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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559:남천택(2)(祝김상동/예천방문1,095)
작성자장병창 @ 2014.02.22 06:15:32

  예천의 자랑(3559) : 남천택(2)(附  *예천읍 지내리 출신 김상동 예천 부군수, 박사 취득...축하합니다/예천방문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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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천택 [記事] :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10월 9일(정묘) 2번째 기사/ 이준구․이원진․이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사간 이준구를 승지로 높여 제수하고, 이원진(李元鎭)을 병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7책 40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현종개수실록 12권/ 현종 6년(1665 을사 / 청 강희(康熙) 4년) 3월 20일(병오) 3번째 기사/ 송시철․최일․남천택․정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최일(崔逸)․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삼고, 정륜을 발탁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7책 43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현종개수실록 13권/ 현종 6년(1665 을사 / 청 강희(康熙) 4년) 5월 30일(을묘) 1번째 기사/ 남용익․이연년․이정․남천택․이지온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이연년(李延年)을 대사간으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삼고, 이지온(李之?)을 발탁하여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그리고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에게는 가선을, 온양 군수 조지맹(趙志孟)에게는 통정을 가자하였는데, 온천에서의 수고를 상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7책 45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3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4월 25일(계축) 3번째 기사/ 이옥을 헌납으로, 남천택을 장령으로 윤휴를 우윤으로 제수하다/ 이옥(李沃)을 헌납(獻納)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남천택은 남천한(南天漢)의 아우이다. 또 특별히 윤휴(尹?)를 승진시켜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尹孝全)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위훈(僞勳)에 서록(敍錄)되어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고 대북파(大北派)가 되었었다. 윤휴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병자년586) 과 정축년587) 의 난을 당한 뒤에 호서(湖西)에 우거(寓居)하면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권시(權?)․이유태(李?泰)․윤선거(尹宣擧) 등과 교유(交遊)하였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추존(推尊)하였다. 송시열(宋時烈) 등은 그의 재주와 학문을 사랑하여 나이를 잊고서 사귀었다. 윤선거가 윤휴를 더욱 존중(尊重)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인재로 인정하였다. 그 뒤에 민정중(閔鼎重)이 효종조(孝宗朝)에 천거하자 친히 가서 만나보겠노라고 하시기에 이르렀고, 송시열 등은 그를 추천하여 지평(持平)을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포의(布衣)라 일컫고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名聲)이 더욱 크게 떨치어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모두 윤포의(尹布衣)로 일컬으면서 그 얼굴을 서로 알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일상(李一相) 형제만은 한 마을에 살았기에 윤휴 가 착하지 못함을 알고서 항상 말하기를 ꡐ이 사람이 출세(出世)를 하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다.ꡑ 하였다. 이단상(李端相)이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민정중을 책망하기를 ꡐ들으니 그대가 희중(希仲)을 혹 백이(伯夷)에 비기고 혹 제갈양(諸葛亮)에 견준다 하니 이 무슨 말인가?ꡑ 하였다. 희중은 윤휴의 자(字)이다. 윤휴가 시골에 살적에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행하였다. 그리고 남의 묘를 빼앗고자 하여 그의 세계(世系)를 위조(僞造)하여 송사(訟事)를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그때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있을 적에 그 송사를 판결하면서 또한 바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기해년588) 에 처음 자희 대비(慈禧大妃)의 복제(服制)를 정할 적에 윤휴가 먼저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었고, 경자년589) 에 허목(許穆)이 소를 올린 뒤에 윤휴가 이유태(李惟泰)에게 서신(書信)을 보내고 또 원두표(元斗杓)를 권하여 차론(箚論)을 올리게 하였으나, 그의 주장이 마침내 행하여지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윤선도(尹善道)의 소(疏)에 예(禮)을 의논한 것이 윤휴의 주장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윤휴가 선동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윤휴가 말하기를 ꡐ내가 일찍이 윤선도(尹善道)를 배 가운데서 한 번 보았을 뿐이니 어떻게 그에게 소를 올리라고 지시하였겠는가?ꡑ 하고, 또 늘 말하기를 ꡐ 사성(思誠) 【 권시(權?)의 자(字)이다.】의 주착(做錯)과 윤선도의 흉패(凶悖)가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ꡑ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람들은 모두 그가 화(禍)를 일으킬 마음을 가진 자로 여겨서 온 세상이 떠들썩하였다. 송시열(宋時烈)도 윤휴를, 속으론 음험하고 겉으로는 양성(陽性)인 체하는 사람으로 여기어 마침내 관계를 끊으니, 이에 윤휴와 서로 친근했던 자들이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고 모두 윤휴와의 관계를 끊었으므로, 삼척동자(三尺童字)라도 윤휴를 음흉한 사람으로 여겨서 한번 그의 문을 지나가기만 하여도 사람들이 모두 헐뜯었다. 이에 윤휴는 세상에서 크게 고생하게 되었는데, 다만 윤선거(尹宣擧)와 이유(李?)와 오정창(吳挺昌) 등 약간의 사람들만이 그를 사랑하고 중하게 여겼다. 윤휴가 오랫동안 벼슬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가난하여 혹 여러 날을 굶기도 하였다. 일찍이 일개 고을 현감(縣監)에 임명되기를 바랐지만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양 말하기를, ꡐ내가 지금은 비록 곤궁하지만 반드시 크게 현달(顯達)할 것이다.ꡑ 하였다.

 

  그의 아내가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부인과 가까운 일가이었으므로 여러 복(福) 590) 과 서로 결탁하여 어두운 밤에 왕래하였기에 야금(夜禁)에 여러 번 구속을 당하였으나 그의 계획은 매우 비밀히 진행되었다. 임금이 즉위(卽位)하여 장차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당(黨)을 크게 쓰려고 하니, 재상(宰相)과 이름난 관원들이 윤휴의 집을 새벽부터 밤까지 달려오는 자가 많아 그의 문정(門庭)은 마치 시장과 같았다. 서인(西人)으로서도 혹 영리(營利)에 서두르고 있는 자들 역시 찾아오는 자가 있었다. 윤휴가 배척을 당한 지 15년 만에 여러 복(福)의 모주(謀主)가 되어서 두서너 해 만에 마침내 뜻을 얻었으나 멈칫거리며 곧 나오지 아니하였고, 한때 허목(許穆)과 이원정(李元禎) 이하 사람들이 모두 윤휴의 지휘(指揮)를 받았다. 윤휴가 전에 효종(孝宗) 때에 있어서는 임금께서 친히 가서 만나겠다는 말씀이 있기까지 하였어도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관(史官)을 한 번 보내자 곧 나왔는데, 그래도 의리가 없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였음인지 명분(名分)을 북벌(北伐)에 두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믿는 자가 없었다. 윤휴가 조정에 나오고 나서는 윤선도(尹善道)를 대단히 칭찬하기를 ꡐ나의 동배(同輩)는 아니다.ꡑ 하였다. 김징(金澄)이 묻기를 ꡐ그대의 말이 어찌 하여 전일과 다른가?ꡑ 하니, 윤휴가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하였다. 성품이 탐욕이 많고 방자하여서 전조(銓曹)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 남짓하여 이미 집을 호화스럽게 꾸미고 그의 거실(居室)을 증축(增築)하려 하였다.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ꡐ이 집은 전에 오래 살던 곳인데 어찌하여 급하게 개수(改修)하려 합니까?ꡑ 하니, 윤휴가 말하기를 ꡐ부인은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 어찌 전일에 오던 손님과 같겠소?ꡑ 하였다. 윤휴의 눈동자는 그늘지고 어두운 기운이 많아서 관상(觀相)하는 자가 ꡐ뱀의 눈ꡑ이라고 하였다. 또 윤 상궁(尹尙宮)과 서로 결탁(結託)했다는 비방이 있으니, 이를 내윤(內尹)․외윤(外尹)이라 하였다. 그러나 시세(時勢)에 영합한 무리들은 그를 허목과 더불어 유현(儒賢)이라 일컬었다. 윤휴의 처음 이름은 정(?)이었으나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었다. 《주례(周禮)》 십운(十煇)에 첫째는 ꡐ침(?)이요, 둘째는 ꡐ 휴(?) ꡑ라 하였는데 ꡐ휴ꡑ라는 것은 해의 옆의 기운이 해를 찌르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창광(猖狂)하고 방자하여 그의 기염(氣焰)을 마음대로 펴서 오로지 보복(報復)만을 일삼으니,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마치 독수리나 올빼미같이 대하였다. 윤휴는 집이 어영 군영(御營軍營)에 가까웠다. 그러기에 그는 여러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무술(武術)의 기예(技藝)을 익히게 하여 무부(武夫)들을 맞아들였으므로 군복(軍服) 입은 자들이 날마다 그의 문정(門庭)에 가득찼다. 이때는 임금이 어리고, 나라의 일이 의심스러운 때인데, 윤휴의 종적(?跡)은 속여 감추어 알 수가 없었다. 안으로는 왕손(王孫)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날쌔고 건장한 무부들과 사귀니,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두렵고 위태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정진헌(鄭震憲)의 변고(變故)가 있은 뒤로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포수(砲手)의 수효를 늘려서 대궐 안에 들어와 호위하기를 청하니, 이를 듣는 자들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정(楨)과 연(?)의 일이 발각된 뒤에 허목 등과 더불어 들어가서 그를 구하려 하였을 적에 자성(慈聖)께서 대신들을 친히 개유하였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말하기를, ꡐ자성(恣聖)의 행동을 관속(管束)하여 절대로 이와 같은 거조(擧措)가 없게 하셔야 합니다.ꡑ 하였으니, 그의 말이 패륜한 것이 이와 같았다.【 윤휴의 이 말은 가주서(假注書)가 일기(日記) 가운데 상세히 썼는데, 승지 이하진(李夏鎭)이 이를 보고 ꡐ관속(管束)ꡑ이라는 두 글자를 제거하고 ꡐ조관(照管)ꡑ으로 고쳐 썼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신(史臣)이 윤휴를 논평한 것은, 예(禮)를 논(論)하던 처음에는 그가 반드시 화(禍)를 얽어 만들려는 뜻은 없었고 다만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여 억지 말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론(時論)이 그를 배척함이 너무 심하였고 장자(長者)들이 그와의 관계를 끊기를 너무 갑작스럽게 하니, 윤휴 는 이렇게 버림과 배척을 당하여 돌아가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분한 마음을 품고 날뛰어서 바르지 않은 길로 기대고 붙어서 끝내는 그 독심(毒心)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었다. 그러기에 전번에 그를 배척하고 관계를 끊는 이들이 진실로 선견(先見)의 밝은 지혜가 있었다. 당(唐)나라의 정권을 잡은 이가 왕숙문(王叔文)의 무리를 10년 동안 탁용(擢用)하지 않다가 그들의 재주를 불쌍하게 여기어 쓰려고 한 것은 또한 아름다운 마음이었으므로, 비록 허물과 하자가 있더라도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났으니 그의 하자를 깨끗이 씻어주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길을 열어 주어서 허목과 김수홍(金壽弘)과 같은 자에 대하여는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은 윤휴와 홍우원(洪宇遠)과 같은 자들은 산질(散秩)로 얽어매어 군읍(郡邑)의 일을 맡겼더라면, 대개는 분한 마음을 쌓고 화(禍)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록 그들이 뜻을 얻었더라도 또한 원한을 풀고 뜻을 통쾌하게 함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의 군자(君子)가 소인(小人)을 대하는 데는 후하게 하는 데에 실수하였는데, 오늘날의 군자가 소인을 대하는 데는 너무 박하게 하는 데에 실수한다고 하였다. 이 의논이 대체로 그럴듯하지만 군자와 소인은 마치 향기 있는 풀[薰]과 냄새나는 풀[?]같고 얼음[氷]과 숯불[炭]같아서 한 그릇에 같이 담을 수 없다. 윤휴와 같이 타고난 성품이 음흉하고 욕심이 만족할 줄 모르는 자에게 일개 산관(散官)이나 작은 수령을 주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그 화(禍)를 그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종통(宗統)을 달리하여 군주를 경멸한다는 말은 그 뜻이 지극히 음험한 것이니, 오늘의 화(禍)는 곧 당시의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 그를 배척하기를 어찌 엄하게 하지 않겠는가?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ꡐ소인(小人)을 대할 적에 악(惡)하게 하지 아니하고 엄하게 하라.ꡑ 하였다. 그러니 군자가 또한 어찌 소인에게 엄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는 반드시 합당한 방도가 있었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6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586]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 [註 587]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 [註 588]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 ☞ / [註 589]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 / [註 590]여러 복(福) : 복창군(福昌君)․복평군(福平君)․복선군(福善君). ☞(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6월 1일(무오) 3번째 기사/ 곽제화․오정창․이복․안여석․권계․민희․홍우원․남천택․이덕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곽제화(郭齊華)를 사간(司諫)으로, 오정창(吳挺昌)을 부응교(副應敎)로, 이복(李馥)을 장령(掌令)으로, 안여석(安如石)․권계(權?)를 지평(持平)으로, 민희(閔熙)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우원(洪宇遠)을 겸 대사성(兼大司成)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집의(執義)로, 이덕주(李德周)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비(中批)793) 로써 윤휴(尹?)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윤휴가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한지 5개월 만에 뛰어서 정경(正卿)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근세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복(李馥)은 그 집안이 개령(開寧)에서 살았다. 개령에는 예전에 토적(土賊)이 많았는데 이복의 이름이 토적 무리 속에 들어 있어서 죽을 뻔하다가 구해주는 이가 있어서 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청로(淸路)의 길이 여러 번 막히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송시열(宋時烈)에게 죄를 가하는 의논에 팔을 걷어붙이고 가담하였기 때문에 인천(引薦)을 받아 대관(臺官)이 되었다. 이복은 일찍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내면서 선생(先生)으로 일컬었다. 그런데 도리어 해를 가하려 하였으니, 사람들이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이복은 얼굴 모습이 표한(剽悍)하였다. 그러니 그가 일찍이 도적이 되었음을 믿을 만하다. 민희(閔熙)는 겉으로는 너그럽고 후한 듯하나 완악(頑惡)하고 탐욕이 많았으며 무식한데다가, 본래 가행(家行)이 없었다. 그러기에 부형(父兄) 앞에서도 일찍이 아들과 아우로서의 예절이 없었고, 온 가족이 어른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성기(聲妓)에 음란하여 세상에서 이들을 비루하게 여겼다. 민희는 일찍이 이정(李楨)의 부관(副官)으로 연(燕) 794) 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에 1년이 못되어 두 번이나 은총의 발탁을 입어 육경(六卿)795) 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ꡐ그가 아우 민점(閔點)과 더불어 허적(許積)과 사귀어 결탁(結托)하기를 형제(兄弟)와 같이 하였기 때문이라.ꡑ 하였다. 이덕주(李德周)의 고모부[叔母夫]는 고(故) 참의(參議) 조경진(趙景?)인데 집은 부유하고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덕주와 친족(親族)의 아들 조성(趙?)을 집에 데려다 기르며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또 친족의 아들 조곽(趙?)을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다. 조경진이 죽자 이덕주와 조성이 나란히 머리를 풀고 상복을 바꾸어 입고 상인(喪人) 노릇을 하였으니, 이는 그 재산을 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문(弔問) 온 사람들이 크게 놀랬고, 이 때문에 세상에서 사람 축에 끼지를 못했는데, 이에 이르러 대원(臺院)796) 에 오랫동안 있고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8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793]중비(中批) :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특지(特旨)로 관원을 임명하는 일. ☞ / [註 794] 연(燕) : 청(淸)의 서울. ☞ / [註 795]육경(六卿) : 육조(六曹)의 판서. ☞ / [註 796]대원(臺院) : 사간원. ☞(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6월 18일(을해) 6번째 기사/ 집의 남천택과 장령 이복이 송시열을 절도에 위리 안치할 것을 청하다/ 집의(執義) 남천택(南天澤)과 장령(掌令) 이복(李馥)이 아뢰기를, ꡒ토죄(討罪)함이 엄하지 못하면 국시(國是)가 정하여지지 않습니다. 오직 이와 같으므로 ꡐ종통(宗統)이 돌아갈 데가 있다.ꡑ는 말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에게서 발론(發論)되었습니다. 원래 그 심술(心術)은 본시 송시열을 위하여 좌단(左袒)846)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하던 중하던 간에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은 마땅히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필명(柳弼明)은 도리어 절도(絶島)로 귀양보내고 송시열은 육지에 안치(安置)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사람들의 마음이 불복(不服)할 뿐 아니라, 유필명도 또한 심복(心服)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특명으로 송시열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고 위리(圍籬)를 더하시면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위로하게 될 것입니다.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喪)에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기년(朞年)의 복(服)으로 고쳐 행하심은 서부(庶婦)와 적부(嫡婦)의 분별이 해와 달이 바뀌어졌을 뿐이 아닙니다. 그리고 효종(孝宗)의 서자 기년(庶子朞年)의 복(服)에 이르러서는 분명히 개정(改正)하신다는 말씀을 못하였습니다. 무엇으로 하늘에 계신 효종 의 영(靈)을 위로하여 드리고 신민(臣民)들의 울분한 마음을 풀어 주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글을 만들어 종묘에 고하고 중외(中外) 고유문(誥諭文)을 반포하고는, 인하여 태사(太史) 847) 에 분부하여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금석(金石)의 법전으로 삼으신 뒤에야 잘 계승하고 잘 닦아나가는 효도가 천하(天下) 후세(後世)에 길이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동료에게 발간(發簡)하여 송시열을 위리(圍籬)하자는 한 조목만은 삼가 다 알고 있습니다마는,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토역(討逆)의 법전이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미 〈송시열〉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이 예(禮)를 경행(經行)할 수 없다 하여 두세 번 말을 주고받으며 의논하였으나, 마침내 귀일(歸一)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 등이 말에 믿음을 얻지 못하여 동료들에게 경모(輕侮)를 당하고 있습니다. 〈신 등의 직임을〉 갈아주시기를 청합니다.ꡓ하였으나, 임금이 사퇴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남천택(南天澤) 등이 드디어 물러가서 기다리었다. 남천택은 남천한(南天漢)의 아우이다. 그 형(兄)이 이미 〈송시열을〉 얽어 모함하는 의논을 먼저 내었는데, 그가 또 기필코 죽인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 또한 통탄할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89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註 846]좌단(左袒) : 남의 편을 들어서 동의함. ☞ / [註 847] 태사(太史) : 사관(史官). ☞(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6월 20일(정축) 2번째 기사/ 곽제화․조창기․이덕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곽제화(郭齊華)를 집의(執義)로, 조창기(趙昌期)를 사간(司諫)으로, 이덕주(李德周)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곽제화는 본래 서인(西人)으로서 물의(物議)의 버림을 받았는데, 허목(許穆)과 가까운 친척인지라 드디어 남인(南人)에 붙고는 시(詩)를 지어 서인(西人)을 조롱한 바 있어 사람들이 그를 몹시 미워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서 폭사(暴死)하였다. 당시 오정창(吳挺昌)이 단독으로 정사를 맡아서 남천택(南天澤)을 사간(司諫)의 수망(首望)에 비의(備擬)하여 앞서 주장했던 논의를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조창기가 부망(副望)으로서 낙점(落點)을 받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9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7월 18일(갑진) 1번째 기사/ 홍처대․이옥․이수경․유명현․남천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처대(洪處大)를 도승지(都承旨)로, 이옥(李沃)을 응교(應敎)로, 이수경(李壽慶)을 정언(正言)으로, 유명현(柳命賢)을 수찬(修撰)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9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7월 29일(을묘) 1번째 기사/ 남천택을 동부승지로 승진시키다/ 남천택(南天澤)을 승진시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당시 송시열(宋時烈)을 준열하게 공격하는 자는 매양 총탁(寵擢)을 입었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29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2월 11일(갑자) 1번째 기사/ 김옥현․이관징․강여감․이서우․이무․안여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옥현(金玉鉉)을 승지(承旨)로, 이관징(李觀徵)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강여감(姜汝?)을 집의(執義)로, 이서우(李瑞雨)를 지평(持平)으로, 이무(李?)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안여석(安如石)을 장령(掌令)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정지호(鄭之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강석빈(姜碩賓)을 수찬(修撰)으로, 홍우원(洪宇遠)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화진(李華鎭)을 정언(正言)으로, 정익(鄭?)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1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3월 10일(임진) 1번째 기사/ 한은을 장령으로, 남천택을 승지로 삼다/ 한은(韓?)을 장령(掌令)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2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4월 13일(을축) 3번째 기사/ 남천택을 승지로 삼다/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2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5월 28일(기유) 2번째 기사/ 동부승지 남천택이 허목을 효유하러 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남천택(南天澤)이 명령을 받들고 가서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을 효유(曉諭)하였으나 허목이 즉시 출발하지 아니하자, 남천택이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지 아니할지를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먼저 돌아오지 말고 반드시 허목이 길을 떠나기를 기다려서 같이 돌아오라 하여 남천택이 머물러 있었다. 대저 국조(國朝)에서 신하를 우대함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근시(近侍)가 먼 외방에 오래 머무는 것은 전에 듣지 못한 바이다. 이제 허적은 이를 청하기에 어려워함이 없고 임금은 이를 시행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허목은 이를 받고도 불안해하지 아니하니, 국가의 사체(事體)와 인신(人臣)의 분의(分義)가 둘 다 가볍다고 이를 만하며, 또한 이때의 풍습과 세도(世道)의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29면/ 【분류】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6권/ 숙종 3년(1677 정사 / 청 강희(康熙) 16년) 6월 10일(을묘) 2번째 기사/ 신후명․오시대․유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후명(申厚命)을 정언(正言)으로, 오시대(吳始大)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유하익(兪夏益)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장선징(張善?)을 판윤(判尹)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강석빈(姜碩賓)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발탁하고, 윤진(尹搢)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5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1678 무오 / 청 강희(康熙) 17년) 4월 17일(병술) 1번째 기사/ 민정중․남천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정중(閔鼎重)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8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1678 무오 / 청 강희(康熙) 17년) 5월 12일(신해) 1번째 기사/ 남천택․이원정․민취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천택(南天澤)을 승지(承旨)로, 이원정(李元禎)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민취도(閔就道)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8책 38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24년 10월 15일 (정해) 원본95책/탈초본5책 (5/9)  1646년 順治(淸/世祖) 3년/ 南天澤의 直赴會試 등 殿講儒生의 시상에 대한 전교/ ○ 傳曰, 殿講儒生生員南天澤, 直赴會試 周易通 幼學金九鼎․李震夏, 各給一分 四書通 幼學鄭?, 給一分書略 進士具時勉․李翊漢, 幼學李必華, 各紙四卷․筆四柄․墨三笏賜給。經書粗(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27년 3월 21일 (경진) 원본105책/탈초본5책 (8/8)  1649년 順治(淸/世祖) 6년/ 洪?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洪?爲持平, 李梓爲掌令, 崔惠吉爲大司成, 金弘郁爲司諫, 洪宇遠爲正言, 柳慶昌爲執義, 李行遇爲大司諫, 朴東緯爲繕工監僉正, 柳壽昌爲司贍奉事, 權儁爲義盈直長, 姜琠爲司饔主簿, 宋熙祚爲掌樂僉正, 鄭慶演爲典牲主簿, 尹垓爲陽德縣監, 趙?爲順川郡守, 吳孝誠爲渭原郡守, 朴?爲昌平縣令, 奇晩獻爲順天府使, 吳竣爲左參贊, 吳以奎爲全州判官, 洪命夏爲副校理, 趙安及爲軍器參奉, 金應祖爲副應敎, 李浣爲漢城左尹, 趙翼爲兼左賓客, 申最爲兼說書, 沈大孚爲兼弼善, 李元敬爲平林君, 南?爲戶曹佐郞, 崔逸爲注書, 李道基爲司評, 李陽復爲兵曹佐郞, 鄭鳴謙爲濟用參奉, 禹惟一爲司贍直長, 宋光心爲奉常直長, 元振溟爲尙衣正, 柳俊昌爲弼善, 李?爲禮曹正郞, 南天澤爲司宰參奉。以上吏批政事(www.history.go.kr 2009)

 

  남천택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27년 4월 24일 (임자) 원본105책/탈초본5책 (4/5)  1649년 順治(淸/世祖) 6년/ 專經文臣의 명단/ ○ 禮曹, 專經文臣, 業經懸錄, 周易, 崔逸․金?․宋光心․黃儁耈․崔應天․盧亨夏․南天澤․申最․許悅․鄭?․吳?․吳斗寅․呂閔齊。書傳, 吳挺緯․李震夏․趙嗣基․朴增輝․鄭?․李正英․金益煦․鄭晳。詩傳, 任重․李英?․金九鼎․南龍翼․李慶徽․趙龜錫․金始振․元萬石․李端相。春秋, 李慶億․申混․李泰淵․李溟翼․閔鼎重, 殿講乙良, 一年內四孟朔十一日爲定, 今年十月爲始擧行。啓。(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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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읍 지내리 출신 김상동 예천 부군수, 박사 취득...축하합니다.

 

  김상동(김상동 醴泉郡 副郡守, 博士 學位 取得 : 地方財政 健全性에 對한 理論으로 嶺南大學校 大學院에서 博士 取得) [記事] : 김상동 예천군 부군수가 영남대학교 대학원 ‘지방재정 건전성 지표개발과 관리방안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부군수는 지난 1985년 예천군청에서 7급 공채로 공직을 시작해 2011년 사무관으로 승진한 후 경상북도 물산업과장, 경상북도 도청이전추진본부 총괄지원과장, 경상북도 도시계획과장, 경상북도 예산담당관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1월 예천 부군수로 부임해 왔다. 김 부군수는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경북도청 주요부서에 두루 근무하였으며 예산담당을 하면서 합리적인 행정업무 추진으로 직원들 상호간에도 큰 신망을 받고 있는 등 평소 연구 노력하는 공무원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김 부군수는 논문을 통해 지방재정 건전성에 대한 이론으로 지방재정의 구조와 재정위기, 외국의 지방재정건전성과 관련제도등에 관한 내용 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醴泉뉴스 2014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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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095

 

  예천군 관광(醴泉郡, 觀光버스로 全國에 觀光弘報 나선다 : 醴泉郡↔觀光버스運送事業者間 車輛利用 觀光弘報 業務協約) [記事] : 예천군(군수 이현준)은 2014년 2월 21일 오전 11시 관내의 관광버스를 이용해 예천의 관광명소를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전세버스운송사업자와 차량이용 관광홍보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관광버스는 전국을 무대로 운행하는 특성상 다른 어느 홍보매체 보다 광고효과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 버스의 외관에 예천지역의 대표관광지를 디자인해서 홍보함으로써 예천관광의 매력을 알려 관광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지역경제에도 한 몫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버스 외관 한쪽 면에 회룡포와 삼강주막, 석송령, 예천온천 등 지역 대표관광지의 아름다운 관광명소 사진을 부착해 관광지를 널리 알려 관광객을 유치하는 한편, 다른 쪽에는 2016년 7월 30일부터 개최되는 ‘2016 예천세계곤충바이오엑스포’ 홍보내용을 부착해 2007년, 2012년 곤충엑스포에 이어 2016년에도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홍보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세버스운송사업자 2개소 18대를 비롯한 군청버스 총 19대에 광고를 부착하게 되며, 또한 이밖에도 기존 택시운송사업자 138대 택시에도 지역의 주요 대표관광지를 홍보하고 있어 전세버스와 함께 지역의 대표관광지, ‘2016 예천세계곤충바이오엑스포’를 알림으로써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진철 문화관광과장은 “관광버스는 전국 곳곳을 누비며 운행하기 때문에 관광 홍보 효과가 뛰어나 우리 지역 관광객 유치는 물론 ‘2016 예천세계곤충바이오엑스포’ 행사를 널리 알리는데 주효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醴泉뉴스 2014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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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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