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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280) : 권중화(영의정부사)(1)(附 예천방문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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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화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119] 因留誼於京師 / 이 후 高麗는 禑王 6年 12月에 贊成事權仲和․禮儀判書 李海를, 다시 禑王 7年 10月에 賀正使로 門下評理 金庾를, 또 11月에는 李海를 보냈고, 禑王 8年 4月에는 贊成事 金庾․門下評理 洪尙載․知密直 金寶生․同知密直 鄭夢周․密直副使 李海․典工判書 裵仁儉을, 6月에는 周謙이, 7月에는 密直司事 柳藩이, 그리고 11月에는 周知密直司事 鄭夢周․版圖判書 趙?이, 禑王 9年 8月에는 門下贊成事 金庾․密直副使 李子庸 등이 繼續해서 派遣되었으나 遼東에서 阻止되었거나, 혹은 海路로 갔다고 해도 陳情․請諡․請襲이 모두 拒否되고 貢物이 돌려보내졌다./ <참조> / 『明史』朝鮮列傳 註 117)/ 十三年 遼東送高麗使誼至京師/ 明에서 高麗의 貢物을 물리치고 使行을 回還시키자, 禑王 6年 4月 崇敬尹 周誼를 遼東에 派遣해서 遼東都司에 咨하기를 都司에서 高麗를 위해서 洪武帝에게 辨明해 줄 것을 依賴했다. 이에 遼東都司에서는 5月 朝廷에 報告했다. 이에 帝는 遼東都指揮使에 勅書하여 高麗의 來咨는 믿지 못할 것이니 그리 알고 周誼는 逮捕해서 京師에 보내라고 嚴命했다. 이에 周誼가 7月 金陵에 이르니 明에서는 周誼를 京師에 拘留시키고, 그 通譯만을 돌려보내면서 都評議使司에 周誼의 書를 傳達케 했다. 周誼는 明帝의 勅旨대로 貢額을 지키도록(여기서는 銀 5千兩․布 5千匹로 半減되고 있다)促求하고 있다(『明實錄』洪武 13年 5月 丙辰․7月 甲午條와『高麗史』辛禑 6年 8月條 參考).(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174] 十二月 瑤遣其子奭 朝賀明年正旦 / 昌王의 親朝要請이 成就되지 못하자 恭讓王때는 世子의 朝見을 推進시켜서, 그 3年 9月 丙午에 世子 奭이 侍中 沈德符․贊成事 ?長壽․密直副使 閔開 등을 帶同하고 賀正次 明에 갔다. 表箋에서는 모두 ꡐ長男 定城君 奭ꡑ이라고 했다. 奭을 長男이라고 한 것은 恭讓王이 아직 高麗國王으로 封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간 恭讓王은 明使인 康完者篤이 다녀간 후, 그 4年 2月 辛未에 永福君 ?․贊成事 權仲和를 明에 보내어 謝恩表를 올리게 하고, 同年 6月 丁卯에는 門下評理 慶儀와 開城尹 趙仁瓊을 賀聖節․賀春秋節하게 하고, 同年 6月 丁丑에는 門下評理 金溱를 보내어 王의 誥命을 請하고자 했으나, 金溱는 使行 중 肅州에 이르러서 朝鮮이 開國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歸還하고 말았다.(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190] 成桂聞皇太子薨 遣使表慰 / 皇太子란 洪武帝의 長子인 懿文太子 標를 말한다. 洪武 元年 正月 乙亥에 洪武帝의 皇帝卽位와 같이 皇太子로 封해졌다. 그러나 洪武 25年 4月 丙子(25日)에 죽었다. 『明史』「列傳」3의 興宗 孝康皇帝條에 그 生涯가 詳細하다. 皇太子가 죽고 皇太孫이 새로 封해졌다는 消息을 朝鮮에서 接하기는 太祖 元年 8月 乙亥의 일이었다. 恭讓王 4年 2月 辛未에 謝恩使로 明에 갔던 永福君 王?와 政堂文學 權仲和가 歸還해서 傳言한 것이다. 그러나 李太祖가 마침 平州에 있었기 때문에 丁丑日에야 行在에서 群臣과 같이 皇太子의 喪服을 입고 停樂十三日․禁屠三日․停嫁娶一月․停大小祀十三日을 宣布했다. 註 189)에서 말한 計?使 趙?의 派明直前의 일이었다. 여하간 李太祖는 訃音을 接하자마자 그 元年 9月 己卯에 三司左使 李居仁을 陳慰使로 보내어 皇太子魂殿에 致祭케 했다. 『高麗史』「禮志」凶禮 上國喪에서는 恭讓王 4年 6月 己卯條에 ꡐ王聞大明皇太子薨 欲發喪 廷臣啓曰 皇太子未成爲君 不可服喪 於是輟朝三日 百官布帶ꡑ(「世家」에는 恭讓王 4年 6月 己卯條에 ꡐ趙仁瓊至西京聞皇太子薨 乃還ꡑ이라고만 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高麗史』에서는 同年 6月에, 『太祖實錄』에서는 同年 8月에 訃音의 소식이 記錄되어 있다. 아마도 前者의 경우는 非公式的인 것이고, 後者는 正式通告를 받고 陳慰使가 遣使되는 節次를 말한 것으로 안다.(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207] 二十八年 …… 釋珣(?)歸 / 賀正表文이 侮慢스럽다고 해서 柳?를 審問하자, 柳?는 表文을 撰文한 責任者가 鄭道傳이라고 했다. 이에 明에서는 鄭道傳을 卽刻 逮捕 押送하도록 朝鮮에 命했다(『明實錄』洪武 28年 12月 己酉條). 그리고 ꡐ將撰文者至 使者方歸ꡑ라고 했다(同上). 이에 朝鮮에서는 禮部의 譴責咨文을 받은 一週日 후인 2月 癸卯에 通事 郭海隆에게 表文 撰文者인 判典校寺事인 金若恒을 押送시키면서, 禮部에 移文하기를/ 小邦僻居海外 聲音言語不類中華 必憑通譯僅習文意 所學粗淺 措辭鄙陋 不能盡悉表箋體制 …… 進賀洪武二十九年正朝表文 係成均大司成 鄭擢修撰 賀東宮箋文 係判典校寺事 金若恒修撰 爲綠鄭擢見患風疾病證 不能動履 難以起遣 除已欽依 差通事 郭海隆 管送撰文人金若恒赴京 伏取聖裁(『太祖實錄』太祖 5年 2月 癸卯條)/ 라고 했다. 그런데 朝鮮에서는 前揭한 禮部에 보낸 咨文에서 본 바와 같이 鄭道傳에 대해서 言及이 없었다. 이에 明에서는 尙寶司丞 牛牛와 宦者인 王禮․宋?羅․楊帖木兒를 보내어(同年 6月 丁酉 到着) 鄭道傳과 鄭擢의 引渡를 要求했다. 明에서는 註 209)에서 後述되는 바와 같이 撰文者를 捕送받고, 約束대로 이 洪武 29年에 賀正表箋關係의 鄭擢과 鄭臣義만 釋放 歸國시켰다. 이들은 太祖 5年 11月 庚申에 돌아왔다(謝恩進表使 權仲和․進箋使 具成老는 被留).(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247] 時朝鮮納女後宮立爲妃嬪者四入 / 高麗에서 元에 進獻한 것 중에는 ?人과 處女가 있었다. ?人을 元에 進獻하기는 忠烈王때 齊國大長公主가 그의 父인 世祖에게 數名을 進獻하면서 시작되었다(『高麗史』「后妃列傳」齊國大長公主條)고 하지만, 그 후는 이 ?人에만 끝이지 않고 處女의 進獻은 明代에도 繼續되었다. 朝鮮이 建國되어서도 그랬다. 『明史』「公主列傳」에 의하면, 洪武帝의 16女 중의 含山公主는 高麗妃 韓氏의 所生으로, 洪武 27年 尹淸에 下稼해서 天順 6年 82歲로 薨하였다고 한다. 이 高麗妃 韓氏는 禑王 初年頃에 中國에 進獻된 女子였다. 또 洪武帝는 이 밖에도 ?妃라는 后妃가 있었다. 이 ?妃는 永樂帝의 生母가 아니였는가 疑問하기까지 하는 女子였다(未松保和, 『前揭書』p.476). 여하간 洪武帝는 自己만이 아니라 高麗 昌王 元年 4月頃에 皇子의 配偶者마저도 高麗에서 娶하려는 일이 있었다(未松保和, 『前揭書』p.413). 朝鮮 太祖 5年 6月 丁酉에 到着한 帝의 宣諭에서/ 聖旨曰 恁那裏來的火者俺這內園裏 到處裏行走都看來俺 這裏去的 到那王的內園裏 到處行走 看一看明日好做親家(『太祖實錄』太祖 5年 6月 丁酉條)/ 라고 하였다. 明에서는 皇女를 朝鮮에 尙하게 하여 王室間에 結婚關係를 맺어서 元代와 같이 血緣的인 因緣을 맺고자 했으나, 朝鮮에서는 이를 ꡐ實有耀於侯邦ꡑ (『陽村集』卷23)이라 하고, 이를 熟考한 후, 同年 6月 癸卯에 判門下府事 權仲和․商議中樞院事 具成老를 明에 보내어 이 請婚을 謝했다. 이에 明에서는 同年 11月 戊午에 到着된 宣諭에/ 我實要做親 我的子孫?兒多 女兒小 恁那裏?八歲 到十六歲 便是成丁 恁那里實事小 虛事多 是實呵我和?做親 恁只要至誠 不要生事(『太祖實錄』太祖 5年 11月 戊午條)/ 라 했다. 따라서 朝鮮에서는 다시 同年 同月 丁丑에 判三司事 ?長壽를 보내어 謝恩하고 鞍馬를 禮物로 傳達케 했으나, 鞍馬의 不良을 구실로 做親의 議論이 中止되었다. 이에 대한『太祖實錄』太祖 6年 4月 己亥條의 禮部의 咨文에 의하면,/ 本部欽奉聖旨 …… 實欲互爲姻親 …… 遣人至進鞍馬 以表誠意 次日驗鞍馬器獸皆? …… 朕以誠往 彼以詐應 …… 其朝鮮姻親之事 難之再議 爾禮部 移文朝鮮 罷姻親之議 …… /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做親問題는 中斷되고 말았다. 그 후 朝鮮側에서 太宗 7年 5月에 世子 ?으로 하여금 永樂帝의 皇女를 尙하고자 하는 陰謀가 參贊議政府事 趙璞․參知議政府事 鄭矩․右軍同知摠制 李玄․平江君 趙希閔․檢校漢城府尹 孔俯․刑曹參議 安魯生 등에 의해서 計劃되었다가 失敗한 일도 있었다(『太宗實錄』太宗 7年 6月 庚寅條). 從前에는 明側에서 要求했다가 中斷되었지만, 이번에는 朝鮮側에서 計劃되었다가 中止당한 것이다./ 여하간 永樂帝가 6年 4月에는 內史 黃儼 등을 보내어 後宮을 위한 女子의 選揀을 要求했다. 明에서 處女의 進獻을 要求한 最初의 일이었다(『太宗實錄』太宗 8年 4月 甲午條의 宣諭에 ꡐ聖旨云 恁去朝鮮國 和國王說 有生得好的女子 選揀幾名將來ꡑ라고 하였다). 이에 朝鮮에서는 바로 進獻色을 두고 良家閨秀 13歲~25歲에서 選取하기로 했다. 이에 黃儼 등이 處女 2~3百名을 同年 7月 乙卯․辛酉․壬申, 8月 甲午 등에, 處女를 選揀해서 同年 11月 丙辰에 權閨秀(嘉善大夫 工曹典書 權執中의 女, 18歲)․任閨秀(通訓大夫 仁寧府左司尹 任添年의 女, 17歲)․李閨秀(通德郞 恭安府判官 李文命의 女, 17歲)․呂閨秀(宣略將軍 忠佐侍衛司 中領護軍 呂貴眞의 女, 16歲)․崔閨秀(中軍副司正 崔得?의 女, 14歲)의 5名을 데리고 出發했다(『太宗實錄』關係年月日條 參考)./ 『明實錄』永樂 7年 2月 己卯條에 의하면, 權氏는 賢妃, 任氏는 順妃, 李氏는 昭儀, 呂氏는 ?好, 崔氏는 美人으로 ?立되었다. 原文에 ꡐ時朝鮮納女後宮立爲妃嬪者四人ꡑ은 이들을 말한다. 原文의 4人은 5人 중 ?立된 사람만을 말한다. 『明史』「后妃列傳」에 權賢妃傳이 있는데(ꡐ恭獻賢妃 權氏 朝鮮人永樂時朝鮮貢女充掖庭 妃與焉 姿質?粹 善吹玉繡 帝愛憐之 七年 封賢妃 命其父永均爲光祿卿 明年十月 侍帝北征凱還薨於臨城 葬?縣ꡑ), 이『明史』중의 ꡐ父永均ꡑ은 ꡐ兄永均ꡑ으로 訂正되어야 한다. 여하간 이 때 處女가 納妃되자 永樂帝는 權永均 이외에도 任添年에게 鴻?卿을, 李文命․呂貴眞에게는 光祿小卿을, 崔得霖에게는 鴻?小卿을 除授했다. 그런데 太宗 9年 5月에도 다시 納妃를 要求해 왔다. 世宗 이 후에는 納妃를 위한 貢女 이외에도 大部分 侍婢를 위한 處女要求가 계속되었다(『世宗實錄』世宗 9年 7月 丙午條 參考). 모두 그 要求에 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중화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黃海道 / 新溪 / 古跡 / 古新恩縣基 在水回坊土人猶指點其獄基 古俠溪縣基 在西里坊云而今不知處 北蘇宮 北蘇卽縣之箕達山辛禑時據道詵秘記遣權仲和等審得之與左蘇白岳山右蘇白馬山爲三蘇乃作宮闕遺基尙存又見長湍府及?德郡 管上驛 舊址/ <하권0076-1>/ 在縣東 古光山鎭基 在沙伊谷坊(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咸鏡道(關北邑誌) / 咸鏡南道咸興府邑誌 / 陵寢 / 德陵 穆祖仁文聖穆大王寢園 安陵 穆祖恭孝王后李氏寢園兩陵同原在府西北六十里加平社癸坐丁向參奉二人守護軍三十名 本陵舊在慶興府城南 太宗十年因野人之亂 同時遷于此 義陵 度祖恭毅聖度大王寢園壬坐丙向在府東二十里雲田社 參奉二人守護軍十五名 純陵 度祖敬順王后朴氏寢園壬坐丙向在府東三十里東溟社 參奉二人守護軍十五名 定陵 桓祖淵武聖桓大王陵園 和陵 懿惠王后崔氏寢園兩陵同原乙坐辛向在府東十五里州東社 參奉二人守護軍三十名五山車天輅說林曰初 太祖丁憂慶興殿僭邸未卜吉丘僧懶翁與其弟子無學來?路上指東山而言曰此興王之地汝其識之乎問答之際 太祖家?適會竊聽奔告 太祖 太祖卽促馬追及於咸關嶺下誠懇偕來占 得此地是爲 定陵 神道碑 上卽位之二年春正月辛未命臣摠若曰予以否德荷天休命造朝家邦維 祖宗積德是賴謹己追諡四代皆上王爵汝其銘我/ ...人臣鄭摠撰碑陰曰萬曆三十九年辛亥我 聖上卽位之四年也咸鏡道觀察使 韓浚謙上聞曰惟我 先王先后之陵在咸興府者?六臣承 朝命來尹滋土謹遵古事祗謁諸 陵其曰 定陵卽 桓祖淵武聖桓太王寢園其曰 和陵卽桓祖妃懿惠王后寢園俱在歸州洞一原實誕 聖祖以啓我東方億萬年無疆之休 陵下舊有神道碑臣得見父老家流傳謄本乃洪武二十六年所立純忠佐命開國功臣藝文館 春秋館學士 都平議司使 西原君 鄭摠撰門下侍郞 贊成事集賢殿大學士 成石?書門下侍郞 贊成事 集賢殿大學士 權仲和篆興 王肇基之跡 璿系本支之祥俱在於是壬辰之亂爲賊?碎今兼存者?跌斷石行道傷嗟臣額易爲新石樹之舊處庶幾表著觀?永傳不墜臣不勝區區輒經紀石材以俟 朝命謹具以聞 上下禮部覆議卽 命准行?吉改?文用舊撰命兵曹正郞 吳翊往書子石漢城府判尹 金尙容篆其額仍命臣廷龜記其梗槪于碑陰時萬曆三十九年七月日臣李廷龜奉 敎記 四至碑 恭維 太祖康獻大...(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1권/ 총서 111번째 기사/ 윤이․이초가 공양왕의 즉위에 대해 명나라에 무고하여 옥사가 일어나다 / 5월,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ꡒ예부(禮部)에서 신(臣) 등에게 이르되, ꡐ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파평군(坡平君) 윤이(尹?)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해 말하되, 「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 112) 이 왕요(王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瑤)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곧 이 시중의 인친(姻親)입니다. 요(瑤)는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모의하여 병마(兵馬)를 움직여 장차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므로, 재상(宰相)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니, 곧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임(李琳)․변안열(邊安烈)․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이종학(李種學)․이귀생(李貴生)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禹玄寶)․ 우인열(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金宗衍)․윤유린(尹有麟)․홍인계(洪仁桂)․진을서(陳乙瑞)․경보(慶補)․이인민(李仁敏) 등은 잡아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내쫓긴 재상(宰相)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天子)에게 고하고, 이내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와서 정토(征討)하게 하시오.」한다.ꡑ하면서, 이에 윤이(尹?)와 이초(李初)가 기록한 이색․조민수 등의 성명(姓名)을 내어 보이므로, 조반(趙?)이 윤이와 대변(對辨)하기를, ꡐ본국(本國) 113) 이 대국(大國)을 지성으로 섬기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ꡑ하고, 이내 윤이에게 묻기를, ꡐ그대는 벼슬이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자못 나를 알 것인데?ꡑ하니, 윤이는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ꡓ하였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 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9장 A면/ 【영인본】 1책 15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변란(變亂) / *사법-행형(行刑)/ [註 112] 이 시중(李侍中) : 이성계(李成桂). ☞ / [註 113]본국(本國) : 고려. ☞(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26일(을해) 1번째 기사/ 사은사가 돌아와 명의 황태자가 죽고 그 아들 윤문으로 황태손을 삼았음을 아뢰다/ 고려의 사은사(謝恩使)였던 영복군(永福君) 왕격(王?)과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말하였다. ꡒ황태자가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나니, 황제가 황태자의 아들 윤문(允?)을 세워 황태손(皇太孫)으로 삼았습니다.ꡓ/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5장 B면/ 【영인본】 1책 28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28일(정축) 1번째 기사/ 예부에서 보낸 상제에 따라 죽은 황태자에게 거애하다/ 임금이 평주(平州)에 있었는데, 행재소(行在所)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태자의 상복(喪服)을 입고 거애(擧哀)하였다. 서울에 있는 각 관사(官司)에서도 또한 이날에 거애하였다. 권중화(權仲和)가 예부(禮部)에서 기록해 보인 상제(喪制)를 가지고 왔는데,/ 1. 복제(服制)는, 최복(衰服) 238) 은 마포(麻布)를 써서 제조하고 또 조포(粗布)를 써서 제조하며, 건(巾)은 사모(紗帽) 위에 싸서 쓰게 하고, 띠[帶]는 뒤로 드리우게 하며, 마질대(麻?帶)는 백일 만에 벗게 하고,/ 1. 13일 동안 음악을 정지하고, 3일 동안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1개월 동안 시집가고 장가감을 정지하고, 13일 동안 대사(大祀) 239) 와 소사(小祀)를 정지하는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6장 A면/ 【영인본】 1책 28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註 238]최복(衰服) : 참최(斬衰)나 재최(齋衰)의 상복. ☞ / [註 239]대사(大祀) :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단(社稷壇)․원구단(?丘壇)의 제사. ☞(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9월 1일(기묘) 1번째 기사/ 삼사 좌사 이거인을 경사에 보내 황태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문을 올리다/ 삼사 좌사(三司左使) 이거인(李居仁)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조의(弔意)를 표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에 이르렀다. ꡒ배신(陪臣) 권중화(權仲和) 등이 남경(南京) 240) 으로부터 돌아와서 황제께서 슬퍼하신다는 말을 삼가 들었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부자(父子) 사이의 지극한 정리로 비록 슬픔은 한이 없겠사오나,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은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 진실로 또한 어기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몸을 굽혀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예제(禮制)에 따라 슬픔을 절제(節制)하시기를 바라옵니다.ꡓ이어서 백은(白銀) 2정(錠), 흑색 세마포(細麻布) 1백 필, 백색 세저포(細苧布) 1백 필을 가져가서 혼전(魂殿)에 나아가서 제사드리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A면/ 【영인본】 1책 29면/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註 240] 남경(南京) : 당시 명나라 서울. ☞(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1월 27일(갑진) 3번째 기사/ 정당문학 권중화를 보내 안태할 땅을 살피게 하다/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에서 안태(安胎) 355) 할 땅을 잡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5장 A면/ 【영인본】 1책 36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註 355]안태(安胎) : 왕자의 태(胎)를 묻는 일. ☞(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2월 13일(기미) 1번째 기사/ 조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조준(趙浚)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삼고, 김사형(金士衡)을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 상락백(上洛伯)으로 삼고, 식읍(食邑)은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은 3백 호로 하고, 권중화(權仲和)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고, 정도전(鄭道傳)과 최영지(崔永沚)를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삼고, 우인열(禹仁烈)과 유만수(柳蔓殊)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고, 정희계(鄭熙啓)를 판팔위사(判八衛事)로 삼고, 조임(趙琳)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다만 문하부(門下府)․삼사(三司)․중추원(中樞院) 정원(正員)의 2품 이상만이 도평의사사의 직책을 겸무하였는데, 이날에 비로소 문하부(門下府)와 중추원(中樞院)의 상의(商議)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대학사(大學士)․학사(學士)와 개성부(開城府) 의 판사(判事)․윤(尹)까지 모두 도평의사사의 직책을 겸무하게 하였다. 노조(盧?)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당군(定唐君)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6장 A면/ 【영인본】 1책 3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월 2일(무신) 1번째 기사/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태실의 길지와 신도 후보지의 지도를 바치다/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ꡒ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ꡓ하면서, 이에 산수 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장 A면/ 【영인본】 1책 39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월 7일(계축) 4번째 기사/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신도 후보지 계룡산 행차에 대간과 의흥 친군위가 수종하도록 준비케 하다/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명령하였다. ꡒ이달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거둥할 것이니 대성(臺省)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이 시종(侍從)하도록 하라.ꡓ/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장 A면/ 【영인본】 1책 39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2월 10일(을유) 1번째 기사/ 권중화가 신도에 들어설 종묘 등의 도면을 바치고, 서운관 관원 등에게 지형을 조사, 측량케 하다/ 삼사 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사직(社稷)․궁전(宮殿)․조시(朝市)를 만들 지세(地勢)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書雲觀)과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繩]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3장 B면/ 【영인본】 1책 40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왕실-행행(行幸)(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7월 27일(경오) 1번째 기사/ 창업에 공이 있는 우인열․김사행․윤상․권중화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 교지를 내리었다. ꡒ공(功)을 기록하고 상(賞)을 주는 것은 진실로 영전(令典)이 있으니, 하물며 창업(創業)의 초기에 있어서는 마땅히 그 공을 거론(擧論)해야 될 것이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우인열(禹仁烈)은 타고난 기품(氣品)이 온화(溫和)하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가 있었는데, 내가 출장입상(出將入相)하던 때부터 구지(舊知)로서 과궁(寡躬)에게 뜻을 두고 방위(防衛)한 공이 진실로 있었으며,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闕內)의 제도가 대강 마련되고 갖추어지지 못했는데, 전조(前朝) 성시(成時)의 궁중 의식을 일일이 들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內助)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며,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 윤상(尹祥)․이광(李匡)과 지내시부사(知內侍府事) 안거(安居) 등은 비록 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보조(補助)의 이익은 많이 있었으니 또한 공을 기록할 만하며,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성석린(成石璘) 등 8인은 신씨(辛氏) 446) 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그들을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ꡓ/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4장 A면/ 【영인본】 1책 4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13일(을묘) 1번째 기사/ 안렴사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를 회복시키다. 한상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안렴사(按廉使)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회복시켜, 양광도는 한상질(韓尙質)을, 경상도는 민개(閔開)를, 전라도는 안경공(安景恭)을, 서해도(西海道)는 유원정(柳爰廷)을,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는 유양(柳亮)을, 경기좌도(京畿左道)는 하윤(河崙)을, 우도(右道)는 이빈(李彬)을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로 삼고, 또 홍영통(洪永通)을 남양백(南陽伯)으로, 안종원(安宗源)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권중화(權仲和)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정도전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유만수(柳蔓殊)와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남은(南誾)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남재(南在)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직(李稷)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이근(李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한상경(韓尙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9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중화 [記事] : 태조실록 4권/ 탲보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2월 11일(임오) 1번째 기사/ 하윤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케 하다/ 대장군(大將軍)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윤(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ꡒ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 이 이른 바, ꡐ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ꡑ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ꡓ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효생(孝生)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호씨(胡氏) 477) 의 글이 이로부터 비로소 반행(頒行)하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 왕조의 서운관(書雲觀)에 저장된 비록 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윤에게 주어서 고열(考閱)하게 하고는 천도(遷都)할 땅을 다시 보아서 아뢰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3장 B면/ 【영인본】 1책 52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도교(道敎)/ [註 477] 호씨(胡氏) : 호순신(胡舜臣).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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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993
예천유등문화제 2013('2013 醴泉유등文化祝祭' 2日째 公演 및 볼거리 많아 떠들썩! 저녁 7時 歌手公演) [記事] : '천년의 빛과 향기-한수야 놀자'라는 슬로건으로 어제(2013년 5월 11일) 오후 7시 개막식을 가진 '2013 예천유등문화제'가 2일째인 12일에도 축제장에서는 각종 행사가 열려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이 축제장을 찾고 있다. 예천유등문화축제 2일째인 오후 2시부터는 '나름 가수다' 에 12개 읍면에서 출연한 20여명의 예비가수 후보들이 열정적인 노래솜씨를 선보여 관람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초여름 날씨가 계속된 가운데도 성공적인 축제를 위해 '예천유등문화축제 추진위원회 위원장인 청안 스님(용문사 주지)과 예총지회장, 문화원장, 각 사찰 주지 스님 및 신도회장들이 비지땀을 흘렸다. 또한, 예천불교청년회, 육바라밀 불자신행단, 대창고등학교 봉사팀 마드리, 예천여고, 경북도립대학, 예천불교정법회원과 주민 및 관람객들을 위한 각 부스 종사자 등이 성공축제를 위해 항상 웃으며 친절을 배풀었다. 특히, 영상 27~28'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도 이현준 군수와 이한성 국회의원은 축제장을 찾은 주민 및 관광객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라며 인사를 건네고 자원봉사자 및 부스 종사자들을 찾아 '수고한다'고 위로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3-05-12 오후 4:36:28)
예천군 방문(너무 신나고 즐거워요! 達成郡綜合社會福祉館 宇宙.生態體驗을 爲해 醴泉 訪問!) [記事] : 대구시 달성군종합사회복지관(송정준 관장)은 체험학습지로 이름난 예천을 찾아 우주환경 및 천문과학에 대한 흥미와 전통문화와 자연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학생, 교사, 학부모 등 40여명과 함께 2013년 5월 11일 예천을 방문했다. 달성군종합사회복지관은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 예천천문우주센터를 찾아 별자리, 천문과학, 우주체험 등을 실시했으며 이어, 오후 1시부터 농촌교육농장인 신라식물원을 방문, 먹거리 체험과 함께 식물심기, 자연 생태체험 등을 실시했다. 한편, 달성군사회복지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예천 방문은 "경북의 천문과학과 생태체험"으로 인터넷 검색 중 네티즌들이 올린 블로그의 후기 등을 보고 사전답사 후 예천으로 결정하게 됐다"며 "예천은 학생들의 체험학습지로 이름난 곳이 너무 많아 하루 일정으로는 너무 아쉽다" 며 "여름방학을 기해 다시 찾겠다"고 밝혔다.(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3-05-11 오후 4: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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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