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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529) : 김필재-김필형(附 지보면 출신 이명숙, 20일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선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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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金弼載)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용궁,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官)을 지냈다.
김필재 [專門資料] : 金弼載/ 2007.02.09(daum 2010)
김필재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以江華留守狀達,井浦堡居武學金弼載等/ 井浦堡, 金弼載/ 2008.03.23(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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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형(金弼衡) : 1725~1800(영조 1~정조 24), 字는克夫, 號는 菊窓, 本貫은 順天, 父는 聲遠, 生父는 輝遠, 母는 潘南 朴氏, 生母는 仁川 蔡氏, 居:醴泉, 安東. 교감본이나 영본에는 저자의 이력을 알려주는 1차적인 자료가 실려 있지 않다. 다행히 류이좌의 {학서문집}에 저자의 행장이 실려 있다. 행장은 국창의 생질인 金在根이 아들 炳運을 류이좌에게 보내 부탁해서 받은 것이다. 류이좌는 家狀 초고를 바탕으로 국창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평소 菊窓공의 덕에 심취했고 훈육을 마음속에 새겨서 잊은 적이 없었다."고 실토했다. 류이좌는 안동 하회출신으로 정조대에 문과에 급제해서 예조참판를 역임했다. 행장의 주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창은 고려조 仁의 후손으로 현조로는 조선조의 乙財가 호조전서를 지냈다. 을재의 4대손 군수 慶言은 1615년 화를 피해 서울에서 함창으로 이거해서는 다시 예천으로 옮겼다. 仁山祠에 제향되었다. 고조는 萬具로 호가 藍溪, 증조는 元柱로 호가 逃隱, 조부는 命夔로, 호가 체堂이다. 부는 聲遠으로 호가 新齋며, 생부 휘원은 체당공의 아우 命卨의 소생이다. 1725년 7월 20일에 예천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소시부터 재주와 품성이 뛰어나 가정에서 특별하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열셋에 비로소 [潘陽節] 1편을 배우게 되었는데 한 글자도 착오없이 외웠다. 조부는 "읽지도 않고 외우는 것은 기뻐할 게 아니다."고 나무래며 도리어 조숙함을 걱정하였다. 1738년에 생모의 상을 당했다 1744년에 쌍벽당[봉화 거촌의 광산김씨가]으로 장가를 갔다. 거촌은 눌은 선생이 거처하던 황전과 근접한 곳이다. 눌은 선생은 당시 사림의 종사로 영남 북부지역의 선비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 문하에 들어가 고인의 학문하던 방법을 배웠다. {朱子書} 1질을 받아서 돌아온 뒤로 견문이 더욱 넓어지고 문장력이 점점 증진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안동의 가곡으로 옮겼다. 가곡은 병곡 선생이 살았던 곳인데 옮긴 뒤로 樹谷, 可齋 등과 더불어 丸窩 서실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외재, 임여재, 수오재 등과 도의를 강학함에 선비들이 모두 의귀처로 삼았다. 지극한 효성은 지극해서 생가와 양가에 정성을 다해 조금도 태만한 적이 없었다. 1756년과 1773년에 만난 친상에서는 상 장례의 의식을 하나같이 {朱子家禮}를 준수하였다. 하루는 모친의 묘소에 곡을 할 때, 범이 앞을 가로막기에 울면서 달랬더니 고개를 숙인채 물러갔다. 고인이 남긴 교훈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써서 벽에 붙여놓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고, 수재들이 와서 배움을 청하면 정성껏 가르쳐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성품이 개결해서 남의 선행을 보면 칭찬을 하고 허물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에 관련된 문제의 경우에는 쇠못을 끊어 버리듯 조금도 타협치 않았다. 인정이 많아 구걸을 청하면 보는 대로 베풀어 주고 길가에 굶어죽은 시체에는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신동으로 호가 杏堂이다. 서너 살에 하늘에다 손짓하면서 "넓어서 포괄하지 못하는 게 없다"하고, 땅에다 손짓하면서 "넉넉해서 자라지 못하는 게 없다." 하였다. 다섯 살에 "길 위에는 나귀, 구름 가에는 새, 天機가 유동하는 곳에 자연의 소리가 들리네."라는 시를 지었다. 재주와 품격이 이와 같았으나 나이 아홉에 죽었다. 효랑이란 누이동생도 총명하고 슬기롭더니 어린 나이에 죽었다. 국창은 자신의 찢어지는 아픔을 속으로 삼키면서 도리어 애통해하는 부인에게 고금의 낙을 즐기던 일을 얘기해 주면서 슬픔을 달래주었다. 일찍부터 국화를 좋아해서 섬돌 가에 몇 포기를 길렀고 시를 읊으면서 만년을 기탁하였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李集斗는 향사당에서 국창을 만나 본 뒤 "山林高士"라 크게 칭탄하고 "菊窓" 두 글자를 대자로 써주어 대청에 걸어두고 호로 삼도록 하였다. 1800년 7월 4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76세. 배위 광산 김씨는 처사 光協의 딸로 부덕을 갖추어 남편의 덕을 어긴 적이 없었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景霖으로 행당동자이고, 딸은 어려서 죽었다. 後配인 안동 김씨는 첨추 時慶의 딸이다. 역시 아들이 없어서 아우 弼楨의 아들 泰霖을 후사로 삼았다. 태림은 河應淸의 딸에게 장가가서 1녀를 낳고, 뒤에 성산 李義根의 딸을 맞아 1남을 낳았다. 국창은 평생 도를 즐기면서 자질을 훈육하고 후진을 장려했다. 때때로 주흥이 일면 시를 읊어 내면의 정신세계를 펼쳐 내고 성정을 들추어내었다. 성격이 담박해서 과거는 본래 뜻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명으로 잠시 종사했지만 부친 사후에는 과장에 출입하지 않았다. 족보 발행과 관련해서 남한의 개원사에 갔었는데 마침 庭試가 있었다. 족친이 억지로 끌어다가 과장에 들어가게 했으나 곧바로 돌아 나왔다. {平城世稿}를 손수 써서 후세에 전하게 하여 선대의 뜻을 매듭지었다. 내외 선조에 대한 세계와 행적, 유묵에 대해서는 별도의 책자를 만들고, 혹은 훼손된 것을 보수하고 배접하여 보배롭게 간직하였다. 눌은 선생의 유고가 권질이 많아서 미간의 상태로 있었는데 한부 베껴서 주야로 독송하였다. 병곡 선생의 원고도 간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可齋 등과 더불어 경비를 적립해서 사업을 추진해 대역사를 마치게 하였다. 孫三省, 郭浩齋, 權慕山 등 제현의 흩어진 원고를 수습해서 교감을 본 뒤 계를 닦아 간행토록 하는 등 유림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에 대해 자임해서 일을 성취했다. 영남에서 명망이 있던 李大山 및 金川沙, 李后山, 柳東菴 등 여러 학자와 도의를 통해 탁마하고 권면을 하자, 향촌의 큰선비와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국창을 사림의 종장으로 추증하였다. 병산서원과 화천서원에서 열린 강회에서는 말씨와 문사가 맑고 깨끗했고 강의는 트이어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고고한 자태는 선계에 사는 학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홀로 서 있는 듯 했다. 문집 서너 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필형(金弼衡) : 학서집 (鶴棲集) | 볼륨:20권 10책 권제목:卷18 / ...이 그렇게 불러 주었다.菊窓金公行狀 11공의 휘는 弼衡, 자는 克夫, 순천김씨로 醴泉 金谷里 世第에서 출생했.../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문집상세해제이다.//
김필형 [記事] : <학서선생문집[鶴棲先生文集, 19세기]>에 실린 학서 류태좌[柳台佐]의 기사로, 그 내용은, “菊窓金公行狀/ 公諱弼衡、字克夫、順夫人。新羅/ 平陽君諱摠、高麗/ 典客/ 令諱允仁之后、我朝有諱乙財、以襄景公諱乙寶之/ ▶ Page 123/ 兄、官戶曹典書、四傳而至諱慶言、官郡守、避己卯禍、自/ 京移居咸昌、復移于醴泉/ 、享仁山祠。高祖諱萬具、號藍/ 溪。曾祖諱元柱、號逃隱。祖諱命夔、號?堂。考諱聲遠、號/ 新齋、世有隱德碩望。?潘南朴氏、護軍、徽道之女、文正/ 公諱尙衷后無男、?堂公有弟、月巖公諱命卨、生諱輝/ 遠、卽公本生考、?仁川蔡氏、仁川君壽之后、處士是錫/ 之女、以景廟乙巳七月二十日、生公于醴泉/ 金谷里/ 第。資性高潔、眉目淸粹、新齋公以其才稟太過、不令早/ 學。十三、始受潘陽節一篇、朝起背誦一字不錯、?堂公/ 不悅曰。不讀而誦、非可喜也。戊午、丁蔡氏憂、晨昏哭、朝/ ▶ Page 124/ 夕奠終、三年如一日。甲子、委禽於金氏雙碧堂、比近有/ 李訥隱先生講道林樊、爲士類宗師、公妙年登門、得聞/ 古人爲學之方、受朱子書一帙以歸、見聞益富、詞華漸/ 進。癸酉、移居安東之佳谷、卽屛谷權先生舊居也。權先/ 生以性理淵源之學、秉拂東南公蓋嘗往來、候謁多所/ 請益、及移居復得先生家、樹谷、可齋諸公相與講討於/ 丸窩之室、我伯父畏齋公從大父臨汝齋、安守吾齋、又/ 與之相從、朝夕追隨、講磨道義、一縣士林皆依歸焉。天/ 性至孝、生養庭?之間、養體養志、靡不用極其有不安/ 節、衣帶不解、躬執藥餌、晝夜罔或少懈。丙子、癸巳、連仍/ ▶ Page 125/ 巨創、喪葬祭奠、一遵文公家禮、三年之內、斷酒肉、恒?/ 帶、朴氏墓在村後峻坂上、自葬及?、必晨夜省哭。一日/ 有虎當前、公哭且諭、虎乃低首而退。服?日必整冠帶、/ 謁家廟、灑掃堂室、對案讀書、古訓之契于心者、輒書壁/ 觀省、村秀才挾冊而來者、訓誨??、未嘗有怠倦色。長/ 於揚善恥言人過、而至於義理大關、是非分界處、斬釘/ 截鐵、無少回互、聞知舊凶、音?哀食、素往復書札、未敢/ ?用、門庭乞?、隨見施?、道有死人、至解衣掩埋。於凡/ 祭需?牲、豫備別儲、母或倉卒窘束、公家租稅、必先人/ 輸納、不見官吏之到門、尤謹於辭受、非其義也。一介不/▶ Page 126/ 以取人、疏?不繼、處之晏如也。公有子神童、號曰。杏堂。/ 數歲指天、問曰。大哉、無所不包。指地、曰。富哉、無所不生。/ 五歲作詩曰。路上之驢、雲際鳥、天機流處、自然聲。其才/ 格如此、而九歲而夭。其?亦聰悟絶人、而次第俱化。朴/ 夫人號慟氣塞、公寬譬萬端、無幾微戚、戚容陳說、古今/ 人極可樂、底事娛?之、嘗愛菊蒔、數?於庭階、滋培玩/ 吟、以托晩香之契。李尙書集斗見公於鄕射堂、盛稱山/ 林高士、大書菊窓字、使揭堂楣以號之。正廟庚申七/ 月四日、卒、享年七十六。是年十二月十三日、葬于蓮洞/ 先兆下某向之原。配光山金氏、處士光協女、貞淑幽閒、/ ▶ Page 127/ 配君子無違德、生一男曰。景霖、卽杏堂童子。一女、亦蚤/ 歿。後配安東金氏、僉樞/ 時慶女、無嗣、以弟弼楨子、泰霖/ 爲后。娶河應淸女、生一女。後娶星山李義根女、生一男/ ?幼。公以淸粹剛明之姿、蕭灑高潔之表、傳襲家庭之/ 訓、涵濡師友之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於親、友於/ 弟。窮經讀史、安貧樂道、訓子姪獎後進、而有時微?歡/
喜之酒、諷吟平淡之韻、發舒精神、披露情性、隱然有舞、/ 雩詠歸底、氣象?業、非素志而先。公有命?勉從事、及/ 親歿、不復入場屋、以修譜事、往南漢之開元寺、適當廷/ 試、族黨力引之、不具紙筆、?入場、旋出勸者慙焉。平城/ ▶ Page 128/ 世稿、手寫傳後以卒。先志內外、先世系行蹟遺墨、或別/ 爲冊子、或修褙煤?寶藏之。先師訥隱遺稿、多?未刊、/ 繕寫一通、昕夕誦讀、屛谷稿亦未??、公與可齋諸公、/ 積費經紀、?竣大役、孫三省、郭浩齋、權慕山、諸賢稿之/ 散佚不傳者、亦皆收拾、攷訂修?、以經紀之、凡係斯文/ 重事、莫不自任以成就焉。南鄕之望、如李大山以下、金/ 川沙、李后山、柳東庵、諸公無不以道義、相與講磨切?、/ 至於縣中碩德、隣居長老、一辭推重、以士類宗匠、其設/ 皐比於屛山、花川之院也。?衣大帶、纖塵不染、辭令淸/ 亮、訓誨通暢、古所謂仙鶴下人間、獨立霜毛整者、幸復/ ▶ Page 129/ 觀於今世也。惜乎、天胡爲?其受、而嗇其後、如杏堂童/ 子千古絶奇之才、未十歲而萎折。公雖學力所推、以理/ 自寬、屢世種德之門、身後之悲?、士林之所共嗟悼也。/ 有文集數卷藏于家、台佐自弱冠蒙知獎甚厚、每於先/ 父兄團會之席、?德而心醉、承誨而銘佩、山仰之?、未/ 或?。忘公之甥姪、金斯文在、根氏使其子炳運草狀以/ 來、謬托以狀德之文、台佐?劣、何敢當是役、蓋屢辭而/ 終不獲、謹?括來狀、敍次如右、以備當世秉筆、君子之/ 裁幸焉。“이다.(www.koreastudy.or.kr 2006)
김필형 : 왕식의6대조고이신,諱宗發할아버님과경상도유생의상소문!/ 2010.01.09/ ...金洛善·金元善·金從善·李東煌·李宜翰·李祚億·金龍采·金泰柱·金東進·金錫胤·金龍景·金龍會·金龍弼·金龍雨·金復霖·金弼衡·權琮·權?·權兢·權祖佑·鄭來祥·鄭來昌·權漣·權?·權載·權師錫·權三錫·權五錫·權宗默·權秉大·權秉淵·權秉?·吳尙泰.../ //cafe.daum.net/wndfidwkd/ 남양홍씨(당성)중랑장파종친회(daum 2010)
김필형 : 屛谷先生(병곡선생) 權 (권구) 文集(문집)/ 2008.05.16/ ...)와 문생(門生) 안민수(安敏修)가 출판하려고 계획하다가 완수하지 못하다가 1797(정조 21)년에 이르러 유림 金弼衡(김필형) 등의 발의로써 간역이 시작되어 외손인 유일춘(柳一春), 상춘(象春) 등이 재정(再整)하여 안동 병산서원.../ //cafe.daum.net/namsunmyun/ 安東권氏(daum 2010)
김필형 : 김종수-관련자료-4/ 2007.07.03/ ...사람들이 과거에 오른 뒤에는 학문에 유의하지 않는데 참으로 경계할 일임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국창 김필형(金弼衡, 1725∼1800(영조 1∼정조 24)의 字는 克夫, 號는 菊窓, 本貫은 順天이다. 이상을 참고해야 한다. 이로써.../ //cafe.daum.net/csbkkorea/ 고문헌(daum 2010)
김필형 : 병곡 권구/ 2006.04.27/ ..., 鄕長 河龍圖와 門生 安敏修가 출판하려고 계획하다가 완수하 지 못하다가 1797년(正祖 21)에 이르러 儒林 金弼衡 등의 發議로써 刊役이 시작되어 李宗洙·柳규·柳象春이 戡校·裁整하고 柳漢奎·金世奎 등이 董役하여 安東屛山書院.../ //cafe.daum.net/yngeo/ 영남지리답사(daum 2010)
김필형 : 왕식의 6대 조고이신, 諱 宗發 할아버님과 경상도 유생의 상소.../ 2010.01.09/ ...金洛善·金元善·金從善·李東煌·李宜翰·李祚億·金龍采·金泰柱·金東進·金錫胤·金龍景·金龍會·金龍弼·金龍雨·金復霖·金弼衡·權琮·權?·權兢·權祖佑·鄭來祥·鄭來昌·權漣·權?·權載·權師錫·權三錫·權五錫·權宗默·權秉大·權秉淵.../ //blog.daum.net/dhkdtlr1015/ 어풍대08블로그임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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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보면 출신 이명숙, 20일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선임...축하합니다.
이명숙(이명숙 辯護士 ‘韓國女性辯護士會長 選任’) [記事] : 지보면 마전리 태생의 이명숙 변호사가 2014년 1월 20일 (사)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에 취임한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이날 오후 6시 서울 서초구 팔래스호텔 로얄볼룸에서 2014년 정기총회를 연다. 이날 총회에서는 김삼화 회장이 임기를 마치고 이명숙(51·사시 29회) 법무법인 나우리 대표변호사가 새 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한다. 이 변호사를 포함한 새 임원들은 임원 추천위원회의 추천과 상임이사회의 결의로 선출됐으며 이날 총회에서 승인받는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1991년 설립됐으며 현재 3천3백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여성변호사 단체로 여성의 기본적인 인권보호와 사회적 지위향상, 여성변호사들의 권익향상과 유대강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명숙 변호사는 대구 신명여고, 이화여대 법대를 졸업했다. 현재 경찰청 4대 사회악 근절 정책자문위원, 국회 가족행복특별위원회 위원,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 법률자문지원단장, 서울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고려대 의사법학연구소 외래부교수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KBS 2TV 사랑과 전쟁 솔루션 위원, 각종 드라마 및 시사교양프로그램 법률자문을 하는 등 방송 언론 활동도 활발하다.(醴泉新聞 20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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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