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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333:김경조(2)(祝이미리,고윤환,남광희,김창호)
작성자장병창 @ 2013.07.05 06:22:12

  예천의 자랑(3333) : 김경조(대사성)(2)(附 예천동부초 이미리, 3일 기초질서문화 전국대회 동상...축하합니다/용문면 출신 고윤환, 4일 한국글로벌 CEO 선정...축하합니다/하리면 출신 남광희, <내 이름을 기어하시나요?> 펴내...축하합니다/예천 출신 김창호, 한국인 첫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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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27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4월 4일(임진) 1번째 기사/ 대사간 김경조 등이 이원의 서용이 적당하지 않음과 지방에 어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김경조(金敬祖)와 장령(掌令) 정미수(鄭眉壽)가 이원을 서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논청(論請)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ꡒ어떻게 해야 하겠는가?ꡓ하자, 특진관(特進官) 정괄(鄭?)과 지사(知事) 이극증(李克增)이 아뢰기를, ꡒ강상죄(綱常罪)를 범하였으니 우선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청풍군의 일은 과연 아뢴 바와 같다. 다만 대군(大君)은 세조조(世祖朝)부터 여러 대군들보다 갑절이나 융숭하게 후대[眷遇]하였는데, 제사를 받드는 자가 녹(祿)이 없이 제사를 지내서야 되겠는가? 죄를 범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찌 허물을 고치지 않았겠는가? 그를 서용하는 일은 대개 부인(夫人)의 상소를 인해 한 것인데 어찌 한 번의 죄 때문에 끝내 다시 쓰지 않겠는가?ꡓ하였는데, 김경조가 다시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ꡒ마땅히 짐작해서 처리하겠다.ꡓ하였다. 김경조와 정미수가 또 이심(李?) 등을 지나치게 올려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ꡒ대간(臺諫)의 말이 옳습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대간의 말이 과연 옳다. 그러나 이 일은 상언(上言)한 것으로 인하여 품계를 올린 것이 아니다. 종친이 어찌 모두 공로가 있은 후에야 자급(資級)을 올리겠는가? 의성군 등이 품계를 올리는 것이 국가에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지금 보니, 나이 많은 종친으로는 이 세 사람만한 자가 없는데, 나이 적은 자가 위에 있고 나이 많은 자가 아래에 있어서야 되겠는가?ꡓ하였다. 정미수가 또 아뢰기를, ꡒ신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민폐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대저 수령이 비록 지극히 탐욕스런 자라 하더라도 어찌 명목 없이 거두어들여 자기 것을 삼겠습니까? 반드시 공부(公賦)라 가탁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공물(貢物)을 수납할 때에 원액(元額)은 비록 작지만 징수해 거두는 것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니, 마땅히 규찰(糾察)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신이 들으니 중국에서는 어사(御史)를 여러 곳에 보내어 규찰한다고 하는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한결같이 그 법대로 팔도에 두루 어사를 보낼 수는 없으나, 우선 한 도(道)에 보내어 주군(州郡)을 순행하게 해서 백성들의 고통을 염문(廉問)20831) 하고 또 관부의 문서를 조사하게 하여 불법(不法)을 검핵(檢劾)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ꡓ하고, 김경조는 아뢰기를, ꡒ신이 근년에 상(喪)을 당해 외방에 있으면서 보니, 수령들의 불법이 자못 많았습니다. 청컨대 고례(古例)에 따라 대관(臺官)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불의(不意)에 적발하게 하면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ꡓ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심회(沈會)가 아뢰기를, ꡒ대간의 말한 바가 아주 절실합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그렇다면 대관을 팔도에 두루 보내야 하는가? 전일에 윤대(輪對)20832) 때는 추첨하여 보내자고 말하였었는데, 그후 헌부(憲府)에서 규찰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상소(上疏)하여 논했기 때문에 즉시 중지할 것을 명하였었다. 지금 만약 불의(不意)에 내보내면 되겠지만, 만약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서서히 행하면 말이 먼저 이르게 될 것이니,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반드시 적발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록 여염(閭閻)에서 묻는다 하더라도 백성 된 자가 어찌 모두 그 수령을 고해 바치겠는가?ꡓ하자,

 

  정미수가 아뢰기를, ꡒ만약 불의에 내보낸다면 수령(守令)들이 어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문서(文書)를 거두어 감추기에 여가가 없을 것인데, 그 소행이 이와 같다면 어떻게 백성들의 의표(儀表)가 되겠습니까? 어사가 몰래 길을 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어찌 왕명을 받든 사람의 대체(大體)에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이제 한 대관(臺官)을 한 도에 보내어 두로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그 문서를 조사하게 하고 민간에게 묻는다면 비록 몰래 다니지 않더라도 민폐를 규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ꡓ하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ꡒ아뢴 바가 옳다. 그러나 농삿일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어찌해야 하겠는가?ꡓ하였는데, 이극증(李克增)이 아뢰기를, ꡒ동작(東作)20833) 의 시기를 당했으니 폐단이 될까 염려됩니다.ꡓ하고, 정미수(鄭眉壽)는 아뢰기를, ꡒ어사 하나가 가는데,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설사 다소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수령들의 불법을 규찰해서 민폐를 제거해야 합니다.ꡓ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ꡒ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 어사를 보내 불시(不時)에 염문[廉訪]하였는데, 혹은 오로지 한 군만을 지정하거나, 혹은 주현(州縣)을 아울러 경유(經由)하게 하여 문부(文簿)를 수색하여 조사해서 적발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여러 고을이 소란했는데, 곳곳에서 요행히 그물을 벗어나 간사함이 날로 심했다. 어사들이 경악(經幄)의 시종(侍從)하는 반열에서 많이 나와 한 번 후관(候館)20834) 을 지나가면 여러 고을에서는 그 먼지만 바라보고도 빨리 기별하는 것이 우서(羽書)20835) 보다 빨랐는데, 이를 호성식(虎聲息)이라 하였으니 대개 어사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이따금 협기(俠氣)있는 무리들이 말을 달려 고을을 지나가는 자가 있으면 도로에서 홍문유(弘文儒)20836) 라고 지목하여 서로 선동(煽動)하였다. 조지서(趙之瑞)가 일찍이 광주(廣州)에서 염찰(廉察)을 매우 가혹하게 하였으므로, 후에 한 어사가 지정을 받아 가니, 그 고을 서리(書吏)가 수령(守令)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ꡐ조(趙)가 옵니다. 조가 옵니다.ꡑ 하고 연거푸 부르면서 깨닫지 못하고 기둥에 부딪혀 넘어졌으니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도 놀라 소란스러운 바가 이와 같았다. 정미수의 말이 있은 뒤부터 추첨하여 적발하는 법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ꡓ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227권 2장 A면/ 【영인본】 11책 461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20831]염문(廉問) : 남모르게 물어 봄. ☞ / [註 20832]윤대(輪對) : 조선조 때 문관(文官)․무관(武官)이 매달 세 차례씩 윤번(輪番)으로 돌아가면서 그 관사의 일을 보고드리던 일. 대개 6품 이상이 4인씩 한꺼번에 하였음. ☞ / [註 20833]동작(東作) : 봄의 경작(耕作). ☞ / [註 20834]후관(候館) : 망루(望樓). ☞ / [註 20835]우서(羽書) : 매우 급히 군사를 징집(徵集)하려 할 때 사용하는 깃털을 붙인 격문. ☞ / [註 20836]홍문유(弘文儒) : 홍문관 관원. ☞(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27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4월 5일(계사) 4번째 기사/ 청풍군의 음행을 치죄하기를 청하는 대사간 김경조 등의 상소문/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경조(金敬祖) 등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유문통(柳文通) 등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ꡒ정희 왕후(貞熹王后)의 상(喪) 때는 중외(中外)에서 울부짖고 통곡한 것이 마치 어버이의 상을 당한 것과 같았는데,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은 승하하신 이튿날 음란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의리로 말한다면 왕후(王后)는 한 나라의 어머니요, 정(情)으로 말한다면 이원(李源)은 왕후의 친조카인데, 슬픔을 잊고 창녀(娼女)의 집에서 잤으니 신하로서 차마 못할 일을 이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여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것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가벼운 형벌로 귀양만을 보냈다가 얼마 후에는 다시 방면하여 곧 직첩(職牒)을 주었는데, 오늘날 다시 작록(爵祿)을 더할 줄을 어찌 뜻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원을 대한 것은 후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강상에는 어떠하겠으며, 국가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또 하교하시기를, ꡐ영응 부인(永膺夫人)이 이원이 대군의 제사를 주관한다는 것으로 상언(上言)하여 직(職)을 구하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제수한다.ꡑ 하셨으니 신 등은 의혹됩니다. 이원은 종친(宗親)의 지위에 있으면서 행실이 금수(禽獸)와 같아 군모(君母)를 업신여기고 강상을 무너뜨린 것이 심했습니다. 대군의 영령(英靈)이 있다 한다면 어찌 이원이 지내는 제사를 편히 흠향(歆饗)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원이 녹(祿)을 잃으면 궁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이원은 대군의 아들로 그 부(富)를 누리고 있는데, 녹봉(祿俸)을 기다린 후에야 제사를 받들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정사(政事)란 임금의 큰 권병(權柄)이며, 어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대우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명기(名器)이니,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응 부인이 어찌 아들의 악(惡)을 두둔하여 전하의 정치에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특히 하늘에 계신 정희 왕후의 영령에게 죄를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전하에게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그 죄를 바로잡지는 못하더라도 또 어찌 굽혀서 그의 욕심을 따라 사사로운 은혜를 보이려 하십니까? 이는 전하께서 강상(綱常)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또 정권[政柄]을 잃는 것입니다. 정사가 대각(臺閣)에 있어도 오히려 불가한데, 더군다나 종척(宗戚)의 집안으로 하여금 관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강상을 무너뜨리고 악덕(惡德)한 자를 사랑하고, 정권을 잃고, 사사로운 은혜를 보인 것이니, 종묘(宗廟)를 받드는 것이 아니며, 신하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살펴보건대, 대군의 적장자(嫡長子)는 종 1품이며, 중자(衆子)는 종 2품으로 작질(爵秩)은 한정이 있는데, 이제 의성군(誼城君) 이심(李?) 등은 받은 벼슬이 이미 그 한계를 넘었으니 법에 어긋나는 바가 있습니다. 이제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을 하루아침에 아울러 자급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법을 재차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심(李?) 등은 상(喪)을 당하여 재물을 다투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어 화목하지 못한 죄를 저질렀지만, 문득 그 죄를 용서하여 이미 법을 어겼는데, 또 높은 품계를 더하니, 성명(聖明)한 조정에 관작의 외람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세 번 유념하소서.ꡓ하였는데, 상소의 끝에다 어서(御書)하기를, ꡒ이원(李源)에게 죄가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며 제사를 받드는 것이 중함도 말을 한 후에 안 것이 아니다. 죄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원이 반드시 깨우쳤을 것이기 때문에 제수하였을 뿐이다. 부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어디 있기에 그대들이 함부로 말하는가? 이심 등의 일은 이미 자세히 유시(諭示)하였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227권 4장 A면/ 【영인본】 11책 462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5월 15일(임신) 1번째 기사/ 지평 이세전 등과 흥덕사 길과 기타 사항에 대하여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地平) 이세전(李世銓)이 아뢰기를, ꡒ지금 흥덕사(興德寺)의 북쪽 길을 막으라고 명하셨는데, 신 등은 그 사유를 모르겠 습니다. 만약 사찰(寺刹)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어떻겠습니까?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그게 아니다. 지리설(地理說) 때문에 막았을 뿐이다.ꡓ하니, 이세전이 다시 아뢰기를, ꡒ유생(儒生)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은 중[僧人]이 법에 의하여 당연히 해사(該司)에 고해야겠지만 대비께서 사람을 보내 적발하셨다니, 신은 대비께서 어떤 이유로 그 사실을 알게 되셨는지 그 연유를 알고자 합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나 역시 모르는 일이다. 다만 대비께서 중관(中官)을 보내 보게 하셨을 뿐이다. 길을 막은 일은 내가 헤아려서 처리한 것이다.ꡓ하니, 이세전이 다시 아뢰기를, ꡒ신은 풍수학(風水學)은 모릅니다마는, 만약 지리설 때문에 막았다면 이현(梨峴)의 큰길은 창경궁(昌慶宮)과 더욱 가까우니 이곳을 먼저 막아야 할 것인데, 이 큰길은 그대로 두고 절 북쪽의 작은 길을 막으시니, 누군들 전하께서 사찰을 위해 하신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ꡓ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경조(金敬祖)가 아뢰기를, ꡒ신이 일찍이 판결사(判決事)가 되었을 때 무릇 노비를 가지고 서로 송사한 자들을 보니, 부모(父母)가 여러 아들들에게 노비를 나누어주었으나 문권(文卷)을 만들지 않아, 여러 아들들이 각각 따로 부리다가 자손들에게 전해 줄 때는 간활(姦猾)한 자들이 조부모(祖父母)가 나누어주지 않은 노비라 칭하고 다투어 송사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청컨대 부모가 이미 나누어 준 노비는 비록 문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손자 대에 와서 다투어 송사하는 자들은 청리(聽理)20903) 하지 않는 것으로 법을 세움이 어떻겠습니까?ꡓ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윤호(尹壕)․동지사(同知事) 이세좌(李世佐)가 아뢰기를, ꡒ이 말은 지당합니다.ꡓ하고, 도승지(都承旨) 한언(韓堰)은 아뢰기를, ꡒ이 말은 옳은 듯하나 그릅니다. 강포(强暴)한 자로 노비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자 또한 많으니, 손자 대에 와서 청리해 주지 않는다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청송관(聽訟官)이 결단해서 처결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법은 가볍게 만들 수 없다. 청송관(聽訟官)이 명확히 분별하면 될 것이지 어찌하여 꼭 법을 만들 것인가?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228권 8장 A면/ 【영인본】 11책 47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사법-재판(裁判) / *가족-가산(家産) / *신분-천인(賤人)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20903]청리(聽理) : 소송을 심리함. ☞(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5월 18일(을해) 4번째 기사/ 유순․이집․이평․김극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순(柳洵)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집(李?)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이평(李評)을 통정대부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김극검(金克儉)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한건(韓健)을 통정대부 좌승지(左承旨)로, 조극치(曹克治)를 통정대부 우승지(右承旨)로, 안호(安瑚)를 통정대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홍흥(洪興)을 통정대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박미(朴楣)를 통정대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안우건(安友騫)을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안처량(安處良)을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으로, 안윤손(安潤孫)을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박숭질(朴崇質)을 가선대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숙감(李淑?)을 통정대부 수 전라도 관찰사(守全羅道觀察使)로, 김경조(金敬祖)를 통정대부 수 황해도 관찰사(守黃海道觀察使)로, 변수(邊脩)를 절충 장군(折衝將軍)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5책 228권 10장 B면/ 【영인본】 11책 47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29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6월 4일(신묘) 1번째 기사/ 황해도 관찰사 김경조가 사조하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김경조(金敬祖)가 사조(辭朝)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229권 2장 A면/ 【영인본】 11책 48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51권/ 성종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3월 5일(신사) 8번째 기사/ 김경조와 강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경조(金敬祖)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강삼(姜參)을 봉직랑(奉直郞) 수헌납(守獻納)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8책 251권 3장 A면/ 【영인본】 12책 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53권/ 성종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5월 26일(신축) 1번째 기사/ 경연이 파하고 대사간 김경조 등과 첨절제사․만호 등의 채용과 체직에 관하여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김경조(金敬祖)가 아뢰기를, ꡒ여러 포(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는 그들의 임무가 가볍지 않은데도 북방(北方)은 더욱 무거우니, 지금부터 후에는 친히 그 재주를 시험보여서, 북방을 정벌하는 군사의 예(例)와 같이 장부에 기록하여 녹용(錄用)23500) 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또 이 무리들이 모두 내금위(內禁衛)로부터 나가서 이 직책을 맡고 있으니 임기가 차면 본위(本衛)에 환속(還屬)23501) 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싫어하니, 지금부터는 체직(遞職)된 사람은 본위(本衛)에 환속(還屬)하도록 하소서.ꡓ하였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에게 물으니, 영사(領事) 노사신(盧思愼)이 대답하기를, ꡒ첨사(僉使)와 만호(萬戶)는 병조(兵曹)에서 무예(武藝)를 시험하여 장부에 기록하고서 서용(敍用)하는 것이 준례(準例)입니다.ꡓ하고, 지평(持平) 이적(李績)은 아뢰기를, ꡒ여러 포(浦)의 첨사(僉績)와 만호(萬戶)는 다만 용렬하고 쇠모(衰耗)할 뿐 아니라 또 재예(才藝)도 없으니, 그런 까닭으로 전일에 왜구(倭寇)가 변방을 침범하여도 적(賊) 1명도 잡지 못했으니, 비록 시험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ꡓ하고, 특진관(特進官) 이철견(李鐵堅)은 아뢰기를, ꡒ본위(本衛)에 환속(還屬)시키는 것은 적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늙고 재주가 쓸모 없다면 환속(還屬)시킬 수가 없으며 무재(武才)가 사납고 용맹스러운 자는 자연히 고쳐 사험하여 환속(還屬)하게 하소서.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그것이 피인(彼人)들의 보는 바에 있어서는 신채(身彩)23502) 와 무재(武才)를 가리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용모로써 사람을 뽑을 수가 없으니, 그들을 본위(本衛)에 환속(還屬)시키는 것은 옛날의 제도를 경솔히 고칠 수가 없다. 그 재주가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 임무를 능히 감내할 만한 사람은 어찌 다만 환속(還屬)시킬 뿐이겠는가? 또한 발탁 임용해야 할 것이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253권 35장 A면/ 【영인본】 12책 4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23500]녹용(錄用) : 채용(採用). ☞ / [註 23501]환속(還屬) : 이전의 소속으로 다시 돌려보냄. ☞ / [註 23502]신채(身彩) : 사람의 신체와 풍채. ☞(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성종실록 292권/ 성종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7월 29일(을묘) 2번째 기사/ 안침․김경조․이승건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안침(安琛)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경조(金敬祖)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승건(李承健)을 봉렬 대부(奉列大夫) 수 사헌부 집의(守司憲府執義)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47책 292권 32장 B면/ 【영인본】 12책 56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경조 [記事] : 연산군일기 4권/ 연산군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3월 6일(기축) 3번째 기사/ 임광재․조익정․정경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임광재를 풍천위로 삼고, 조익정(趙益貞)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정경조(鄭敬祖)를 한성부 부윤으로, 김극뉴(金克?)를 예조 참의로, 성세명(成世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박처륜(朴處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조위(曺偉)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숙함(李叔?)을 충청도 관찰사로, 김경조(金敬祖)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2장 B면/ 【영인본】 12책 65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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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동부초 이미리, 3일 기초질서문화 전국대회 동상...축하합니다.

 

  이미리(第7回 基礎秩序文化大展 優秀作 施賞 : 醴泉東部初 이미리 學生에게 賞狀 授與) [記事] : 예천경찰서(서장 이수용)은 2013년 7월 3일 제7회 기초질서문화대전에 작품을 출품해 전국대회 동상의 영예를 얻은 예천동부초등학교 6학년 1반에 재학 중인 이미리 학생에게 경찰청장 상장 수여 및 격려를 위해 예천동부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이날 이수용 서장은 6학년 1반 학생들을 상대로 ”큰 꿈을 가지고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힘이 약한 학생들을 배려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학생이 되어라”라고 당부했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예천경찰서는 예천의 초석인 학생들을 위해 안전한 학교, 폭력 없는 학교, 깨끗한 학교환경조성에 노력하겠다고 했다.(醴泉뉴스 2013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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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면 출신 고윤환, 4일 한국글로벌 CEO 선정...축하합니다.

 

  고윤환(고윤환 聞慶市長(龍門面 出生) 大韓民國 글로벌 CEO 選定) [記事] : 취임 1년3개월을 맞은 고윤환 문경시장(용문면 출생)이 2013년 7월 4일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2013대한민국 글로벌 CEO선정식 및 출판기념회에서 글로벌 혁신경영 부문 최고경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대한민국 글로벌 CEO(최고경영자)는 불굴의 의지로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한국의 상품과 문화를 지구촌 곳곳에 알린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CEO에게 주어지는 시상으로 중앙일보, JTBC, 산업통상자원부, 포브스코리아가 주최하고 후원하는 시상으로 12개 분야 31명의 CEO를 선정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이 선정된 배경은 2012. 4. 12 시장에 취임해 소통과 참여로 변화를 주도하며 정직한 지방자치를 실천하고 있는 행정의 달인으로 문경시를 모범적인 중소도시 발전모델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인정받았다. 주요 공적으로는 도심재창조사업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농업소득배가운동과 농특산물 명품브랜드화를 통해 부자농촌건설에 박차를 가했으며 경상경비 절감과 부채 62억 조기상환 등 재정건전성을 높여 2012년 행정안전부 지방재정분석 결과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공직자가 우대받을 수 있게 인센티브 제도를 시행하여 1등 문경 건설을 위해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창조 경영의 혁신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고 시장은 대통령 소속 지역발전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위촉되어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지역 현안을 점검하고 추진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관련 정책을 심의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상에 앞서 문경시는 지난 6월 안전행정부에서 주관하는 제18회 지역경제활성화 우수사례 발표에서 문경오미자 복차산업화로 창조경제 실현이라는 주제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협조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8만 문경시민들께 감사드리며,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발전 동력을 찾아내 더욱 소통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만들어 1등 문경 건설을 위해 더욱 열심히 뛰겠다” 수상소감을 밝혔다.(醴泉인터넷放送 2013-07-04 오후 2: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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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면 출신 남광희, <내 이름을 기어하시나요?> 펴내...축하합니다.

 

  남광희(사랑 나누며 살아온 지난 歲月 담아 : 남광희(美國) 氏 八旬記念 自敍傳 <내 이름을 記憶하시나요?> 펴내) [記事] : 강성철(예천읍 `영흥철물·건재') 전 영남일보 기자의 어머니 남광희 씨가 팔순을 맞아 자서전을 썼다. 자서전(「내 이름을 기억하시나요?」)은 하리면 부초리(방골) 영양남씨 가문에서 맏딸로 태어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마을의 유일했던 여학생으로서 은풍초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 8·15 광복과 6·25 전쟁에 관한 일화도 담겼다. 특히 19세 때 한 살 아래인 삼대독자이자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남편과의 결혼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대구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남편과 부득이하게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 결혼 8년 만에 남편과의 사별한 가슴 아픈 이야기도 담았다. 장사를 하면서 4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워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 낸 세월과 시부모와의 각별한 정을 나눈 이야기도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맏딸(은희)을 도와주기 위해 1997년 미국으로 건너 가 시민권 시험을 단번에 합격한 이야기, 손자 손녀들과 나눈 사랑도 가슴을 울린다. 무엇보다 사별한 남편에게 띄우는 편지는 눈시울을 적신다. 자서전에는 평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마음을 전한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도 읽을 수 있다. `평생 당신의 안락은 생각지 않으시고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사랑과 정성으로 대하시며 항상 남에게 보탬이 되시는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맏딸 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우리 사 남매, 외삼촌을 비롯해 열 분도 넘는 식솔들이 한집에서 생활했던 어린 시절. 가게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안, 바깥일을 도맡아 하셨지요.'(장남 성철)  ‘할머니의 재미있는 입담과 음식 맛, 웬만한 세탁소보다도 훌륭한 수선과 재봉 솜씨, 어느 정도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영어교육을 받은 사람도 붙기 어렵다는 시민권 시험 한 번에 통과 등등 시작하면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게 할머니 자랑이다.’(손녀 유나)  `인생은 60부터라고 하니 할머니는 이제 20살 청춘이시네요. 그러니 늘 소녀 같은 웃음 잃지 마시고 건강 유의하세요'(손녀 유리)(醴泉新聞 2013년 07월 04일 (목) 15: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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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출신 김창호, 한국인 첫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축하합니다.

 

  김창호(韓國人 첫 히말라야 14坐 無酸素 完登 김창호 隊長) [記事] : “(성호) 어머님이 물으시더군요. ‘너 또 히말라야 갈 거지?’라고요. 제가 차마 답을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님이 그러시더군요. ‘가겠지? 그렇겠지?’” 지난 5월 20일 에베레스트(8848m) 정상을 밟아 한국인 첫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의 마침표를 찍은 김창호(44) 2013 한국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장이 2013년 7월 3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음식점에서 뒤늦은 귀국 보고회를 가졌다. 김 대장의 14좌 완등은 고(故) 박영석 대장이 2001년 첫 테이프를 끊은 뒤 한국인으로는 여섯 번째(오은선은 칸첸중가 등정 논란)이자 처음으로 산소통에 의지하지 않은 채 이룬 것이어서 각별하다. 여기에 인도 벵골만에서 갠지스강을 거슬러 156㎞를 카약으로, 콜카타에서 네팔 툼링타르까지 893㎞를 사이클로, 베이스캠프까지 162㎞를 트레킹한 뒤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무산소, 무동력, 무폐기물 등반으로 의미를 더했다. 또 하나, 예지 쿠쿠츠카(폴란드)의 7년 11개월 14일을 7년 10개월 6일로 단축시킨 최단 기간 완등이었다. 하지만 장한 행보는 하산 과정에서 운명을 달리한 서성호 대원의 비극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김 대장은 “정상에 머물렀던 2시간의 기억이 마치 오래된 영화필름처럼 뚝뚝 끊어졌다 이어지면서 1분 남짓으로만 남아 있다”고 털어놓았다. 80여일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체중이 15㎏ 정도 빠져, 베이스캠프에서 그를 만난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 기념 드림원정대의 한 대원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고 썼다. 어깨 쪽 살이 많이 빠져 실제보다 커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던 김 대장은 이제 몸은 어느 정도 추슬렀지만 5년 동안 8000m급 11개 봉우리를 함께 올랐던 서 대원이 옆에 없는, 슬픔이란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처는 채 극복되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달여가 흘렀지만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희박한 공기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가상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독백이 허허롭기만 했다. 김 대장은 “성호가 2006년 봄 북동릉(중국령 티베트)을 통해 이미 에베레스트에 올랐고 워낙 체력이 뛰어난 친구라 이내 극복할 줄 알았다”며 “이런 비극이 발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더욱이 일행은 서 대원에게 인공산소를 쓸 것을 계속 권했지만 본인이 거부했다고 전했다. 하산 도중에라도 인공산소를 쓰면 무산소 등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김 대장은 오는 8일 고인의 49재가 열리는 부산의 한 사찰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후원사인 몽벨은 부산산악연맹과 함께 고인을 추모하고 청소년들에게 탐험과 도전 정신을 고취시키는 사업을 전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장은 공기 속 산소 용존량이 30%대로 떨어지는 해발고도 8500m 이상에서 무산소 등반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2007년 5월 에베레스트 정상 공격을 하루 앞두고 오희준, 이헌조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느라 포기했다. 이때 다시 에베레스트에 도전한다면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듯 바다에서 산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했다”며 “인간의 힘만으로 고봉을 발 아래 두는 것이 초등학생 정도가 생각하는 원초적인 탐험의 의미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카약 때문에 인도의 하천법을, 사이클 때문에 인도와 네팔의 도로교통법 등을 준수하면서 탐험을 준비하느라 아주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전에 올랐던 가장 높은 봉우리가 K2(8611m)였던 만큼 에베레스트가 더 높은 240m 구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늘 두려웠다고 털어놓은 김 대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성호 추모사업에 힘을 쏟겠다”고 밝힌 그는 “이제 고봉보다 창의적 고도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어떻게 오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산소나 고정 로프, 셰르파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새로운 루트나 미답봉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산을 잘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고자 강연에도 힘을 쏟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2000년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1700여일 동안 파키스탄 히말라야 지역을 탐사했다. 1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자료를 모으고 7개 부족어의 단어를 외운 일은 유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꼼꼼히 모든 일정을 기록하는 산악인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국내 산악인들이 파키스탄 히말라야 지역을 오르기 전 그를 찾아 조언을 구한다. 집에는 산과 관련된 책만 3000권이 있다고 했다.  “후배들이 무산소 등정에 도전하겠다면 많이 생각해 보라고 권하겠다. 내가 원래부터 고산이나 거벽 등반 같은 수직 여행보다 카라코람 지역을 혼자 훑는 수평 여행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고 털어놓은 김 대장은 “파미르 고원에서 주먹만 한 별똥별이 떨어지는 장면을 바라보던 기억을 늘 떠올린다”고 읊조렸다.

 

  ■ 김창호는 누구? : ▲1969년 9월 15일 경북 예천 출생,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 입학하며 산에 입문, ▲1993년 트랑고타워로 거벽 첫 도전, ▲2000년부터 여덟 차례 나홀로 1700여일 카라코람 탐사,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으로 14좌 첫 등정, ▲2012년 5월 대학 후배와 결혼, ▲201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14좌 완등,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히말라야 카라코람 연구소장, 몽벨 자문위원, ▲2005년 월간 사람과 산 알파인 클라이머상, 2006년 대한산악연맹 대한민국 산악대상, 2007년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 2007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올해의 산악인상, 2012년 제7회 황금피켈상 아시아상(임병선 記者 서울新聞 201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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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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