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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212:권상로(2)(祝2012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작성자장병창 @ 2013.03.06 06:16:28

  예천의 자랑(3212) : 권상로(총장)(2)(附 2012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5일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 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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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로 [記事] : (한국 승려․불교학자)  [權相老]/ 출처: 브리태니커/ 한국 승려․불교학자, 1879년 태어남, 1965년 죽음, 한국의 승려(daum 2008)

 

  권상로 : 1879(고종 16)~1965. 승려․불교학자. 교육계․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의 발굴․선양에 힘썼다. 호는 퇴경(退耕). 아버지는 찬영(贊泳)이다. 1896년(건양 1)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은사로 삼아 출가했다. 그뒤 10년 동안 김룡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학을 연구하여 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를 이수했다. 1906년(광무 10)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 강사를 지내다가, 1909년(융희 3) 원종(圓宗)의 종무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불교월보〉를 6년 동안 발행하고,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불교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불교〉를 발간했다. 1931~44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1953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불교약사〉․〈조선불교사〉․〈삼국유사역강〉 등이 있으며, 불교관계 사료를 모아 〈고려사불교초론〉․〈한국불교사료〉․〈한국사찰전서〉․〈한국지명연혁고〉 등을 편찬했다. 죽은 뒤 조계종으로부터 대종사의 법계를 받았다.(daum 2008)

 

  권상로 [記事] : [[불교학연구회]] 권상로 불교학의 근대적 성격 / 이재헌 / 2006.10.30 21:39/ http://cafe.daum.net/mobuddhism/EQP9/138 / Ⅰ. 문제의 제기 : 최근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과 관련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 종단의 유래, 교육과 사찰 재정 등 각종 제도의 개혁, 항일민족운동과의 관련, 한국선의 본질, 신불교 운동에 대한 평가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과 논의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한국불교학과 관련한 논의는 정체성 회복과 관련한 일련의 담론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대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가장 최근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한국불교학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한 최근의 논의들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불교학의 대중화와 관련된 논의인데, 이는 불교와 불교학자, 불교학과 불자들의 괴리를 없애려는 것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나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로부터 불교학이 소외되는 것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ꡐ전승 佛學ꡑ과 ꡐ근현대 불교학ꡑ (Buddhist Studies, Buddhology)을 구분하여, 전자는 經學과 禪學 위에 수행, 또는 신행적 의미가 가미된 것을 말하고, 후자는 일체의 신행을 배제하고 근현대 서구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연구를 일컫는다고 보기도 한다.1) 둘째 근대 한국불교학의 시점과 관련된 논의로서, 명진학교의 설립을 분기점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2)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내에 인도철학과가 설립되어 문헌학을 토대로 한 원전적 연구를 시작한 1964년경으로 보는 입장3) 등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셋째는 불교학 방법론과 관련된 논의이다. 근대불교학이란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주로 언어학적, 문헌학적, 철학적, 종교학적 접근)을 적용한 새로운 연구 경향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개 공감하고 있지만, 이것이 서구의 제국주의적 문헌학의 이식으로 보아 전통의 단절과 주체성 상실이라는 심각한 폐해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식민성은 연구자의 개별적인 자세나 학문적인 배경과 관련된 문제이지, 현재의 불교학 연구가 모두 문헌학만을 그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최근 늦게나마 이러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불교학 내지는 불교 자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하며, 이러한 논의들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근대 한국 불교학의 제1세대 학자라고 평가되는 退耕堂 權相老(1879˜1965)의 불교학을 통해서 근대 한국불교학이 태동되어 가는 과정을 논구해 보려고 한다. 사실 전통 학문과 구별되는 근대 과학(science)의 특징은 바로 방법론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연구로부터 나온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어떤 방법론을 적용해 보려는 노력, 즉 한마디로 ꡐ과학적ꡑ인 연구의 시도는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상로는 분명 전통 학문에 바탕을 둔 불교 敎學僧이면서도 불교 연구에 근대적 방법론을 도입한 선구자이며, 진정한 근대 한국불교학의 시작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상로의 학문적 이력은 전통 한학과 講院 교육에서 시작하여 근대적 불교 교육까지 섭렵하였는데, 불교학적으로 볼 때 傳統 불교학이 近代 불교학으로 넘어오는 바로 그 接點에 그가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연구에 있어서 그의 근대적 방법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서는 그의 근대적 방법론을 일별하면서 그것을 통해 그가 이룩하려고 했던 불교학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Ⅱ. 근대적인 종교 연구 방법론 : 근대 불교학과 전통 교학의 결정적인 차이는 護敎的인 교리 연구나 訓?學的인 연구를 탈피하여 客觀的이고 科學的인 불교 연구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전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종교 현상을 객관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도 19세기 이후로 나타난 근대적인 현상이다. 즉 護敎論的인 성격을 띠던 전통적인 종교 연구와는 달리 자신의 종교적 실천과 믿음에서 우선 한 발자국 물러나 어떠한 신앙적 전제도 없이 종교 현상을 객관적 학문으로서 연구하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 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종교다원주의의 일반화와 관계가 깊다. 즉 다른 종교 집단들이 경쟁적 상황에 공존하고 있음이 인정될 때 객관적인 종교 연구의 동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과학적인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타종교에 대한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어떤 일정한 방법론의 적용이 필수적이다. 종교학의 초창기를 특징 지울 수 있는 중요한 방법론은 比較의 방법과 진화론(進化論)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상로는 이러한 방법론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방법론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여 한국의 종교들을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조망해 보려고 했다. 그의 근대 학문에 대한 체계적 습득은 바로 최초의 근대적인 불교학교인 明進學校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었는데,4) 그는 여기서 당시의 세계적인 종교 연구 방법론을 접할 수 있었고, 이점이 그를 전근대적인 학문 태도에서 탈피하여 근대적인 학문 연구자로서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만 4세 때 이미 한문으로 시를 지었고, 6세부터 서당에 들어가 10여년 간 과거를 위한 經史와 詩賦에 전념하였으니, 기본적으로 전통 漢學 및 儒學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러다가 출가 이후 10여 년 간은 불교 전문 講院에서 大敎科까지 이수함은 물론, 불교 경전을 비롯해 <周易>, <道德經>, <南華經> 등 外典까지 섭렵하게 된다. 한문으로 다다를 수 있는 전통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셈이다. 그는 27세 때 명진학교에 입학함을 계기로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양계초의 <飮氷室文集>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져 지식인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社會進化論과 종교학 및 세계종교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의 종교를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古宗敎, 佛敎, 仙敎, 儒敎, 基督敎, 新興宗敎ꡑ이다.5) 여기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불교이지만, 상대적으로 古宗敎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外來 宗敎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권상로는 불교의 승려로서 종교 경쟁의 새로운 시대에 불교의 존립과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당시 한국 사회에 있던 모든 종교의 비교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불교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타종교의 비판에 대해 불교를 변증하려고 했으나, 타종교들을 비교 고찰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類型論을 전개하였고, 나아가서는 일반 이론의 정립까지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선 그는 제종교의 장?단점을 看取한 바탕 위에 불교가 가장 우수한 종교라는 점을 내세우려 한다. 그는 종교의 유형을 나누어 말하기를, “원래에 불교는 유교나 예수교처럼 다만 인격적인 天神이나 혹은 성현만을 숭배하는 것과도 같지 않고, 또는 道敎처럼 다만 영구적인 자연 법칙으로 의지를 삼는 것과도 같지 않아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곧 사람과 법, 두 가지를 하나로 통일하여서 신앙을 내는 이상을 삼는 것이다.6) ”라고 하면서, 불교는 人格神을 믿는 종교와 非人格的 법칙을 의지하는 종교를 포괄하여 人格神과 法 두 가지를 모두 신앙하는 종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불교가 自力 및 他力 신앙을 兼行함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며, 또한 타종교의 신비스러운 면과 윤리적 가르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종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각 종교의 救援觀을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 神術로 중생을 가르치면 중생이 그 希夷함은 느낄지언정 人人이 皆神은 되지 못할지며, 天道로 중생을 가르치면 중생이 그 渺茫함은 느낄지언정 人人이 皆天은 되지 못할지며, 仙學으로 중생을 가르치면 중생이 그 恬靜함은 느낄지언정 人人이 皆仙은 되지 못할지며, 孔子의 書로 중생을 가르치면 중생이 그 規矩는 느낄지언정 人人이 皆孔子는 되지 못할지며, 耶蘇의 敎로 중생을 가르치면 중생이 그 博愛함은 느낄지언정 人人이 皆耶蘇는 되지 못할지니, 然則 吾?衆生은 何의 歸依하던지 但古聖의 糟粕만 ?하며 咳唾만 拾할 따름이요 一聖人으로 同化함은 得치 못할까 寧有是哉리오.7) ”라 하여 대개의 종교들이 절대자를 높이고 인간을 낮추어 인간 스스로 절대적 지위에는 가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불교는 인간 자체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종교이니, “唯佛은 天中天이며 聖中聖이라. 諸天의 범위를 초탈하며 諸聖의 規矩에 탁월하야 衆生의 自心中에 本具한 佛性을 開示하시니, 佛은 즉 그 性을 先覺한 者이오 중생은 즉 그 性을 方覺할 者이라. 覺의 後先은 有할지언정 覺할 當體는 別立한 地位로써 凡夫의 難行할 處가 아니오. 즉 個人自己의 고유한 불성을 反語함이니 此性이 旣聖凡에 在하야 增減異同이 無한지라. 그 究竟도 平等無二하야 一切衆生이 皆可成佛이니 卽所謂 感化力은 唯佛敎爲大로다.8) ”라 하여 부처와 중생이 깨달음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平等無二하여 모든 중생이 成佛할 수 있는 것이니, 그 감화력에 있어서 불교가 가장 위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서양 및 중국의 종교 문화와, 불교 문화를 비교하여 각각 奴主ㆍ父子ㆍ師弟的 문화 체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서양 종교의 인생관을 노주적(奴主的) 문화의 체계라고 본다. 즉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被造物)이니 신의 지배와 관리를 받아야 하고, 그렇게 신의 소유가 된 이상 신의 노예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을 主라 부르고 스스로는 신의 종이라고 생각하므로 노주적(奴主的) 문화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념은 문명이 미개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합리하다고 했을는지 모르지만 노예가 해방되고 군주 정치가 변하여 민주가 된 현대에 와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식 문화체계는 父子式 문화 체계라고 본다. 즉 중국에서 사람은 天地에서 혹은 陰陽이 화합해서 났다고 보기 때문에 父子式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은 아버지의 家長 制度이고, 정치에 있어서는 人君을 民父母라고 하고, 백성과 신하는 子民, 臣子라고 하며, 심지어는 지방관을 백성의 父母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천지가 만물을 내는데 오직 사람만이 正氣를 타고났기 때문에 만물의 靈長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天地로 더불어 병립하여 三才가 된다고 보는 등, 실로 서양의 奴主的 문화는 훨씬 달라서 합리적인 면이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 제도가 변하여 민주 정치가 되는 바람에 가정적 윤리가 따라서 없어지고, 인간이 천지ㆍ음양에서 난다는 동양의 고상한 우주관, 인생관이 파괴되는 것을 그는 애석히 여긴다고 말한다. 이상의 두 문화체계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내가 세계를 만들었다고 본다. 즉 이른바 ꡐ제가 짓고 제가 받고(自作自受)ꡑ, 또는 ꡐ같이 짓고 같이 받는다.(共作共受)ꡑ는 것이니 서양 종교와는 꼭 서로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만일 인간을 신이 만들었다면 사람은 아무런 역량도 없으니 일체를 모두 신이 해결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자기의 업력(業力)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 능히 자기도 개조할 수 있으며 세계도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적인 문화를 그는 사제적(師弟的)인 문화라고 하였다. 즉 먼저 깨달은 이는 스승이오, 뒤에 깨달은 이는 제자이기 때문이다. 노주(奴主)관계에서는 義가 중하고, 父子관계에서는 情이 중하지만, 師弟관계에서는 情과 義가 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공동적으로 同事하는 완전히 평등한 지위에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자유 정신에 꼭 적합한 것이라는 것이다.9)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그는 타종교와 불교를 비교해 보면서, 타종교의 불교 비판에는 護敎論을 펼치고, 더 나아가서는 불교의 우월성을 여러모로 論及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작업은 전통 불교학자들이 타종교의 불교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내세웠던 전통적인 회통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승려의 입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종교 연구 그 자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미 불교를 전제한 상태에서 타종교와의 관계를 모색해 나간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한계는 필연적인 것이다. 다만 그가 모든 종교들을 비교 고찰함에 있어서 비교의 관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즉 신앙의 대상, 구원관, 경전, 天 신앙, 敎徒數, 윤리관의 여부 등 다양한 기준을 동원해 종교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종교들을 비교 고찰하면서 나름대로의 유형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는 일이다. 즉 동ㆍ서 문화를 奴主的ㆍ父子式ㆍ師弟的으로 구분해 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결국 그는 당시 한국에 불교 이외에도 수많은 형태와 종류를 가진 타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그들 종교를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비교ㆍ고찰해 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후술하게 될 그의 宗敎多元主義적인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불교의 활로를 모색하는 불교 개혁론이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권상로의 높은 종교학적 안목을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의 高宗敎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종교 기원론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당시 유행했던 ꡐ進化論에 입각한 종교 연구ꡑ 방법론을 한국 종교 연구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즉 진화론적인 방법론에 의거 한국의 고종교를 탐구함으로써, 고대 한국인의 종교 심성과 인류의 종교 기원을 알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초창기 종교인류학자들의 종교 기원 연구와 매우 흡사한 착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종교학의 흐름에 대해 정통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古宗敎를 통해서 동아시아 제민족의 종교 기원을 발견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그의 애국계몽적인 민족 주체적인 사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엄밀성을 결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인 배경 하에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宗敎史 硏究 方法論에 대하여 헤겔의 연구법과 반헤겔파의 연구법을 병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헤겔적 연구란 종교가 ꡐ低級으로부터 高級에로ꡑ, 즉 正反合의 논리적 과정을 밟아서 進化된 것으로 보는 것이고, 반헤겔적 연구란 종교가 과연 이렇게 역사 철학의 논리에 기인하여 발달된 것인가가 의문할 여지가 없지 아니하므로, 言語學ㆍ考古學ㆍ土俗學의 三방면으로 연구의 대상을 삼는다는 것이다.10) 이것 또한 근대 종교학의 태동 이후에 종교학의 2대 방법론으로 각광받았던 進化論과 比較法, 다시 말해서 通時的인 연구 방법과 共時的인 연구 방법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권상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多元 宗敎 現象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이러한 종교 자유주의 시대에 불교가 생존과 발전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더욱 포교와 개혁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 확실히 전통 불교학자들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宗敎라는 그것이 오직 하나만 世上에 存在할 때에는 人生의 宗敎熱이 많지 못하게 되고, 여러 가지 敎門이 蜂房水窩처럼 森羅한 때에는 人生이 宗敎의 方向을 迷徨하야 목을 느리어 기웃거리면서 어느 宗敎가 宗敎다운 宗敎인가 나는 어느 敎에 投身을 할가하고 迷津의 客이 되지 않는 者가 幾希하다. 하물며 宗敎製造業者가 輩出하야 別別宗敎를 새록새록 맨드러서 어제 못보든 敎旗가 오늘 曉風에 나붓기고 지난달에 못보든 敎壘가 오늘 晴空에 突現하는 朝鮮에서는 더욱이 말할 수 없다. 宗敎術이 이대로만 자꾸자꾸 進化되다가는 不幾年에 朝鮮人은 每人에 宗敎 하나씩 될 것이다.11) “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宗敎多元主義思想12)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시장 경제의 제 원칙이 종교의 場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각개 종교 전통들이 더 이상 강요되지 못하고 消費者 偏愛理論에 따라서 팔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所謂 ꡐ宗敎의 市場化ꡑ13)와 비슷한 논리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본 인식 하에서 그는 여러 종교가 동일한 위치에서 자유 경쟁하는 마당에 한국 불교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이런 종교 상황에서는 敎理도 敎體도, 무엇 무엇도 모두 우리가 세계의 제일이라. 紛然한 여러 종교가가 吾敎에 比하면 모두 後進輩요 部分的이라고 하는 등 自慢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되며, ”義理 깊은 것도 자랑 말며, 지체 높은 것도 자랑말고, 중생을 위하여 똥자루도 입어야 하고, 호랑이 새끼를 구하기 위하여 호랑이 굴에도 들어가야 할 것이라.14)“ 고 주장하고 있다. 즉 百千方便으로라도 오로지 佛敎로 回向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니,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를 끊임없이 갈고 닦아서 중생들의 구미에 맞게끔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있었기에 불교 포교 및 교학 발전을 위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러한 개혁의 일환으로서 전통 불교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종교 인식은 근대 한국 불교학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변수로서 다뤄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Ⅲ. 근대 한국 불교학 성립에의 공헌 : 권상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교 월간 잡지인 <朝鮮佛敎月報>를 창간(1912)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고, 또한 韓龍雲의 <朝鮮佛敎維新論>(1913) 보다 앞서서 역시 최초로 <朝鮮佛敎改革論>(1912)을 써서 餘他 불교 개혁론의 선봉이 되었으며, 또한 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1918)보다 앞서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통사인 <朝鮮佛敎略史>(1917)를 썼고, 해방 후 1953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宗立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학에 관한 그의 저서나 불교계 내에서의 활약상은 어느 것 하나 선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또한 일제 하에 간행되었던 많은 불교 잡지 가운데서도 가장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佛敎>(1924. 7˜1933. 8)지의 창간호부터 통권83호(1931. 5)까지 7년여 동안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약하면서 그 지면을 통해 100여 편의 논설을 남겼으며, 한국 불교사 자료의 집성에 주력하여 <李朝實錄佛敎?存>을 비롯한 방대한 자료집을 내는 등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 그의 활약상은 참으로 눈부시며, 당시 불교 지성계를 이끌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권상로의 불교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한 이론적인 천착에 머물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승려로서 불교에 대한 독실한 신앙과 사상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는 타종교와 불교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불교의 우월성을 더욱 확신하고 있다. 그의 불교 사상은 自覺과 覺他가 圓滿하여지는 ꡐ滿覺의 平等主義ꡑ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불교의 우수성을 평등주의에서 찾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社會主義나 共産主義的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宗敎家인 까닭에 政治, 經濟 같은 世間問題와는 조금 距離가 隔離함으로 物質的인 이런 問題에 對하여는 何等의 解決을 하려고 힘을 쓰지 아니하였다.15)”라고 하면서 精神的으로 이러한 社會問題를 徹底히 解決해서 現代를 救濟하는 것이 곧 宗敎家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소위 無産階級과 有産階級 간의 계급적 투쟁은 人人의 精神上 信仰, 즉 大悲 平等의 신앙에 依하여 해결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16) 그러나 불교가 來生을 위한 종교이지 現生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론을 제시하였다. 사실 그의 불교 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현상에 따른 活用을 중시하는 圓融的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戒定慧 三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戒에 대해서도 그는 墨守보다는 활용을 중시하고 있다. 우선 그는 계율의 중요성에 대해, “如來臨滅에 遺囑하신 至言은 後代兒孫으로 하여금 以戒爲師하라 하시고, 又는 金口所說 八萬法藏을 總括하면 要不出戒定慧三學하나니 戒는 如器하고 定은 如水하고 慧는 如月하야 戒器가 一破하면 定水와 慧月은 止現할 地가 無한지라. 然則如何한 定學慧學의 徒와 顯敎密敎의 門이 모다 그 初步로부터 終點에 至하기까지의 中間에 戒는 一瞬一息이라도 敢히 忘域에 置치 못함이니.17) ”라고 하여 戒定慧 중에서도 戒를 가장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그것을 꼭 그대로만 굳게 지킬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活用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기독교의 十誡命 같은 것은 고칠 수 없는 것이지만, 불교의 계율은 그렇지 아니하여서 尊嚴하기는 위가 없지만 活用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불교가 원래는 世界的이었지만 점차로 세계 民衆을 떠나게 된 것은 계율에 너무 偏執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ꡐ불교는 승려나 하는 것이다. 불교를 믿으려면 승려가 되어야 한다. 불교는 厭世的이다. 虛無寂滅이다. 實際 生活과는 何等의 관계가 없다ꡑ라는 비판이 모두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 그것은 모두 불교를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釋尊이 소수의 승려만을 위하여 敎法을 펴신 것이 아니오, 無邊한 세계에 無量한 중생을 위하여 건립하신 본 뜻을 안다면 다른 것은 이러니 저러니 말할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계율의 활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18)

 

  또한 그의 禪觀도 行解의 相應과 世間 및 出世間法을 하나로 보는 圓融性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전체 佛法이라는 것은 二見의 相을 떠나는 것이라 전제하고, 業識과 佛性도 둘이 아니어서 같은 物에 어떤 때는 業識으로 나타나며 어떤 때는 佛性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業識의 性이 佛에 있어서는 佛性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불성이 중생에 있어서는 業識이라고 하는 것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情識 분별의 어리석음으로 볼 때에는 如來萬德의 境界도 生死流轉과 같으며 佛智見의 光明으로 세계를 비추면 六道에 윤회하는 중생이라도 다 如來常住의 法身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옛말에 ꡐ煩惱가 곧 菩提요, 生死가 곧 涅槃ꡑ이라 하며, ꡐ만약 本心을 識得하면 大地에 寸土가 없다ꡑ라 하니 먼저 그 本心을 識得하여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禪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선은 본래 그 本心을 識得하는 本領이며, 依文解義하는 것은 禪이 아니거늘 많은 사람들이 다분히 依文解義로써 해석하니 이것은 선의 골수를 잘못 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禪은 修行이 따르지 않는다면 活禪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요, 佛과 祖師의 本懷를 識得해야만 一代藏經과 一千七百公安이 活句가 되는 것이니, 佛法은 오직 修行의 大段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의 불법은 解뿐이오 行이 缺하여도 되지 아니하며, 行뿐이오 解가 缺하여도 되지 아니하나니 行解가 상응하여야 비로소 佛法이 圓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辛苦를 겪어가며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一心으로 수도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인 바, 死後의 영혼을 극락으로 제도함보다는 중생으로 하여금 生前의 극락을 現前에 수용케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즉 世間, 出世間法이 본래 둘이 아니니 出世法 가운데 오직 骨子가 되는 禪으로써 世間法 가운데에 활용하여 經濟, 生活 등 각종 문제에 적용하도록 함이 옳다는 것이다. 農工商業과 動植鑛物과 阿屎放溺, 擧足動念이 禪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만일 禪自禪, 世自世로 禪을 수행한 결과가 다만 수행자 본인의 해탈에 그치고 一點도 세상의 필요에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가 선을 最上乘이라고 부르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1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불교 사상은 평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철저하게 현실적이요 원융적인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불교 사상은 근대적인 개혁이 시급히 요청되었던 당시 불교계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시의 적절하며 또 활용의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그가 불교 개혁의 요체로서 포교와 교학 진흥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던 所以이기도 했다.20)  사실 권상로의 불교학이 가지고 있는 근대적인 성격은 그의 불교 개혁 이념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의 근대적 불교학 연구는 사실은 이러한 불교 개혁에 대한 신념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사실 당시 불교 개혁론은 시대적인 대세였던 것인데,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제기했던 것이 바로 권상로이다. 그가 제시하는 개혁의 핵심적 대상은 교육 제도의 개혁이다. 그는 불교계의 急先務로 看經과 參禪, 布敎를 들고 있으며, 敎理의 연마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리를 배우는 學人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개량을 주장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師範, 書籍, 體制, 場所의 개혁을 제시하였다. 그가 전통 강원 교육을 통해 불교를 배웠으면서도 전통 불교학을 비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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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5일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 수상...축하합니다.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2012(2012 醴泉昆蟲바이오엑스포 : 大韓民國 祝祭 콘텐츠 大賞 受賞, 韓國祝祭콘텐츠協會, 스포츠서울 共同 主催) [記事] : `2012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가 제1회 대한민국 축제콘텐츠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제1회 대한민국 축제콘텐츠는 한국축제콘텐츠협회와 스포츠서울이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예천군은 곤충을 이용한 친환경 농업 실천과 산업화, 교육적 가치와 지역경제 파급 효과를 증대시키는 등 창의성을 높이 인정받아 축제콘텐츠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예천군은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농촌 폐교를 활용하여 산업곤충연구소를 설립 친환경 농업을 선도해 왔으며, 2012년 7월 28일부터 23일 동안 `곤충과 함께하는 친환경 세상'이라는 주제로 ‘2012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를 개최했다. 국내 최대의 곤충 축제로 세계 희귀종, 멸종 위기종 등 살아있는 곤충 위주로 전시장을 마련했으며, 학습과 축제가 함께하는 에듀&엔터테인먼트엑스포를 지향하여 관람객 85만 명 유치와 9백94억원의 경제파급 효과를 거둬 국제곤충학회(ICE)로부터 세계 최고 곤충산업축제로 인증받았다. 특히, 투자비용 대비 가장 경제성 있는 박람회라는 평가와 함께 행사 기간 중 곤충산업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세계 32개국 1백30명의 곤충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여 국내·외 곤충학자들은 물론 곤충엑스포 행사장을 방문한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예천군에서는 2012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의 성공적 개최에 크게 힘입어 차기 곤충엑스포의 내실있고 알찬 추진을 위해 기본계획 수립과 타당성 용역을 실행하는 등 행정력을 모으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축제콘텐츠 시상식은 2013년 3월 5일 오후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마련돼 이현준 예천군수가 시상식에 참석해 수상했다.(醴泉新聞 2013년 03월 05일 (화) 10: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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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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