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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087:황준량(12((祝군청)
작성자장병창 @ 2012.11.01 06:11:10

   예천의 자랑(3087) : 황준량(목사)(12)(附 예천군, 31일 행안부의 노사문화 우수기관으로 인증...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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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준량 : 금계집(錦溪集)/ 금계 황준량의 문집이다. 대학자인 퇴계 선생이 손수 쓰고 편집한 금계집은 명문장가요 글씨로 이름났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명종21년 1566, 당시 28세)의 발문, 퇴계 문하의 대표적인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글씨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시문집이다. 목록과 내집 5권, 목록, 외집 9권, 합 9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66년 이전에 간행되었다. 당초 문집은 4권 분량으로 집안에 남아 있었다. 이를 단양군수 손여성과 아우 황수량이 유집을 수습하여 퇴계에게 편찬을 부탁해 단양군에서 간행했다. 사후에 이 문집이 그곳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재임 시 단양군수로서 끼친 업적 때문이다. 단양군수에 부임한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는 1584년 초간본의 잘못된 글자 13자를 정정하여 판목을 수정했다. 그리고 1607년,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해 초간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모아 외집 8권을 만들어 손수 글씨를 써서 간행하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후손가에 정고본(定稿本)을 남겼다. 외집의 발문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썼다. 그 뒤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소실되자 욱양서원에서 1755년에 간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문집의 목판은 풍기 금계리의 종택 불천위 사당에 보관 중인데 수십년 전 당시에 당한 화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830제(題)가 넘는 그의 시는 처조부인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의 창작에 끼친 영향과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경기체가를 논한 그의 이력으로 인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06/08/23 09:21/ 서수용 박약회 간사(daum 2011)

 

  황준량 : 조선의 문화공간 2/ 冊/ 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 2006-08-07/ 책본문 : 이현보는 이 절의 한적함을 길이 지키라는 뜻으로 절구시를 써서 손자사위 황준량(黃俊良), 그리고 이황·이해(李瀣) 형제에게 보내어 답을 받았다. 바로 인근에 집을 두었던 이황은.../ 32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대동기문(하)/ 冊/ 김성언 역주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 2001-03-20/ 책본문 : ...(洪振道) 500황근중(黃謹中) 522황순승(黃順承) 621황인검(黃仁儉) 642황준량(黃俊良) 255황진(黃進) 336황형(黃衡) 206황희(黃喜) 26효령(孝寧)대군 20휴정(休靜) 379.../ 780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서운관지/ 冊/ 성주덕 편저 지음| 이면우 외 옮김| 소명출판 펴냄 | 2003-04-30/ 책본문 : 영남의 학풍을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황준량(黃俊良)·이덕홍(李德弘)·김성일(金誠一) 등이 있다. 88)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 퇴계 이황(.../ 212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 2(간성에서 정의까지)/ 冊/ 신정일 지음| 황금나침반 펴냄 | 2006-08-04/ 책본문 : 띄우고 놀면 그야말로 신선놀이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율곡 이이 등은 이곳의 경치를 보고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옥순봉은 희고 푸른 암봉巖峯들이.../ 110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冊/ 김성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1-02-28/ 책본문 : ...따르지만 영서지방의 1읍 사례로 파악했다.* 명종 12년(1557) 단양군수 황준량(黃俊良)의 상소.* 명종 16년(1561) 평창군수 양사언(楊士彦)의 상소.* ( ) 안의 수치는 추정치. 대한.../ 112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퇴계문선/ 冊/ 편집부 지음| 두산동아 펴냄 | 2010-05-20/ 책본문 : 제19권 서(書) 4 황중거(黃仲擧)에게 거듭 답하다(*황중거(黃仲擧):황준량(黃俊良 : 1517-1563)으로, 자가 중거이고, 호는 금계(錦溪)이다.) 지난번에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451페이지(daum 2011)

 

  황준량 : 이황,공자 손바닥 위인전/ 2년전, 2009년 10월 30일/ ...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 답변수: 1 | 조회수: 3,588(daum 2011)

 

  황준량 : 이황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 5년전, 2006년 9월 5일/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황준량(黃俊良)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정시한(丁時翰)을 이어 이재(李栽.../ 답변수: 4 | 조회수: 1,367(daum 2011)

 

  황준량 : 이황에 대해/ 지난달, 4월 6일 (수)/ ...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 조회수: 612(daum 2011)

 

  황준량 : 가족과 함께 즐기는 관광명소 ㅣ 멋과 정겨움이 있는 고장 경북 영주.../ 4년전, 2007년 10월 20일/  대(臺)를 이루었으니, 바로 금선대(錦仙臺)이다. 바위 위에 새겨진 금선대는 조선 명종 때의 석학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명명하였으며, 당시 풍기군수였던 송징계(宋徵啓)가 서각(書刻)한 것이다. 이 금선대 위에 황준량의.../ 모아진 > 붕어(daum 2011)

 

  황준량 : 錦溪 黃俊良 - 퇴계학파 맏형… 청빈·애민의 '名 목민관'/ [종가기행 ⑮] 금계 황준량 1517년(중종12)-1563년(명종18)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 중기의 명신. 본관은 평해(平海)다. 안동 출신 명신이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학자였던 농암 이현보의 손서(孫壻)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며, 퇴계 이황의 대표적 제자다. 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난 금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해 '기동(奇童)'으로 불렸다. 21세에 생원(生員)이 되고 24세에 문과 을과 이인(二人)으로 급제했다. 24세 문과 급제는 회재 이언적, 동갑인 소고 박승임 등이 있는데 당시로 보면 매우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성취였다. 지역 선배 중엔 농암 이현보가 32세, 충재 권벌이 30세, 퇴계 이황이 34세, 학봉 김성일이 31세에 급제했다. 그는 급제 후 성균박사, 공조좌랑, 호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거쳤지만 모함을 받고 신령현감으로 나간 이후 단양군수, 성주목사에 이르렀다. 그의 20여 년에 걸친 관료 생활은 중앙 무대에서보다 지방의 목민관으로서 그 성과와 명성이 더 높았다. 금계는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거늘, 그들을 이 지경으로 버려두고서야 관은 있어서 무엇하랴!"고 절규했다고 한다. 4년간의 성주목사 재임 시에는 목민관으로서 뿐 아니라 퇴계 학파의 맏형으로 그리고 중심 학자로서 연구와 책자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기본서로 애독되었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0책 간행이다. 퇴계는 주자서를 '마치 신명처럼 받들었다(敬信如神明)'고 했다. 그러한 유림의 숙원사업을 금계가 이룬 것이다. 금계는 공직자로서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청백리의 모범이었다. 신령현감 시절,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같이 여겨 보살피며, 전임 현감이 관의 재정을 많이 축낸 것을 절약과 긴축으로 메웠다고 한다. 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파산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진폐소를 올렸는데 4, 800여 자의 명문장으로 임금을 감동시켰다. 그가 죽었을 때는 20여 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염습을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교육자로서 금계는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흥한 공이 크다. 성주목사 재임 때 전임자가 세운 염봉서원을 증축하고, 문묘를 증수하는가 하면 교관을 두어 지방의 제자들을 가려서 가르치고, 매달 강회를 열어 성적에 따라 상벌을 베풀었다. 금계는 또 민생의 근본적 대책으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균전의(均田議)'· '책문(策問)'을 통하여 당시 빈부격차의 극심함과 농민의 유리(流離)를 심각히 인식하여 이를 중대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그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도 우리 나라 형편에 따라 우선 한전제(限田制) 실행을 추구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 경세치용의 발단을 보인 것이다. 후일 퇴계학파에서 성호학파-경세치용파가 나왔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주목할 만하다. 금계는 급제 후 '재기가 탁월하여 글을 잘 짓는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실록 편수관에도 이름을 올렸다.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호조좌랑에 있었던 그는 이조좌랑 직에 있던 청천당 심수경, 초당 허엽과 함께 참여했다. 심수경과 허엽은 모두 동문수학한 이들로 관료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다. 영남 지역에 '영유소고(榮有嘯皐)요 풍유금계(豊有錦溪)'라는 문자가 있다. 이는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는 말인데, 퇴계 선생보다 16년 연소한 동갑나기인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의미다. 만약 안동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많은 학자들이 소고와 금계의 문하에 몰려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고와 금계 두 사람만을 놓고 비교하면 금계가 우위라고 할 수 있다. 금계가 퇴계 선생을 배향한 욱양서원(郁陽書院)에 종향(從享, 현종3년, 1622)된 것으로 우열은 판가름 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승보다 먼저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려 퇴계는 제문을 지어 애도했고 행장을 찬해 그의 생애를 정리했으며, 그가 남긴 글을 교열해 문집으로 엮었을 뿐 아니라 관상명정(棺上銘旌)에 '선생(先生)'이라고 썼다. 이는 퇴계에 의해 '세상을 밝힌 유학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아쉬워하는 점은 수(壽)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갔을 때 권문세가에 협조해 깨끗한 선비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오해를 한 이는 다름 아닌 후일 영의정을 지냈고 사림으로 명망이 있었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좌의정을 지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1548-1622)였으니 이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급기야 욱양서원에 종향된 그를 스승인 퇴계를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폐를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물론 숙종 당시에 행해진 출향(黜享) 요구에 맞서 '황준량은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 퇴계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것과 조광조를 신원한 강유선이라는 선비를 배척하여 죄를 입게 했다는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하지만 끝내 사당에서 위패가 퇴출되었고 그의 유적지 및 종택은 사림들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 금양정사 옆에다 퇴계와 금계의 단소(壇所)를 마련해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금계의 평가와 관련 또 하나의 오해가 있었다. 금계는 풍채가 빼어났을 뿐 아니라 도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기이한 야사 한 토막이 사랑방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다. 금계가 성주목사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하급관리의 아내가 그를 흠모해 상사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했다. 생전의 연정을 풀지 못한 여인은 원혼으로 나타났고 금계는 준엄하게 타일러 거절했다. 그래서인지 금계는 성주목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이 중해졌고 세상을 떠날 때도 손을 모으는 시늉을 하면서 '남녀 간에는 분별이 있어(男女有別)'라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다. 성호는 이를 기록한 뒤 '굽힐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사랑방에서는 당사자 이름까지 그대로 거명돼 전해지고 있다. 요점은 금계가 여원(女怨)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 했다는 것.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하다고 판단된다. 금계는 퇴계로부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특히 꼼꼼하게 배우고 토론했던 학자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주목사 재임 중에는 주자서절요를 간행했을 뿐 아니라 문교를 진흥한 교육자였다. 이는 퇴계도 인정한 것으로 결코 여원에 휘말릴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1550년(명종5)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스승을 찾아온 제자 금계에 대해 퇴계는 시 한 수를 써서 반겼다.

 

  시냇가에서 님을 만나 의심난 것 토로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조물주가 매화꽃 더디 피운 것을 아쉬워해/ 일부러 잠깐 동안 가지에 눈꽃 피게 했네/ '퇴계 초옥으로 황금계가 찾아온 것을 반겨(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라는 퇴계의 작품이다./ 금계의 '민폐10조 상소문' : 선비의 기개는 상소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중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역사적인 상소로 회재 이언적이 49세 때 올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퇴계 이황이 67세 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남명 조식이 55세 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일명 丹城疏)를 손꼽는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영남의 지성 금계 황준량의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를 더하고 싶다. 물론 금계는 지명도에서 위에 예시한 인물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곤궁한 백성들의 실상과 그 해결방안을 4,800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담은 이 상소문은 문장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목민관으로서의 극진한 마음씨와 함께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가 읽는 이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41세 때인 1557년(명종12) 가을에 단양군수가 된다. 막 부임한 단양은 자신의 고향과 큰 산을 사이에 둔 이웃 고을이며 스승인 퇴계 선생도 산수향(山水鄕)으로 즐겁게 봉직했던 곳이다. 그러나 고을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민폐는 감내할 정도를 넘어섰고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금계는 우선 고을의 상태를 '잔폐(殘廢, 쇠잔하여 다 없어짐)'로 진단하고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에서 단양 고을의 현실을 이렇게 그렸다.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田地)는 본래 척박해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 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고단한 민초(民草)들의 삶이 참으로 절절이 담겨 있다. 금계는 상·중·하로 나누어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단양을 살리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정해 부역과 조공을 면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上策)이며, 군(郡)을 혁파하여 현(縣)으로 강등시켜 아직 살아 남은 백성들을 다른 고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그 다음 계책(次策)이요, 이 둘을 모두 선택할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해 볼 일이 있다(下策)고 설정했다. 그런데 앞의 두 정책은 현실적으로 채택할 수 없는 이상론이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계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치밀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조정에서는 그가 열거하는 하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금계는 가장 못한 정책으로 10가지 항목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목재, 종이, 산짐승, 약재, 꿀 공납(貢納) 등 열 가지의 폐단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것을 없애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이 상소는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이른 윤원형은 단양 고을만 잡역(雜役) 면제의 특혜를 줄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마침내 명분에 밀려 주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뢴 대로 하라"는 전교가 그것이다. 애민의식이 투철했던 작은 고을 수령의 지혜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금계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유려한 문장도 일조했다. 문장을 통해서 나라를 명예롭게 한다는 의미로 '이문화국(以文華國)'이란 말도 있지만 금계의 경우는 '이문활민(以文活民)'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소문은 현 시점에서 읽어도 가슴을 울리게 한다. 450여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 농촌의 현실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금계는 목민관의 착취와 함께 수재와 한재라는 자연재해 때문에 고을이 잔폐했다고 했는데, 최근 단양 주민들이 큰 물난리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니 고금의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닮아 있는 것이다.(daum 2011)

 

  황준량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성명 : 황준량(黃俊良) , 1517(중종 12)년 ~ 1563(명종 18)년/ 본관 : 평해(平海)/ 자 : 중거(仲擧)/ 호 : 금계(錦溪)/ 출신지 : 풍기(豊基)/ 분묘지 : 풍기(?基) 내곡(內谷)/ 입사경로 : 문과(1543년)/ 내관직 : 공조 좌랑(工曹佐郞), 호조좌랑겸춘추관기사관(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병조 좌랑(兵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외관직 : 성주 훈도(星州訓導), 신녕 현감(新寧縣監), 단양 군수(丹陽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문명(文名)을 날리다 : 금계 황준량은 1517년(중종 12) 풍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자질이 남달라서 일찍부터 문자를 해독하고 말을 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기이한 아이(奇童)라 불려졌다. 18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여 책문(策文)을 지었는데, 시험감독이 그 책문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자자해지게 되었다./ 목민관으로서 민생과 교육에 힘을 쓰다 : 황준량은 중앙의 벼슬보다 신녕 현감(新寧縣監), 단양 군수(丹陽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등 외직을 통해 지방의 교육을 부흥시키고 민생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업적을 많이 남김으로써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35세인 1551년(명종 6) 신녕 현감에 부임한 황준량은 백성의 진휼에 힘썼고 전임관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림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주력한 것은 학교(學校)의 부흥이었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의 창설은 학교 부흥에 대한 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백학서원을 보고 느낀 감회를 시를 통해서 표현하였다.  “옷깃에 노리개를 차고 당에 올라 모두 어진 이를 바라니, 벽을 비추는 은 갈고리에 붓이 사다리 같네. 옛 골짜기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강론할 자리를 마련하고, 미친 물결을 둘러막아 아름다운 못을 만드네. 존심(存心)의 요체는 시(詩) 석 자이고, 주경(主敬)을 담당하는 스승은 예(禮) 한편이라. 읊으며 돌아가니 춘흥에 저절로 서로 이끌리는 구나.” 41세인 1557년(명종 12) 황준량은 단양 군수가 되었는데, 당시 단양은 남아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곤궁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을 목격하고 ?단양진폐소(丹陽陳幣疏)?를 올려서 백성의 폐해가 되는 원인을 조목별로 올려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단양은 10년간 면세가 되는 특혜를 입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떠돌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단양향교(丹陽鄕校)를 중수하고 우탁(禹倬)을 배향하여 지방 내의 학풍을 일신하고자 노력하였다. 44세인 1560년(명종 15)에는 성주 목사가 되었는데, 역시 학교의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전임 목사인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세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증수하여 규모를 더욱 넓혔으며, 오건(吳健, 1521~1574)을 성주의 교관(敎官)으로 삼아 제자들을 모아 교육을 주관하고 감독하게 하였고, 매월 한 번씩 회강하여 글을 외우고 의문이 나는 곳은 토론하도록 하여 근면의 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성주 동쪽에 공곡서당(孔谷書堂)·팔거현(八?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웠고, 그 결과 교화가 사방에 이르고 각자의 자질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황준량은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노년에 돌아가기 위해 죽령(竹嶺)의 아래에 있는 금계(錦溪)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짓고는 책을 보관하고 도를 강론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어지기도 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금계에서의 노년의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휘어 꺾여 맑은 산골 물을 따르고, 얽히고 돌아 끊어진 다리를 건너네. 언 구름이 돌구멍에서 피어나고 찬 눈이 소나무 끝에 쌓이네. 자리를 편 듯 바위 모양이 예스럽고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높네. 봄이면 한 초가집에서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늙으리.”/

 

  이황이 바라본 황준량의 성품 : 이황은 황준량의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평가한다. 물건이 생기면 모친을 봉양하거나 자매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장사를 지내는 날 상복이나 관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황은 그가 아름다운 산수를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풍경을 보며 배회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가족이야기 : 조 : 황효동(黃孝童), 생부 : 황치(黃?), 모 : 창원황씨(昌原黃氏) 황한필(黃漢弼)의 딸, 형제 : 황수량(黃秀良), 황계량(黃季良)/ 풍기 지역에 터를 잡은 가문 :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平海)로 원조는 고려시대 시중(侍中) 황유중(黃裕中)이다. 그의 고조는 황연(黃?), 증조는 황말손(黃末孫)이며, 사온주부(四?主簿)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황효동(黃孝童), 아버지는 황치(黃?)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창원황씨로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처의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이문량(李文樑)의 딸이며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손녀이다. 황준량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황수량(黃秀良)의 아들 황영(黃瑛)을 후사로 삼았다. 원래 선조들이 처음부터 어디에 거주하였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고조인 황연이 영천에서 풍기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풍기 지역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학문이야기 :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우곡서원(愚谷書院)에는 류운룡,황섬,이준,김광엽 봉안, 백학서원(白鶴書院), 욱양서원(郁陽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이현보(李賢輔), 노경린(盧慶麟), 금응보(琴應賓), 주세붕(周世鵬)/ 학문에 대한 자질과 열정 :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라 불릴 만큼 학문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청년기에 그의 책문(策文)이 훌륭한 평가를 받으면서 더욱더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정확하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그와 자주 학문적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식견이 드러나 조정에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가 성주 목사로 있을 때는 밤새도록 식음을 전폐하고 독서에 몰입하여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기르는 것이 근본인데 글을 읽는 것으로 병이 나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운명이지 글의 잘못은 아니다.”고 하면서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학문에 대한 자질과 열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시세계와 성리(性理) 탐구 : 황준량의 시(詩)는 농암 이현보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유선(儒仙)의 풍류를 이어받아 자신의 시속에서 선계(仙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현보와 교류가 있었던 이황을 만나게 되면서 서로간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훨씬 더 깊이 있는 성리학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황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황은 황준량에 대해서 “처음 선생(이현보)의 문하에서 공을 알게 되어 교유함이 깊고 가까워져서 어리석고 듣지 못한 것을 공으로 인해 깨우친 바가 많다.”고 하여 자신도 그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였다. 황준량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가지 성리학(性理學) 관련 서적들을 읽고 마지막에 주자서(朱子書)를 읽음으로써 깨달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의문이 나는 지점은 항상 이황에게 질의를 하여 문답과 토론을 통해 의문을 해결해 나갔다고 한다. 특히 거처하는 곳마다 주정지경(主靜持敬)의 핵심이 되는 성현(聖賢)의 긴요한 말씀들을 적은 첩(帖)을 사방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작이야기 : 이황(李滉)과 정구(鄭逑)의 노력으로 편찬된 『금계선생문집』, 『금계선생문집』은 '내집'과 '외집'으로 되어 있다. '내집'은 단양 군수 손여성(孫汝誠)이 1564년(명종 19)에서 1566년(명종 21) 사이에 저자의 동생 황계량(黃季良)과 함께 글들을 모은 뒤, 이황의 편차를 거쳐서 4권으로 만들어 단양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후 18년 뒤인 1584년(선조 17) 황응규(黃應奎)가 단양 군수가 되면서 초간본을 검토하고 오류를 정정한 뒤에 다시 간행한 것이 '내집'이다. '내집'의 완료 이후 1607년(선조 40) 정구가 안동 부사로 부임하면서 초간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모아 8권으로 편찬한 것이 '외집'이다. 얼마 후 단양의 초간본이 화재로 유실되자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에서는 이광정(李光庭)의 교정 아래 이황과 정구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내집'과 '외집'을 재편하지 않고 다만 부록(附錄)만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서정적 문학과 성리학적 세계관이 농축된 『금계선생문집』 : 황준량의 문집은 내집(內集) 5권·외집(外集) 9권, 총 14권 5책으로 되어 있다. 내집의 권1~3은 시(詩) 200편으로 저작의 시기 순으로 배열되었으며 퇴계 이황에게 보내거나 차운한 시가 가장 많다. 권4는 잡저(雜著)로 기(記) 2편·서(書) 9편·제문(祭文) 1편·소(疏) 1편·발(跋)1편이다. 권5는 이산해(李山海)의 발문(跋文), 황응규(黃應奎)의 지(識)가 있다. 외집의 권1~6은 시인데 574편이 수록되었고, 권7은 상소 2편·전(箋) 3편·편지글 15편, 권8은 잡저 26편·제문 2편·묘지(墓誌) 1편·대책(對策) 2편으로 되어 있다. 권9는 부록으로 이황이 쓴 저자의 행장(行狀)과 제문 5편·만사(輓詞) 2편·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에 대한 유운용(柳雲龍)의 발문이 수록되었다. 권말에는 중간본의 간행 경위를 자세하게 기술한 이광정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금계선생문집』에 수록된 시(詩)는 외직을 맡은 곳과 주변의 경관을 대면하면서 선계(仙界)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을 형상화한 서정적인 내용의 시가 대부분으로 주로 이언적(李彦迪)·이황·이현보·노경린(盧慶麟) 등과 주고받은 것이 많다. 문장은 시에 비해서 양이 매우 적다. 그 중에서 편지글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이황과 성리(性理)에 대해서 의문이 나는 곳을 질문하고 답변해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그의 학문 경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서정적인 시 문학, 이황이나 동료 학자들과의 철학적 논쟁이 문집에서 주로 드러나지만 이 외에도 목민관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글도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특히 단양 군수 시절 고을을 피폐시키는 10가지 폐단을 조목별로 제시한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이다. 이 상소 덕분에 단양의 백성은 10년간 공부(貢賦)를 감면받게 하였고, 백성들의 고통을 감면시킨 사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초간본이 단양에서 간행된 것도 바로 저자가 베풀어준 은공에 감사해 하는 단양군의 의도가 반영된 것임을 볼 때 그의 목민관으로서의 업적 역시 그의 문집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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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31일 행안부의 노사문화 우수기관으로 인증...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醴泉郡 公務員 勞使文化 優秀機關으로 認證) [記事] : 예천군(군수 이현준)은 2012년 10월 31일 오후 2시 대전시 유성호텔 스타볼룸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관 2012년 공무원 노사문화 대상 및 우수 행정기관으로 선정되어 인증서를 수여받았다. 2010년부터 행정안전부에서 도입한 공무원 노사문화 우수행정 기관 인증은 노사문화를 잘 정착시키고 있는 모범적인 행정기관을 발굴해 공직사회 전반에 상호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까다로운 심사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지난 7월 인증을 신청하여 행정안전부 관계자를 비롯해 외부 심사관계자들이 9월 5일 예천군을 직접 방문하여 이현준 군수 및 군청직장협의회장(권석진) 등을 면담하고 협력적 노사문화에 대한 추진 상황과 현장을 일일이 점검하였다. 이번 공무원 노사문화 우수 행정 기관에는 예천군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군단위 자치단체로 선정된 것이며 이는 이현준 군수를 비롯한 전 공직자가 건전한 노사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만들어 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현준 군수는 上下의 노사관계가 아닌 화합의 노사 관계 형성을 위해 상호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직원 간 소통의 대화시간을 많이 가져 활기찬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권석진 공무원직장협의회장은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함양을 위해 공무원으로 구성된 공무수행 밴드를 결성, 지역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재능 기부에 앞장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에 앞장섰다. 또한 지난 8월 85만 명이나 다녀간 전국 최대의 곤충 축제인 2012예천곤충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도 이현준 군수를 중심으로 대화를 통한 끈끈한 신뢰 구축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군 관계자는 우수기관 인증을 계기로 보다 성숙하고 생산적인 노사문화로 계승시켜 공공서비스 질 향상은 물론 군민 복지증진에 더욱 매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醴泉인터넷放送 2012-10-31 오후 4: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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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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