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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442) : 김약구(2)-김양동-김양진(1)(附 고평리 출신 김주일,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가꾼 이야기> 펴내...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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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4년 2월 22일 (경진) 원본1277책/탈초본71책 (10/12) 1768년 乾隆(淸/高宗) 33년/ ○ 吏曹判書洪樂性進, 參議洪趾海進, 同副承旨李之晦進。以洪檢爲副修撰, 以洪良漢爲工曹參議, 以洪相聖爲吏曹佐郞, 宋翼彦爲掌樂僉正, 金若龜爲監察, 姜?福․白師殷爲典籍, 申晦爲典牲提調, 任?爲安岳郡守, 石物重修都監堂上李昌誼․黃?, 郞廳慶再觀․曺允亨。(www.history.go.kr 2009)
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10월 20일 (무진) 원본1297책/탈초본72책 (10/15) 1769년 乾隆(淸/高宗) 34년/ ○ 兵曹口傳政事, 副護軍南泰普, 副司直兪彦述, 副司果李顯祚․鄭枋․鄭恒齡․李弘稷․南鶴宗․尹在謙․南彦彧․權穎․金?․朴宗亮․成胤儉․安正仁․李宇喆․李廷烈․愼爾復․韓宗濟․李奎徽․李益普․安致宅․元啓英․李仁黙․鄭景瑞․金瑋․宋德基․李益炡․宋淳明․李思質․李命賢․金仁大․徐日修․金漢房․朴載天․鄭游良․尹心宰․金光遂․安商楫․李蓍延․吳道源․金時訥․李龜應․趙恒彦․申?․李龜老․辛宅寧․宋龜明․李明吾․尹得宣․尹得勳․呂冕周․李黃中․李彦濟․李顯白․崔守誠․尹?․郭鎭億․鄭翼祥․鄭錫長․李萬協․權燧․金厚澤․金楗․金若龜․鄭弘德․徐道賢․金應遜․洪應辰․金應漢․李宗漢․崔弘輔․李光紹․張爾良․權德性․安渶․韓弼冑․申大規․崔昌世, 副司猛趙顯宇․黃?, 副司勇李宜楫․李宜業․徐命哲․徐尙修。(www.history.go.kr 2009)
김약구 : 김길구(金吉龜)/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자는 경칙(敬則)이고, 호는 묵옹(默翁)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부친은 가선대부 예조참판 김화중(金華重)이고, 형제로 김약구(金若龜)가 있다. 유고는 김화중·김광려(金光礪)의 문집을 합쳐서 간행한 《미호세고(眉湖世.../ people.aks.ac.kr(daum 2012)
김약구 : 김화중(金華重)/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부임하였는데 수많은 백성들이 흉년으로 굶주리자마자 자신의 녹봉을 내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아들로 김길구(金吉龜)와 김약구(金若龜)가 있다. 유고는 김길구·김광려(金光礪)의 문집을 합쳐서 간행한 《미호세고(眉湖世稿)》/ people.aks.ac.kr(daum 2012)
김약구 [專門資料] : 吏曹判書洪樂性進, 參議洪趾海進,/ 자료유형 한국학자료/ 자료소개 洪樂性|洪趾海|李之晦|洪檢|洪良漢|洪相聖|宋翼彦|金若龜|姜福|白師殷|申晦|任|李昌誼|黃|慶再觀|曺允亨(daum 2012)
김약구 [專門資料] : 兵批,判書沈進, 參判尹得養病,/ 자료유형 한국학자료/자료소개 沈|尹得養|鄭純儉|洪樂仁|具顯謙|趙惠慶|金勉行|黃仁儉|韓光德|田昌雨|兪應基|洪啓|金由澤|李匡運|李仁康|韓有大/李明運|洪麟漢|金華鎭|李鉉玉|全栢齡|金若龜|洪龍漢|金觀柱|李長玉(daum 2012)
김약구 [專門資料] : 以徐命臣爲吏曹參判,朴師崙爲持平,金/ 자료유형 한국학자료/ 자료소개 徐命臣|朴師崙|金尙默|尹承烈|李景祜|趙雲逵|李得宗|黃|兪漢吉|呂龜周|金若龜|洪相簡|吳漢迪(daum 2012)
김약구 [專門資料] : 兵曹口傳政事, 副護軍南泰普, 副司/ 자료유형 한국학자료/ 자료소개 南泰普|兪彦述|李顯祚|鄭枋|鄭恒齡|李弘稷|南鶴宗|尹在謙|南彦彧|權穎|金|朴宗亮|成胤儉|安正仁|李宇喆|李廷烈|愼爾復|韓宗濟|李奎徽|李益普|安致宅|元啓英|李仁默|鄭景瑞|金瑋|宋德基|李益炡|宋淳明|李思質|李命賢|金仁大|徐日修|金漢房|朴載天|鄭游良|尹心宰|金光遂|安商楫|李蓍延|吳道源|金時訥|李龜應|趙恒彦|申|李龜老|辛宅寧|宋龜明|李明吾|尹得宣|尹得勳|呂冕周|李黃中|李彦濟|李顯白|崔守誠|尹|郭鎭億|鄭翼祥|鄭錫長|李萬協|權燧|金厚澤|金楗|金若龜|鄭弘德|徐道賢|金應遜|洪應辰|金應漢|李宗漢|崔弘輔|李光紹|張爾良|權德性|安渶|韓弼胄|申(dau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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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동(김양동 氏 5級 公採 合格) [記事] : 보문면 승본리 태생의 김승한(55·구미시) 이정화(53) 씨의 차남 김양동(24) 씨가 2011년 5급 공개채용 시험(옛 행정고시)에서 기술직에 합격했다. 김씨는 현재 포항공대 화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醴泉新聞 2011년 12월 19일 (월) 10: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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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金楊震) : 1467(세조 13)-1535(중종 30), 호명면 직산1리 광석산(廣石山) 산록 행갈(大枝골) 사람,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본관은 풍산(豊山), 호조참판 휘손(徽孫)의 아들, 사가 서거정(四佳徐居正)의 제자, 경주인 정항효(慶州人鄭恒孝)의 문하에 들어가 이행(李荇), 정희량(鄭希良), 권달수(權達手) 등과 친했다. 1489년(성종 20)에 식년 생원시(式年生員試)에 2등 10위로 합격하고, 1497년(연산군 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4위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등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4월 7일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때 연산군이 모비 윤씨 능묘(母妃尹氏陵廟)의 호를 추존(追尊)하려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투옥 후 곤장 60대를 맞고 호명면 직산1리 행갈에 유배되었다가 동년 6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곤장 60대를 맞고 호명면 배소(配所)로 다시 왔다가 경주로 이배(移配)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으로 풀려나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고, 1514년(중종 9) 12월 기유일(己酉日)에 영의정 유순(領議政柳洵) 등이 사유(師儒)에 합당한 자를 의론했는데, 김양진(金楊震), 이행(李荇), 신상 (申상) 등 28인이다. 1516년(중종 11) 6월에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 문의하여 사유(師儒)의 합당한 인원을 간택했는데, 이행(李荇), 김양진(金楊震), 민수(閔壽), 이자 등을 보고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1520),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524년(중종 19) 공조 참판(工曹參判) 때 권신 김안로(權臣金安老)의 비위에 거슬러 산직(散職)으로 좌천되었고, 김안로의 실각(1529)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1529),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1533)일 때 병으로 사직, 뒤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조정의 요직을 거쳤어도 가난하기가 가난한 시골 선비와도 같았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했다. 1535년(중종 30)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특히 전라도 관찰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고을 백성들이 울며 떠남을 아쉬워했는데, 망아지 한 마리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전라도에서 낳은 것이니 끌고 갈 수 없다'라고 하며 동문(東門) 밖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왔다는 일화(逸話)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러한 청렴한 모습을 기려서 그 곳 백성들은 살아있는 그를 위해 사당(祠堂)을 세워 은덕을 기렸다고 한다. 경연(經筵)에 자주 입시(入侍)하여서는 당시의 정치의 잘 잘못을 강력하게 주청했는데,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는 국왕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의연(毅然)한 풍도(風度)와 추상열일(秋霜烈日)과 같은 논계(論啓)는 비루한 훈신(勳臣)들의 간담을 서늘하게도 했으나 결국은 그들의 모함을 면치 못해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불리를 감수하면서도 강직한 지조를 굽힘이 없어서 '당대의 명류(名流)'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초년에 동계 정온(桐溪鄭蘊), 허암 정희량(虛庵鄭希良) 등과 교유했고, 만년(晩年)에는 퇴재 권민수(退齋權敏手), 우재 손중돈(愚齋孫仲暾) 등 당대(唐代)의 명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호명면 직산리 음산(陰山)의 대지곡(大枝谷) 행갈에 있는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를 수호하기 위해 대지재사(大枝齋舍, 慶北有形文化財 173號)가 있고, 그 뒷편에 위패(位牌)를 봉안한 묘우(廟宇)가 있다. 신도비는 호음 정사룡(湖陰鄭士龍, 1491-1570)이 찬(撰)했는데, 풍마우세(風磨雨洗)하여 1934년에 그 옆에 새로 또 하나 더 건립하였다. 감천면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후손 종가(宗家)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安東市豊山邑五美洞)에 살고 있다. 1535년(중종 30) 청백리(淸白吏) 로 녹선(錄選)되었다. 그는 성실하여 학문에 박식하였고, 역수(易數), 음양(陰陽)에까지 통달하였고, 주량(酒量)이 매우 컸다고 한다. 무덤은 호명면 직산리 행갈(大枝) 광석산 사향(廣石山巳向)에 있다. 서암 태두남(西庵太斗南, 1486-1536)의 만시(挽詩)가 있다. [內容] : 허백당 김공 양진(虛白堂金公楊震)에게 한 만사 두 수// 1) 재와 덕을 겸전하여 참판까지 지내고서/ 칠순의 노인으로 세속 영화 버렸도다/ 서문(西門)을 한 번 파한 양담(羊曇 : 晋 나라 謝安의 사위로 사안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안이 죽은 뒤 사안이 살던 서문에 가지 않았음)의 슬픈 눈물/ 영남이 풍산 고을 만년의 유택일세// 2) 그림과 띠(畵帶)는 두 가문의 보배이며/ 뛰어난 재능(南金)은 두 변화가 기이했다/ 선정한 치적(棠陰)은 호남에서 칭송했고, 시림비(始林碑 : 慶州 南쪽에 있는 알지왕이 태어났다는 숲 속에 세워졌는 碑石)에 다퉈가며 들어갔네// 후손은 예천(閥芳里, 縣內里), 안동(五美里), 봉화(梧麓里), 영주, 함북(吉州), 경기(坡州), 평북(碧潼), 황해(延白), 충남(唐津) 등지에 살고 있다.(司馬榜目, 虛白堂世蹟 1999, 西庵集, 燕山君日記 52卷 54卷 55卷 56卷 63卷, 中宗實錄 卷5 卷25, 襄陽誌 1661, 墓喝, 原色世界大百科事典 6卷 386쪽, 韓國人의 姓譜, 醴泉文化 7輯 1994)
김양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壇廟 / 勿溪書院 在甘泉縣立祠祀上洛公金方慶 判典校 金九容 參判 金楊震古尹金應祖(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人物 / ...權檣 ?之弟登第選弘文正字己卯禍作被斥官至正郞 權? 登第官至吏曹判書以己卯史官論神武之變其後又論李沆之奸沈貞之邪多?權貴結茅亭洛江上退居十二年而終 金楊震 登第官至工曹參判燕山欲追崇母妃擧朝莫敢言楊震力爭旿旨逮?備受?楚終無撓屈選淸白鄕人祀于書院 金義貞 楊震之子能文章登第官至修撰?旿金安老坐廢 柳景深 中司馬兩試登第重試壯元官至大司憲 金璡 漢啓之曾孫號靑溪中司馬 贈判書後人立影堂祀之五子配焉 柳仲? ...(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8권/ 중종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3월 4일(병신) 2번째 기사/ 김양진을 사간원 헌납으로 삼다/ 김양진(金楊震)으로 사간원 헌납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31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2월 19일(갑오) 2번째 기사/ 경세창․김세필․한효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경세창(慶世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세필(金世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한효원(韓效元)을 사간으로, 신상(申?)을 응교로, 김양진(金楊震)을 헌납으로, 홍언필(洪彦弼)을 교리로, 채세걸(蔡世傑)을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56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16권/ 중종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7월 18일(기축) 3번째 기사/ 검상 김양진이 함경도의 흉년 구제하는 일에 노련한 인물을 보내기를 건의하다/ 검상(檢詳) 김양진(金楊震)이 삼공의 의논으로 아뢰기를, ꡒ함경도의 흉년 구제하는 일이 큽니다. 도사(都士) 임해(林?)를 이미 부임하였으나 젊어서 일을 알지 못하니 체직하시고, 관질(官秩)이 높고 일을 아는 사람으로 대신 보냄이 매우 마땅합니다. 또 그 도의 감사는 10월에 갈아야 하니, 모름지기 관질이 높고 백성 구제에 마음을 다할 재상으로 대신하여 보냄이 어떠하겠습니까.ꡓ하니, ꡐ그리하라.ꡑ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순(尹珣)은 본래 기국(器局)이 작은 사람으로 갑자기 한 지방을 맡았는데, 부임[按部]한 뒤에 해마다 기근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연달고 떠도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되, 윤순 이 이미 소양(素養)이 없고 시설(施設)도 없었으며, 또 도사(都事) 임해 는 허황한 사람으로, 한 가지라도 계책을 내어 흉년을 구제한 일이 없이 태연히 앉아서 보기만 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란과 주림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삼공이 윤순 의 직을 계체(啓遞)하여 한 것인데, 사정(私情)에 끌리어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600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구휼(救恤) /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19권/ 중종 8년(1513 계유 / 명 정덕(正德) 8년) 12월 11일(을사) 2번째 기사/ 신용개․박열․성세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용개(申用漑)를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로, 박열(朴說)을 겸동지경연춘추관사(兼同知經筵春秋館事)로, 성세순(成世純)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성세정(成世貞)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손중돈(孫仲暾)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양진(金楊震)을 집의(執義)로, 한효원(韓效元)을 사간(司諫)으로, 권희맹(權希孟)․홍언필(洪彦弼)을 장령(掌令)으로, 유관(柳灌)을 지평으로, 임추(任樞)를 헌납(獻納)으로, 남세준(南世準)․정사룡(鄭士龍)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70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2월 27일(신유) 1번째 기사/ 김양진 등이 제조․《후속록》에 관한 일을 논계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조강에 나아갔다. 집의 김양진(金楊震)․정언 남세준(南世準)이, 송일 등과 제조․《후속록》에 관한 일을 극론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4월 1일(갑오) 2번째 기사/ 집의 김양진이 경상도 군졸의 윤번에 대해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사간(司諫) 이자(李?)와 집의(執義) 김양진(金楊震)이 전의 일을 반복하여 논계하고, 양진이 또 아뢰기를, ꡒ경상도는 한번 왜란(倭亂)을 겪은 뒤로 군졸이 감소되고 수군(水軍)의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육군에 있어서는 비록 3번(番)으로 나누었다 해도, 교대할 때에 도로가 험난하여 흔히 1개월씩이나 걸리므로, 집에 있는 날은 적고 여행하는 비용이 무궁하여, 몇 해 안가 이산될 형세입니다. 관방(關防)의 긴헐(緊歇)을 나누어 그 번수(番數)를 늘리고 교대하는 기한을 늦추어 그들의 노력을 쉬도록 하면 군졸들이 조금 소생될 것입니다. 충주(忠州) 가흥창(可興倉)에서 상납하는 세곡(稅穀)을 실은 배를 서울에 도착시킨 선부(船夫)에게는 변상시키는 법이 없으므로, 이들이 수호를 근실히 하지 않아 많은 수량이 도난당하니, 금후로는 결손이 있으면 모두 선부에게 변상시키기를 전라도 의 예와 같이 하면 이러한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잡세(雜稅) / *교통-수운(水運)(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5월 18일(경진) 1번째 기사/ 손중돈․김양진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손중돈(孫仲暾)과 집의 김양진(金楊震)이 전의 일을 논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5월 25일(정해) 1번째 기사/ 손중돈․김양진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손중돈(孫仲暾)과 집의 김양진(金楊震)이 전의 일을 논계하고, 시독관 유돈(柳墩)과 검토관 유인숙(柳仁淑)도 논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5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2월 21일(기유) 5번째 기사/ 영의정 유순 등이 김안국․윤탁 등 28인을 사유로 뽑다/ 영의정 유순 등이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해당될 만한 사람으로 김안국․윤탁․이행․홍언필․김정․소세양․이순량․배익신․김유․조유형․박호․진식(陳埴)․이위(李偉)․이득전(李得全)․곽수령(郭遂寧)․김가원(金可遠)․안중손(安中孫)․최호(崔灝)․임계중(任繼重)․황위(黃瑋)․최명창(崔命昌)․김양진(金楊震)․유보(柳溥)․성운(成雲)․신상(申?)․김희수(金希壽)․조방언(趙邦彦)․신봉전(申奉全) 등 28인을 뽑고서 아뢰기를, ꡒ사유는 경학(經學)만을 전공해서는 안 되는 까닭에 사장(詞章)하는 사람도 함께 초(抄)했습니다.ꡓ하고, 또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ꡒ 남곤은 호조 판서로서 성균관 동지를 겸했었는데, 호조는 하루라도 비워 둘 수가 없으며 성균관의 일도 또한 오랫동안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중요한 직무이므로 양쪽을 겸할 수는 없을 듯하나, 이 때문에 육경(六卿)을 체직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할 듯합니다.ꡓ하니, 전교하기를, ꡒ학교가 퇴폐하는 일에 대하여 요즈음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호조 판서는 합당한 사람이 많으나, 사유에 합당한 자로는 남곤 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서 성공을 바라고 효과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또 모든 사람들에게 학교를 중하게 여겨서 육경을 체직하는 뜻을 알리게 된다면, 이것도 또한 학문을 권장하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이다.ꡓ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남곤 은 그 당시에 제주가 뛰어난 선비로서 명망이 매우 무거운 까닭에 이를 천거한 것이다. 그러나 재예(才藝)에는 장점이 있어도 성리(性理)의 학문에는 어두웠다. 겉으로는 비록 총명하고 민첩하였지만, 속으로는 몸소 실천하는 실상이 부족하였으며 특히 마음이 간사하고 또 학문에 의한 굳건한 힘도 없었으니, 어찌 사표(師表)에 합당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49면/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4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2월 7일(무오) 5번째 기사/ 이계맹․박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계맹(李繼孟)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박열(朴說)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허굉(許?)을 전라도 관찰사로, 정수강(丁壽崗)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김양진(金楊震)을 집의(執義)로, 유보(柳溥)를 사간으로, 이원간(李元幹)․홍언필(洪彦弼)을 장령(掌令)으로, 신필주(辛弼周)․윤지형(尹止衡)을 지평(持平)으로, 채침(蔡?)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남원(南原) 에 만복사(萬福寺)가 있는데 유생(儒生)이 부처 속에 간직해 둔 물건을 훔쳐갔다. 남원 사람 윤지형이 지평이 되어 사헌부 안에 이 사실을 퍼뜨리고 공문을 보내 추국하게 하였는데, 설령 유생이 참으로 이런 범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법사(法司)에서 금할 바가 아니다. 그가 한 일이 불가(佛家)를 부호(扶護)한 것 같다 하여 시론(時論)의 비난을 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4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4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2월 21일(임신) 2번째 기사/ 내수사 장리, 기신재, 금기 지역의 인가, 친영 등에 대한 김양진․조한필의 상소/ 조강에 나아갔다. 집의 김양진(金楊震)이 아뢰기를, ꡒ이장생은 그 직임을 파하지 않을 수 없고, 구수영은 대관을 협박하였으니 그 죄를 다스리소서. 또 간원이 아뢴 기신재와 내수사 장리(長利)의 일도 마땅히 속히 윤허하셔야 합니다. 사가(私家)에서 장리놀이를 하여도 물론(物論)이 또한 비웃거든, 하물며 국가이겠습니까? 어찌 차마 장리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신재가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것은 상께서도 잘 아시는 일이니, 속히 윤허하소서.ꡓ하였다. 헌납 조한필(曹漢弼)도 이에 대하여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ꡒ궁궐 근처에 바짝 다가 있거나 산밑이거나 산맥을 파내고 지은 집들은 모두 철거하라 하셨는데, 만약에 대내(大內)에 바짝 다가 있는 집들은 할 수 없거니와, 대내에서 멀리 떨어져 지세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집까지를 일시에 모두 헐어 버린다면 원망이 적지 아니할 것이니, 다시 자세히 살펴 헐지 못하게 하소서. 또 친영을 거행하지 않는 자는 법사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소서. 박상 등이 말 때문에 죄에 저촉되었으므로 하정(下情)이 지극히 억울해 할 뿐 아니라 언로도 막히겠사오니, 모름지기 오래 구수(拘囚)의 고초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ꡓ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김양진(金楊震) 등이 반복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ꡒ내수수의 장리와 기신재는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니고 조종조부터 있었으니 고칠 수 없다. 친영의 예는 매우 아름다운 일이니 법사가 규찰하면 할 만할 법도 하다. 인가를 허는 일은 진실로 경솔히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이유없이 허는 것이 아니고 한성부(漢城府) 가 적간(摘奸)한 데 따라 의법 처리한 것이다. 듣건대, 사산(四山)에 집을 지은 자가 많아서 소나무가 점점 없어지므로 헐라고 한 것인데, 이제 도로 중지시킨다면 법이 시행되지 못할 것이다.ꡓ하니, 김양진이 아뢰기를, ꡒ신이 경상도에 갔을 때 들으니 ꡐ 왜변이 있은 후로 도내(道內)의 군사가 한 달에 한번씩 번(番)을 갈아 부방(赴防)하였던 바 지금은 3번으로 나누어 교대하는데, 만약 왕래하기에 멀지 않은 곳이라면 크게 고달프지 않지만 상도(上道) 사람인 경우에는 도로가 매우 멀어서 양식을 싸고 제구를 갖추어 왕복(往復)하게 되므로, 인마(人馬)가 함께 지쳐 지탱하지 못한다.ꡑ고 하니, 그 도리(道里)의 원근과 방어가 긴하고 긴하지 않은 곳을 분간하여 방어가 그다지 긴하지 않은 곳이면 참작하여 조절(調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ꡓ하고,
특진관(特進官) 고형산은 아뢰기를, ꡒ김양진은 아뢴 바가 지당합니다. 군사들이 정장(呈狀)하여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이 모두 이 일인데, 상번(上番)한 후에 또 다시 부방할 걱정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별군관(別軍官)의 가설(加設)은 경오년6402) 에 왜변 이 있은 뒤로 시작된 것입니다. 신이 호조를 맡았을 때에 군량을 온갖 방법으로 조치(措置)하였어도 먹는 사람이 많아서 늘 부족함을 걱정하였으므로, 별군관 방어가 긴한 곳인지 아닌지를 관찰하여, 긴하지 않은 곳은 양감(量減)할 것을 근일 아뢰려 하였으나 아직 못하였습니다. 가설 군관이 미편(未便)하다는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편리한가를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묻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근자에 들으니, 남방의 가설군관(加設軍官)에 관한 일은 사람마다 모두 미편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왜구(倭寇) 가 침식(寢息)되었다고 하지만 방어에 대한 일을 경솔히 하여서는 안 된다. 백성의 폐단을 헤아리지 않을 수는 없으나 방어하는 일도 튼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45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재정-상공(上供) / *금융-식리(殖利) / *농업-임업(林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농업-임업(林業) / *풍속-예속(禮俗) / *주생활-택지(宅地)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註 6402]경오년 : 1510 중종 5년. ☞(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4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3월 9일(경인) 1번째 기사/ 김응기․박열 등이 기신재․내수사 장리 혁파를 청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동지사 박열(朴說)․집의 김양진(金楊震)․사간 유보(柳溥)․특진관 안당(安?) 이장곤(李長坤)․참찬관 이자화(李自華)․시독관 유관(劉灌)․전경 이약빙(李若氷)이 기신재(忌晨齋)의 혁파를 청하고, 열 【곧 대사헌이다.】․양진․보 등이 또 장리(長利)의 혁파 및 이장생(李長生) 일을 아뢰니, 장생은 체직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영사 김응기(金應箕)가 아뢰기를, ꡒ기신재 때 판자(板子)로 신주를 만들어 백평상(白平床)이나 백의자(白椅子)6404) 위에다 놓고 지전(紙錢)6405) 으로 사방을 모두 두르고 뭇 중들이 둘러 서 징과 북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신주를 맞아들이는데, 불상(佛像)은 위로 법당에 있고 신주는 아래로 방에 있게 되니, 이것이 더욱 상서롭지 못합니다. 대왕(大王)으로서 승사(僧舍)6406) 에서 제사하는 것도 이미 안될 일인데, 하물며 왕후의 신위를 모시는 것이겠습니까? 왕후의 신령이 반드시 놀라서 결코 흠향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효(仁孝)와 성경(誠敬)의 뜻이겠습니까? 종묘에서는 궁위령(宮?令)6407) 이 왕후의 신주를 받드는데, 기신재 때는 중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니 될 일입니까? 또 내수사(內需司)는 노비들의 신공(身貢)6408) 으로도 쓰기가 족한데, 어찌 꼭 장리를 해야 합니까?ꡓ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5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 *금융-식리(殖利)/ [註 6404]백평상(白平床)이나 백의자(白椅子) : 아무 장식을 하지 않은 민 평상과 의자. ☞ / [註 6405]지전(紙錢) : 종이로 만든 돈이다. ☞ / [註 6406]승사(僧舍) : 절을 뜻함. ☞ / [註 6407]궁위령(宮?令) : 궁중 관원의 직명. ☞ / [註 6408]신공(身貢) : 노비들로부터 징수하는 공부(貢賦)의 한 가지. 신역(身役)의 댓가로 받는 것인데, 공천(公賤)으로 독립 가정을 가진 외거 노비(外居奴婢)의 노(奴)는 매년 포(布) 1필, 저화(楮貨) 20장, 비는 포 1필, 저화 10장을 바치고, 사천(私賤)으로 독립 가정을 가진 사노(私奴)는 면포 2필, 사비는 1.5필을 바쳤다. ☞(www.history.go.kr 2009)
김양진 [記事] : 중종실록 25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6월 14일(갑자) 3번째 기사/ 송천희․민상안․심정․이장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천희(宋千喜)를 형조 판서로, 민상안(閔祥安)을 이조 참판으로, 심정(沈貞)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이장곤(李長坤)을 함경도 관찰사로, 황성창(黃誠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양진(金楊震)을 사헌부 집의로, 김인손(金麟孫)․이우(李佑)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9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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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리 출신 김주일,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가꾼 이야기> 펴내...축하합니다.
김주일(김주일 前 外交通商大使 回顧錄 펴내) [記事] : 김주일(예천읍 고평리) 전 외교통상부 대사가 최근 지난 삶을 기록한 회고록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가꾼 이야기>(도서출판 행복에너지)를 펴냈다. 그는 “공직에 있던 40년 간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바꾸어보겠다는 각오로 나랏일에 임해왔다”며 “경험담이 한국경제의 공직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의 성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원고를 집필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던 1969년부터 20여년 동안 경제기획원과 외교부에서 경제정책과 외교행정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경제와 외교에 대해 안팎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에는 파란과 격동이 점철했던 개발연대의 여러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또한 경륜있는 원로로서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현실적 청사진과 전략적 대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김주일 전 외교통상부 대사는 예천초등, 예천중, 부산상업고등학교, 국민대학교, 호주 시드니대학, 와세다대학원을 졸업했다. 예천군, 경제기획원, 청구권 및 경제협력사절단, 청와대, 보건복지부,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및 일본경제기획청, 통계청, 서울시, 경제기획원(경제교육기획국장으로 복귀), 국회사무처, 주일본 대한민국대사관 및 요코하마 총영사를 역임했다.(醴泉新聞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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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