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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083:황준량(8)(附예천방문946)
작성자장병창 @ 2012.10.28 06:08:54

   예천의 자랑(3083) : 황준량(목사)(8)(附 예천방문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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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上退溪先生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上退溪先生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退溪先生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退溪先生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退溪先生論四七辨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上退溪先生問目心經○癸亥/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上退溪先生問目近思錄/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退溪先生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盧星山仁父論書院事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答吳子强疑問/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與迎鳳諸賢書/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一門約議/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釋冕反喪服論/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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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書司馬契後/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書和唐詩吹後愚溪黃上舍漢忠公所和/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遣韓愈宣諭王廷湊詔/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屢年頌/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守在四夷賦月課八角律威德漸被。蠻夷率服。/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鋤銘/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唐憲宗君臣屛風贊/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赤城鄕校上梁文/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祭周愼齋景游文/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聾巖先生墓誌銘/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祭文/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祭文嘯皐朴承任/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祭文寒岡鄭逑/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二絶。次退溪韻/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二絶。次退溪携壺見訪於聾巖下。/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李退溪遊月瀾菴見寄之作/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謝蔡居敬臨訪于汾水亭時聾巖大人在上座/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退溪雜題/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琴和受/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和琴和受見寄/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蒼石臺韻。退溪所名/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竹嶺。新築矗冷臺。/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李退溪在洛寄詩。以月下長吟久不歸爲韻。時遊修道菴六絶。/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送權悅可還朝/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安生景福所寄詩/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久病書懷/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退溪見寄/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權學官應仁見贈。時遊伽倻山。路星州。/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宿宣城縣。次壁上韻。/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平安馹滯雨三日/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景浩先生郡齋移竹/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錦溪路。歇坐樹林間有作。/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次南上舍景見贈/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丁巳二月。嶼金生箕報。宿昌樂郵軒。時除丹山。赴京/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望華山臨漢津有感。次朴生應烈韻。/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二日。到維新。寄金重遠遊俗離山。/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德峴紀行。憩曹生亭。/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苔潭泛舟。聞主趙子修彈琴。/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龜潭路上口占/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陪李退溪。遊陶山亭基。次口占韻/ 황준량(黃俊良)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錦溪先生文集/ 黃俊良 저 黃尙 편(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醉時歌 原韻見本集/ 황준량(黃俊良) 등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錦溪先生文集/ 1. 著者인 黃俊良의 生涯 2.「錦溪先生文集」의 編纂 및 刊行 3.「錦溪先生文集」의 內容 4. 錦溪 黃俊良의 詩作品/ 朴魯春  | 장서각(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어부단가(漁父短歌)분석 (6p)/ 이 작품은 이현보의 손녀사위였던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어부장가”와 함께 구해다 준 것으로, 현재는 이현보에 의해 다섯 수로 정리되어 전하고 있다. 이 노래의 정리 작업에는 인근에 사는 이황도 깊이.../ 해피캠퍼스  | 2007.12.13 | 태그:  어부장가 , 이현보 , 이황 , 농암 , 어부단가(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퇴계의 교육사상 (5p)/ 한강(寒岡) 정구(鄭逑),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제자가 쏟아져 나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해피캠퍼스  | 2002.10.08 | 태그:  퇴계 , 이황 , 도학(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논문 : 남명의 (南冥) 유도사상 (儒道思想) 비교연구 (23p)/ 퇴계의 남명 비판과 관련된 내용은 그 문인 錦溪 黃俊良과의 왕복 서신 및 『퇴계언행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퇴계는 남명과 그 친우인 대곡을 隱者의 무리로 간주하고, 이들은 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오이환 ( Yi Hwan Oh )  | 철학연구회  | 1997(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가정 23년 갑진(1544, 중종39). 공의 나이 6세./ 중종|윤결(尹潔)|안공 명세(安公命世)|취부|장욱|성암공(省庵公)|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퇴계 선생|성암 선생|성암공|토정공|퇴계 선생|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황금계|소재.../ 이산해(李山海)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禮曹 以上言擊錚原情覆達/ 權尙厚|尙焌|||尙|||尙裕||尙焌|黃銑||金長年|孟欽圭|南尙翼|鄭浩直|卓東範|金台煥|具鴻|金龍在|文純公李滉|黃俊良|金啓豊|文忠公成三問|金在大|喜晩|喜晩|宋國澤|惟政|金大|李禿金|安浩源|吳命熙|李禿金|吳命熙...(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전문사전] 금계의암유묵(표지)/ 사진. 『금계의암유묵(錦溪毅庵遺墨)』의 표지를 찍은 사진으로, 금계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황준량(黃俊良)이고, 의암은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이다.(daum 2011)

 

  황준량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자는 중거(中擧)이며, 호는 금계(錦溪)로 평해인이다. 그의 원조(遠祖)는 고려 때 시중 벼슬을 지낸 유중(裕中)이며, 그의 아들 유정(有定)이 조선조에 벼슬을 해서 공조전서가 되었으며, 영천에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 전서공의 아들은 생원을 지낸 연(?)으로 금계의 고조에 해당된다. 이 무렵 연이 다시 거주지를 풍기로 옮김에 따라 그의 선대들이 여기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증조부 말손(末孫)은 사온주부를 역임했다. 조부 효동(孝童)과 부 치(?)는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인은 창원 황씨로 교수 한필(漢弼)의 따님인데 중종 12년(1517)에 금계를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일찍이 문자를 해득했는데 “말을 꺼내면 즉시 사람을 놀라게 하여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18세(1534)때에 남성시(南星試)에 응거했는데 고관이 그의 책문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니, 이로부터 그의 문명은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시험을 치를 때 마다 늘 앞자리를 차지했다. 정유년(21세, 1537)에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24세(1540년)에 을과에 제 2인 급제에 오르고부터 47세(1563년)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거의 반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수의마저 갖추지 못해서 베를 빌려서 염을 했으며, 관에 의복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너무 애석히 여긴 나머지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도 썼다. 퇴계는 금계의 행장에서 그의 인물 됨됨이와 어진 목민관,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재 형상했다. 즉 그가 신령현에서 백성들을 진휼한 점과 백학서원을 창건하고 문묘를 증축하여 유학을 흥기시키고, 선비들의 사기를 높인 점도 동시에 평가하고 있다. 또 단양 고을의 적폐를 열 가지 조목으로 간곡히 상소하니, 조정으로부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는 장유(?諭)와 함께 10년을 한정하여 공부(貢賦) 20여 조목을 감면 받게 했다. 특히 향교가 산간 가까이에 있어서 침수의 우려가 있기에 군치(郡治)의 동쪽으로 이전 건축해서 풍화의 근원을 세움에도 전력했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의 수축과 단장, 문묘의 중수를 주관하는 등 목민관, 흥학 사문의 선구자적 자세를 지닌 그의 인간상을 그려보았다. 『금계집』의 편찬 경위는 이광정(李光庭)이 『금계집』발문에서 상세히 밝혔다. 『금계집』은 퇴계를 비롯한 한강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 경향과 의리지심이 당대 영남 사림에서 출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상퇴계서 上退溪書」,「여영봉제현서 與迎鳳諸賢書」,「상주신재논죽계지서 上周愼齋論竹溪志書」의 글을 통해 금계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유교 교육을 통한 덕치수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유교 교육의 활성화 방안으로 향교 교육의 강화와 향촌 사회에서 유교 이념의 구체적 실천대안도 제시했다.

 

  퇴계는 금계가 영진(榮進)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무오년(42세, 1558)으로 잡고 있다. 즉 금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고 있을 당시 조정의 대신들이 금계의 치적과 학문을 들어 문한의 직임을 맡기자고 상소했으나 질시를 당해 중지된 이후, 금계는 위기지학으로 그의 학문 세계를 적극 전향했었다고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책문에서 선비들의 타락상을 열거하면서 이런 폐단을 구제할 방안과 그 본원을 밝히고 있다. 선비란 자들이 과거 시험에 얽매여서 유학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성률만을 읊조리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난국을 수습할 대안으로 서원 교육을 통해 이를 실현 가능케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만고의 역사에 부침 되는 인물들의 사적을 들어서 그 교훈성을 획득한 뒤에 위기(爲己) 공부, 즉 성리학에 침잠하여 성인을 표준화하여 현인을 기약하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일련의 산문과 시를 통해서는 그의 사상 경향이 위기지학적인 것으로 귀결됨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이 단순히 소극적인 위기지학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실천 유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16~17세기 퇴계 학단의 처사들이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언론 활등을 펴 향론을 형성? 조정하였고, 국가적 위기에 처해서는 의병을 조직하여 향토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단양향교중창기」에서는 그가 단양 고을 원으로서 교육과 어진 목민정치를 실현했음이 충분히 입증된다. 이런 점에서 위기지학을 실천 유학으로 체행한 인물로 지적할 수 있다. 「자양서당기」에서는 금계의 이러한 지방 교육 목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른바 선비 정신을 진작시키고 사회의 복리 안녕에 기여케 한다는 근대적 교육 지향점과도 일치한다. 「일문약의 一門約議」에서는 금계는 효제를 숭상하여 신구 세대가 상호 의리를 존중하여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뢰의 폭은 급기야 향촌 전체의 것으로 파급되기를 희망하기에 이른다. ‘계’모임을 통한 향촌의 적극적인 교화책이다. 「서사마계후 書司馬契後」에서 사귐의 즐거움을 피력한다. 그는 향촌 사회의 대한 미풍양속의 진작과 교화를 통해 유교 덕목 구현화 가능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금계는 여러 산문을 통해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명했는데 위기지학을 지향한 유자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금계가 지향한 역사관이 그만의 독특한 역사의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당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범주 안에서 공유된 역사의식의 일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원변 桃園辯」에서 그는 종래 전설적인 도원, 곧 ‘무릉도원’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근거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부정하면서 역사란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집합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전개한다. 금계는 역사란 이러한 현실적이고 올바른 역사의 전수만이 진정한 역사의 가치를 획득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역사의 전승은 오직 천명에 의한 것이라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논리를 「기자위무왕진홍범론 箕子爲武王陳洪範論」에서 개진했다.

 

  「대책문사재득실순박 對策問史才得失純駁」이란 글은 실제로 역사를 기록할 사관의 인간 됨됨이가 자세를 꼼꼼하게 제시한 글인데 금계는 사관은 학문과 재질, 절조를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며 그 준거로 중국 역대 사관 중 ‘춘추’를 집필한 공자, ‘강목’을 찬술한 주자를 이상적 사가형이라고 손꼽았다. 「예조청찬동국통감강목전 禮曹請撰東國通鑑綱目箋」에서 역사 기술 원칙을 말하기를 역사란 엄연한 현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신적이고 허탄한 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며, 역사의 전승 관계는 오로지 천명에 의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를 집필하는 사관은 엄정한 책무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또 중국 역대 정통 사서로는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을 들어 정통 유학에 입각한 역사관에 진정한 의미를 두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당대 16세기 우리 문단의 주류를 형상한 사림파 문학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학 위주에서 경세적인 국면으로 경사되는 시각을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의 문학에 관한 총체적 양상을 집약한 글로써, 이산해가 쓴 발문을 들 수 있다. 그가 초년에 사장학적적인 공부를 지향하다가, 만년에 도학 위주의 공부로 선회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년의 외도적인 학문 추구에 대해 매우 애석한 심정을 토로했다. 심성 공부에 주력해서 지난날의 비루함을 일신하여 군자의 도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장학 곧, 문학에서 대우, 성률 등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도학 공부를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증김생륵등제유 贈金生?等諸儒」에서는 문장을 여사로 보았으며, 선비로서 우선하여야 할 것은 존심양성(存心養性) 공부라는 그의 입지가 여실히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차청천현운육언 次晴川縣韻六言」에서는 맨 끝 부분에서 ‘조충전각’의 수식 위주나 연구(聯句)를 다투는 등의 사장 위주의 문예를 노년에 도학 위주로 전향했던 바 이는 그의 주된 학문이 방향이 심성 공부였음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수양은 실제 시세계에서 산수 자락의 정서나 경세적인 시정(영사시 포함)으로 표출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대별(二大別)하여 그 주제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금계는 원란암 시에서 귀전 은둔의 삶을 희구해 왔다고 퇴계에게 고백했다. 그는 유자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선비다운 풍류미를 구비하고 있었다. 곧 선비적인 멋의 발현이라 하겠다. 이를 통해 실현되는 한거 청적미는 자연 객체와 어떤 조화미를 갖는가를 연결시켜 보았다. 금계는 유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연명과 맹자의 전례를 들어서 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명예에 빠져 길이 아득할 뿐이었으나, 서책 속에서 참된 스승을 만난 기쁨을 획득했다고 했다. 금계 시의 한 특징인 산수자락(山水自樂)이 진락 추구로 전이되어 급기야 물아일체로 몰입되는 양상을 주시했다. 말하자면, 금계의 내적 심성 수양의 진전 양상이 겉으로 표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유가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지하여, 전대의 역사는 후인들로 하여금 감계와 교훈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를 도출했다. 실제로 문집에 산견되는 영사 회고시에서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금계는 백제의 흥망성쇠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낙화암을 중심으로 해서 백제 멸망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애상도 하고 때로는 의자왕의 실정을 따끔하게 질책도 하면서 역사적 교훈성을 보고했다. 그러기에 금계에 있어서 백제의 역사는 사장된 역사가 아니라 재 반사되어 우리민족의 미래를 예고하여,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바로 비난받을 역사의 회고를 통해 미래 역사의 버팀돌로 삼자는 것이다. 한편 그가 목민관의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전심전력으로 흥학사문하며, 애민의 자세를 견지했음이 「단양진폐소」나 애민시 계열에서 극명히 드러남도 볼 수 있었다.

 

  금계 시에서는 4언, 6언 등 장편시가 많이 산견되는데 이는 그만큼 시에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덕현기행」은 조선 후기에 대거 발생된 서사시 계열의 작품에 버금갈 만한 수작이었다. 금계는 실천적 의지가 강한 유자로서 경세적인 문학관을 구비했으며, 시에서는 풍류를 지닌 산수자락과 물아동체의 경지를 회구했다. 그리고 이는 영사의 회로를 거쳐 새로운 역사를 재창조하기 위한 감계교훈을 제시했다 또 어진 목민관으로서 애민 의식을 갖춘 퇴계의 문도였다. *남성(南星) : 당나라 사람들이 상서성이 대명궁(大明宮)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성이라고 하였 다. 여기서는 국자감(國子監)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 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김성규 객원기자 안동넷 2008-01-17 오전 10: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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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946

 

  한국국악협회 예천지부('第2回 醴泉아리랑 全國競唱大會' 開催...全國 26個팀 56名 參加 醴泉아리랑 熱唱!) [記事] : 아 리랑~아 리당~아~라리~~요/ 아 리랑~얼씨구나~~잘 넘어가~~네/ 맑고푸른 젖줄따라~기름진 들~판/ 너와나의~땀 방울이~~우리네 농~촌/ 학 가산 고운햇살 송~~포 들~녘/ 백두대간~내린비는~~내성천~에/ 아 리랑~아 리랑~~아~라리~~요/ 아 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예천아리랑을 주제 속에 꼭 넣어서 불러야 하는 이색 경창대회인 "제2회 예천아리랑 전국명창대회"가 2012년 10월 27일 오후 2시~5시까지 청소년수련관 대공연장에서 열려 전국에서 예천을 찾은 26개 팀 56명이 열띤 경연을 벌였다. 예천군과 예천문화원이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예천지부(지부장 장경자 명창)가 후원하는 이번 대회 개막식에는 권점숙 군의장, 임상원 교육장, 정희융 예천문화원장, 정창모 노인회장, 주민 등 150여명이 참석 대회를 지켜봤다. 장경자 지부장은 대회사에서 "아리랑은 민족혼의 소리이며 그 지역의 뿌리로 예천아리랑을 편집하고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에 생각이 멈추었다"며 "도대체 아리랑의 정의는 무엇인가... 예천아리랑 만큼은 좀 더 특색있고 독창적이어야 했기에 대중들이 부르기 쉽고 듣기 편한 퓨전이나 트로트 풍으로 갈까도 생각을 하면서..... 전국의 수십 장르의 아리랑을 탐문·탐색하면서 권위있는 국악계의 문화제 국악 관련 교수님들의 의견에 초점을 맞춘 결과 아리랑은 아리랑 다워야 한다는 결론 아래, 예천인의 억양이나 특색, 정서가 묻어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예천아리랑을 만들게 됐다"고 그간의 배경을 설명했다. 장 지부장은 자신의 이 같은 노력도 중요하지만 "오늘 대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신 이현준 군수님과 이한성 국회의원님, 그리고 권점숙 군의장님, 기관단체장님, 정희융 문화원장님과 군민들의 관심과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권점숙 군의장은 축사에서 "푸른 산하에 단풍이 자태를 뽐내는 좋은 절기에 제2회 예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게 된 것을 먼저 군민과 함께 축하드리고 예천아리랑이 세간에 알려 진 것이 몇 해 되지 않지만 많은 군민과 출향인들, 그리고 장경자 명창의 노력으로 예천의 토속 아리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정희융 문화원장은 환영사에서 "전국 각지에서 예천아리랑을 사랑하시고 우리 민요를 사랑하시는 많은 대회 참가자 여러분을 5만 군민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하고 경연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아리랑을 통해 하나되는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 대회에는 용문초등학교 전세진 외 2명이 예천아리랑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으며 강원도 춘천시에서 박금윤 외 7명이 정선아리랑과 예천아리랑, 문경에서 남상순 외 20명이 문경새제아리랑을 부르는 등 단체 참가자들이 열창을 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예천아리랑은 우리 고장의 아낙네들이 힘든 농사일과 고된 시집살이의 일상생활을 하면서 고달프고 피곤할 때에 즐거움과 서러운 한을 콧소리로 흥얼거리던 소리를 며느리나 딸에게로 전해오면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7세에 호명 직산에서 통명으로 출가를 해 온 현재 92세인 양옥교 할머니에 의하면 일곱 살 때부터 훗날 올케가 된 동네언니와 나물을 캐면서 부르기도 하였고 어린동생을 등에 업고 소리를 배우기도 하였으며 소리를 잘하시는 작은 오빠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예천아리랑은 원래 통명리에서 20여리 떨어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속칭 피실마을) 일대에서 불리어진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옥교 할머니는 신혼시절 남편을 일본에 징용보냈는데 헤어진 남편과의 사랑과 자신의 어려운 삶의 역정을 노래로 자연스럽게 불렀다는 것이다. 예천아리랑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중요무형문화재 통명농요기능 보유자인 이상휴 씨(통면농요 선소리자)가 젊은 시절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불러오던 가사를 정리하여 불러오면서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소개됐다.

 

  2008년 예천아리랑이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갈 즈음 예천아리랑 보존 전승 사업을 통해 양옥교 할머니와 이상휴의 원음 채취는 물론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게 악보를 채보하고 예천아리랑의 CD음반을 제작하는 등 예천아리랑을 새롭게 체계화하고 널리 보급했다. 현재는 예천문화원에서 문화학교 프로그램으로 예천아리랑 강좌를 열어 명창 장경자 선생의 지도하에 매년 30여명의 교육생이 배출되고 있으며 예천아리랑 창극공연과 예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을 개최하는 등 예천아리랑 전승 보급 활동에 열과 정성을 쏟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2-10-27 오후 5: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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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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