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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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895) : 태허(종정)-하성호(총재)-한결(생원)-한문환(부사장)-한석호(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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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 : 1916-2004, 예천 출신, 1928년 김용사에서 경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예천 연방사 주석으로서 본원종 초대 및 2대 종정을 지냈고, 1999년 9월 13일 서울 종로 연화정사에서 열린 본원종 종정추대위원회에서 제3대 종정에 현 종정으로서 재추대되었다.(現代佛敎 239號 佛紀 2543.9.22)
태허 : [가까이서 뵌 큰스님] 태허스님(본원종 종정)/ ...없애야 정토사상 몰랐으면 불제자 되지 않았을 것 화두받는 사람 근기에 맞게 ‘마음 정화’ 이 시대 가장 절실 ◇태허 스님은 틈틈이 ‘나무아미타불’을 비롯해 <삼국유사>등에 실려있는 정토관련 게송을 쓰시며 정진하신다. ◇태허.../ bud.buddhapia.com(daum 2011)
태허 : 예천동부초등학교총동문회cafe/ Re:운문사 구경하세요~(청화산 법주사,호거산 운문사,가지산 .../ 5년전, 2006년 7월 10일/ 작년 말에 태허당 본원종 종정께서 원적하신 뒤로 49제를 마치고 종로 평창동 연화정사에 사리탑을 봉안하신다는 말씀도 계셨기에, 겸사겸사해서 일단 을지로의 집사람 사무실로 나왔다. (*참고로 .../ cafe.daum.net/yceast(daum 2011)
태허 : 수행의 향기 【수행한담】태허 스님<본원종 종정> 스님수행 법향 2010/10/19 21:00/ 태허스님<본원종 종정>/ <약력> :·1916년 경북 生, ·1927년 문경 김용사에서 정경원 스님을 은사로 이화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1938년 김용사 경흥강원 대교과 졸업, 1941년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 졸업, 1945년 문경 봉암사 주지, ·1950~58년 서악사, 부석사, 연방사 주지/ 나는 12살 되던 해 당시 큰 본찰이었던 문경 김용사로 입산을 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절에 의탁하게 된 것이지요. 세속의 잣대로 보면 불행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다 나에게 주어진 인연도리였습니다. 절에 와서 초등학교도 다니고 불법공부도 두루 섭렵하게 됐으니 절은 나에게 있어 큰 복밭인 셈이지요. 대강백이셨던 정경원 스님을 은사로 모셨는데 계를 받기 전에 입적하시는 바람에 육주(六洲)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육주 스님은 김용사 주지를 역임하는 등 학식과 덕망이 높은 스님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다보니 잔심부름도 많이 해야 했지만 온통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은사 스님을 시봉하는데 있어 밥은 공양주가 했지만 나물장만은 내가 직접 산이나 밭에서 뜯어다가 했습니다. 대신 어른스님들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기르듯이 제자를 거두었습니다. 옷을 장만해주고 학교도 보내주었으며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도 은사 스님의 도움으로 다녔습니다. 28세 때 김용사 상주포교당 주지로 머무를 때 일입니다. 먼 훗날 조계종 승려로서 정화불사의 최선봉에 섰던 청담 스님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상주경찰서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청담 스님은 순호 스님으로 불리웠는데 하루는 법춘 스님이란 분이 찾아와서는 “지금 순호 스님이 전염병에 걸려서 격리되어 있는데 그대로 두면 목숨을 잃게 될 것 같다”면서 모셔오자고 했습니다. 청담 스님은 이질에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는 약이 변변치 않던 시절인데다 일본인들은 이질에 특히 약해서 가장 무서워하는 병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경찰서와 병원을 찾아가서 책임지고 간호할 테니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 야채를 많이 먹고 요양을 잘하면 이질쯤은 큰 병이 되지 못했습니다. 6개월쯤 같이 지내는 동안 병도 완쾌되고 사건도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청담 스님을 만나려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수좌들이 상주포교당으로 많이도 찾아왔지요. 그 중에는 지금은 입적하신 성철 스님, 자운 스님, 홍경 스님도 끼여 있었습니다. 도반들끼리의 만남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해방되던 해 문경 봉암사 주지를 거쳐 김용사 법무국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봉암사는 김용사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에 선방이 없어서야 되느냐는 여론이 비등했어요. 정화를 추진하는 스님들과 함께 새로이 선원을 건립하고 제방의 납자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청담 스님 향곡 스님 성철 스님을 비롯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서 장삼과 의복을 제정하는 등 청정가풍을 정립하기 위한 정화불사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지요. 47년경에는 불교 대구중앙포교사로 부임하여 경상북도 전역을 포교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땐 오직 불교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셨던 청담 스님은 후일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요청에 의해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가게 되었고, 나는 태고종 총무원장 직무대행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원주에 있는 모 군부대에서 사찰을 건립, 낙성식에 초대를 했습니다. 각자 종단대표로 참석해서 만났는데 그날 저녁 청담 스님은 숙소로 돌아가다가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그때 그 안타까웠던 마음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지요. 김용사 중암에 있는 선방에서 한 5년간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염불삼매로 일관했습니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아미타불에 의거해서 지냈습니다. 지금까지 여든 두 해 동안 살아왔지만 그렇게 심한 환란과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던 것도 돌이켜보면 아미타불 염불정근 덕택이 아닌가 합니다. 염불정근이 몸과 마음의 전체로 순숙해지면 화두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신앙의 소의경전인 <아미타경>은 다른 대부분의 경전들이 제자들의 간청으로 인한 부처님의 설법인데 반해 부처님 자신이 자청해 설하고 있는 이른바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의 시대를 3등분하여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로 구분했습니다. 즉 경전에 의하면 불멸이후 첫 5백년간은 정법시대이고 이후 1천년은 상법시대며 다음 1만년은 말법시대라 했습니다. 또한 부처님 열반 후 첫 5백년간은 해탈견고(解脫堅固)하고 다음 5백년간은 선정견고(禪定堅固)하며 그다음 5백년간은 다문견고(多聞堅固)하고 또 다음 5백년간은 조사견고(造寺堅固)하며 마지막 5백년간은 투쟁견고(鬪爭堅固)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처님께서 입적하신지 2천5백년도 훨씬 지난 시점이므로 가히 말법시대라 하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언교(言敎)는 난무하되 행증(行證)은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법시대는 지계견고하고 상법시대는 선정견고하며 말법시대는 염불견고라 하였으니 말법시대에는 아미타의 교법인 염불수행이 수승하여 가통입로(可通入路)라 하겠습니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무량광불 혹은 감로불이라고도 하는데 아득한 과거세에 법장비구의 몸으로 있을 때 시방세계 2백10억의 국토 중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이상세계를 구현할 것을 서원하고 48가지 대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아미타불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도 쉽게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나무아미타불만 부른다고 성불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화두드는 참선이나 염불이나 수행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일념이 되어야 합니다. 자나깨나 그것 한 가지만 들고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오매일여가 되고 나중에는 생사일여로 나아갑니다. 화두는 사무치는 분심과 대의심이 생명인데 오늘날에는 좀처럼 되질 않습니다. 생활하다보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응용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공부 따로 생활 따로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게 우선 필요합니다. 모든 생활이 곧 공부와 직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적용시키려 노력하세요. 모든 현상의 원인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화두를 타파하기 위하여 용맹심으로 치열하게 정진하세요.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자신의 잘못된 업장도 차츰 소멸되고 번뇌가 사라지고 청정한 자신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체의 차별이 없는 그 마음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기질투가 난무하는 번뇌소굴이 곧 법신불의 전 신체(全身體)임을 관(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부다피아 /정리:(http://dochang.pe.kr)/ **연인사 道窓 스님**/ [출처] 수행의 향기 【수행한담】태허스님<본원종 종정> |작성자 관음정(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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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호(大韓合氣道 慶北北部協會長에 하성호 氏) [記事] : 한국프로태권도협회 하성호 총재(환경시사일보 예천담당 취재부장)는 2006년 4월 1일 (사)대한합기도 경북북부협회장으로 추대됐다. 하성호 협회장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프로태권도 및 합기도를 통해 북부 지역은 물론 예천 지역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겠다”고 역설했다.(醴泉文化新聞 2006.4.24)
하성호 : 예천군무술협회(총재 하성호) 주최 '제8회 전국 무술대회' 학생체육관에서.../ 2년전, 2009년 3월 28일 | 예천인터넷뉴스/ 예천군무술협회(총재 하성호, 환경일보 부장)가 주최하고 예천군, 예천군의회, 예천경찰서, 예천교육청, 환경일보, 안동 MBC가 후원하는 제8회 전국 무술대회가 28일 오전 10시부터 동본리...(daum 2011)
하성호 :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cafe/ 예천군무술협회 주최 '제8회 전국 무술대회' 성황리에 개최/ 2년전, 2009년 3월 30일/ ...주최 '제8회 전국 무술대회' 학생체육관에서 성황리에 개최! 예천군무술협회(총재 하성호, 환경일보 부장)가 주최하고 예천군, 예천군의회, 예천경찰서, 예천교육청, 환경일보, 안동 MBC가 .../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하성호 : 한국프로태권도협회 주최 전국무술대회-내일(28일) 개최/ 2년전, 2009년 3월 27일/ 예상되어 어려운 지역 경기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프로태권도협회 하성호 총재(환경일보 기자, 부장급)는 "본 경기에 앞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무술수련을.../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하성호 : 예천군 2007년도 국.도.군정 추진 유공자 시상식!/ 4년전, 2007년 12월 26일/ (상리 석묘리), 김세진(바르게살기 예천군협의회), 이경숙.이영자.김순자(여성자원활동센터), 하성호(환경일보 부장), 박명순(수지침봉사회), 김욱기(보문 미호리), 엄재상(노상리), 이태섭(대심리.../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하성호 : 예천동부초등학교총동문회cafe/ 예천초등총동창회 및 전국무술대회-예천인터넷뉴스/ 5년전, 2006년 6월 12일/ 한편 같은 시간 학생실내체육관에서는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제7회 전국무술대회가 하성호 회장(한국프로태권도협회), 김윤태 예천교육장, 박헌규 부군수, 임원 및 선수, 주민 등 2천여 명이.../ cafe.daum.net/yceast(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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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韓潔) : 용궁현(龍宮縣) 출신, 1414년(태종 14)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司馬榜目)
한결 : 광주안씨 서령공파 파조(안철산) 숙부인 안산김씨/ 3년전, 2008년 7월 18일/ 歷諸曹參判。■文宗朝常奉表朝大明。還至平壤。聞朝廷以罪遠問。自刃其胸而卒。 朴游藝。趙壽山 平壤君?之子。 韓潔 居龍宮。 李恭全。禹傅。洪柔克。裵閑 星州人。後登第。父規及弟閏。三父子皆爲諫官。士林美之。 全初。李協.../ blog.daum.net/yescheers/ 안 산 김 씨(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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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환(韓文煥) : 1943- , 예천 출생, 62년 예천농고, 66년 연세대 법학과 졸업, 72년 (주)대한항공 입사, 91년 동 김포국제여객운송지점장(이사 대우), 93년 동 뉴욕여객지점장, 94년 동 이사ㆍ공항여객서비스BU장, 99년 동 김포국제여객운송지점장 겸 신공항건설운영본부장(상무), 2003년 동 종합통제부담당 전무, 한국공항(주) 대표이사 전무, 2005년 동 대표이사 부사장(현)이다.(韓國經濟 2003.1.22,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每日名鑑 2005)
한문환 [사이트] : 한문환 -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공항 대표이사, 인물정보./ www.fki.or.kr/members/popup/officerinfo.aspx.../ 인물 > 경영자(daum 2011)
한문환 : [항공사지상직정보]-[항공사지상직국비지원] 한국공항 대한항공 지상조업.../ 2달전, 2010년 12월 3일 (금)/ 잡코리아 기업정보 KAS[항공사지상직연봉] 기업정보 업종운송(육상·해운·항공)·운수·물류대표자명 한문환 사원수 3,000명 설립년도 1968년 자본금158억원 매출액 2640억원 기업형태·규모 대기업 상장여부 비상장.../blog.daum.net/jobclick/ ♡ JOB Factory ♡(daum 2011)
한문환 : (20일) 일양약품 등/ 2년전, 2009년 3월 20일 | 한국경제 . ▲건설화학공업=사외이사 노영욱 선임. ▲CJ CGV=대표이사 하대중에서 강석희로 변경. ▲한국공항=대표이사 한문환에서 이명기로 변경. ▲웅진씽크빅=대표이사 최봉수 등 2인에게 총 7만5000주의 주식매수선택권 부여. ▲중외제약...(daum 2011)
한문환 : 한국공항, 이명기氏 대표이사 선임/ 2년전, 2009년 3월 20일 | 아시아경제 | 미디어다음/ 한국공항이 한문환 전 대표이사의 임기만료에 따라 이명기씨를 대표이사에 선임했다고 20일 공시했다. 이 대표는 한국공항 총괄전무 등을 역임했다.// 한국공항, 대표이사 변경/ 2009.3.20 | 아주경제신문// 한국공항, 이명기 신임 대표이사 선임/ 2009.3.20 | 뉴스핌// 관련기사 총 4건(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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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호([進步에 길을 묻다 7] ꡒ分黨으로 兩黨 모두에게 도움 됐다ꡓ) [記事] : ●민주노총 지도부를 사상 처음 직선제로 뽑는다는 데도 국민들은 아무도 이를 모르는 사실이 민주노총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것 같다? =맞다. 규약대로라면 지금 단계에서 조합원들에게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알리는 일마저 소홀했다. 직선제를 도입하는 규약 개정만 해놓고 초래할 상황들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하지 못했다. 크게 두 가지 쟁점이 있는데 투표권을 전조합원에게 줄 것인지, 조합비를 낸 조합원에게만 줄 것인지가 있고 두 번째는 투표소 설치 문제가 있다. 첫 문제는 조합비를 내야 하는 질서가 무너질 수 있고 두 번째로는 투표소 설치와 감독을 엄밀히 할 것인지, 모든 조합원 사업장에 설치할 것인지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창피한 얘기지만 경남본부, 대전본부, KT노조 등 부정투표 논란 등의 문제가 현재도 불거지고 있는데 투개표에 대해 감독이 제대로 안되면 필히 부정선거 시비로 갈 거다. 해답을 못 찾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선거를 연기하자, 아예 직선제를 없애버리자, 직선제는 가되 경선 대신 통합지도부를 구성하자, 민주노동당 식으로 임원 후보가 다 나가 1위가 위원장하자 다양한 얘기가 나오는데 지도부 보궐선거 뒤에 본격화될 것이다. 보궐선거 지도부가 곧바로 해결해야할 난제 중의 하나다. ●금속노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기업 노조의 한계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금속노조인데? =민주노총과 같은 맥락에서 금속노조도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그래도 금속노조가 민주노총에서는 가장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파업하라면 파업하고 비정규직 사업에 관심을 쏟고 있고 사회문제 실천에서 앞서 있다. 내부에서 논란이 있지만 정갑득 위원장 기자회견에 정부나 자본측에선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일자리 나누고 지키기에 협력하자는 메시지는 민주노총 바깥에 던진 메시지에 의미가 있다. 그나마 건강성이 확보되는 것은 역사성 때문이다. 87년에 주축이었고 전노협 시대 큰 싸움을 어렵사리 계속 해내 노조를 지켜냈다. 여기에 정파의 순기능 덕도 있다. 서로 조합원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다보면 조직이 발전하는 측면도 있다. 또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학습된 조합원과 활동가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이유도 있다. ●민주노총 안에서의 정파간 갈등을 풀려는 움직임은? =ꡐ다름ꡑ의 문제를 ꡐ틀림ꡑ의 문제로 대응하고 판단하는 한국적 풍토가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을 향한 비판이 내부를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지난 98년 노사정 합의와 총사퇴 이후 정파갈등이 매우 심각해 대의원대회가 무산되고 유회되는 등의 일이 반복됐다. 선거에서의 격렬한 갈등 때문에 민주노총 힘이 반감되는 상황에 이르는 점을 보고 어느 쪽이 집행부가 되더라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인식이 싹텄다. 사실 성폭력 파문이 터지기 전인 2009년 1월 21일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정파들의 비공개 간담회가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 분당은 정말 불가피했나? =분당 뒤에 친한 동지가 ꡐ같이 운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함께 운동할 사람에게 종북파란 딱지를 붙였는데 평생 괴롭지 않겠느냐.ꡑ고 얘기했을 때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평생 안고 갈 부담이라 생각했다. 선도탈당파가 내세운 분당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종북주의 문제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이 나왔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격렬한 내부 논쟁이 있었다. 다수파인 자주파는 미국에 맞선 자위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고 평등파는 모든 핵을 용인해선 안된다는 것이 진보란 이유로 반대했다. 일심회 때도 자주파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평등파는 공당의 정보를 북한 정보원에 넘기는 건 해당행위란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었다. 둘째 패권주의 문제인데 다수파가 선거 때마다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비 대납, 대리투표, 위장전입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상황이 몇 년 간 누적된 것이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그것이 왜 문제냐는 태도를 보이거나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 아니냐고 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우리로선 맞서서 타락하든가 결별하든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보았다. 난 개인적으로 패권주의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통합을 하든 할 수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 통합이 안된다고 본다. 그 이유는 자주파가 패권주의적인 양태를 보여왔던 것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1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선거를 보고 다수파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이쪽에서 ꡐ오버ꡑ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법한데?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2001년 용산 지구당을 만들자고 해서 사업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인천에서 100여 명이 당적을 용산으로 이동하면서 빼앗아갔는데 그들 중에 결혼하지 얼마 안된 부부에 남성들이 몇 명 얹혀 사는 것이 확인됐다. 대리 투표 문제가 잦아 징계도 많이 줬는데 고쳐지지 않았다. 조승수 전 의원이 당대표 경선 나갔을 때는 그가 당선되면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다른 문자메시지를 날린 것이 확인됐다. 종북파란 안 좋은 감정을 갖고 한 표현보다는 자주파가 적절한데 분당 과정에서 그쪽의 핵심 리더를 만나 ꡐ절망스럽다. 한 당에 같이 하려면 룰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룰이 지켜질 수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상대에게 나가버려 라고 하는 것과 같다.ꡑ고 따졌더니 ꡐ몰상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판단의 차이ꡑ라고 하더라. 그 때 분당을 더욱 확고히 결심했다.
●짧은 기간 분당을 밀어붙였다면 반대로 통합할 때도 빨리 할 수 있는 힘이 될 텐데? =두 달만에 (분당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밑바닥에서 용솟음쳐 올라온 힘이 당시까지도 분당은 안 된다는 노회찬 심상정 단병호 시도당 위원장 등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역으로 민주노동당이 혁신하고 이것이 확인되면 각종 선거나 실천에서 연대하고 연합하면 신뢰감이 회복되고 하면 통합하든 상시적인 선거연합을 하든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당했기 때문에 두 당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당선자를 못 냈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는데 사실 분당 않더라도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본다. 노회찬 심상정이 비록 낙선했지만 나름대로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분당 과정에서의 역할을 보고 지지세력이 늘어난 측면도 있다.(분당으로 힘이 약화됐다면) 대선 때 권영길 후보의 낮은 지지율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분당되고 나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 상대보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민주노동당도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오고 진보신당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뭔가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진보신당은) 밑으로부터의 자발성이 살아났다. 민주노동당 같으면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하는데 이제는 자신 소신대로,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논의를 해볼 수 있고 진보신당은 편하게 노선과 흐름에 따라 가는 거다. 우리는 ꡐ촛불당원ꡑ이라 표현하는데 당원 1만 5000명 가운데 60%가 새로 들어온 당원이다. 민주노동당 세대 당원은 40%밖에 안 된다. 새로 들어온 당원들은 ꡒ예전 민주노동당은 맞는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칙칙해 망설였다.ꡓ고 말한다. 진보신당이 뜨면서 칼라TV 같은 거, 과거 같으면 ꡐ어느 쪽에서 하지.(다른 쪽에서 하는 거라는 말 듣고) 그럼 안 되지.ꡑ하는 식으로 바로 막혔는데 지금은 제안하고 실천하면 바로 사업이 돼버리는, 창의성과 역동성이 발현되는 측면이 있다. ●앞으로 3~4년 뒤 두 당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동시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 공방과 고민이 있을 것이다. MB정부가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는 기조를 계속하면 민주당과 시민사회를 통괄하는 반MB 전선 구축이라는 난제에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반MB 전선 구축에 찬동하는 이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을 것이고 진보신당 안에선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일 것이고 당론으로는 꿈도 못 꿀 얘기인데 대신 강한 압박을 받을 것 같다. 반MB 전선에서 왜 따로 나가느냐는 강한 압박을 받을 것 같다. 이미 일부에서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반대하는 이도 있고. 진보신당이 왜 그렇게 어렵냐 하면 87년 민중의 당 시절, 독자적인 세력화와 비판적 지지로 갈라졌던 것과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진보신당은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계속 매달려온 사람들이어서 그런 선택은 어려울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앞날을 예측한다면? =민주노동당은 민족주의 정당으로, 진보신당은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자유주의 연합 정당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는 당내 여론의 가장 많은 이가 사민주의로, 27% 정도가 사회주의로 가자는 의견이었다. 진보정당운동 재편의 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 하나이고 사노련과 사회주의정당건설 준비모임 등을 아우른 사회주의 정당으로 갈 것이냐, 진보정당으로 갈 것이냐가 두 번째다.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할 만큼 내용도 실력도 없기 때문에 우회로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언젠가는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민주당과의 반MB 전선에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뜻에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대로 그 안에서 우리 쪽으로 끌어올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됐지 않은가.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대통합을 외치는데?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은 기층 민중의 축과 지배세력의 축이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민중들이 끌고 가려 했던 축에 대해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정희 친일파 지배세력이 끌고 가려 했던 대한민국마저 뭉뚱그려 인정하라고 하면 잘못된 얘기라 할 수 있다. 근거가 잘못돼 있고 본인이 가고자 하는 운동의 길에 설명이 필요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 외람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진보정당 실험은 실패했고 미국식 양당제로 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진보세력은 민주당과 손잡고 가자,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데 난 동의하지 못 하겠다.
●한석호가 걸어온 길?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용산고를 졸업한 뒤 1983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같은 노동자들이 힘들게 살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87년 6월 항쟁 때 처음 구속돼 4개월을 복역했다. 박종철이 사망하기 일주일 전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다. 이듬해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 22년째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다. 인노협 선봉대로 역량을 인정받은 그는 90~95년 전노협 선봉대와 조직 쟁의를 담당했고 96년 민주금속연맹을 조직해 쟁의 담당으로 일했고 98년 금속연맹(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등에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서울의 경찰서란 경찰서는 다 가봤다고 할 정도로 각종 집회와 시위 등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스스로도 ꡒ수만 명 앞에서 선동하는 것은 겁이 나지 않은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잔뜩 긴장한다.ꡓ고 너스레를 떨 정도. 1999년 주 40시간 쟁취투쟁과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에도 구속돼 ꡐ별ꡑ이 세 개인 그의 복역 기간은 2년 1개월로 상대적으로 짧은 편. 2004년 노조운동 진영 안의 최대 정파로 불리는,ꡑ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 전진ꡑ 창립을 주도해 임시의장, 조직위원장, 집행위원장 등을 맡았다. 2007년 민주노동당 분당기획 문서 ꡐ진보신당을 창당하자ꡑ를 작성하고 기획자 및 조직자를 차처했다. 2008년부터 진보신당 확대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08년 말부터 노동운동 판에서 초유의 일로 보이는 ꡐ노동운동과 나ꡑ란 제목의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2009년 1월 24일 이후 연재가 끊긴 것은 성폭력 파문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이라고 하면서 조만간 다시 시작해 연말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분당 고민하면서부터 진보신당 창당까지 시간대별로 일지를 기록할 정도로 꼼꼼한 면모가 있다. 어딜 가나 무지개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평등 자유 민주 생태 여성 소수자 양심적인 기업인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상과 이념을 존중하는 사회주의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진달래 사회주의를 하고 싶다는 얘기도 곧잘 곁들이는데 진달래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는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ꡑ사막에 홀로 떨어져도 운동의 씨앗을 뿌리자.ꡓ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했다.(서울新聞 200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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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