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의 자랑(3621) : 예천8경 중 금당실전통마을과 송림(9)
---
금당실솔숲과 석송령(춤추라, 소나무여 : 저마다의 事緣으로 소나무를 품은 ꡐ솔바람 모임ꡑ의 生態紀行) [記事] : 2007년 3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영우 교수(국민대 산림자원학과)는 집을 나서며 복분자술과 포도주 한 병을 챙겼다. 그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을 ꡐ소나무 사랑ꡑ으로 더불어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 ꡐ자축ꡑ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5년 전 이날 아침 교수회의 자리에서 쓰러진 뒤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곧바로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암 환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기까지 4년 9개월이 걸렸다. 2006년 12월 주치의에게서 ꡒ항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ꡓ는 말을 들었다. ꡒ암 진단을 받은 뒤 휴직 상태에서 전국의 소나무를 만나기 시작했다. 소나무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신비로운 생기를 부여받은 듯하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소나무에서 나오는 솔향기의 청신한 맛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ꡓ 전 교수는 인체의 종양을 말끔히 제거하는 데 소나무의 치유력이 작용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항암 치료와 강의․저술 활동, 현장 답사 등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ꡐ솔바람 모임ꡑ(www.solbaram.or.kr) 회원들의 ꡐ동행ꡑ도 큰 힘이 됐다. 그들의 맑은 기운으로 ꡐ항체ꡑ가 형성될 수 있었으리라. [함께 떠난 ꡐ소나무 기행ꡑ의 인연] : 2007년 세 번째 소나무 생태기행을 떠나는 길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국제 마라톤이 열리는 바람에 대형버스를 다른 장소에 대기시켜야 했다. 전 교수가 준비한 ꡐ자축의 날ꡑ을 이심전심으로 알았는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북 예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대부분 출범부터 함께한 솔바람 모임의 터줏대감들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소나무를 만나러 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일주일 뒤 돌아갈 예정인 일본 주루대학 변영호 교수(비교문화학) 가족도 포함됐다. 이처럼 전국의 소나무를 순례하는 솔바람 모임의 탄생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교수는 2003년 한 일간지에 매주 1회씩 20주에 걸쳐 ꡐ소나무를 찾아서ꡑ라는 글을 연재했다. 항암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화가 이호신 씨와 함께 전국의 ꡐ명목 소나무ꡑ를 순례하는 연재물이었다. 이를 통해 소나무를 다시 보게 된 이들이 같은 해 가을 1박2일에 걸쳐 소나무 기행을 떠났다. 당시부터 함께한 출판기획자 남미은 씨는 ꡒ이전에 숲과 문화 연구회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나무를 가까이하게 됐다. 소나무가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소나무 기행을 하면서 아름다움과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ꡓ고 말한다. 이때의 기행을 계기로 다음해(2004) 2월 솔바람 모임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소나무숲과 명목 소나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덤으로 생활의 에너지와 예술적 영감 등도 챙길 수 있었다. 해마다 6회 가량 진행되는 소나무 생태기행은 호젓한 오솔길만을 향하지 않았다. 구불구불 산길을 대책 없이 헤맨 끝내 소나무 앞에 서기도 하고, 벼락을 맞아 식물의 일생을 마감한 곰솔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때론 지적 갈증을 채울 기회도 마련했다. 원로시인 박희진 선생으로부터 소나무의 품격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변영섭 교수(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한테선 전통 회화에 나타난 소나무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구한말 ꡐ사산송계ꡑ 결성해 소나무 관리] : 이미 소나무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일까. 초보 소나무 답사자를 위한 ꡐ가르침ꡑ은 없었다. 아마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품는 것을 넘어서는 배움은 따로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경북 예천 용문면 상금곡리(금당실 마을)의 용문중학교에 들어서자 운동장 동편에 있는 ꡐ금당실 솔숲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2006년 3월 천연기념물 469호로 지정된 금당실 솔숲은 50m 안팎의 폭에 800여 m의 길이로 펼쳐져 있었다. 여기에 2천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대부분 수령 120년 안팎인데 300년 이상의 것도 50여 그루나 됐다. 이 소나무숲은 마을의 휴식처로서 찬바람의 가림막 구실도 했다. 일행은 순식간에 저마다의 자리로 흩어져 소나무를 만났다. 현지에서 합류한 사진작가 장국현 씨는 소나무 사이에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솔숲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렌즈에 담았다. 1년에 4개월씩 산에서 지내며 받은 산의 정기(精氣)를 솔숲에 풀어놓는 듯했다. 그 주변에서 한국화를 그리는 이영복․이호신씨 등은 스케치북을 앞에 놓고 빠르게 붓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튼실한 소나무를 껴안더니 ꡒ큰 어른을 만난 것 같다ꡓ고 했고, 다른 이는 굵은 소나무에 구멍을 낸 솔잎혹파리 방제 흔적을 바라보더니 ꡒ솔숲에서 어린 소나무를 찾을 수 없는 게 안타깝다ꡓ고 말했다. 이때 전 교수는 한 무리의 탐방객들에게 ꡐ한국형 내셔널트러스트 운동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구한말 격변기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솔숲의 울창한 소나무를 베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이 ꡐ사산송계ꡑ(四山松契)를 결성해 소나무를 다시 심고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ꡒ지금껏 유지되는 금당실 마을의 송계처럼 200여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서구의 내셔널트러스트보다 앞서 생태계 보존의 모범을 만들었다ꡓ고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변영호 교수가 ꡒ조선시대에는 금벌정책만 있지 않았냐?ꡓ고 질문을 던졌다. 국가적으로 나무를 심는 게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ꡒ조선의 산림정책은 나무를 베어가지 못하게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ꡓ며 ꡒ그때 심고 가꾸지 않으면서 산림이 황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ꡓ고 말했다. 전 교수는 ꡒ만일 많이 심는 사람에게 벌채할 자격을 주는 정책을 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ꡓ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사업은 성공 사례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녹화사업에 성공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독일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로 따지면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임산물 연료 대신 화석연료가 쓰이고, 국토 녹화사업이 효과적으로 진행되면서 숲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ꡒ마을의 주인이 소나무인 듯하다ꡓ] : 그야말로 금당실 솔의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조형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비단 굵고 기다란 때문만은 아니었다. 껍질마저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ꡒ기가 엄숙해서 나를 감싸더니 하나가 되는 듯하더라.ꡓ는 말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보유자 이애주 교수(서울대 체육교육학)가 소감을 말하자,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박희진 시인이 가만있지 않았다. ꡒ춤사위 많이 연구했어요?ꡓ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멀리에 있는 이 교수가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듯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 시인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ꡒ춤추지 않는 소나무가 없다. 소나무를 제대로 살펴보면 새로운 춤사위를 개발할 수 있을 것ꡓ이라고 스치듯 말했다. 울창한 솔숲의 쾌청한 정기를 느낀 솔바람 모임 사람들은 전 교수가 준비한 복분자술과 포도주를 반주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에 있는 ꡐ부자나무ꡑ 석송령(石松靈)을 향했다. 600여 년 전 마을 앞 석간천에 떠내려가던 어린 소나무를 건져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이 나무는 마치 용트림을 하는 듯한 신비로운 생김새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석송령은 높이가 11m이고 밑동은 4.65m로 어른 세 아름을 넘으며, 보통 소나무 밑동보다 굵은 가지가 뻗어 있다. 1920년대 말 마을의 부자 노인이 자신이 소유한 토지 6600㎡(1400여 평)를 이 나무에 상속하며 등기까지 마쳤다. 이를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ꡐ석평동의 영험 있는 나무ꡑ라는 뜻의 석송령이라 이름짓고 석송계를 조직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상속 재산으로 인해 세금도 납부해야 한다. 수령 500년 된 팽나무 ꡐ황목근ꡑ(黃木根․천연기념물 제400호)과 함께 인격체로 대접받는 희귀한 사례인 셈이다. 누구나 석송령 앞에 서면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그만큼 인상적인 풍모를 지녔다. 그림 그리는 건축가 김석환 씨는 ꡒ근육이 뭉쳐 있는 듯한 나무의 표정이 인상적ꡓ이라며 ꡒ석송령 뒤로 계곡이 만나 마을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소나무인 듯하다ꡓ고 덧붙였다. 그것은 부자 나무의 위용을 만끽한 대가였을까.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의 소나무(천연기념물 제426호)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령 400여 년으로 추정되는 반송인 대하리 소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옆으로 뻗어 우산 2개를 받쳐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그런데 소나무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ꡐ아픔ꡑ이 전신에 파고드는 듯했다. ꡐ수령이 특이하고 손상이 거의 없으며 관상적인 가치가 크다ꡑ는 정보는 오래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버팀목은 문화재에 대한 예의였는지 모른다. 군데군데 시멘트를 입힌 수술 자국이 선명했고, 지난해 여름부터 솔잎혹파리가 갉아먹은 이파리가 수두룩했다. 이미 문경시 산양면의 존도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425호․2006년 8월7일자로 해제됨)가 말라죽은 터였다. 충남 서천군 신송리 마을에 있던 곰솔은 나무 전체를 방부 처리해 외형이나마 보존하고 있지만 존도리 소나무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대하리 소나무의 병세가 완연하자 솔바람 모임 사람들의 표정은 이내 굳어졌다. 시멘트로 붕대를 한 것도 모자라 늘푸른 빛깔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내년쯤에는 베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여성가족부 이성미 과장은 ꡒ시한부 환자를 본 느낌ꡓ이라는 말로 충격을 고백했다. 사실 대하리 주민만큼 소나무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없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2000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대하리 소나무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수세 약화를 이유로 가지를 자르거나 시멘트를 입히는 외과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대하리 주민 김철한 씨는 ꡒ이파리가 병들 때 시청 산림과에서 방제를 했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다ꡓ고 말했다. ꡒ당시 양봉농가가 민원을 제기하자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공무원들이 관리를 지금껏 미뤄오고 있다. 이제라도 전문가 중심으로 ꡐ특별대책위원회ꡑ를 만들어 회생 대책을 세워야 한다.ꡓ애당초 소나무 생태기행은 대하리 소나무가 마지막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서울행을 서두른다면 고사 위기의 소나무가 솔바람 모임 사람들의 마음에 남긴 생채기가 지워질 리 없었다. 이때 충북 충주가 고향인 신세영 씨가 ꡒ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니 충주의 맏형 같은 단호사 소나무를 둘러보자ꡓ고 제안했다. 한동안 병든 이파리의 잔상 때문에 무거운 공기가 흐르던 버스 안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내 버스는 충주시 단월동의 단호사를 향했다. 오래전부터 단호사 소나무를 화폭에 담아온 이영복 씨는 ꡒ층석탑(원래는 5층석탑이었음) 등 노송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ꡓ고 치켜세웠다.
[솔바람춤으로 응어리를 풀어볼까] : 실제로 단호사 소나무는 병든 이파리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디에서 보더라도 황홀한 자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분재처럼 구불구불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수령이 500여 년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ꡐ청춘시절ꡑ을 보내는 듯했다. 그 푸름에 한껏 빠진 이애주 교수는 소나무에 어울리는 춤을 선보였다. 이미 솔바람 모임 사람들 앞에서 솔바람춤을 보여주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몸짓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동작이었다. 거기엔 앞으로 500년 아니 1천 년을 지나도 변함없이 늘푸른 소나무로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으리라. 소나무 생태기행은 이렇게 솔바람춤으로 응어리를 풀면서 마무리됐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시의 위로일 뿐이다.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ꡐ소나무재선충병ꡑ이 나날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ꡐ재선충병 방제 특별법ꡑ이 제정됐지만 병균을 옮기는 솔수염하늘소를 아직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치사율 100%인 재선충병을 잡지 못한다면 ꡐ민족수ꡑ로 여겨지는 소나무가 한반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솔바람 모임은 조성된 기금을 활용해 오는 4월7일 강원도 홍천 인근의 국유림에 소나무 식목행사를 한 뒤, 소나무재선충 방재사업에 적극 나서려고 한다. 서울 태평로와 을지로 등지에 조성되는 ꡐ소나무 가로수ꡑ의 운명도 재선충병에 달려 있는지 모른다.(김수병 記者 한겨레21 2007년 4월 3일 (화) 08:07)
금당실 송림(김봉규 氏, 嶺南日報 連載 記事 單行本 發刊) [記事] : ...영남일보 김봉규 논설위원이 문화부 기자 시절인 2006~2007에 연재한 '길따라 숲찾아'를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길따라 숲찾아'는 단순히 좋은 길이나 숲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길 이상의 길' '숲 이상의 숲'을 찾아 나선 긴 여정이었다. 멋진 정취와 풍광이 있고, 옛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자취가 녹아있는 곳이다. 시인묵객의 작품 산실이 되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휴식과 재충전의 장이 되기도 하는 그런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처럼 김봉규 논설위원은 웰빙시대 영혼을 살찌우며 인간 삶을 윤택하게 하는 소중한 존재인 좋은 숲과 길을 카메라를 메고 2년간 찾아다녔다. 꽃구름과 신록의 기운이 솟는 봄철에는 쌍계사 십리 벚꽃길, 퇴계 오솔길, 옥포 이팝나무 숲, 백련사 동백림, 목은 이색 산책로, 봉암사 행선(行禪) 길, 제주 평대리 비자림을, 여름 휴가철 더위를 잊게 하는 숲으로는 통도사 입구 보행로, 예천 금당실 송림, 가야산 홍류동 계곡길, 문수산 금강송숲, 의성 사촌 가로숲, 평해~백암온천 목백일홍 길, 소수서원 학자수림, 문경 토끼벼루잔도, 지리산 천왕봉 가는 길, 포항 덕동마을 숲, 금강산 상팔담 가는 길 등을 찾았다... 책 말미에는 숲의 주소와 연락처를 상세히 밝혀 여름휴가철이나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좋은 길라잡이가 되도록 했다. 노벨미디어/301쪽/1만2천원(박종문 記者 嶺南日報 2008-07-04 07:37:49)
금당실 송림(小說家 淸山 윤영근의 十勝地와 可居地 25.豫言家가 禮讚한 吉地 中의 吉地- 金塘室 松林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記事]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은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이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의 마을로 알려진 명당지였다. 예천의 금당실 송림은 인공으로 심고 가꾼 소나무 숲이다. 숲은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고 즐거움을 나누어준다. 최근에는 천연기념물(제469호)로 지정되었다. 용문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 서북쪽에 수해와 방풍을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심은 소나무가 오늘날까지 무성하게 자라 사람들의 심성을 선하게 지켜주고 있다. 금당실 오미봉 아래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심어진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게 우거져 예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에는 삶에 활기를 넘치게 해주는 숲이 있어야 한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숲은 필수적인 요소다. 숲이 없어서 마을이 살기 힘든 곳도 있는데 숲이 마을의 대표 트렌드로 이름을 떨치게 해주는 마을도 있다. 하찮은 소나무가 마을을 전국적으로 띄워 올려주는 큰일을 해주기도 한다. 금당실의 소나무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로 심었던 소나무는 풍수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심고 가꿨던 나무였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충하고 차가운 북서풍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심었던 소나무로 비보풍수의 일종이었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상금곡리 금당실은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이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의 마을로 알려진 명당 지였다. 병화가 들지 않는다는 명당마을로 탈바꿈시킨 것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홍수난리를 막아주고 수구막이를 해준 마을서쪽의 송림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곳의 소나무가 무슨 이유로 금당실을 승지의 마을로 부르게 해주었는지 겨울철 소나무 숲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섣달부터 매서운 칼바람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휩쓸 듯이 불어온다. 아무리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어도 살을 도려낼 듯한 북서풍의 찬 기운은 막을 길이 없었다. 힘이 장사라도 들판의 가운데에 서있지 못할 정도의 강풍이 불어오는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산을 넘어온 센바람이 너른 들판을 지나면서 가속도를 받아 더욱 강한 강풍으로 변한다. 마을사람들은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위한 방법을 찾아야만했다. 바람막이의 일환으로 소나무를 심기로 했던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에 나무를 심자.” 소나무를 심고 난 다음 나무 뒤에 동네사람들이 실제로 들판에 나가 서보았다. 우선 찬바람을 직접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숲이 얼마나 인간들에게 이로움을 주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 샘이다. 무더운 여름에는 마을사람들이 삼복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숲 속으로 모여든다. 믿을만한 휴식공간이 숲 속이 되었다. 용문중학교 동편을 중심으로 폭이 50m 정도 되는 소나무밭에는 무려 2천여 그루가 자라 하늘을 뒤덮고 있다.
(금당실은 비보풍수로 심은 소나무가 척박한 땅을 승지로 만들어 주었다) 120년생의 아담한 소나무가 대부분으로 300년 이상 된 커다란 소나무도 50여 그루나 된다. 학교와 농경지, 민가 등이 인접해 있어서 숲이 사람들을 모여들게 해준다. 쉼터와 간단한 체육시설이 있는 금당실 송림은 마을주민들의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야외수업장이고 마을의 각종 행사나 집회장소로도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는 황금의 장소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명소가 되었지만 금당(金塘)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연못위에 둥둥 떠 있는 연꽃 모양과 흡사한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지켜주는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소나무다. 우리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정한 액막이로 소나무가지를 잘라 금줄을 건다. 그리고 죽어서는 소나무로 짠 나무관속으로 들어가 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나라님이 살던 궁궐이나 민초들의 집도 소나무로 짓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의 애국가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남산위에는 소나무가 자라며 우리들의 기상을 대변해주며 고고한 인품으로 자라기를 기원한다. 한국인에게 생과 사를 넘나들며 함께 살아가는 나무는 소나무뿐이다.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또 멋이 넘치며 즐겨 그리는 산수화속에 등장하는 나무도 역시 소나무였다. 송림의 역사는 깊다. 금당실 마을은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인 복천과 용문사 계곡을 흐르는 지천이 내려간다. 두개의 하천이 만나 넓은 평야를 이루며 복된 땅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름이면 하천물이 범람하고 겨울이면 북서풍의 찬바람을 피하는 것이 당장 필요한 급선무였다. 그래서 금당실 주민들은 수백 년 전에 바람을 막고 수해를 줄이기 위하여 2천m에 이르는 소나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사람의 손을 빌려 가꾼 마을은 천하에 제일가는 십승지의 마을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의 격변기(1892년)에 이르러 송림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되고 말았다. 그해 7월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금을 몰래 캐던 광부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아 내려고 했다. 사나운 노비들을 시켜 광부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몇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살해된 광부는 러시아가 소유한 광산회사의 하수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는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있었다. 마을을 승지의 마을로 지켜온 것은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뒷산 오미봉덕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을은 크게 보면 배 모양의 형국으로 오미봉이 배의 돛에 해당된다. 핵심이 되는 중심이다. 배에서 돛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그런 오미봉을 허물고 금을 캐낸다니 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격분된 행동은 광부들을 집단으로 몰아내는 폭행치사 사건이 일어나고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잡혀간 노비 30여명의 옥바라지를 하고 처형의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위하여 소나무를 잘라 팔아야했다. 키가 크고 곧게 자란 소나무는 그 무렵 대부분이 잘려나가고 송림은 순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소나무는 굽거나 휘어져서 볼품이 없는 앙상한 나무만 살아남았다. 현재 자리를 지켜주는 소나무는 그때 살아남은 것들로 작거나 쓸모없는 것들이 자란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굽어진 가지와 아무렇게나 자란 가지가 눈요기 감으로 변했다. 요사이는 생김새가 조금은 이상해야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고 기묘한 가지의 소나무가 더 많은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소나무의 역사인 샘이다. 인생역전이요 볼품없는 흉이 복으로 변한 것이다.
반듯하게 쭉쭉 자라던 소나무는 잘려나가고 공터로 변한 곳에는 다시 소나무를 심어야 했다. 잘린 나무로 인해 허한 공터의 자리는 승지의 땅이 아니었다. 맨땅에는 다시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 바람막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이 고장 출신으로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관직을 마치고 금당실로 내려와 99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송림보호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지켜온 소나무는 지금까지 내려오며 급기야는 오늘날 천연기념물로 살아남았다. 그는 소나무가 죽거나 상하면 동네 사람들도 소나무처럼 죽거나 마을이 없어질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과 같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부티 나게 마을을 지켜온 소나무가 마을의 희망이며 자존심이다. 마을을 지켜오며 십승지의 명맥을 이어준 것이다. 고마운 소나무라 하겠다. 금당 송림은 마을의 자존심이었다.(무등일보 2010-06-07)
금당실 송림 : 예천 금당실 송림(자료=예천군) | 예천신문 | 2010.04.03. 11:11/ 예천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 2006. 3.28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542-1 외/ 소유자 : 예천군/ 자세한 설명 : “예천 금당실 송림”은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는 땅을 일컫는 십승지지의 한 군데로 알려져 있는 예천 용문면 금당실 마을의 수해방지와 바람막이를 위하여 조성된 송림이다. 금당실 서북쪽에 위치하는 숲으로 오미봉 밑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수백 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 학교, 농경지 및 민가와 인접되어 있다. 금당실 송림은 상금곡리가 낙동강 지류인 복천과 용문사 계곡과 청룡사 계곡으로 흐르는 계류가 만나는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어 해마다 여름철 하천물이 범람하므로 수해방비와 겨울철 북서한풍을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조성하였으나,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되어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구출 비용 마련을 위한 나무 벌채가 심하여 1895년(고종 32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이 마을 보호를 위하여 이 숲을 보호하고 관리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휴식처와 행사의 중심지로 활용되는 등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큰 마을 숲이다.(daum 2010)
금당실 송림(마을을 감싸 안은 傳統마을숲 /醴泉 金塘室 솔숲 /250~300年 된 巨木이 만든 ‘솔 둥지’) [記事]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은 조선 중기에서 ‘난세에도 전쟁이나 흉년의 피해가 없는 길지’로 꼽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다.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든 지형은 소백산 줄기의 높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둘러싼 넓은 들과 마을을 굽이쳐 흐르는 금곡천이다. 한 가지 허점이 있었으니, 마을 앞쪽의 터진 곳이다. 1500년대에 이런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는 솔숲이 조성됐다. 오미봉에서 금곡천을 따라 정자산까지 2㎞에 이르던 솔숲은 금당실 마을을 완전히 감싸 안는 형태였지만, 지금은 그 중 600m 가량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이 ‘솔 둥지’라고 부르는 마을숲에는 수령 250~300년 된 소나무 거목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소나무 하나하나에는 예천군이 관리한다는 표찰이 붙어 있다. 박희식 예천군 문화해설사는 “전에는 숲이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쉬고 생활하는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재 비슷한 공간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숲 속에는 좁은 오솔길만이 나 있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마을을 둥지처럼 보듬은 솔숲과 산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한다면 한옥 체험마을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홍섭 環境專門記者 한겨레新聞 2011-08-10)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