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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958) : 명봉사를 다녀와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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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사 : 식구 10명이 상리면 명봉사에 다녀왔다. 1912년 6월 24일 병창, 춘우, 익상(특허청 사무관), 대중(서울 서초구 (주)대평이엔씨 대표이사), 혜원, 혜경, 동훈, 서영, 정안, 승훈이가 명봉사를 거쳐 지보면 참우명가에서 중식을 하였다. 서영(대전 어은초 4)이 이르기를,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는 이두문 연구자료로 귀중하고, 문종대왕태실비와 사도세자태실비(명봉사사적비)는 왕실과 인연을 맺은 절이었음을 느꼈고, 특히 계곡의 시원함속에 가제잡이에 더위를 잊었어요.”라고 하였다.
명봉사(잊혀진 文化遺産-醴泉 鳴鳳寺) [記事] :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승용차로 25분 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 해발 500m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1번지에 위치한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해서 명봉사로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명봉계곡의 울창한 수목과 맑은 물을 접하는 순간, 선경(仙境)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사찰은 한창 때 100칸이나 되는 매우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날의 번창했던 모습은 볼 수 없고, 법당과 요사채만 복원돼 있다. 대웅전 안에는 한국전쟁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보관돼 있고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가 에워싸 듯 경내를 가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낀다. 명봉사 대웅전 옆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난 1975년 2월 보물 제682호로 지정된 조선조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가 자리하고 있다. 절 동쪽 숲 속에는 지난 1972년 12월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가 당시의 번성했던 사찰의 모습을 증언한다.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 : 조선 왕실의 태(胎)를 명당이나 명산에 묻어 성장과 성공을 기원했다는 태실(胎室)과 태봉(胎封)은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한 뒤 태실을 봉안하고 그 위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명봉사에 자리하고 있는 문종대왕태실비는 대구. 경북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태실비 중 하나다. 문종대왕태실비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명봉사사적비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의 태실비를 각인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840년에 세웠다는 명봉사사적비는 문종대왕태실비보다 조금 크지만 형상과 모양, 낡은 정도가 같고 비문을 다시 각인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도세자태실비의 비문을 깎고 그 위에 명봉사적 비문을 새로 새겼다는 것이다. 조동윤 예천군청 문화관광과장은, "전문가들은 명봉사사적비를 사도세자의 태실비로 추정하고 있다"며, "비극의 주인공이 또다시 비극을 맞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영조 11년(1735년) 화강암으로 조성돼 현재 법당 옆에 서 있는 문종대왕태실비는 높이 2.46m, 비신높이 1.13m, 폭 0.57m, 두께 0.25m로 문종대왕의 태를 안치하고 세운 비석(碑石)이다. 원래 대웅전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 비는 구질(龜跌) 위에 화강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같이 하여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고,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으로 양각해 놓았다. 몸체에 비해 귀부의 처리 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신 앞면에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 胎室)' 뒷면에 '숭정기원 후 일백팔 을묘(崇禎紀元後 一百八乙卯)'라 음각한 비명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 연대가 영조 11년(1735)임을 알 수 있다 [경천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 지방 유형문화재 제3호인 자적선사능운탑비는 자적 선사(慈寂禪師)의 부도탑비이다. 화강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전체 높이 2.91m, 좌대높이 0.52m, 비신높이 1.9m, 폭 0.96m, 두께 0.20m로 고려 태조 24년(941)에 건립됐다. 탑비는 귀부 위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어 놓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비이다. 이두 문자(吏讀文字)로 새겨진 이 석비는 비바람에 마멸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76년 단국대 남풍현 교수의 판독에 따르면, 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드는 시기의 과도기적 이두 문자로 당시 중앙 관서인 광평성에서 승도에게 내린 행정적인 공문서다. 이두가 행정적인 양식으로 쓰여진 것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경주 남산신성비와 일본 쇼수인 소장의 신라장적 정도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라시대의 이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구비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문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두문으로 된 이 비문은 고려 초기에 한림원령(瀚林院令)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장가 최언위(崔彦僞)가 지은 것으로 판독됐다. 자적 선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법명은 홍준이다. 선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서 효공왕 3년(899)에 수계하였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대사에게 자적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탑은 능운이라 이름하였다. 자적선사능운탑비는 숲 속에 방치돼 오던 것을 예천군이 지난 2001년 사업비 4천만 원을 들여 보호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했다.(마경대 記者 每日新聞 2004.6.4)
명봉사(思悼世子 胎室碑를 망가뜨렸다고? : 醴泉 鳴鳳寺 文宗大王胎室碑와 鳴鳳寺事蹟碑) [記事] : 어제는 경북 예천 남서쪽에 있는 회룡포 마을을, 오늘(2007년 12월 24일)은 하루 동안에 예천 곳곳을 둘러보려고 마음먹었기에 시간을 잘 쪼개어 쓰고, 계획을 알차게 세워야했어요. 가장 먼저 가기로 한 곳이 북쪽에 있는 명봉사와 용문사랍니다. 아침 일찍 여관방을 빠져나와 명봉사까지 가는 버스를 탔어요. 지난번에 ꡐ산업곤충연구소ꡑ로 가던 길인 하리를 지나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타고 갑니다. 아스팔트로 길이 잘 깔려있었지만 땅 모양을 그대로 살린 길이라 꼬불꼬불한 게 버스 타는 재미도 꽤 남달랐어요. 게다가 둘레 풍경은 시골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마음 같아서는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가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녀볼 곳이 저마다 거리가 뚝뚝 떨어진 곳이라 시간이 빠듯하니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예천에 이렇게 자전거로 길을 터놨으니,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라 여기고 아쉬운 마음 달래면서 차창 밖 풍경을 즐기면서 갑니다. 버스는 명봉사가 종점이었는데, 민박집 둘과 가게 하나가 서로 마주보며 어렴풋이 여기가 관광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른 아침인데다가 아직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조금은 썰렁했지만, 순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면서 개 임자인 듯 보이는 이와 산책을 하고 있어요.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새로 끼워 맞추고 첫 들머리부터 오르막인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어요. 낯선 곳에서 만날 여러 가지 즐거운 일들을 기다리면서…. 명봉사 가는 길은 겨울철인데도 숲길이 퍽 아늑하고 아름다웠어요. 소나무와 전나무, 느티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라 여름철이면 더위를 피하여 이곳 숲에서 쉬었다가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하네요. 숲길을 벗어나자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보살님(문수보살님인가? 그건 잘 모르겠음)이 고운 모습으로 서있는데, 퍽 정겹고 낯설지가 않았어요. 절집에 들어서자마자 온통 조용하던 세상을 큰 개 짖는 소리로 흔들어 깨웁니다. 여기도 어김없이 개가 우리를 먼저 반기네요. ꡒ괜찮아. 우리 나쁜 사람 아니거든? 가만히 둘러보고 갈 테니까 너무 그러지마.ꡓ 언젠가 절집에서 사나운 개를 만나 혼쭐이 난 뒤로 개 소리만 들어도 덜컥 겁부터 나는데, 누군가가 그때 내가 쓴 글을 읽고 ꡒ개랑 대화를 하라!ꡓ고 했던가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말투와 웃는 얼굴로 얘기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짖어대기만 했어요. 쩝!
[성주 세종대왕 왕자태실에는 없었던 걸 여기서 보네!] : 명봉사 마당 위,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무량수전 곁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빗돌 두 개가 나란히 서있어요. ꡒ아하! 이거구나. 자기야! 빨리 와봐! 이게 문종대왕 태실비야.ꡓ 무량수전 화려한 단청 문양과 공포를 부지런히 찍고 있는 남편을 불렀어요. 앞에는 ꡐ문종대왕태실비ꡑ라고 적혀있고, 뒤에는 ꡐ숭정기원후일백팔십을묘ꡑ라 새겨져있어요. 사실 나는 이 비문에 새긴 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조선 5대 임금인 문종대왕의 태실비를 1735년(영조 11년)에 세웠다는 거라고 안내판이 따로 있어 알았어요. 얼마 앞서 성주에 있는 ꡐ세종대왕 왕자태실ꡑ에 갔을 때, 세종대왕의 아들인 왕자들의 태실이 그곳에 모셔져 있어 모두 봤는데, 문종대왕의 태실은 없었거든요. 그랬는데, 이곳 예천까지 와서 만났네요. 이 태실비는 일제강점기 때에 명봉사 법당 뒤 산봉우리에 묻혀있던 걸 찾아내어 여기에 다시 세웠다고 해요.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태실은 없고 태실비만 남아있었어요. 지난번에 성주 태실에 갔을 때, 세종대왕의 왕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좋은 터에다가 따로 모셔두었다는 걸 보고난 뒤라 그런지 한낱 빗돌이지만 퍽 반갑고 정겨웠답니다. [사도세자 태실 비문을 깎아내고 절집 사적비문을 새겼다고?] : 문종대왕 태실비(경북유형문화재 187호)와 나란히 있는 빗돌, 바로 ꡐ명봉사사적비ꡑ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태실비와도 모양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어요. 아니, 어찌 보면 이 사적비가 더 오래된 듯 보였어요. 처음엔 그저 이 절집을 세운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겠거니 하면서 봤답니다. 하기야 앞뒤로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를 모조리 한문으로만 적어두었으니, 나같은 사람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지요. 또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나중에 예천에 다녀와서 자료를 찾아보고 알았는데, 이 ꡐ명봉사사적비ꡑ에는 아주 남다른 얘깃거리가 있었답니다. 바로 이 사적비는 그 옛날 조선 후기 영조 임금의 아들, 그러니까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태실비였다고 해요. ꡐ어쩐지 문종대왕태실비와 그 모양과 생김새가 매우 닮았다했더니, 이것도 바로 태실비였구나!ꡑ 이 얘기도 일제강점기 때 일인데요. 그때 명봉사에 주지로 있던 스님이 사도세자의 태실비 비면을 깎아내고 거기다가 명봉사 사적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겨 넣었다고 하네요. 이때, 이 일 때문에 크게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나라 잃은 설움도 크고 깊은데, 왕실과 관련된 유적을 망가뜨리다니요? 어쩌면 일제가 저지른 몹쓸 짓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어요.
우리가 절집에 자주 찾다보니, 처음 절집을 세우고 그 뒤 이런저런 모진 일을 겪으면서 불타버리고 무너진 걸 또 다시 짓거나 새로 고쳐 세웠다는 기록을 참 많이 봐왔어요. 그 때마다 그 끄트머리에는 늘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때 망가진 것들이 많았어요. 글쎄, 내가 일제강점기를 겪어보지 않았으니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 소중한 문화재마다 흠집을 낸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참 화가 많이 났지요. 그때 명봉사 주지스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면 어떤 지시를 받아 이와 같은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문화유적을 망가뜨렸다는 건 매우 안타깝고 딱한 일이랍니다. 우리가 명봉사에 갔을 때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그저 ꡐ문종대왕태실비ꡑ를 본 것만으로도 반갑고 기쁜 마음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실을 알고 나니 매우 씁쓸했답니다. 명봉사를 벗어나와 이제는 그 곁으로 난 산길(임도)을 따라 올라갑니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고려시대 절집이고 꽤 크고 이름난 ꡐ소백산 용문사ꡑ가 나오지요. 여기 산길도 자전거를 타는 재미가 꽤 남달라요. 며칠 앞서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아직 산자락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어서 난생 처음으로 하얀 눈길에서 자전거를 타봤답니다. 더구나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이라 한쪽은 탁 트여있어요. 양쪽으로 꽉 막혀있는 다른 산길에 견주어보면 경치가 매우 멋스러워요. 발아래 저 멀리 성냥갑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도 무척 정겹지요. 자! 이제는 용문사까지 냅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손현희>(오마이뉴스 2008.01.19 19:19)
명봉사 [記事] : 전국기행문화클럽 산따라 물따라 카페/ 명봉사 (경북 예천) / 글쓴이: 기행대장/ 2009.02.02 00:33/ 개요 : 소백산맥의 깊은 산기슭에 위치한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 두운대사가 창건하였다. 문화재로는 고려 태조 24년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 師凌雲塔碑-유형문화재 제3호)는 이두문으로 된 비석으로 국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최언위(崔彦僞)가 지은것으로 판독됐으며,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97호)도 있다. 대웅전 안에는 한국전쟁 때에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보안돼 있다. 절 입구의 숲과 계곡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 큰 느티나무가 해를 가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끼게 한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 여름 철 피서지,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다.
[길안내] : * 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신갈JC에서 빠져나와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가다가 남원주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을 지나 단양 IC로 빠져나온다. 국도를 이용해서 단양 방면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왼쪽으로 예천으로 빠지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소백산관광 목장을 지나 재를 하나 넘어 내리막을 내려간다. 왼쪽에 용두리 휴게공원을 지나 내리막을 계속 내려가다가 오른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회전하여 도로를 따라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서울에서 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청주 방면으로 가다가 음성IC 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이용해서 충주, 수안보, 문경(점촌)을 거쳐 예천으로 간다. 예천읍에서 영주로 가는 28번 국도를 타고 조금만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대전에서는 국도를 이용해서 상주, 문경(점촌)을 거쳐 예천으로 간다. 예천읍에서 영주로 가는 28번 국도를 타고 조금만 가다 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와서 서대구, 금호j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광주에서는 88고속도로를 타고 서대구IC로 온 다음 다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오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대구에서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서안동을 지나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주변 숙박지] : 이름 유형 객실수 조회의 순서이다. 1) 두메산장 펜션 5실 1056, 2) 문곡 포밀레(formilre) 리조트 펜션 펜션 12실 871, [주변 관광지] : 이름 유형 조회의 순서이다. 1) 용문사 사찰 용문사 2323, 2) 청룡사 사찰 청룡사 201, <정보제공 예천군청>(daum 2009)
명봉사 [記事] : 예천 명봉사 부도 갤러리 - 부도/ 2009/02/16 20:49/ 명봉사는 예천군 상리면에 있는 사찰입니다. 헌강왕 원년(875년)에 두운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요. 네 해 전 명봉사를 찾았을 때 이 부도는 마당 한 가운데 덩그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명봉사에는 나말여초의 선승인 자적 홍준(慈寂 洪俊) 스님의 탑비인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가 남아있습니다. 스님은 고려 태조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태조는 스님이 939년 10월 구산선원(龜山禪院) 법당에서 입적하자 '자적선사'라는 시호와 '능운(凌雲)'이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현재 명봉사에는 스님의 탑비만 남아있을 뿐 부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대석과 상대석, 상륜부를 잃은 채 마당 가운데 쓸쓸히 앉아 있는 부도를 보며 '혹시 자적 선사의 부도는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 2004. 2./ [출처] 예천 명봉사 부도|작성자 놀부
명봉사(佛紀2553年 鳴鳳寺 奉祝 法要式 奉行) [記事] : 불기 2553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고 자비가 온 누리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봉축 법요식이 2009년 5월 2일 오전11시 명봉사에서 봉행됐다. 봉축 법요식에는 김수남 예천군수, 최명환 예천교육장, 안현진 신도회장, 신도 등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됐다. 이날 행사는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헌화, 찬불가, 반야심경, 법어, 봉축사, 봉행사, 발원문 등의 순서로 법요식이 거행됐으며 부처님 관욕식 순으로 봉행됐다. 한편 명봉사 신도회에서는 관내 학생 5명을 선정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앞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학업에 열중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법요식이 끝난 후 기관단체장들은 경내에 기념식수를 했다.(醴泉인터넷放送 2009-05-04 오후 12:00:05)
명봉사(鳴鳳寺) [詩] : 추강 김현종(秋崗金炫鍾, 1906-1987)이 1971년 10월 23일 시로써 이르기를, "명봉관풍(鳴鳳觀楓)// 내 고장 승경지(勝景地)를 만추(晩秋)에 다시 보니/ 심산(深山)에 홍엽(紅葉)이요 유곡(幽谷)에 세류(細流)로다/ 웅대한 자연 화폭에 안겨볼까 하노라//"라고 하였다.(秋崗文集 1988)
명봉사(鳴鳳寺), 절 [宗敎] : 상리면 명봉리 501번지 백운봉(白雲峰) 아래에 있는 사찰로, 용문사(龍門寺)를 창건한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875년(신라 헌강왕 1)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鳳凰)이 울어 명봉사(鳴鳳寺)라고 하였다. 특히 이 절 뒷편에 문효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과 사도세자 태실(思悼世子胎室)을 모시면서 풍기군(豊基郡)이 설치되었다. 주변에 법화암(法華庵)과 내원암(內院庵) 등이 있어 100여 명의 수도승(修道僧)이 기거했던 큰 사찰이었는데, 한국전쟁(1950) 때 국군의 초토전술(焦土戰術)로 전부 소실되고 빈터만 남은 곳에 1955년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에서 승려 서만중(徐萬重)으로 하여금 복원하도록 하였고, 그는 동민과 신도들을 중심으로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1동, 산신각(山神閣) 등을 새로 지었고, 그 후에 동료(東寮) 1동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법당은 극락전(極樂殿)이고, 그 법당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봉안하고 있다. 최근 명봉사행(鳴鳳寺行) 도로가 포장되고, 골 깊고 천년의 수목이 무성한 깊은 계곡인 이곳을 찾는 이가 날로 증가되어 예천의 명소가 되고 있다. 옛날 풍기향교(豊基鄕校) 유생(儒生)의 설접(設接) 때 명봉사에서 채소, 염장, 조포 및 장지 3장, 백지 2권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859년의 대향(大享) 때는 상리(上里) 산직이가 송명(松明) 2부(負), 탄(炭) 2말, 척기통(滌器桶) 1좌(座)를 지원했는데, 이는 항상 예납(例納)하던 것이다. 1911년부터 김룡사본산(金龍寺本山)의 말사(末寺)였으나, 1962년부터 직지사교구(直指寺敎區)의 말사(末寺, 區分 丁)이다.(豊基鄕校雜錄 卷3 1789- 1906, 豊基鄕校重修雜錄 1858-1873)
명봉사 [記事] : 안동문화 10집/ 간행년 : 2002/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바. 영봉사(詠鳳寺) : ...곧 봉정사(鳳停寺)가 되었으며 다시 봉은 높이 솟아 예천 땅 상리면의 명봉사(鳴鳳寺)에 가서 크게 울었다고 ...(www.koreastudy.or.kr 2007)
경청선원(鏡淸禪院) [寺刹] : 상리면 명봉산에 있던 라말여초의 사찰로, 현욱(玄昱)의 제자 심희(審希)가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에 봉림산문(鳳林山門, 9山門의 하나)를 개창하였는데, 그의 제자 홍준(洪俊)이 이곳에 자리잡아 경청선원이라 하였다. 현 명봉사(鳴鳳寺)의 전신이다.(두산世界大百科事典, Lycos 2001)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느티나무, 예천우곡리(醴泉愚谷里) 느티나무 [堂山木] : 하리면 우곡리 214번지 은풍초등학교(殷豊初等學校) 교정 대지(校庭垈地)에 있는 군 보호 나무로, 전국 일련번호 2,059, 지역 일련번호 6, 수령 460년, 높이 7m, 둘레 5m, 지름 19m, 수목 면적 30㎡이다. [傳說] : 1520년 경 상리면 명봉사(鳴鳳寺)의 유명한 고승(高僧)이 영주 부석사(浮石寺)로 가려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산수가 좋아서 기념으로 심어두었다고 한다. 옛날 우곡서원(愚谷書院)의 선비들이 글을 읽던 곳이고, 여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과거(科擧)에 급제한다고 했다. 한국전쟁(1950) 때 은풍초등학교가 폭격으로 인하여 전소(全燒)되었는데, 그 때 이 나무속에서 살고 있던 한 쌍의 용(龍)이 폭격의 진동에 놀라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保護樹誌 1972, 郡統計年報 1981)
명봉암(鳴鳳庵) [절] : 상리면 명봉리에 있는 암자로, 조선 문종대왕 태실을 봉안한 후 창건되었다.(嶠南誌 1937 豊基郡篇)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記事] :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에 대한 기록과 사진으로, 경상북도(道知事 金武然)가 1980년 2월 22일에 발행한 <지방문화재대관(地方文化財大觀)> 20-21쪽(2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鳴鳳寺 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碑] : 상리면 명봉리 산 1-1번지 명봉사 경내 법당(法堂) 동쪽 능선에 있는 고려 태조 때 세운 비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3호(1972.12.29 指定)이다. 전체 높이 2.91m, 비신 높이 1.9m, 비신 폭 0.96m, 비신 두깨 0.2m, 좌대(座臺) 높이 0.52m, 이수 높이 0.49m, 너비 1.25m, 두께 0.44m이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의하면, 이 비는 자적 선사의 고매한 인격과 공적을 길이 전하고자 941년(고려 태조 24)에 세운 것인데, 비문 중에 이두문(吏讀文)이 있어 국어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고, 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비는 이수는 네 마리의 용(龍)이 서리게 조각되었고, 구부(龜趺)를 좌대(座臺)로 하여 비신(碑身) 위에 이수를 얹은 규모가 큰 비석이다. 현재 구부의 머리는 떨어져 없으나 용수형(龍首形)으로 모각(模刻)된 듯하고, 앞뒤의 발은 오지(五脂)를 만들었고, 꼬리 부분은 우회하여 비교적 작은 모양으로 표현했다. 비문(碑文)은 풍화로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웠는데, 일제 때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해독을 하였고, 1976년에 남풍현(南豊鉉) 교수의 재확인으로 최언위(崔彦僞)가 글을 짓고, 연훈(然訓), 법오(法悟), 심장(心藏) 등이 글씨를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적 선사(慈寂禪師)는 법휘(法諱)가 홍준(洪俊), 속성은 김씨인데, 882년(신라 헌강왕 8) 생으로 일찍 불가에 입문했다. 고려 태조는 그의 선덕(禪德)을 받들어 귀산선원(龜山禪院)에 거처하도록 하고, 5년 뒤인 939년(태조 22) 58세로 입적(入寂)한 고승(高僧)인데, 자적(慈寂)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능운(凌雲)으로 명명(命名)하여 선원(禪院) 안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로 접어드는 과도기의 이두(吏讀)가 많은데, 중앙 관서인 광평성(廣評省)에서 승도들에게 내린 공문서 양식이다. 이런 양식의 글은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와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 정창원(東大寺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民政文書, 775)가 있으나, 뒤의 것은 지방의 호구 조사를 위한 것이다. 이 비에 쓰인 이두(吏讀)는 표기법(表記法), 어법(語法)에 있어서 신라 시대의 이두문(吏讀文)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두(吏讀) 발달사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郡誌] :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인 자적 선사는 882년(헌강왕 8)에 태어났다. 속성은 김, 법휘(法諱)는 홍준(洪俊), 태어나면서부터 유별난 점이 많아 고을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다. 출가를 하기 위해 태령(太嶺)을 지나 흑암선원(黑巖禪院)에 이르러 진경 대사(眞鏡大師)를 뵙고 공부를 하였다. 진경 대사는 홍준을 통해 불교를 현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그를 독려하였다. 그는 진경 대사를 떠나 899년(효공왕 3)에 명주(溟州)에 머물러 있던 양율 대사(良律大師)를 통해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된다. 이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선덕(禪德)을 듣고 귀산선원(龜山禪院)에 머물게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학자들이 운집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여기서 제자를 통해 불교를 널리 선포하던 그는 939년(태조 22)에 입적하게 된다. 태조는 자적 선사(慈寂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의 이름을 능운(凌雲)이라 이름하여 941년(태조 24) 경청선원(鏡淸禪院)에 비를 세웠다. 경청선원은 오늘의 명봉사이다. 비명은, "고려국 상주 명봉산 경청선원 고교 시 자적선사 능운지 탑비(高麗國尙州鳴鳳山鏡淸禪院故敎諡慈寂禪師凌雲之塔碑"이다. 이 비문은 최언위(崔彦위)가 찬(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세에 당(唐) 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 설정규(禮部侍郞薛廷珪) 아래에서 급제하고 42세 때 귀국하여 집사 시랑(執事侍郞), 서서원 학사(瑞書院學士)가 되고, 왕건이 개국하자 고려시대 한림원 대학사 평장사(翰林院大學士平章事)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이 비 건립에 있어서 태조 왕건은 물론이고, 당시 국통(國統)을 비롯한 도당(道堂), 함혜(含惠), 혜윤(惠允) 등의 승려와 재가 제자(在家弟子)인 수문(秀文), 영회(英會) 등 13명의 신자, 보주 관반(甫州官班)인 원길(元吉), 순보(純保), 영희(英希), 사향 촌주(寺鄕村主) 길훤(吉萱), 그 외에도 촌주(村主), 철장(鐵匠), 석장(石匠) 등이 관련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명봉사가 갖는 당시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이 비의 중요성은 이두(吏讀)의 내용에 있다는 사실도 또한 밝혀져 있다. 현재 이두문이 591년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신성비명(南山新城碑銘)과 755년으로 추정되는 신라민정문서(民政文書)가 남아있지만, 명봉사의 자적선사비명에 남아있는 이두는 중앙관서인 도평성(都評省)에서 승도(僧徒)에게 내린 것으로, 그 양식이 근대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란 점과, 당시 이두 사용의 표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또 이 비에 쓰인 표기법이나 어법은 신라 시대의 이두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醴泉郡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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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