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3293:권진(8)-권진-권진도(附예천방문998)
작성자장병창 @ 2013.05.26 06:08:29

  예천의 자랑(3293) : 권진(입향조)(8)-권진(학자)-권진도(생원)(附 예천방문 998)

---

 

  권진 [記事] : 세종실록 68권/ 세종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4월 12일(계축) 3번째 기사/ 우의정으로 치사한 권진의 졸기/ 우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한 권진(權軫)이 죽었다. 안동 사람으로 총명 민첩하고 기억력이 강하였다. 정사년에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의 권신 염흥방(廉興邦)이 질녀를 아내로 주려 하였다. 이 중매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ꡒ권세 있는 집과 연혼(連婚)하는 것이 소원이 아니다.ꡓ라고 하였다. 흥방이 모함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이 관직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것이 두어서너 해였다. 의창현(義昌縣)이 왜적의 침략을 받아 거민(居民)들이 생업을 잃었었는데, 이 현령이 되어 오래 된 폐단을 없애고 궁핍한 사람을 진휼하니, 선정(善政)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우리 태조가 그때에 시중(侍中)으로 있었는데, 말하기를, ꡒ우리 고향 전주(全州)가 백성이 많고 일이 번다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ꡓ하시고, 발탁하여 판관(判官)을 삼았더니, 부세(賦稅)가 공평하고 정치가 엄숙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성석린(成石璘)이 나가서 서도(西都)를 진무(鎭撫)하였는데 특별히 진 을 천거하여 경력(經歷)을 삼았다. 사명을 받들고 제주 에 갔는데, 제주 의 풍속이 매양 조신(朝臣)을 만나면 으레 토산물을 선사하므로, 이 주는 대로 받았다가 일이 끝난 뒤에 받았던 물건을 모두 사관에 달아 두고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나가서 수령과 감사가 되매 모두 그 직책에 알맞았고 들어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드디어 형조․호조․이조의 판서와 찬성(贊成)을 지냈고, 신해년에 우의정에 제수되고 계축년에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79세이다.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행하지 아니하고 염(斂)에는 옷 한 벌만을 썼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중지하고 조의(弔儀)와 부의를 보냈는데, 쌀․콩이 합하여 70석이고, 종이가 백 권이다.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 주고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하였으니, 은혜로써 백성을 사랑함을 문(文)이라 하고, 의로써 다스림을 경(景)이라 한다. 의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였으며, 일을 다스리는 것이 간결하고 평이하였으며, 먹는 데는 여러 가지 반찬을 겹치지 않았고, 옷은 문채있고 수놓은 것을 입지 않았으며, 거문고․비파․바둑․장기 같은 것은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고, 병이 있으면 귀신이나 부처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여 말하기를, ꡒ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으니, 제가 어떻게 나를 수요(壽夭)하게 할 수 있겠는가.ꡓ하였다. 아들 셋이 있으니 권맹경(權孟慶)․권맹도(權孟度)․권맹정(權孟貞)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4장 A면/ 【영인본】 3책 623면/ 【분류】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68권/ 세종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5월 25일(병신) 5번째 기사/ 우의정으로 치사한 권진에게 제사를 내리다/ 우의정(右議政)으로 치사(致仕)한 권진(權軫)에게 제사(祭祀)를 내렸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ꡒ기영(耆英)2446) 과 숙덕(宿德)2447) 은 국가에서 의지하여 중(重)히 여기는 바이요, 신민(臣民)의 의표(意表)이다. 의리가 이미 휴척(休戚)을 같이 하였으니, 정리가 어찌 유명(幽明)에 간격이 있으랴. 마땅히 조휼(弔恤)을 가하여 슬픔과 영광을 갖춰야 하겠도다. 오직 경(卿)은 자품(資稟)이 정민(精敏)하고, 조행(操行)이 청검(?儉)하였도다. 학문은 경사(經史)를 통하고, 식견(識見)은 기무(機務)를 통달하였도다. 일찍이 경륜(經綸)은 기국(器局)을 가지고 마침 좋은 시기를 만났도다. 열성(列聖)의 알아주심을 만나서 청화(淸華)의 벼슬을 고루 거쳤도다. 나가서 여섯 고을을 맡았으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였고, 들어와 여러 벼슬에 있으매 일이 모두 바르게 거행되었도다. 두 번이나 형옥(刑獄)을 맡았으매 세상에서 고요(皐陶) 2448) 의 명윤(明允)2449) 이라 일컬었고, 다섯 번이나 감사가 되었으매 소백(召伯) 2450) 의 순선(巡宣)2451) 을 노래하였도다. 대강(臺綱)2452) 을 떨치매 나라의 헌장(憲章)이 엄숙하게 맑아졌고, 전형(銓衡)을 맡으매 여러 어진 이가 다투어 나왔도다. 사대(四代)를 도와서 시종(始終)이 한결같이 정성스러웠도다. 빛나는 이름과 위대한 공적이 사람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켰으니, 진실로 간세(間世)의 명신이요, 여러 조정의 원로(元老)이도다.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이 큰 공(功)을 이었으매, 전대(前代)의 공업(功業)을 이을 것을 생각하니 어찌 구인(舊人)의 임용을 도모하지 않으랴. 이에 옹립하여 정승을 삼으니 진실로 구첨(具瞻)2453) 의 물망에 부합되었도다. 지난번에 쇠하고 병들었다 하여 굳이 물러가 쉴 것을 빌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좇아서 곧 일을 사절하게 하여, 거의 그 정신을 편안히 길러서 길이 귀감(龜鑑)이 되어 주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갑자기 슬픔을 가져다 주는가. 드디어 거애(擧哀)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또 은혜로써 시호(諡號)를 내리고,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박전(薄奠)을 베풀게 하노라. 영혼이 어둡지 않거든 이 한 잔을 흠향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19장 B면/ 【영인본】 3책 63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註 2446]기영(耆英) : 나이 많고 학덕 있는 사람. ☞ / [註 2447]숙덕(宿德) : 덕망을 오래 쌓은 사람. ☞ / [註 2448] 고요(皐陶) : 순(舜)임금의 신하로서 법리(法理)에 통달하여 법을 세워 형벌을 제정하고 옥을 만들었음. ☞ / [註 2449]명윤(明允) : 밝게 다스림. ☞ / [註 2450] 소백(召伯) : 주나라 때의 사람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음. ☞ / [註 2451]순선(巡宣) : 돌며 살핌. ☞ / [註 2452]대강(臺綱) : 어사대의 기강. ☞ / [註 2453]구첨(具瞻) : 여러 사람이 함께 우러러 봄. ☞(www.history.go.kr 2009)

 

  권진(權軫) : 1352(공민왕 6) ∼ 1435(세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독수와이며 아버지는 감찰규정 희정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377년(우왕 3)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촉망을 받았다. 당시 권세가인 염흥방이 자기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고자 했으나 권세가의 혼인하기를 거절하여 염흥방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 뒤 연해안 지방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의창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선정을 펴니 당시 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발탁하여 전주판관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 성석린이 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하여 경력으로 삼았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문하부 직문하를 거쳐 지합주사가 되었다. 1402년(태종 1) 지형조사에 이어 우사간대부를 지내고 1406년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폈다. 청렴함이 알려져 이듬해 대사헌에 발탁 되었으며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413년 충주목사를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17년 형조·호조·이조 판서를 지냈다. 1426년(세종 8) 찬성이 되었으며 1430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형률의 잘못 적용으로 백성 10여명이 강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33년에는 겸판이조사 재직 때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세종 때 정인지 등과 함께 목조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였으며 의례상정소의 제조가 되어 악률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경이다.(daum 2010)

 

  권진 : 軍器寺副正 (諱)云侯의 처남(妻男)-右議政 文景公 獨樹窩 권진(權軫)의 家系/ 2006.05.12/ ...戶長) 좌윤(佐尹)을 지낸 권지정(權至正)을 파조(派祖)로 한다. 조선 세종(世宗)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권진(權軫). 단종(端宗)때 충신 권산해(權山海) 등이 있다. 세거지는 경주 국동. 비안 석정. 감천. 석남이다. ◆ 권진(權 軫.../ http://cafe.daum.net/jinsunglee/ 진성이씨 후손들이여!(daum 2010)

 

  권진 : 7세조 전농정공 휘득우(典農正公 諱得雨)/ 2010.03.29/ ...참판 수증(壽增)이 고쳐 세우고 표문을 썼다. 1남 2녀를 낳으시니 아드님은 혁(革)이고, 따님(즉 사위) 권진 ( 權軫 )은 안동인으로,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여, 조선조에서 영의정을 하고, 시호가 문경(文景)이다. 손인유(孫仁裕)는.../ http://cafe.daum.net/adkimhhyuammunjeong/ 安東金氏 休菴公派 文貞公 門中(daum 2010)

 

  권진 : 광주안씨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 1344∼1421)/ 2010.03.24/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태종8년(1408) 1월 27일 ○慶尙道都觀察使安省, 以父病辭, 以權軫代之。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안성(安省)이 아비의 병(病)으로 사직(辭職)하니, 권진(權軫)으로 대신하였다. 태종11년(1411) 6월.../ http://cafe.daum.net/anssi-history/ 안씨역사고증(daum 2010)

 

  권진 : 600년 전으로 시간여행 아산 맹사성 고택(배방읍 중리)/ 2010.02.28/ ...맹유(孟裕), 맹희도(孟稀道), 맹사성의 위패를 모셨고, 구괴정(九槐亭)에는 세종때 황희(黃喜), 맹사성, 권진(權軫) 등 3정승이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그 중 2그루만이 남아 있다.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http://blog.daum.net/11757/ 비단장수 왕서방 이야기(daum 2010)

 

  권진 : 독수와권진.hwp/ 권진 (權軫)/ 1357-1435 (공민왕6-세종17) 號: 獨樹窩·敬齋,  本貫: 安東, 父: 希正, 母: 彦陽 金氏./ 권진은 1377년(우왕 3)에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촉망을 받았으나 당시 권세가인 廉興邦(?-1388)과의 혼사를 거부하여 미움을 받아 여러 해 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뒤 義昌縣令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당시 侍中이었던 李成桂에게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왔다. 1398년(태조 7) 成石璘(1338-1423)이 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하여 經歷으로 삼았으며 定宗이 즉위하자 문하부 직문하가 되었고 태종대에는 지형조사, 우사간대부,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호조·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1431년(세종 13)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형률을 잘못 적용하여 무고한 백성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는 탄핵을 받았고, 사람을 잘못 천거하였다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세종 때 鄭麟趾(1396-1478) 등과 함께 이성계의 고조인 穆祖에서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였으며,  儀禮詳定所의 提調가 되어 樂律을 만드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文景이다.(daum 2010)

 

  권진 : 칠원부원군 윤자당 선조에 대한 기록/ 2010.01.04/ ...13리에 있다. 정창손(鄭昌孫) 묘(墓) 주 서쪽 14리에 있다. 오사충(吳思忠) 묘(墓) 주 북쪽 11리에 있다. 권진(權軫) 묘(墓) 주 동쪽 20리에 있다. 맹사성(孟思誠) 묘(墓) 주 남쪽 30리에 있다. 유창(劉敞) 묘(墓) 주 북쪽 10리에.../ http://blog.daum.net/bendy0201/ 송원의 쉼터(daum 2010)

 

  권진 : 윤저 선조의 기록/ 2010.01.05/ ...납부하지 않았다가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폄직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조박(趙璞)이 지합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기를, "이거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趙浚)의 말을 믿었던 것을 후회한다.' 하기에, 무슨.../ http://blog.daum.net/bendy0201/ 송원의 쉼터(daum 2010)

 

  권진 : 안동 길안 묵계서원 보백당 종택... (신)안동김씨[정헌공파(보백당파,묵계파)]/ 2010.03.16/ ...감찰규정 권희정의 사위로 우의정 권진(權軫,1357-1435)과 처남매부 (부)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제평공 권맹손(權孟孫)과 사돈간 (아들)김극인- 영릉참봉 (아들)김극의- 진사 (아들)김극예- 생원 ......(daum 2010)

 

  권진 : 수원백씨에 대해 알려 주세요/ 2008.02.28/ 세종 36권 9년 5월 6(癸巳)일 백언이 부친의 묘에 성묘하러 감에, 창성이 한강까지 배웅하고 찬성 권진(權軫), 호조판서 안순(安純) , 좌대언 김맹성(金孟誠)을 명하여 한강루(漢江樓)에서 위로하여 보냈다. 10. 세종 36권 9년...(daum 2010)

 

  권진 : 지역유래 - 광주 남종면 유래/ 2004.11.12/ ...文忠公) 김석주(金錫胄)의 묘가 있으며, 삼성리산 42에는 朝鮮 世宗代의 文臣으로 刑曹와 吏曹判書를 역임한 文景公 權軫의 묘와 삼성리산 60에는 世宗代의 문신이고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盧思愼)의 아버지이며, 世宗의 妹夫인...(daum 2010)

 

  권진(權軫) : 호 독수와(獨樹窩), 시호 문경(文景), 생졸년 1357 (공민왕 6) - 1435 (세종 17),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안동(安東),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고려문과] 우왕(禑王) 3년 (1377) 정사(丁巳) 우왕 3년 정사방(禑王 三年 丁巳榜)/ [상세내용] 권진(權軫){2}에 대하여 : 1357년(공민왕 6)∼1435년(세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 아버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377년(우왕 3)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촉망을 받았다. 당시 권세가인 염흥방(廉興邦)이 자기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고자 했으나, 권세가와 혼인하기를 거절하여 염흥방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 뒤 연해안지방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의창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선정을 펴니,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이성계(李成桂)가 발탁하여 전주판관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 성석린(成石璘)이 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하여 경력(經歷)으로 삼았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문하부 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지내고, 1406년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폈다. 청렴함이 알려져 이듬해 대사헌에 발탁되었으며,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413년 충주목사를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17년 형조·호조·이조 판서를 지냈다. 1426년(세종 8)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1430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형률의 잘못 적용으로 백성 10여명이 강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33년에는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재직 때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목조(穆祖)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였으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어 악률(樂律)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daum 2010)

 

  권진(權軫) : [고려문과] 우왕(禑王) 3년 (1377) 정사(丁巳) 우왕 3년 정사방(禑王 三年 丁巳榜)/ [인적사항] 시호 문경(文景), 본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좌상(左相)/ [가족사항] [부] 성명 : 권희정(權希正), [조부] 성명 : 권용일(權用一) [증조부] 성명 : 권혁(權奕), [외조부] 성명 : 김기(金器), [처부] 성명 : 송권(宋權)/ [출전]《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daum 2010)

 

  권진 :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내가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세종은 종부법 개정 논의의 물꼬를 텄다. 그러자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허조(許稠) 등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종모법 환원을 주장했다.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 http://blog.joins.com(daum 2010)

 

  권진 : 맹사성 고택 (孟思誠 古宅)/ :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맹사성[1360(공민왕 9)∼1418(세종 20)]은 조선시대 3대 정승(黃喜, 孟思誠, 權軫)의 한사람이다. 호(號)는 일명(日明) 또는 고불(古佛)이라 하고,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 명장 최영(崔瑩)의.../ http://blog.joins.com(daum 2010)

 

  권진(權軫) [專門資料] : 관련인물 :독수와(獨樹窩)|희정(希正)|염흥방(廉興邦)|염흥방|이성계(李成桂)|성석린(成石璘)|정종|세종|정인지(鄭麟趾)|목조(穆祖)|태종|문경(文景)관직 :감찰규정(監察糾正)|의창현령|시중(侍中)|전주판관.../ 2009.04.06(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世宗朝)權軫/ 安鐘和  | 2007.02.11(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敬齋先生逸集/ 朝鮮 初期의 文臣 權軫(1357-1435)의 詩文集/ 權軫(朝鮮) 著 ...  | [刊者未詳]  | 2007.02.13(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차 결성 객관 운(次結城客觀韻)/ 권진(權軫)/ 권진(權軫)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4(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敬齋先生逸集/ 權軫 저? 權正? 등 편  | 2007.01.06(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장동김씨 가문의 성장과 번영/ 김득우는 權希正의 딸을 외아들 金革의 아내로 삼았는데, 권희정은 세종조에 우의정을 지낸 權軫의 아버지였다. 더욱이 김득우는 권진을 사위로 삼음으로서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는 연혼중혼관계(겹사돈)가.../ 2009.12.20(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배소(裵素)/ 관련인물 :상공(尙恭)|권진(權軫)관직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양잠채방판관(養蠶採訪判官)|강원도도사|이조정랑관련서적 :관련지역 :조선|풍해도(豊海道) 수안(遂安)|경상도/ 2009.04.06(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조유(趙瑜){2}/ 관련인물 :옥천(玉川)|처곡(處谷)|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원길(元吉)|권진(權軫)|숭문(崇文)|철산(哲山)|숭문|철산관직 :지군사|도관찰사|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현령관련서적 :관련지역 :조선/ 2009.04.06(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찬술(纂述)과 제작(制作)/ ...循)|윤회(尹淮)|권도(權蹈)|호삼성(胡三省)|정초(鄭招)|당명황(唐明皇)|양귀비(楊貴妃)|당명황(唐明皇)|안록산(安祿山)|주왕(紂王)|권진(權軫)|목조(穆祖)|강석덕(姜碩德)|수양대군(首陽大君)|단종(端宗)|설총.../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4(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육진(六鎭)의 개척/ ...猛哥帖木兒)|박천가(朴天哥)|심도원(沈道源)|하경복(河敬復)|성달생(成達生)|황희(黃喜)|허조(許稠)|권진(權軫)|우효강(禹孝剛)|맹사성(孟思誠)|소공(召公)|김종서(金宗瑞)|이살만(李撒滿)|신상(申商)|알타리.../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4(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과거 Ⅱ 과거제도/ ...毅宗)|임유공(任裕公)|문종(文宗)|정유산(鄭惟産)|권근(權近)|하륜(河崙)|적인걸(狄仁傑)|권남(權擥)|권진(權軫)|황상(黃象)|김자(金?)|허조(許稠)|정종(定宗)|정영통(鄭永通)|유방선(柳方善)|조수(趙須)|이석형.../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4(daum 2010)

 

  권진 [專門資料] : 조준(趙浚)의 옥사/ 조준(趙浚)|이거이(李居易)|조박(趙璞)|권진(權軫)|권근(權近)|박은(朴?)|이서(李舒)|윤저(尹?)|이직(李稷)|김승주(金承?)|박석명(朴錫命)|조준|태종, 축산도, 계림부윤(鷄林府尹)|간의대부(諫議大夫)|참찬(參贊).../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4(daum 2010)

 

  권진 : 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e-Book/ 서정민 지음 |  살림 |  2008.03.06/ 책본문 : ...세종은 진노했다. 즉시 의정부와 병조의 중요 대신인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최사강崔士康을 부르고, 아울러 조말생을 불러들여 의논하였다.세종이 물었다.“야인野人들이.../ 143페이지(daum 2010)

 

  권진 : 조선시대 도자기/ e-Book/ 김영원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09.30/ 책본문 : ..衆則稍重何以處之議于三議政以啓黃喜孟思誠權軫等議曰小老之罪與狄哈盜廂庫銀器之罪無異宜加重刑”59)『世宗實錄』「地理志」南原都護府‘阿山里磁器所府北中品’; 金宗直, .../ 248페이지(daum 2010)

 

  권진 : 한국의 명문 종가/ e-Book/ 이순형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05.10/ 책본문 : ...어째서 길을 열어 줄 것을 논의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우의정 권진(權軫)이 과거에뽑히면 벼슬길이 열리어 대간(臺諫)에까지 이를 수 있으므로 과거의 응시를 허가하지 않는 .../ 174페이지(daum 2010)

 

  권진 : 한국의 성씨와 족보(한국의 탐구25)/ e-Book/ 이수건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06.10/ 책본문 : ..., 201군현향리  256弓裔  222권문세족  272, 274權文海  4, 57權允明  40權適  253權軫  288權幸  49, 116, 195權煦  195貴姓  340均如  156근친혼  99『錦城日記』74琴召驛林氏  .../ 415페이지(daum 2010)

 

  권진 : ‘충절·예절·민속의 고장’ 아산/ 2007.09.01/ 세덕사에는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인 맹유(맹사성의 조부), 맹희도(맹사성의 부), 맹사성의 위패를 모셨고, 구괴정은 ‘세종 때 명 재상 황희(黃喜)·맹사성·권진(權軫) 등 3정승이 각각 세 그루씩 9그루의 느티나무(槐木)를.../ 스토리서치 > 산이 좋아(daum 2010)

 

---

 

권진(權晋) : 1568(선조 1)-1620(광해군 12), 용문면 제곡리 작은맛질(小渚谷) 출신, 자는 경명(景明), 호는 춘우재(春雨齋), 본관은 안동, 입향조(入鄕祖) 의(檥)의 손자, 심언(審言)의 아들, 담(曇)과 욱(旭)의 동생, 상경(尙經, 贈司僕寺正)의 아버지이다. 음사(蔭仕)로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를 연찬(硏鑽)하였고 유고가 있다. 효행(孝行)이 있고, 묘는 용문면 송동(松洞)의 병향 임좌(丙向壬坐)에 있는데, 7세손 승언(昇彦)이 글을 지었다. 후손이 작은맛질에 그를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송동재(松洞齋)가 있다. 또한 작은맛질에는 그가 창건하여 임진왜란(1592)을 겪은 이후 중수하였던 안동 권씨의 사당(祠堂)이 현존하는데, "앞집 사당(祠堂)"이라고 한다.(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邑誌 1895, 醴泉郡誌 1939, 族譜, 醴泉의 金石文 2003)

 

  권진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春雨齋 安東權公(晋) 墓碣銘/ ...춘우재 안동권공(진) 묘갈명公의 휘는 晋이요, 字는 景明이요, 號는 春雨齋이니, 安東.../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권진 : 춘우재 고택 시도민속자료102호(예천군)/ 소 재 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197/ 안동 권씨(安東權氏) 복야공파조(僕射公派祖)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代孫)이며 제곡리(渚谷里) 입향조(入鄕祖)인 야옹(野翁) 권의의 손자인 참봉(參奉) 권진(權晋)(1568∼1620)이 세웠다. 집의 이름은 권진(權晋)의 호(號) 춘우재(春雨齋)에서 따온 것으로, 앞면 5칸·옆면 7칸인 ㅁ자형 안채와 앞면 3칸·옆면 2칸인 사당이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 지방의 전형적인 중·상류 민가의 유형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http://cafe.daum.net/jeonchon42/ 전촌42회(daum 2010)

 

  권진 : [스크랩] 작은 맛질의 춘우재 종가집 모습| 宗家 世居地 集姓村/ 松河 李翰邦/ 2009.04.28 20:32/ http://cafe.daum.net/yngeo/3GRh/297/ 이 고택은 야옹 권의의 손자인 참봉 춘우재 권진(1568-1620)이 1600년대 초에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7칸의 'ㅁ‘자형 안채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평면으로 배치되어 조선시대 이 지방의 전형적인 중?상류 민가의 유형을 지니고 있다. 기둥을 다룬 고급기번이 19세기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제적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안동권씨를 대표하는 상대파는 총 15개로서, 9세 6형제들의 자손 15명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작은 맛질 안동권씨는 9세 권중시(權仲時)의 차남 권수홍(權守洪)의 후손들로서, 권수홍이 고려시대 상서좌복야 상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복야공파라고 하며, 흔히 “제곡권씨”나 “맛질 권씨”로 불린다. 맛질 안동권씨의 경우 입향조 권의(權?)의 후손 가운데 문과급제자는 모두 5명이다. 권수홍에서 비롯된 복야공파의 작은 맛질 안동권씨는 11세 권자여(權子與)의 차남 권윤평(權允平)이 혈통을 잇게 된다. 이후 적장자 혈통으로 내려오다가 18세에서 차남 권곤으로 이어진다. 권곤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차남 권사빈이 외가 서원정씨의 별서가 자리하고 있던 안동 북후면 도촌리에 정착하며, 이후 둘째 아들 권벌을 따라 봉화 닭실로 옮겨 간다. 권사빈의 장남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가 바로 작은 맛질 입향조이다. 원래 작은 맛질은 문경송씨가 개척하여 살고 있었으나 후손을 두지 못해 사위인 밀양손씨에게 터전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밀양 손씨에게도 후손이 없어 사위 권의가 외손봉사를 하며 들어오게 된 것이다. 현재 문경 송씨와 밀양 손씨의 후손들은 살고 있지 않으며, 안동권씨 문중에서 밀양 손씨 외손 봉사를 하고 있다. 이처럼 권사빈의 아들 4형제는 북후면 도촌리에서 출생하여 장남 권의는 작은 맛질로, 차남 권벌은 처가 파평 윤씨의 터전인 봉화 닭실로 옮겨 갔고, 셋째 아들 권예도 닭실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현재 후손이 남아 있지 않고, 넷째 아들 권장은 맛질에 정착하여 살았으나 후손들은 전라도로 이주해 갔다고 한다. 작은 맛질 입향조 권의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장남 권심기는 부친 권의가 태어난 안동 도촌리에 자리를 잡았고, 차남 21세 권심언이 작은 맛질을 세거지로 삼았다. 따라서 작은 맛질 안동권씨는 차남 권심언의 후손들인 셈이다. 권심언은 1566년 부친 권의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야옹정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권심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22세 권시(權時 1552-1612)는 용궁전씨 부인을 얻어 작은맛질에 살면서 첨정공(僉正公) 종가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종택도 남아 있지 않다. 차남 梅堂 권욱(權旭 1556-1612)은 안동 임하면 신덕리의 의성김씨 입향조 운암 김명일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은맛질에 살고 있는 권욱의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지 못한 듯하며, 종손과 종부는 오래전에 대구로 옮겨 갔다고 한다. 마을에 남아 있는 매당종가는 고택은 없고 신축 양옥에 노 종부가 혼자 살고 있으며, 권욱이 세웠다는 함취정은 연곡고택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권욱은 예천에 자리한 봉산서원(예천권씨 권오복을 위해 건립한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셋째 아들 함계(咸溪) 권담(權曇 1558-1631)은 영순 태씨 부인을 얻어 작은 맛질에 살았으나 후손은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현재 함계 종가의 종손과 종부는 예천읍에 살고 있으며 마을에는 종택 건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에 비해 넷째 아들 春雨齋 권진(權晋 1568-1620)의 춘우재 종가는 그야말로 작은 맛질 안동 권씨를 대표하는 종가로 자리 매김 되고 있다.

 

  한편, 권심언의 딸은 안동 임하면 내앞(川前) 출신 의성김씨 남악(南嶽) 김복일의 둘째 배위로 출가하였다. 김복일의 경우 예천 용문면 죽림의 예천권씨 첫째 배위로 맞이하여 이들의 세거지였던 죽림에 정착하였다가 이후 안동권씨 둘째 배위와의 인연에 의해 금당실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금당맛질반서울’책자에서)/ 작은 맛질의 춘우재 종가는 현재 권창용씨가 종손으로 춘우재를 지키고 있다./ http://cafe.daum.net/yngeo/ 영남지리답사(daum 2010)

 

---

 

  권진도(權進道) : 1737(영조 13)-1803(순조 3), 예천 출신, 자는 희진(希進), 본관은 예천, 승지 문해(承旨文海)의 후손, 치대(致大)의 장자, 진덕(進德)의 형이다. 일찍부터 과거(科擧)를 포기하였으나 만년(晩年)에 어머니 광주 김씨(光州金氏)의 명에 의하여 응시한 결과 편모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795년(정조 19) 식년 생원시에 2등 10위로 합격하였다. 생활이 검소하고 지조가 굳고 문학에 능했다. 유집(遺集)이 있는데, 김굉이 찬(撰)하였고, 묘는 군(郡) 서쪽 불유 술좌(佛游戌坐)에 있다.(醴泉郡邑誌 1895, 醴泉郡誌 1939, 族譜, 司馬榜目)

 

  권진도(權進道) : [생원진사시] 정조(正祖) 19년 (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10위/ [인적사항] 자 희진(希晋), 생년 정사(丁巳) 1737년, 합격연령 59세, 본관 예천(醴泉), 거주지 예천(醴泉)/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권치대(權致大), 관직 : 학생(學生)/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제] 권진덕(權進德)/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권진도 : 예천권씨(醴泉權氏)/ 2010.03.04/ ...(權克泰) 권명상(權命相) 권문성(權文晟) 권성(權晟) 권오기(權五記) 권오륜(權五倫) 권오복(權五福) 권오행(權五行) 권용(權墉) 권임(權任) 권진도(權進道) 권철(權澈) 권호상(權顥相) 권후(權厚) 권희열(權希說) 권희정(權希正)/ http://blog.daum.net/ilkobstar/ 별중별(daum 2010)

 

  권진도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홍유구(洪有龜) , 조부는 홍학(洪?) 이며, 아버지는 홍문표(洪文杓) 이다. 외조부는 예천(醴泉) 권진도(權進道) , 영천(永川) 이인발(李仁發) 이며, 처부는 오천(烏川) 정산휴(鄭山休) 이다. 홍택주 는 8세 때 이미 《서경(書經.../ http://people.aks.ac.kr(daum 2010)

 

  @예천방문 998

 

  한천체육공원(榮州노회 敎役者 家族親善體育大會 열려) [記事] : 제21회 영주노회 교역자 가족 친선체육대회(대회장 김윤기 어신교회 목사)가 2013년 5월 14일 예천읍 한천체육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이현준 군수, 이한성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형식 군의원 및 각급 기관단체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으며, 예천·영주·봉화 3개 시군 8개 시찰 목사 및 전도사 가족, 신도 등 500여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먼저 지보 신암교회 임순금 전도사의 기도와 함께 풍기 성내교회 최갑도 목사의 ‘웰빙과 힐링’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대회장인 어신교회 김윤기 목사는  “오늘 하루 목회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며 “모두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노회장인 문병조 목사, 이현준 군수의 축사, 지보교회 황배엽 장로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체육대회에서는 배구, 수족구, 줄다리기, 공굴리기 등 다양한 경기로 우정과 화합을 다졌다. 열띤 접전 끝에 예남시찰과 영북시찰이 공동우승을 차지했으며, 상락교회 김무강 목사의 축도를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醴泉新聞 2013.5.23)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