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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932:홍하량(학자)-홍하적(학자)-홍현기(교수)(1)(祝군청,배드민턴/예천방문864)
작성자장병창 @ 2012.05.30 06:09:27

  예천의 자랑(2932) : 홍하량(학자)-홍하적(학자)-홍현기(교수)(1)(附 예천군, 기금운용 성과분석 전국 우수자치단 선정...축하합니다/예천군, 25일 배드민턴 도대회 우승...축하합니다/예천방문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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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하량 : 1588(선조 21)-1632(인조 10), 용궁현 출신, 자는 군수,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부림, 홍문박사 언방의 현손자, 수약의 아들, 학봉 김성일의 외손자, 경당 장흥효의 제자이다. 성리학에 뛰어나 '학문의 요체를 얻었다'라고 칭찬받았고, 한강 정구는 '독학 군자'라고 했다. 저서로 <誠齋先生自警錄>, <성재집>이 있다.(인터넷 Alta Vista 2001)

 

  홍하량 [專門資料] : 홍하량의 성재자경록 표지자료/ 유형 전문사전/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소개 : 대부분의 시문들이 산실되고 (자경일록(自警日錄))만 남은 것을 1830년(순조 30) 후손들이 2책으로 편집, 7대손 명주(命疇)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재편, 1871년(고종 8)에 간행.(daum 2011)

 

  홍하량 [專門資料] : 홍하량의 성재자경록/ 전문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daum 2011)

 

  홍하량 : 문집명 성재자경록 (誠齋自警錄)(17c)/ 간략서지 : 誠齋 洪河量의 일기. 목활자본. 4권 2책./ 간략해제 : 권두에 前 형부시랑 李敦禹가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1836년 후손 洪宗九가 쓴 발문과 1871년 洪殷標·洪命疇가 쓴 後識가 있다. 識에 따르면 遺文과 언행록 등이 모두 散佚되고 일기문인 ≪自警錄≫만 남은 것을 1830년(순조 30) 후손들이 2책으로 편집하였다가, 그 후 40년이 지난 1871년(고종 8)에 7대손 명주의 주도로 간행된 것이다. ≪자경록≫은 빠진 날짜가 많이 있지만, 1607년(선조 40) 10월 6일부터 1628년(인조 6) 3월 1일까지 20여 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권1의 첫머리에 “매일 매일의 과실을 기록하여 종신토록 스스로 경계하려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자신을 절제하며 성현의 뜻을 쫓아 居敬窮理의 삶을 살고자했던 저자 자신의 반성의 기록이다. ≪자경록≫이 끝나는 권4의 말미에는 鶴駕山에 가서 읊은 遊山詩 1편과 외삼촌 金潗에게 올린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李玄逸과 李嵩逸이 쓴 행장 2편과 權愈가 찬한 묘갈명, ≪咸寧誌≫와 ≪嶺南人物考≫의 저자에 관한 부분, 스승인 張興孝와 金應祖·金昌祖의 만사, 柳元之가 쓴 제문 등이 실려 있다. ≪자경록≫을 통해 17세기 성리학자의 일상생활과 삶을 대하는 엄격한 자세 등을 알 수 있으며, 몇몇 일기에는 김성일의 외손자로서 당대 영남 남인의 명사들과 어울렸던 상황들이 적혀 있어 그들의 사상적·정치적 동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편저자  홍하량 (洪河量) : 저자개요 1588-1632 (선조 21-인조 10) 字: 君受, 號: 誠齋, 本貫: 缶溪, 父: 守約, 母: 義城 金氏/ 저자내용 : 金誠一의 외손으로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임진왜란 때 외삼촌댁에 의탁하여 자랐다. 勤實한 외가의 도학적 가풍에 영향을 받아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스승인 張興孝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오직 爲己之學으로서의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柳袗(1582-1635), 金應祖(1587-1667) 등 당대 영남 남인의 쟁쟁한 명사들과 교유하며 평생 학문에 힘썼으나 성리학에 관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시문들은 散失되고 일기문인 ≪自警錄≫만이 전한다./ 내용제목  誠齋自警錄/ 내용개요 : 제목 없음. 1870. 후손 命疇의 부탁으로 李敦禹가 쓴 서문. 20년간 일기를 쓰며 자신의 과실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경계하는 삶을 살았던 홍하량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군자의 삶을 산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권제 권제목:卷之一 : 丁未-大明萬曆三十五年我宣祖大王三十九年 (1) 1607. 10월 6일부터 12월 26일까지의 일기. 매일매일 기록한 것은 아니고 경계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때마다 옛 풍속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祠堂에 昏定晨省하는 풍속이 사라짐을 염려하면서 더욱 勉勵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거나, 부모님이 계실 때 개나 말에게도 큰소리치지 않았던 옛 풍습을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밖에 一身의 過失이 모두 마음에서 오니 마음과 기질을 잘 다스릴 것을 다짐하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戊申 (3) 1608. 1월 2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기. 戰戰兢兢하는 조심성있는 태도로 克己復禮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古人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남을 공경하면 남도 자기를 공경하고? 자신이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면 남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주로 맹자와 주자의 말이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12월 4일자에는 스승 張興孝에게 “窮理以致其知? 反躬以踐其實”이라는 주자의 말에 대해 물음을 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己酉-光海元年 (7) 1609. 1월 2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일기. 內兄 金是樞와 南汝敬? 權景元 등 서당 친구들과 鶴峯 金誠一의 山亭인 石門에 가서 매화를 구경했던 일(3월 15일)과 친우 金應祖·金念祖 등과 함께 族長 權宅甫(1580-1651)를 방문했던 일(10월 23일) 등이 적혀 있다. 대개는 古人과 경전의 말을 되새기며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다./ 庚戌 (13) 1610. 1월 4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 밤에 꿈꾼 것이 亂雜했음을 경계하며 낮동안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정결히 할 것을 다짐하거나(2월 28일)? 취침시에도 手足과 생각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古人의 말을 되새기는 등(4월 15일) 잠자리에서까지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는 도학자로서의 철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 親友·親知들과의 교유 사실이 짤막하게 자주 기록되어 있다./ 辛亥 (25) 1611. 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일기. 마을의 慶老宴에 참석하거나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새삼 母情의 깊음을 느꼈던 일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과 그에 대한 所懷를 적은 것이 주를 이룬다. 이 밖에 주자의 讀書三到를 발췌하며 潛心讀書하는 자세를 되새기거나? 居敬하는 삶으로 嗜慾을 다스리고 道心을 기를 것을 다짐하는 내용 등 성현의 삶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 또? 鄕試에 참석했던 유생들이 과거시험문제로 考試官과 논쟁하다 罷散해버린 일(9월 4일) 등 당대에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이 간간이 기록되어 있다./ 壬子 (38) 1612.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 전년과 다름없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자기반성? 경전의 내용을 발췌한 독서 기록 등이 주를 이룬다. 낮잠을 자다 공자에게 꾸중을 들은 宰予가 게으른 습관을 고쳐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경계했음을 들어 賢者라고 칭송하는 내용(2월 4일)과 정자와 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寡慾이 致知와 良知를 이루는 기본임을 밝히는 내용(11월 22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癸丑 (43) 1613. 1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의 일기. 실제로는 1월과 4월의 일기만 기록되어 있어 다른 년도에 비해 매우 소략한 편이다. 독서 기록은 거의 없고 이웃과 친지를 방문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乙卯-甲寅脫 (44) 1615. 3월 22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일기. 전년도의 일기처럼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인근의 마을 어른과 친지들을 방문한 기록, 벗들과의 교유, 친척들의 訃音과 제사 등을 기록하고 있다./ 丙辰 (48) 1616. 7월 12일부터 12월 4일까지의 일기. 스승 張興孝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다. 선생이 性·道·誠·忠·恕 다섯 글자의 뜻을 강론하던 일? 스승을 모시고 寒岡 鄭逑(1543-1620) 선생을 맞이하러 醴泉에 갔던 일? 스승과 함께 식솔을 거느리고 艾蓮寺에 가다가 鶴駕山에서 길을 잃어 고생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丁巳 (58) 1617. 5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일기. 金孝錫·金子峻·柳袗 등과 石門亭에 갔던 일과 權善養·李景涉·李君涉 등과의 만남, 벗 大仁과 함께 ≪孟子≫를 강론했던 일 등 주로 친구·친지들과의 교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스승에게 ≪詩傳≫을 배우고 ≪心經≫중의 未發已發에 관한 장을 배웠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戊午 (64) 1618. 6월 24일부터 12월 7일까지의 일기. 6월과 7월, 10월은 하루치의 일기만이 간략히 적혀 있고? 9월은 빠져 있는 등 실제 기록된 날은 매우 적은 편이다. 선생에게 未發의 의미에 관한 강의를 들었던 일과 여러 벗들과의 교유 사실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己未 (1) 1619. 1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의 일기. 선생께 ≪周易≫兌卦를 강의받던 일? ≪詩傳≫ <鹿鳴>편과 ≪논어≫의 의문나는 구절을 여쭌 일 등이 적혀 있다. ≪맹자≫의 “恥之於人?大矣”와 ≪대학≫의 愼獨에 관한 장을 베껴 적으며 매사에 反求諸身하며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내용도 보인다. 5월에는 가뭄이 심해 농사일을 걱정하는가 하면? 7월에는 大雨大風으로 곡식이 많이 상하고 논밭이 침몰했다고 기록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염려하고 있다./

 

  庚申 (11) 1620. 1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의 일기. 寒岡 鄭逑의 부음을 듣고 슬퍼하는 내용(1월 17일)? 친우 權善養이 疫에 걸려 목숨을 잃은 일과 어머니께서 돌림병을 피하여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한 일(1월 26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1월에는 屛山과 臨川 儒生 등 200여 명이 廬江에 모여 西厓 柳成龍(1542-1607)을 배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辛酉 (16) 1621. 1월 1일부터 10월 27일까지의 일기. 서당에서 선생에게 朱書를 배운 일과 어머니께서 병환에 걸려 걱정했던 일, 도산서원을 방문했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마을의 원생들과 醴泉 유생들이 廢母殺弟의 대역 죄인으로 李爾瞻(1560-1623)을 성토한 일(6월 24일) 등이 적혀있어 인목대비 폐위에 관한 당대 유생들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癸亥-壬戌脫 (27) 1623. 6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의 일기. 벗들과 함께 吳山書院에 가서 旅軒 張顯光(1554-1637) 선생을 뵈었던 일 등 친우? 스승과의 교유사실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선비들이 과거시험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해서 베껴 적는 일이 습속이 되었음을 개탄하는 내용 등이 있지만? 대개는 친지들의 상례와 제사? 저자의 독서기록을 간략히 적고 있다./ 甲子 (34) 1624. 1월 1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일기. 선생에게 ≪심경≫·≪근사록≫을 강론 받던 일 등 대부분은 예년과 다름없는 독서·생활기록이지만? 시국과 관련하여 李适(1587-1624)의 난 때의 정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李适이 韓明璉 등과 반란을 일으키자 巡營方伯이 향교와 서원 등에 통문을 돌려 의병이 일어났던 일? 이괄이 서울을 점령한 후 이내 敗退하기까지의 과정 등이 날짜 별로 적혀 있다.(1월 29일-2월 18일) 또 3월 24일에는 前 慶尙監司였던 閔聖徵(1582-1647)가 이괄의 난 때 영남의 道內 유생들이 관망하였다는 啓를 올려? 이를 辨誣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마을 유생들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丁卯-乙丑丙寅兩年脫 (41) 1627. 7월 26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 별다른 독서기록은 없고? 어머니께서 병환에 걸려 걱정했던 일? 친지의 제사와 상례에 참석한 일? 벗들과의 교유 상황 등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戊辰 (46) 1628. 1월 1일부터 3월 1일까지의 일기. 家廟와 外祖廟에 參禮했던 일? 숙부 등 여러 친지들을 방문했던 일 등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다른 년도의 일기에 비해 매우 소략한 편이다./ 詩 (49) 與同門諸友往鶴駕山次同遊絶句/ 祭內舅洗馬公文 (49) 외삼촌인 金潗을 추모하는 제문.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댁에 의탁하여 자란 일을 추억하며 외삼촌의 은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권말 권제목:附錄/ 丁未-大明萬曆三十五年我宣祖大王三十九年 (1) 1607. 10월 6일부터 12월 26일까지의 일기. 매일매일 기록한 것은 아니고 경계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때마다 옛 풍속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祠堂에 昏定晨省하는 풍속이 사라짐을 염려하면서 더욱 勉勵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거나? 부모님이 계실 때 개나 말에게도 큰소리치지 않았던 옛 풍습을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밖에 一身의 過失이 모두 마음에서 오니 마음과 기질을 잘 다스릴 것을 다짐하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戊申 (3) 1608. 1월 2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기. 戰戰兢兢하는 조심성있는 태도로 克己復禮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古人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남을 공경하면 남도 자기를 공경하고? 자신이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면 남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주로 맹자와 주자의 말이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12월 4일자에는 스승 張興孝에게 “窮理以致其知? 反躬以踐其實”이라는 주자의 말에 대해 물음을 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己酉-光海元年 (7) 1609. 1월 2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일기. 內兄 金是樞와 南汝敬? 權景元 등 서당 친구들과 鶴峯 金誠一의 山亭인 石門에 가서 매화를 구경했던 일(3월 15일)과 친우 金應祖·金念祖 등과 함께 族長 權宅甫(1580-1651)를 방문했던 일(10월 23일) 등이 적혀 있다. 대개는 古人과 경전의 말을 되새기며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다./ 庚戌 (13) 1610. 1월 4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 밤에 꿈꾼 것이 亂雜했음을 경계하며 낮동안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정결히 할 것을 다짐하거나(2월 28일), 취침시에도 手足과 생각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古人의 말을 되새기는 등(4월 15일) 잠자리에서까지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는 도학자로서의 철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 親友·親知들과의 교유 사실이 짤막하게 자주 기록되어 있다./ 辛亥 (25) 1611. 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일기. 마을의 慶老宴에 참석하거나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새삼 母情의 깊음을 느꼈던 일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과 그에 대한 所懷를 적은 것이 주를 이룬다. 이 밖에 주자의 讀書三到를 발췌하며 潛心讀書하는 자세를 되새기거나? 居敬하는 삶으로 嗜慾을 다스리고 道心을 기를 것을 다짐하는 내용 등 성현의 삶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 또? 鄕試에 참석했던 유생들이 과거시험문제로 考試官과 논쟁하다 罷散해버린 일(9월 4일) 등 당대에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이 간간이 기록되어 있다./ 壬子 (38) 1612.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 전년과 다름없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자기반성, 경전의 내용을 발췌한 독서 기록 등이 주를 이룬다. 낮잠을 자다 공자에게 꾸중을 들은 宰予가 게으른 습관을 고쳐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경계했음을 들어 賢者라고 칭송하는 내용(2월 4일)과 정자와 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寡慾이 致知와 良知를 이루는 기본임을 밝히는 내용(11월 22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癸丑 (43) 1613. 1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의 일기. 실제로는 1월과 4월의 일기만 기록되어 있어 다른 년도에 비해 매우 소략한 편이다. 독서 기록은 거의 없고 이웃과 친지를 방문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乙卯-甲寅脫 (44) 1615. 3월 22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일기. 전년도의 일기처럼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인근의 마을 어른과 친지들을 방문한 기록? 벗들과의 교유? 친척들의 訃音과 제사 등을 기록하고 있다./ 丙辰 (48) 1616. 7월 12일부터 12월 4일까지의 일기. 스승 張興孝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다. 선생이 性·道·誠·忠·恕 다섯 글자의 뜻을 강론하던 일? 스승을 모시고 寒岡 鄭逑(1543-1620) 선생을 맞이하러 醴泉에 갔던 일, 스승과 함께 식솔을 거느리고 艾蓮寺에 가다가 鶴駕山에서 길을 잃어 고생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丁巳 (58) 1617. 5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일기. 金孝錫·金子峻·柳袗 등과 石門亭에 갔던 일과 權善養·李景涉·李君涉 등과의 만남, 벗 大仁과 함께 ≪孟子≫를 강론했던 일 등 주로 친구·친지들과의 교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스승에게 ≪詩傳≫을 배우고 ≪心經≫중의 未發已發에 관한 장을 배웠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戊午 (64) 1618. 6월 24일부터 12월 7일까지의 일기. 6월과 7월, 10월은 하루치의 일기만이 간략히 적혀 있고? 9월은 빠져 있는 등 실제 기록된 날은 매우 적은 편이다. 선생에게 未發의 의미에 관한 강의를 들었던 일과 여러 벗들과의 교유 사실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己未 (1) 1619. 1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의 일기. 선생께 ≪周易≫兌卦를 강의받던 일? ≪詩傳≫ <鹿鳴>편과 ≪논어≫의 의문나는 구절을 여쭌 일 등이 적혀 있다. ≪맹자≫의 “恥之於人?大矣”와 ≪대학≫의 愼獨에 관한 장을 베껴 적으며 매사에 反求諸身하며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내용도 보인다. 5월에는 가뭄이 심해 농사일을 걱정하는가 하면, 7월에는 大雨大風으로 곡식이 많이 상하고 논밭이 침몰했다고 기록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염려하고 있다./ 庚申 (11) 1620. 1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의 일기. 寒岡 鄭逑의 부음을 듣고 슬퍼하는 내용(1월 17일)? 친우 權善養이 疫에 걸려 목숨을 잃은 일과 어머니께서 돌림병을 피하여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한 일(1월 26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1월에는 屛山과 臨川 儒生 등 200여 명이 廬江에 모여 西厓 柳成龍(1542-1607)을 배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辛酉 (16) 1621. 1월 1일부터 10월 27일까지의 일기. 서당에서 선생에게 朱書를 배운 일과 어머니께서 병환에 걸려 걱정했던 일? 도산서원을 방문했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마을의 원생들과 醴泉 유생들이 廢母殺弟의 대역 죄인으로 李爾瞻(1560-1623)을 성토한 일(6월 24일) 등이 적혀있어 인목대비 폐위에 관한 당대 유생들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癸亥-壬戌脫 (27) 1623. 6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의 일기. 벗들과 함께 吳山書院에 가서 旅軒 張顯光(1554-1637) 선생을 뵈었던 일 등 친우? 스승과의 교유사실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선비들이 과거시험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해서 베껴 적는 일이 습속이 되었음을 개탄하는 내용 등이 있지만? 대개는 친지들의 상례와 제사? 저자의 독서기록을 간략히 적고 있다./ 甲子 (34) 1624. 1월 1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일기. 선생에게 ≪심경≫·≪근사록≫을 강론 받던 일 등 대부분은 예년과 다름없는 독서·생활기록이지만? 시국과 관련하여 李适(1587-1624)의 난 때의 정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李适이 韓明璉 등과 반란을 일으키자 巡營方伯이 향교와 서원 등에 통문을 돌려 의병이 일어났던 일? 이괄이 서울을 점령한 후 이내 敗退하기까지의 과정 등이 날짜 별로 적혀 있다.(1월 29일-2월 18일) 또 3월 24일에는 前 慶尙監司였던 閔聖徵(1582-1647)가 이괄의 난 때 영남의 道內 유생들이 관망하였다는 啓를 올려? 이를 辨誣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마을 유생들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丁卯-乙丑丙寅兩年脫 (41) 1627. 7월 26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 별다른 독서기록은 없고, 어머니께서 병환에 걸려 걱정했던 일, 친지의 제사와 상례에 참석한 일, 벗들과의 교유 상황 등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戊辰 (46) 1628. 1월 1일부터 3월 1일까지의 일기. 家廟와 外祖廟에 參禮했던 일, 숙부 등 여러 친지들을 방문했던 일 등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다른 년도의 일기에 비해 매우 소략한 편이다./ 詩 (49) 與同門諸友往鶴駕山次同遊絶句/ 祭內舅洗馬公文 (49) 외삼촌인 金潗을 추모하는 제문.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댁에 의탁하여 자란 일을 추억하며 외삼촌의 은덕을 기리는 내용이다.(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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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하적(洪夏績) : 1659(효종 10)-1741(영조 17), 자는 성필(聖弼), 호는 한산(寒汕), 본관은 남양, 익명(翼溟)의 손자, 이원(履元)의 2자, 문학과 효행으로서 도신(道臣)에 의해 천거되어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는 유천면 당동 동산 재사터 해좌(堂洞東山齋舍터亥坐)에 있다. 예천읍에 도서당(都書堂)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族譜,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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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현기(洪鉉旗) : 1947- , 용문면 원류리 출신, 용원초등(龍元初等), 대창중, 대창고(10회), 홍익대 서양화과, 동 대학원 졸업, 대창중고등학교ㆍ왜관 순심여고(純心女高) 미술 교사, 인천 가톨릭대 교수이다. 83년 제1회 개인전(個人展)을 서울 관훈미술관(寬勳美術館)에서 열었다. 85년 미국 LA Gallery Scope 개인전, 93 95년 일본 오사카 Amano갤러리 개인전, 87 94년 대구 인공갤러리 개인전을 열었다(醴泉新聞 1995.5.25). [김복영 敎授의 評論] : 83년 제1회 '신화전(神話展)' 84년 제2회 신화전, 85년 제3회 신화전, 87년 제4회 신화전, 90년 제5회 신화전을 열었다. 그 간의 변모 과정, 또는 탐색의 특징을 개괄한다면, 그의 정확한 작품 명제인 '신화-태동기'가 말해주 듯이, '신화'라고 말해지는 작가의 내밀한 특수한 체험의 근원적 의미를 묻고자 한다는 점, 이 물음을 작품으로 진치시키는 방법으로서 화면의 단위 전체 속에 검정과 갈색의 얼룩들을 방만하게 배열하되 이 것들이 중첩되면서 발전적으로 화면 전체의 톤을 이룩하며 마침내 예기치 않은 표면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애초에는 커다란 얼룩들의 배열이 두드러졌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조밀하고 담면 효과에로 진입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일반적인 추이를 또한 첨언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일단 '신화'라는 것은 작가의 주관적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체험과 체질, 의식 내용과 정서 등 일체가 용해되어진, 그러므로 해서 한 인간의 정신적 시초를 이루는 그 자신의 숨겨진 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작업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형상보다 질(質)이 중요한데 신화의 본질은 어떤 것인가? 역사보다 신화가 더 깊은 데가 있다. 신화 속에서 역사가 탄생하며 역사는 다시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신화를 첫째 형상보다 질적인 세계, 둘째 역사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러한 본성이 어떻게 자신의 체험, 또는 의식과 관련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신화의 본성들이 어떻게 증식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금번 제5회전은 바로 이러한 관심의 직접적인 표명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화-내재율(內在律)>로 명명되고 있는 명제가 이미 시사하고 있듯이 신화라는 것은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내적 법칙으로서 이해되어진다. 그는 '내재율'로서의 신화가 자신의 깊이로부터 증식되어 의식의 밖으로 유출되어지는 것으로 믿는다. 바로 이러한 증식과 유출을 우리의 신체와 종이의 상호 작용의 방식을 빌려 치환시키거나 옮겨낼 수 있다는 데서 <신화-내재율>이 구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작업일기>에서 이르기를, "한지에 수성 젯소를 묽게 만들어 바르고 건조시키면서 몇 번씩 반복한 후에 얻어진 따블로에 색동저고리의 화려한 색들 또는 퇴락한 흙색들을 밀도있게 바른 위에 블랙을 반복해서 덮는 작업을 한다. 붓과 손가락(신체)으로 먹과 기름(오일)의 안료를 바를 때 손가락이나 붓이 화면에서 움직이는 방향은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다. 나의 진솔한 바이로리듬인 것 같다. 기(氣)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무심필(無心筆)이라고나 할까"라고 하였다.

 

  위의 <작업 일기>의 일절은 근작들이 제작되는 방법, 기법, 의의를 기술하는 가운데 신화, 즉 내재율의 증식과 유출이 1)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옮겨질 수 있고, 2) 이 효과를 젯소와 몇몇 유채색을 원용함으로써 높일 수 있으며, 3) 붓과 신체의 일부인 손의 바이로리듬, '기(氣)' 또는 '무심필(無心筆)'의 상태로 치환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준다. 그는 이러한 의미와 절차에 부가해서 '표현의 분방함보다는 표현의 금욕'을 통한 '농축된 표현'(작업 일기)의 양식이 자신의 내재율을 획득하는 건강한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와 방법 그리고 이것들이 가질 수 있는 의의에 관련해서 고려할 때 <신화-태동기>와 <신화-내재율> 사이에는 질량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분명히 전자에는 그가 태어나 자라온 농촌의 삶, 특히 흙의 애환, 어머니의 한, 커서 알게 된 자신의 정신적, 심리적 정황들의 흔적이 짙게 배태되어 있지만, 후자는 그러한 흔적들이 일체의 검정색의 침묵 속에 잠입되고 은닉되어져 하나의 '단일 평면'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종래의 두텁고 영롱하던 얼룩의 색면이 단일한 검정의 평면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신화'를 자신의 의식의 출발점, 또는 세계의 체험 가능성의 시초 내지는 원천으로 파악하면서 이것이 작가 개인에게서 증식되고 유출되어 형성화된 것에서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 말하자면 사회와 역사 가운데로 확장됨으로써 그것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 가운데서 홍현기는 분명히 후자보다는 전자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신화가 사회와 역사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시초적으로 증식되는 말하자면 작가의 의식 속에 주관적이고 무형한 상태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화-내재율>은 그러하다면 무엇을 겨냥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작가 자신의 존재 확인이자 존재 증명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듀상에서 네오지오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이 따위와는 관계없이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반복된 의혹의 핵심이기도 하다.(작업일기)" 즉 자신을 묻는다는 것이야 말로 홍현기에 있어서 '내재율'로서의, <신화>의 창조의 동기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분방한 표현보다 금욕적인 표현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유채색을 배면에 은닉시킨 표면의 농축된 검정과 단일한평면이 강조됨에 이르렀다. 이 점에서 홍현기의 <신화-내재율>을 '미니멀한' 양식 개념으로 치부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이 말미에서 강조해 두고자 한다. 그의 근작들은 바로 그 자신의 존재 전체와 맞먹는, 하나의 분신(分身)으로서의 무게를 갖는다는 것에 주목할 때 그의 검은 그림들은 그 자신의 존재에로 해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것들은 어떠한 의미에서건 객관적인 물체(오브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사 홍현기는 <신화-내재율>에서 자신의 인간됨의 존재론적 시발을 붙잡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신화> 시리즈의 탐색의 결과이긴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라는 점을 또한 강조하면서 그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1990.11 김복영(美術評論家 弘益大 敎授 哲學 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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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기금운용 성과분석 전국 우수자치단 선정...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醴泉郡, 基金運用 成果分析 全國 優秀自治團體 選定 : 全國 上位 10%로 S等級 받아 選定) [記事] : 예천군이 2011년도 지방자치단체 기금운용 성과분석 결과 전국 우수 자치단체로 선정되어 행정안전부장관 기관표창을 받았다. 예천군은 이번 기금운용 성과분석에서 세입구조, 세출관리, 재정관리, 투명성 등 4개 분야 12개 지표분석 및 성과분석 자료의 충실성 등을 종합한 결과, 전국 상위 10%로 S등급을 받아 우수자치단체로 선정되었다. 행정안전부가 이번 전국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금운용 성과분석 평가에서 우수지자체로 선정된 곳은 군부 9개 단체다. 예천군은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효율적이고 투명한 기금운용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 기초생활자활기금, 식품진흥기금, 재난관리기금 등 6개 기금을 운용함에 있어 기금별로 위원회를 개최하여 낭비성 지출을 줄여 계획적으로 운영하였고 고유목적 사업비 확대, 수혜자 선정기준의 투명화 등 기금 운용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왔다.(醴泉뉴스 2012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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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25일 배드민턴 도대회 우승...축하합니다.

 

  예천군배드민턴연합회(慶北어르신 生活體典서 友情 나눠 : 醴泉郡, 배드민턴 道大會 優勝) [記事] : 2012경북어르신생활체육대회가 2012년 5월 24~25일 영주시 일원에서 2700여명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기량을 겨루고 우정을 나눴다. 이번 대회는 게이트볼, 그라운드골프, 배드민턴, 생활체조, 정구, 탁구, 테니스 등 7개 정식종목과 국학기공 1개 시범종목으로 펼쳐졌다. 게이트볼에선 영주시와 고령군이 우승을 차지했고 포항시·영덕군(준우승), 김천시·의성군(3위), 상주시·예천군(장려상)이 입상했다. 그라운드골프에서 고령군이 경주시, 문경시, 구미시를 따돌리고 1위에 올라 도지사 상장을 받았다. 배드민턴은 김천시·예천군이, 생활체조는 문경시·영양군이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또 탁구는 김천시·울진군이 우승했고 테니스는 포항시가 단체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시범종목으로 열린 국학기공에서는 포항시가 우승의 기쁨을 안았고 경산시, 구미시, 영주시가 뒤를 이었다.(최만수 記者 慶北道民日報 2012.05.28  17: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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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864

 

  예천군 방문(安東 북후초등 醴泉서 生活科學 體驗學習) [記事] : 안동시 북후초등학교(교장 권순길) 학생 21명은 2012년 5월 26일 토요체험학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예천곤충연구소와 천문우주센터에서 다양한 생활과학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체험학습은 <사>대구경북여성과학기술인회 주최로 이뤄졌다.(嶺南日報 201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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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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