이르고 나섰다. 농민군의 연합부대 곧 최맹순 도접주를 비롯하여 상주, 용궁, 안동, 풍기, 영천(榮川 : 現 榮州), 문경, 단양 등의 13접주가 예천읍을 공격한다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북쪽의 금곡, 서쪽의 화지에 수 만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고 나서 예천읍을 사면으로 틀어막고 양식과 땔감의 통로를 막으면 한 달이 못 되어 굶어 죽게 된다는 전술을 짰다. 이 사실을 염탐한 집강소에서는 8월 23일 먼저 공격에 나서서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다. 하지만 읍내는 절박한 지경에 있었다. 이 때 사정에 대해 <갑오척사록>은, "읍내의 방수가 거의 한 달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어서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저자와 길 막힌 것이 또 한 달 가까이 되어 땔감과 양식이 끊어져 읍내 백성들이 모조리 주려있고,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어쨌든 민보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최맹순은 이 때 결연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8월 28일 한낮 화지 농민군 수 천 명이 읍내 10여 리 지점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협공을 약속한 금곡의 농민군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양쪽의 싸움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갑자기 예천읍 남산에 횃불이 오르면서, "안동의 구원병 3천 명이 온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농민군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다가 서정자 들판의 동남편 논에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민보군이 읍내로 들어와 승리를 자축할 적에 금곡의 농민군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민보군은 우계리 광천(廣川)의 모래밭에서 일제히 농민군을 공격해 퇴각시켰다. 이렇게 승리를 장식한 이튿날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민보군은 금곡의 농민군 포덕소인 유계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무수한 농민군이 잡혀 죽었으나 최맹순과 전돼지는 몸을 숨겼다. 최맹순이 처음부터 읍내를 공격하지 않았고, 또 봉쇄로 자멸을 기다린 것이 전술적 착오였을 것이다. 기득권을 누린 세력들을 소홀히 본 것이다.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농민군을 규합해 충청도를 거쳐 다시 예천 적성동을 공격했고 이어 충주 독기령을 넘나들며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11월 21일 아들 최한걸, 동료 장복극과 함께 잡히는 몸이 되었다. 최맹순은 남사장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고, 최한걸과 장복극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때 최맹순의 부하들은 읍내로 숨어 들어와 구출을 도모했다 한다. 그러나 금곡포덕소의 모량도감 전돼지는 끝내 잡히지 않고 뒷날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많은 재산을 모두 구실아치들에게 빼앗겼다 한다. 예천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전돼지의 손자 며느리 정금섭(94세, 대구 수성구 만촌1동) 할머니는 백 살을 눈앞에 둔 나이인데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작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 지팡이 짚고 동네 나들이도 한다고 했다. "시할아버님이 만석꾼이셨다는데,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올 때 숟가락 하나 안 남았어. 시어머님 모시고 살기란 워낙 힘들어 나중엔 산으로 들어갔지" 정씨는 17세 나던 해 용문면 금당실 마을의 동갑내기 남편 일호 씨에게 시집왔다. 붙잡힘을 피해 외지를 떠돌다 슬그머니 고향으로 돌아온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만석꾼 살림은 물론 남김 없이 민보군의 차지였다. 고향살이라곤 하지만 동학 얘기만 나와도 오금이 저리는 조바심에다 생계도 막연해 문경의 산악 지대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 "화전 생활도 참 힘들었지. 특히 겨울에는 양식이 모자라 가을에 모아둔 도토리를 껍질 벗긴 뒤 방아로 찧어 팥고물처럼 만들어 먹었어." 정씨는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금당실로 되돌아와 소작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 번에는 6.25가 정씨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예천 일대가 최고의 격전지였던 탓에 큰 아들과 함께 피난간 남편이 혼자 돌아온 것이다. "걔가 아마 28세인가 되었을 때였어. 어쩌다 제 아버지와 헤어진 모양인데, 지금도 죽었다는 생각이 안들어. 그 놈 얼굴을 다시 보기 전에는 눈도 못 감을 것 같애." 정씨는 예천에 후손들이 있지만 지금은 며느리(70)와 함께 대구에서 산다. 증손자(17)가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다. 웃는 표정이 참 온화해 보이는 정씨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증손자가 꼭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이화 歷史問題硏究所長 정재권 記者 한겨레新聞 1994.1.18, Kinds 2001)

 

  최맹순 : [길을 찾아서] 쇠가죽으로 밥짓기 재현 등 안방 파고든 ‘농민전쟁’ / 이이화/ 3일전, 오후 8:50 (일) | 한겨레 | 미디어다음/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으며 차기석은 오대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항거했다. 최맹순은 강원도 출신이었는데 예천에서 옹기장수를 하면서 농민군을 모으다 끝내 강릉교장에서...(daum 2011)

 

  최맹순(崔孟淳) : 충청(忠淸) 북부와 강원도 일부에까지 미칠 정도였다. 이 해 가을에 들어 일본군의 출동으로 세력이 무너져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平昌)까지 밀려가 11월에 민보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잡혀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cyberhumanrights.com(daum 2011)

 

  최맹순 :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冊/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1995-11-01/ 책본문 : 서북 외지의 경우에 대접은 만여 명, 소접은 수천 명을 형성하였다.4) 구체적으로 최맹순이 체포되어 관에 자백한 내용에 의하면,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일부.../ 289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冊/ 이이화 지음| 한길사 펴냄 | 2003-12-15/ 책본문 : 민보군 또는 의병을 조직하여 관할구역을 다스리고 원정까지 하였다. 예천의 접주 최맹순은 드세게 활동하면서 심지어 안동부사의 행차를 가로막고 부사를 묶어 구타했으며, 지닌.../ 306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소통하는 우리역사: 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 冊/ 조광환 지음| 살림터 펴냄 | 2008-07-17/ 책본문 : ...내고 상주와 선산읍에서 물러났습니다. 예천의 농민군은 3월부터 수접주(首接主) 최맹순의 지휘 하에 활동을 개시했으며, 그 결과 예천 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206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冊/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3-04-25/ 책본문 : 서울(고창) 평민(상민) 44 유랑 서울 출신 이희인 목천 향반 48 부농 조부 수령 최맹순 춘천(예천) 평민 42 옹기장수 예천 접주 편보언 금주 향반 28 중농 금산 접주 황하일 보은 .../ 169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너 하드디스크 포맷해 봤니(개정판)/ 冊/ 양재봉 지음| 길벗 펴냄 | 2005-07-27/ 책본문 : ...꼼꼼히 읽고 매뉴얼을 순서대로 따라하다 보니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정말 쉬워요. 최맹순 님 일단 이해하기가 쉽구요. 오랫동안 컴퓨터를 사용해 오면서 애매하고 자신 없었던 .../ 6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역사비평(1994년 여름)/ 冊/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1994-06-01/ 책본문 : 그리고 북접계열의 지도자인 손병희. 이희인, 손천민. 박인호. 경상도 농민군지도자 최맹순과 편보언. 강원도 농민군 지도자 차기석, 해주에서 용맹을 떨친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 .../ 370페이지(daum 2011)

 

  최맹순 :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작년, 2010년 5월 17일/ 경상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 일대 농민군은 비교적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예천은 3월부터 수접주(首接主) 최맹순의 지휘 하에 농민군이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뒤 최맹순은 7만여 명의 농민군을 모았으며 접이 설치된 지역이 .../ blog.daum.net/ 바른역사알리기 운동본부(daum 2011)

 

  최맹순 : 제1장 집안내력과 출생 1.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작년, 2010년 10월 9일/ ...로 인정되어 탄압을 받으면서도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무렵 소야 출신 동학의 수접주(首接主) 최맹순은 관의 기찰(畿察)을 피해 옹기장수로 가장하여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결망을 형성, 면리 단위까지 출접(出接.../ www.cyworld.com/abdulrashid/ 알라후 아크바르(daum 2011)

 

  최맹순 : 동학농민운동 일지/ 작년, 2010년 6월 4일/ ...12일(2/17) 말목장터로 진을 옮김 25일(3/2) 백산으로 진을 옮김 3월 3일(4/8) 고부 농민군 기본세력 해산 최맹순 예천 소야에 설접 포교 20일(4/25) 무장에서 1차 기병, 창의문 선포 23일(4/28) 고부성 재점령 25일(4/30) .../ blog.naver.com/ synopticon's (역사+교육)컨텐츠(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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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환 : 1947- , 예천읍 백전리 출신, 동부초등, 예천중, 대창고, 안동교육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교육행정과 졸업, 예천, 남부초등 교사, 개포초등 교감, 울진, 예천교육청 장학사, 99년 예천남부초등 교장, 은풍초등 교장이다. 예천군교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醴泉新聞 1999.9.9)

 

  최명환(奉化敎育廳으로 發令) [記事] : 최명환 하리면 은풍초등학교 교장이 봉화교육청 학무과장(2004년 9월 1일자)으로 전보 발령됐다. 최 과장은, 예천읍 백전리 출신으로, 예천교육청 장학사, 예천남부초등 교장, 은풍초등 교장, 예천군교원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醴泉新聞 2004-08-27 13:37:10)

 

  최명환 : 최명환 전 교육장/  작년, 2010년 2월 25일 | 예천인터넷뉴스/ 최명환 전 예천교육장은 25일 오전 11시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제33회 예천문화원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김종배 원장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예천문화원이 지역 문화창달에 많은 공헌을 하고...(daum 2011)

 

  최명환 : 내가 쓴 글/ 언론 속의 모교 동창회 (5)/ 作成 張炳昌/ 3년전, 2008년 11월 22일 11월 19일/ 오후 1시 교내에서 예천교육청 지정 시범수업 보고회를 가졌다. 이날 보고회에는 최명환 예천교육장을 비롯 학부모, 관내 교장 등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醴泉인터넷放送 .../ cafe.daum.net/yceast/ 예천동부초등학교총동문회(daum 2011)

 

  최명환 : 최명환 전 교육장/ 작년, 2010년 2월 25일 | 예천인터넷뉴스/ 최명환 전 예천교육장은 25일 오전 11시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제33회 예천문화원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김종배 원장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예천문화원이 지역 문화창달에 많은 공헌을 하고...(daum 2011)

 

  최명환 : 최명환 전 교육장/ 최명환 전 예천교육장은 25일 오전 11시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제33회 예천문화원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김종배 원장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예천문화원이 지역 문화창달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에 경의를 표했다. 정차모 기자.../ ycinews.co.kr(daum 2011)

 

  최명환 : 대창80년사:부록(10) 부장교사-대입자(1)/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11일 (금)/ ...(경북), 박영환(경북), 김광호(안동), 김휘경(안동), 조세재(안동), 남창진(안동), 정경섭(안동), 최명환(안동), 윤광희(안동), 이상현(안동), 최익항(안동), 남효천(안동), 박영식(대구), 신현림(안동.../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최명환 : 언론 속의 모교 동창회 (5)/ 작성 장병창/ 3년전, 2008년 11월 22일/ 11월 19일 오후 1시 교내에서 예천교육청 지정 시범수업 보고회를 가졌다. 이날 보고회에는 최명환 예천교육장을 비롯 학부모, 관내 교장 등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醴泉인터넷放送 .../ cafe.daum.net/yceast/ 예천동부초등학교총동문회(daum 2011)

 

  최명환 : 재경예천군민회cafe/ 예천여자고등학교 제54회 졸업식/ 지난달, 2011년 2월 11일 (금)/ (교장 안중현) 졸업식에는 이한성 국회의원, 전상학 예천군 총무과장, 김숙희 총동창회장(최명환 전 교육장 부인), 김종현 운영위원장, 조애자 어미니회장을 비롯한 학부형, 졸업생 및 재학생 등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제2회 대창동문가족 친선골프대회-참가신청자 명단 현황표/ 작년, 2010년 9월 1일/ 108 송진욱 대고32회 109 황중엽 110 최명환 대고11회 111 권리안 대창동문가족- 카3 112 강웅대 대고26회(대구.../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최명환 제27대 예천교육장 (대고13회) 정년 퇴임식!/ 2년전, 2009년 8월 28일/ 41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동안 후진양성에 힘쓰고 퇴임하는 최명환 교육장에게 예천교육청 전 직원들은 석별의 정을 담은 꽃다발을 전달했으며 송후덕 관리과장의 송공패 전달, 장애인 복지에 남다른.../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경인년 새해 풍양면 신년교례회 출향인 및 면민 등 300여명 .../ 작년, 2010년 1월 8일/ 행사장에는 정영광 군의장, 이영섭·남시우 군의원, 이현준 도의원, 오창근 민주평통협의회장, 최명환 전 교육장, 김학동 재경군민회 부회장, 재부·재구·재경 향우회원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예천신년교례회 성숙한 군민의식 당부- 최영수 회장/ 작년, 2010년 1월 5일/ ...개최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정창모 대한노인회 예천군지부장, 오창근 민주평통군협의회장, 최명환 전 교육장, 정희융 세계평화대사, 보훈단체 회장단, 정숙자 회장을 비롯한 여성단체협의회원,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지보초등학교 다목적 강당(숭지관) 개관식 가져/ 2년전, 2009년 8월 17일/ 다목적 강당(숭지관)이 준공돼 17일 오후 2시 김수남 군수와 정영광 군의회 의장, 최명환 교육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학부모 및 지역주민과 관계자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최명환 : 제1회 예천동부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이모저모/ 2년전, 2009년 6월 15일/ ...12회)를 비롯한 부회장단 10명, 각 기별 회장단 및 회원, 이한성 국회의원, 이현준 도의원, 최명환 예천교육장, 오창근 전 경찰서장 등 내빈이 참석, 대회를 축하했다. 장대복 회장은 대회사에서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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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예천선거구, 11일 투표율 전국 최고...축하합니다.

 

  국회의원 선거 2012(投票率, 聞慶醴泉選擧區 全國 最高) [記事] : 2012년 4월 11일 치러진 19대 총선의 전국 투표율은 54.3%로 잠정 집계됐다. 전체 유권자 4020만5055명 중 2181만5420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 투표율은 역대 전국 단위 선거 중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2008년 18대 총선의 46.1%보다는 8.2%포인트 높아진 것이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었던 2004년 17대 총선의 투표율 60.6%에는 미치지 못했다. 2010년 지방선거 투표율 54.5%보다도 0.2%포인트 뒤졌다. 오전에 전국 곳곳에 비가 내리면서 투표는 오전 9시까지 역대 최저 투표율인 2.3%를 기록하면서 우려를 낳기도 했지만 오후 들어 투표율이 상승했다. 광역시·도별 투표율은 이번에 처음 선거를 치른 세종특별자치시가 59.2%로 가장 높았으며 인천이 51.4%로 가장 낮았다. 대구(52.3%)는 근소한 차이로 인천을 앞서 꼴찌를 면했다. 선거구별로는 경북 문경예천이 68.4%로 전국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새누리당의 여상규 후보, 통합진보당의 강기갑 후보, 무소속 이방호 후보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경남 사천남해하동도 65.9%로 높은 투표율을 보였으며 서울에서는 노원을이 61.3%로 가장 높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이끌었던 새누리당의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민주통합당의 정동영 의원이 맞붙은 서울 강남을의 투표율은 60.6%를 기록했다. 노원을에 이어 서울에서 2번째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것은 ‘거물’ 간의 대결이 펼쳐지면서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은 결과로 풀이된다. 야권의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20대인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가 대결을 펼친 부산 사상도 57.4%로 비교적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 밖에 <나꼼수> 진행자인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와 새누리당 이노근 후보가 맞붙은 서울 노원갑(57.4%), 정치 1번지로 꼽히는 종로(57.1%),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와 이계안 민주통합당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초접전 양상을 보인 동작갑(57.1%) 등도 서울지역 평균 투표율보다 높았다. 반면 민주통합당 서영교 후보, 새누리당 김정 후보, 공천 탈락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유정현 후보, 이상수 후보 등 5명이 대거 출마한 중랑갑은 서울에서 가장 낮은 50.9%의 투표율을 기록해 대조를 보였다. 한편 이번 선거에는 사상 최초로 재외국민 투표 결과가 반영됐다. 총 12만3571명이 등록한 뒤 5만6456명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율은 45.7%를 기록했다.(京鄕新聞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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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포면 장병국, 9일 한시 전국 3등...축하합니다.

 

  장병국(장병국 氏 구암제 別試大展 甲科 探花) [記事] : 예천한시회 장병국(75·개포면) 회장이 2012년 4월 9일 경남 사천시 (재)사천문화재단이 주관한 제3회 구암제 별시대전에서 갑과 탐화(探花·3등)에 급제, 교지를 받는 영예를 안았다. 구암제는 조선시대 구암 이정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행사로 전국의 유림 3백여 명이 참가하여 과거시험을 재현하였다. 한편 장병국 회장은 조선시대 과거시험 재현 행사에서 병과와 을과에 급제한 바 있으며, 전국한시백일장에서 다수 입상하는 등 예천한시회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醴泉新聞 2012년 04월 12일 (목) 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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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841

 

  회룡포(山과 江이 어우러져 陸地 속 섬이 된 마을 : 연두선생의 體驗踏査旅行 - (6)醴泉 回龍浦) [記事] : ▲ 맑은 물과 은빛 모래, 아름다운 절경 속 마을을 찾아 경북 예천 회룡포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찾는 이는 많지만 정작 고립된 섬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정든 고향을 떠나간다. 내성천 물길을 따라 만연한 봄기운이 흐르고 있다. 경북 예천군 ‘회룡포’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2년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됐다. 이번 선정은 ‘회룡포’가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 마을로써 내성천 물줄기가 350도를 휘감아 돌고 금방이라도 육지에서 뚝 떨어져 나올 듯 강줄기 속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절경이라는데 있다. 또 주변에는 맑은 물과 눈부신 백사장,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뿅뿅다리가 있어 동심을 불러일으키고, 해발 190m의 비룡산 중턱에는 천년고찰 장안사와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주변의 풍광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하는 그 곳을 다녀왔다.// 내성천에 휘감긴 완벽한 물돌이동/ ‘뿅뿅다리’ 건너 마을 들어서다보면/ 아이는 물론 어른도 향수에 젖어// 아름다운 경치 이면에 감춰진/ 삼국시대 전란 피비린내 나는 역사/ 비 오면 원혼 소리 들린다는 전설도// ◇절경 속에 감춰진 역사 이야기 : 예천 회룡포. 워낙 알려진 곳이다보니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할 지 난감할 정도다. 드라마 ‘가을동화’로 한번 알려졌고,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덕분에 누구에게나 친근한 그곳에도 봄이 찾아왔다. 화면이나 사진으로 회룡포를 자주 접한 사람들은 그곳을 가보지 않고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룡포를 감싸안고 돌아앉은 비룡산을 한번 거닐어 보라. ‘길은 걸어봐야 제맛을 알게 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때서야 깨닫는다. 예천으로 접어들면 도로 곳곳에 ‘회룡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용궁면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룡산을 둘러보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용궁면에서 회룡교를 건너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회룡마을을 지나 주차장에, 오른쪽은 장안사에 닿는 길이다. 비룡산과 회룡포는 그 이름에서도 깊은 뜻이 느껴진다. 용이 돌아 승천한다는 회룡과 비룡의 이름뿐 아니라 인근 곳곳의 이름 또한 지상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장안사의 장안(長安)도 불교에서는 피안의 세계를 의미한다. 비룡산 건너편 천축산(天竺山)도 그렇다. 신라시대에는 용궁을 축산이라고 불렀다. 오랜 전 사람들도 이 곳 경치를 두고 지상 낙원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에만 치우쳐 그 속에 감춰진,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지나치기 쉽다. 비룡산 등산로 어느 지점에 이르면 동강, 내성천,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을 굽어보는 절벽이 나온다. 깎아지르는 벼랑 위에는 삼국시대 격전지였던 원산성(圓山城)이 나온다.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까. 회룡포를 알리는 표지판에는 ‘비가 많이 오면 성 아래 마을에서 아비규환과 원혼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한다.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는 장안사가 자리한다. 사찰 터가 넓지 않아 한눈에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범종각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회룡대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나온다. 위에서 내려다본 회룡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물돌이동(물이 돌아나가는 마을)이었다. 안동 하회마을과 비슷한 듯하지만 차이가 크다. 하회마을 물돌이가 반달 모양이라면, 이 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던 내성천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물길이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 회룡포의 물돌이를 보름달이나 태극모양으로 비유하는 이유다.

 

  ◇회룡포 보다 더 유명한 뿅뿅다리 : 비룡산을 내려와 내성천을 건너 회룡포 마을로 들어가려면 그 유명한, 일명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뿅뿅다리는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멍이 ‘뿅뿅’ 뚫려있는 철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개포면 산 뒤쪽으로 찻길이 뚫렸지만,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뽕뽕다리는 물이 많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수면 위에 걸터앉은 형국이 되기도 한다. 물에 닿을락말락하는 다리를 건너갈 때면 뚫려있는 구멍으로 강물이 ‘뿅뿅’ 솟아오른다고 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울렁거리고 삐꺼덕 삐꺼덕 소리도 난다. 이 다리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일부러 다리를 밟겠다고 전국에서 몰려 올 정도다. 낯선 다리에 흥미를 느끼는 아이들과 향수에 젖은 어른들 중에는 일부러 몇 번씩 다리를 오가기도 한다. 아예 다리에 걸터앉아서 물 속을 다니는 송사리떼를 바라보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서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사와 쏜살같은 세월의 속도를 비켜가는 곳처럼 여겨진다. 큰 물길은 마을이 앉은 산을 둥글게 휘감은 채 흘러간다. 약한 곳을 파고드는 물의 속성으로 육지 속 섬마을이 됐고, 그렇게 단절의 시간 속에 갇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안하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마을은 긴 세월을 잘 버텨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수년 전까지 만해도 20여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은 점점 주민 수가 줄어들고 있다.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지금은 아홉 가구만이 남았다고 한다. 신순애(체험답사여행가)(慶尙日報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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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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