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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155:권대웅(2)-권대하-권덕룡-권덕여(1)(祝군청)
작성자장병창 @ 2013.01.08 06:08:33

   예천의 자랑(3155) : 권대웅(교수)(2)-권대하(화가)-권덕룡(부사직)-권덕여(대제학)(1)(附 예천군, 7일 일자리 창출 도평가 우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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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웅 : 서양 건축사/ 冊/ 저자 권대웅 지음 출판사 일광 | 2002.10.10 형태판형 B5 | 페이지 수 226 | 책소개 : 역사적 사실에 관련된 사물사진이나 자료, 그리고 역사에 관련된 그림들이 많이 포함된 서양 건축사./ 목차 1. 서양건축사 핵심이론, 2. 서양건축사 종합이론(daum 2012)

 

  권대웅 : 한말 영남유학계의 동향/ 冊/ 저자 편집부 편 지음 출판사 영남대학교출판부 | 1998.04.30 형태판형 A5 | 페이지 수 670 | 책소개 : 『韓末 嶺南 儒學界의 동향』은 畿湖 學界와 더불어 우리 민족 정신사의 큰 두 흐름을 형성해 왔으면서도 전통적인 보수성 때문에 급진 개혁파들로부터 국권 상실의 책임자로 비판받기도 하였던 영남 유학계가 반제반봉건의 시대적 과제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역사분야와 철학분야의 학제간 공동 연구로 규명하였다. 역사 분야에서는 '한말 제국주의 침략과 영남 유학계의 대응'이라는 주제 하에 영남 유학계가 전개한 반봉건, 반외세 운동의 구체적인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다. 한말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정세 하에서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영남 유학계가 전개한 위정척사운동, 의병활동, 계몽운동 등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종래 보수적인 성격으로만 파악되었던 영남 유림은 민족운동의 주도 세력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개화를 한 일부 유림은 활발한 개혁 운동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 분야에서는 '서양 사상의 수용과 영남 유학계의 동향'이라는 주제 하에 西學의 전래와 수용 과정 속에 영남유학계가 느낀 충격과 위기의식에 대해 영남 유학계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조망하고 있다. 그 반응의 하나는 유학을 개혁하여 변화된 시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흐름이었던 반면 다른 하나는 유교를 더욱 더 철저히 계승하려는 보수적 흐름이었다. 전자에는 유교 개혁 운동, 유교 종교화 운동, 실학의 계승과 양명학을 수용하려 했던 학자들이 속하며, 후자에는 의병 활동을 통하여 유학을 의리학적으로 전개한 흐름과 전통 유학을 계승 고수하려 한 학자들의 노력이 속한다. 지금까지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은 항상 전국적인 민족운동이나 문화사의 맥락 속에서 그 한 부분으로만 연구되어 왔을 뿐 하나의 독자적인 연구 성과는 아직 매우 미미한 편이다.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하는데 이 연구가 응분의 기여를 하리라고 기대한다. 저자소개 [역사분야] 이병주, 오세창, 정진영, 권대웅(1955년생, 영남대 국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현 대경전문대 관광일어통역과 조교수), 김희곤, [철학분야] 김종석, 이완재, 신귀현, 이동희, 최재목, 백도근/ 목차 제1부 제국주의 침략과 영남 유학계의 대응... 한말 영남유학계의 의병활동 - 권대웅...(daum 2012)

 

  권대웅 : 한국학보(제74집)/ 저자 한국학보 편 지음/ 출판사 일지사 | 1994.03.10 형태판형 A5 | 페이지 수 220 | 책소개 계간 학회지 제74집. 문학.역사 관련 논문 6편과 서 평 1편을 실었다./ 목차 001. 해방직후 북한의 문학비평/신두원, 002. 조선자연주의 소설 시론/박상준,  003. 인제하 항일독립운동전체 [민전조합]/권대웅, 004. 홍대용의 상대주의적 사유와 변혁의 논리/송영배, 005. 고려시대 공.사전의 수조율/이인철, 006. 김재용외/채호식(daum 2012)

 

  권대웅 : 종이책 한국근현대사연구 제9집(한국근현대사연구)/ 저자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지음 출판사한울 | 1998.12.12 형태판형 A5 | 페이지 수 358 | 목차 001. 헐버트의 한국관...이광린/ 002. 1894년 농민전쟁과 보부상 활동의 추이...조재곤/ 003.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권대웅/ 004. 대한제국기 고종의 황제권 강화책과 경위원...서진교/ 005. 안중근의사 전기의 종합적 검토...윤병석/ 006. 서간도 광복군사령부의 성립과 활동...김병기/ 007. 전조선청년당대회 연구...이현주/ 008.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의 동향...김도형/ 009. 일제하 명동성당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윤선자/ 010. 일제 말 조선에서의 <군수회사법> 실시에 관한 연구...김인호/ 011. 해방 직후 미군정의 유일정부적 권위의 확립과정...김광욱(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 朴尙鎭의 생애와 독립운동 (29p)/ 박상진은 38년의 삶을 살았다. 그는 1884년 격동기에 태어나 외세의 침략과 국권의 상실이라는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각자이며, 혁명가였다. 그는 스승 허위의 의병투쟁을 보고.../ 권대웅(Gwon Dae-Ung)  | 한국동학학회  | 2010.04 | 태그:  박상진(Park Sang Gin) ...(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한말 , 일제초기 청도지역의 민족운동과 주도세력의 성격 (26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2000(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 [연구논문] 1896년 靑松義陳의 조직과 활동 (32p)/  1. 서론: 『적원일기』검토 2. 청송의진의 결성 경위 3. 청송의진의 조직과 구성원 4. 청송의진의 군비확충 5. 청송의진의 활동 6. 청송의진의 성격 7. 결론/ 권대웅  | 한국근현대사학회  | 1998.12(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 : 제국주의 침략과 영남 유학계의 대응 ; 한말 영남유학계의 의병활동 (74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9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논문 : 일제하 항일독립운동단체 「 민단조합 」 (25p)/  권대웅(Dae Woong Kwon)  | 일지사(한국학보)  | 1994(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을미의병기(乙末義兵期) 경북 북부지역의 예천회맹(醴泉會盟) (24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93(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동구 (251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수성구 (115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북구 (101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중구 (80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달서구 (36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표지 및 간행사 목차 (27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논문 : 조선국권회복단 (朝鮮國權恢復團) 연구 (22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색인 (22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서구 (21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대구지역문화유적 : 남구 (20p)/  권대웅, 권병탁, 조강희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8(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일제말기 조선저축운동의 실체 (34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6(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학술지논문] 논문 : 1920 년대 금융자본의 농업지배에 관한 연구 - 조선식산은행을 중심으로 - (29p)/  권대웅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1983(daum 2012)

 

  권대웅 [專門資料] : 『韓末義兵日記 -乙未義兵日記·赤猿日記-』/ 제1부 乙未義兵日記 제2부 赤猿日記/ 김희권·권대웅 편  | 국가보훈처(dau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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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하(權大河) : 1960- , 예천 출신, 대창고 졸업, 서양화가이다.(朝鮮日報 DB 2003,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권대하 : 권대하展 / KWONDAEHA / 權大河 / painting/ 2009.07.09/ Since 1999 까만 밤풍경 권대하展 / KWONDAEHA / 權大河 / painting 2009_0708 ▶ 2009_0724 권대하_A Night in Seoul1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3×486cm_2009 초대일시_2009.../ 권대하는 오랜 시간 밤풍경을 그려왔다. 밝은 빛의 동네, 명동에 위치한 권대하의 작업실 벽면에는 까만 밤풍경이 가득하다. 그에게 밤은 매혹적인 공간이자 낮과는 다른 특별한 시간대였던 것 같다. 초기에 구체적인 도시의 야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다가 이후 점차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근작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야경이 반짝이는 불빛, 어른거리는 빛 그림자만을 표식하는 색채, 붓질, 점들로 기호화되어 간다. 그는 캔버스 표면을 단호하게 검정색으로 칠해버렸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단색주의회화에 다름 아니다. 붓자국도 없고 물감의 흔적도 배제된 체 오로지 절대적인 검음만이 단호하게 둘러쳐져있다는 인상이다. 강조된 평면과 물감/색을 즉자적으로 현존시키는 이 그림은 오로지 표면에서만 멈춰서 있다. 그런데 그 표면에 색 점들이 여기저기 분산적으로 찍혀있다. 그 점들은 그저 물감/색을 머금은 붓끝에서 밀려나와 얹혀진 작은 점들이다. 노랑, 주황, 파랑 색 정도로 제한된 색/점들이 까만 바탕위에 올려지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나름의 배열구성을 지니는 순간 그것은 이내 밤풍경이 되어버렸다. 절대적인 짙음, 어둠이 없었다면 그 위에 찍힌 색, 점들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도시의 야경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본 도시의 밤풍경에 대한 기억이 이 그림의 표면을 통해 다시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도시의 밤풍경을 재현한다기 보다는 도시의 야경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과 잔상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패턴을 형상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대하는 서울의 밤풍경을 대부분 멀리서 조망한 시선으로 건져 올렸다. 매우 먼 거리에서 내려다보거나 눈높이로 혹은 난간에 의해 분절된 체 바라보는 시선의 이동이 감지되면서 관자들은 자신 역시 어느 장소, 거리에서 보았던 그 도시의 야경을 떠올릴 것이다. 멀리서 본 도시의 밤은 오로지 작은 불빛/점으로만 존재한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그림은 이미 보았던 것을 낯설게 보여주는 동시에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대상이 실은 모호하고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가 먼 거리 속에서 바라본 밤의 도시는 그저 반짝이는 불빛으로만 존재한다. 불빛, 색 점들은 흐름을 이루고 흘러간다. 그는 그 불빛을 찍어가면서 오늘날 도시의 풍경을 그려 보인다. 저 안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어디론가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저 불빛들 역시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다. 삶과 죽음도 낮과 밤처럼 그렇게 덧없이 교차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명멸하다 사라지는 도시의 불빛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덧없는 삶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성찰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11회 개인전 전시평론 중 발췌인용. 미술세계 및 월간전시 7월호에 게재됨.) ■ 박영택. http://cafe.daum.net/chosaboo/ 醉畵堂취화당(daum 2010)

 

  권대하 : Re:사위 개인전에서 - 작가 권대하/ 2009.07.11/ " 까만 밤풍경 권대하展 / KWONDAEHA / 權大河 / painting 2009_0708 ▶ 2009_0724 권대하_A Night in Seoul1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3×486cm_2009 초대일시_2009_0708_수요일_06:00pm오프닝 축하 공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김태은.../ http://cafe.daum.net/silverhischool/ 청춘대학교(남녀공학)(daum 2010)

 

  권대하 : 명동갤러리/ ■ 대표 서양화가 권대하/ 權大河/ 홍익대 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가/명동갤러리 관장, 한국미술협회, 한국인물 작가회, 신작전, 청구작 회원, 미술동호회 그림을 배우자 운영자/ <개인전> 1996 초대전(서울, 백갤러리), 1997 개인전(서울, 서경갤러리), 1999 개인전(서울, 갤러리 사비나), 2000 초대전(서울, 경인미술관), 2001 개인전(서울, 현대아트 갤러리), 2003 개인전(서울, 예술의 전당 Art Seoul전), 2005 개인전-빛의 향연(서울, 인사아트센타), 2008년 개인전-비오는 도시(서울, 명동갤러리), 2009년 개인전-순정의 추억(서울, 명동갤러리)/ <단체전> : 2005년 코리아 아트 페스티벌(세종문화회관, 서울)외 단체, 기획초대전 다수/ ■ 개요 : 명동갤러리는 2008년 11월에 개관한 명동의 세종호텔 뒤에 위치한 명동과 인사동의 미술문화를 잇는 명동의 특별한 전시공간입니다. 명동은 한국문화의 다양성이 어울려 오늘의 한국과 내일의 우리를! 느낄 수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명소입니?! ¤. 명동갤러리는 명동에 응집되어있는 한국문화를 계승하고 이곳을 지나간 수 많은 외국인들이 남긴 문화들을 안고 다시 잉태된 현대의 한국미술문화로 꾸밀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모티브를 계승하고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과 한국전통의 국악을 비롯한 전통 퍼포먼스를 적극적으로 전시하고 소개할 것입니다. 한국의 미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는 문화강국으로서 더욱더 주목받을 것입니다. 이에 명동갤러리는 그 중심에서 한류를 전하고 한국의 참신한 작가들을 고무시키고 한국의 전통과 정체성에 고민할 것입니다. 이에 명동갤러리의 앞날에 열화와 같은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관람시간 : 평일 /오전 11:00 - i! 후 7:00     주말/ 오전 10:00 - 오후 7: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관람료 : 무료/ ■ 교통안내 : 4호선 명동역 9번출구 도보로 3분(daum 2010)

 

  권대하 : 대창80년사:부록(12) 대입자(3)/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13일 (일)/ ...(체육), 김필수(음악), 최상우(경영), 장형기(무역), 김경동(미술), 최봉열(국문), 정재근(미술), 권대하(미술), 양승식(미술), 박광수(미술), 박태석(미술), 현범구(미술), 최종철(행정), 전재한(무역.../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대하 : 대창80년사:중고병설시대(20) 개교70주년행사(2)-고22회동기회.../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18일 (화)/ ...(안동대 미술과), 김종달(안동대 미술과), 임환재(계명대 회화과), ㅇ 1981 : 강웅대(계명대 회화과), 권대하(안동대 미술과), 김동백(안동대 미술과), 김태진(세종대 산업미술과), 이중우(계명대 회화과).../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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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덕룡(權德龍) : 1698(숙종 24)-?, 예천 출신, 자는 정중(正中), 호는 주일재(主一齋), 본관은 안동, 이조좌랑 건(建)의 후손, 유학(幼學) 경제(經濟)의 아들, 병암 권기(屛岩權기)와 병곡(屛谷) 권구의 제자이다.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738년(영조 14) 식년 생원시에 2등 3위로 합격하였다.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醴泉郡邑誌 1770 1841 1898, 嶠南誌 1937, 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권덕룡(權德龍)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14년 (17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3위/ [인적사항] 자 정중(正中), 생년 무인(戊寅) 1698년, 합격연령 41세, 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예천(醴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과목 일의(一疑)/ [가족사항] [부] 성명 : 권경제(權經濟),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권덕룡(權德龍) : 본관(本貫) 안동(安東), 이력(履歷) 부사직(副司直)/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부사직 권덕룡의 묘표(副司直權德龍의 墓表) : 산양면 송죽리(daum 2010)

 

  권덕룡 : 兵曹 及各營門以 華城 城役時牌將以下分等施常啓/ 尹?邦|金百鍊|禹德逸|鄭東植|金在豊|黃允九|金光福|李世大|宋仁宅|朴思淳|李光祐|徐奉千|洪時太|李?春|李根成|李道文|李時輔|車繼運|林致雨|權德龍|車龍巾|李貴福|金成福|崔得春/ 2007.02.13(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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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1569 기사 / 명 융경(隆慶) 3년) 3월 1일(을사) 1번째 기사/ 판중추부사 이황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다/ 판중추부사 이황 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이황 자신이 노병(老病)을 들어 시골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간곡히 청하면서 계속 장소(章疏)를 올리니 상이 인견하고 두세 번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이황 은 더욱 강력히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경은 지금 돌아갈 것인데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ꡓ하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ꡒ고인(古人)은 ꡐ치세(治世)가 걱정이 되고 명주(明主)가 위태롭다.ꡑ 하였습니다. 이는 명주는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치세에는 걱정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독단적인 슬기로 대중을 제어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교만하고 사치스런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대가 비록 치평(治平)의 시대인 듯하나 남쪽과 북쪽에 흔단이 있고 민생은 지쳐 있어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자질이 고명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지(才智)가 성상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슬기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조짐이 없지 않으므로, 식자들은 그 점에 대해 미리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이 전일에 《주역》의 건괘(乾卦)에 ꡐ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ꡑ는 것과, 또 ꡐ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亢龍有悔]ꡑ는 말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임금이 지나치게 스스로 뛰어난 체하여 신하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진 이들이 아래에 있게 되어 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의 공정을 폐지하지 않아야 사의(私意)를 이겨 낼 수 있어 그러한 병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신이 전일 올렸던 《성학십도(聖學十圖)》 는 그것이 신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모두가 선현(先賢)들이 했던 것인데, 그에 대한 공부는 신이 올린 차자(箚子)에서 사(思)자와 학(學)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하신다면 얻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신이 충심을 바쳐 회언(誨言)을 올리는 뜻입니다.ꡓ하였다. 상이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답하기를, ꡒ우리나라에 사림(士林)의 화가 중엽부터 일어났는데, 폐조(廢朝)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현인(賢人) 군자(君子)가 모조리 큰 죄를 당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邪)와 정(正)이 뒤섞이게 되었고 간사한 무리들이 득세하였는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묘의 여습(餘習)이라고 하였으므로 사림의 화가 연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당시 명종(明宗) 은 어렸으므로 권간(權奸)들이 득세하여 한 사람이 패하고 나면 또 한 사람이 나와 뒤를 이어 용사했기 때문에, 사화가 차마 말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지난 일들을 앞으로의 경계로 삼으소서. 예로부터 임금의 초정(初政)은 청명(淸明)하게 하여야 정직한 인물이 등용되므로 임금이 과실이 있으면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이에 대하여 싫증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 간사한 무리가 그 기회를 노려 온갖 아양을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임금은 마음속으로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고 여겨 그때부터 소인배와 합하게 되어, 정직한 사람은 손 댈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태가 이에 이르면 소인배가 득세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정(新政)의 초기라서 모든 간쟁(諫諍)에 대해 뜻을 굽혀 따르고 있으므로 대과(大過)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성상의 마음이 혹시라도 달라진다면 꼭 오늘 같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 된다면 그때는 간인들이 필시 승세를 타게 되어 초정(初政)과는 크게 상반될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의 개원(開元) 시기에는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태평을 이루었으나 현종 이 욕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이 오직 봉영(逢迎)을 일삼았으므로, 군자는 모두 떠났고 소인배만 남게 되어 끝내 천보(天寶)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똑같은 그 임금이면서 마치 두 사람의 일인 양 달랐던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마음이 맞았다가 끝에 가서는 소인과 친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 점을 큰 경계로 삼아 선류(善類)를 보호하여 소인배들로 하여금 모함을 못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며 신이 계고(戒告)하고 싶은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아뢴 바를 내 마땅히 경계로 삼으리라.ꡓ하였다. 또 묻기를, ꡒ경은 조신(朝臣)들 중에 추천할 만한 자가 없겠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오늘날 대신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청신(淸愼)하고 육경(六卿)도 사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상(首相)에 있어서는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당해서도 음성이나 안색을 동요하지 않고 나라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자리에 올려놓았으니, 참으로 주석(柱石)같은 신하로서 의중(倚重)할 만한 사람으로는 그 사람보다 훌륭한 이가 없을 듯싶습니다.ꡓ하였다. 상이 또 학문의 선비로 누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ꡒ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정자(程子) 에게 ꡐ문인(門人) 중에 누가 체득함이 있습니까?ꡑ라고 묻자, 정자 는 ꡐ체득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쉽게 말할 수 없다.ꡑ 하였는데, 그 당시 유작(游酢)․양시(楊時)․사양좌(謝良佐)․장역(張繹)․이유(李?)․윤돈(尹焞) 등 상당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정자 가 감히 가벼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천일(天日)을 속여 가며 아무가 체득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같은 사람은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또 이학(理學)에 있어서는 소견이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여 통유(通儒)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렴(收斂)의 공부가 좀 부족합니다.ꡓ하였다. 아룀이 끝나자 물러갔다.【 이황이 귀향할 때 명사(名士)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모두 나와 전송을 하면서 시를 읊어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황이 기대승(奇大升)․박순(朴淳) 두 사람의 시에 화답하고 여러 사람과 작별을 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ꡐ가련하다 여러 성조에 은총을 받은 몸이 부질없이 일곱 차례나 조정을 오갔네[可憐異代承恩渥空作區區七往還]ꡑ라는 구절이 있었다.】 상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영명(英明)하고 영오(穎悟)하여 온 나라가 성덕이 성취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시속의 말들이 날마다 탑전에서 떠들어대므로 상의 뜻이 유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황이 입조하여 언제나 성현의 학문으로 상을 권면했기 때문에 상이 사랑하고 공경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반성하는 실행이 없었다. 이리하여 이황은 원래가 겸퇴(謙退)할 마음을 갖고 있는데다 또 도(道)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집의(執義) 권덕여(權德與)가 상소를 올려, 정원이 만류할 것은 청하지 않고 지레 인견(引見)할 것을 청했고 또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기도 전에 지레 역말을 주어 보낼 것을 청한 것을 논하면서, ꡐ그를 만류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도리어 말을 내주자는 청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ꡑ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41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사상-유학(儒學)(www.history.go.kr 2009)

 

  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6월 1일(신해) 7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 등이 상차하여 이이가 한 일에 대해 논계하다/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權德與), 전한 허봉(許?)․홍진(洪進)․홍적(洪迪)이 상차하기를, ꡒ병조 판서 이이는 학자 출신으로서 순서를 뛰어넘어 숭반(崇班)에 올랐는데,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특별하게 은총을 베푼 대우에 대하여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집요하게 자신의 의견만 내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모의와 계획이 인정에 거슬려서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공론이 어찌 발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요즈음의 일로 말하건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품명(稟命)해야 함은 곧 신하의 직분인데도, 전폐(殿陛)를 지척에 두고서도 말을 바치라는 명령을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아뢰었으니, 이는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행위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하며 심한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임금의 명에 교만한 태도를 지니고서 내조(內曹)에까지 왔으면서도 정원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으니 대간이 죄를 청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이로서는 마땅히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거취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필설을 놀려 공론과 대항해 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론(時論)에 거슬렸다느니 좌우에 자문해 보시라느니 하며, 슬프고 괴로운 언사를 가지고 성상을 감동시켜 반드시 대간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였으니, 그가 공론을 무시한 것이 어떻다하겠습니까. 공론이 있게 되면 만승천자라도 오히려 자신을 굽히고 따르는 법인데, 일찍이 재상의 반열에 있었던 자로서 공론을 무시하고 거리낌이 없는 행위를 이렇게까지 한 자가 있었습니까. 이런 풍조가 계속 조장될 경우 그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분주하게 명을 받게 하며 조금도 어김없이 그의 말대로만 하게 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워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273) 라고 한 것과 가깝게 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대체로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의 역할을 하면서 한때의 공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공론이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스럽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역사를 탐구하여 전대의 잘잘못을 관찰해 보실 때 어찌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대간을 모욕하고 나라가 안전하게 된 경우가 있었습니까. 요즈음 말하는 이들은 혹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 비교하는데, 왕안석의 문장과 절행이야 어찌 이이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왕안석이 교만하게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이 이이에게 있고 말하는 자를 배척한 것도 이이에게 있습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 그런 점을 통촉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대간을 억제하십니까. 신들은 뒷날의 화근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처음에야 어찌 이이 의 방자스러움이 이렇게까지 심할 줄 알았겠습니까. 오직 그 한 생각에 편벽된 나머지 점점 해(害)가 심해졌는데 심지어는 대간의 입을 막고 온 나라를 자기에게 편하게 몰고 가는 등 못할 바가 없었으니, 이이의 죄가 여기에서 중대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옛말에 ꡐ한 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 맡기면 난을 일으킨다.ꡑ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을 쓰시고, 한 사람에게 맡기고 치우치게 듣는 것을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이이만을 신하로 여기고 대간은 의식할 것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어 한편으로는 사림(士林)을 보호하시고 한편으로는 처음과 끝이 모두 잘 되도록 하소서.ꡓ하니, 그대들이 진달한 뜻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8장 A면/ 【영인본】 25책 51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註 273]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려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 : 범수는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 진 소왕(秦昭王)을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했는데, 이 말은 망국적인 행위를 지적하면서 소왕에게 간한 말이다. 《사기(史記)》 권79.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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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7일 일자리 창출 도평가 우수상...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醴泉郡, 慶尙北道 일자리 創出 評價에서 優秀賞 受賞 : 地域 特色 살린 社會的企業 育成, 自治團體長의 農特産物 品質 保證으로 일자리 創出 增大) [記事] : 예천군이 2012년 4분기 경상북도 일자리창출 부문에서 군부 1위에 올라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군은 2013년 1월 7일 오후 3시 경상북도청 정무부지사실에서 개최된 일자리 창출 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2012년 일자리 창출 목표 1,454개 대비 실적 1,786개로 122.8% 성과를 창출해 받은 것으로, 지역특화 사회적기업 육성 모델인 ‘희망씨앗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하여 2012년 고용노동부 지역브랜드일자리 사업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SK 행복나눔재단 주최 사회적기업 컨테스트에서 3등을 수상해 일찌감치 타 자치단체보다 두각을 나타냈었다. 특히, 사회적기업에 공공재산을 임대 지원하였고 예천군수가 지역 온라인 판매시장에서 직접 농ㆍ특산물 품질을 보증해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어 온라인 판매시장을 활성화하여 일자리 창출을 증가시킨 것이 주효했다. 또한, 지역 문화 관광지인 회룡포관광지와 연계 지역 명칭을 스토리텔링한 ‘토끼간 빵’의 사회적기업 육성 계획이 우수 일자리 시책 사업으로 손꼽혔다. 예천군은 “민선 5기 공약 사업으로 일자리 창출을 전면에 내세우고 예천군의 미래 비전인 곤충산업 활성화, 지역특화 대표 브랜드 육성, 농ㆍ식품 강소기업 육성 등 농업ㆍ축산업·임업 활성화, 재래시장 활성화, 친환경녹색산업 유치 등 지역 일자리 창출과 서민경제·지역경제 살리기를 군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전 직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한 성과가 오늘의 수상으로 이어진 것”이라 밝히며, “앞으로도 사회적기업인 (주)한국에코팜(채종 관련)과 같은 지역 특성을 살린 작지만 강한 미래 발전의 강소기업 육성 등 예천군만이 지닌 특색있는 일자리 창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醴泉뉴스 2013년 0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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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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