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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136:권교택(5)-권구(1)(祝경찰서)
작성자장병창 @ 2012.12.20 06:13:27

   예천의 자랑(3136) : 권교택(사장)(5)-권구(승지)(1)(附 예천경찰서, 치안 고객만족도 도내 1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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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교택 :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cafe/ 예천경제인포럼- 홍천 테마파크 1박2일 워크숍 대성황/ 작년, 2010년 9월 14일/ (가나다순) ◆수석부회장(6명) △고규환 아세아시멘트(주)대표이사 △권건춘 (주)건은 대표이사 △권교택 (주)한솔캐미칼 대표이사 △권재익 삼송산업(주)대표이사 △윤희육 모닝스타코리아(주)대표이사 .../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권교택 : 제18회 정심상 시상식 가져/ 4년전, 2007년 10월 5일/ (정심상) 시상식이 3일 오전 11시 예천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권교택 정심회장 및 회원, 김수남 군수, 남시우 군의장, 최명환 예천교육장, ·윤영식 도의원, 이재창·.../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권교택 : 재경용문면민회 정기총회 사진 =12/9/ 5년전, 2006년 12월 20일/ ...하셔서 서초로얄프라자 큰회의실을 가득 매웠읍니다. 재경용문면민회 권만하 회장님 이하 권교택 수석부회장님, 각기 부회장님 사회를 보신 박병희 상임부회장님, 윤병열 감사님, 특히 재경면민회 살림을.../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권교택 : 재경예천군민회cafe/ [축 영전] 권교택 지도위원 용문35회 한솔제지 대표이사 영전을.../ 2달전, 2011년 1월 28일 (금)/ 한솔그룹은 28일 권교택(62) 한솔케미칼 대표이사를 한솔제지 및 아트원제지 대표로 임명하고, 한솔케미칼 대표에 박원환(57) 한솔케미칼 경영지원본부장을 각각 임명하는 등 대표 인사를 단행했다.../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예천경제인포럼- 홍천 테마파크 1박2일 워크숍 대성황/ 작년, 2010년 9월 14일/ (가나다순) ◆수석부회장(6명) △고규환 아세아시멘트(주)대표이사 △권건춘 (주)건은 대표이사 △권교택 (주)한솔캐미칼 대표이사 △권재익 삼송산업(주)대표이사 △윤희육 모닝스타코리아(주) 대표이사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석호진, 김범일, 권교택 씨 표창 -"2008 노사상생협력대상/ 3년전, 2008년 12월 26일/ 석호진씨(석탑산업훈장) 김범일 대구시장 권교택씨 대통령 표창 등 노사 상생 협력 우수 자치단체와 산업현장의 노사문화 선진화 등에 기여한 기업, 노사대표 및 유공자를 발굴·포상하는 "2008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예천경제인포럼 정기총회 3월월례회 개최-(예천신문)/ 2년전, 2009년 3월 19일/ 노상우 박헌식 배명직 석근 손병희 전재천 조영정 최상호 황병봉 △부회장:고규환 권건춘 권교택 권동칠 권재익 권중길 김선도 김완규 김창균 채용호 최경원 최동순 황진섭 권오봉 △감사:우필구 권오수.../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예천경제인포럼 발기인대회-이모저모(보고)/ 2년전, 2009년 2월 1일/ 정용인 前 대전고법원장, 권남혁 前 부산고법원장, 박명기 서울시 교육위원 등 위촉고문단과 권교택 한솔캐미칼 대표이사 등 각계 성공한 출향예천인 100여명이 참석하여 예천인의 기상으로 아침을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예천경제인포럼 발기인 명부/ 2년전, 2009년 1월 31일/ 2@yahoo.co.kr 예천읍 0 0 0 권건춘 ㈜건은 대표이사 kunchoon@kuneun.co.kr 감천면 0 0 0 권교택 ㈜한솔캐미칼 대표이사 ktkwon@hansol.co.kr 용문면 0 0 0 권동칠 ㈜트렉스타 대표이사 dckwon@.../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헤닉권 권병하 회장 재경예천군민회 환영모임(보고)/ 3년전, 2008년 8월 18일/ 르네상스호텔에서 재경예천군민회 변정구 회장 변우량 고문, 정용인 고문, 김선도 정심회 회장, 권교택 한솔케미칼 대표이사, 김학동 푸른학원 이사장, 조영정 (주)몰드리치 회장 등 많은 재경예천출신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교택 : 재경 용문 면민회 정기총회 사진 [1]/ 5년전, 2006년 12월 16일/ ...하셔서 서초로얄프라자 큰 회의실을 가득 매웠읍니다. 재경용문면민회 권만하 회장님 이하 권교택 수석부회장님, 각기 부회장님들, 사회를 보신 박병희 상임부회장님, 윤병열 감사님, 특히 재경면민회 살림을.../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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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구(權坵) :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2년 (165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1위/ [인적사항] 자 차산(次山), 생년 신해(辛亥) 1611년, 합격연령 41세, 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상주(尙州)/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권익린(權益隣), 타과 : 성균생원(成均生員)/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제] 권질(權?)/ [제] 권암(權?)/ [제] 권탄(權坦)/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권구 [專門資料] : [挽辭] 權坵/ 2007.02/ 권구(權坵)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권구 :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휘 익(諱 瀷) 묘갈명(墓碣銘) 원문 - 국당공파 충주지역.../ 2009.05.14/ ...。端莊有度。閨門穆如。聞慶公薦孝行。節死于壬辰。其賢有行有自云。擧一男一女。男仁實。翊衛司司禦。女適生員權坵。司禦娶同郡金氏。持平元亮女。五男炡,?,炳,炯,?。二郞四郞俱進士。季寢郞。二女庶尹李志雄及曹一夔。權氏二男以.../ http://cafe.daum.net/chunghokong/ 경주이씨 익재공후 청호공 종중(daum 2010)

 

  권구(權坵) : 본관(本貫) 안동(安東), 자(字) 차산(次山)/ 이력(履歷) 권구(權坵) 본(本) 안동(安東) 자(字) 차산(次山) 관(官) 좌승지(左承旨)(daum 2010)

 

  권구 :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좌승지 권구의 묘표(左承旨權坵의 墓表) : 산북면 내화리(추동)/ 府君諱坵字次山安東人始祖諱幸佐高麗太祖討甄萱報國紈援大匡太師子孫繁衍榮顯爲我東大姓有諱徵登第官司憲府持平以北評事歿於王事子諱甲成孫諱燁皆廢科隱遯至曾祖諱大器中司馬有學行退溪先生集中有酬唱詩及書且入於門人錄是府君曾祖也因子別坐宏參原從勳三世皆贈職祖諱宇十九歲往陶山受周易早中司馬薦學行官王子師傅贈左承旨世稱松巢先生考諱益中司馬明經力學遊張旅軒門下娶順興安氏郡守敬賓之孫贈佐郞命男之女以萬曆辛亥四月二十日生府君幼而岐疑甫成童文詞大進累捷鄕解辛卯始登司馬雖以親命蠅勉赴擧而素心不在歲巳亥占別業于北山之草谷愛其幽寬携家棲隱名所居室曰藏齋是年冬遭考枇喪易戚備盡旣葬與弟三人奉肌筵結廬于墓下楸洞村朝夕哭奠終制乃歸丙午卜地于近癌村移家家焉又於家後山谷間別築取志士不忘在溝壑之義以溝壑名齋燔閱經史顯養心性有自得無求之樂壬戌夏五月十二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二葬于楸洞考枇墓下壬坐丙向之原府君資質端潔器度嚴重有三軍不可奪之節於朋友少許可愼然諸諾居泮時有京城一士食堂會與府君捿膝而坐終一歲不交一言後其人敬歎曰吾固難君亦難於吾活齋李處士渠僑居於大道村與爲知心友道義講磨過從勤數一日犯邁病甚篤府君入救疾不避及卒爲諒詞祭文極其哀惜且抵書洪木齋汝河議私謚事平居訓子弟御奴候嚴而有道又謹於祭祀之禮參酌先世所行爲一帖名以奉先禮定早謝公車杜門出入而士望益尊鄕黨愈敬慕皆惜其尼於時命不得見用於世而有所施設也不喜著述有遺稿略干卷而先輩多稱文章高古有西漢體云聘慶州李氏考諱瀷光海廢大妃時以內翰上疏極諫囚牢獄幾死賴時相營救安置濟州仁廟初被召還朝翌年甲子卒官止司憲掌令贈弘文館典翰祖諱惟一判官贈左贊成曾祖諱鸞贈領議政外祖申公諱吉元壬辰島夷之亂以聞慶縣監不屈而死掌令公謫濟州時夫人申氏巳喪逝祗有一子一女皆幼遂托子於婦兄敎官公命休托女於友壻牧使李公憺家李公時自忠原寓居於尙州山陽之塔洞無子女祖枇自幼養於姨母申氏無異己出申氏歿服喪哀毁忌祭必親設行極其誠敬遺命子與孫無廢祭以報養育之恩云惟度雅貞軒豁無屑屑態家貧而不遂利營産惟以孝舅姑謹祭祀爲務生於癸丑九月初九日歿於丙午正月二十八日享年五十四墓在楸洞後十七年葬府君于壙西合墓有二子一女相一生讒四歲府君下世不能記其顔面而侍先考側熟聞平生言行窈恐日遠日忘乃敢綴拾爲狀草以備秉筆君子之取舍云禽/ 不肖 曾孫 相一 謹誌/

 

  <譯文> : 府君의 諱는 坵요 字는 次山이니 安東人이라 始祖의 諱는 幸이니 高麗太祖를 도와 甄萱을 討伐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으니 大匡太師를 주었다. 子孫이 번연하고 높이 현달하여 우리나라의 大姓이 되었다. 또한 諱는 徵이니 登弟하여 벼슬이 司憲府持平인데 北評事로 王事에 돌아가셨다. 子의 諱는 甲成이요 孫의 諱는 燁인데 모두 科擧를 廢止하고 은둔하였다. 曾祖諱大器에 이르러 司馬에 合格하고 學問과 德行이 있었다. 退溪先生의 文集속에 唱酬한 詩와 便紙가 있고 그리고 門人錄에 들어갔다. 이 어른이 府君의 曾祖인데 아들 別坐인 宏의 原從에 參與한 공훈으로 三世가 다 贈職이 되었다. 祖의 諱는 宇니 十九歲에 陶山에 가서 周易을 배웠다. 일찍이 司馬試에 合格하고 學問과 德行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王子師傅였는데 左承旨에 贈職되고 世上이 松巢先生이라고 일컬었다. 考의 諱는 益隣인데 司馬試에 合格하고 經書에 밝고 學問을 힘써 張旅軒門下에 游學하였고 順興安氏郡守인 敬賓의 孫이요 佐郞을 贈職한 命男의 따님에게 장가가셨다. 萬曆辛亥四月二十日에 府君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 겨우 成童에 문장이 크게 진전되어 여러번 鄕解에 合格하였다. 辛卯에 처음으로 司馬에 오르고 비록 어버이의 명령으로 힘써 과거에 갔으나 본래의 마음에는 있지아니했는지라 己亥年에 別業을 山北의 草谷(샛골)에 占有하였음은 그곳의 그윽하고 관대함을 사랑하여 가솔을 이끌고 사는 집을 이름하여 이르되 藏齋라 하였다. 이해 겨울에 부모상을 만나서 예의와 슬픔을 갖추어 다하며 이미 장사를 지내고 아우 세사람과 机筵(靈床)을 받들고 여막을 묘아래 楸洞村에 결구하여 朝夕으로 울고 上食을 드리고 三年을 마치고 돌아왔다. 丙午年에 近癌村에 터를 잡아서 집을 옮겨 生活하여 또한 집뒤 山谷間에 別莊을 신축하고 志士는 溝壑에 있던 義理를 잊지 아니함을 취하여 溝壑으로 齋를 이름하였다. 경서와 사기를 펴 놓고 조사하며 心性을 이양하고 스스로 無求곧 욕심없는 樂을 누렸다. 壬戌夏五月十二日에 正寢에서 考終命하니 享年이 七十二라 楸洞考의 墓아래 壬坐丙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府君의 자질이 단정결백하며 기국과 도량이 엄숙중후하여 三軍이라도 탈취못하는 절개가 있었다. 벗에 있어서 許交를 적게하고 허락함을 신중히 하셨다. 泮宮(성균관)에 있을때 京城一士로 食堂에 모임에 府君과 같이 무릎을 닿게 앉아 一年이 되도록 한말도 교환을 아니했드니 뒤에 그사람이 경탄하여 이르되 나도 진실로 그대를 어렵게 여겼지만 또한 나를 어렵게 여겼다고 하였다. 活齋李處士가 大道村(한두리)에 僑居(타향살이)함에 더불어 知心友를 삼고 道義를 講磨하며 過從곧 내왕을 부지런하게 자주하였다. 하루는 전염병이 범하여 병이 매우 위독하니 府君이 들어가 병구완 하기를 피하지 아니하셨다. 죽음에 이르러 詞와 祭文을 하여 哀惜의 情을 극진하게 하고 그리고 편지를 洪木齋汝河에게 보내어 私諡의 일을 논의하였다. 평상시 생활에 子弟를 훈계하고 노복을 다스림에 엄숙하여 道義가 있고 또한 祭祀의 禮를 삼가 先世所行을 참작하여 한첩을 만들어서 奉先禮定이라고 이름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사절하고 杜門不出入하였으되 士望이 더욱 높고 향당이 더욱 경모하고 모두가 그가 시기의 운명이 定해져 세상에 보고 쓰임을 얻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으되 시설한 바는 있었다. 저술을 기쁘하지 아니하여 遺稿略干卷이 있었는데 先輩들이 文章家라 칭하고 高古하여 西漢의 文體가 있다고 하였다. 慶州李氏考諱瀷의 따님을 맞이하니 光海君이 大妃를 廢할때에 內翰으로 上疏하여 극간하다가 옥에 갇히어 죽을뻔하다가 그때 정승의 구제를 힘입어 濟州에 安置되었다가 仁廟初에 부름을 입어 朝廷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甲子에 돌아가시니 벼슬이 司憲府掌令에 그쳤으나 弘文館典翰에 贈職되었다. 祖의 諱는 惟一인데 判官으로 左贊成이 贈職되고 曾祖의 諱는 鸞인데 領議政을 贈職하였다. 外祖는 申公諱吉元인데 壬辰島夷의 亂에 聞慶縣監으로 屈伏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掌令公이 濟州에 귀양갔을 때 夫人申氏는 이미 죽고 다만 一子一女다 어려서 드디어 아들은 婦兄인 敎官公命休에게 부탁하고 딸은 벗의 사위인 牧使李公憺의 집에 부탁하였다. 李公이 그때에 忠原으로부터 尙州山陽의 塔洞(지금의 봉정)에 寓居하고 子女가 없었다. 祖가 어려서부터 姨母申氏가 길렀으며 자기가 낳은 거와 다름이 없었다. 申氏가 돌아가심에 상복을 입고 슬퍼했으며 忌祭에 반드시 親히 제사를 지내고 그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했다. 子與孫에 명령을 내려서 제사를 폐지함이 없도록 하여 양육의 은혜를 갚도록 했다고 이른다. 성품과 도량이 아담하고 곧으며 넓어서 잡다한 태도가 없고 利害를 좇아서 살림을 하지 아니했다. 오직 구고에 효도하고 祭祀를 삼가는 것으로 힘썼다 癸丑九月初九日에 나셔서 丙午正月二十八日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五十四라 墓는 楸洞뒤에 있었는데 十七年뒤에 府君의 壙西로 合墓를 하였다. 아들 셋, 딸 한분을 두었다. 相一이가 겨우 네살에 府君이 돌아가셨으니 能히 顔面을 기억하지 못하나 先考를 곁에서 뫼실 때 익혀 들었으므로 平生의 言行이 날이 멀어지면 날로 잊어질까봐 간절히 두려워하여 이에 敢히 거두어 엮으니 狀草를 만들어 秉筆君子의 取舍의 資料에 대비하노라./ 不肖孫相一謹誌厚有三男七女皆及時婚嫁多具粧櫃以乙亥四月初四日生壬辰十一月初一日卒享年七十八附葬于楸洞墓左/ 不肖孫 相一 謹誌(daum 2010)

 

  권구 : 성명(姓名)/ ...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었던 황시간(黃時幹)의 외손(外孫)이며, 유직(柳稷)의 문인이다. 홍호(洪鎬)권구(權坵)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황(李滉)의 문하 중 병파(屛派)인 유성룡 계통의 학통을 이었다. 1650년(효종 1) 집권파인.../ http://www.shinjongwoo.co.kr(daum 2010)

 

  권구 : 권상룡(權相龍)/ ...관직(官職) : 장령(掌令) [가족사항] 부(父) : 권한(權澣) 조부(祖父) : 권이칭(權以稱) 증조부(曾祖父) : 권구(權坵) 외조부(外祖父) : 조연(趙淵)/ http://koreandb.nate.com(daum 2010)

 

  권구 : 권상룡(權相龍)/ ...) 관직 장령(掌令) [가족사항]   [부] 성명 : 권한(權澣) [조부] 성명 : 권이칭(權以稱) [증조부] 성명 : 권구(權坵) [외조부] 성명 : 조연(趙淵)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수정일 수정내역 2005-11-30 서울대학교 규장각.../ http://people.aks.ac.kr(daum 2010)

 

  권구 [記事] : 안동권씨 수곡종택/ 관련인물유물/ 수곡집(樹谷集)|소지(所志)|권조의 가계 : ... 세 아들 중 셋째이다. 병곡 권구는 안동권씨 세계상 27대로, 예천에서 가일로 재입향하여 가일 안동권씨의 ...(www.koreastudy.or.kr 2007)

 

  권구 : <병산육곡(屛山六曲)>/ 2010.03.20/ 권구-병산육곡-해설.hwp/ http://cafe.daum.net/dlsaram/ 들사람의 문학 공방 『하늘못』(daum 2010)

 

  권구 : 병곡(屛谷) 권구|지역및역사인물▣ / 청계(淸溪) | 2009.04.10 16:41/ http://cafe.daum.net/andonggilan/FU7J/78/ 병곡(屛谷) 권구/ 선생의 諱(휘)는 구요 자는 方叔(방숙)이며 안동권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搏(박)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징이며 선교랑이다. 처는 풍산류씨인데 拙齋(졸재) 元之(원지)의 따님으로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증손녀이다. 현종 13년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자물쇠를 거꾸로 잠갔는데 외숙이 꾸짖자 이에 스스로 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八陣圖(팔진도)도 풀었는데 천하의 물건이 어찌 풀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하며 글의 뜻을 모두 밝게  풀이하셨고 커가면서 세속에 얽매임이 없이 옛사람의 법도를 따라하였으며 독서를 통하여 사물에 本末(본말)과 輕重(경중)을 살피셨다. 六經(육경)과 四書(사서)를 탐독하였으며 程朱學(정주학)에 이르기까지 독실한 뜻으로 연구하셨다. 성년이 되어서는 葛菴(갈암)선생의 문하에 遊學(유학) 하였으며 密菴(밀암)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切磋琢磨(절차탁마)하여 견문이 매우 넓었으며 학문의 깊은 뜻을 밝히어 스스로 깊이 이해하였다. 山澤齋(산택재) 權泰時(권태시) 都事(도사) 金命基(김명기) 縣監(현감) 柳後光(류후광) 蒼雪齋(창설재) 權斗經(권두경) 같은 선배들과 나이를 잊고 벗하였으며 유림에서 큰 의론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생의 한 말씀으로서 去就(거취)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아무개는 나이는 젊으나 우리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丁丑(정축:1697년), 戊寅(무인:1698년)에 거듭 內外艱喪(내외간상)을 당하였는데 병을 救療(구료: 병을 고쳐줌)하고 居喪(거상: 상중에 있음)의 범절에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다. 선고(아버지:징)께서 일찍이 병중에 계시면서 甘酒(감주)를 원하였으나 의원이 이롭지 못하다고 말하기에 드리지 아니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생토록 자신은 감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사에 뜻을 끊으시고 杜門不出(두문불출)하여 독실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丙申(병신:1716년)에 병산에 우거하고 자호를 병곡이라 하였다. 藍田鄕約(남전향약)을 增減(증감)하여 주민들을 깨우치니 백성의 풍속이 점차 개선되었다. 戊申(무신:1728년) 봄에 大臣(대신)이 그 착한 行誼(행의)를 들어 조정에 狀啓(장계)를 올렸는데 밀암과 함께 薦目(천목)에 들어갔다. 이해(1728년)에 역적 鄭希亮(정희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賊將(적장) 李能佐(이능좌)가 무리를 이끌고 밤에 들이닥쳐 사태를 헤아릴 수 없이 위급하였는데 이는 평소에 선생의 聲望(성망)을 듣고서 중요한 인물에게 의지하려고 함이었다.  선생께서 꾸짖으시고 목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다만 내 머리를 잘라가거라’ 하셨다. 賊徒(적도)의 기색은 울상이 되어 물러갔으며 이어서 文扇(문선)에 글을 써서 이르시기를 ‘밝은 해 머리위에 다르다니 붉은 마음 한 올이 밝아지도다. 차라리 죽고 사는 변고 있을지라도 기어이 귀신에게 맹세하리라’ 하셨다. 그 후 親鞫(친국)에 나아갔을 때 왕께서 그 神色(신색)의 편안하심과 응대함에서 정직하심을 살피시고 大臣(대신)과 郞官(낭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하셨다. 대답하기를 ‘도학을 배워서 지킴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 옵니다’하였다 왕께서 그렇다고 하시고 석방을 명하시면서 두 군졸을 시켜 거처에 까지 모셔다 드리게 하셨다. 이어서 관찰사에게 諭旨(유지)를 내리셨는데 요약하여 이르자면 ‘안동사람은 順(순)과 逆(역)을 밝게 이해하였으며 역도를 꾸짖어 적을 물리쳤으니 가히 아름답다 할 것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 후 戊申(무신:1788년)에 영남유림에서 왕께 疏(소)를 올렸는데 정조께서 경연에 있는 대신에게 이르기를 “권구의 일은 참으로 장하도다. 칼날을 무릅쓰고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랴”하시었다. 선생의 이름난 절의는 더욱 오래도록 더욱 빛나게 드러났다.

 

  戊辰(무진:1784년) 겨울에 병환이 있음을 탄식하며 말하기를 “중용과 대학은 내 일생동안 독송하였는데 이제 구절을 외우는데 자꾸만 헷갈리니 정신은 거의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구나!”하셨다. 이듬해 정월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며 井山南麓(정산남록)의 庚坐原(경좌원)에 안장하였으며 장례에 모인 이가 300여인 이었다. 선생께서는 단정하고 온화하며 담백하고 깨끗하였다. 평소 생활에서 진실함은 사람에 따라 다름이 없었다. 마음을 변함없이 지키심은 더욱 꿋꿋하셨고 利(이)와 義(의)에 이르러 판단하고 분석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니 가히 그 지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접하고 사물을 대응함에는 한결 같이 성실하였으며 간소함을 즐기시어 의식이 나쁘거나 거처가 누추하여도 태연하고 편안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물의 깊은 이치를 궁구함에는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반드시 平平(평평)한곳에 두어야 하며 한 터럭이라도 잡념이 드러나서는 아니 된다. 사람은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여 혼미하며 함부로 넘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마음은 본시 광명한 것이며 이를 맑게 다스리는 법은 “敬(경)” 뿐이다. 道(도)의 本體(본체)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 있으며 사물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몸에 근본이 있다. 이를 앎이 精微(정미)하지 못하면 스스로 이해하여 이치를 꿰뚫어 깨우치는 오묘함을 이룰 수 없고 이를 행함에 힘쓰지 않으면 그의 처소에서 편안히 살고 그에게 주어진 물질을 충분히 활용하는 영역에 이를 수 없다”고하셨다. 사서에 있어서는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더욱이 주역과 중용, 대학에 힘을 써서 “讀易?義(독이쇄의)”와“學庸就正錄(학용취정록)”을 저술하셨고 또 周敦?(주돈이)의 “太極圖說(태극도설)”에 취하여 이를 推衍(추연)해서 두 圖形(도형)을 만들고 邵雍(소옹)의 坎?寅申(감리인신)의 說(설)에 就(취)해서 끝에 도형을 이루었는데 이들을 합쳐 이름 하기를 “二五交感圖(이오교감도)”라 하였다. 또 “四端七情說(사단칠정설)” 및 “初學入門(초학입문)”과 “內政篇(내정편)” 등의 저서가 있는데 다만 이치가 통하고 말이 順平(순평)하게 하였으며 詩(시) 또한 平易(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뜻은 깊고 멀게 執筆(집필)하였다. [출처] 병곡(屛谷) 권구 - 김성규 객원기자 | 안동넷(daum 2010)

 

  권구 : 병산육곡(屛山曲)/ 2010.02.02/ ...택한 공간을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연에서의 안빈낙도의 삶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權矩(권구) : 1672~1749> 자는 屛谷(병곡), 호는 方叔(방숙)으로, 안동 권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搏(박)이며 문과에.../ http://blog.naver.com/kmin1100/ 모꼬지마을(daum 2010)

 

  권구 : [名詩感想]조서(嘲鼠) - 쥐를 비웃다/권구/ 2010.03.04/ [名詩感想]조서(嘲鼠) - 쥐를 비웃다/권구 이 불쌍한 쥐새끼야...! 조서(嘲鼠) - 쥐를 비웃다 /권구 (權구)1672(현종13)∼1749(영조25) 爾本無家依我屋 너는 집도 없어, 내 집에 사는데 이본무가의아옥 旣依胡乃反穿爲 네가 사는.../ http://cafe.daum.net/cjs2470389/ 소설가의 방(daum 2010)

 

  권구 : 칠언절구/ 2010.02.18/ ...忍字 참아야지 참아야지 권구 (權구) 1672(현종13)∼1749(영조25) 工夫須向一忍求 공부란 모름지기 참을 인 자를 찾아야 해 忍到熟時方自好 참는 것이 익숙하면 참으로 좋은 거야. 看他衆人煩惱處 저 많은 사람들은 번뇌 속을.../ http://cafe.daum.net/stone-kim/ 華周堂 이야기(daum 2010)

 

  권구 : 때문이야...모든 것이 다/ 2010.03.18/ ...' 발언 전문공개 "10년간 좌파 편향 교육, 바로잡아야" - 오마이뉴스 서울신문 민중의 소리 嘲鼠 쥐를 비웃다. 권구 (權구) 1672(현종13)∼1749(영조25) 爾本無家依我屋 너는 집도 없어 내 집에 사는데 旣依胡乃反穿爲 네가 사는 집에.../ http://blog.daum.net/wasda/ 流浪(유랑)(daum 2010)

 

  권구 : 안동의 인물 - 병곡(屛谷) 권구/ 선생의 諱(휘)는 구요 자는 方叔(방숙)이며 안동권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搏(박)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징이며 선교랑이다. 처는 풍산류씨인데 拙齋(졸재) 元之(원지)의 따님으로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증손녀이다. 현종 13년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자물쇠를 거꾸로 잠갔는데 외숙이 꾸짖자 이에 스스로 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八陣圖(팔진도)도 풀었는데 천하의 물건이 어찌 풀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하며 글의 뜻을 모두 밝게  풀이하셨고 커가면서 세속에 얽매임이 없이 옛사람의 법도를 따라하였으며 독서를 통하여 사물에 本末(본말)과 輕重(경중)을 살피셨다. 六經(육경)과 四書(사서)를 탐독하였으며 程朱學(정주학)에 이르기까지 독실한 뜻으로 연구하셨다. 성년이 되어서는 葛菴(갈암)선생의 문하에 遊學(유학) 하였으며 密菴(밀암)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切磋琢磨(절차탁마)하여 견문이 매우 넓었으며 학문의 깊은 뜻을 밝히어 스스로 깊이 이해하였다. 山澤齋(산택재) 權泰時(권태시) 都事(도사) 金命基(김명기) 縣監(현감) 柳後光(류후광) 蒼雪齋(창설재) 權斗經(권두경) 같은 선배들과 나이를 잊고 벗하였으며 유림에서 큰 의론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생의 한 말씀으로서 去就(거취)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아무개는 나이는 젊으나 우리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丁丑(정축:1697년), 戊寅(무인:1698년)에 거듭 內外艱喪(내외간상)을 당하였는데 병을 救療(구료: 병을 고쳐줌)하고 居喪(거상: 상중에 있음)의 범절에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다. 선고(아버지:징)께서 일찍이 병중에 계시면서 甘酒(감주)를 원하였으나 의원이 이롭지 못하다고 말하기에 드리지 아니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생토록 자신은 감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사에 뜻을 끊으시고 杜門不出(두문불출)하여 독실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丙申(병신:1716년)에 병산에 우거하고 자호를 병곡이라 하였다. 藍田鄕約(남전향약)을 增減(증감)하여 주민들을 깨우치니 백성의 풍속이 점차 개선되었다. 戊申(무신:1728년) 봄에 大臣(대신)이 그 착한 行誼(행의)를 들어 조정에 狀啓(장계)를 올렸는데 밀암과 함께 薦目(천목)에 들어갔다. 이해(1728년)에 역적 鄭希亮(정희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賊將(적장) 李能佐(이능좌)가 무리를 이끌고 밤에 들이닥쳐 사태를 헤아릴 수 없이 위급하였는데 이는 평소에 선생의 聲望(성망)을 듣고서 중요한 인물에게 의지하려고 함이었다. 선생께서 꾸짖으시고 목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다만 내 머리를 잘라가거라’ 하셨다. 賊徒(적도)의 기색은 울상이 되어 물러갔으며 이어서 文扇(문선)에 글을 써서 이르시기를 ‘밝은 해 머리위에 다르다니 붉은 마음 한 올이 밝아지도다. 차라리 죽고 사는 변고 있을지라도 기어이 귀신에게 맹세하리라’ 하셨다. 그 후 親鞫(친국)에 나아갔을 때 왕께서 그 神色(신색)의 편안하심과 응대함에서 정직하심을 살피시고 大臣(대신)과 郞官(낭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하셨다. 대답하기를 ‘도학을 배워서 지킴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 옵니다’하였다 왕께서 그렇다고 하시고 석방을 명하시면서 두 군졸을 시켜 거처에 까지 모셔다 드리게 하셨다.

 

  이어서 관찰사에게 諭旨(유지)를 내리셨는데 요약하여 이르자면 ‘안동사람은 順(순)과 逆(역)을 밝게 이해하였으며 역도를 꾸짖어 적을 물리쳤으니 가히 아름답다 할 것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 후 戊申(무신:1788년)에 영남유림에서 왕께 疏(소)를 올렸는데 정조께서 경연에 있는 대신에게 이르기를 “권구의 일은 참으로 장하도다. 칼날을 무릅쓰고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랴”하시었다. 선생의 이름난 절의는 더욱 오래도록 더욱 빛나게 드러났다. 戊辰(무진:1784년) 겨울에 병환이 있음을 탄식하며 말하기를 “중용과 대학은 내 일생동안 독송하였는데 이제 구절을 외우는데 자꾸만 헷갈리니 정신은 거의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구나!”하셨다. 이듬해 정월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며 井山南麓(정산남록)의 庚坐原(경좌원)에 안장하였으며 장례에 모인 이가 300여인 이었다. 선생께서는 단정하고 온화하며 담백하고 깨끗하였다. 평소 생활에서 진실함은 사람에 따라 다름이 없었다. 마음을 변함없이 지키심은 더욱 꿋꿋하셨고 利(이)와 義(의)에 이르러 판단하고 분석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니 가히 그 지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접하고 사물을 대응함에는 한결 같이 성실하였으며 간소함을 즐기시어 의식이 나쁘거나 거처가 누추하여도 태연하고 편안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물의 깊은 이치를 궁구함에는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반드시 平平(평평)한곳에 두어야 하며 한 터럭이라도 잡념이 드러나서는 아니 된다. 사람은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여 혼미하며 함부로 넘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마음은 본시 광명한 것이며 이를 맑게 다스리는 법은 “敬(경)” 뿐이다. 道(도)의 本體(본체)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 있으며 사물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몸에 근본이 있다. 이를 앎이 精微(정미)하지 못하면 스스로 이해하여 이치를 꿰뚫어 깨우치는 오묘함을 이룰 수 없고 이를 행함에 힘쓰지 않으면 그의 처소에서 편안히 살고 그에게 주어진 물질을 충분히 활용하는 영역에 이를 수 없다”고하셨다. 사서에 있어서는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더욱이 주역과 중용, 대학에 힘을 써서 “讀易?義(독이쇄의)”와“學庸就正錄(학용취정록)”을 저술하셨고 또 周敦?(주돈이)의 “太極圖說(태극도설)”에 취하여 이를 推衍(추연)해서 두 圖形(도형)을 만들고 邵雍(소옹)의 坎?寅申(감리인신)의 說(설)에 就(취)해서 끝에 도형을 이루었는데 이들을 합쳐 이름 하기를 “二五交感圖(이오교감도)”라 하였다. 또 “四端七情說(사단칠정설)” 및 “初學入門(초학입문)”과 “內政篇(내정편)” 등의 저서가 있는데 다만 이치가 통하고 말이 順平(순평)하게 하였으며 詩(시) 또한 平易(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뜻은 깊고 멀게 執筆(집필)하였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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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경찰서, 치안 고객만족도 도내 1위...축하합니다.

 

  예천경찰서(醴泉警察署 `2012年 治安 顧客滿足度 道內 1位') [記事] : 예천경찰서(서장 이수용)가 2012년 경찰청에서 실시한 치안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경북청 24개 경찰서 중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번 고객만족도 조사는 경찰청에서 지난해 11월부터 금년 9월까지 경찰서를 방문해 직접 치안서비스를 경험한 민원인(민원실·112신고·교통사고조사·수사형사) 1백20명을 상대로 전화 설문조사하였다. 예천경찰서는 치안 고객만족도 향상을 위하여 민원인이 미흡하다고 지적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민원인 편의 위주 환경개선과 직원 친절화 교육, 지속적인 사후 모니터링, 민원인 설문카드 제작, 조사 후 귀가 알림 문자메시지 전송, 노약자(장애인)에 대한 교통편의 제공 등 민원인 위주의 시책을 적극 발굴해 시행해 온 결과 도내 1위(전국 3급지 71개 경찰서 중 4위)를 차지했다. 예천경찰서는 지난 11월 지역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체감안전도 분야(범죄·교통사고 안전도·법질서 준수도, 전반적 안전도)에서도 도내 2위의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醴泉新聞 2012년 12월 19일 (수) 09: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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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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