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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253) : 권은아(사시합격)-권응삼(생원)-권응참(생원)-권응추(진사)-권응탁(학자)-권의(부윤)-권의(현감)-권이강(정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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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아(第50回 司法高試 最終合格 권은아(醴泉邑 西本里) 孃) [記事] : 제50회 사법고시에 권은아(예천읍 서본리) 양이 최종 합격했다. 예천초등(76회) 출신으로 초등 2학년 때 서울로 전학가 이화여대부속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한국외국어대에 다니다가 부친의 뜻에 따라 서강대 법대에 다시 입학하여 오늘의 큰 영광을 이루었다. 내년(2009년) 3월 15일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인 부군 방신욱(33세) 씨도 제49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입학을 미루다가 이번 50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예비부부 권은아(33) 양과 함께 사법연수원 입학을 앞둔 자랑스런 예비부부애를 마음껏 자랑했다. 부친 권오현(예천초54회) 씨와 모친 윤분란(개포초28회/용궁중) 씨의 1남 2녀 중 장녀로 부친은 3년 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였고 어머니 윤분란(개포초28회/용궁중) 씨의 어려운 뒷바라지 속에 오늘의 큰 영광을 어머니 품에 안겨주었다.(권은 서울本部長 醴泉인터넷放送 2008-11-27 오후 9:00:44)
권은아(第50回 司法試驗 合格 : 醴泉邑 胎生 권은아 氏) [記事] : 권은아(33) 씨는 초등학교 2학년(예천초)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전학, 이화여대부속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 재학 중 부친 권오현(예천초54․2006년 작고) 씨의 권유로 서강대 법대에 재입학, 사법시험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권은아 씨는 권오현 씨, 윤분란(개포초 28회) 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다. ꡒ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어 마음이 가볍다ꡓ며 ꡒ묵묵히 뒷바라지 해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ꡓ고 밝혔다. 권은아 씨는 2009년 3월 15일 결혼을 앞두고 있으며, 예비 남편인 방신욱(33) 씨도 제49회 사법시험에 합격, 부부법관의 길을 걷게 됐다.(醴泉新聞 2008년 12월 04일 16: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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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삼(權應參) : 조선 명종 때, 개포면 경진리 노포(蘆浦) 사람, 호는 안분당(安分堂), 본관은 안동, 판사(判事) 초의 증손자, 경(經)의 3자, 1600년(선조 33)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6,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권응삼 : 하회마을의 전통문화(류 완하 엮음) 三. 15. 文集 著書 巴山派 파산 柳仲淹/ 2009.09.01/ ...나왔다. 조 : 류자온(柳子溫) 생부 : 류공석(柳公奭) 양부 : 류공계(柳公季) 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딸 형제 : 모하당 류중청(柳仲淸) 지극한 효성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약관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여 일.../ http://cafe.daum.net/poongryuhahoi/ 풍류하회(daum 2010)
권응삼 : 파산(巴山) 중엄(仲淹)묘갈명병서: 이광정(李光庭)/ 2008.12.21/ .... 본관은 풍산으로 그곳에는 대대로 이름난 분이 있었다. 부친은 참봉(參奉) 공석(公奭)으로 안동 권씨 응삼(權應參)의 딸에게 장가들어 1538년(중종 33)에 선생을 낳았으며, 선생은 막내 숙부 공계(公季)의 양자로 들어가 그 집의.../ http://cafe.daum.net/yclee/ 영천이씨대종여로(daum 2010)
권응삼 : 구촌집(龜村集): 류경심/ 2008.07.07/ ...康汝亨의 女 柳景沈 南?臣의 女 柳景濬 副司果 盧祚의 女 女 鄭邦賢 女 張好謙 參奉 柳公奭 參奉 黃漢忠의 女 權應參의 女 女 全應房 柳公季 參奉 南處長의 女 기사전거 : 行狀(柳仲? 撰), 神道碑銘(金應祖 撰, 鶴沙集 卷9), ?山.../ http://cafe.daum.net/poongryuhahoi/ 풍류하회(daum 2010)
권응삼 : 파산 류중엄(ⅩⅡ) / 행적/ 2007.08.18/ ...)은 진사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다. 부친 유공석(柳公奭)은 참봉이고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며, 숙부인 참봉 류공계(柳公季)에게 출계하였다. 공은 1538년(중종 33)에 나서 1571년(선조 4)에 세상을.../ http://cafe.daum.net/poongryuwoocheon/ 豊 柳 마을(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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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참(權應參) : 예천 출신, 자는 찬군(粲君), 본관은 안동, 참봉(參奉) 순(純)의 아들이다. 유학(幼學)으로서 1540년(중종 35) 식년 생원시에 3등 17위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권응참(權應參) :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35년 (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7위 [인적사항] 자 찬군(粲君), 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예천(醴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권순(權純), 관직 : 전참봉(前參奉)/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권응참 : 권응▣(權應▣)/ ...校)[가족사항] [부]성명 : 권세인(權世仁)관직 : 고성포만호(高城浦萬戶)[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제]권응참(權應參) [제]권응두(權應斗) [제]권응기(權應箕) [제]권응원(權應元)[출전]〈기축증광용호방목(己丑增廣龍虎榜目.../ http://people.aks.ac.kr(daum 2010)
권응참 : 한국의 서원과 학맥 연구(소성학술연구총서 1)/ e-Book/ 경기대학교소성학술연구원 지음 | 국학자료원 | 2002.11.29/ 책본문 : ...할 수 있겠다. 초기 『입원록』에는 『죽계지』사마조에 등재된 李承健·李.·權應參·李克儉·黃應奎 등이 기재되고 있다. 그러면 소수서원 『入院錄』18)을 통해 원생의 입원 당시 .../ 75페이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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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추(權應樞) :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醴泉郡誌 1939)
권응추 [專門資料] : 권응추가 질병과 문중 일을 언급하며 갑신년에 보낸 간찰(全州柳氏 好古窩 [簡札 60])/ 사돈 사이며 현재 상주인 권응추(權應樞 : 본관 安東)가 갑신(甲申)년 3월 3일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상주로 슬프게 지내는 자신을 위로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자신은 질병으로 심신이 불편하며 문중 여러.../ 사제복인 권응추(査弟服人 權... |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 | 2007.11.05(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응추가 과거 시험에 대해 언급하며 갑신년에 보낸 간찰(全州柳氏 好古窩 [簡札 419])/ 병으로 고생하는 아우뻘인 권응추(權應樞 : 본관 安東)가 갑신(甲申)년 12월 7일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인편을 통해 보내준 서찰을 반갑게 받았다면서 상대방 여러 가족의 평안 여부가 궁금하다고 했다..../ 병제 권응추(病弟 權應樞) |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 | 2007.11.05(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응추가 상주로서 슬픈 입장을 언급하며 갑신년에 보낸 간찰/ 사돈 사이인 권응추(權應樞, 본관 安東)가 갑신(甲申)년 3월 3일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상주로 슬프게 지내는 자신을 위로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자신은 질병으로 심신이 불편하며 문중 여러 가지 일과 가족의.../ 사제복인 권응추 | 2008.03.21(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응추가 과거 시험을 기대하며 갑신년에 보낸 간찰/ 병으로 고생하는 아우뻘인 권응추(權應樞, 본관 安東)가 갑신(甲申)년 12월 7일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인편을 통해 보내준 서찰을 반갑게 받았다고 했다. 상대방 여러 가족의 평안 여부가 궁금하다고 했다..../ 병제 권응추 | 2008.03.21(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병기(權丙基)/ ...(三宜庵) 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이고, 우영(于永) 입암리(立巖里) 출신이다. 고조부는 향려(香廬) 권응추(權應樞) 이고, 증조부는 권은(權?) 이며,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권주엽(權周曄) 이고, 아버지는.../ http://people.aks.ac.kr(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헌팔(權憲八)/ 임인(壬寅) 1782년 본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갑오 식(甲午式) [가족사항] [부 - 부] 성명 : 권응추(權應樞) [조부 - 조부] 성명 : 권필한(權弼漢) [증조부 - 증조부] 성명 : 권일(權佾) [고조부 - 4대조부] 성명 : 권중도.../ http://people.aks.ac.kr(daum 2010)
권응추 [專門資料] : 권헌팔(權憲八)/ ...(安東) 거주지(居住地) : 단성(丹城)[이력 및 기타 사항]전력(前歷) : 유학(幼學) [가족사항]부(父) : 권응추(權應樞)조부(祖父) : 권필한(權弼漢)증조부(曾祖父) : 권일(權佾)외조부(外祖父) : 정기동(鄭起東)/ http://koreandb.nate.com(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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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탁(權應鐸) : 자는 천진(天振), 호는 송서당(松西堂), 본관은 예천, 문해(文海)의 7세손, 문행(文行)과 우애(友愛)가 뛰어나고, 문집(文集)이 있다.
권응탁 [專門資料] : 四月, 大/ 2007.02/ 李先達孝兼|柳君宗春|南振伯|申汝重|柳報恩明彦|復孫|厚卿|李君徽|擎天|李君徽觀|國亨|李參判鳳徵|安子仁|權應鐸|虞徵|虞徵|權鳳仁|德瞻|成甫|見甫|潤如|高君日?瞿|復仁|金光謙|明謙|復孫|士豪|柳君宗春|致和.../ 權相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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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의(權誼) : 조선 태조 때, 용문면 성현리 중마 출신, 본관은 예천, 판서 군보(判書君保)의 맏아들, 조선 태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검교(檢校),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묘는 하리면 율곡리 유좌(酉坐)에 있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醴泉郡誌 1939, 族譜)
권의 : 예천권씨는 흔씨이다/ 2009.07.23/ 일찍이 관향인 예천에 터를 잡아 누대에 걸쳐 세거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무진보"에 의하면,3세 권의(權誼) 이후에 지금의 경북 영주를 세거지로 삼고 있으며,4세 권자화(權自和)가 진주에서 살았던 사실이 나타나 있으므로 이.../ http://cafe.daum.net/namsunmyun/ 安東권氏(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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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의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野翁 安東權公(檥) 墓碣銘/ ...側室에서 一男하니, 內外曾玄孫 合하여 三百餘人이다. 墓在는 豊基殷豊縣(醴泉郡下里面芙草里) 南芙蓉山 子坐之原이.../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권의(權檥) : 화산세고(花山世稿) [한국국학진흥원-고도서]/ ...호는 야옹(野翁),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사빈(士彬)의 아들이며, 권벌(權橃)이 그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예천(醴泉)의 제곡리(渚谷里)에 거주하다가 1540년(중종 35) 찰방(察訪)이 .../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권의(權檥) : 구분: 영남유학인물자료/ 날짜: 1475-1558/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권의/權檥/ 자 백구/伯懼/ 호 야옹/野翁/ 년도 1475 ~ 1558/ 프로필/ 권의(權?, 1475∼1558)의 본관은 안동.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영의정에 추증된 사빈(士彬)의 아들이며, 권벌(權橃)이 그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었으나 더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예천의 제곡리에 거주하다 1540년(중종 35) 찰방이 되었고, 1545년(인종 1) 의흥현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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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강(權以綱)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30년 (175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55위/ [인적사항] 자 숙기(叔紀), 생년 경술(庚戌) 1730년, 합격연령 25세, 본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타과 영조(英祖) 38년(1762) 임오(壬午) 알성시(謁聖試)/ [가족사항] [부] 성명 : 권유(權濡), 타과 : 생원(生員)/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제] 권이경(權以經)/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권이강(權以綱) : [문과] 영조(英祖) 38년 (1762) 임오(壬午)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인적사항] 자 숙기(叔起), 생년 경술(庚戌) 1730년, 합격연령 33세, 본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 성명 : 권유(權濡), [조부] 성명 : 권후태(權后泰), [외조부] 성명 : 홍정철(洪廷喆), [처부] 성명 : 이양환(李陽煥), [처부2] 성명 : 홍길보(洪吉輔)/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daum 2010)
권이강 [記事]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3월 23일(병진) 1번째 기사/ 과차하여 권이강 등에게 급제를 내리다. 신은 민백흥에게 수서를 내리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과차(科次)15351) 하여 권이강(權以綱) 등 3인을 뽑아 급제를 내리고 모두 입시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신은(新恩) 민백흥(閔百興)에게 수서(手書)를 내려 그의 형 고 상신(相臣) 민백상(閔百祥)의 궤연(?筵)에 돌아가 고하게 하였으니, 무릇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9장 B면/ 【영인본】 44책 94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註 15351]과차(科次) : 조선조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 성적을 9등(等)으로 나누어, 이상(二上)․이중(二中)․이하(二下)․삼상(三上)․삼중(三中)․삼하(三下) 및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로 규정, 이로써 우열(優劣)을 가렸고, 삼하 이상을 급제(及第)로 하였음. ☞(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영조실록 105권/ 영조 41년(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6월 11일(을묘) 2번째 기사/ 이인배․한광회․박지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인배(李仁培)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하고,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지원(朴志源)을 집의(執義)로, 서병덕(徐秉德)을 장령(掌令)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지평(持平)으로, 홍윤(洪?)․이익선(李益?)을 정언(正言)으로, 민백흥(閔百興)을 강원도 관찰사로,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응교(應敎) 김치양(金致讓)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고,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71책 105권 26장 A면/ 【영인본】 44책 20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1769 기축 / 청 건륭(乾隆) 34년) 9월 23일(임인) 5번째 기사/ 남현로․홍상직․신응현․권이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현로(南玄老)를 대사간으로, 홍상직(洪相直)을 사간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집의로, 권이강(權以綱)을 정언으로, 이병정(李秉鼎)을 수찬으로, 이언형(李彦衡)을 공조 참판으로, 홍인한(洪麟漢)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이때에 호판이 비었는데, 임금이 대신들에게 천망(薦望)하도록 명하고, 또 말하기를, ꡒ전 예조 판서가 가장 좋을 것이다.ꡓ하였으니, 대개 홍인한을 가리킨 것이었다. 홍인한은 바야흐로 정후겸(鄭厚謙)을 붙좇아 총우(寵遇)가 매우 두터웠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10장 B면/ 【영인본】 44책 33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영조실록 123권/ 영조 50년(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년) 12월 27일(병오) 2번째 기사/ 정언 권이강이 상소하여 정조례를 보류하라는 명에 대하여 아뢰다/ 정언 권이강(權以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ꡒ지난번 왕세손 저하에게 정조례(正朝禮)를 잠시 보류(保留)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전하의 추모(追慕)의 정성과 겸양의 덕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잘 알지만 왕세손의 새해를 맞이하는 기쁜 마음을 바치는 의식에 있어서는 어찌 답답한 마음이 없겠으며, 또한 법도를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ꡓ하니, 임금께 가납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5장 A면/ 【영인본】 44책 48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3월 22일(병오) 2번째 기사/ 홍문록에서 7점을 받은 자들/ 홍문록(弘文錄)【부제학 서호수(徐浩修), 부응교 이도묵(李度?) 이다.】에서 7점(點)을 받은 사람은 김익휴(金翊休)․권이강(權以綱)․유의(柳誼)․김우진(金宇鎭)․유맹양(柳孟養)․윤행원(尹行元)․이은모(李殷模)․조정진(趙鼎鎭)․홍문영(洪文泳)이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8장 A면/ 【영인본】 45책 104면/ 【분류】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3월 28일(임자) 2번째 기사/ 도당록에서 5점을 받은 자들/ 도당록(都堂錄)【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서명선(徐命善), 좌참찬 황경원(黃景源), 홍문제학 이휘지(李徽之), 이조 판서 정상순(鄭尙淳), 참의 유당(柳戇), 좌랑 윤행수(尹行修)이다.】에서 5점을 받은 사람은 김익휴(金翊休)․권이강(權以綱)․유의(柳誼)․정연순(鄭淵淳)․한만유(韓晩裕)․유맹양(柳孟養)․윤행원(尹行元)․서유성(徐有成)․홍문영(洪文泳)․심낙수(沈樂洙)․이경일(李敬一)․이은모(李殷模)․조정진(趙鼎鎭)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9장 B면/ 【영인본】 45책 104면/ 【분류】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9월 19일(경자) 1번째 기사/ 심환지․권이강이 상선의 회복을 청하였으나 이들을 추고하다/ 주강(晝講)하였다. 연신(筵臣)이 감선(減膳) 다섯째 날이 탄신(誕辰)이므로 뭇 신하의 뜻이 서운하여 못 견딘다 하여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옥당(玉堂) 심환지(沈煥之)․권이강(權以綱)이 그 말을 따르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ꡒ재변을 당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도 무릇 언책(言責)의 직임이 있는 자는 귀에 거슬리어 임금을 노엽게 하는 말을 날마다 앞에 서 아뢰어야 할 것인데, 더구나 구언(求言)하는 이때이겠는가? 대개 내가 간언(諫言)하게 하는 정성이 없어서 말하도록 이끌지 못한 것이니, 본디 한스럽고 부끄러워하기에 겨를이 없으나, 어찌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도리어 뜻을 굽히는 말을 할 줄 알았겠는가? 옥당이 감선에 관한 일을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작은 일이 아니라 하겠으니, 시독관(侍讀官) 심환지, 검토관(檢討官) 권이강을 추고(推考)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22장 B면/ 【영인본】 45책 121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년) 3월 18일(신묘) 2번째 기사/ 이문원에서 《근사록》을 강하고 이어 홍문관에서 《심경》을 강하다/ 이문원(?文院)에 행차하여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서 인정전(仁政殿)으로부터 본원(本院)에 나아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의장(儀仗)이 동․서로 나누어 섰다.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니 음악을 연주하였다. 인의(引儀)가 각신(閣臣)을 인도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제학 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 직제학 정민시(鄭民始)․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대교 정동준(鄭東浚)이 왼쪽을 경유하여 뜰 동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원임 제학 이휘지(李徽之)․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직제학 서호수(徐浩修), 직각 정지검(鄭志儉)․김희(金憙)․김우진(金宇鎭), 대교 서용보(徐龍輔)는 오른쪽을 경유하여 뜰 서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배례가 끝나자 시임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오고, 원임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와서는 반열을 합쳐 한 줄로 만들어 전(殿)으로 올라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영첨(領籤)이 안책(案冊)을 내어오니 승지가 전봉(傳捧)하여 꿇어앉아 올렸다. 검서관(檢書官)이 각신(閣臣)에게 책(冊)을 주고, 청강(聽講)을 명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이 전으로 올라왔다. 영경연사(領經筵事)는 서명선(徐命善), 지경연사(知經筵事)는 정상순(鄭尙淳)․김익(金?),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는 이명식(李命植)․정창성(鄭昌聖), 시강관(侍講官)은 박천형(朴天衡), 시독관(侍讀官)은 이시수(李時秀)․이정운(李鼎運)․이겸빈(李謙彬)․유맹양(柳孟養), 검토관(檢討官)은 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권이강(權以綱)․홍문영(洪文泳)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근사록》은 곧 학문의 요지(要旨)인데, 태극도설(太極圖說) 이 책을 펴면 가장 중요한 뜻이 되니 먼저 이 장(章)을 읽으라.ꡓ하니, 심염조(沈念祖)가 독주(讀奏)하고 문의(文義)를 진달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ꡒ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 새로 본원(本院)을 옮기고 특별히 이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경들과 일당(一堂)에서 자순(諮詢)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찌 곧 글을 이야기하고 경(經)을 설명하고서 끝내려는 것뿐이겠는가? 문의 이외에 오늘날의 일에 관해서 할말이 많을 것이다. 위로는 과궁(寡躬)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득실에서부터 백성들의 고락(苦樂)과 전왕(前王)의 치란(治亂)에 이르기까지, 일은 말하지 못할 것이 없고 말은 끝까지 못할 것이 없게 함으로써 상하(上下)가 서로 이익됨이 있게 하자는 것이, 곧 내가 오늘 본원에 임어한 뜻이다. 만약 책을 가지고 연석에 나오게 하여 준례에 따라 문의만 대답하게 한다면, 이는 한마당 한가한 설화(說話)에 불과한 것이니, 군덕(君德)과 치모(治謨)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대개 강설(講說)은 곧 말로 인하여 의문을 일으키고 의문으로 인하여 의문을 풀게 하여 결국은 사람의 선심(善心)을 감격하여 발현하는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 2591) 와 상산(象山) 2592) 이 의리가 같지 않아서 문로(門路)가 각각 달라 지게된 것이다. 〈주자가〉 백록 서원(白鹿書院) 에서 강론할 때에 강을 듣는 문인(門人) 중에 왕왕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던 것은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아서였다. 이제 성인(聖人)의 말을 외면서 성인의 도(道)를 강설하여 조금이나마 개발(開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로지 강설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오늘 마땅히 경들과 함께 하루 종일 끝까지 담론하고 밤을 지새워 아침까지 계속 하려하니, 경들은 다 말하여 숨김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나도 마땅히 겸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ꡓ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서 절하고 수명(受命)하였다. 하교하기를, ꡒ이 책의 책명은 곧 《근사록(近思錄)》인데, 선유(先儒)들이 이 책을 가지고 사자(四子)2593) 의 계제(階梯)로 삼았다. 이는 대개 학자가 학문을 함에 있어 먼저 가까운 데에서부터 공부하여 간절히 묻고, 비근한 데서부터 생각함으로써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이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 ꡐ근사ꡑ로 이름하였으니, 편수(篇首)에 먼저 성리(性理)의 은미하고 깊은 내용을 말한 것이어서 초학(初學)이 깨우칠 만한 것이 아는 듯 싶으며 근사(近思)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는 듯싶다. 무릇 학자는 비록 도(道)를 터득한 것이 깊고도 돈독한 뒤일지라도 의리(義理)의 중요 부분과 성명(性命)의 본원(本原)에 대해 갑자기 뛰어넘어 의논(議論)한 적이 없었다. 자공(子貢) 이 총명하고 민첩한 식견으로 성문(聖門)에서 친자(親炙)되어 이미 승당(升堂)2594) 의 반열에 올랐는데도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오히려 듣지 못하였었다. 이에 의거하여 궁구하여 보건대, 이 책에서 첫머리에 태극도설(太極圖說) 을 기재한 것은 참으로 신장(神章)에 가까운 것으로 중화(中和)에 대해 말한 것은 거의 없으니, 학설이 너무 높고 말이 너무 깊은 결과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설자(說者)가 혹 주자(朱子) 가 《소학(小學)》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ꡐ원형이정(元亨利貞)ꡑ과 ꡐ인의예지(仁義禮智)ꡑ를 말하였고, 또 이 책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ꡐ무극태극(無極太極)ꡑ과 ꡐ미발이발(未發已發)ꡑ을 말한 것은 특별히 초학자(初學者)들로 하여금 그 명의(名義)를 알아서 향하여 나갈 데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근사하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성명에 관해서는 드물게 말한 뜻으로 견주어 보면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평일 이에 대해 무슨 강구(講究)한 뜻이 있는가?ꡓ하니,
이복원(李福源)이 대답하기를, ꡒ공문(孔門)에서 사람을 가르친 것은 효제(孝悌)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맹자(孟子)에 이르러 처음으로 성명(性命)에 관해 말을 하였고, 정자(程子)에 이르러서는 학문(學問)을 논하고 도(道)를 논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은미하고 심오한 뜻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時義)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도체(道體)에 대해 먼저 말하였다는 것은 여동래(呂東萊) 2595) 의 서문(序文)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며 《중용(中庸)》 에서 먼저 천명(天命)이 성(性)이라고 말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인 것입니다.ꡓ하였다. 하교하기를, ꡒ대체(大體)는 그러하다. 그렇다면 공자(孔子) 가 사람을 가르치는 차서(次序)와 주자(朱子) 가 사람을 훈도하는 계급(階級)이 각각 다른 점이 있게 되는데, 그 같거나 다른 뜻의 이유에 대해 분석(分析)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ꡓ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ꡒ학자(學者)는 모름지기 먼저 대강(大綱)을 안 연후에야 바야흐로 준적(準的)이 서게 되고 손을 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자 가 반드시 이 태극도설을 가지고 편수(篇首)에 게재한 것은, 세급(世級)이 더욱 내려갈수록 설명을 더욱 상세히 하기 위한 것에 연유한 것입니다.ꡓ하였다. 하교하기를, ꡒ진달한 내용이 좋다. 대개 맹자의 세대에는 이단(異端)이 점차로 일어나고, 정도(正道)가 점점 회색(晦塞)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맹자 가 할 수 없이 성(性)을 말하게 된 것이다. 염계(濂溪) 2596) 때에는 성인의 말씀이 이미 없어져 버려 사설(邪說)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므로 염계가 할 수 없이 무극(無極)에 대해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맹자가 말한 것이며, 맹자가 말하지 않을 것을 염계 가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ꡓ하니, 유언호(兪彦鎬)는 대답하기를, ꡒ성현(聖賢)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상략(祥略)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사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학문(學問)하는 도리는 아는 것을 먼저하고 행하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니, 진실로 성도(性道)의 본원(本原)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손을 대어 공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책을 엮는 법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ꡓ하였다. 하교하기를, ꡒ주자가 말한 수신(修身)의 대법(大法)은 《소학》에 기재되어 있고,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에 대해서는 《근사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유(先儒)들이 또 이 두 책을 진실로 도(道)를 바라보는 계제(階梯)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장(祠章)에 치중하면서부터 이 두 책을 눈에 붙여 읽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비록 도에 들어가려 해도 어려웠다. 지금의 세상을 돌아보건대, 온 세상 사람들이 단정한 자세로 도를 향하여 달려갈 마음이 없어 분발 면려하고 연마하려는 노력이 없는 탓으로 이 책을 무용지물처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갓 자회(字會)․자의(字義)․구탐(句探)․구지(句旨)뿐만이 아니라 큰 규모(規模)와 상세한 절목(節目)에 이르기까지도 애당초 연구하지 않고 있으며 체용(體用)의 본말(本末)과 대소(大小)의 상세함과 소략함에 대해서도 또한 강마(講?)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옛 학자들의 병폐는 비근(卑近)한 것에 염증을 내고 현원(玄遠)한 것을 힘쓰며 순서를 건너뛰기를 좋아하며 허무(虛無)를 좇는 것이었으므로 사장(詞章)이나 이단(異端)으로 귀결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학자들의 병폐는 사장과 이단까지도 마음을 다하여 힘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모든 문자에 속한 일을 한쪽에다 팽개쳐 놓고 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기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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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