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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918:홍언충(3)-홍여하(사간)(1)(祝예천중,박상우,선생님들)
작성자장병창 @ 2012.05.16 06:14:32

 

  예천의 자랑(2918) : 홍언충(대제학)(3)-홍여하(사간)(1)(附 예천중, 12일 양궁 전국대회 단체전 2위...축하합니다/예천군 박상우, 14일 도체 최우수선수상...축하합니다/예천 선생님들, 15일 스승의 날 정부 포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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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언충 [專門資料] : [간행물] 子伯母夫人挽/ 홍언충(洪彦忠)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홍언충 [專門資料] : [간행물] 藏義洞卽事/ 홍언충(洪彦忠)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홍언충 [專門資料] : [간행물] 항왕충신(項王忠臣)/ 항왕(項王)|정당시(鄭當時)|지씨(智氏)|예양(豫讓)|호원(胡元)|채자영(蔡子英)|소식(蘇軾)|야은(冶隱)|장릉(莊陵)|연산(燕山)|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이해(利害)|정군(鄭君)|대부(大夫)|제배(除拜)|의열.../ 이익(李瀷)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홍언충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四月初四日酉時, 上御熙政堂。夕講時/ 得載|景夏|彦好|景夏|孔子|子羽|景夏|金尙迪|景夏|景夏|景夏|鄭羽良|景夏|景夏|李延慶|延慶|趙光祖|延慶|光祖|光祖|光祖|李滉|盧守愼|燕山|延慶|世佐|延慶|洪彦忠|延慶|彦忠|延慶|貴達|延慶|金湜|金湜|晩|景夏|晩(daum 2011)

 

  홍언충 [專門資料] : [간행물] 연산조(燕山朝)의 절신(節臣)/ 홍언충(洪彦忠)|직경(直卿)|우암(寓菴)|귀달(貴達)|김안로(金安老)|이장곤(李長坤)|중종(中宗)|장순손(張順孫)|이장곤(李長坤)|우암(寓菴)|유기창(兪起昌)|중종(中宗)|김숭조(金崇祖)|남세주(南世周)|희지(禧之).../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홍언충 [專門資料] : [간행물] 군미(君美)를 곡(哭)하다./ 직경(직경(直卿) 조선조 성종(成宗), 중종(中宗) 때의 문신인 홍언충(洪彦忠)의 자(字)이다.)의 무덤가 나무 벌써 굵어졌고 / 直卿宰木曾成拱/ 이행(李荇)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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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여하(洪汝河) :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용궁현(龍宮縣) 율곡(栗谷) 출신, 한때 용문면(龍門面)에 살았다. 자는 백원(伯源, 百源)ㆍ도견(圖見)ㆍ일청,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림(缶林, 缶溪), 대사간 호(大司諫鎬)의 아들, 여렴(汝濂)의 동생, 여잠(汝潛)의 형, 우복 정경세(愚伏鄭經世)의 제자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54년(효종 5) 식년 진사시에 2등 23위로 합격, 동년 식년 문과에 을과 5위로 급제하였다.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어 설서(說書), 전적(典籍),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러 효종에게 충언(忠言)의 소(疏)를 올려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으나 당로자의 배척을 받아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효종 9) 다시 나아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고, 왕의 하문(下問)에 의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상소(上疏)의 내용 중에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이조 판서 송시열(吏曹判書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면(赦免)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하여 복제 문제(服制問題)로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방, 다시 등용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이어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특명되었으나 숙환으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전고(典故)에 밝고 문장에도 능해 당시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주자학(朱子學)에 밝아 당시 사림(士林)들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고,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고, 저서로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儀禮考證)>, <여사휘찬(麗史彙纂)>, <동사제강(東史提綱)>, <용학구의(庸學口義)>, <해동성원(海東姓苑)>, <경서해의(經書解義)>가 있다. 후손은 풍양면 구룡동(九龍洞)에 산다.(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龍宮縣邑誌 1780, 韓國人의 族譜, 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홍여하(洪汝河) : 브리태니커/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다. 어려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배웠다. 1654년(효종 5) 진사가 되었으며,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설서·전적·정언을 거치면서 경연(經筵)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했으나, 효종에게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가 서인의 배척을 받아 고산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다음해 파직당했다. 1658년 경성판관으로 복귀하여 다음해 제1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宋時烈)의 기년복론(朞年服論)을 공격하고 윤휴(尹?)의 3년복론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자 1660년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유배에서 풀렸으나 복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삼택재를 짓고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좌랑·사간을 역임했다.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 〈주역구결〉·〈의례고증〉·〈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국통감제강 東國通鑑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daum 2011)

 

  홍여하 : 금강산-81. 홍여하(洪汝河)의 풍악만록(楓嶽萬錄)/ 작년, 2010년 9월 26일/ 홍여하(洪汝河)의 풍악만록(楓嶽萬錄-木齋集) 가. 작자소개; 홍여하(洪汝河-1620∼1674)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광해군/현종 때 사람이다.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다. 1654년.../ cafe.daum.net/ck.seo/ 물이고구름이어라(daum 2011)

 

  홍여하 : [스크랩]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 타문중자료; 영남 서원/ 이한방 2010.05.13. 19:45/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 목재 홍여하(1620~1674)는 학문과 문장으로 꽃 핀 인물이다. 당시 영남 사림에서는 영남 문장 사대가로 우복(愚伏), 동강(東岡), 창석(蒼石)과 함께 목재를 꼽았다. 학맥상으로는 전통적인 가학을 이어받았다. 그에 5대조는 유명한 허백(虛伯) 귀달(貴達)이다. 아버지는 홍호(洪鎬: 1586~1646)는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선조 39년에 문과에 올라 승정원 박사가 되었으므로 뒤에 대사간이 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은 종적으로는 유가집안의 학통을 이어받으면서 횡적으로는 경북북부 유학자들의 학통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휘찬여사목판(彙纂麗史木板), 목재 홍여하가 『고려사』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사림의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하였다. 그의 학문의 경지는 넓었다. 도학을 본으로 삼았으나 사학에도 심취하여 실증사관에 의해 우리나라의 사서를 찬술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사서의 연구와 저술도 많이 남겼다.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휘찬여사彙纂麗史](48권)등의 역사서와 [용학구의庸學口義][의례고증儀禮考證][목재집木齋集] 등이 그 것이다. 그는 광해 12년에 안동부 동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 외에도 산택재(山澤齋) 또는 동락(東洛)이라고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우복이 이를 보고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인조 24년 (1646) 26세 때에는 이미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을 저술했다. 34세때 진사가 되었으며 그해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현종 1년 (1660) 40세 때 고향인 밤실로 돌아와 집을 짓고 집 앞에 못을 퍼서 집 이름을 산택재라 하고 목재라고도 했다. 이 때 세상이 어지러워 그는 오직 양생과 경서에 침잠하여 경의 강론과 소요로 일관했다. 그는 사서 중에서도 특히 중용에 힘을 기울여 이를 해석한 [용학구의庸學口義]를 저술했다. 또한 평생 [주자절요朱子節要]를 눈에서 떼지 않았다. 역학(易學)의 연구도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때때로 조선 사람은 역(易)을 읽을 때 명리에 얽매어 참 뜻을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곤 했다. 현종 11년(1670) 예천의 북쪽 복천림(福泉林)에 옮겨 살면서 존성재(尊性齋)를 짓고 더욱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다. 이때는 그가 육학파(陸學派)의 학문비판에 주력한 때이다. 육학파는 송의 육구연(陸九淵:象山)의 학문을 신봉하는 학파로 명대에 와서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이를 대성하여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주자의 도학이 [진존덕성眞尊德性]이며 육씨의 [덕성]은 기질에 치우친 것이므로 덕성이 아니라고 논변했으며 [제양명집후題陽明集後]의 시를 지어 [양지설良知說]의 헛됨을 읊기도 했다. 헌종 13년(1672)에는 다시 밤실로 돌아와서 우리 역사의 연구와 저술의 힘을 기울여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과 [휘찬여사彙纂麗史][해동성원海東姓苑] 등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들은 모두 그의 실증사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설화적 사실인 단군신화나 삼국시대의 시조신화 등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뒷사람의 위작(僞作)으로 다루어 보려는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끈다.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은태사(殷太師)와 기준왕(箕準王)의 시대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단군 조선의 일천여년 사적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단군신화의 설화적인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삼국사의 앞선 삼한사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마한사(馬韓史)를 중시하고 계통을 이은 것이 신라사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사는 부록으로 붙여놓기도 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왕의 원년(元年)에 대한 것이다.

 

  김부식(金富植)의 삼국사기는 한임금이 죽으면 다음 왕이 즉위해도 그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재는 이와 달리 왕이 즉위한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휘찬려사]는 고려사의 역사를 기술 세가(世家), 지론(志論), 열전(列傳)으로 나누어 서술했으며 부록으로 계단전(契丹傳), 여진전(女眞傳), 일본전(日本傳) 등을 수록해 놓았다. 그의 정치생활은 다난했다. 효종 5년(1654)에 급제한 후 그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효종 7년에는 봉교(奉敎),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바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의 바른 소리가 시사를 논변하는 상소로 나타나자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효종 8년(1657)에는 좌천되어 파면되었다. 이듬해 효종 9년에는 다시 복직. 북쪽의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부임하자 이내 학교를 세워 학동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으며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여 변방의 경계를 보강했다. 효종10년에 왕이 하교하여 그의 경륜을 구했다. 그러자 그는 성학치도(聖學治道)의 요점과 고급관리의 염치(마음이 깨끗하고 결백하고 공정함)에 대해 얘기했으며, 언로를 막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해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현종1년(1660)에는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 이 해에는 곧 유배가 풀렸으며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종 7년에 조대비(趙大妃)에 복제(服制)에 대한 기년설(朞年說)에 대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반대 논의가 관철되지 못하자 이에 영남유림의 논의를 담은 상소를 그가 초(抄)했으나 쓰이지 못했다. 그 후 현종 15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 장(張)씨가 죽자 대왕대비 복제논쟁이 일게 되어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그러자 복제논의에 걸려 귀향 갔던 여러 신하가 풀려나게 되었다. 이 때 목재에게도 벼슬이 내려져 사간원사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지 않았다. 이 해 12월에는 그는 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5세의 한창 일할 나이였다. 숙종 15년(1689)에 그에게 부제학이 추종되었으며 상주의 근암서원(近岩書院)과 경성서원(鏡城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의 죽음으로 영남북부유림에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는 생전에 산두(山斗: 가장 존경받는 이)로 일컬어 종사(宗師)로 떠받들어 질 만큼 경학에 한 경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출처]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 김성규 객원기자 | 안동넷(daum 2011)

 

  홍여하 : 도안서원 이야기/ 3주전, 2011년 1월 29일 (토)/ ...호가 되었다. 어머니가 부림홍씨 문광공(文匡公) 귀달(貴達)의 4세손이다. 그 인연으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생원이 되고,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추천으로 광릉 참봉을.../ cafe.daum.net/poongryuhahoi/ 풍류하회(daum 2011)

 

  홍여하 : 한산이씨(韓山李氏)/ 지난주, 2011년 2월 8일 (화)/ 목은(牧隱)의 곧은 절개, 깨끗하고 고매한 품격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시(詩)다. 홍여하(洪汝河)는 일찍이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이 근원이며 이규보(李圭報)가 다듬어 윤을 내고 이제현(李齊賢.../ cafe.daum.net/ihwawolbaek/ 이화에 월백하고...(daum 2011)

 

  홍여하(洪汝河) : 본관(本貫) 부림(缶林) 부계(缶溪), 시대(時代) (1621-1678), 자(字) 백원(伯源), 호(號) 목재(木齋)/ 이력(履歷)/ 홍여하(洪汝河)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周易口訣》·《의례고증 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사제강 東史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金甲周〉(daum 2011)

 

  홍여하(洪汝河) : 시대 : 조선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정의 : 조선 현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애 :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대박산인(大朴山人)이다. 본관은 부계(缶溪)로 경북 안동(安東) 출신이며, 홍호(洪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설서(說書)·전적(典籍)·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이 때 경연(經筵)에서 시(詩)와 『주례(周禮)』 등을 강학(講學)하였다. 1658년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학교(學校)를 일으켰으며, 이듬해 예송(禮訟)에서 송시열(宋時烈)과 반대 입장에 섰다. 1660년(현종 1)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율리(栗里)에 돌아가 산택재(山澤齋)를 짓고 강학과 학문연구,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 제2차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西人)이 실각하고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자 병조좌랑에 이어 사간(司諫)을 지냈다. 그는 경서(經書)에 침잠하여 사서(四書)와 『주역(周易)·『시경(詩經)』·『서경(書經)』의 독서차기(讀書箚記)를 썼으며, 또한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일명 東史提綱)·『해동성원원(海東姓苑源)』 등을 편찬하였다./ 사상 : 그는 어려서 성리학 연구에 뜻을 두고 학문하면서 한양에 있던 정경세(鄭經世)를 찾아가 문학(問學)하였는데, 이 때 정경세가 『중용(中庸)』 수장(首章) 장구(章句)의 뜻을 묻자, "만약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되 리(理)가 역시 품부(稟賦)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가 먼저고 리가 나중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본구(本具)'자로 대신한다면 '부(賦)'자의 뜻이 잘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학(禮學)에 특히 조예가 깊어 예송이 날 때 송시열과 입장을 달리하였는데, 영남인(嶺南人)을 대표하여 상소문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이용후생(利用厚生)에도 관심을 두어 '경술(經術)로 본(本)을 삼고 다스림과 이용(利用)도 갖추는' 학문을 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저서 : 저서에 『목재집(木齋集)』이 있고 편서(編書)에 『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해동성원원』·『여사휘찬(麗史彙纂)』·『동국통감제강』·『경서해의(經書解義)』가 있다./ 기타 :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고,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었다.(daum 2011)

 

  홍여하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홍여하(1621-1678)는 용궁현(龍宮縣) 출신으로서 한동안 용문면에서 살았다. 자는 백원(伯源),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림, 호(鎬)의 아들, 정경세의 제자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이어서 같은 예문관에서 대교, 봉교 등으로 승진하고 사간원 정언에 이르러 효종 임금께 충성스런 상소문을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았으나 반대 당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도 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효종 9)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성 판관이 되었다. 임금의 물음에 답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상소문의 내용 중에 이 후원을 논박한 구절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이조판서 송시열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홍여하는 황간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1660)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숙종 임금이 즉위하여 상복제도 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이 추방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병조 좌랑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 사간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숙환으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고전에 밝고 문장에도 능하여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홍여하의 제자였고, 주자학에 밝아 당시 선비들의 스승으로 일컬어졌다.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사서발범구결>, <주역구결>, <의례고증>, <여사휘찬>, <동사제강>, <용학구의>, <해동성원>, <경서해의>가 있다. 후손은 풍양면 구룡동과 용문면 등지에서 살고 있다. <장병창 논설위원>(www.shinjongwoo.co.kr(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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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중, 12일 양궁 전국대회 단체전 2위...축하합니다.

 

  예천중학교(醴泉中學校 全國 種別洋弓 選手權 大會 團體戰 2位 個人戰 60m 3位 入賞) [記事] : 2012년 5월 10일부터 12일까지 충북 청주에서 개최된 제46회 전국 남녀 양궁종별선수권대회에서 관내 예천중학교 양궁팀이 중등부 단체전 2위(송창협, 김동일, 양희우, 송동준)와 60m 개인전에서 3위(송창협)로 입상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예천중학교 양궁팀(감독 금휘섭)은 5월 25일부터 경기도 안산시에서 열리는 전국소년체전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훈련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醴泉인터넷放送 2012-05-15 오후 3: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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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박상우, 14일 도체 최우수선수상...축하합니다.

 

  경북도민체전 2012(第50回 慶北道民體育大會 閉幕式  : 醴泉郡 立場賞에서 郡部 2位 차지, 最優秀選手賞 醴泉郡 박상우 選手 受賞) [記事] : 제50회 경북도민체전이 도민의 관심과 열광 속에 2012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구미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는 ‘도민체전 반세기 구미에서 미래로’라는 슬로건 아래 어느 대회보다 우렁찬 함성과 열기로 가득했으며, 각종 공연과 전시 등 다채로운 문화 예술행사를 통회 대회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대회결과 시부 종합성적은 1위 포항시, 2위 구미시, 3위 경산시이고, 군부 종합성적은 1위 칠곡군, 2위 울진군, 3위 성주군이 각각 차지하였으며, 성취상에는 영천시와 고령군이, 모범선수단상에는 영주시와 청도군이, 입장상은 시부 1위 안동시, 2위 문경시, 3위 김천시와 군부 1위 의성군, 2위 예천군, 3위 봉화군이 차지했다. 한편, 최우수선수상은 육상 트랙에서 4관왕을 차지한 예천군 박상우 선수가 수상하였다. 한편 이번 도민체전에는 경상북도와 체육교류협정을 체결한 인도네시아 서자바주 육상선수 11명이 전 경기를 관람하며 수준높은 선수들의 기량에 부러움을 나타냈다. 인도네시아 서자바주 선수 110여명은 8월말까지 경북도내에서 전지훈련을 받게 되는데 본진은 6월 1일 입국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내년 제51회 경북도민체육대회는 김천에서 개최된다.(醴泉뉴스 2012년 0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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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선생님들, 15일 스승의 날 정부 포상...축하합니다.

 

  예천교육청(스승의 날 政府 褒賞者 名單) [記事] : <교과부장관표창> △예천초 박점이 △은풍초 윤종구 △유천초 김태한 △예천여고 예수희 △예천중 장금익 △예천여중 이재익/ <교육감표창>△지보초 이준호 △예천남부초 지정수 △용궁초병설유치원 박강희 △풍양중 천미경 △대창고 정억진 △지보고 배준규/ <도지사표창> △예천초 조동직(大邱日報 2012-05-1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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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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