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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254:권이강(2)
작성자장병창 @ 2013.04.17 06:21:30

  예천의 자랑(3254) : 권이강(정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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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우리나라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여겨 예의(禮義)가 풍속을 이루었고 치교(治敎)가 융성하여 유현(儒賢)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일컫고 있다. 이런 때문에 말학(末學) 후생(後生)으로서 비록 실제의 공부를 힘써 행하지 못하여 어려서부터 익혀 늙도록 해도 갈피를 못 잡고, 나가서는 종[奴]이고, 들어와서는 주인(主人) 행세하는 자일지라도, 그래도 성리(性理)의 찌꺼기와 성현(聖賢)의 말씀이나마 지니고 있게 되었다. 따라서 비록 가정[家]마다 공(孔)․맹(孟)에 대해 이야기하고, 호(戶)마다 정(程)․주(朱)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빈말이 아닌 것이다. 후세에 이르러서도 선비의 옷을 입고 관을 쓴 사람으로서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고 변폭(邊幅)만 꾸미는 자에게서도 또한 유풍(遺風)과 여속(餘俗)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일(近日) 이래에는 이런 일마저도 또한 폐기되었단 말인가? 옛날에는 칠성(七聖)2597) 이 모두 미혹되었다는 탄식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온 세상이 모두 미혹되었다고 할 만하다. 경연(經筵)에서는 도움을 의뢰할 가망이 없고 횡사(?舍)에서는 현송(絃誦)하는 소리가 끊어졌으니, 이는 모두 교화가 밝혀지지 않은 데서 온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내가 바야흐로 내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나, 그 까닭을 공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상하 사이에 반드시 초래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들은 모두 경악(經幄)2598) 의 근신(近臣)이기 때문에 이에 나의 속마음을 펴서 보여 창언(昌言)2599) 을 듣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날에 무엇을 꺼려서 아뢰지 않는가? 가언(嘉言)과 선모(善謨)로 위로는 나의 마음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지금 세상의 습속(習俗)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각(內閣)을 옮겨 설치한 처음을 맞아 특별히 경연(經筵)을 열고 일대(一代)의 신진(新進)인 사람들을 선발하여 비로소 강제(講製)를 만들었으니, 이는 곧 나의 고심(苦心)과 지극한 뜻으로 혹 조금이나마 보익(補益)되는 점이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도 만약 단지 헛된 이름만 널리 퍼지고 끝내 실효가 없게 된다면, 용관(冗官)을 창립한 잘못을 내가 진실로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여러 근신에게 기대하는 것이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숨김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경들은 모두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로서 이미 지척(咫尺)의 연석(筵席)에 올라서 만약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간다면, 비단 스스로의 마음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후세에 전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날 문풍(文風)을 진기시키고 치도(治道)를 만회할 수 있는 요체에 대해 들을 수 있겠는가?ꡓ하니, 서명선(徐命善)이 대답하기를, ꡒ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 무릇 문사(文士)들을 장려하고 권면하는 방도에 대해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풍이 진기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아무런 이유가 없겠습니까? 대개 주(周)나라 문왕(文王) 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한 사람은 모두가 호걸(豪傑)스런 선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쇠세(衰世)에 호걸스런 선비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고서 능히 스스로 도제(導齊)2600) 의 근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예로부터 얻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지금 그런 폐단을 바로 잡는 근본은 전적으로 ꡐ격양(激揚)ꡑ이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진실로 탁류(濁流)를 치고 청류(淸流)를 드날리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글을 모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며 글을 잘하는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한다면, 인재가 울연(蔚然)히 흥기하고 치도(治道)가 성취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전하께서 한번 전이(轉移)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ꡓ하였다. 하교하기를, ꡒ돌아보건대, 지금은 세급(世級)이 이미 낮아졌고 다스리는 도리도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주나라 문왕 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하는 것을 어찌 지금의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권선징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 대체(大體)가 좋다. 그른 것을 고치고 습속을 바로잡을 방도에 대해 여러 신하들은 끝까지 다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ꡓ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ꡒ오늘 강회(講會)에 친림하신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성상(聖上)께서 과연 계옥(啓沃)하고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을 받아들이시어 끝내는 문풍을 크게 진기시키는 효험이 있게 된다면 오늘의 강화가 진실로 불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혹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미문(彌文)2601) 을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본각(本閣)의 규도(規度)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성의(聖意)가 애를 쓰고 여러 신하들이 마음을 기울인 결과로 끝내는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삼가 기뻐하면서도 또한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치법(治法)과 정령(政令) 이 모두 처음에는 힘을 쓰다가도 나중에는 해이해지는 조짐이 없지 않았는데, 각사(閣事)의 성취된 것이 이와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니, 이로부터 온갖 일을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끝에 가서 해이해지는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본말(本末)이 전도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걱정하는 것입니다.ꡓ하였다. 하교하기를, ꡒ그렇다. 선유(先儒)의 말에 ꡐ정전(井田)은 반드시 한 고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ꡑ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먼저 한 고을에다 시행하여 보고, 천하에 미루어 나가게 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임금된 자가 나라를 경영하고 학자(學者)가 덕을 증진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 먼저 들어가는 첫머리 부분에서부터 손을 댄 연후에야 순서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각(內閣)을 설치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인 것이다. 문풍을 진기 면려하고 일세(一世)를 고동(鼓動)시키는 효과를 장차 하나의 내각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 지가 이제 이미 6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비로소 대략 규도(規度)를 정하였고 의절(儀節)도 점차 확립되었으니, 거의 명분에 따라 실효를 요구할 가망이 있게 되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었겠는가? 과거 세조조[光廟朝] 때 처음으로 내각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그 요점은 송(宋)나라 와 명(明)나라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중고(中古) 이후에 폐기되고 수거(修擧)하지 않았으며,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 비로소 편차인(編次人)을 두고서 사륜(絲綸)을 윤색(潤色)하는 임무를 맡겼었다. 다만, 그 직(職)에 정하여진 호칭이 없고, 그 관(官)에 정하여진 법규가 없어 비록 내각을 수거하려는 뜻을 갖고는 있었지만 내각의 제도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내각을 설치한 것은 내가 창립한 것이 아니라,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대략 가감(加減)한 것이다.

 

  이제 다행히 의문(儀文)이 비로소 갖추어졌으나, 만약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한갓 허함(虛啣)만 벌려놓게 한다면, 오로지 내가 문풍을 진기하려는 본의(本意)가 그저 그 부문(浮文)을 보태는 것에 족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거(修擧)하는 정사(政事)가 단지 일각(一閣)에만 행하여졌을 뿐이요, 이 밖의 온갖 법도에 대해서는 실로 처음의 계획대로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다. 그리하여 위미(委靡)하고 총잡(叢雜)스러워 수습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어찌 치화(治化)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사를 돌아보건대,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하고, 조상(朝象)이 흐트러져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고 있으며, 백성들의 수심과 고통이 아직도 구제되지 못하고 있다. 사기(士氣)가 더욱 퇴폐되어 가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진작(振作)시킬 것이며, 인재(人才)가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군정(軍政)이 날로 문란해지는데도 그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이 없고, 경비(經費)가 날로 부족한데도 용도를 넉넉하게 할 방도가 없다. 이 밖에 갖가지 병폐에 대해서는 이루 거론할 수 없이 많으니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그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진실한 말이 없는 것이 곧 오늘날의 큰 병폐의 근원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내가 간언(諫言)을 나오게 하는 실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경들에게 간언을 올리려는 정성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이에 참으로 좌우를 돌아보면서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없다. 아! 명(明)나라의 과도(科道)에 대한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 설관(說官)한 것은 대개 언로(言路)를 널리 열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에는 붕당(朋黨)으로 나누어져 점차 서로 참소하고 이간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사람을 기용하면 문득 탄핵하고 논박하는 소장이 올라오고, 한마디 말을 하면 뒤따라 결적(抉摘)을 가하여 새외(塞外)의 장수가 서로 잇따라 주참(誅斬)을 당하고, 임하(林下)의 선비들도 또한 모두 화(禍)를 당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2백 년의 원기(元氣)가 이에서 다시는 진작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의 풍기(風氣)와 습상(習尙)으로 만약 공거문(公車文)2602) 을 날로 쌓이게 한다면 혹 이런 폐단이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언로는 나라의 혈맥(血脈)이니 존망(存亡)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일에 앞서 미리 걱정하여 언로를 열 방도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이 메인 것 때문에 밥먹는 것을 폐기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하교는 진실로 속마음을 펴서 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연석(筵席)에 오른 여러 신하들이 끝내 한마디 말도 우러러 부응함이 없으니, 이는 실로 나의 평일의 정성이 능히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탓이다. 이에 진실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나 또한 능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ꡓ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ꡒ《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ꡐ선한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ꡑ라고 하였는데, 모름지기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입으로 말한 것보다 더 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아랫사람을 감동시켜 미덥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비록 부지런히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신하 가운데 끝내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교하기를, ꡒ장차 옥서(玉署)에 나아가려고 하니, 대신(大臣) 이외의 경연(經筵) 제신(諸臣)들은 물러가 본서(本署)에서 기다리라. 내가 선온(宣?)하려 한다.ꡓ하니, 이에 지사(知事) 이하의 관원들이 차례대로 먼저 물러나갔다. 하교하기를, ꡒ홍문관에서 강론할 책자는 관관(館官)이 영사(領事)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초기(草記)로 품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라.ꡓ하고, 이어 선온을 명하였다. 술을 한 순배 돌리고 난 다음 강(講)을 거둘 것을 명하였다. 통례(通禮)가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니, 각신(閣臣)이 다시 배위(拜位)로 내려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인의(引儀)가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들을 인도하여 좌우로 나누어 물러나갔다. 임금이 드디어 수레를 타고 홍문관으로 나아가니, 각신들이 합문(閤門) 밖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이어 홍문관으로 거둔 경연 제신들을 불러서 《심경(心經)》 을 강하였다. 본관(本館)에서 《심경》을 진강(進講)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경연 제신들에게 전상(殿上)으로 올라올 것을 명하였다. 영사(領事) 이하의 관원들이 서계(西階)로 올라가서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영사 서명선(徐命善)․이휘지(李徽之), 지사(知事) 정상순(鄭尙淳)․김익(金?), 동지사 이명식(李命植)․정창성(鄭昌聖), 참찬관 이갑(李?)․서유방(徐有防)․신응현(申應顯)․조시위(趙時偉)․김우진(金宇鎭)․정지검(鄭志儉), 시강관 박천형(朴天衡), 시독관 이시수(李時秀)․이정운(李鼎運)․이겸빈(李謙彬)․유맹양(柳孟養), 검토관 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권이강(權以綱)․홍문영(洪文泳)이 차례대로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각신 가운데 원임은 물러가고 시임은 청강(聽講)하도록 명하니, 제학 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 직제학 정민시(鄭民始)․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대교 정동준(鄭東浚)이 차례대로 강 위로 나아가 부복하였다. 박천형이 독주(讀奏)하여 제 4장(第四章)에 이르자 각각 글의 뜻을 진달하도록 명하였는데, 진달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ꡒ여러 신하들이 면려(勉勵)한 것은 절실(切實)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날이 이미 저물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경연에 참석한 지도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제 길게 말할 수 없다. 대저 이 편(篇)은 마음[心]에 대해 말한 글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을 만든 것으로 천고에 마음을 다스리는 요법(要法)인 것이다. 진서산(眞西山) 2642)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공이 진실로 크다. 그런데 책의 이름을 《심경》이라고 한 것은 《시경》이니 《서경》이니 한 것과는 같지 않으나, 설명이 하나의 ꡐ심(心)ꡑ 자에서 나왔으므로 드디어 ꡐ경(經)ꡑ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근사록(近思錄)》의 이름을 붙인 뜻과 비교하여 보면 차등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끝내 타당치 못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이 편(篇)은 선정(先正)이 여저(旅邸)에서 구득(求得)한 것이어서 조각난 쪽지와 떨어진 책장이 마구 뒤섞여 두서가 없는 탓으로 하나의 통일성 있는 책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문에 선정이 이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을 만년(晩年)의 공부로 삼았다. 그런데 부주(附注)와 상고한 말들이 각기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황돈(程篁墩) 2643) 의 경우는 학문이 정로(正路)를 잃어서 말에 오해된 것이 많았으니, 지난날 선정(先正)의 명쾌한 변석(辨釋)이 아니었다면 어찌 후학(後學)을 그르치는 탄식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경전(經傳)의 큰 가르침과 성현(聖賢)의 중요한 공부가 모두 이 한 편의 글에 들어 있음을 뚜렷이 고증할 수 있으니, 말세(末世)의 어둠을 밝혀주고 말학(末學)의 본보기가 되는 전칙(典則)임은 물론 위로 황왕(皇王)에서부터 아래로 필서(匹庶)2644) 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에 대한 공부를 함에 있어 이 책을 버리고 무엇을 택하겠는가? 선정이 이른바, 《근사록》에 못지않다고 한 것은 참으로 절실한 말인 것이다...(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1782 임인 / 청 건륭(乾隆) 47년) 7월 24일(기미) 3번째 기사/ 교리 권이강 등이 대간의 청을 윤허하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다/ 옥당에서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논하기를,【교리 권이강(權以綱), 부교리 윤행원(尹行元), 부수찬 이경일(李敬一)․조성진(趙城鎭)이다.】 ꡒ 홍낙성과 이휘지가 굳이 인척이라는 혐의를 들어 각자 차자를 올리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친척을 돌아보지 않아야 하는 의리를 생각지 않은 채 기꺼이 역적을 비호하는 죄를 범하였으니, 청컨대 대간의 청을 윤허하시어 국가의 기강을 엄중히 하소서.ꡓ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9장 A면/ 【영인본】 45책 322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5월 12일 (정유) 원본1156책/탈초본64책 (36/36)  1758년 乾隆(淸/高宗) 23년/ ○ 戊寅五月十二日辰時, 上御涵仁亭。到記儒生殿講入侍時, 右議政申晩, 行司直李鼎輔, 禮曹參判金陽澤, 禮曹參議成天柱, 行副司直洪重孝, 應敎尹得養, 副司果鄭光漢, 行都承旨趙明鼎, 右承旨尹東暹, 右副承旨安允行, 記事官洪?, 假注書李昌燮, 記事官鄭昌順․柳敍五, 以次進伏訖。上曰, 儒生製述, 當於此庭內設行, 注書出往, 令儒生各持試具, 仍爲率入, 可也。臣昌燮承命出來, 率諸儒生入, 諸儒行四拜禮畢。上曰, 掌議亦赴擧耶? 明鼎曰, 西齋掌議未差, 東齋掌議適下鄕云矣。鼎輔曰, 色掌四人, 雖未參到記, 來待矣。上曰, 色掌予欲見之, 注書出往召入。臣昌燮承命出召色掌入, 明鼎奏儒生擧案都數。上曰, 頗多矣。晩進伏曰, 昨日終夜勞動, 今又親臨試士, 聖體調攝, 若何? 上曰, 一樣矣。晩曰, 寢睡之節, 若何, 水刺之節, 亦若何? 上曰, 俱一樣矣。上曰, 上下色升階, 上下色掌以次升階。上曰, 各奏姓名, 可也。對曰, 洪善養․沈念祖․朴左源․權以綱也。上曰, 色掌赴擧已成前例, 許赴製述。上親命題, 時刻, 限未初。鼎輔曰, 時刻若晩, 則疊作者多矣。上曰, 此場, 豈有再水乎? 仍命御題賦油然沛然, 東暹曰, 今方開政, 而兵曹參知洪得厚, 以入直堂上, 方入侍衛, 使之出去參政, 似宜矣。上曰, 出去。得厚承命退出。上曰, 今日開政政官, 誰爲入來? 明鼎曰, 參判金致仁入來開政云矣。上命講經儒生講周易, 講儒李有行, 首入不通。上曰, 治經者如此, 昨日文官之誤讀, 無足怪矣。有頃, 上命諸臣小退, 還殿坐, 命諸臣入侍。上覽政事望筒。上曰, 金蓍耈誰也? 明鼎曰, 曾爲翰林矣。上曰, 申景祖誰也? 明鼎曰, 故判書晸之孫也。上曰, 閔百祿誰也? 明鼎曰, 百祥至親也。上曰, 金會元, 卽金得臣子孫乎? 明鼎曰, 然矣。上曰, 所謂耳淸, 在耳孔何處, 予昨以養齒竿, 刮耳門, 誤致深入, 予謂耳淸傷矣。雖不致傷, 而尙有痛?之候矣。晩曰, 然則召醫官入診, 何如? 上曰, 姑置之。晩曰, 俄承下敎, 不勝憂慮, 召諸御醫, 卽令診察, 爲宜矣。明鼎出去, 率醫官金履亨入來, 而皮世?, 則聞已出去, 故不繼率入矣。上命醫官入診。履亨入診退伏曰, 卽今耳輪內稍有浮氣, 而不至大段矣。晩曰, 若値風惡之時, 則恐有受傷之慮, 以細綿護塞, 何如? 履亨曰, 風入可畏, 特加掩塞, 宜矣。上曰, 兪。上命諸臣少退, 有頃, 還爲入侍。上曰, 近來講經, 不偶然矣。明鼎曰, 講才大抵難矣。上曰, 收券幾何, 而無曳白者乎? 鼎輔曰, 當爲七十八丈, 而收券只是六十九丈矣。講儒李邦榮講畢。上曰, 最善爲之矣。鼎輔曰, 此爲故相臣李陽元子孫, 而其兄宗榮, 亦昨年殿講及第矣。上曰, 然乎? 復召邦榮, 邦榮進伏。上曰, 汝於故相臣李陽元爲幾代孫乎? 邦榮曰, 爲七代孫矣。上曰, 與汝直赴, 勿爲比較, 卽爲出去, 可也。上問講儒郭鎭純曰, 汝於郭始徵, 爲幾寸耶? 鎭純曰, 四寸從祖矣。晩曰, 當該注書誤書講儒名字, 宜有不察之責,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重孝曰, 近來經工之明習, 蓋由聖上頻以殿講取士之致, 敎導之效, 有如是矣。上曰, 然矣。晩曰, 講經已異, 講榜則先爲書入, 何如? 上曰, 依爲之。講榜書入後, 上命以書傳比較, 純通儒生金尙權居首。上曰, 比較儒生, 則皆可爲及第者也。晩曰, 製述收券, 今若欲出榜, 則必致夜曙, 出去考之, 待朝科次, 何如? 上曰, 不必如是, 卽今考課出榜, 可也。仍命諸試官考之, 科次擢榜。上曰, 製述居首生員兪彦脩, 直赴殿試, 之次生員朴徽鎭, 進士李東泰․魚錫雨, 各給二分。出傳敎 上曰, 殿講居首幼學金尙權․李邦榮, 竝直赴殿試, 之次幼學車大修․金宗九․崔景岳․柳薰․李有白․金聲國․金再彦․李明直․金百齡․李宜泰․任煜, 竝直赴會試, 進士朴弼淳, 幼學車升鎭․金鳳仁․桂德新․白光澤․宋尙復․郭鎭純․朴聖集․趙琳, 各給二分, 幼學申暹․金履禧․具昌瑞․康文祥․李瓊?․鄭弘鎭․李鴻羽, 各給一分。出傳敎 上曰, 製述殿講直赴人, 竝使之來待, 昨年直赴李宗榮, 若在京, 則亦爲來待。出榻敎 上曰, 頃者之雨, 於牟麥雖足, 於畓穀惟潤矣。其後五日一夜微雨之後, 雨意漠然, 瞻彼田野, 予心憫然, 其或後時, 不若預焉, 初次祈雨祭, 以十五日設行事分付。出傳敎 上曰, 秋曹抄啓, 卽爲擧行事分付。出傳敎 上曰, 備局入侍, 以明日傳香後擧行。出傳敎 上曰, 昨年則初次祈雨, 幸得雨矣。晩曰, 聖上至誠如此, 雖今年, 豈無得雨之慶乎? 上曰, 夜曙矣, 退去, 可也。諸臣, 相繼退出。(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5년 10월 28일 (을사) 원본1174책/탈초본65책 (8/8)  1759년 乾隆(淸/高宗) 24년/ ○ 己卯十月二十八日辰時, 上御熙政堂。親臨, 到記儒生․四學儒生殿講入侍時, 執冊承旨兪漢蕭, 假注書洪景顔․鄭槃, 記事官金載順․申益彬, 以次進伏訖。上曰, 試官使之斯速入侍。行司直李鼎輔, 禮曹參判金陽澤, 行副司直黃景源, 副司直韓光會․金時黙, 弘文館副修撰任?․鄭光漢肅拜後, 以次進伏。上曰, 到記儒生讀書, 只今日矣。上曰, 製述儒生, 東庭入之。漢蕭曰, 講生及製述儒生有?不來者, 三四人云矣。上曰, 大司成誰也? 漢蕭曰, 兪彦民也。上曰, 入來乎? 漢蕭曰, 似領率儒生而來待矣。上命任?․鄭光漢, 書題擬唐朝十八學士謝躬臨弘文館表, 揭之。上曰, 講經儒生, 以次進講, 而講冊則以周易爲之, 諸生以次進講。上曰, 近來鄕孺, 亦能做表矣。陽澤曰, 果有能做者矣。上曰, 近來講規變通後, 果多讀書者乎? 景源曰, 今冬則儒生輩着實讀之矣。上曰, 聞闕內有呼唱聲, 高夢聖, 似入來矣。在道理卽當避嫌, 而今始爲之非矣。上曰, 以今日見之, 科規背講似難矣。光會曰, 雖有製述之善爲者, 年至四十, 則以無路應講, 自停者多云矣。上曰, 諸臣少退。以次退出, 更爲進伏。上曰, 比較時可用崇文堂故例矣。上曰, 出?之際, 通不相雜, 當該試官推考。出擧條 上命注書曰, 高夢聖避嫌持入。槃出來, 持高夢聖避嫌進伏。上命承旨讀之, 漢蕭讀訖。上曰, 高夢聖, 以惶恐莫甚四字, 作?音, 而今始爲此避嫌矣。諸生講罷。上命漢蕭書之曰, 殿講居首幼學洪龜瑞․崔慶裕, 竝直赴殿試, 之次生員李奭濟, 幼學鄭弘逵․沈?․李敏?․李亨元, 竝直赴會試, 洪夏正․李翼龍․李衡澤․金宗珏․車大彦․元修良․黃樟, 各給二分, 尹性忠․李東明․鄭鴻羽, 生員金光遇, 各給一分。上曰, 講經旣已出榜, 製述試券, 合考, 可也。合考?榜訖。上命漢蕭書之曰, 製述居首生員尹承烈, 直赴殿試, 之次進士權以綱․閔瑜, 各給二分。上命漢蕭書之曰, 太學․四學, 以通讀取材塡入事, 旣已定式, 已載續大典, 則今日親臨殿講時, 有不通者, 雖因一時不能, 不可無飭, 當該大司成, 從重推考。上命漢蕭書之曰, 飭已行, 所陳, 由於無隱, 前校理金應淳敍用, 金應淳事在無心, 而李商芝, 其雖有心, 不可事同而飭異, 一體敍用。光漢曰, 臺閣之風, 惟貴切直, 日昨憲臣之書, 首請金時粲之放釋, 則其言有足可尙, 當其登筵之時, 所當力爭, 而未嘗一言及此, 此已慨然。且伊日聖敎誨責旣多, 則今於避辭之中, 宜有自引之語, 而亦復闕焉。以此以彼, 虧損臺體甚矣。臣謂持平高夢聖, 罷職不敍, 宜矣。上曰, 依啓。出擧條 上曰, 前有崇文堂, 以便服臨, 比較之前例, 故俄者, 亦以便服爲之矣。諸臣以次退出。(www.history.go.kr 2009)

 

  권이강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7년 2월 7일 (정축) 원본1190책/탈초본66책 (6/6)  1761년 乾隆(淸/高宗) 26년/ ○ 辛巳二月初七日巳時, 上御景賢堂。編次人․各司公事堂上․北道暗行御史․儒生, 同爲入侍時, 吏曹判書金相福, 禮曹判書韓翼?, 刑曹判書具善行, 漢城判尹南泰齊, 編次人元仁孫, 北道暗行御史鄭光漢, 右承旨徐命膺, 記事官金履禧, 記注官李宗明, 記事官金德元, 以次進伏訖。上曰, 儒生來待乎? 命膺曰, 已爲來待矣。上曰, 注書出去率入, 可也。臣履禧與之偕入。上命書傳敎曰, 在外承旨許遞, 其代, 兼文學李?除授。上命儒臣, 以次讀中庸十二章。儒生以次進讀。至辛應三, 上曰, 此則曾已讀者矣, 點其名以表之, 可也。命膺, 持儒生擧案點之。至鄭述煥, 上曰, 汝出去着實讀書, 勿效浮?之習。至南宅寬, 上曰, 點之。至李翼運, 上曰, 汝入於頃日殿講否, 面目聲音頗熟矣。翼運曰, 臣入於殿講, 而其時誤讀落講矣。至徐有肯, 上曰, 汝亦出去, 着實讀之, 可也。至金晩耈, 上曰, 最善讀矣圈其名, 可也。至沈?之, 上曰, 文義之前, 當先問於汝矣。汝儒生輩, 亦以此世, 爲浮?乎, 否乎? ?之曰, 聖敎至當矣, 今世何不浮?乎? 上曰, 汝亦欲效浮?乎? ?之曰, 雖有此心, 君父之前, 豈敢以有此心仰奏乎? 上曰, 所奏質實, 點之。至許?, 上曰, 圈之。至應宗, 上曰, 點之。至台秉, 上曰, 點之。至金成國․申孟權, 上曰, 圈之。至權以綱․黃夏鎭․權晤․任瓘, 上曰, 點之。至朴徽鎭, 上曰, 此人誰也? 徽鎭曰, 故師傅臣光一之孫也。上曰, 貴矣。點之。至康烈土․鄭漢孚, 上曰, 圈之。儒生讀畢。上命書傳敎曰, 今番大成殿執事儒生召講, 意蓋深矣。康烈土․鄭漢孚․李星俊, 依朔書居首例, 金晩耈․許?․李台秉․金聲國․申孟權․任?, 依朔書之次例, 鄭夢弼․沈?之․李應宗․權以綱․李東駿․黃夏鎭․權晤․任瓘․朴徽鎭․李壽咸, 依朔書三等例施賞。上曰, 諸臣少退, 可也。編次人以下少退還入, 上命諸臣持公事以奏。翼?進前曰, 此咸興居前別將崔基大等上言, 而以興龍舊基立碑?表事爲言矣。誠如其言, 則前後爲道臣者, 宜無一任其荒弊之理矣。上曰, 更爲詳問于道臣, 狀聞後持稟。出擧條 又啓曰, 此燕岐幼學鄭熙敍, 晉州幼學鄭重權等上言也。熙敍, 自稱故相臣鄭?繼後子孫, 重權, 自稱血孫, 果是繼後則宜無血孫, 如有血孫, 則必不繼後, 彼此以此相爭矣。上曰, 事在久遠, 勿施。出擧條 又啓曰, 此京出身安厚成上言也。本以姜哥子, 早喪父母, 遺棄道路, 爲其姨母夫安廣浹所收養, 冒姓安氏, 今請復其本姓矣。上曰, 依上言許施。出擧條 又啓曰, 此陜川幼學文必龍上言也。爲其先祖勝國名臣克謙, 請建祠宇, 而曾在辛酉, 有私自創建之禁令。又於年前, 有子孫爲祖先干恩者, 一切防塞之下敎矣。上曰, 猥濫勿施。出擧條 又啓曰, 此京居魚用壯上言也。其父錫耈繼其三寸叔爲鑄之後, 乙亥後其門長, 以錫耈爲堯鏡之外孫, 呈本曹入達罷養矣。今此用壯, 敢請還繼, 事極駭然矣。上曰, 勿施, 事涉無嚴, 令攸司從重科治, 此上言之下該曹, 曰有政院, 當該承旨罷職。出擧條 泰齊曰, 此乃西部幼學朴行三上言也。其從祖景德, 買得長淵?堰, 費財修理矣。本府土豪洪燧締結衙客, 嚴囚景德, 奪取文書, 終不出給, 請令京兆更査事也。此不過田畓相訟, 而冒瀆天聽, 事極猥越矣。上曰, 此等事, 呈于京兆秋曹, 可也。何敢上言? 勿施, 令有司從重科治。出擧條 又啓曰, 此忠淸道靑陽幼學文天孝上言也。其十六代祖高麗待中克謙, 卽我穆祖大王祖?文氏之考也。墓在全羅道南平縣龍山, 子孫零替, 莫能守護, 今欲改築省掃, 則墓下有法雲菴, 而僧徒頑悍, 稱以佛堂至近之地, 使其子孫, 莫敢接足云矣。上曰, 其涉猥濫, 勿施。出擧條 又曰, 此乃慶尙道草溪幼學李興甲擊錚原情也。與陜川 文啓東, 爲山訟, 而興甲上年夏間擊錚之後, 自本府, 未及回啓, 興甲, 又於駕前訟?, 故自上以事極猥越, 爲持敎, 命還送本道, 令道臣嚴處此事, 已經處分, 而其原情, 則尙有本府, 故敢此持入矣。

 

  上曰, 其所猥濫, 勿施。出擧條 相福曰, 老職上言中忠翊衛孟仁昌, 黃州幼學趙時亮, 南部閑良金尙佑, 平壤通政崔世完, 大丘幼學許瀁, 竹山通政李信寬, 鳳山幼學金孰亨, 大興幼學申文夏, 通津僉知張世權, 南部禦侮金尙璧, 長水通政梁聖麟, 瑞興通政高夢協, 淸安幼學延致賢, 潭陽司果梁元悌, 全州幼學丁武榮, 龍岡閑良金義贊, 黃州閑良朴二進, 咸興權管尹萬柱, 洪州通政李溫瑞, 瑞興通政高夢赫, 春川 鄭龜章, 楊州朝奉李命圭等, 啓下經年, 戶籍, 尙不來納, 置之, 何如? 上曰, 勿施, 可也。出擧條 又啓曰, 此乃老職上言也。南原折衝張宇峻, 年八十八, 泗川幼學崔允謙, 年九十, 定山幼學趙萬亨, 年八十六, 海州業武李光昌年九十一, 黃澗前同知孫光錫, 年八十二, 南部通政金世萬, 年八十五, 价川通政劉進建, 年八十五, 長湍 金次益, 年八十八, 定州 朴尙契年一百一, 春川幼學金德濟, 年八十九, 遂安幼學趙義得, 年八十九, 西部閑良張世漢, 年八十五, 宜寧幼學許澣, 年八十五, 東部幼學金必弘, 年八十五, 義州折衝金成立, 年八十九, 西部閑良張起漢, 年八十七, 密陽幼學鄭萬敬, 年八十八, 西部閑良李萬起, 年八十五, 黃州閑良金厚周, 年八十六, 中部忠翊衛鄭信福, 年八十八, 楊州折衝金完碩, 年八十六, 義州折衝洪命赫, 年八十六, 西部閑良吳贊, 年八十五, 楊州幼學金重基, 年八十六, 黃州幼學朴璉, 年八十五, 瑞興通政朴遂采, 年八十六, 伊川通政鄭泰成, 年九十一, 西部別破陣金昌運, 年八十六, 西部僉知曺道泰, 年八十五, 上項諸人, 或年滿九十, 或年八十, 而曾有官銜, 或於丙子推恩, 當以年八十入參, 而未免見漏, 其所請者俱有前例, 且已考籍, 竝許施, 何如? 上曰, 一體加資, 後日政卽爲擧行。出擧條 又啓曰, 此乃老職上言也。龍宮幼學鄭弼, 年八十四, 永昌通德李敏樹, 年八十二, 鳳山幼學李震白, 年八十四, 禮山幼學朴龍采, 年八十四, 坡州幼學愼希顔, 年八十一, 平壤幼學洪漢朝, 年八十一, 安山通德金淵, 年八十二, 淸州進士盧聖重, 年八十三, 龍仁幼學姜鳳瑞, 年八十四, 上項諸人, 以士庶, 年滿八十, 竝依法典, 除一階,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啓曰, 此是石手金大輝․朴弼心․池俊起․崔尙運, 漆匠姜世珍, 毛衣匠李元春․石夢致等上言也。年滿七十後許施事, 新有定式, 而今此諸人俱未年滿, 竝勿施,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啓曰, 老職上言中, 安山通德元春先, 河陽通政金世鉉, 松禾忠義衛李燦, 鳳山 崔興瑞, 義州折衝金世元, 瑞山通政車萬重, 長淵僉知朴繼彬等戶口, 與上言年歲相左, 置之,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啓曰, 此卽樂師金益詹․金鳳來等上言也。旣有前例, 成給帖加,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啓曰, 此卽禁漏官鄭德基․朴文均․李時煌等上言也。所請有前例云矣。上曰, 猥濫, 勿施可也。出擧條 又啓曰, 此江上民人等上言也。以爲折衝金振輝, 本以孝行見稱, 且丁丑七月因山時, 募得轝士軍八十餘名, 備給巾帶與鞋, 其他數百名, 亦爲饋糧云, 而請以加資矣。若全無實狀, 則衆民, 似不敢如是張皇矣。上曰, 特爲加資。出擧條 又啓曰, 此是咸陽幼學朴師儒等上言, 而其爲邑人林芳汝, 以戊申倡義事, 請蒙贈職矣。上曰, 久遠之事, 今何請施? 勿施可也。出擧條 又啓曰, 此乃草溪幼學安世春等, 爲其邑人卞三重․三信․三謹等孝行卓異, 至請褒典矣。上曰, 復戶足矣, 棹楔之政, 此等末世, 何可輕施? 勿施可也。出擧條 又啓曰, 此乃鐵山出身金聚井, 以其父戊申軍功, 請蒙贈職之上言也。此等之事, 恐不可因其濫請而輒許矣。上曰, 旣已右職調用, 今日復請勿施。出擧條 又啓曰, 此乃黃海道幼學金宗泰上言也。觀其措語, 乃是賜牌奴婢田畓推尋事, 而誤下本曹矣。上曰, 非徒誤下, 事涉猥濫, 勿施, 此等上言, 其豈例下? 當該承旨罷職。出榻敎 又啓曰, 此卽湖南御史金應淳書啓也。自上已處分外, 八邑守令, 旣無優異之績, 又無大段疵政, 置之道臣, 則事體自別, 亦爲置, 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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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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