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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17) : 예천8경 중 금당실전통마을과 송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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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朝鮮 太祖도 반해 都邑地로 定하려 했던 明堂 : 文化解說師와 함께하는 慶北의 再發見 - 51. 醴泉 上金谷里 追遠齋·祠堂) [記事] :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금당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정록감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에도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풍수가로 널리 알려진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는 이곳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지만 큰 냇물이 없이 아쉽다고 하여 '금당맛질 반(半)서울'이란 향언도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용문 금당실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와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예천 상금곡리 추원재 및 사당(경상북도지정 민속자료 제82호)에 대해 알아본다. 금당실은 '배날들'을 사이에 두고 위쪽의 '윗금당실', 아래쪽의 '아랫금당실'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행정구역상 윗금당실은 상금곡리, 아랫금당실은 하금곡리로 구분된다. '금당실'이란 이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옛날 중국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 입구에 학고개가 있고, 오른쪽 어깨에 개고개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금계(金鷄)가 앞에 있고, 옥견(玉犬)이 뒤에 있는 것이 마치 중국 양양 고을의 금곡(金谷)과 같다"고 했다. 상금곡리는 배산임수형 마을로 뒤쪽에는 오미봉(五美峰)을 비롯한 해발 200m 내외의 산들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금곡천(金谷川)이 휘감아 흐르는데, 금곡천 주변에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하여 금당실 사람들은 명당에 걸맞게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마을 뒤쪽 계곡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쉽게 피난 갈 수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주변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복된 땅이라고 전했다. 금당실에는 감천 문씨 문억향의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1496~1553)이 함창에서 이사해 세거했다. 함양 박씨 박종린은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외사촌이며, 외조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다. 이후 금당실은 함양 박씨들이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면서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박종린(朴從鱗, 1496~1553)은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했다. 그 후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및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벼슬을 그만두고,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박종린은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세칭 향오린(鄕五鱗:형제 5명이 모두 문과에 등과)이라 불렸는데, 그의 형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에 아버지 박눌(朴訥)이 병조참판에 추증(1533년)되기도 했다.
사당 기둥에 연꽃무늬 새겨 '예스러움' 더해(이재완 학예연구사에게 듣는 건축양식) : 금당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을 올리는 금곡리 추원재 및 사당(上金谷洞 追遠齋 ·祠堂)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1532년(중종 27) 과거에 합격한 이후 홍문관 교리와 이조정랑을 역임한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朴從鱗)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656년(효종 7)에 건립한 것으로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2호로 지정되었죠.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추원재(강당) · 대문간 등 4동이 동일 축선상에 배치돼 있고, 담장의 오른쪽에는 영사정이 별도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답니다. 추원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며 막돌기단을 쌓고 막돌초석을 두었으며 앞면에는 둥근기둥을, 나머지에는 네모기둥을 세웠습니다. 또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오량가 구조의 익공집입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장대석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둔 오량가 맞배지붕집이기도 하죠. 이 집은 기둥 상부의 익공쇠서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했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넣어 짜임과 양식이 매우 예스럽다할 수 있습니다. 이 학예사는 "금당실은 사람이 잘살 수 있었던 복된 땅이자,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세거지로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며 "향후 예천지역 인물들을 주제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인물과 연계된 관광지 개발에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장석원 記者 慶北日報 2010-12-17)
금당실([週末旅行] 慶北 醴泉 金塘室 마을 : ◆ 꼭 걷고 싶은 길 (34) / 금당실 마을 ◆ ) [記事] : 경북 예천 금당실 마을은 정감록의 십승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명소로 꼽힌다. 주변 경치가 좋고 지형이 뛰어난 곳으로 금당실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금당실 마을은 `물에 떠 있는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해서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도 불린다. 600여 년 전인 15세기 초 감천 문씨가 이곳에 정착했고 그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과 원주 변씨 변응녕의 후손이 그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른다. 금당실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처럼 연결된 돌담길이 옛 양반 문화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다른 민속마을과 달리 이곳의 한옥은 개방돼 있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마을 서쪽에는 약 800m에 이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금당실 마을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송림은 소나무 수령이 100~200년 정도, 둘레가 약 20~80m에 이르는 줄기가 구불구불하게 자란 자연림으로 2006년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 KBS 드라마 `황진이`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길 걷기 전문 여행사 블루라이프(www.hibluelife.com)에서 2011년 3월 12일(토요일) 경북 예천군 금당실 마을 걷기 상품을 판매 중이다, 봄이 오는 산골마을과 천연기념물 송림을 즐긴다. 코스는 약 12㎞, 4시간 소요된다. 점심식사로 오징어, 돼지고기 등의 연탄구이가 제공된다. 요금은 4만7000원...(每日經濟 2011.03.06 14:56:53)
금당실(後進 養成 힘쓰던 선비精神 느껴져 : 醴泉 金谷洞 追遠齋 金塘室 入鄕祖 朴從鱗 追慕 爲해 建立 1988年 慶北道 民俗資料 第82號 指定) [記事] :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금당실이 있다. 조선시대 풍수가로 널리 알려진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에도 이 마을만큼은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해 '금당맛질 반(半)서울'이란 향언도 생겨났으며 이처럼 용문 금당실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다. 금당실에는 감천 문씨 문억향의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1496~1553)이 함창에서 옮겨 왔다. 함양 박씨 박종린은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 외사촌이며, 외조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다. 이후 금당실의 함양박씨들은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해 명문으로서 지위를 굳히게 된다. 박종린(朴從鱗·1496~1553)은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한다. 그 후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및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는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해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벼슬을 그만두고,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금당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 올리는 금곡동 추원재 및 사당(上金谷洞 追遠齋 및 祠堂)이 있다. 이 건물은 1532년(중종 27) 과거에 합격한 이후 홍문관 교리와 이조정랑을 역임한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朴從鱗)을 추모하고 제사하기 위해 1656년(효종 7)에 건립한 것으로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2호로 지정됐다.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추원재(강당)·대문간 등 4동이 동일 축선 상에 배치되고, 담장의 오른쪽에는 영사정이 별도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추원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오량가 구조의 익공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장대석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둔 오량가 맞배지붕집이다. 이 집은 기둥 상부의 익공쇠서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넣어 짜임과 양식이 매우 예스럽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1-04-08)
금당실(달빛 가득, 古家에서 風流를 만나요 : 18日 午後 8時부터 醴泉, 義城 等 儒敎文化圈에서 同時 進行) [記事] : 유교문화권 9개 시ㆍ군에서 매 주말 밤마다 진행되고 있는 세계유교문화축전 고가음악회가 이번 주말인 2011년 6월 18일에는 의성 사촌마을과 청송 송소고택, 예천 금당실 마을에서 동시에 열려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세계유교문화축전 고가음악회의 올해 첫 공연이 열리는 예천은 18일(토) 저녁 8시부터 금당실마을 전통한옥체험관(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별,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선율’(예천문화원 주관)이란 주제로 대금 연주, 색소폰 합주, 대중가요 등의 다양한 공연이 진행돼 관객과 하나 되는 마당이 연출될 예정이다... 세계유교문화축전 조직위원회는 다음 주말인 오는 25일에는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과 봉화 만산고택, 영양 여남강당 등 3개 지역에서 고가음악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세계유교문화축전 조직위원회는 경북 북부지역 9개 시ㆍ군에서 매 주말마다 테마가 있는 공연을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 4월부터 오는 10월까지 모두 56차례 고가음악회를 진행해 지역 주민과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축전 조직위원회는 “이번 고가음악회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문화체험의 장이 되고, 지역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는 한국적 풍류를 느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고 밝혔다. 「세계유교문화축전 2011(World Confucianism Festival)」은 “사람을 받들고, 세상을 사랑하고”를 슬로건으로 유교문화권 9개 자치단체(안동시, 영주시, 상주시, 문경시, 의성군, 청송군, 영양군, 예천군, 봉화군)와 안동MBC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유교문화 산업화 프로젝트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 2년째를 맞고 있다. 주요 사업은 오는 11월까지 고가음악회, 라디엔티어링, 한국과자축제, 삼강주막 막걸리축제, 하회마을 실경뮤지컬 부용지애, 유교음식 페스티벌, 부석사 불교문화축제, 세계유교연맹 건립, 지역 전문인력 육성, 유교문화 UCC 공모전 등이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전통한옥체험관 : 금당실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 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醴泉뉴스 2011년 06월 17일)
금당실 : 집성촌을 찾아서...... 함양박씨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금당실마을| 박종열 | 10.02.13 12:51/ 집성촌을 찾아서...... 함양박씨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금당실마을)/ 금당실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니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이곳!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또한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했고 사위인 박종인과 변응영이 정착하여 지형을 피니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으로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組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군지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박종린 선조가 입향 이래 300여 호가 거주하며 예천군의 명문가로 번성했던 금당리의 함양박씨는 지금도 10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 올리는 추원재, 박종린의 셋째아드님이신 박운의 위패를 모시고 재향을 받드는 재실(경담재,鏡潭齋) 등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또 인근 원류리에는 1600년대 건축한 감노루(유형문화재 제292호)와 입향조 박종린의 후손 박세주가 용문면 대제리로 세거지를 옮기면서 건축한 고택(미산고택, 문화재자료 제137호) 등이 있어 한번쯤은 가볼만 하다. 최근에는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주요인물로는 입향조 박종린(朴從鱗)과 그의 삼자(三子) 박운(朴蕓), 박수서(朴守緖), 박정시(朴廷蓍), 박손경(朴孫慶),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등 충신과 열사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입향조 박종린(1496~1553)은 상주 이안에서 처가인 상금곡리 북촌(北村)에 우거(寓居)하였다. 자는 자룡(子龍), 찰방 눌(察訪 訥)의 아들 현감 문숙손(文叔孫)의 사위로 함양박씨 시조 상서공(尙書公) 휘 선(諱 善)의 16世로 문원공 박지빈(朴之彬, 2파 파조)의 후손이다. 성품이 근검하고 사치를 싫어하고, 덕을 쌓고 자녀 교육으로 업을 삼았다. 1516년(중종11)에 진사시에 함격 1532년(중종2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었다가 주서(注書)로 한림원 남상(翰林院 南床)에 뽑혀 홍문관의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1535)로 옮겼고 수찬(修撰)으로 승진되고 사간원 정언(正言) 지평(持平), 홍문관 교리(敎理)를 지내고 시강원 설서(設書), 문학(文學), 헌납(獻納),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벼슬에 뜻이 있을때 김안로의 횡포가 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도의 수양과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여 칭송을 받았고 한원선생안(翰院先生案)에 실려있고 예천 금당실에 물러와 살면서 대대로 살고 있다. 후손들이 추원사(追遠祠, 永思亭)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종린의5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종린은 그들 중 막내이다.
박운(朴蕓, 1535~1606)은 자는 사수(士秀) 호는 병백당(病栢堂) 입향조 박종린의 셋째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퇴계 이황의 지결(旨訣)과 심법(心法)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여 문학과 행실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성품 견확(堅確)하여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불의를 보면 굴하지 않고 바로잡기에 온힘을 기울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 불리었으나 오르지 않았지만 아들 수근(守謹)이 임진왜란(1592)때 호성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경담재 경담사에 배향되었다.
박수서(朴守緖, 1567~1627)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尤溪) 조선중기(명종22~인조5)의 문신·학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지(芝)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건원릉 참봉과 창릉참봉을 역임하였으며 1609(광해군1)년에 문과에 급제 시강원 설서(侍講院 設書)에 제수되었다. 성균관 전적을 재직 중 인목대비를 폐하려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귀향하였다. 다시 예조좌랑과 정랑 성균관 사예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 특명으로 북도순무어사(北道巡撫御使)가 되어 입조(入召)한 후 북관(北關)으로 가서 민심을 수습 진무(鎭撫)하고 돌아오니 대비가 이미 폐출되어 서궁에 부처되었으므로 곧 소백산 우수동에 들어가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뒤 통례원좌우통례, 상의원정, 동부승지, 북평사, 우승지를 거쳐 1621년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가되었다. 이때 조우인과 입직하다가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비판의를 지은 것을 백대형이 이이첨의 무리에 고변 조우인과 함께 피체 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1623년(인조1)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으며, 울산부사가 되었다. 1627년 우승지가 되어 호란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위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왔다. 저서로는 우례일고가 있으며 사후에 영남사림의 발의로 순을의 도고서원에 봉안되었다.
박정시(朴廷蓍 1601-1672) 자는 길부(吉孚) 1623년(인조 11)에 형 정협과 함께 생원이 되고, 1639년(인조 17)에 식년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도사와 형조 정랑을 거쳐 결성, 영암, 서산 등 3군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서산군수 시절 그곳 태안(泰安) 고을에서 5년간이나 부임하는 원님마다 놀라서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자진하여 고을 원으로 가게 되었다. 관원의 딸인데 아전이 급탈하려 할 때 말을 듣지 않아 참혹하게 살해 오동나무 밑에 암매장 당한 원혼이 한을 풀어달라고 부임한 원님에게 나타났는데 모두 놀라 사망 한 것이다. 원귀의 원을 풀어주고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준 날 밤 자정에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보은의 인사를 한 후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라하여 그 여혼(女魂)의 지시에 따라 오동나무로 거문고 3장(帳)을 만들어 하나는 임금에게 하나는 태안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 책 1부와 같이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 거문고는 원한을 풀어준 보은으로 가정이나 국가의 길흉가사 있을 때마다 스스로 울어 미리 길흉사에 대처케 해서 큰 도움을 주었기에 박정시는 자명금이라 했는데 그 후 그의 현손 손경(孫慶)은 여혼(女魂)의 이름을 따서 태랑금(泰郞琴)이란 이름을 붙였고 대대로 가보로 여기며 소중히 보관하였다. 그러나 같은 마을의 세도가의 압력에 빌려주었다가 줄이 끊어지고서부터는 새줄을 이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전한다. 박정시는 성격이 강직하고 담력이 세며 의협심이 강했다. 또한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 올랐다. 사후에 좌승지(1745)에 증직되었다.
박경손(朴慶孫, 1713~1782)은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南野)이다.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덕성스러워 1777년(정조1년) 경상도 관찰사 추천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부모 모시기 위해 오르기를 사양하였고, 1779년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이 그의 학문이 선비들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임금께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임명받았으나 역시 오르지 않았다. 당시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그의 높은 학문과 효행을 전해듣고 행차했는데, 갑작스레 방문을 맞은 그는 평소에 부모를 시봉(侍奉)하던 간결한 오찬(午餐)으로 정성껏 대접하였다. 군수가 오찬을 마치고 너무나 감미로와 이르기를, “어떻게 음식을 장만해서 이렇게 맛이 나느냐?”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가난한 집에서 돈 들여 부모 봉양을 못한 죄책을 느껴 해마다 이른 봄에 논에 있는 우렁이를 주워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쓰는 것 뿐”이라고 했다. 군수는 부모를 위하는 그 정성에 감복하여 무엇인가 음성적으로 그를 돕고자 백성들에게 우렁이 가루를 구해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우렁이 가루를 갑자기 구할 수 없었고, 다만 그의 집에서 조금 구해 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금품을 보냈으나, 그는 내가 돈을 받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굳이 사양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처럼 지조와 효행이 돈독하여 세인의 귀감이 되었고, 부모를 모심에 하루도 빠짐없이 의관(衣冠)을 정제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하고 부모의 거처에 손수 군불을 지피고 평생 시중을 게을리 한 일이 없어서 학문과 도덕을 겸비한 희대의 도덕군자(道德君子)로 칭송을 받았고, 그의 많은 작품은 제자들의 시금석이 되었다. 도의를 바로 잡고 경상(經常)을 지켜 왔으므로 사람이 그 도덕을 추앙하였다. 저서에 『논어혹문정의(論語或問精義)』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고 『남야집(南野集)』이 전한다. 금곡서원(金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열(朴烈 1902~1974) 의사의 초명은 준식(準植), 일명 혁(爀). 아버지는 영수(英洙)이다.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으나 2학년 때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 퇴학당했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을 다녔다. 일본에서 선생은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접한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1922년 2월경 선생은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사상 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반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선생은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흑도》·《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4월 선생은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었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일왕 폭살을 위해 추진한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선생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해방 후 23년의 옥고를 마감하고 초대 거류민단장을 5대까지 역임하다가 1949년 귀국해 신조선 건설 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중 6·25사변을 만나 납북됐다. 1974년 1월 향년 73세로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2007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 되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8년 재정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정부수립 축전에 참석하고, 이듬해 5월 다시 귀국해 서울에 머물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74년 북한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자료제공 박일순(금곡서원 보존회 별유사)/ //cafe.daum.net/hbdkj/ 함박대경종(daum 2010)
금당실(솔둥지는 金빛 햇살에 춤추고, 모래밭은 銀빛 江물에 흥얼대고…) [記事] : 부라보콘 값이 150원 하던 유년 시절. 테마파크도 리조트도 없던 그때 여름방학이 되면 너도나도 쪼르르 시골로 달려갔다. 시외버스 내려서 완행버스 갈아타고 신작로를 한참 달려 닿는 곳은 할머니 할아버지 사시는 큰집이거나, 큰외삼촌 농사짓는 외갓집이거나, 막내 삼촌 소 키우는 작은집이거나 그랬다. 놀거리라고 해봐야 물장구치고 매미 잡고 강냉이 따는 게 전부. 하지만 요새 아이들이 모르는 재미가 거기 있었다. 익지도 않은 머루 따먹고, 방 안으로 날아든 박쥐에 놀라 잠을 깨고, 낮에 같이 놀던 누렁이가 저녁상에 탕으로 올라와 울고불고 하던 그런 추억 말이다. 멀지 않은데 아득한 시간이다. 시골집 동네는 도시의 변두리처럼 변해버렸고 기억은 벌써 희미하다. 이번 방학, 마냥 만만하고 정겨웠던 시골 외갓집의 여름을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건 어떨까. 도라지꽃 핀 예쁜 돌담길, 금당실마을 : 도시 사람의 때가 덜 묻은 시골을 누가 물어보면, 머릿속으로 덕유산 자락의 전라북도 땅이나 소백산과 주왕산 사이 경상북도 내륙을 더듬는다. 서울과 가까운 강원도는 산자수명한 곳마다 리조트고 골짜기마다 구석구석 펜션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은 흙냄새와 사람의 체취가 아직 비슷한 농촌 가운데 하나다. 굴뚝이라곤 군(郡)을 다 뒤져봐야 읍내에 있는 흙벽돌 공장 하나뿐. 특별할 건 없다. 불과 몇 해 전에야 회룡포와 낙동강의 마지막 주막 터가 유명해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이제 그래서 귀한 시골이다. 예천읍에서 용문사 쪽으로 가다 보면 낮은 돌담이 이어진 마을을 지나게 된다. 금당실마을이다. 땡볕 무서웠던 지난 주 목요일 이른 아침. 용문면사무소 맞은편 반 백년은 족히 묵었을 정미소 앞에서 만나기로 한 문화관광해설사를 기다리는데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노올러 왔니껴? 집에 가가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드리니껴?" 아침거리라도 해오는 참인지 손에 푸성귀를 들었다. 몸뻬의 물방울 무늬가 곱다. TV만 켜면 온통 흉흉한 소식인데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일 인심이 이 마을엔 아직 남은 듯했다. 금당실은 에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ㆍ전란이 미치지 못하는 땅)라고 기록돼 있다. 마을의 자랑은 7㎞ 남짓 되는 돌담이다. 황토를 이겨 돌을 쌓았는데 막돌담장, 토석담장, 기와담장이 어깨 높이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해설사 정학진 씨에 따르면 돌담길은 본래 24㎞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게 폭을 넓혔지만 예전엔 나무지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였다고. 이 마을에 와서는 길을 잃고 미로 속을 헤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단다. 오래된 한옥, 최근에 초가지붕을 새로 올린 집, 시멘트로 지은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사괴당(문화재자료 제337호) 등 예닐곱 채의 고택과 초가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 작은 마을 치고 역사가 깊어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수십 기, 조선 양반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반송재 고택, 구한말 세도가였던 이유인의 99칸 집터 등이 골목마다 숨어 있다. 마을 서북편의 송림은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됐는데 해질녘 금빛 햇살이 사선으로 들 때 반드시 찾아가볼 일. 밥 짓는 연기라도 스며들면 모기에 뜯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운치가 있다. 얘깃거리 많은 곳이니 하루 이틀 먹고 자며 시골집의 정취에 푹 젖을 수 있다. 헐렁한 추리닝과 시장에서 파는 '삼선 슬리퍼' 같은 패션이, 파란 도라지꽃 핀 이 돌담길에선 잘 어울린다.../ 여행수첩 : ●수도권에서 금당실마을로 가는 길은 중앙고속도로보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쪽이 편하다. 점촌함창IC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읍으로 간 뒤 용문사 방면 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중앙고속도로 영주, 예천IC가 가깝다. 영주에서는 장수면과 문수면 거쳐 내성천을 따라 가면 닿을 수 있고 예천에서는 92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가 열린다.(유상호 記者 韓國日報 201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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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