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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29) : 예천8경 중 용문사(1)(附 *예천교육지원청, 21일 교사 2명과 학생 11명 장관 표창...축하합니다/예천청결고추영농조합법인, 2일 식재료 우수관리업체로 지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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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龍門寺) [記事] : 예천읍 백전리 109번지 출신인 백산(栢山) 장병창(張炳昌, 1942- , 中等 校長)의 용문면 내지리 소재의 용문사에 대한 기사로, 서울 재경송대동문회(在京松臺同門會)에서 1979년에 출판한 <대학송대(大學松臺)>에 수록되어 있고, 예천에서 장병창이 2002년에 출판한 <백산지(栢山誌)> 1권 120-128쪽(9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용문사(龍門寺 : 1979.4.1 大昌高等學校 敎師 張炳昌 作成) [寄稿] : 용문면 소재지(龍門面所在地)에서 서북으로 약 8km 지점에 소백산맥의 준령(峻嶺)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멀리 국사봉(國師峰)을 바라보면서 전면(前面)에 계곡을 중심으로 청룡등(靑龍嶝)과 백호등(白虎嶝)의 울창한 큰 노목(老木)으로 둘러싸여 있는 용문면 내지동(龍門面內地洞) 319번지에 용문사(龍門寺)가 소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소백산(小白山)의 영기(靈氣)를 타고나 10훈요(訓要) 안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도참설(圖讖說)에 의해 절을 함부로 세우지 말라는 내용에도 부합되었던 곳이었으므로 고려 때 역대 왕 중에 이곳에 관심을 쓴 분이 많았다. 또한 조선 때 정감록(鄭鑑綠)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 예천 용문 금당실(醴泉龍門金谷洞)이 들어있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용문(龍門)'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세 군데 있으니, 경기도 양평군(京畿道楊平郡), 경상남도 밀양군(慶尙南道密陽郡)과 이곳을 헤아리는데, 이것을 북쪽으로부터 용(龍) 머리, 용 허리, 용꼬리로 사문(寺門)에서 보아 예천 용문이 용의 허리에 해당하니, 허리는 용의 가장 힘쓰는 부분이므로 이곳에 절을 세움으로서 불법(佛法)을 널리 펴 흥성(興盛)케 할 수 있다고 하여 이룩하였다고 한다. 물론 다른 용문에도 사찰(寺刹)이 건립되어 있다./ 용문사는 870년(統一新羅 景文王 10)에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오막살이 한 칸을 창건하여 창기사(昌期寺)라 한 것이 그 효시(嚆矢)이다. 좌우 산수(左右山水)와 초목이 울창하여 경내의 풍치(風致)가 아름답고, 물 맑고 공기 좋다고 하여 이름이 났었다. 노수(老樹)가 된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으며 개울물은 그 사이를 끼어 흐르는바 손아귀로 퍼서 마실만 하다. 국내 사찰 중 어느 곳 못지않게 경치 좋은 곳으로 대가람(大伽藍)이라고 <동국여지승람 예천군조(東國輿地勝覽醴泉郡條)>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는 창기사(昌期寺)에 93개의 암자(庵子)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안동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싸워 승리하고서 여러 신하를 데리고 귀경(歸京) 도중 날이 저물어 이곳에 머물었는데, 태조 왕건(王建)은 앞에 보이는 아담한 절을 가리키며,/ "오늘은 저 절에서 묵고 가겠다."/ 라고 하였다. 이 때 시종과 비복(婢僕)들이 부랴부랴 노숙(露宿)할 행장을 마련하는 등 절로 달려가는 등 법석을 떠는데, 왕건이 묻기를,/ "저 절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도대체 절의 이름은 무엇이뇨?"/ 라고 물었으나, 좌우 수행 신하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주지인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반길 사이, 난 데 없는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풍우(風雨)가 일어나 모두 놀랐다. 그 때 사문(寺門) 밖에 있는 '수림지' 라는 연못에서 구름 속처럼 꿈틀대는 무엇이 있었다. 이윽고 비늘이 손바닥 같은 푸른 청룡(靑龍) 두 마리가 서기를 뿜으며 나타나 태조 면전(面前)을 두 바퀴 돌면서 춤을 추며 환영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말에서 내려 자기를 환영하는 한 쌍의 청룡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환대(歡待)에 답하였다. 그러자 한 쌍의 청룡은 삽시간에 운무(雲霧)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섰던 낡은 사문(寺門)이 하이얀 잿더미로 화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이르기를,/ "이는 짐(朕)의 삼한(三韓) 통일을 경축하는 하늘의 계시(啓示)이니라. 오늘같이 기쁜 날을 맞이하여 이 절 이름(昌期寺)을 '용문사(龍門寺)'로 개칭(改稱)하라."/ 라고 하고, 매년 공양미(供養米) 150석(石)을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한 전설에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두운 선사가 이 산에 들어갈 때 동구(洞口)의 바위에서 용이 춤을 추며 환영하였다 하여 창건 당시부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즉 지금도 용문면 두인동(龍門面杜仁洞) 뒷산 국사봉(國事峰) 산골 한 쪽에 '조가집골'이 있는데, 이곳에서 두운 선사가 조(粟) 천 석을 경작하였다 하여 그 골짜기의 이름이 생겼고, 두운 선사가 이 근처에 경치가 좋으니, 절을 지으면 후에 성할 것이라 하여 용문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두운 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다래 덩굴을 헤치고 입산하니,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서 놀던 용이 두운 선사를 보고 환영하여 하늘에 오르지를 않고 지상을 내려가다가 현 하금곡동(下金谷洞) 앞에 이르러 승천(昇天)하였다 하여 용이 사라진 그 지명을 '용두(龍頭)'라고 하였다 한다./ 또 한 전설에는 두운 선사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용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이 아늑하고 좋아서 절을 지으려 하니, 용이 반대하므로, 내기로써 겨루었다고 한다. 즉 용이 비를 내리니, 두운 선사는 그 비를 하늘로 올려버리고, 또 용이 햇빛을 두운 선사 있는 곳으로 모으면, 선사는 그 빛을 도리어 용이 있는 연못으로 이끌어 들여 물을 끓게 하니, 용은 할 수 없이 용문면 하금곡동 용바위까지 내려가서 승천하였다고 한다./ 936년(太祖 19)에 왕명으로 태조가 두운 선사를 위하여 용문사를 중수(重修)한 사실은 있으나, <동국여지승람 예천군조(東國輿地勝覽醴泉郡條)>에서 고려 태조가 용문사를 창건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970년(光宗 21) 조응 선사(祖膺禪師)가 자기 종제 자원 대사(從弟資源大師)를 주지로 삼고 전 재산을 기부했다./ 1165년(毅宗 19) 왕명에 의해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1166년에 보광명전(普光明殿), 해운루(海雲樓), 1167년에 명부전(冥府殿) 등을 창건하면서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였다./ 1171년(明宗 1)에 태자(太子)의 태(胎)를 절문 밖에 묻고 창기사(昌期寺)라 개칭함과 동시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설치하여 복전(福錢)으로 승려들의 생활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한다. 당시 국내외가 크게 어지러워 남방에 도적이 심하므로 3만 명의 승려를 모아 7일 간 법회(法會)를 열었으며. 1173년(明宗 3)에는 경술칙령(庚戌勅令)을 통하여 당시 고승(高僧) 자엄 대사가 대장전(大藏殿) 3칸을 짓기 시작하여 1177년(明宗 7)에 완성했다. 1179년(明宗 9)에 선종 9문학도(禪宗九門學徒) 500명을 모아 상호 담선회(談禪會)를 열고,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고 있는 노돈 선사(老惇禪師)를 모셔다가 전등록(傳燈錄), 능엄경(楞嚴經), 점송(점頌) 등을 강의한 바 있다./ 1185년(明宗 15)에는 경내에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를 세웠다. 비신(碑身)은 6자 6치, 폭이 2자 9치로 구부(龜趺) 위에 놓여 있다. 이수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이 중수비의 글은 산기상시 이지명(散騎常侍李知命)이 지었고, 글자는 보제사의 연의 선사(淵懿禪師)가 썼다고 한다./ 또한 고려 중엽에 9층탑을 만들어 불사(佛事)를 다 마칠 때에 오색구름이 탑을 둘러싸고 5-6일 간 없어지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1467년(世祖 13)에 대장전(大藏殿) 등을 보수했고, 1478년(成宗 9)에 왕비(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奉安)하고 '성불산 용문사(成佛山龍門寺)'로 고쳤고, 1529년(中宗 24)에 혜공 대사(慧空大師)가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중수하였고, 1534년(中宗 29)에 대장전(大藏殿)을 중수하였다./ 그 후 역대의 억불정책(抑佛政策)에도 먼 산골짜기에 고립되어 남아 있다가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남부의 절들은 거의 병화(兵禍)를 입어 불타버렸음에도 광대한 산림과 토지를 보유하여 자력(自力)으로 절을 유지하고 수많은 승려를 보호하고 불교 예술을 보존하였다./ 1599년(宣祖 31)에 대장전(大藏殿) 등을 다시 중수하였고, 1641년(仁祖 19)에 계인 화주(戒仁化主)가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중수하였고, 1665년(顯宗 6)과 1767년(英祖 43)에 대장전(大藏殿) 등을 중수하였다./ 1783년(정조 7)에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라 개칭하였다./ 1865년(高宗 2) 8월에 불타버린 것을 다시 역파(역坡)가 중건한 후 건물 19동(棟)에 309칸이나 보유하게 되었다./ 1880년 경 가을 어느 날 뒷산에 산불이 일어나 80여 명의 스님들이 모두 산불을 끄고 내려와서 승방(僧房)에서 짚신을 삼고 있었다. 이 때 산을 보는 산감이 산불 뒷처리를 하느라고 한 시간 뒤에 산에서 내려와 승방으로 찾아가니, 승방 문 앞에 큰 호랑이가 승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때 산감수는 산에 갈 때에 신호하기 위한 나팔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나팔로 호랑이 뒤로 가서 "빽" 하고 불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놀란 결에 승방으로 뛰어 들어가게 되니, 방에 있던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놀라 불도 꺼진 방에서 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한 스님이 여러 사람에게 밟혀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 스님을 화장(火葬)하였더니, 이 스님에게서 사리(舍利)라는 구슬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구슬을 용문사 입구에 있는 벼랑의 바위 위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 사리(舍利)를 뫼셨다고 한다. 그 후 사리는 없어지고 지금도 벼랑 암벽에 네모로 뚫어놓은 구멍이 있다고 한다./ 1893년(高宗 30) 9월에는 비구 법현(比丘法賢)이 화장찰해 탱화(華藏刹海幀畵)를 그려 강당 안에 안치시켰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때는 의병(義兵)의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1962년 9월 20일에 지정문화재 보수 계획에 의하여 중앙에서 대장전(大藏殿)을 직접 보수하였다. 1970년 1월 용문면 내지동과 자매 결연을 맺었고, 1972년 4월 장마로 약간 손실을 입었고, 1972년 12월에 400만 원의 보조로 보수 준공했고, 1973년 1월에 다시 보수 공사를 하였다./ 이 용문사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이(奇異)한 전설(三奇 傳說)이 있다./ 첫째, 고려 태조(太祖)가 왕가(王駕)할 때 동구(洞口)의 양 암상(兩巖上)에서 청룡(靑龍)이 출영(出迎)한 것이고,/ 둘째, 고려 중엽에 옛 건물을 중수하려고 파옥(破屋)할 때에 상량(上樑)에서 16냥중(兩重)의 묘한 은병(銀甁)이 한 개 나온 것이고,/ 셋째, 고려 중엽에 9층탑을 만든 후 4층에서 5층까지 5색 구름이 5-6일 간 서리었다는 것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건물과 유물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順)/ 1) 극락암(極樂庵) : 용문사 서쪽 끝에 있는 건물로, 지금은 퇴락(頹落)하여 있다. 원래 전내(殿內)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모셔지고, 뒷면에 부처의 탱화도 있었는데, 특히 관음보살상은 아주 기묘한 불상이다. 현판(懸板) 3자는 1797년(正祖 21) 7월 자헌대부 행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 윤사국(資憲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尹師國)이 썼다. 중수기(重修記)는 1801년(純祖 1) 7월에 성규(聖奎)가 썼다. 극락암(極樂庵) 바로 뒤에는 원통전(圓通殿)이 있는데, 이는 1954년(佛紀 2981) 중춘(仲春)에 박주영(朴周榮)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각수(刻手)하였다./ 2) 남무아미타불 음각(南無阿彌陀佛陰刻) : 민경지에서 용문사로 올라가다가 보면, 넙적바우 뽀족바우(立巖)를 지나면 바위 위에 <남무아미타불 김철하(南無阿彌陀佛金徹霞)>라고 음각된 것을 볼 수 있다. 용문사 주지로 있던 김철하(金徹霞)가 1920년경에 새겼다. 김철하의 아들인 김법성(金法性)은 문경군 왕릉의 '개운사' 주지이다./ 3) 단하각(丹霞閣) : 산신각(山神閣)이다./ 4) 대장전(大藏殿) : 용문사 법당(法堂)인 보광명전(普光明殿) 동편에 위치한 목조 건물(木造建物)로, 과거 국보(國寶) 제243호로 지정되어 오던 중, 1963년에 보물(寶物) 제145호로 새로 지정되었다. 이 대장전을 처음 세운 것은 1177년(明宗 7)이고, 그 후 1467년(世祖 13), 1534년(中宗 29), 1599년(宣祖 31), 1665년(憲宗 6)에 중수(重修)를 하였다. 창건에서부터 여러 번의 중수로써 규모가 많이 바뀌었고, 오랜 세월 동안의 비바람을 겪은 고로 댓마루와 들보가 기울고 석가래와 모양이 썩고 어긋나서 이 절 안에 살던 승려들과 신도들이 임시 수리하여 왔던 것이다. 1767년(英祖 43) 봄에 이 절에 있는 여러 스님들이 이 대장전을 새로 중수하는 데 뜻을 모아서 많은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얻어 몇 달 동안 모든 힘을 기울여 중수하는 데 힘썼던바 짧은 시간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1962년 9월 20일 자 지정문화재 보수 계획에 의해 중앙에서 직접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으나, 당시 단청 개도(丹靑改塗) 공사는 제외되었고, 또 10년 세월이 흘러 방 밑 토벽이 허물어지고 전각(殿閣) 앞면과 좌우(左右) 바닥들이 꺼져 있고, 전각(殿閣) 내외 단청도 많이 퇴색(褪色)되어 외관상(外觀上)으로 볼품없게 되었는데, 1972년 4월 장마로 뒷면 부연 40개와 기와 300개가 무너져 파손되었던 것을 1972년 12월부터 400만 원의 국고 보조(國庫補助)로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 김동현(金東賢) 씨의 공사 지도로 1973년 1월 보수 완료하였다./ 1972년 12월 2일 보수하기 위하여 대장전의 지붕을 해체하던 중에 1767년(英祖 43)의 중수 상량문(重修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現在 文化財管理局에 所藏 中) 그 상량문(上樑文)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있다. 즉,/ 東西南北上下樑 五色玲瓏一時揚/ 大明天地名居地 梵宇귀然接天陽/ 대장전 내에는 윤장대(輪藏臺) 한 쌍이 있고, 본존불(本尊佛) 뒤에 보이는 양각탱불(陽刻幀佛)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솜씨로 조각되어 보물(寶物)로 지정되었으며, 그 자료는 대추나무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67년(英祖 43)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2칸, 단층(單層) 맞배지붕으로 처마끝 기둥 사이에는 공간보 2개씩을 배치하였고, 건축 내부에 나타난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으나 건물 외부는 고려의 건축 양식이다./ 5) 동향각(東香閣) : 용문사 경내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사찰로, 사택(舍宅)으로 사용되고 있다./ 6) 두운암(杜雲庵) : 용문사 경내 동쪽 끝에 있는 건물로, 승려들이 거처하고 있다. 지금은 퇴락(頹落)하였으나, 두운 선사(杜雲禪師)의 명에 따라 지은 암자라고 한다./ 7) 명부전(暝府殿, 一名 十王殿) : 1167년(毅宗 21)에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지금 명부전(暝府殿) 자리에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나타나서, "이곳에 명부전을 세워 모든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게 하면, 이 절이 앞으로 번창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고 즉시 명부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81년(肅宗 7)에 희인 대사(希仁大師)가 재건(再建)하였다./ 고려식(맞배집) 건물로, 경내의 보물(寶物) 제145호(大藏殿)와 같은 건축 양식이다. 높이 약 5m, 폭 약 10m, 측면 4m, 축대와 합해서 지상으로부터 총 높이 약 8m이다./ 8) 목각탱화(木刻幀畵) : 대장전 내 뒷면에 모신 나무로 양각(陽刻)한 탱불로, 가로 280cm, 세로 265cm에 달하는 정교하게 새긴 이 탱화는 '강희 23년(康熙二十三年'(1684)이라는 명기(銘記)가 있어, 이미 보물(寶物)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북 남원군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화(南原郡實相寺藥水庵木刻幀畵, 乾隆47年, 1782)보다도 연대가 꼭 1세기 앞선 것으로, 현존 최고(最古)의 것임이 밝혀져 학계(學界)에 관심을 모으고 있을 뿐 아니라 크기에 있어서도 두 배가 넘는 우수한 조각품이다. 이는 조각 수법이 미려(美麗)할 뿐 아니라 아미타(阿彌陀)를 중심한 주변 14명의 불(佛), 보살(菩薩), 군속(群屬)을 조각한 것이 일품(逸品)이며 색깔은 금색(金色)으로 되어 있다./ 9) 보광명전(普光明澱) : 용문사 중앙에 정남향(正南向)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주법당(主法堂)이다. 1166년(毅宗 20)에 칙명으로 창건되었고, 웅장한 조각미(彫刻美)를 나타내고 있다. 이 법당 안에는 석가존불(釋迦尊佛, 毘盧遮那佛)을 중앙으로 우측(右側)에 노자나불(盧遮那佛), 좌측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좌고(坐高)가 약 4척, 슬폭(膝幅) 3척(尺)으로써 신라 시대의 불상이라고 하나 감정이 아쉽다./ 창건 당시에는 원당(願堂)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529년(中宗 24)에 혜공 대사(慧空大師)가 내(內) 7포(包), 외(外) 9포식으로 변경하여 중수하였고, 1641년(仁祖19)에 계인 화주(戒仁化主)가 중수하였고, 1649년(仁祖 27)에 광인 화주(廣仁化主)가 중건, 1761년(英祖 37)에 주지 각철(覺哲)이 중수, 1839년(憲宗 5) 7월에 중수하여 은허사문 윤열(隱虛沙門尹悅)이 기(記)하고, 석초거사 권노경(石焦居士權老慶)이 서(書)하였고, 1884년(高宗 21)에 운구 화주(雲句化主)가 번미(번尾)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나 퇴락일로(頹落一路)에 있다. 1967년 11월에 50만 원을 들여 보수했다. 길이 24척(尺), 폭 18척, 지상에서 옥상까지의 높이가 40척이고,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건물 전체가 웅장하다./ 10) 윤장대(輪藏臺) : 대장전(大藏殿) 내에 2좌(坐)가 있는데, 전국 사찰 중 이 절만이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이 윤장대를 돌린다면 누구든지 소원 성취할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이 있으니 아들 없는 사람, 장가 시집 못간 사람, 기타 어떤 소원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이 윤장대를 찾아와서 땀을 빼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원래 윤장대는 대장경(大藏經)을 넣어두고 손잡이로 돌려가며 불경을 외던 것으로 가장 사치스러운 높이 4.2m의 원주(圓柱)를 주축(主軸)으로 하여 팔각정(八角亭) 모양의 대장경 보관대(保管臺)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기록과 파손물 만이 산견(散見)되었을 뿐 완벽하고 호사스러운 한 쌍을 얻기는 용문사의 것이 처음이며, 유일의 것이다. 또한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 윤장대를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긴다. 조각미(彫刻美)의 섬세 기묘한 수법이 고대 미술의 정화(精華)라 하겠고, 장경(藏經)을 모시고 도는 것은 국내의 지운을 고르기 위함이라고 하고, 회전하는 구조물의 장치는 현대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의 연구 자료로 길이 보존의 가치가 있으며, 국내 900여 사찰 중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11) 응진전(應眞殿, 羅漢殿) : 용문사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내(殿內)에는 16존상(尊像)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조각미(彫刻美)를 지닌 전당(殿堂)이다. 1649년(仁祖 27)에 광인 화주(廣仁化主)가 창건하였고, 1884년(高宗 21)에 운구 화주(雲句化主)가 중수, 1933년에 주지 최성환(崔成煥)이 중수, 1935년에 주지 이하(李夏)가 수선하였다./ 12) 자운루(慈雲樓) : 1173년(明宗 3)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창건한 목조(木造) 건물로, 고려식 기와지붕 2층이다. 높이 약 10m, 전면 폭(前面幅) 약 15m(單層 높이 約 5m)이다. 매우 오래된 건물이다./ 13) 장승 : 용문사 입구인 동구(洞口)에는 1909년(隆熙 3) 윤 2월에 세운 <호법대장군(護法大將軍)>, <삼무대장군(三无大將軍)>과 1936년 음력 3월에 세운 <상원주장군(相元周將軍)>이 있다./ 14) 중수비(重修碑) : 이의 원문 이름은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로, 1185년(明宗 15)에 새겼다. 높이는 6자 6치(約 200cm), 폭은 2자 9치(約 93cm)로, 구부(龜趺) 위에 놓여 있었다. 글자는 모두 1,300여 자의 전문(全文)이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도 나와 있는 등 일제 중기까지도 용문사에 현존해 오던 것을 해방 이후 어디론지 사라져 사학계(史學界)에서 궁금해 하던 중 용문사대장전(龍門寺大藏殿) 마룻바닥 밑에서 두 동강이난 채로 1972년 1월 30일 단국대학교 조사단(檀國大學校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었다. 중수비의 글은 이지명(李知命)이 지었고, 글자는 보제사의 연의 선사(淵懿禪師)가 썼다./ 15) 진영당(眞影堂) : 내부의 영정(影幀)들이 특색이다. 창건자인 두운 선사(杜雲禪師)의 영정을 비롯하여 고승(高僧)들의 영정 50여 점이 베 바탕(布地)에 채색화(彩色畵)로 그려져 있어 불교 미술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이며 초상화 기법의 사적 자료(史的資料)로도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16) 해운루(海雲樓) : 1166년(毅宗 20)에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창건한 고려식 목조 건물로, 여기에는 종(鍾), 목어(木魚), 운판(雲板), 북 등 사중 4물(寺中四物)을 비치(備置)하고 있어 매일 삼시(三時)로 불전(佛前)에 예식 절차(禮式節次)를 거행하고 있다. 본시(本是)는 신도들의 예식 집회 장소로 써왔으나 지금은 사용치 못하고 있다. 정면(正面)에는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 라는 현판(懸板)이 걸려있고, 실내(室內)의 벽에는 여러 개의 기문(記文)이 게시되어 있다./ 17) 화장찰해(華藏刹海, 嶺南大講院) : 19세기에 세운 건물로, 예전에 승려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불경을 공부하던 곳이라 한다. 약 100명이 기거할 수 있는 큰방이다./ 18) 화장찰해 탱화(華藏刹海幀畵) : 화장찰해 북쪽 내벽에 있는 탱화로, 이는 1893년 9월 30일에 비구 법현(比丘法賢)이 제작한 것인데, 그림의 내용은 천상천하세계만방(天上天下世界萬邦)의 자연 전체를 표현한 것인데, 최하층은 물(水), 중층(中層)은 연화(蓮花), 상층(上層)은 지구를 뜻하고 있다. 목액자(木額子)의 베 바탕(布地)에 도색되어 있고, 높이 9척, 넓이 10척이며, 우리나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약간 검게 퇴색되었으나 파손됨이 없이 봉안되고 있다. 이 탱화 앞에 아침저녁으로 불공(佛供)을 드리면 아들딸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으며, 만사를 소원대로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지금도 행복을 기원하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다./ 19) 회전문(回轉門) : 1166년(毅宗 20)에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창건하였고, 1688년(肅宗 14)에 처원 화주(處源化主)가 재건(再建)할 때 원선 대사(圓善大師)가 천왕상(天王像)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1884년(高宗 21)에 운구 화주(雲句化主)가 중수하였고, 1956년 가을에 주지 김성배(金聖培)가 중수하였다. 1965년 여름에 주지 최병규(崔秉奎)가 사천왕(四天王)을 병사 봉행(倂事奉行)하였다.(<大學松臺 創刊號>의 寄稿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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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육지원청, 21일 교사 2명과 학생 11명 장관 표창...축하합니다.
예천교육지원청(醴泉 科學 꿈잔치 盛況) [記事] : 예천교육지원청(김기한 교육장)은 2014년 4월 21일 예천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관내 각급 초*중학교장 등 교육 가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빅뱅! 2014 예천 과학 꿈 잔치’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날 함께 진행된 ‘제 47회 과학의 날’ 기념식에서는 상리초 박상열 교사 외 1명이 교육공로가 인정되어 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예천초 이정식 교사 외 1명이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예천초 권해승 학생 외 10명의 학생들이 장관 표창을 받는 등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빅뱅! 2014 예천 과학 꿈 잔치’에는 관내 초*중등 18개교와 곤충연구소, 경도대학교 유아교육과 창작미술동아리, 예천글로컬인재교육원이 함께 동참해 20여개의 다양한 과학 체험 프로그램 부스를 운영하여 학생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특히 균형잡기의 원리를 이용하여 인형을 만들고 재미있는 놀이를 통해서 물체의 무게 중심과 안전성 관계를 이해하는 감천초의 ‘외다리 인형들의 무도회’라는 체험 프로그램은 학생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았다. ‘빅뱅! 2014 예천 과학 꿈 잔치’는 대한민국 미래 창조의 주역으로 성장할 우리 학생들의 과학적 상상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의 찬사가 이어졌다.〈수상자〉 ◆우수과학어린이 표창(미래창조과학부장관) △권해승(예천초6) △권오철(예천동부초6) △박경호(예천남부초6) △양은진(용문초6) △차유진(상리초6) △권나래(은풍초6) △임승배(감천초6) △김태연(유천초6) △박영민(용궁초6) △권규태(지보초6) △최오성(풍양초6) ◆유공 교원 표창 △박상열(상리초 교사·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권유경(예천중 교사·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이정식(예천초 교사·경상북도교육감 표창) △윤선미(예천여중 교사·경상북도교육감 표창)(醴泉新聞 2014년 04월 22일 (화) 08: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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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청결고추영농조합법인, 2일 식재료 우수관리업체로 지정...축하합니다.
예천청결고추영농조합법인(醴泉淸潔고추 營農組合法人, 2014年 ‘食材料 優秀管理業體’ 指定 : '差別化된 製品 生産을 爲한 品質管理로 技術農業을 具顯한다') [記事] : 예천청결고추영농조합법인(대표 박규형, 예천군 용문면 소재)이 국립 농산물품질관리원이 선정한 『2014 식재료 우수관리 업체』로 지정되어 2014년 5월 2일 오후 2시 현지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경북지원 박광훈 과장, 예천농협 이달호 조합장을 비롯한 직원, 관계자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식재료 우수관리 업체지정 사업은 최근 단체급식 식재료에서 이물질 검출 등 식품 안전사고 문제가 빈번히 발생함에 따라 식재료의 품질과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에 따라 품질관리에 필요한 기준을 갖춘 업체 중 서류ㆍ현장평가 등 예비 심사를 실시한 후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식자재 우수관리업체 지정심의위원회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이번에 최종 지정을 받게 되었다. 지난 2003년에 설립한 예천청결고추영농조합법인은 ‘차별화된 제품 생산을 위한 품질관리로 기술농업을 구현한다.’는 경영방침 아래 2009년 HACCP적용업소 지정을 시작으로 전통식품 품질인증, 경북 우수농산물 지정, 유기가공식품 인증 등을 받았고 ‘고춧가루 해체장치’와 ‘고춧가루 철분제거기’에 대한 특허등록을 완료해 완벽한 품질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2009년 경북 관광기념품 가공식품분야, 2012년 지식경제부장관상, 농식품 파워브랜드대전 수상과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사단법인 한국브랜드경영협회 및 한국경제신문에서 주관한 2013 고객감동브랜드지수 1위에 선정되는 영광도 얻었다. 또한, 예천청결 건고추와 고춧가루는 현재 학교급식 유통전문회사인 농업회사법인 (주)정든사람들을 통해 전국의 학교로 납품되고 있으며 그 동안 단 한건의 식품안전사고도 없었던 우수한 상품이며 2012년부터는 NS홈쇼핑, 전국의 이랜드 매장과 코레일 매장, 중소 김치가공 전문업체에도 공급되고 있어 지역 고추재배농가의 소득증대와 고용창출로 이어져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박규형 대표는 “앞으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잔류농약분석과 업체 종사자에 대한 교육 및 홍보지원 뿐만 아니라 원산지 표시, 인증품 관리, 품질관리 등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받아 일반 업체와 차별화된 안전한 고품질 식재료 유통업체로 거듭나 소비자의 신뢰를 구축해 나가며 지역 농산물 소비촉진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醴泉뉴스 2014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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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1,114
예천축산업협동조합(韓國勞總 이천여주지역지부 代表者 醴泉畜協 訪問) [記事] : 예천축협(조합장 김장식)이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예천한우의 판로 개척 및 유통망 확보를 위해 전 임직원이 총력을 경주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14년 4월 21일 한국노총 이천여주지역지부 대표자 28명을 초청해 조합 방문 및 예천군문화탐방 행사를 가졌다. 이날 방문행사에는 이천여주지역지부 정상영 의장, 경기지역본부 허원 의장을 비롯한 21개 노조위원장들이 참석했으며, 김장식 조합장은 임직원들과 함께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했다. 먼저 예천축협을 방문하고 하나로마트 유통센터, 한우프라자를 견학했으며, 예천의 자랑인 회룡포, 삼강주막 등을 돌아보고 양궁체험 행사를 가졌다. 김장식 조합장은 “안전하고 위생적인 먹거리 생산을 위해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며 “고급육 생산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예천한우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고 유통망 구축을 통해 지역 한우 농가의 소득증대에 앞장서 나가겠다.”고 밝혔다. 예천축협은 지난 2012년 9월 부천의 (주)신한일전기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반기별로 1회 이상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축산물 이동 판매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10월,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황완성 의장 및 경기도 부천지역 기업 노조위원장 20여명을 비롯한 부천시의회 강동구 의원이 방문해 예천축산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으며, 이를 계기로 지속적인 교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한국노총 이천여주지역지부 대표자 초청 행사를 통해 부천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으로 예천한우의 판매망을 확장하고 소비 촉진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펼칠 방침이다.(醴泉新聞 2014년 05월 02일 (금) 09: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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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