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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595) : 예천8경 중 삼강주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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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 [建物] : 풍양면 삼강리(三江里) 삼강나룻터 옆에 있는 주막으로, 조선말에 지어져 1934년 경술홍수(庚戌洪水) 때 무너진 것을 그 해 새로 지은 것이다. 방(房) 2칸, 부엌 1칸, 청마루 1칸으로 지어진 15평 크기이다.
삼강주막(三江酒幕) [古家] : 풍양면 삼강리 삼강 강변에 있는 작은 주막집으로, 큰 나무를 등지고 슬레이트로 덮었을 뿐 그 옛날 초가삼간(草家三間)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날 이곳 나룻터를 이용하던 소금뱃 사람들의 쉼터로서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을 주막집이 100여 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데 깊은 감회를 느끼게 한다. 지금도 할머니가 혼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現場體驗學習의 길잡이 1998)
삼강주막(三江酒幕) [古家] : 풍양면 삼강리 166-1번지 소재, 낙동강 나루터 옆에 자리잡고 있는 주막인데, 이 나루터는 예로부터 서울로 다니는 중요한 통로였을 뿐 아니라 낙동강으로 소금배 등이 오르내릴 때 부두 구실을 한 화물 집산지이자 물물교환처이기도 한 곳이다. 주막은 1900년대에 건립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옥이었으나 지금은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되어 있다. 평면은 온돌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단순한 평면이며, 온돌방의 정면에는 평상을 설치하여 과객들이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醴泉郡誌 2005)
삼강주막(豊壤 三江酒幕 文化財 된다. 洛東江 700里 마지막 나루 지킴이) [記事] : 낙동강 700리 줄기의 마지막 나루터 주막인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三江) 주막이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위치한 삼강주막은 190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 주인인 유옥연(89) 할머니가 16세 때인 1932년 이 마을 배송봉(50년 전 작고) 씨와 결혼한 후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결같이 주막을 지켜왔다. 일제 말기까지 낙동강 하구에서 오는 소금배를 두고 물물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 등이 주손님이었으나 소금배가 끊긴 후로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 대구 등지로 가려는 주민과 과객들로 붐볐다. 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으로 다리가 놓이고 잇따라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뚝 끊겨 버렸다. 그러나 주막의 옛 정취를 느껴보고 유 할머니의 전설 같은 삶의 여정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이어져 주막의 불은 여태 꺼지지 않고 관광 명소로 되살아나고 있다. 예천군은 지역 문화로 보존하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근 경북도에 주막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으며 이미 주변 땅도 매입한 상태다. 경북도는 2004년 12월 2일부터 현지 조사를 실시한 뒤 문화재 지정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며, 예천군은 지정이 이뤄지면 주막을 원형인 초가로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할 계획이다.(정차모 醴泉인터넷뉴스 2004-12-01 오후 4:37:17)
삼강주막(야고부-三江 酒幕) [記事] : 주막은 시골 길가나 도심 변두리에서 술과 밥을 팔거나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집이다. 이런 집을 주막집․탄막(炭幕)․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鋪)라고도 했다.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제공하지만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호텔․여관․여인숙과는 다르다. 신라 시대에 김유신(金庾信)이 드나들던ꡐ천관(天官)ꡑ이 효시라는 말도 있고, 고려 숙종 때 처음 생겼다는 기록도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보부상(褓負商)의 활동이 진전돼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19세기부터 전국에 고루 퍼져 마을 사이에는 대개 한두 집은 있어 나그네들에게 불편을 덜어 줬다. 그 이후 주막은 도시의 새문화와 물건을 전하는 전달처 구실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장(場) 구실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막은 새벽녘 노동자들에게 술과 모주․해장국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며, 역전과 5일장이 서는 장터 주변에 주로 있다. ○...낙동강 700리의 마지막 나루터인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ꡐ삼강(三江) 주막ꡑ은 그 뿌리가 깊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1900년경에 등장했다. 지금 주인 유옥연(89) 할머니가 16세가 되던 1932년부터 운영해 온 이 주막은 일제 말까지 소금배 상인과 보부상이 주요 고객이었으나 나룻배가 사라지면서 인적이 끊긴 곳이 돼 버렸다. ○...그ꡐ삼강 주막ꡑ이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시대의 변화에 떠밀려 빛이 바랜 이 주막이 제대로 복원돼 관광 명소로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도 옛 정취와 전설 같은 주모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더러 찾는다고 하나 예천군이 보존하려고 문화재 지정을 신청, 주변 땅도 매입해 놓은 모양이다. 경북도는 오늘부터 현지 조사 뒤 지정할 움직임이며, 초가지붕 등 원형도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백년설의ꡐ번지 없는 주막ꡑ도 그렇지만, 김용호의 시ꡐ주막에서ꡑ는 일제의 암울한 사회상과 서민들의 애환을 그렸다. 박태일도ꡐ그리운 주막ꡑ에서 ꡒ산그늘 하나 따라잡지 못하는 걸음이/ 느릿느릿 다가서는 거기…<중략>…입안 가득 머금은 어둠은 차마 눌 주랴./ 마른 명주 만초 동이고 비틀비틀 찾아가거니ꡓ라고 노래했다. 주막은 우리의 애환을 끌어안아 주므로ꡐ삼강 주막ꡑ 소식이 더욱 반가우리라.(이태수 論說室長 每日新聞 2004년 12월 02일)
삼강주막(우리 時代 마지막 酒母…醴泉 '三江酒幕' 유옥연 할머니, 70年 間 洛東江 700里 三江酒幕 지켜) [記事] : 낙동강 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터)의 유옥연 할머니(88)는ꡐ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酒母)ꡑ이다. 1917년 10월 20일 우막리 태생인 유 할머니는 열다섯 살이던 1932년에 네 살 위인 남편과 혼인, 열아홉(1936년) 꽃다운 나이에 삼강주막을 사서 들어갔다. 70년 주모 생활에서 겪은 애환이 한둘이랴만, 기쁨도 슬픔도 다 저 강물에 흘려버렸는지 별 말씀이 없다. ◆ꡒ너무 늦었어, 내가 한 70만 됐어도…“ ꡒ할머니, 이 집이 곧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다는데요?ꡓ ꡒ(집은) 이대로 놔두고 짚으로 지붕 이고, 수리만 한다네. 그치만 인지(지금) 지정되면 뭐해? 나이 아흔에. 내가 한 칠십(때)만 (지정)됐어도 좋았을 텐데…ꡓ유 할머니는 삼강주막이 문화재로 지정된다고 해도 크게 반기지 않는다. 혼자서 아침저녁 끓여먹기도 귀찮은데, 뒤늦게 문화재로 지정되는 게 대수냐는 것이다. 할머니의 체력과 기억력이 좀 더 좋을 때 지정 절차를 밟았더라면, 민중사 생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루터와 주막, 그리고 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의 생애사를 더 정확하게 복원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지가 못하다. ◆ 삼강주막과 달지주막 : 낙동강,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합쳐지는 교통 요충지 삼강나루터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 사실 낙동강 700리에서 유일한 주막은 아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낙동강에는 삼강주막 외에 달지주막도 있다. 삼강주막의 강 건너편에 있는 달지주막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 있다. 목청껏 부르면 들릴 것 같은 가까운 거리다. 두 주막 가운데 달지주막은 과객이 묵어갈 수 있는 큼직한 방도 두어 개 있고, 말을 맨 흔적도 있다. 이에 비해 삼강주막은 숙박시설 없이 그냥 나그네들이 목이나 축이고 국수나 말아먹으면서 여독을 풀고 발을 쉬어가던 곳이다. 요즘은 밥 달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네 사람들이 더러 놀러 나오고, 여름철이면 물놀이 온 사람들이 들르는 정도이다. ◆ 소금배가 다닐 때는 삼강에 주막 여러 개 : ꡒ옛날에는 고배(소금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어. 여름에 물이 많을 때면, (크기가 작은 소금배는) 안동 하회 나루터까지 올라갔지.ꡓ물길을 따라 낙동강의 맨 꽁지인 김해에서 상류인 예안까지 소금, 해산물, 소(牛), 쌀 같은 물자가 오가고, 강을 건너 과거를 보거나 경북 북부지방을 다녀올 때, 그리고 점촌 장날이면 삼강나루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창 때는 주막이 서너 개씩 늘어섰다. ꡒ수해 때 다른 주막은 다 떠내려갔어.ꡓ갑술년(1934) 물난리 때 떠내려간 27채 가운데 주막도 2채나 된다. 힘센 사람이 양손으로ꡐ콱ꡑ밀면 마치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삼강주막이지만 그 많은 물난리를 다 이겨왔다. ꡐ토끼집ꡑ이라고 할 만큼 방도 작고, 천장 없이 지붕 서까래를 이고 살지만 1900년대 초에 나무로 지은 덕에 처마 밑까지 강물이 차고 들어와도 물만 빠지면 집 뼈대는 고스란히 살아남는다. 흙집이 아니어서 물이 빠지면 대강 고쳐서 다시 살 수 있다. ◆ 젊음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해 : 유 할머니는 남편이 농사를 지었다고 하고, 동네 사람들은 사공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한창 시절, 삼강나루에는 소가 6마리나 들어가는 큰 배와 작은 배 두 척이 있었단다. 그러나 뱃길이 끊기고, 나루터 자리에 6년 공사 끝에 삼강교가 놓이면서 자연스럽던 3강의 풍치는 사라졌고, 낙동강의 사연을 품었던 삼강주막도 위태롭게 버텨오고 있다. ꡒ할머니 혼자서 이 넓은 강가에서 무섭지 않으세요?ꡓ ꡒ뭐 나이 젊어서 붙들어가겠나, 돈이 있어서 훔쳐가겠나. 무릎이 아파서 걸음도 겨우 걷구만. 약은 먹어 봐도 낫지도 않고.ꡓ50년 전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주막을 하며 다섯 자녀까지 키운 유 할머니에게 청춘, 젊음이란 남들처럼 즐거움이 아니라 소금처럼 짜고도 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외모도 단정하고, 말수도 적다.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 낙동강 품에서 희로애락을 흘려보내 : 주모란 업에 어울리지 않게 순한 성격의 유 할머니가 힘겹게 살면서도 동네 어른들이 얘기하듯이 비교적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졌던 것은ꡐ한국의 나일강ꡑ이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낙동강을 벗 삼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사위가 어두워진 강 섶 주막의 낡은 상을 둘러싸고 권커니 청커니 하던 주객들이 물러가고 나면 유 할머니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아픔도 괴로움도 다 쏟아버렸다. ꡒ예전에는 낙동강 물이 아무 소용없는 물이라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이 물이 얼마나 고마운지. 남풍양에서도 이리저리 논물 다 대 쓰고, 둑이 넘치게 흐르던 강물이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많이 줄었제.ꡓ◆ 삼강주막의 부엌문은 사방으로 나있어 : 삼강주막에서 막걸리가 사라진 지는 꽤 됐다. 많은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던 귀빠진 사발도 모습을 감췄고, 컬컬한 탁주 한 사발에 여독을 풀던 나그네도 더 이상 없다. 그저 동네 안 사랑어른들이나 가끔 들르고, 여름철이면 다리 아래로 피서 나온 젊은이들이 소주에 라면이나 찾는 정도다. 방 둘, 부엌 하나, 툇마루 하나가 전부인 삼강주막의 앞마당에는 세 그루 고목이 서있고, 나무 그늘에는 살평상이 놓여져 있다. 부엌에는 문이 사방으로 네 개나 달렸다. ꡒ(한창) 바쁠 때면 어디든지 부르는 대로 바로 (뛰어)갔제.ꡓ그러고 보니 하나의 부엌 아궁이에 두 개의 고래가 있어서 솥을 2개 동시에 걸 수 있도록 해두었다. ◆ 56년 영화ꡐ벼락감투ꡑ에 삼강주막 원형 나와 : 1956년에 제작된 영화ꡐ벼락감투ꡑ(감독 홍일명)에 삼강나루터와 이 집의 전경이 잘 나와 있다고 해서 그 영화를 촬영했던 배성학 기사를 수소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2004년 초 타계, 원형 사진을 찾는데 실패했다. ꡒ할머니, 그래도 길이 잘 뚫려서 어디 다니시기는 좋겠어요.ꡓ ꡒ올 봄에 꼭 6년 걸려서 다리(삼강교) 개통식을 했는데, 해봐도 좋은 것도 없어. 차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고 맨날 짐차만 빽빽 소리 지르며 내달리는 걸.”(최미화 編輯委員 每日新聞 2004년 12월 13일)
삼강주막(이보시게, 대포 한 盞 하세나) [記錄] : <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사석원 글․그림, 푸른숲 출판)에서 전국에서 소문난 막걸리집 15곳 순례하면서 기록에 남겼는데, 그 중에 삼강나룻터주막 얘기도 있다. 저자 사씨는 19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동양화․서양화, 평면회화와 입체조각의 벽을 넘나들며 파격적인 작품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작가. 그는 ꡐ예술가입네ꡑ하는 법이 없이 늘 겸손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그에겐 술로 치면 다른 어떤 것보다 텁텁한 막걸리가 딱 어울린다... 젊어서 청상(靑孀)이 된 경북 예천ꡐ나루터주막ꡑ의 89세 노주모(老酒母)가 열일곱 시집올 때 가지고 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70년된 ꡐ골동품ꡑ 원앙금침엔 산업화와 이농(離農) 등 우리 현대사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작가는 선입견 없이 오감(五感)을 활짝 열고 대폿집 안의 모든 풍경을 흡수한다. 낯선 사람들과 술상머리에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날개를 펼친다. 후줄근한 벽에 걸린 달력그림을 보며 화가의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서울 광장시장 좌판에서 돼지 머릿고기를 젓가락질하면서는 양장점을 하던 어머니와 옷감 끊으러 다니며 맛보던 왕순대와 그 시절을 생각한다. 생각의 꼬리쯤에 가선 남모르는 젊은 날의 부끄러운 추억이 떠오르는 것도 대폿집이기에 가능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대폿집에서 작가는, 술보다 인정과 흥에 취한다. 제목으로 쓰인ꡐ그냥 갈 수 없잖아ꡑ를 발견한 곳도 부산의 대폿집ꡐ부산포ꡑ에서다. 작곡가이자 연극연출가였던 한형석 선생이 썼다는 이 구절은 대폿집 세상의 속성을 지극히 간명하게 보여준다. 순례 끝에 작가는ꡒ나도 이제ꡐ사(史) 한량ꡑ이다ꡓ라고 말한다. 일종의 대폿집 존칭인ꡐ한량ꡑ이란 이름처럼ꡐ멋과 풍류를 아는 사람ꡑ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아쉬운 점은, ꡒ이 책이 우리 시대 대폿집들의 마지막 증언이 될지도 모르겠다.ꡓ는 작가의 말속에 담겨있다. 그렇지만 어떤 형태로든 대폿집의 인정과 흥취는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도 갖게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사람냄새를 그리워하고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부터 그 해 말까지 9회에 걸쳐 조선일보에ꡐ사석원의 대폿집 기행ꡑ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바탕으로 6곳을 추가로 순례하고 못다한 이야기를 보탰다.(김한수 記者 朝鮮日報 2005.5.13 (금) 17:58)
삼강주막(100年 뒤 慶尙道 마지막 酒幕 : ◆愉快한 頭腦檢索(SBS 午後 7時 5分)) [記事] : 멀리 떨어져 있어도 풍선 두 개로 통화할 수 있는 놀라운 풍선 전화기를 선보인다. 풍선 속에 숨겨진 비밀을 공개한다. 인하대학교 비룡탑 앞에 있는 동그란 판 위에 숨겨진 소리의 비밀을 알아본다. 서울 삼성동 도심 한가운데서 도를 닦는 희한한 도인, 자동차 옆 좌석에 알몸의 여인이 있는 미국 괴짜 예술가, 경상도 예천에 있는 이 시대 마지막 100년된 주막 중에서 가짜 이야기를 찾아본다.(일간스포츠 2005.7.6 (수) 14:23)
삼강주막(洛東江의 마지막 酒母) [뉴스 9] : ◉앵커: 주막집이나 주모,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실존하고 있는 주모가 있습니다. 정정훈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 세 갈래의 물줄기가 만나는 경북 예천 삼강입니다. 다리와 큰 길이 생기면서 나룻배와 뱃사공은 간 데 없고 강과 기울어져가는 주막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이 시대 마지막 주모인 87살 유연화 할머니가 쓰러져가는 주막을 지키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18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 와 평범한 아낙으로 살다가 50년 전 병으로 남편을 잃은 뒤부터 다섯 남매를 키우기 위해 주막 일을 시작했습니다. 혼자 몸으로 주막일 뿐 아니라 농사일까지 해야 할 정도로 곡절 많았던 삶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가슴에 묻어놓습니다. ◉유연화(할머니): 옛날에 죽도 못 얻어먹고 그랬는데 5남매 키운다고 내가 숱한 고생 다 했어요. ◉기자: 장에 다녀온 마을 사람들이 툇마루에 자리를 잡자 할머니는 소주와 안주를 쟁반에 담아냅니다. 이제는 찾는 이도 별로 없고 자식들도 모두 도시로 떠났지만 주막과 50년을 함께 살아온 할머니는 쉽게 이 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유연화(할머니): 고기도 놀던 물이 좋다고 살던 데가 정이 들어서 좋아요. ◉기자: KBS뉴스 정정훈입니다.([사회] 입력 시간 : 2003.07.08 (21:00))
삼강주막(山 찾아 물 따라 醴泉 豊壤 삼강 주막(三江酒幕) [인터넷] : 낙동강 물길 700리에 마지막 남은 주막, 주막(酒幕)은 예있는데 사공은 간 곳이 없네... 낙동강 물길 700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풍양면에서 삼강을 만난다. 내성천과 낙동강, 금천의 세 강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삼강으로 불린다. 낙동강 700리 강줄기에 현존하는 마지막 주막이 이 곳 풍양면 삼강리 주막이다. 세월의 무게를 못이겨 건장한 사람이 힘껏 밀면 쓰러질 듯한 흙집인 이 주막이 지금까지 낙동강 변을 지키고 있다. 이 주막을 50년 넘게 지키고 있는 분이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로 불리는 유옥연(87) 할머니이다. 1934년 큰 물난리를 겪으면서 수리한 뒤로 70년 넘게 이 자리에 그대로 살고 있단다. 위태롭게 서 있는 쓰러질 듯한 주막을 보노라면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인 할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갈한 모습이다. 시집 와서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이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병으로 남편을 잃고 보니 손바닥만한 땅에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자식들을 키울 수가 없어, 이 때 마침 주막을 하던 옛 주인이 마을을 뜬다고 해서 할머니는 주막을 넘겨받았단다. 그 시절만 해도 배가 들어오면 손님이 북적대던 때라 넉넉하지는 못해도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단다. 지금은 삼강나루와 영순면을 잇는 다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어 다음 달이면 준공이 된단다. 오늘도 주막집 회화나무 고목 아래 평상에는 촌부들이 모여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때마침 늦장마로 큰물이 흐르는 낙동강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그 옛날의 주막의 풍경을 그리는 듯 했다. 나무 아래 표시돌이 이 나무가 200살 된 보호수로 회화나무임을 말해 준다. 유일하게 이 회화나무만이 주막과 할머니의 애환을 알고 있을 것 같다. 삼강 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까지 가는 길에 쉬어가는 곳이었고,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그 때 삼강나루터 주변에는 주막이 네 개나 있었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큰길이 나면서 소금배가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건네다 주던 나룻배마저 없어졌다. 삼강을 건너다니던 이 곳 7~8개 마을에서 집집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한 두 되씩 쌀을 걷어서 뱃사공에게 뱃삯을 줬는데, 길이 나고 경운기가 다니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는 이들이 없어졌다. 자연스럽게 뱃사공도 마을을 떠났단다. 요즘은 차를 달리다 삼강 끝자락에 옛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가끔 찾아 든단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막에도 커피 자판기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정보화시대라고 하지만, 이 곳 예천 땅은 아직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이 곳 삼강주막 지척에 육지 속의 섬마을인 물도리 마을 "회룡포"와 세금 내는 부자 소나무 "석송령"도 있어, 테마기행 장소로 추천해 볼 만한 고장이다. ▲ 삼강나루 건너편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의 백포와 금포도 백사장이 좋다. 강변에 검은 바위가 있어 금포, 흰바위가 있어 백포라고 했다고 한다. 굽이굽이 은빛 모래알을 적시며 흐르는 내성천. 모래찜질을 하고 피라미를 쫓는 ꡐ옛날 추억ꡑ을 떠올리기 좋은 강변 휴양지이다. ▲ 삼강재 넘어 굴미라는 마을은 아직 때뭍지 않은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글 丁海酉)
삼강주막(살아있는 마지막 傳說 三江酒幕) [記事] : 풍양면 삼강리 166-1번지에 있는 주막으로, 풍양면과 문경시 영순면을 지나는 국도 59호선 사이에 있다.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 주위의 산들이 병충처럼 둘러쳐진 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 태백산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700리 낙동강 중 마지막 주막이 있는 삼강. 1주일째 계속되는 열대야에 풀도 나무도 지쳐가고 매미울음 소리도 잦아드는 대서(大暑)인 2005년 7월 23일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낙동강 700리 물길 따라 떠나 보았다. 예전에는 서울로 가는 길목을 소금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 곳을 거쳐 갈 만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번성하였던 삼강나루터 주막, 이 날 찾은 삼강은 뱃사공 없는 빈 배 하나 강가 풀숲에 나뒹굴고 세월의 상흔을 견디기가 몹시 힘들음일까 덕지덕지 외과수술을 받은 500년 넘은 회화나무 한 그루. 그리고 ‘훅’하고 불기만 하여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있는 100년된 흙벽집 주막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사공도 뱃사람도 다 떠나고 국도 59호로 승격되면서 새로 놓여진 삼강대교의 높다란 교각 아래에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이 얼핏 스쳐 지나가면 놓치기 쉬운 주막. 그 곳이 낙동강 700리 마지막 주막임을 알리 없는 사람들은 그냥 스쳐지나만 갈 뿐이었다. 온몸에 전쟁의 파편조각 같은 파스를 붙이고 숨소리조차 고르지 못난 유옥연(89세) 할머니, 그 모습을 보노라니 갈바람에 낙엽 지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장날이면 황소 5-6마리에 장년 30여 명을 태우고 강에 다시 나룻배 띄울 일 없겠지만 낙동강과 함께 해 온 영욕의 삶들은 애환이었고, 주막은 그의 모든 것이었기에 주모는 이곳을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삼강이 주막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 위해 강 건너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소재 달봉산을 찾았다. 국도 59호선 옆에 조성된 달봉산 쉼터에는 등산안내도, 의자 등 편의 시설과 얼음보다 더 차가운 달봉산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에서 잠시 쉬면서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을 얼음물로 식히고 물 한 병을 담아 산을 올랐다. 등산객이 별로 없어 많은 잡초로 우거진 임도길을 따라 도착한 정상,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였다. 이 곳이 굳이 금강, 내성천, 낙동강이 합치는 삼강이 아니더라도 강줄기 따라 어우러진 주변 경관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삼강주막 그 하나만으로도 족히 이름에 오르내려도 될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정상에는 전망대와 의자 등 쉼터가 설치되어 있어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노오란 원추리를 비롯한 많은 들꽃들이 있어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었다. 왕복 2시간이 소요되는 그리 높지도 않는 해발 250m 달봉산은 낙동강을 조망하기엔 최적인 것 같다. 등산으로 젖어버린 몸과 마음을 삼강에 던져 보았다. 무심한 삼강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말없이 흘러만 가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하는 삼강주막, 낡아버린 허술함이 싫지가 않고, 우리의 가슴에 고향의 기억이 머무르는 것처럼 이 주막 또한 잊혀져가는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볼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주막을 찾는지도 모른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16세에 시집와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한국전쟁 직전에 홀로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60여 년을 지나는 길손에게 술 팔고 밥 팔고 말벗이 되어주고 옛것이 그리워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출가한 5남매가 모신다고 해도 떠나지 못하는 주모. 삼강대교 및 그늘에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있는 주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 ‘인제는 살았을 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내가 죽고 나면 이 주막이 어찌 될 건지 그 것이 걱정될 뿐이다.’ 라고 말하는 주모의 눈가에 맺히는 잔이슬을 보면서 까닭 모를 서러움을 느꼈다. 이제는 찾는 발길조차 뜸한 주막에 내가 찾아간 날도 삼강마을의 어르신 몇 분이 술잔을 기우리기 위해서 찾아왔다.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는 삼강마을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이곳만한 데가 없다는 어르신의 말씀과 “주모 술 한 잔 주소”의 말에 휘어진 등을 두드리며 소주에 마른 멸치와 고추장 안주로 된 술상을 봐오는 점점 전설이 되어가는 삼강주막. 앞으로 예천군에서 이 곳을 문화재로 보존한 계획이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마르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캔음료수 3개를 사고 주모에게 3,000원을 주었다. 애써 가격을 묻고 물건값을 셈한다는 것이 웬지 어색해 보였다. 그 동안 방송사, 신문사 등 여러 곳에서 주막을 취재해 갔다며 이런저런 질문에 귀찮아 할만도 하련만 이날 할머니는 싫다는 내색없이 잘 응해 주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모습 등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전설인 유옥연 할머니,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나의 말에 아쉬운 작별의 손을 흔드는 주모를 뒤로하며 돌아서는 주막 위로 황금빛 노을이 강나루를 삼킬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장광현 醴泉文化新聞 2005.8.26)
삼강주막(우리 時代 마지막 酒母 떠나다 : 豊壤面 三江里 '三江酒幕' 유옥연 할머니 '道 文化財 指定' 앞두고 他界) [記事] : 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酒母)인 풍양면 삼강리ꡐ삼강주막ꡑ유옥연(90) 할머니가 2005년 10월 1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삼강주막의 경북도문화재 지정을 눈앞에 둔 터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유옥연 할머니가 이 주막의 주모로 들어앉은 때는 열여섯 살에 네 살 위 남편과 혼인한 3년 뒤 열아홉(1936년) 꽃다운 나이였다. 유 할머니는 50여 년 전 남편(배송봉)과 사별한 후 다섯 자녀를 홀로 키우며 청춘을 보냈다. 삼강주막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1900년께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삼강나루가 한창 붐볐을 때는 소가 6마리나 들어가는 큰 배와 작은 배 두 척이 있었단다. 일제 말기까지 소금배 상인과 보부상이 주요 고객이었으나 소금배가 끊긴 후에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 대구 등지로 가려는 주민과 과객들로 붐볐다는 삼강주막.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마저 끊어졌다고. 더구나 2004년 봄 삼강교가 개통되면서 자연스럽던 삼강의 풍광마저 사라졌다. 유옥연 할머니는 거동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이 곳 삼강주막에서 주막의 옛 정취를 찾는 관광객들과 동네 사랑어른들의 말벗이 되어주며 세월을 낚았다. 어쩌다 맥주, 소주, 라면 등을 팔면서…. 정재충 삼강리 이장은ꡐ삼강주막ꡑ에서 유 할머니의 뒤를 이어 삼강나루터를 찾는 길손들의 벗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꽤 여럿 있다고 귀띔했다. 한편 예천군은 2004년 삼강주막을 지역 문화재로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막 주변 땅을 매입하고 경북도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권오근 記者 醴泉新聞 2005-10-21 13:26:46) [답변] : 경기대학교 이기환입니다. 부보상은 1392년 이성계 태조대왕이 하사한 명칭이고 보부상은 1925년 조선 총독부에서 변조한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일제시대에 변질된 명칭을 부보상의 명칭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www.bubosang.n에서 확일할 수 있습니다. 2005-10-22 12: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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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