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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284) : 권중화(영의정부사)(5)(附 예천유등문화제, 곧 TV 방송...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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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화(權仲和) : 김정준을 전농 판사로 삼다. 친왕자를 공으로, 종친을 후로, 정1품을 백으로 봉하다/ 서명: 태조실록 (태조 7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398-09-01(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9월 1일(계유) 5번째 기사/ 김정준을 전농 판사로 삼다. 친왕자를 공으로, 종친을 후로, 정1품을 백으로 봉하다/ 김정준(金廷雋)을 승진시켜 전농 판사(典農判事)로 삼았다. 비로소 친왕자(親王子)를 공(公)으로 삼고, 여러 종친을 후(侯)로 삼고, 정1품(正一品)을 백(伯)으로 삼았다. 익안공(益安公)을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로, 회안공(懷安公)을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로, 지금 전하747) 를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로, 복근(福根)을 봉녕후(奉寧侯)로, 양우(良祐)를 영안후(寧安侯)로, 이백경(李伯卿)을 상당후(上黨侯)로, 심종(沈淙)을 청원후(靑原侯)로, 이화(李和)를 판문하부사 겸 영의흥삼군부사(判門下府事兼領義興三軍府事) 의안공(義安公)으로, 심덕부(沈德符)를 영삼사사(領三司事) 청성백(靑城伯)으로, 조준(趙浚)을 좌정승 평양백(平壤伯)으로, 김사형(金士衡)을 우정승 상낙백(上洛伯)으로, 권중화(權仲和)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호조사(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로, 이지란(李之蘭)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형조사 의흥삼군부 중군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判刑曹事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 청해군(靑海君)으로, 이무(李茂)를 참찬문하부사 판예조사 의흥 삼군부 좌군 절제사(參贊門下府事判禮曹事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장사길(張思吉)을 참찬문하부사 판공조사 의흥삼군부 우군 절제사(參贊門下府事判工曹事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 영가군(永嘉君)으로, 조박(趙璞)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하윤(河崙)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이거이(李居易)를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로, 조영무(趙英茂)를 판중추원사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로, 조온(趙溫)을 중추원사 의흥삼군부 좌군 동지절제사(中樞院使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로, 김로(金輅)를 동지중추원사 의흥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同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로, 장사정(張思靖)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이천우(李天祐)를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同知中樞院事兼兵曹典書義興侍衛司上將軍知三軍府事)로, 정탁(鄭擢)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장철(張哲)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남재(南在)를 의령군(宜寧君)으로 삼고, 이문화(李文和)를 그전대로 도승지로 삼아 상서 윤(尙瑞尹)을 겸무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책 13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王室)/ [註 747]전하 : 태종(太宗). ☞//
권중화(權仲和) : 조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집현전을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다/ 서명: 정종실록 (정종 1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399-03-13(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3월 13일(갑신) 5번째 기사/ 조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집현전을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다/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集賢殿)에 모이게 하였다. 대사헌 조박(趙璞)이 상언(上言)하였다./ “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회복하여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예문 교서(藝文校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되, 문신 4품(品) 이상으로서 관각(館閣)의 직책을 띤 자는 날을 번갈아 모여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케 하소서.” 임금이 심히 허락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대사헌(大司憲) 조박(趙璞), 중추(中樞) 권근(權近)·이첨(李詹)으로 제조관(提調官)을 삼고, 문신 5품(品) 이하로 교리(校理)에 충당하고, 7품(品) 이하로 설서(說書)·정자(正字)에 충당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책 146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권중화(權仲和) : 양인의 딸과 혼인한 천민의 자식을 사수감에 소속시키다. 이에 관한 권중화의 상소문/ 서명: 태종실록 (태종 1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01-07-27(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7월 27일(갑인) 2번째 기사/ 양인의 딸과 혼인한 천민의 자식을 사수감에 소속시키다. 이에 관한 권중화의 상소문/ 천구(賤口)가 양녀(良女)에게 장가들어 낳은 자식을 사수감(司水監)에 속하게 하였으니, 몸은 양인(良人)이지만 역(役)은 천역(賤役)이기 때문이다. 예천 부원군(醴泉府院君) 권중화(權仲和)가 상소하기를, “본조(本朝)의 노비의 소생은 어미를 따르고 아비를 따르는 법이 오래 되었습니다. 흉포(凶暴)한 천구(賤口)가 많이 양녀(良女)에게 장가들어 소생은 모두 사천(私賤)이 되니, 이 때문에 천구는 날로 늘고 양민(良民)은 날로 줄어서 나라 역사에 이바지할 자가 크게 감소되오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천구가 양인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녀로서 이미 천구의 아내가 된 자는 또한 이혼하게 하고, 혹 영을 어기는 자가 있게 되면, 그 죄를 종의 주인[奴主]에게 미치게 하소서.”하여,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210면/ 【분류】 *신분-천인(賤人) / *풍속-예속(禮俗) / *재정-역(役)//
권중화(權仲和) : 내사 정승을 의정부에서 영접하다. 예천부원군 권중화가 비를 빌다/ 서명: 태종실록 (태종 5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05-07-07(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 10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7월 7일(경자) 3번째 기사/ 내사 정승을 의정부에서 영접하다. 예천부원군 권중화가 비를 빌다/ 내사(內史) 정승(鄭昇)이 그의 고향에서 돌아오니, 의정부(議政府)가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맞이하였다. 예천 부원군(醴泉府院君) 권중화(權仲和)를 명하여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었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책 331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외교-명(明)//
권중화(權仲和) : 예조에서 계절에 따라 불씨를 갈아 쓰는 것에 대해 아뢰자 의논하여 시행케 하다/ 서명: 태종실록 (태종 6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06-03-24(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3월 24일(갑인) 6번째 기사/ 예조에서 계절에 따라 불씨를 갈아 쓰는 것에 대해 아뢰자 의논하여 시행케 하다/ 개화령(改火令)을 내렸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삼가 《주례(周禮)》를 상고하면, ‘하관(夏官) 사훤(司?)이 행화(行火)630) 의 정령(政令)을 맡아 사철에 나라의 불[國火]을 변하게 하여 시질(時疾)을 구제한다.’ 하였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불씨[火]를 오래 두고 변하게 하지 아니하면, 불꽃이 빛나고 거세게 이글거려 양기[陽氣]가 정도에 지나쳐서 여질(?疾)이 생기는 까닭으로, 때에 따라 바꾸어 변하게 한다. 그 변하게 하는 법은 찬수(鑽燧)631) 하여 바꾸는 것인데, 느릅나무[楡]와 버드나무[柳]는 푸르기 때문에 봄에 불을 취하고, 살구나무[杏]와 대추나무[棗]는 붉기 때문에 여름에 취(取)하고, 계하(季夏)632) 에 이르러 토기(土氣)가 왕성하기 때문에 뽕나무[桑]와 산뽕나무[?]의 황색(黃色) 나무에서 불을 취(取)하고, 작유(?楢)는 희고 괴단(槐檀)은 검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에 각각 그 철의 방위 색[方色]에 따라 불을 취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불이라고 하는 물건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이나 상용(常用)되므로 그 성질에 따르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오래되고 법이 폐지되어 불씨를 바꾸는 법령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아니하여, 섭리(燮理)하는 도리에 미진(未盡)함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사철에 불씨를 바꾸는 영(令)을 내려, 경중(京中)에는 병조(兵曹)에서, 외방(外方)에는 수령들이 매양 사철의 입절(入節)633) 하는 날과 계하(季夏) 토왕일(土旺日)634) 에 각각 그나무를 문질러, 그 철의 불씨로 바꾸어 음식을 끓이는 데 사용하면 음양(陰陽)의 절후가 순조롭고, 역질(疫疾)의 재앙이 없어져서, 섭리(燮理)하여 조화(調和)하는 일이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가 내게 이르기를, ‘사철에 불씨를 바꾸는 것은 예전에 그 제도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옛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여, 이 때문에 화재(火災)가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내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있다.”하고 드디어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책 352면/【분류】 *풍속-풍속(風俗) / *역사-고사(故事)/ [註 630]행화(行火) : 절기(節氣)에 따라 불씨를 바꾸는 일. 봄에는 느릅나무·버드나무에서, 여름에는 살구나무·대추나무에서, 가을 겨울에는 작유(?楢)·괴단(槐檀)에서 불씨를 얻었음. ☞/ [註 631]찬수(鑽燧) : 나무를 문질러 부벼 불을 일으킴. ☞/ [註 632]계하(季夏) : 음력 6월. ☞/ [註 633]입절(入節) : 입춘·입하·입추·입동. ☞/ [註 634]토왕일(土旺日) : 음양(陰陽)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음력 6월에 토기(土氣)가 왕성한 날. 대개 입추(立秋) 전 18일 동안을 말함. ☞//
권중화(權仲和) :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서명: 태종실록 (태종 8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08-11-23(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23일(정묘) 1번째 기사/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치사(致仕)한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중화(仲和)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고려(高麗)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아들이다. 지정(至正) 계사년 을과(乙科) 제2인에 올라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親舊)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문하(門下)에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恬靜)1365) 자수(自守)1366) 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뒤에 기년(耆年)·숙덕(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제수하고 예천백(醴泉伯)을 봉하여, 본관(本官)1367) 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醫藥)·지리(地理)·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1368) 과 팔분(八分)1369) 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蝨]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제(弔祭)하였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권방위(權邦緯)이다./【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책 464면/ 【분류】 *인물(人物)/ [註 1365]염정(恬靜) :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함. ☞/ [註 1366]자수(自守) : 행실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 ☞/ [註 1367]본관(本官) : 판문하부사를 말함. ☞/ [註 1368]대전(大篆) : 한자(漢字) 서체(書體)의 하나.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 특색은 번잡(繁雜)하고 수식(修飾)을 주로 한 점임. ☞ / [註 1369]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만든 한자(漢字)의 서체(書體). 한(漢)나라 채옹(蔡邕)이 처음 만들었다고 함. ☞//
권중화(權仲和) : 술을 가지고 박 집의(朴執義)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용부(庸夫) 정당공(政堂公)(용부(庸夫) 정당공(政堂公)은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권중화(權仲和)를 가리킨다. 그는 권한공(權漢功)의 아들로서 자는 용부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이 마침 조정에서 퇴청하여 집에 있으므로, 흔연히 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짓다./ 서명: 牧隱集/ 저자: 이색(李穡)/ 분류: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제공: 한국고전번역원/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5권/ 시(詩)/ 술을 가지고 박 집의(朴執義)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용부(庸夫) 정당공(政堂公)이 마침 조정에서 퇴청하여 집에 있으므로, 흔연히 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짓다.// 술병 들고 옛 동료 방문했다 못 만났더니 / 携壺不遇舊同僚/ 문학 선생이 마침 퇴조하여 집에 있구려 / 文學先生適退朝/ 반쯤 취하니 되레 마음은 걱정이 생기고 / 半醉却敎心耿耿/ 혼자 놀 땐 까칠한 귀밑털을 탄식도 하네 / 獨游堪歎?蕭蕭/ 새봄의 도성 거리를 거닌 지 얼마 안 되어 / 新春紫陌行無幾/ 지는 해에 현릉을 다시 멀리 바라보노라 / 落日玄陵望更遙/ 잔 가득 술 부어 창자의 열을 씻으려노니 / 滿酌欲?腸內熱/ 이승에서 어떻게 다시 요 임금을 만날쏜가 / 此生安得再逢堯// [주C-001]용부(庸夫) 정당공(政堂公) :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권중화(權仲和)를 가리킨다. 그는 권한공(權漢功)의 아들로서 자는 용부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권중화(權仲和) : 예천군(醴泉君)의 자손들이 용부(庸夫)(용부(庸夫)는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의 서자(庶子)인 권중화(權仲和)의 자이다.) 사재(四宰)의 금릉(金陵) 행차를 위해 돈을 갹출하면서 유독 나는 가난하다 하여 돈을 내지 못하게 하고, 또 나는 용부의 동년으로 장원(壯元)이라 하여 특별히 그 자리에 배석하도록 하였다. 이 자리에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광평 시중(廣平侍中)을 초대하여 함께 있었는데, 밤중에 이르러 두 시중은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더 머물러서 서로 바싹 다가앉아서 매우 즐겁게 놀았는데, 두 아들이 나의 많이 취한 모습을 보고는 나를 부축하여 나왔다. 다음 날 해가 높이 올라온 뒤에야 일어나서 기록하여 가장(歌章)을 만들어 사재령(四宰令) 저하(邸下)께 바치면서 한번 웃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명: 牧隱集/ 저자: 이색(李穡)/ 분류: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제공: 한국고전번역원/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6권/ 시(詩)// 일재의 내외손은 구름처럼 많기도 한데 / 一齋內外孫如雲/ 문무에 다 능하다고 세상이 칭하거니와 / 世稱好武仍能文/ 용부 선생은 그중에서도 우뚝 뛰어나 / 庸夫先生更拔萃/ 멀리 중국에 놀아 고결한 덕행 남기었고 / 遠游中國留淸芬/ 현릉으로부터 금상까지 알아줌을 입어 / 遇知玄陵逮今上/ 묘당에 주선하며 성군들을 협찬하였네 / 周旋廟堂贊華勛/ 금릉에서 조서 내려 세공을 독촉해오자 / 金陵降詔責歲貢/ 선생이 명 받들고 천자께 조회를 가는데 / 先生將命朝大君/ 아국은 땅이 척박해 다 마련할 수 없어 / 我邦地薄辦不得/ 말은 천 필 절반이요 금은 백 근 뿐이라 / 馬半千匹金百斤/ 부로들이 조금 봐달라고 애원을 하여라 / 父老哀訴願少貸/ 입으로 말하면서 몹시 애간장을 태우네 / 言出于口心?熏/ 학이 구고에서 울면 밖에 소리 들리나니 / 鶴鳴九皐聲在外/ 아득한 하늘은 듣지 못한다 누가 말하랴 / 誰謂杳杳天無聞/ 성명한 천자가 우릴 멀리 버리지 않으사 / 天子聖明不遐遺/ 거울로 비춰 보듯 유훈을 응당 분간하리 / 如鑑照物分?薰/ 선생은 말이 간명해 사리 절로 분명하니 / 先生辭簡理自明/ 의심만 풀 뿐 아니라 분란도 해결할걸세 / 匪徒析疑堪解紛/ 양고기 삶고 술 따라 공에게 축수 드리니 / 烹羊酌酒爲公壽/ 고당의 백발 노모께선 마냥 기뻐하면서 / 高堂鶴髮心欣欣/ 내 아이가 표문 받들고 천자께 조회하고 / 我兒奉□近耿光/ 돌아와선 동해 가에 태평을 선포할 텐데 / 歸布太平東海?/ 내 늙었지만 다행히 직접 보게 되었으니 / 我雖老矣幸目覩/ 만족하고 즐거움을 무어라 말할꼬 하네 / 足矣樂矣何云云/ 자손들 일어나 춤추고 풍악 소리 들렐 제 / 子孫起舞簫鼓沸/ 곡성군과 광평군 또한 약간 거나하였고 / 曲城廣平亦微?/ 서로 일어나 술 따르며 화기 융융한 속에 / 迭起行酒和氣融/ 촛불은 반쯤 타고 때는 한밤중에 이르러 / 燭焰半銷淸夜分/ 장자가 먼저 나가자 내 또한 이어 나오니 / 長者□□我亦出/ 코에 스며든 향내는 아직도 농후하였고 / 香塵入鼻猶??/ 산을 높이 올라서도 풍악 소리 들리자 / 登山已高聞樂音/ 늙은이가 자리 먼저 떠난 게 후회되었네 / 心悔老物先離?/ 안씨 따라서 나라 다스림을 묻고플 뿐 / 曾從顔氏問爲邦/ 자로의 삼군 거느리는 건 원치 않노라 / 不願子路行三軍/ 더구나 지금은 중국에 성인이 나왔으니 / 況今中國聖人出/ 폐백은 부족하나 정성으로 대신해야 하리 / 雖乏玄黃當獻芹/ 야차로 보내 주려고 이 말을 쓰노라니 / 欲書此語贈野次/ 적적한 남쪽 창엔 향 연기가 피어오르네 / 南窓寂寂淸香焚//
[주C-001]용부(庸夫) : 용부는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의 서자(庶子)인 권중화(權仲和)의 자이다./ [주D-001]일재(一齋) : 예천부원군 권한공의 호이다./ [주D-002]학(鶴)이 …… 말하랴 : 구고(九皐)의 고는 물웅덩이로서 아홉 웅덩이라 함은 매우 깊고 먼 곳을 의미하는데,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울거든, 소리가 하늘에 들리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유훈(?薰) : 유는 악취(惡臭)가 나는 풀이고, 훈은 향초(香草)이므로, 전하여 선악(善惡), 현우(賢愚)에 비유한다./ [주D-004]안씨(顔氏) …… 않노라 : 안연(顔淵)이 일찍이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하나라의 시력을 쓰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복을 착용하고, 음악은 소무를 써야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하였고, 자로(子路)가 일찍이 묻기를 “부자께서 삼군을 거느리시게 된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子行三軍則誰與]”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범을 맨손으로 잡으려 하고,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려다가 죽어도 뉘우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일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계책 쓰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라야 한다.[暴虎憑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무력(武力)보다는 평화적인 방도를 추구하는 뜻에서 한 말이다. 《論語 述而, 衛靈公》//
권중화(權仲和) : 용부(容夫),동고(東皐),문절(文節)/ 구분: 한국역대인물자료/ 날짜: 1322/ 분류: 인물 > 한국역대인물자료/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권중화(權仲和)/ [요약정보]/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안동(安東)/ 성 권(權)/ 자 용부(容夫)/ 호 동고(東皐)/ 시호 문절(文節)/ 성별 남/ 생년 1322/ 연령 87/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의료인/ [상세내용]/ 권중화(權仲和)에 대하여/ 1322(충숙왕 9)∼1408(태종 8).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의료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 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하여 조선 초에 고려 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으며,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하여 의약·지리·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朝鮮金石攷, 槿域書畵徵, 國朝人物志,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권중화[權仲和] : 문신인 권중화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용부 호는 동고였다. 32세 때인 고려 공민왕 2년(1353)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왕명을 전하는 벼슬인 승지에 해당하는 우·좌부대언을 거쳐 고려 후기 몽고 간섭기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인 밀직사의 정삼품 관직, 지신사로서 관리를 뽑는 일을 맡았다. 또한 56세 때인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던 중서문하성의 종이품 벼슬인 정당문학의 신분으로 과거의 최종시험인 예부시의 시험관이 되었다. 이밖에도 71세 때인 고려 공양왕 3년(1392)에는 중국에 보내는 사신인 보은사로 명에 파견되었다가 왕조가 바뀐 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의약에도 정통하여 고려 말기에 유행한 의학서인 삼화자향약방을 보충하는 성격의 향약간이방을 서찬 등과 편집하였으며, 78세 때인 정종 1년(1399)에는 한상경과 신편집성마우이방을 새로 편집하였다. 권중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태조실록 등에서 볼 수 있다.(daum 2010)
권중화(權仲和) :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학자(1322~1408).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事)를 지냈고 고사(故事)·의학·지리·복서(卜筮) 따위에 통달하였으며,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에 《향약간이방》이 있다.(daum 2010)
권중화 : 安東權門(안동권문)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 생몰년 : 1322-1408, 시대 : 고려, 조선,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의료인/ 권중화(權仲和)에 대하여 : 권중화(權仲和) 1322(충숙왕 9)∼1408(태종 8).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의료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 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하여 조선 초에 고려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으며,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하여 의약·지리·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朝鮮金石攷, 槿域書畵徵, 國朝人物志,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申解淳〉(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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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유등문화제, 곧 TV 방송...축하합니다.
예천유등문화제 2013(2日間 開催된 醴泉유등文化祭 tv로 다시 볼 수 있다 : 17日 13時 58分 아이넷放送, 17日 21時 佛敎tv, 20日 午後 6時 30分 安東mbc全國時代 放映) [記事] : 2013년 5월 11일부터 2일간 한천체육공원에서 열린 예천유등문화제 및 제5회 목련음악회가 5월 17일 오후 1시 58분에 아이넷방송을 통해 방영되며 5월 17일 저녁 9시 불교tv에도 방영된다. 또한 5월 20일 오후 6시 20분 안동mbc 전국시대에도 2013 예천유등문화제가 방영된다. 이날 방영될 내용은 개심사지오층석탑 1002주년 기념다례제 및 봉축법요식 장면과 제5회 목련음악회, 행사장의 풍성한 볼거리 등 행사장의 전반이 방영될 예정이다.(醴泉인터넷放送 2013-05-16 오후 1: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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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