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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086:황준량(11)(附군청/예천방문947)
작성자장병창 @ 2012.10.31 06:14:09

   예천의 자랑(3086) : 황준량(목사)(11)(附 예천군, 예천곤충엑스포를 국제박람회로 승화 준비...성공을 빕니다/예천방문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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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준량 : 3. 금계선생 행장...이퇴계 서/ 성주(星州) 목사(牧師) 황공(黃公)은 휘가 준량(俊良)이며 자(字)는 중거(仲擧)로서 평해인(平海人)이다. 고려때 시중(侍中)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란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공의 먼 선조(先祖)가 된다. 유중의 후손(고손) 이름은 근(瑾)인데 그는 공민왕(恭愍王) 때에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인 김속명(金續命)과 더불어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 당시 지진의(地震)의 변고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다가 (註 : 海月公 黃汝一의 고증편(考證篇)에 보면 황근은 공민왕조에 좌헌납이 되어 정언이었던 김속명과 더불어 상소하여 후궁(後宮)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극언을 했다고 적혀 있음)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옥천(沃川) 군수로 좌천되었다. 그후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근(瑾)은 휘 유정(有定)을 낳았으니 유정은 조선조에(朝鮮朝)에서 벼슬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고 유정이 휘 연(?)을 낳았으니 그가 공(公)에게는 고조(高祖)가 된다. 전서 유정부터 영천(榮川)(현재 영주)에 거주(居住)하였고 생원 연(?)이 풍기(豊基)로 이사하여 살았으니 드디어 풍기사람이 되었다. 증조의 휘는 말손(末孫)인데 사온주부(司?主簿)였고 할아버지의 휘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의 휘는 치(?)인데 모두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창원(昌原) 황씨이니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딸인데 정덕(正德) 정축(丁丑)년(1517) 7월 어느날 공(公)을 낳았다. 공은 범상(凡常)치 않은 자질을 지니고 태어나 일찍이 문자를 해득하고 말을 하면 곧 남들을 놀라게 했으니, 신동(神童)으로 불리어졌다. 나이 18세에 남성(南省)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고시관이 공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칭찬하니 이로부터 문명(文名)이 심히 자자하였다. 매번 시험볼때마다 앞 부류(部類)에 속했다. 정유년(1537)에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기해년(1539) 임금이 친히 치르는 정시(庭試)에는 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갔으며 경자년(1540)에 을과(乙科)에 제 2인 (第二人)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고 성주훈도(星州訓導)로 뽑혔다가 임인년(1542)에 학유(學諭)로 들어갔고 계묘년(1543)에 학록(學錄)겸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로 승진하고 갑진년(1544)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을사년(1545)에 승문원 전고(承文院 殿考)로 상주교(尙州敎)로 나갔고. 정미년(1547) 가을에 내직으로 들어와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오르고 그 이듬해 공조좌랑(公曹佐郞)으로 있을 때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고 경술년(1550)에 상복(喪服)을 벗게 되자 전적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郞) 겸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으로 옮겨 중종(中宗)?인종(仁宗) 양조(兩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그해 겨울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근되어 불교를 배척하는 벽불소(闢佛疏)를 올렸다. 신해년(1551) 2월에 경상도 감군어사(監軍御史)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 교검(承文院 校檢)으로 바뀌어 임명되고 6월에는 추생어사(抽?御史)가 되고 7월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배수(拜授)되었는데 그때 한(韓)씨 성을 가진 자가 언로(言路)에 있었는데 일찍이 공(公)에게 부탁하는 바가 있었는데 공이 그 청을 응해주지 않았음에 그에게 중상 모략하는 논박을 당하여 공은 이에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영해현감(寧海縣監)으로 갔다. 병진년(1556) 겨울에 병(病)으로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가을에 조정에서는 단양군(丹陽郡)이 메마르고 주민들이 궁핍함으로 인하여 특별히 이를 치유할 적임자를 뽑음에 공으로 하여금 군수를 맡겼다. 가족을 동반치 않고 근무하고 임기가 참에 돌아와 집에서 거주하다가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경신년(1560) 가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배수(拜授)되어 4년이 지나 계해년(1563) 봄에 병(病)을 얻어 사직을 하고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병이 악화되어 3월 11일 예천(醴泉) 지경에 이르러서 드디어 서거하니 향년(享年)이 47세였다. 공은 사람됨이 영특하고 준수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영민하고 풍체가 뛰어났으며 용모가 그림 같았고 재주 역시 풍부해서 무슨 일을 맡기면 못할 일이 없었는데도 이미 주현(州縣)의 직책에 그쳤다. 직책이 낮다고 하여 의기 소침하지 않았으며 항상 문서를 검토함에 열심히 충실하였고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 공이 신령(新寧) 고을에 있을 때 그해 흉년을 당했는데 백성의 배고픔을 마치 자기의 굶주림으로 여기고 어려운 주민들에게 경우를 따라 균등하게 구휼을 행하니 백성이 소생하여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이 전날 정사(政事)를 돌볼 때는 백성들의 미납된 부채를 공이 능히 절약하고 긴축하여 고을의 재정을 보충하여 메우고 채웠다. 그리고 채무 문건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더욱이 학교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하거나 새롭게 단장하고 힘을 기울여 권면하고 훈도 하였으며 또 옛 고을 터에 학사(學舍) 한구(一區)를 창설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고 이름하여 편액(扁額)을 걸고 책을 비치하고 전답을 마련하니 선비들의 마음이 흥기(興起)하여 사모(思慕)하였다. 단양(丹陽)의 군수로 부임하여서는 수레에 내리자 말자 사방의 경황을 살펴보니 겨우 10여호가 남아 있는데 모다 피폐하고 넘어져 쓰러질 것 같았다. 이에 그 원인을 묻고 헤아려 개탄하여 말하기를 「관(官)은 백성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니 이 폐단을 버리지 않아서 우리 백성이 생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관(官)으로 무슨 존재가 있는가」하고 즉시 상소를 지극한 말로 1강(綱) 10목(目)으로 조리 있게 올렸다. 임금이 응답하고 격려하며 깨우쳐 말하기를 “그대의 글은 임금을 사랑하는 정과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노라”하며 특명을 내려 10년에 한(限)하여 공물 바칠 20여 조목을 면제한다고 했다. 이는 공(公)의 지극한 성심(誠心)이 하늘에 상달되지 않았다면 어찌 전례에 없던 임금의 은혜스러운 혜택을 얻었겠는가 이로부터 단양(丹陽) 백성들은 의기가 고무되고 진작되어 떠돌아 다니거나 야반도주 해 간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향교(鄕校)가 산 개울 물가에 임박하여 왕왕히 침수되고 바닥 흙이 깎이어 나가는 환난이 있게되니 공께서 옮겨 세우기를 명하여 고을 땅 동편에 땅을 확보하고 목재도 좋은 것을 구하여 사용하고 시설구도도 좋게 하여 건축하였으니 온 읍(邑)의 모습이 새롭게 되었다. 그는 재정이 다 바닥났다고 해서 풍속 교화(風俗敎化)의 근원을 느슨하게 미루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또 군(郡)의 이전 현인(賢人)인 제(좨)주(祭酒) 우탁(禹倬)은 경학(經學)과 충절(忠節)이 모두 족히 세상의 사표가 된다고 여겨서 문묘(文廟) 서편에 별도로 한 칸의 집을 짓고 거기에 사당을 차려 제사 드리게 했다.

 

  성주(星州)의 목사(牧使)로 가서는 다스리기 어렵다고 알려진 이 고을을 공(公)은 스스로 어렵다고 여기지 않고 학문 진흥의 일에 이전에 두 고을에서 행했던 예를 경험 삼아 힘을 더욱 기울여 진력하였다. 이에 앞서 목사(牧使) 노경린(盧慶麟)이 옛 벽진(碧珍)의 고을터에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웠는데, 공이 이 서원 건물을 더욱 잘 장식하고 아름답게 치장하였다.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옛 규모대로 넓혔다. 마침 선비 오건(吳健)이 교관(敎官)으로 부임한지라 서로 더불어 뜻이 맞고 의논이 합하여 제자(弟子) 약간 명을 선발하여 4등분하고 오(吳)교관에게 가르치기를 주관하게 했다. 그리고 공 자신은 수업 검사와 감독 임무를 맡아 강론함에 책을 덮고 읽은 바를 암송하게 했다. 또 이로 인해 의심나는 뜻은 토론을 하게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과 게으른 학생을 살펴서 차례대로 상(賞)과 벌(罰)을 내렸다. 고을 동쪽 공곡(孔谷)이라고 불리는 땅이 있었는데 여러 생원들이 거기에 서당(書堂) 세우기를 원했다. 이에 공께서 흔쾌히 여겨 건축하고 공곡서당(孔谷書堂)이라 이름 지어 편액현판을 달았다. 또 팔거현(八?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워 훈육(訓育)하고 이끌어 교도(敎導)하기를 다방면으로 하니 각각 그 소질과 능력의 고하(高下)를 따라 성취한 자가 심히 많았다. 처음에 상산(商山)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가 됨에 공은 그의 후진으로서 여러번 그에게 왕복하면서 논변하곤 하였다. 그때 뜻이 다르거나 같거나 또는 서로 동의하거나 반대할 적에 사람들이 공의 식견(識見)이 밝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 그 전공분야 본체에 (철학학문) 나아가서는 참된 맛을 맛볼 수 없었다. 그러기에 조정(朝庭)에 있을 때 오직 그가 문사(文辭)로서만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 뒤에 차츰 스승과 친구들을 좇아 성리연원(性理淵源)의 설(說)을 듣고 비로소 이른바 학문(學問)이라는 것이 이전에 말하던 바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분발하여 이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그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등 여러 성리학에 관한 서적들을 읽게 되었고 주자서(朱子書)를 구해서 읽었는데 이에 심히 감화되는 바 있어서 책읽기에 더욱 탐닉하고 매우 즐겼다 성주에서는 또 동지(同志)와 서로 덕업의 도움(이택)을 얻어 그 뜻이 더욱 격려되고 고무되었고 그 공업(功業)에 더욱 깊어졌다. 공무(公務)의 여가에는 오 교관(吳敎官)과 함께 책상을 대하여 강론하며 연구하고 밤을 새우기도 하며 침식을 잊고 지루함 없이 열심히 공부에 힘쓰니 사람들이 혹 지나친 노력으로 병을 얻을까봐 만류하여 아뢰게 되면 답하여 말하기를 “책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기(氣)를 기르는데 근본을 삼는 것이니 어찌 글을 읽는 것 때문에 병이 생길 까닭이 있겠는가 간혹 이와 상반된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자기가 타고난 운명이지 책 읽은 탓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독방에서 쓸쓸히 거처하면서 성현(聖賢)의 중요한 격언들을 네 벽에 붙여놓고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정(靜)을 주론하고 경(敬)을 지닌다는(主靜持敬) 문귀에 깊이 감화되고 터득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관직 때문에 뜻을 빼앗기고 또 공무(公務)에 시달리고 바빠 이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큰 병폐였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벼슬을 벗어버리고 죽령(竹嶺)아래 금계(錦溪)가에 돌아와서 거기에 좋은 땅을 골라 몇 칸의 집을 짓고 금양정사(錦陽精舍)라고 이름하여 책을 비치하고 도(道)를 강론(講論)하는 장소를 삼았다.

 

  돈독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정(靜)을 체험하며 기(氣)를 기르는 공(功)을 더욱 힘쓰니 그 소견이 진전이 있어서 그 얻는바가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그만 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병(病)이 그 일을 어긋나게 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비록 그러나 공의 이름은 이미 홍문관(弘文館)과 성균관(成均館) 선발함에 올랐고 무오년(1558) 봄에 공이 단양에 군수로 재임 중이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상의하여 계(啓)를 올려 공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職)에 두고자 하였다. 비록 함께 벼슬하는 자의 모함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당시의 여러 대관들이 공에 대해 칭송하고 인정해 준 것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히 알만하다. 그러나 공(公)은 자기의 능한 재주를 이용하여 영진(榮進)하는 이득에 만 급급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돌려 보통 세상사람들이 구하지 않는 바를 구하고 뭇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않는 바를 맛보며 남을 향해 비방하여 비웃을 줄 몰랐으며 남에 대한 화(禍)와 복(福)을 알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매일 힘쓰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두었으니 이는 그 술(術)을 택하기를 바르게 하고 도(道)를 향하는 일에 부지런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니 가상한 일이다. 공은 우애(友愛)도 돈독하여 무릇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 어머니에게 받들어 올리고 자매 동생 조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조금 가졌다. 또 향당의 친구들에게는 궁핍하고 급한 것을 구제함에 있어 미치지 못할까바 두려워했다. 비록 혹시 이러한 일로 남에게 비방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죽음에 이르게 날에는 이불이나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고 삼베를 빌려와서 염을 하였고 의복은 관(棺)에 차지도 않았다. 이를 본 연후에 사람들은 또 공(公)은 거짓으로 꾸며서 세상에 드러내 표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겨 무릇 지나가는 곳이나 머무는 곳에 이름난 산과 운치 있는 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불러 함께 찾아가기도 하며 혹은 몸을 빼쳐 혼자 가기도 하였는데 당도한 즉슨 이리저리 거닐면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리고 저녁이 되어도 돌아 갈 것을 잊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귀담(龜潭)에서 은사(隱士) 이지번(李之蕃)을 주인으로 하여 마음껏 놀고 마음껏 감상하기도 하였다. 더욱 즐거워 한 것으로는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기도 하고 겨울달이 얼음이 언 강위에 비췰 때 충주(中原)에서부터 강 위를 따라 썰매를 타고는 사람을 시켜 앞에서 썰매에 맨 줄을 당기게 하여 미끄럼을 지쳐 위로 올라가 이군(李君)이 있는 곳을 지나 군(郡)에 도달하여 스스로 말하길 “이 쾌락한 마음을 비길데 없구나 ” 라고 했으니 그 운치(韻致)와 진솔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공의 병(病)이 오랜 날을 않자 날로 쇠잔하였으나 정신은 어그러지지 않았다. 그가 임종 하루전날 나 황(滉)에게 편지로 작별을 고(告)하였는데 글의 뜻이 맑고 새로움이 평일의 글과 다름이 없었다. 들은 바로는 임종 때에도 정신이 똑똑하여 흐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공은 예안인(禮安人)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 수량의 아들 지환(之?)으로 후사를 삼았다.

 

  이듬해 갑자년(1564) 정월 어느날 고을의 동쪽산 내곡(內谷) 감좌(坎坐)의언덕 선영(先塋)의 좌편에 장사지냈다. 찰방은 즉 농암(聾巖 (이현보의 호))선생의 아들이다. 나 황(滉)이 공(公)을 농암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놀로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하였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 공을 얻어서 깨우친 점이 많았다. 공이 물러 나서 돌아오면 실로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에 있던 공을 곡(哭)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으나 정중히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그 큰 것만을 위와 같이 추려서 서술한다. 그러니 혹 다른 날 붓을 잡는 자가 상고(詳考)하길 바라며 이 졸렬한 문장으로는 다 찾아내어 밝히지 못한다. 오호라 슬프다. 공이 지은 문집(文集) 두권(二卷) 시집(詩集) 두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정(嘉靖) 42년(1563) 12월 어느 날 진성(眞城) 이황(李滉) 행장을 짓다.(daum 2011)

 

  황준량 :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 이우성(李佑成) 저(著)/ 본관(本貫) 여주(驪州) 호(號) 벽사(碧史) / 거(居) 밀양(密陽) 부북면(府北面) 퇴로(退老)/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편/ 황준량(黃俊良) 본(本) 평해(平海) 1517(중종12)~1563(명종18) 조선의 문신(文臣). 자(字)는 중거(仲擧), 호(號)는 금계(錦溪)/ 제(第) 1부 시(詩)  275/ 문헌(文獻)/ 금계집 ( 錦溪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 권수제  錦溪先生文集, 판심제  錦溪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55年刊, 권책  目錄, 內集 5권, 目錄, 外集 9권 합 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3×16.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松文庫,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7/ 저자 : 성명  황준량(黃俊良), 생년  1517년(중종 12)  몰년  1563년(명종 18), 자  仲擧  호  錦溪, 본관  평해(平海), 가계도 조부(祖父) 황효동(黃孝童), 부(父) 황치(黃치), 모(母) 창원황씨(昌原黃氏)  교수(敎授) 황한필(黃漢弼)의 女, 본(本) 황준량(黃俊良), 배(配) 영천이씨(永川李氏)  이문량(李文樑)의 女, 자(子) 황영黃瑛(황지환黃之煥)  系 배(配) 금응수(琴應銖)의 女, 제(弟) 황수량(黃秀良), 자(子) 황지환(黃之煥)  出, 자(子) 황지찬(黃之璨), 기사전거 : 韓國系行譜, 行狀(李滉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12 1517 정축 正德 12 1 7월, 태어나다./ 중종 29 1534 갑오 嘉靖 13 18 南省試에서 策問을 잘 지어 文名이 알려지다. / 중종 32 1537 정유 嘉靖 16 21 생원시에 합격하다. / 중종 34 1539 기해 嘉靖 18 23 庭試에서 直赴會試하다. / 중종 35 1540 경자 嘉靖 19 24 文科에 乙科로 급제하다. 學諭가 되고 星州 訓導가 되다. /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27 學錄 兼 養賢庫奉事가 되다. /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29 尙州 敎授가 되다. ○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시 〈遊頭流山紀行篇〉을 짓다. / 명종 2 1547 정미 嘉靖 26 31 가을, 박사가 되다. 聘母 李氏의 挽詞를 짓다. ○ 겨울, 전적이 되다. / 명종 3 1548 무신 嘉靖 27 32 공조 좌랑으로서 부친상을 당하다. /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34 服을 마치고,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中宗實錄」과 「仁宗實錄」을 찬수하다. ○ 겨울, 병조 좌랑으로 옮겨 〈闢佛疏〉를 올리다. / 명종 6 1551 신해 嘉靖 30 35 2월, 慶尙道 監軍御史에 제수되었다가 승문원 검교가 되다. ○ 6월, 抽?御史가 되다. ○ 9월, 지평이 되었으나 언관의 탄핵으로 체직되다. ○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新寧 縣監이 되다. 飢民을 진휼하고 재정을 잘 운용하여 負債文券을 태우다. 文廟를 수축하고 白鶴書院을 창설하다. / 명종 11 1556 병진 嘉靖 35 40 겨울, 사직하고 돌아오다. /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41 가을, 丹陽 郡守가 되다. 민폐에 대해 〈十條疏〉를 올려 貢賦를 감면받다. 丹陽鄕校를 중수하고 禹倬을 배향하다. 〈丹陽鄕校重創記〉를 짓다. /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43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44 가을, 星州 牧使가 되다. 迎鳳書院을 增修하고 文廟를 수리하다. 孔谷書堂을 세우고 또 八?縣에 鹿峯精舍를 세우다. /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45 「朱子書節要」를 星州에서 간행하고 〈晦菴書節要跋〉을 짓다. /

 

~ ~ ~ ~ ~ ~ ~ 竹嶺에 錦陽精舍를 지어 강론할 장소로 삼다. /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47 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하던 도중 병이 악화되어 3월 11일, 醴泉에 도달하여 졸하다. ○ 12월, 李滉이 行狀을 짓다. /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  1월, ?基 동쪽 內谷의 선영에 장사 지내다. /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  丹陽 郡守 黃應奎가 문집 考異를 추각하다. / 현종 3 1622 임인 康熙 1 -  ?基 郁陽書院에 李滉과 함께 배향되다. /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  郁陽書院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중간본) / 기사전거 : 行狀(李滉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유문은 退溪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文集 2권 詩集 2권이 집안에 가장되어 있다.’라 하였으니, 본래 4권 분량의 시문집이 가장되어 있었다. 丹陽 郡守 孫汝誠이 저자의 아우 黃秀良과 함께 유집을 수습하여 퇴계에게 편차를 부탁한 것도 이 家藏本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遺集이 丹陽에서 간행된 것은 저자가 일찍이 단양 군수로 재임 시 貢賦의 감면을 얻어 내 이 고을에 큰 은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與趙士敬書 甲子〉의 ‘見閱錦溪集 欲改吳訥誤稱處而忘其齋號…’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1564년부터 문집의 교열을 시작하였으며 편차를 마친 뒤 李山海에게 발문을 쓰도록 부탁하였다. 이 퇴계교정본 4권을 단양 군수 孫汝誠이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초간본의 정확한 간행 시기는 알 수 없으나 孫汝誠이 1566년 12월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 단양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즉 1564년에서 1566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단양 군수로 부임한 黃應奎가 1584년 초간본을 검토하고 잘못된 글자 13자를 정정하여 追刻한 뒤 識를 남겨 놓았다. 1607년 鄭逑가 安東 府使로 부임하여 초간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모아 外集 8권으로 편차 교수하고 손수 淨書하여 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 이임하게 되자 정리한 고본을 本孫家에 맡겼다. 그 후 丹陽의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인하여 많이 소실되자 저자와 李滉을 배향하고 있던 ?基 郁陽書院의 洞主인 李萬華가 원중의 유생들과 저자의 문집을 중간할 것을 의논하여 재물을 마련하고, 저자의 宗孫 黃尙?가 일을 주간하였다. 도중에 이들이 죽자 上舍 金翼景이 종손 黃潤德과 함께 간행하는 일을 맡아 李光庭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1755년 이광정은 鄭逑와 退溪의 편차를 존중하는 뜻에서 중간시 內集과 外集을 합하여 재편하지 않고 본래의 체제 그대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다만 뒤에 행장과 만사 등의 글을 부록으로 실었을 뿐이다. 이 중간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松D1-A1181),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137a), 규장각(古3428-522)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55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장본이다. 기사전거 : 內集跋(李山海 撰), 外集跋(李光庭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 본 문집은 目錄, 內集 5권, 目錄, 外集 9권 합 5책으로 되어 있다. 內集 권수에는 1권부터 4권까지의 목록 6板이 실려 있다. 권1~3은 詩이다. 약 200餘 題의 시가 詩體에 관계없이 권별로 저작 시기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저자와 퇴계와의 관계를 반영하듯 退溪에게 보내거나 차운한 시가 가장 많고, 그 외 門人들과 주고받은 시, 扶餘 등 고적을 기행한 시 등이 실려 있다. 간간이 시 말미에 작자의 주가 붙어 있다. 권4는 雜著로 記, 書, 祭文, 疏, 跋 등이다. 저자의 문은 시에 비해 분량이 적으나 퇴계는 內集을 편차하면서 ‘이 사람은 文이 詩보다 뛰어나 論事가 명쾌하고 훌륭한데 그런 점을 평시에는 미처 다 알지 못했었다. 이제 그의 글을 보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평하였다. 書는 저자가 增修한 迎鳳書院의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보낸 것이 많고, 〈請革兩宗疏〉는 文定王后가 普雨를 등용하여 佛敎의 부흥을 꾀하고 禪宗과 敎宗을 부활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이다. 〈晦菴書節要跋〉은 퇴계가 정리한 「朱子書節要」를 저자가 星州 牧使로 있을 때 간행하면서 지은 발문이다. 권5에는 李山海의 跋과 1584년에 쓴 黃應奎의 識가 실려 있다. 그런데 목록에는 권5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뒤에 追刻된 것으로 보인다. 外集 권수에는 권1에서 권8까지의 목록 17板이 실려 있다. 권1~6은 詩이다. 역시 內集의 편차방식과 같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중 권1의 〈遊頭流山紀行篇〉은 1545년 4월에 지리산을 유람한 장편시이며, 권2의 〈集勝亭十詠〉은 巫山一段雲體로 지은 것이다. 권3에는 〈外王父敎授挽〉, 〈聘母李氏挽〉 등의 장편 挽詩가 실려 있으며, 권4에는 〈湘靈鼓瑟〉, 〈疑塚〉 등의 月課로 지은 시가 실려 있다. 〈次眞安鴨脚臺〉 이하는 南征錄으로 1551년 경상도 監軍御史가 되어 그 지방 고을을 순행할 때 지은 시집이다. 권5에는 1557년 2월 7일 竹嶺을 넘고, 8일에 黃江을 지나고, 9일에 ?川을 건너는 등의 과정을 시로 읊은 기행시가 실려 있다. 권6에 실려 있는 〈復次曹牧韻〉 이하는 拾遺이다. 권7~8은 疏, 箋, 書, 雜著, 祭文, 墓誌(聾巖先生墓誌銘), 對策이다. 이 중 〈丹陽陳弊疏〉는 1557년 단양 군수가 되어 고을을 피폐시키는 열 가지 폐단을 조목별로 상소한 것인데, 이 상소로 인하여 丹陽은 10년 동안 貢賦를 감면받게 되었다. 〈上退溪先生問目〉은 1563년 「心經」과 「近思錄」에 관해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내용과 퇴계의 대답이다. 文 중에는 聾巖 李賢輔를 대신해 지은 글이 많은데 이는 저자의 장인 李文樑이 바로 聾巖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권9는 부록으로, 行狀(李滉 撰), 祭文 5편, 挽詞 2편, 李滉이 쓴 錦陽精舍完護記文 1편과 이에 대한 柳雲龍의 跋이 부기되어 있다. 권말에는 중간본의 간행 경위를 자세하게 기술한 1755년에 쓴 李光庭의 跋이 실려 있다./ 필자 : 金圻彬(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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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예천곤충엑스포를 국제박람회로 승화 준비...성공을 빕니다.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2012("醴泉昆蟲엑스포, 國際博覽會로 昇華" : 郡, 來달 政策企劃團 派遣…國際行事 開催 順天市·潭陽郡 벤치마킹 等 總力) [記事] : 지난 7월 28일부터 23일간 8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은 곤충바이오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로 전국 최고 '곤충의 고장'으로 자리매김에 성공한 예천군이 국제적인 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한 본격 채비에 뛰어들었다. 이에 군은 2012년 11월 2일 정책기획단 담당 직원 2명을 올해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2012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와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준비상황 등 행사 전반을 배우기 위해 순천시와 담양군을 방문한다. 이와 함께 올해 곤충엑스포가 관람객 동원은 물론 국제 곤충학회로부터 세계 최고 곤충축제로 선정된 점에 고무돼 향후 개최될 곤충엑스포를 명실상부한 국제박람회로 승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군은 곤충박람회 개최를 위한 필수적인 인프라 구축은 물론 현재 연구소로만 운영되고 있는 상리면 고항리의 산업곤충연구소의 확충까지 총체적인 점검에 들어간다. 특히 곤충바이오엑스포의 국제박람회로 승격, 개최를 위해 그동안 군이 주관해 온 행사를 경북도가 주관토록 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 해결도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또 국제곤충학회와도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박람회 승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사가 열리면 외국인 관광객 유치 및 외국 곤충 관련기관의 행사 참여에도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곤충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미 두 차례 곤충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군이 곤충엑스포 행사를 세계적인 규모의 곤충박람회로 승화시키면 곤충산업의 메카로 우뚝 서게 될 것으로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군은 당초 2년에 한번 개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곤충엑스포 차기 개최는 3년 뒤인 2015년에 개최하기로 잠정적으로 내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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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947

 

  예천천문우주센터([慶北道·每日新聞主催 2012 사이언스 GB 투어] (7)蔚珍 후포동부초교생 醴泉 투어) [記事] : 울진 후포동부초교 학생들이 우주로 나갈 때 우주비행사들이 느끼는 중력의 변화를 알기 위해 가변중력 체험을 하고 있다.  “이번 천문 우주 체험으로 미래 과학자의 꿈을 갖게 됐습니다.” 2012년 10월 25일 오후 예천군 감천면 예천천문우주센터. 상상력과 동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우주 환경과 천체 관측 체험 프로그램을 접한 울진 후포 동부초교 학생들의 환호와 탄성이 쏟아졌다. 특히 그동안 어떤 과학시설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우주 환경 체험은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훈련 코스인 달중력과 가변중력, 우주자세제어 등 3개 체험과 4D영상 체험으로 이뤄진 우주 환경 체험은 스피드와 스릴, 즐거움이 넘쳤다.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공룡 소재의 입체영상물인 4D영상 체험을 한 아이들은 갑자기 의자가 움직이고 진동하거나, 물과 바람 등의 특수효과가 나타날 때마다 ‘우와~’라고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김수민(10) 양은 “공룡이 갑자기 바로 앞에 나타나 나를 먹으려고 했을 때 무서웠지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스프링을 이용해 캥거루처럼 껑충껑충 뛰며 달 표면을 걸어보는 달 중력 체험을 한 후에도 “한 번 더 체험 기회를 달라”며 사정했다. 또 빙글빙글 돌면서 상`하, 좌`우 방향 감각과 동서남북 방위 감각을 완전 상실하는 우주자세 제어 체험과 초스피드 회전력으로 몸이 무거워지는 가변중력 체험은 구토와 어지럼증이 발생할 정도로 힘들지만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윤대현(12) 군은 “우주에서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며 두 배나 무거워진 느낌을 받았으나 전혀 어지럽거나 무섭지 않았다. 이대로 하늘을 날고 싶다”며 즐거워했다. 태양과 달, 별을 관측할 수 있는 별 천문대도 아이들의 인기를 끌었다. 머나먼 우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주관측실에서는 반사경 지름 508㎜의 망원경을 통해 다양한 별들과 달의 신비로운 모습을 관찰했다. 또 보조관측실에서도 태양망원경으로 낮에는 태양의 자기폭풍 현상인 흑점과 불기둥 현상인 홍염 등을 관찰하고, 밤에는 쏟아질 것 같은 여러 별들을 살펴보며 아름다운 밤하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윤주(12) 양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천체망원경을 통해 아름다운 별과 달을 실감나게 볼 수 있어서 행복했고,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은 국내 최초의 디지털 우주영상실로, 7m 돔형 스크린을 갖고 있어 ‘우주 극장’으로 불리는 우주영상실(플라네타리움)에서 4계절 밤하늘의 별자리와 천체를 관람했다. 또 로켓을 만들어 발사를 했고 종이 헬리콥터를 제작해 비행시키는 체험도 했다. 아이들은 사계절 살아 있는 곤충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예천곤충생태원도 둘러봤다. 붉은색 조명으로 꾸며진 호박벌 전시실에서는 벌을 만진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곳에서 길러지는 호박벌은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지만 벌 중에서 유일하게 침을 쏘지않아 아이들이 마음대로 만지고 잡을 수 있다.  정성현(11) 군은 “귀여워서 집에서 키우고 싶다”며 호박벌을 연신 쓰다듬었다. 식물원으로 이동하던 중 아이들이 무리로 나타난 무당벌레들을 밟으려고 하자 김진환(11) 군은 “생명은 소중하다고 수업시간에 배웠잖아, 밟으면 안 돼!”라고 소리를 쳐 웃음바다를 연출했다. 장월기(31) 교사는 “아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우주 환경과 천체 관측 체험을 하게 돼 감사하며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반겼다.(강병서 記者 每日新聞 2012-10-30)

 

  하리면(沙果 收穫 돕기에 休日 返納 ‘구슬땀’ : 龜尾 三星電子 奉仕팀) [記事] : “농가에 작은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삼성전자 구미 스마트시티 봉사팀 30여명은 2012년 10월 28일 예천군 하리면 한 과수농가에서 사과 수확을 도왔다. 이날 봉사에 나선 삼성전자 봉사팀은 삼성전자 2공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로 모처럼의 휴일을 반납한 채 사과밭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이들 중에는 어린 아이와 함께 가족모두가 봉사활동에 나선 직원도 눈에 띄었다. 한창 사과 수확철이지만 일손을 구하기 힘든 농가입장에선 이들 삼성 직원들이 천군만마와도 같다. 농장주인 조제노(68) 씨는 “수확철이지만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민했는데 삼성 직원들의 도움으로 일거리를 많이 덜게 됐다”며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도와준 삼성 봉사팀에게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날 세 살된 딸을 데리고 가족이 함께 봉사활동에 나선 한 삼성전자 봉사팀원은 “일요일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함께 봉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될 것 같아 함께 봉사에 나섰다”며 “아내랑 사과를 함께 따면서 그 동안 못 나눈 대화도 할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신승남 記者 大邱日報 2012.10.30 01:00)

 

  농협중앙회 예천군지부(農協郡支部&大邱성동초 父母님과 함께하는 自然探訪 및 沙果따기 體驗行事) [記事] : 농협예천군지부(지부장 이종우)는 2012년 10월 27일 하리면 은산리 박세진 농가에서 대구성동초등학교(교장 이병수) 학생과 학부모 등 90여명을 대상으로 사과따기 체험행사를 실시했다. 이날 사과따기 체험행사, 부모님 사과 깎기, 비오는 날 농장에서 도시락으로 나눔행사를 가졌으며, 농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우리 농산물의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정차모 記者 예천인터넷뉴스 2012-10-30 오전 9: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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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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