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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25) : 예천8경 중 초간정 및 원림(1)(附 예천방문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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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우리 百科事典의 産室 草澗亭 : 醴泉郡) [記事] : 경상북도교육연구원에서 편집한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정자에 대한 기사로, 경상북도교육청에서 2003년 12월 30일에 발행한 <내 고장에 깃든 조상의 얼을 찾아서> 162-167쪽(6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초간정(4. 聞慶과 尙州, 醴泉 : 코스 3 醴泉 - 草澗亭에 올라 듣는 물소리 새소리) [記事] :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저서로, 돌베개에서 1997년 12월 15일에 펴낸 <경북 북부> 4번 코스 3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경상북도에서 북부에 해당하는 문경 상주 예천 봉화 하회 안동 의성 영양 청송 울진 영덕 등을 10개의 답사코스로 엮었다. 경북 북부는 양반문화뿐 아니라 불교문화, 민속문화 등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의 전통 문화를 가장 짙게 맛볼 수 있는 답사의 황금 코스이다. 특집으로ꡐ조선의 서원ꡑ을 실었다. 우리 문화유산을 직접 느끼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감성의 과소비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계기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답사여행 안내서이다. 지난 15년 동안 문화유산의 현장을 찾아 구석구석을 답사했던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체험과 살아 있는 지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머리에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인 유홍준 교수의 해설을 넣어 여행의 전체 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으며, 부별․코스별 개관을 실어 가고자 하는 곳의 구체상을 머리에 그릴 수 있도록 했다. 또 본문에는 답사지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기초적인 답사 지식, 전설, 인물에 얽힌 이야기, 문양, 그림, 사진 등을 수록하였다.『답사 여행의 길잡이』에는 우리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답사 정보 뿐 아니라, 찾아가는 길, 잠자리, 먹거리 등 기본적인 여행 정보도 충실히 담겨 있다. 권지도, 부지도, 코스별 지도를 그려 넣었으며, 특별히 찾기 어려운 곳에는 상세도를 넣어 여행지를 찾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각 답사지에는 골목길 하나하나까지 설명해주는 친절한 길 안내를 실어 지도와 함께 이용하도록 했다. 또한 숙식 시설의 전체 윤곽을 잡아주고 특별히 좋은 곳은 전화번호까지 적어놓아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각 권 부록에는 각 지역을 알차게 볼 수 있는 주제별 코스, 기차․고속버스․시외버스 시간표, 각 지역 문화재 안내문 모음 등이 수록되어 있다.[예스24 提供]
초간정(慶北 醴泉 「草澗亭」: 韓國의 庭園 : 11) [記事] : ◎선조 때 학자 초간공의 별서 정원//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예천읍에서 문경쪽 12㎞ 지점 송림이 울창하고 기암괴석 사이로 계류가 흐르는 경승지의 암곡에 세운 초간정(문화재자료 제143호)은 본가에서 2㎞ 떨어져 있는 초간 권문해 공(1534~1591년)의 별서 정원이다. 49세 때(선조 15년) 창건했으며 도승지 박승임이 「초간정사」현판을 썼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고 광해군 4년(1612년) 후손들이 재건했으나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또 붕괴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고종 7년(1870년) 현손이 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세 번째 세운 것이며, 팔작지붕의 건물로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이고 4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석조헌․화수헌․백승각을 함께 세웠으나 부속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정자와 현판만 남아있다. 초간공은 퇴계 선생의 문하생으로 학자였으며, 명종 15년(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부승지, 대구부사 등을 지냈다. 특히 최초의 백과사전격인「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여 큰 업적을 남겼는데 대동은 동방대국을, 운부군옥은 운별로 분류한 사전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고금 문적을 참고하여 단군시대부터 편찬 당시까지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 등을 총망라한 20권 20책 목판본이며 선조 22년(1589년) 편찬을 완료했다. 초판목 판목은 보물 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의 자제 별(鼈)도 해동잡록 14권 14책 필사본을 이 곳에서 저술했는데 대동운부군옥과 상호 연결되는 최초의 인물사전이다. 종택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3대 종손 권영기 씨(56)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최근 인접한 곳에 철제 출렁다리가 가설되어 초간정 출입이 편해졌고 주변 2천여 평의 경승지는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해 준다.(글 조명동 編輯委員 京鄕新聞 1994-08-12)
초간정(慶北 醴泉 草澗亭 : 숨은 秘境, 氣勢 좋은 溪谷물도…날 세운 겨울바람도…暫時 쉬었다 가는…) [記事] : 가볍게 다녀올 곳이 없는지 고민했다. 생각도 할 겸 오고가는 거리 부담이 없는 한나절 길이 좋겠다 싶었다. 예천이 눈에 들어왔다. 순전히 자의적 판단이다. 대여섯 번 가본 곳이지만 안 본 곳이 더 많은 곳이다. 국회의원 선거취재 아니면 문상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천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안타깝기 짝이 없을 것이다. 초간정(草澗亭)은 예천 토박이 퇴직 공무원으로 고향 문화유산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용성씨(67)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사색하기 좋은 곳이라 했다. 맞닥뜨리는 순간 '저건 건축물이 아니다'고 여겨졌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리는 용문사 계곡의 한 굽이에 멈춰선 바위 더미 위에 정자를 띄웠다. 원래 초간정사(草澗精舍)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초간정이 됐다 한다. 정사는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고, 그냥 '정(亭)'이면 노는 의미가 강하다. 수학하는 공부방이었으니 당연히 초간정사가 맞다는 것. 그러나 고개가 갸웃해졌다. 공부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정자가 아닌가. 필시 고고한 조선의 선비들도 저 대청마루에 올라 한바탕 놀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정도라면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구분될 수 있겠는가. 300여년 된 소나무 앞 벤치에 앉아 정확히 424년 된 초간정을 다시 바라봤다. 계곡의 찬 얼음이 초간정을 더 춥게 하는 것 같다. 온 마음이 쏠렸지만 더 이상 입댈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다음에 올 사람에게 괜한 불편이 아닐까 생각했다.(박재일 記者 嶺南日報 2006-01-26 07:55:54)
초간정(慶北道, 草澗亭 等 16件 國家文化財 申請) [記事] : 경북도는 2006년 5월 26일 문화재로 가치가 높고 역사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도지정문화재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도는 이 달 말에 도지정문화재인 양진당(養眞堂)과 문경 봉암사 극락전(極樂殿) 등 6건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해 줄 것을 문화재청에 신청키로 했다. 또 예천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史蹟)으로, 포항 상달암(上達庵)을 비롯한 9건은 중요민속자료로 각각 승격해 주도록 요청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도는 2006년 하반기에 도지정문화재인 성주 한개마을과 영덕 괴시마을, 예천 금당실마을 등을 국가중요민속자료(전통민속마을)로 지정해 주도록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다.(嶺南日報 2006-05-26 21:51:35)
초간정(草澗亭), 초간정사(草澗精舍) [亭子] : 용문면 죽림리 350번지에 있는 정자로, 문화재자료 제143호(1985.8.5 指定)이다. 정면 3칸(6.9m), 측면 2칸 (4.75 m), 목조와가(木造瓦家) 팔작(八作)지붕이다. 이는 원류(院流)마을 앞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奇岩塊石)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경승지에 우뚝 서 있다. 큰 자연암석(盤石)의 기단 위에 선 이 정자는 초간 권문해(草澗權文海(1534-1591)가 49세 때인 1582년(선조 15)에 정사(精舍)로 창건하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저술한 곳인데, 임진왜란(1592) 때 불타고 없어졌던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재건했다가 병자호란(1636)의 와중(渦中)에 다시 붕괴되었다. 남야 박손경(南野朴孫慶)이 찬(撰)한 중수기문(重修記文)에 의하면, 현존 건물은 초간(草澗)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현손(玄孫)이 세웠다는데, 당시는 석조헌(夕釣軒), 화수헌(花樹軒), 백승각(百承閣)을 함께 세웠으나 현판과 정자만이 남아 있다. 평면 구성을 자연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세운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간(通間)의 대청(大廳)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측배면(側背面)은 단애(斷崖)를 이루어서 사면으로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후손이 정자의 내 건너편에 권문해신도비(權文海神道碑)를 1974년 3월에 세웠다. [傳說] : 1) 예천 권씨 종가(醴泉權氏宗家)에서 옛날에 정자 둘레를 물구나무서서 100바뀌 도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하여 어느 초립동이 나서서 99바뀌를 돌고 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화가 나서 도끼로 정자를 부서 버리겠다고 정자 기둥을 찍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홍현기). 2) 옥매(玉梅)라는 기생이 장고춤을 추다가 물에 떨어져 죽어서 그의 어머니가 와서 정자를 부수겠다고 도끼로 정자의 기둥을 찍은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淸臺 權相一의 詩] : 시내 풀 푸르고 푸러러 티끌에 물들지 않아/ 옛 어진 이 끼친 꽃다움 다시 사람에게 쫓이네/ 먼 마음은 천종록(千種錄)을 사례(謝禮)하고저 하는데/ 작은 집 처음으로 만력(萬曆)의 봄 이루었네/ 붓은 양(陽)주에 내려 의리로 뿌리삼고/ 책상머리 글에 정신 부치는고야/ 내 와서 손 씻고 끼친 책 헤쳐 보니/ 상자에 넘고 차서 정히 가난치 않노라/(醴泉郡邑誌 1780 1841 1895, 醴泉郡誌 1939, 朝鮮寰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초간정(가볼만한 곳 : 草澗亭) [記事]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자리잡은 초간정, 소백산맥을 끼고 우거진 잡목 속에 맑은 시냇물을 휘감은 조용하고 아담한 곳에 자리잡았다. 좌우 산수와 초목이 울창하여 경내 풍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전국 각지에서 찾고 있다는 용문사가 있기에 그 가는 길목 초입에 자리잡은 초간정은 그냥 스쳐 버리기가 일쑤인 것 같다. 원명은「초간정사」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후대인들이 초간정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조선조 명종 때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학자로 알려진 초간 권문해 선생이 임금을 보필하다가 국사를 잠시 뒤로하고 이 곳에 머물면서 수양도 하고 사색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지금 모습의 정자는 후손들이 초간 선생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당시 초간 선생은 청빈하기로 이름나 사각이 반듯한 정자 모양은 필요치 않았고 곡초로써 지붕을 덮은 움막이면 만족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대구~서안동 인터체인지까지 1시간 남짓한 거리로 이 곳을 벗어나 30여 분 가다보면 물 맑고 풍치가 아름다워 부르게 된 예천읍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서 용문면까지 8km. 가는 길목 곳곳에는 한 겨울이라서 인지 주변 풍경이 을씨년스럽게 초라하고 쓸쓸함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말끔히 단장되고 포장된 도로는 시골길 맑은 공기와 함께 쾌적함 또한 느끼게 한다. 신라시대 수주현으로 불렸다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예천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아 그 고장 이름에 대단히 긍지를 갖고 있는 듯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효행이 지극했던 도씨 부부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고 활 생산지로 전국에 이름을 날리면서 세계를 제패한 명궁의 고장이라는 생각도 잠시, 시냇가 바위 위에 정갈스럽게 세워진 정자를 만나게 된다. 용문사 가는 길 그 왼편에 자리잡아 얼핏 지나치기 쉽게 시냇가 옆 언덕에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가던 길을 벗어나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10여 평 남짓한 간이 주차장. 수 백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소나무 수 십 그루가 숲을 이루 듯 수량이 적어진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듯 스산한 겨울바람에 앙상한 가지가 서로 부벼대는 소리가 정감을 주기도 한다. 빛바랜 안내판이지만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정중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내직을 두루 거치다가 대구 부사라는 외직에 몸담아 오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으로 일컬어지는「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초간 권문해 선생의 학자다운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정자라 하면 예부터 권문세가에서 풍유체의 누각이 상례이나 이 곳만은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난 하나의 도장이었음을 그 원명이었던 초간정사가 일러주는 듯 한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인 초간정 안내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선조 15년(1582)에 초건된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초간 선생의 현손이 중창한 것으로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초간 권문해(1534~1591)는 명종 15년에 급제한 후 대구 부사 등 내․외직을 거쳐 좌부승지를 지냈으며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류인「대동운부군옥」20권을 저술하여 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겨놓았다고 적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이 정자는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을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배면은 절벽을 이룬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수기문에 따르면, 현존 건물은 초간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현손이 세웠다는데 당시는 화수간, 백승각을 함께 세웠으나 현판과 정자만이 남았다고 한다. 권문해는 예천인으로 호가 초간인데 일찍이 퇴계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일가를 이루어 명종 7년(1552) 진사가 되고 명종 15년(1560)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선조 24년(1591) 동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한 학자이다. 한겨울 소백산에서 몰아치는 찬바람은 초간정을 휘감아 흐르는 시냇물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널따란 바위 위에 세워진 지금의 초간정은 건물 곳곳의 재목들이 빛바랜 듯 보이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중후한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초간정 주춧돌 구실을 하고 있는 널따란 바위에는 언제 누구의 손으로 음각되었는지 아직도「초간정」이란 힘찬 세 글자가 오랜 세월 풍상에도 확연히 드러나 있다. 초간정 용마루에는 원명인「초간정사」와「초간정」이란 글이 나란히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한겨울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이 지금은 뜸하지만 봄소식이 전해지면서 얼어붙은 시냇물이 녹아내리고 이 정자를 휘감아 도는 시냇물도 물보라를 일으키며 힘차게 흐를 때 탐방객들은 선현들의 발자취를 찾아 마음을 모아 올 것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1-28 오전 9:51:28)
초간정(草澗 權文海의 醴泉 龍門面 草澗亭 : 公州牧使 辭任하고 49歲에 草堂지어 學問 硏磨, 民族意識 깔린 純粹 우리 歷史․文化書 執筆 邁進) [記事] : 초간정(草澗亭)은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가 공주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노년의 수양처로 49세 무렵에 완성한 초당이다. 초간의 종가에서 약 2㎞ 거리인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의 초간정은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草澗精舍)였다. 후대에 누군가가 초간정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으나, 이는 본래 이름의 본뜻을 거스른 것이라고 초간의 종손은 지적한다. 초간 당시에 대사간을 지낸 소고(嘯皐) 박승임(1517~1586)이 '초간정사'라 명명하여 직접 써 보냈고, 지금도 그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사(精舍)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이란 뜻으로 본래는 유가의 문자였으나, 불가에서 빌려가 쓰면서 불가 문자처럼 되어 버렸다는 주자(朱子)의 설이 있다. 주자는 무이구곡에 세운 자신의 서재를 무이정사로 명명한 바 있다. 초간의 14세 종손인 권영기(權榮基) 옹은 초간정은 초간정사로 이름부터 바로 지칭되어야 하며, 초간정은 사적지로서 본래 모습을 복원해 우리의 주체성을 되살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일궈야 함을 역설했다. 본래 모습이란 초간 종가에 있는 서고(書庫) 백승각(百承閣: 백세를 이어간다는 뜻으로 주자의 장서각명(藏書閣銘)에서 취해 온 것)과 백승각 옆 연못 등이 30년 전처럼 초간정 옆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복원된 초간정 옆의 건물도 그 구조가 바뀌었고, 위치 또한 본래 있던 암반자리에서 약 10보 왼쪽으로 물러나 앉아있다는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 : 초간 권문해는 본관이 예천이다. 종조부인 수헌(睡軒) 권오복, 조부 권오상 이래로 문학과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이 끊이지 않았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초간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했다. 17세 무렵 부친을 모시고 조부 묘소 곁에 있는 재실에서 글을 읽을 때 총명이 일반 사람보다 넘쳤으며, 역사서를 널리 공부하고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했다. 인물의 어질고 어리석음, 문장 수준의 높고 낮음에 대해 한 번만 보면 다 알아버렸다고 행장에 전하는 바이다. 이러한 총명으로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아우인 감정공(監正公)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하던 24세 무렵에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파고들어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당시 신징(信澄)이란 스님이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면 늘 기름을 갖다 부어주곤 했다. 훗날 초간이 그 스님에게 지어준 시에 '옛날 걸상이 뚫릴 정도로 앉아 학업에 열중하던 날, 스님께 밤마다 모자라는 등잔기름 대게 했던 때가 그립습니다(仍憶昔年穿榻日, 令渠夜夜點燈時)'라고 적고 있다. 23세 때는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선생에게 수학했고, 27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초간은 평소 아우 감정공에게 "동방의 풍속이 질박하고 비루하여 문헌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선비들이 중국 역사의 흥망에 대해선 마치 어제의 일같이 되뇌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선 상하 수천 년간의 역사를 아득히 모르기를 태고시절 일같이 여긴다. 이는 눈앞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것을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독서하는 여가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적을 널리 살펴 연구하며 우리의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부터 품었다. 또한 역사가들이 황당하고 비루한 말로 저술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저술을 남겨 야사를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평생 벼슬생활 틈틈이 엮은 저술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 20책이다. 민족의식이 짙게 깔린 순수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수록한 대백과사전이 완성된 것이다. [#초간정 내력] : 초간(草澗)이란 뜻은 종현손(從玄孫)인 선계(仙溪) 권용이 쓴 초간정사 사적과 박손경이 쓴 중수기문에 의하면,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저주서간( 州西澗)이란 시에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당시 그곳 문수(汶水) 주변을 실제 초간이라 불렀고, 초간정을 짓기 전부터도 자신의 호를 초간이라 했다. 사적과 기문에서 덧붙이기를 '송나라 주돈이가 창 앞에 자라는 풀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보며 천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한 뜻과 같다'고 했다. 이 초간정은 불후의 명저인 대동운부군옥 집필이 마무리된 사적지이고, 초간의 아들 죽소공(竹所公) 별이 부친을 이어 최초의 인명사전으로 알려진 해동잡록(海東雜錄) 14권 14책을 집필한 곳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했던 본래의 초가삼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인조 4년에 아들 죽소공이 그 터에 다시 세워 해동잡록을 집필한 초간정사가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됐다. 훗날 초간의 현손인 봉의공(鳳儀公)이 힘을 모아 그 유허지에 다시 중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종손 권영기 옹이 두 아우 부영․영일 씨와 함께 선대의 정신을 이어 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종택으로 옮겨진 백승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동운부군옥 목판과 초간일기가 보관돼 있고, 권영기 옹이 이를 수호하고 있다. 놀랍게도 목판이 한 장도 빠짐없이 보관되고 있는 데에는 종손의 말 못할 고충과 노력이 배어 있다. 초간정에는 초간정 주위를 100번 돌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과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한 선비가 99번을 돈 뒤 현기증으로 난간 밖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자 그 장모가 도끼를 들고 와 기둥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초간정 낭떠러지 쪽의 한 기둥에는 도끼로 찍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정도로 문혼이 서린 곳임을 말해준다.
[◇대동운부군옥-지리․국호․성씨 등 한자 韻별로 정리 완벽한 '대백과사전'] : 중국의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중국의 역사를 106운의 운서(韻書)를 바탕으로 나열한 '운부군옥'이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초간이 우리나라 역사와 저작물을 운부군옥 편찬 방식을 채택하여 편찬한 것이다. 역사와 전적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대백과사전으로 지리, 국호,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 선명(仙名), 목명(木名), 금수 등으로 분류해 한자의 운별로 정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낙동(洛東)은 동(東)자 운에 찾으면 나온다. 172종의 전적이 참고된 이 역작이 선비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여기에는 이미 없어진 문헌들도 기록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수이전이 그렇고,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 도원수(都元帥)에 대한 고증이 고려사에는 실전되고 없었으나 이 책에는 남아있는 것이 그 예다. 원고 초본을 3부로 만들었는데, 한 부는 학봉 김성일이 임금에게 아뢰어 나라에서 출판하려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뜻을 못 이루고 분실되었다. 그 후 한강 정구가 한 부를 빌려가 분실했다. 마지막 한 부는 초간의 아들 죽소공이 보관했고, 죽소공이 다시 한 부 정서해 전하다가 헌종 2년(1836)에 목판으로 완간되었다. 일제 때는 왜경이 총을 겨누며 탈취해 가려 했으나, 종가에서 죽음으로 맞서자 빼앗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죽소공의 해동잡록은 보관해 오던 초고를 40여 년 전 태학사에 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김봉규 記者 嶺南日報 2006-10-09 0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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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1,111
예천공설운동장(醴泉郡, 天惠의 環境·差別化된 인프라·行政 支援 '三位一體' : 韓國 陸上 메카로 자리매김, 每年 1萬餘名 轉地訓鍊, 크고 작은 大會 年中開催, 스포츠마케팅에 觀光 接木, 安定的인 내수 活性化로 地域經濟 孝子노릇 '톡톡') [記事] : 육상의 메카, 전지훈련장으로 전국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예천군이 요즘 굵직한 육상 대회를 연이어 개최하고 있어 예천읍 음식점과 시가지는 대회 임원 선수들로 북적이고 있다. 연인원 1만 여명이 전지훈련을 다녀가고 전국대회, 도 단위 대회 등 크고 작은 대회가 연중 이어지고 있다는 것, 예천군에서는 국내 유일의 육상 훈련시설(경사로 직선코스 300m)과 실내 전천후 육상보조 경기장, 최첨단 넓은 트레이닝 장, 한천 모래백사장(300m)훈련장, 100계단 훈련장, 인조구장,수영장, 2종 공인경기장, 임원들을 위한 기능실, 판독실, 휴게실, 등 각종 체육 시설 등이 잘되어 있다. 또 군은 육상 전용 돔구장 건립과 크로스 컨트리 훈련장, 마라톤 대회 구간 공인 인증 준비 등으로 타 시군과 차별화된 체육 시장을 향한 정책을 펴고 있다. 2014년 4월 18일 오후 이현준 군수와 정한 회장이 심판진들과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이날 정한 회장은 전국 규모의 마라톤대회를 예천군에서 개최하기로 약속했다. 예천군은 그동안 각 지자체 마다 내 세우는 관광, 축제 마케팅을 스포츠에 응용해 과감히 체육시설 확충과 공인 경기장 건립에 투자하면서 지역에 새로운 부가사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또 1월부터 12월 달까지 예천군의 육상 대회와 전지훈련 참가 신청, 일정 현황을 보면 대한 체육회 일정만큼 빼곡하게 잡혀져 있다. 중앙, 실업, 대학, 도 육상 가맹단체와의 업무협약과 회장단들과의 군 체육회 관계자들과 인정 넘치는 평소 교류로 각종 육상대회가 늘어나고 있다. 스포츠 시장에 뛰어 든 예천군은 안정적인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지역경제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유일한 지자체가 되고 있다. 당연 숙박업소와 식당은 사전 예약은 필수고 커피 숍, 호프 집, 치킨 집 등상 가들도 덩달아 매출이 늘어나고 부족한 숙박시설로 인해 인근 안동시 영주시 도 상당한 수혜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예천군(군수 이현준)이 지난 2012년 전천후 육상실내훈련장이 문을 연 이래 육상 전지훈련 선수단이 급증하고 지난 해 전국육상대회 유치에 탄력을 받으면서 육상의 메카로 급부상하며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각종대회 및 전지훈련지 유치에 숨은 일꾼들' : 이현준 군수는 각종 대회와 전지 훈련장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찾고 있다. 예천군을 찾은 전지훈련 대회 관계자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소홀함이 없는지 확인하고 현장에서 바로 조치하는 등 전지훈련과 대회유치에 임원들을 직접 만나 유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18일부터 한국중고육상경기연맹(회장 정한)이 주최한 제43회 춘계 전국 중 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겸 제2회 전국 초등학교 육상 경기대회를 찾은 이현준 군수는 정한 회장과의 만남에서 전국 규모 마라톤 대회 유치의사를 보여 현장에서 성과를 거뒀다. 이현준 군수가 "예천군에 중·장거리 대회가 하나 있으면 전지훈련과 대회를 겸 할 수 있어 지역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 이라고 건의하자 정 한 회장이 즉석해서 "과천 마라톤 대회가 사라져 육상의 메카인 예천군에서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8일 열린 제43회 춘계 전국 초·중·고 육상대회에서 선수들이 힘찬 출발을 하고 있다. 정한 회장이 한국 중고 육상경기연맹 회장에 취임하면서 전국 육상 초등학교 대회를 지난해 처음으로 예천군에서 개최 하면서 대회 기간 동안 이 현준 군수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회와 전지훈련 유치를 위한 치열한 지자체의 전쟁 속에서도 단연 유치 활동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예천군의 체육 관계자들의 협력과 의지다. 김주석 체육회 상임부회장, 최인해 교사, 이규삼 사업소장, 도영기 담당, 황주섭 주사보, 최원대 사무국장, 예천군 육상경기연맹 임원 등이 유치단처럼 하나가 돼 각종 대회와 전지훈련유치를 위해 365일 비상체제로 근무하고 있다. 도영기 계장과 직원들은 전국 육상 책임자들을 상시 예천군을 방문하도록 평소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들과의 인연을 맺고 있다. 또 각종 대회와 전지훈련기간 동안에는 감독들과 선수들의 불편함이 없는지 상시 체크하고 24시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수 임원들을 위해 퇴근시간도 잊은 채 대회가 끝 날 때 까지 경기장을 누비고 다니고 있다. 임원, 선수들의 넋두리와 하소연을 들어주고 늦은 밤 잦은 사고 소식에도 한 달음에 달려 나가 사후 처리까지 도맡아서 하고 있다. 지난 18일 밤 11시경 모 학교 감독이 뇌출혈로 쓰러져 119로 안동병원으로 후송돼 밤새도록 도영기 계장과 최인해 교사는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다음날 가족이 도착할 때까지 자리를 지킨 후 서울로 후송되는 과정을 지켜본 후 다시 본 경기장으로 두 사람은 향했다. 이를 지켜본 한국중·고육상경기연맹 임원들은 "요즘도 저런 공무원이 있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천군을 매년 동절기 훈련 장소로 지정하는 국가대표 상비군 이종윤 감독과 김동주·정선군 감독, 전복수 시흥시 감독들은 "육상 훈련 인프라가 예천만큼 잘 된 곳이 없다"며 "많은 분들이 훈련기간 동안 가족처럼 대해 주고 있어 매년 다시 찾고 있다"고 전했다. 정한 한국중고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지자체 단체장의 관심과 노력이 없었다면 예천군이 육상 메카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며 "타 시도와 차별화된 시설과 선수, 임원들을 위한 각종 인프라 구축이 예천군이 제일 잘 되어 있는 것 같다"라며 "이 군수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추진력이 육상 감독들의 마음을 예천군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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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