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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596) : 예천8경 중 삼강주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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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酒母는 떠나도~豊壤面 三江里 所在 三江酒幕이 慶北道 民俗資料로 指定됐다) [記事] : 낙동강 7백리 줄기의 마지막 나루터 주막인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소재 삼강주막이 2005년 12월 26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됐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위치한 삼강주막은 190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얼마 전 작고한 주막 주인 유옥연(89) 할머니가 16세 때인 1932년 이 마을 배송봉(50년 전 작고) 씨와 결혼한 후 지금까지 70여 년 간 주막을 지켜오다 얼마 전 정든 주막을 떠났다. 일제 말기까지 낙동강 하구에서 오는 소금배를 두고 물물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 등이 주 손님이었으나 소금배가 끊긴 후로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 대구 등지로 가려는 주민과 과객들로 붐볐다. 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으로 다리가 놓이고 잇따라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뚝 끊겨 버렸다. 그러나 주막의 옛 정취를 느껴보고 유 할머니의 전설 같은 삶의 여정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이어져 주막의 불은 여태 꺼지지 않고 관광명소로 되살아나고 있다. 예천군은 지역문화로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근 경북도에 주막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으며 이미 주변 땅도 매입한 상태다. 경북도의 문화재 지정으로 예천군은 주막을 원형인 초가로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키로 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12-27 오후 6:24:40)
삼강주막(洛東江 1300里 마지막 남아있는ꡐ三江酒幕ꡑ慶北 民俗資料로) [記事] : 경북도는 최근ꡐ마지막 주모ꡑ가 세상을 뜬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했다고 2005년 12월 28일 밝혔다. 삼강은 내성천과 낙동강, 금천의 세 강 줄기가 예천에서 몸을 섞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은 낙동강 강줄기 1300리에 남은 마지막 주막이다.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안동까지 가기 전 쉬어가는 곳이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삼강주막은 이 나루를 오가는 길손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잠자리로, 시인묵객들의 흥을 돋구는 장소로 이용돼 온 유일한 조선시대 주막이다. 세월이 흘러 소금배가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건네주던 나룻배마저 없어지자 한 때 네 개나 있던 삼강나루의 주막이 다 사라졌지만 이곳만은 남아 지나간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차를 달리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주막을 보고 이곳을 찾아 탁배기를 찾는 손님들이 있었다. 하지만ꡐ마지막 주모ꡑ이던 고 유옥연 씨가 2005년 10월 1일 89살을 일기로 세상을 뜨자 지금은 영업은 하지 않고 예천군 풍양면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현재 지역 주민들이 유씨 뒤를 이어 주막의 맥을 이을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께 지어진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건축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크고 지역의 역사와 옛 시대상을 읽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박영률 記者 한겨레新聞 2005년 12월 28일 (수) 22:02)
삼강주막(三江酒幕) [記事] :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김용호 시인의 시 '주막'의 한 구절이다. 주막은 나그네들이 들러 술과 밥을 사먹거나 한 숨 자고 가던 곳이다. 나그네들에게는 허기를 채우고, 고단한 몸을 누이는 회한이 서린 공간이기도 했다. 주막은 숫막 또는 탄막(炭幕)이라 불렸다. 예부터 원(院)과 참(站)에 설치된 참점(站店)이 여행객들의 숙소로 쓰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장사가 늘어나면서 장사치들의 쉬어가는 곳으로 주막이 발전했다. 도시의 객주와 여각에 비해 시골에는 주막이 시장이나 역(驛) 주변, 나루터 같은 곳에 드문드문 있었다. 17세기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서울로 압송된 적이 있는 네덜란드인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에는 숙박시설이 극히 미비했다. 그런 가운데서나마 주막이 드문드문 있어서 마당의 살평상이나 마루에 앉아 대폿잔을 들이켜거나 먼 길 가는 이는 가장 큰방인 봉놋방에서 10여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자는 데 끼여 자기도 했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삼강주막은 우리 주막문화의 마지막 잔영이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 세 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삼강으로 불리는 이곳은 낙동강 소금배가 오르내릴 적에는 오가는 이들로 붐비던 나루터였다. 나루에서 낙동강 둑에 올라서면 길목에 오도카니 주막집 한 채가 쓰러질 듯 서 있는 게 보인다. 이 주막에는 유옥연 할머니가 주모(酒母)로 있었는데, 2005년 가을에 타계했다. 이 주막이 전국의 주막으로서는 유일하게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예천군은 이를 원형 복원 후 주모도 새로 들여서 관광자원화하려 하고 있다. 사통팔달 길들이 나고 미끈하게 다리도 세워져 나루터가 사라져버림에 따라 나루 오가던 길목을 지키던 주막은 이제 아주 구석진 곳으로 내몰려버렸는데,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기특하게도 다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이하석 論說委員 嶺南日報 2006-01-03 07:15:37)
삼강주막(三江나룻터 酒幕) [記事] :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삼강나룻터는 현존하는 낙동강 유일의 주막으로,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66-1번지 삼강마을 앞 낙동강 제방 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주막은 옛날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가 왕래하는 선착장이었으며, 또한 대구~서울을 오고가던 일반 행인들이 쉬어가는 쉼터이면서 그들의 먹거리 장소로 이용되었다. 주막이 세워진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백여 년 전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그 형태가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경상북도문화재관리 전문위원이 연구차 자주 현지를 답사하고 있으며, 각종 매스컴에서도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문화재 자료로 수차례 촬영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나룻터 주막 구조를 보면, 대지가 52평에 건평 10평 정도로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지붕은 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스레트로 개조되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방 2칸에 조그마한 부엌 한 칸, 한 평 반 정도의 마루와 마른 솔가지로 둘러싸인 옛날 모습의 화장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88세의 유옥연 할머니가 약 70년 전부터 주모를 하고 있는 역사 깊은 우리 소중한 문화 자료이나 안타깝게도 2005년 9월 유옥연 할머니가 타계하고 그 모습만이 남아 앞으로 삼강리에서 그 주막을 이어받아 보존할 계획이다. 끝으로 삼강나룻터에 배가 오갈 때 뱃사공이 불렀던 노래를 실어본다. 삼강나룻터 뱃사공 노래// 이내팔자 사공일세/ 어서가자 어서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뱃머리에 어서가세/ 뱃머리에 찾아드니/ 잘가세요 잘가세요/ 어디있소 어디있소/ 술한잔에 작별일세// 한두사람 건너보니/ 지는해가 서산일세/ 삼강리라 나룻터는/ 낙동강이 큰물이고/ 내성내라 작은물이/ 용궁의 살미물과/ 인정좋게 합수하니// 삼강의 나룻터라/ 저건너 저주막에/ 텁텁한 막걸리가/ 사공의 몫이일세/(김병구 醴泉文化院 豊壤支部長 醴泉文化 第18輯 2005 34-35쪽)
삼강주막(三江酒幕 : 100年間 숱한 事緣 간직한 地方文化財) [記事] : 21세기의 마지막 주모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삼강주막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삼강(三江)은 회룡포를 돌아 나온 내성천과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나루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예로부터 삼강은 서울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여기에 소금배 등이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삼강나루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은 늘 장사꾼과 길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삼강교가 완공되면서 뱃사공마저 떠나버리더니 2005년 10월에는 열여섯 살에 시집와 반세기 넘게 주막을 지켜오던 유옥연(당시 90세) 할머니가 세상을 등지면서 주인 잃은 삼강주막은 깊은 시름에 젖어 있다. 100여 년 전 지어진 삼강주막은 손바닥 크기의 방 두 칸과 부엌, 그리고 길손 네댓만 앉으면 꽉 차는 마루가 전부다. ꡐ문화적 의의를 간직한 삼강주막을 민속자료로 지정하고 복원을 서둘고 있다ꡑ는 입간판이 무색하게 흙벽에 덧칠한 시멘트는 떨어져나가고 새마을운동 때 얹은 슬레이트 지붕은 검은 이끼로 뒤덮이는 등 삼강주막은 폐가로 전락했다. 다만 수령 200년의 회화나무 한 그루만이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주막을 100년 째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박강섭 記者 國民日報 2006년 6월 22일 (목) 15:40)
삼강주막(나루를 찾아서 '洛東江 나루에 굽이치는 事緣') [記事] : 박창희 지음/ 서해문집 발행, 296쪽, 1만3,500원/ ꡐ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굳이 건너시고 말았네…ꡑ 물길에 지아비를 잃은 아픈 마음이 스며있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강과 나루가 삶과 사랑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주는 고대 가요다. 공무도하가는 고려의 서경별곡(西京別曲), 조선의 강호가로 이어지며 나루 노래의 계보를 형성했다. 나루는 노래의 현장이면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위해 의주 나루를 건넜다가 위화도에서 병사를 돌렸고, 인조는 한강나루 삼전도에서 청에 굴욕적인 화친을 청했다. 한국전쟁 때는 한강과 낙동강의 나루와 포구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나루를 찾아서>는 우리의 삶과 문화가 녹아있는 낙동강 나루에 관한 이야기다. 낙동강 나루는 1,300리나 되는 긴 길인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안고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100여 곳에서 배가 오갔으나 어느 순간부터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책에 들어있다. 나루에는 사연이 많다. 낙동강 예성천 금천의 세 강과 팔공산 학가산 주흘산의 산줄기가 내려와 만난 예천의 삼강나루에는 옛 정취를 간직한 주막이 있다. 오가는 손님을 한 잔 술로 위로하던 주모가 2005년 10월 숨진 뒤 주막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어렵게 오남매를 키운 주모의 지난 세월이 쓸쓸한 황토 주막에 묻어있다. 함안 악양나루는 가요 <처녀 뱃사공>이 탄생한 곳이다. 1953년 가수 윤항기, 윤복희 씨의 선친 윤부길 씨가 강을 건넜는데 사공이 놀랍게도 20대 젊은 처녀였다. 뱃사공 오빠가 군대를 가자 늙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다. 윤씨는 오빠를 기다리며 애처롭게 노를 젓던 처녀의 모습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노랫말로 만들었다. ꡐ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ꡑ 책은 단순한 나루 풍경뿐만 아니라 강에 기대 살아가는 뱃사공과 어부의 이야기, 사라져가는 나루를 되살리려는 작은 움직임 등도 소개하고 있다.(박광희 記者 韓國日報 2006/12/08 17:22)
삼강주막(醴泉 ꡐ三江酒幕ꡑ觀光名所 만든다 : 慶北道, 復元事業에 12億 投入) [記事] : 경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됐으나 그동안 방치됐던 예천 삼강주막이 옛모습으로 복원돼 관광명소화 된다. 경북도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에 대해 2007년부터 3년간에 걸쳐 모두 12억 원을 투입해 옛모습 그대로 복원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개발키로 했다. 예천 용궁면과 풍양면이 만나는 낙동강 곡류점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강변에 1900년 전후에 건립된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소금배,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이 자주 머무는 곳으로 이용돼 왔다.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 구성의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건축 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클 뿐만이 아니라 옛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이 주막의 주인이었던 유옥연 할머니가 지난 2005년 타계한 이후 오랫동안 보수가 되지 않아 지붕, 기둥 등 목부재 훼손. 퇴락이 심화되고 건물이 전체적으로 기우는 등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도는 우선 문화재위원, 향토사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을 거치고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해 퇴락된 주막 건물을 규모와 형태, 초가지붕 등 원형 그대로 복원해 주모가 있는 옛 주막이 그대로 재현할 계획이다. 이어 삼강 북쪽 낙동강의 하상 정비, 물길 조성, 나룻터 및 나룻배를 복원하고 주변 경관을 수변 문화단지, 생태회랑, 수변 꽃공원 등을 조성키로 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ꡒ삼강주막을 인근 회룡포 마을, 용궁향교 등 향토유적과 연계한 관광벨트가 구축되도록 해 전국적인 역사문화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다ꡓ고 말했다.(양승복 記者 慶北日報 2007/01/16)
삼강주막(옛 모습 되찾는 醴泉 `三江 酒幕') [記事] : 낙동강 700리 줄기의 마지막 주막이던 경북 예천의 삼강(三江)주막이 옛 모습을 되찾는다. 2007년 1월 16일 경북도에 따르면 관리 허술 등으로 훼손이 심한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낙동강 나루터 삼강주막을 2009년까지 3년 동안 12억 원을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관광 명소로 만들기로 했다.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있는 삼강주막은 1900년쯤에 지은 것으로 일제 말기까지 낙동강 하구에서 싣고 온 소금과 내륙의 쌀을 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을 비롯해 시인, 묵객 등이 많이 찾던 곳이다. 소금배가 사라진 뒤에는 강을 건너 서울, 대구 등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붐비기도 했으나 나룻배가 사라진 1970년대 들어 다리를 놓고 둑을 쌓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럼에도 이 주막은 2번째 주인이자 낙동강 마지막 주모이던 유모 할머니가 70여 년 동안 지키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에 도는 삼강주막이 이 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옛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건축 자료로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보고 2005년에 도 민속자료(제304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유 할머니가 같은 해 10월 숨진 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지붕과 기둥 등이 심하게 훼손되고 건물이 기우는 등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도는 문화재 위원 및 향토사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을 거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한 뒤 올해 안에 주막을 초가지붕 등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고 주모가 있는 옛 모습까지 재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낙동강 물길 조성, 나루터와 나룻배 복원, 꽃공원 조성 등을 통해 삼강주막 일대를 역사문화 관광단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경북도 김상준 관광문화재과장은 "삼강주막을 복원해 인근 회룡포 마을 등 향토유적과 연계한 관광벨트를 구축하면 북부지역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효중 記者 聯合뉴스 2007년 1월 16일 (화) 07:02)
삼강주막('豊壤面 三江酒幕 復元된다' : 慶北道 2009年까지 12億원 投入, 周邊 觀光地 開發) [記事] : 풍양면 삼강주막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다. 경북도는 2007년 1월 16일 풍양면 삼강리 낙동강 나루터의 삼강주막을 2009년까지 모두 12억 원을 들여 복원하고 주변지역을 역사문화관광지로 개발키로 했다. 삼강주막은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할머니가 2005년 10월 타계한 이후 방치돼 왔으며, 지난 2005년 12월 경북도 민속자료(304호)로 지정됐다. 도는 문화재위원과 향토사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을 받고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복원계획을 수립한 뒤 2007년 연말까지 1억 5천만 원을 들여 초가지붕 등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도는 이와 함께 2008년부터 2년간 삼강 북쪽 낙동강의 강바닥을 정비하고 물길을 다듬어 나루터와 나룻배를 복원한 뒤 주막 주변에 수변 문화단지와 꽃공원 등을 만들어 인근의 회룡포 마을과 용궁향교 등을 연계한 관광벨트로 조성한다는 복안이다.(醴泉新聞 2007년 02월 02일 00:00:45)
삼강주막(酒幕) [記事] : 연어처럼 모천(母川) 회귀본능을 확인해야 자족하는 시기가 돌아왔다. 해마다 ꡐ사상 최대ꡑ 혹은 ꡐ민족 대이동ꡑ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운 설맞이 귀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귀소(歸巢) 본능과 인간. 아무래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한국인은 어느 민족보다 짧은 시기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와 그런지 더욱 고향의 그늘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최근에는 그런 귀소본능이 단순한 귀성행렬 차원을 넘어 의식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비만 걱정으로 옛 선조들의 채소 위주 식단이 선호되고 한국 전통미를 앞세운 중․대형 아파트가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아파트의 경우 황토벽 문양과 창호지문은 기본이고 현관문을 양개문(兩開門)의 한옥 대문양식으로 만들어 초가지붕만 얹으면 조선시대 주막에 머무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고 한다. 한옥이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자연건축(natural building) 바람을 타고 ꡐ황토방ꡑ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황토흙․밀짚․대나무 등 자연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방바닥을 흙으로 만드는 등 자연친화적으로 시공하는 것이다. 미국에만 수천 명의 자연건축가가 활동하고 흙손을 들고 진흙을 바르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최근 경북도가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는 황토흙 냄새가 100년 넘게 녹아든 조선시대 주막 살리기에 나섰다. 그 주인공은 조선시대 주막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터의 ꡐ삼강주막ꡑ. 1900년쯤에 지어졌다. 낙동강․내성천․금천이 합쳐지는 삼강나루터는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안동까지 가기 전 쉬어가거나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이 주막은 소금과 내륙의 쌀을 교환하던 보부상과 길손의 잠자리이자 시인․묵객의 휴식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05년 10월 국내 마지막 주모(酒母)로 알려진 유옥연(당시 88세) 할머니가 숨지면서 그대로 방치돼 서서히 기울어져 왔다. 호텔과 여관의 원조격인 주막이 뒤늦게나마 제대로 복원된다니 다행이다. 이번 설 귀성길에서 혹시라도 ꡐ우리 것ꡑ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며 잊고 지낸 것은 없는지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그 대상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효심과 혈육간의 우애도 예외일 수 없다. 그 ꡐ귀향ꡑ을 기대해 본다.(김영호 論說委員 文化日報 2007년 2월 16일 (금) 13:17)
삼강주막(朝鮮의 마지막 酒幕 '三江酒幕'의 情趣) [記事] : 벌써 100여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ꡐ삼강주막ꡑ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ꡒ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ꡓ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ꡐ조선의 마지막 주막ꡑ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ꡒ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ꡓ라면서 ꡒ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ꡓ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ꡐ삼강리ꡑ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 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 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ꡐ그은ꡑ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비록 술장사를 했지만 할매는 단아하고 정직했다오. 마을 노인은 ꡒ인정 있고 인심 후했던 주모ꡓ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할매는 옆 동네 술도가에서 탁주를 받아다 팔았소. 당시엔 안주래봐야 어쩌다 멸치나 콩자반이 곁들여질 뿐, 평소엔 소금이 대부분이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 씨는 ꡒ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ꡓ며 ꡒ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ꡓ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할매의 삶은 고단했다오. 강변에 있긴 했지만 주막엔 의외로 먹을 물이 귀했소. 그래서 할매는 매일 마을로 가서, 동이에 우물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왔소. 5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매일을 그렇게 5남매를 키웠으니, 고단할 만도 했을 거요. 할매는 10여 년 전부터 막걸리 대신 소주나 과자를 주로 팔았는데, 소주 한 병에 1000원을 받았다니 수입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오. 전국의 대폿집을 순례해 ꡐ사람아 바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ꡑ란 책을 쓴 화가 사석원 씨는 ꡒ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주모ꡓ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사씨는 할매가 작고하기 2년 전인 2003년 11월 ꡐ삼강주막ꡑ을 찾았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 같은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오. 마을을 가로질러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현대식 다리인 삼강교가 마을과 주막 사이를 가로막고 들어선 바람에, 강 따라 소담하게 자리잡은 동네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소. 동네 노인은 ꡒ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ꡓ고 하더이다.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렸으니…. 도로가 생기면서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다오. 주막은 원래 짚단에 진흙을 섞어 지었는데, 1934년 ꡐ갑술홍수ꡑ 때 물에 잠기면서 한 번 보수를 했다오. 짚단을 얹어 놓은 원래 지붕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슬레이트로 바뀌어 버렸소. 하지만 옛 모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오.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여전하고 할매가 쓰던 토끼굴 같은 부엌도 여전하니 말이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줄지 말이오.(이범진 週刊朝鮮 記者 朝鮮日報 2007년 3월 3일 (토) 13:31)(www.koreastudy.or.kr 2007)
삼강주막(우리 時代의 마지막 酒幕을 찾아서) [記事] : 벌써 100여 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ꡐ삼강주막ꡑ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ꡒ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ꡓ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ꡐ조선의 마지막 주막ꡑ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ꡒ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ꡓ라면서 ꡒ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ꡓ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ꡐ삼강리ꡑ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 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 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ꡐ그은ꡑ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비록 술장사를 했지만 할매는 단아하고 정직했다오. 마을 노인은 ꡒ인정 있고 인심 후했던 주모ꡓ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할매는 옆 동네 술도가에서 탁주를 받아다 팔았소. 당시엔 안주래봐야 어쩌다 멸치나 콩자반이 곁들여질 뿐, 평소엔 소금이 대부분이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 씨는 ꡒ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ꡓ며 ꡒ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ꡓ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할매의 삶은 고단했다오. 강변에 있긴 했지만 주막엔 의외로 먹을 물이 귀했소. 그래서 할매는 매일 마을로 가서, 동이에 우물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왔소. 5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매일을 그렇게 5남매를 키웠으니, 고단할 만도 했을 거요. 할매는 10여 년 전부터 막걸리 대신 소주나 과자를 주로 팔았는데, 소주 한 병에 1000원을 받았다니 수입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오. 전국의 대폿집을 순례해 ꡐ사람아 바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ꡑ란 책을 쓴 화가 사석원 씨는 ꡒ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주모ꡓ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사씨는 할매가 작고하기 2년 전인 2003년 11월 ꡐ삼강주막ꡑ을 찾았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 같은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오. 마을을 가로질러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현대식 다리인 삼강교가 마을과 주막 사이를 가로막고 들어선 바람에, 강 따라 소담하게 자리잡은 동네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소. 동네 노인은 ꡒ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ꡓ고 하더이다.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렸으니…. 도로가 생기면서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다오. 주막은 원래 짚단에 진흙을 섞어 지었는데, 1934년 ꡐ갑술홍수ꡑ 때 물에 잠기면서 한 번 보수를 했다오. 짚단을 얹어 놓은 원래 지붕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슬레이트로 바뀌어 버렸소. 하지만 옛 모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오.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여전하고 할매가 쓰던 토끼굴 같은 부엌도 여전하니 말이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 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 줄지 말이오.(이범진 記者 週刊朝鮮 2007년 3월 6일 (화)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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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